금오신화 펭귄클래식 14
김시습 지음, 김경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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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움의 이상

-김시습 금오신화’-

 

 

 

귀신과 산다

 

'금오신화'의 이야기들은 낯익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기이한 분위기가 풍긴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듣고 전래동화로 읽은 이야기지만 우리와는 분명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귀신과 인간이 서로 혼례를 올릴 수 있다거나 염마왕이나 용왕의 초대를 받아 이세계로 구경을 간다는 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자칫하면 터무니없는 판타지로 읽힐 수도 있다. 과학과 논리가 모든 사실의 판단 기준이 되는 현대에는 더욱 그렇다. 또한 이 설화에서 나오는 그 누구도 귀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신화'들에서는 사실 삶과 죽음의 세계를 긋는 선이 불분명하다. 분명 이승과 저승을 갈라 놓고 있으나 인간이 마음을 먹거나 어떤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그 사이를 넘나들 수 있게 되어 있다. 가령 이생규장전에서 이생의 아내 최씨가 죽은 후에도 이생을 위해 그의 곁에 머물다가 '저승'으로 넘어간다거나 남염부주지에서 박생이 염마왕을 만나기 위해 '저승'으로 내려가지 않는가. 이는 이승과 저승의 선이 불분명하다는 것을 단순한 혼란으로 파악하는 대신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서술자의 태도를 보여준다. 우리가 생각하는 귀신의 이미지는 피 한줄기를 입술에 물고 긴 머리를 늘어뜨린 귀신이다. 두려움, 그 자체다. 허나 이 소설 속 인물들은 귀신을 '귀신이 아닌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밝혀진다 하더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처한다. 그 이유인즉슨 이 '귀신'과 우리가 아는 귀신은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사나운 기운과 요망한 도깨비가 사람을 해치고 사물을 미혹되게 하는데 이것도 귀신이라 할 수 있습니까?"

왕이 말했다.

"귀라는 것은 구부러짐이요, 신이란 것은 폄이오. 굽혔다 펴는 것은 조화의 신이요, 굽혔다가 펴지 못하는 것은 답답하게 맺힌 요귀라오. 신은 조화에 합치하기 때문에 시종일관 음양과 함께 하나 자취가 없고, 요귀는 답답하게 맺혀 있기 때문에 원망을 품고 사람과 동물에 뒤섞여 형체를 가지고 되는 것이오. 산의 요귀를 ''라 하고, 물의 요귀를 ''이라 하고, 수석의 요귀를 '용망상'이라 하고, 목석의 요귀를 '기망량'이라 하고, 만물을 해치는 것을 ''라 하고, 만물을 괴롭히는 것을 ''라 하고, 만물에 붙어 있는 것을 ''라 하고, 만물을 현혹하는 것을 ''라 하니 이 모두가 요귀들이오. '음양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신이라 하니' 이것이 바로 신이오. 신이란 묘한 쓰임을 말하고 귀란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오. 하늘과 사람이 하나의 이이고 드러난 것과 은미한 것 사이에는 아무런 간격이 없으니,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이라 하고 천명을 회복하는 것을 상이라 하오. 시종일관 조화를 이루나 그 조화의 자취를 알 수 없는 것, 이것이 바로 도라는 것이오. 그런 까닭에 '귀신의 덕은 성대하도다!'라고 한 것이오.

-남염부주지 78p

 

귀신과 요귀는 분명 다르다. 오히려 우리가 아는 귀신은 요귀에 가까운 편이다. 흥미로운 점은 요귀는 분명 '기망량'이나 '' , 구체적인 뜻과 이름이 있는 반면 귀신에게는 구체적인 뜻과 이름 없이 그저 '조화를 이루나 그 조화의 자취를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는 앞에서 말한 '이승과 저승 사이의 모호한 선'과 같다. 결국 귀신은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존재다.

만약 이 '존재'가 두려워진다면, 그건 어떤 순간일까? 서양의 일화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의 '귀신' 중 가장 유명하다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는 아버지의 귀신이 나온다. 아버지 귀신은 그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는다. 허나 그 존재만으로도 사람들은 위협을 느끼며 두려워한다. 유령이 말을 거는 건 오로지 '햄릿', 그의 아들 뿐이다. 아버지 귀신은 햄릿을 응원해주거나 힘을 북돋워주기 위해 나온 게 아니다. 오히려 햄릿이 '두려워하는 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게끔 한다. 사실 햄릿이 언제든 눈을 감고 평생 '의심하기만 하는' 상태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도 있다. 허나 귀신의 존재로 인해 햄릿은 그가 외면하고자 했던 '진실'에 대해, 외면하려 했던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그 뒤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햄릿이 제대로 '복수해야 한다'는 책임감-죄책감을 극복하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다.

이처럼 귀신은 사실 ''를 짓지 않는 이상, 그 자신이 어떤 '죄책감'을 가지는 순간 두려운 존재가 된다. '금오신화''만복사저포기''이생규장전'의 경우 귀신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두 인물 다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서양의 일화에서 나오는 귀신처럼 우리 나라의 귀신들 또한 '역설적으로'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진실'을 보여준다. 허나 그 '진실'은 두렵거나 끔찍하지 않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 '진실'은 더 강력하다. 그래서 '금오신화'의 이야기들은 '착한 인물들'이 나오지만, 그 끝은 씁쓸하기 그지없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우물 안에서만 사는 한 개구리가 있다고 치자. 그 개구리는 우물 밖으로는 나가본 적이 없다. 그리고 우물 안에 사는 다른 개구리보다 훨씬 더 크기가 크고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게다가 우물 벽과 구석에 대해 다 알고 있다. 그러면 그 개구리는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실수로 인해 우물 ''으로 나가게 되거나 ''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 깨닫는 순간 그 개구리는 최고로 불행한 개구리가 되고 만다. 자신이 최고인 줄로만 알았고 자신이 아는 세상만이 제대로 '알만한 것'이라고 여겼건만, 여태껏 그가 살아온 삶을 부정하는 '외부'를 보게 되는 것이다.

'취유부벽정기'의 홍생은 부자이며 시를 잘 읊고 여자들도 그를 졸졸 따라다닌다. 가진 게 많은 만큼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가 월궁항아의 시녀이자 과거 은나라의 후예를 만나게 되자 그는 '현실'과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그가 제일 나은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홍생은 그 만남 이후 행복해지기는 커녕, 그전과 다르게 불행해진다. 그는 모든 것에 권태를 느끼며 방 안에서 뒹굴거릴 뿐이다. '남염부주지'의 박생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연구하는 '승려'와 교우관계를 맺으면서 어떻게든 ''을 세우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그가 '저승'에 내려가서 염마왕에게 모든 ''을 들은 이후, 그는 더 이상 어떤 '탐구'를 하지 않게 된다. '용궁부연록'의 한생 또한 마찬가지로 용왕의 부탁을 받아 용궁에 온다. 그는 수많은 문장가들이 있다는 것을 보고, 또 용궁에 놀라운 것이 많다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 곳에서 '야명주' 같은 용궁의 보물을 선사받는다.

이들의 공통점은 '아름다운 것'을 만나 행복했으나, 그 뒤에는 여지없이 불행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많은 것을 보고 접한 만큼 그들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물리적'으로는 닿지 않을 '이상', '아름다움'은 그들을 좌절시킨다. '아름다움'과 극반대라고 볼 수 있는 극적인 ''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극단적인 것'의 끝을 보게 되는 순간, 인간은 그 '이미지'에 사로잡히게 된다. 일종의 '죽음 충동'인 것이다.

홍생의 경우 그는 '그가 잡을 수 없는' 여인을,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뛰어난 문장가를 만났다는 것을, 박생의 경우 그가 그렇게 원했던 '악인에게 공정한 처벌''질서'가 어느 한 곳에서는 규칙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한생의 경우 평생 둘러봐도 다 둘러볼 수 없을만큼 많고 진귀한 보물들의 일부를 보았다는 것을 그 '충동'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는 그들이 노력해서 얻은 게 아니라 갑자기 그들 앞에 딱 등장한 '완성품'이다.

김시습은 이 '금오신화'의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통해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완성품'에 대해 쓰면서도 그는 그런 세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세계를 꿈꾸는 순간 현실에 얼마나 염증을 느끼는지를 토로했다. 이는 그의 행동에 대한 변명이자 대대적인 입장 발표나 다름없다. 그는 그런 '이상적인 세계'가 그에게 주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홍생과 박생과 한생들은 결국 '죽거나' '속세에서 떠난다'. 김시습 또한 속세에서 벗어난 산 중턱에서 이 글을 썼다. 하지만 그는 어떤 '이상'이 실현되었기 때문에 떠난 것이 아니다. 그는 홍생이나 박생, 한생들처럼 떠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에 한탄을 하기도 한다. 김시습은 마치 '햄릿'처럼 '이상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 아니면 '이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 그 이상을 죽여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과연 어떤 것이 타당한 것인가? 하지만그는 결국 그 '염증'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그 이상적인 세계를 실현해 나가고자 한다. '금오신화'를 통해, 이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통해 그는 그 자신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기담

 

'금오신화'에는 두세편 정도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 허나 그 사랑하는 연인들을 다룬 이야기에서 여성의 이름-성씨라도 나온 건-고작 한 편에 불과하다. 다른 이야기들의 경우 남성의 성씨만 나오고 여자는 '여자'라고만 불리곤 했다. 다른 여자들이 나올 때면 헷갈리지 않도록 다른 여성의 성씨를 알려주곤 한다. 하지만 그래도 남성의 상대역인, 조연 여성들보다는 비중이 높은 여자의 이름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 이를 두고 유교적 사상에 입각한 김시습의 편협한 여성관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유교적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이다. 허나 '이상'이란, 본래 현실과는 다르고 당장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어떻게든 다가가고자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진정한 이상주의자에게 '이상'이란, 평생토록 올 수 없는 것이다. 그에게 '이상'이란 추상적인 것으로, 오아시스의 신기루와 같다.

'금오신화''여자' 또한 추상적인 존재다. '여자'는 여자로서의 덕목을 갖춘, 김시습에게는 이상적인 여자다. 반면 남성의 경우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이생규장전'에서 이생은 아무리 사랑하는 현재가 아름답더라도 후에 어떤 액운이 따라 붙을 것이라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물론 늘 좋은 일만이 있을 수는 없다. 좋은 일이 있다면 나쁜 일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현재 그들의 상황에서 '미래의 액운'을 걱정하는 순간, 현재의 행복은 색이 바래 버리고 만다. 여자는 이를 알고 그를 꾸짖는다. 여자는 철이 없는 게 아니라 그 '분간'을 하는 대신, 현재의 행복이 날아가기 쉬운 만큼 지금은 그걸 즐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그녀의 세상에서는 모든 '좋은 일''나쁜 일'의 경계란 없고, 그녀는 오로지 현재, 현재에만 집중할 뿐이다. 어떻게 보면 그녀의 '태도'야말로 사실 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주축'이다.

 

 

이생이 이어서 읊조리기를,

 

뒷날 우리 사랑이 새 나가면

비바람 무정하게 불어닥치리니 또한 가련치 않은가

 

하니 여자가 얼굴빛이 변하며 말했다.

저는 그대와 더불어 부부가 되어 영원토록 기쁨을 누리려고 하는데 낭군은 어쩌면 갑자기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제가 비록 여자라도 마음이 태연한데 장부의 의기로 어찌 이런 말씀을 하신단 말입니까? 뒷날 규중의 일이 새 나가서 부모님께서 저를 꾸짖고 책망하시면 제가 감당하지요. 항아는 방에 술과 과일을 차리도록 해라.”

 

-이생규장전. 32-33p

 

그로 인해 이 '금오신화'에서 초현실적인 존재로 나오는 이들의 대부분은 여자거나 염마왕, 용왕 등의 전설 속 인물들이다. 염마왕이나 용왕의 경우 어렸을 때부터 읽어오던 전래 이야기나 설화 등에서 어느 정도 캐릭터가 잡혔지만 여자의 경우 캐릭터보다는 그냥 '초현실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나온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들은 '초현실적인' 귀신에 속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영혼 결혼식이나 다름없는 '만복사저포기' 또한 그렇다. 과거에는 이 이야기가 사랑 이야기였다.

허나 현대의 '만복사저포기'는 어떠한가. 한국 영화 '기담'은 사실 로맨스 영화다. 다른 로맨스 영화와 다른 점은 바로 '영혼', 귀신과 사랑을 나눈다는 것이다. 첫번째 에피소드에서 이 '만복사저포기'와 비슷하다고 할 만한 인물들을 볼 수 있다. 한 의사 견습생이 죽은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는 '영혼 결혼식'을 하며, 여자와 '환상' 속에서 관계를 갖고 아이를 가지며 산다. 그 순간은 길 것 같았으나 실은 우라시마 타로의 이야기처럼 짧은 '순간'일 뿐이었다. 의사 견습생은 그 꿈이 끝나는 순간, 자신이 혼자 있다는 차가운 현실을 깨닫게 되며 머리카락 일부분이 하얗게 세어버린 것을 본다. ''이지만, ''이 아니라는 증거가 나타난 것이다. '만복사저포기'에서도 양생은 여자와 함께 '며칠'을 보낸다. 그는 한없이 행복해하지만 결국에는 그 곳을 떠나야만 한다. 그는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는 대신 주발을 받게 된다.

그 뒤로도 두 남자들은 귀신, 여자에 대한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영화 속 의사 견습생은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지만 다들 죽고, 결국 홀로 남게 된다. 여기서 왠지 소름이 끼칠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그건 '귀신' 탓이 아닐수도 있다. 그는 귀신에게 그렇게 말한다. 왜 이때껏 자신을 혼자 두었느냐고. 원망하듯이 말하는 어조에서, 사실 그 또한 양생처럼 여자를 '귀신'이 아니라 여자로, 사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만복사저포기'에서 여자는 결국 남자로 환생해 '윤회의 아이러니', 양생과 헤어지게 된다. 그러나 '기담'의 의사 견습생은 결국 그 '귀신'과 마주함으로써, 끝내 만나게 된다.

어떻게 본다면 '기담'의 엔딩이야말로 해피 엔딩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기담''사랑과 영혼'이 되지 못했다. 현대에서는 '귀신과의 사랑'이 로맨틱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과 영혼'도 사실은 육체적인 사랑이 영혼의 사랑으로 이어진 것이니 온전한 '귀신과의 사랑'이라고는 볼 수 없다. 현대에서는 '분명하고 또렷한 것',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안전한 것'이다. 하지만 '추상적이거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 앞에서는 두려워하며 입을 다문다. 오답이 인정되지 않고 객관성을 중시하는 만큼, 자칫하면 정신병자로 몰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영혼과의 사랑'이라고 볼 수 있는 '기담'은 과거의 '금오신화'와 달리, 기이한 이야기로서 '괴담'이 되어 버린다. '금오신화'를 현대화하여 영화로 제작한다면 아마 이 '기담'이 나올 것이다.

총 세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는 이 영화에서는 '금오신화'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속 인물들이 일하는 병원이 정전이 된다. 그로 인해 병원 안 사람들은 촛불을 켠다. 사람들의 얼굴은 보이지만, 왠지 어두운 가운데 조금 음산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평온하다. 그들은 서로에게 촛불을 나눠 받으면서 미소를 짓는다. 그 순간 그들은 일제 강점도 괴로움도 모두 잊어버린 것 같다. 그들을 억누르던 모든 경계는 사라지고 삶과 죽음, 선과 악이 뒤섞이고 현실과 비현실이 함께 어둠 속에서 녹아내린다. 빛나는 건 오로지 사람들의 '얼굴' 뿐이다. 그 어둠 속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전에,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 보면서-그 사람이 죽었든 살았든 간에-서로가 ''에 있다는 것만을, 재차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가슴 속에 조그만 '', '이상'이나 '좌절'을 품고 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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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들, 자살하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8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이화연 옮김 / 민음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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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씨들

-제프리 유제니디스 처녀들, 자살하다

 

 

검은집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단편 '검은집'에서 팀은 '검은집'에 들어간다. 그리고 검은집에서 본 그대로를 사람들에게 말한다. 팀이 말하는 건 마을 사람들이 꿈꾸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팀은 의기양양해 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런 그를 '고깝게' 여긴다기보다는 위험하게 여긴다. 팀은 이전까지 마을이 암묵적으로 지켜오던 어떤 ''을 깨버린 것이다. 그들의 밝고 즐거운 나날들과 대비되는 검은집이 있어야 하는데 팀은 검은집의 '대비될 환상'을 부정한 것이다. 결국 팀은 마을 사람들의 폭행으로 인해 죽게 된다.

제프리 유제니다스의 '처녀들, 자살하다'에서 막내 서실리아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서실리아가 왜 죽었는지 의문을 품는다. 몇몇은 서실리아를 두고 도미닉 팔라촐로에 대한 사랑에 미쳐 그런 행동을 했다고 추측한다. 하지만 서실리아의 일기장으로 서실리아가 단순히 상사병으로 죽지 않았다는 게 밝혀진다. 동갑내기 아이들은 서실리아가 죽기 전까지는 그런 '유쾌한 청소년'이 죽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치 못했고 묘지 인부들이 파업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안전지대'였기 때문이다. '서실리아가 죽던 시기'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흑인이 아직 백인 사회에서 용납되지 않던 때였다. 하지만 서실리아가 죽고 나서 그 시기는 '안전'에서 '불안'으로, '백인들만의 사회'에서 '다인종 사회'로 서서히 바뀌는 시기다. 또렷하던 광경이 점차 흐려지는 것에 아이들은 놀라고 어른들은 은폐하거나 어물쩡 해결한 척 지워버리려고 한다.

어른들이 서실리아의 죽음에 애써 '해석'을 덧붙이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해석을 '고정된 사실'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 사실 우리 나라에서 무당이 '굿'을 하는 건 죽은 사람이 왜 죽었는지 알고 싶어하는 행위이다. 일종의 '해석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사실 그 무당이 정말 죽은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지, 다른 무당이 다른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는데, 혹은 그 유령이 기독교라면 그 무당에게 나타나겠는지. 수많은 변수를 따져야 한다. 하지만 어른들은 애써 그 '변수'를 모른 척 한다. 손택은 어느 '사실'로 고정된 '해석'은 사실 그 진실에 대한 '보복'이라고 말했다. 서실리아의 '죽음''고정된 해석'을 부여하려는 이 어른들은 그렇다면 무엇에 보복하려는 것일까?

그들은 '전쟁'을 겪었고, 죽음은 이제 저 멀리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안전해야' 한다. 그들은 그들의 자식을 아주 안전하고 행복하게 키운다. 그런데 그 사실을 부정하는 서실리아의 죽음은 그들에게 '보복 대상'이 될 만하다.

그들이 '서실리아'를 지우는 법, 어른들은 그녀를 '애도'하려 든다. '애도'란 그 사람이 왜 죽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하는 것이다. 허나 이 소설에서 '애도'는 벌어진 '실재'를 가리기 위한 방책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서실리아가 죽은 '울타리'를 치움으로써 모든 게 해결된다고 본다. 리즈번 가족이 외부로부터 스스로 '차단'을 행하고 있는 이상 리즈번 가족의 집은 '검은집'이 된다. 사람들은 그 '검은집'의 존재를 못 견뎌하면서도 알기를 두려워한다. 울타리를 치우는 것, 사실 울타리는 서실리아가 죽은 이유가 아니다. 서실리아는 울타리가 없었더라도 끝내 죽기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울타리가 없어졌으니 이제 '죽음'은 끝이 났다고 생각한다.

보니 또한 아버지에게 비꼬듯이 울타리가 이제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아버지 리즈번은 서실리아의 유령에게 '왜 죽었는지' 묻고 싶어했지만 서실리아의 유령은 없다. 햄릿에서 유령은 자신이 죽은 이유를 말해주지만 유령이 없다는 것은 유령마저 입을 다물었다는 것을 뜻한다. 서실리아가 왜 죽었는지는 절대로 알 수 없다. 그 누구도. 아버지 리즈번은 그저 그렇게 '이유없이' 또 누군가가 울타리 위로 뛰어내리는 죽음이 번복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힐 뿐이다. 주변에 도사리는 죽음을 '내쫓기 위해' 그는 창문을 닫는다.

 

그는 앞으로 내달려, 유령을 지나쳐서, 창문을 닫았다. 그때 유령이 돌아섰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것은 이불을 둘러쓴 보니였다. "걱정 마세요."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사람들이 울타리를 없앴잖아요."

 

73

 

아버지 리즈번은 '애도의 날'을 지정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서실리아의 죽음을 그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마치 이해한 것마냥 구는 것이 맘에 들지 않는 자매들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추측과 수많은 말들에 질려 자매들은 '부서지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은 것 같은' 상태가 된다. 사람들은 서실리아를 정신병 환자로, 탈선한 청소년으로 몰아간다. 이에 함께 희생되는 건 서실리아의 자매들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들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다. 이 완벽한 '인형의 집' 같은 세상에서는 그 무엇도 위협이 되어서는 안된다.

사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검은집'에서 가장 여운이 남았던 건 팀의 죽음이 아니었다. 팀의 죽음 후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그들은 팀이 죽게 된 원인을 제공했으나 '평화롭게' 풀려 나와 맥주를 즐긴다. 그들은 팀을 가엾게 여긴다. 한 남자가 그들에게 '팀이 잘 죽지 않았느냐'고 동의를 구하지만 사람들은 애써 그 진실을 부정한다. 그래야만 그들은 '도덕적'이고 '인형의 집' 같은 생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처녀들, 자살하다'의 어른들 또한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상적인 삶'을 위해 실재를 가리려고 한다. 허나 그 실재를 가린다는 건 곧 그들의 '이상적인 삶'이 거짓임을 드러낸다. 리즈번 부부 또한 마찬가지다. 어머니 리즈번은 아이들을 '사랑했고' '보호했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건 감금이나 다름 없는 행위였다. 아버지 리즈번 또한 '침묵'으로 그 행위를 방관한다. '위화감'을 파악할 수 있는 건 아이들이다. 그들은 '새로운 것'의 충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자매들의 '생활''생각'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단순히 '서실리아'가 왜 죽었는지를 알고자 하는 게 아니라, 그 자매들이 그 죽음 뒤에도 '분명히 살아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그들로 인해 자매들은 '개별적인 존재'들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세상은, 서실리아와 보니, 메리, 럭스, 터리즈를 한 덩어리로 묶어서 본다. 서실리아가 죽었다는 건 곧 그들 덩어리의 한쪽이 썩었다는 뜻으로 치부된다. 세상의 눈에 그들은 이미 다 '죽은 사람들'로 보일 뿐이다. 죽음과 접촉했기 때문에, '검은집'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외부로부터 격리되고 집으로부터 격리된다.

 

그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이 세상은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향이 아니고,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잔디를 돌보고 잡초를 뽑아 댄다 한들 사실 잔디 따위에는 털끝만큼의 관심도 없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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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마와 루이스처럼

 

리즈번 자매들은 트립 폰테인과 럭스의 관계 덕분에 무도회에 가게 된다. 하지만 그 무도회는 정말 그들에게는 '어색한 것'이었다. 그들 또한 다른 여자애들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작은 아씨들'에서 나오는 자매들처럼 정숙하고 바른 몸가짐을 갖춰야 하며 '같이' 움직여야 한다. 개별적인 것은 용인되지 않는다. 그들의 어머니는 마치 '푸대자루' 같은 드레스를 만들어 준다. 그래도 자매들은 즐겁게 그 드레스를 입고 나가지만 무도회장에 들어선 순간 그들은 알게 된다. 다른 여자애들이 입은 드레스와 그들이 입은 드레스는 천차만별로 다르다는 것을. 트립 폰테인이 럭스에게 관심을 두는 건 사실 '럭스'가 다른 아이들과는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럭스와 '입맞춘 순간'을 하나의 자극으로 여긴다. 그 순간 럭스에 대한 그의 사랑은 끝난 것이다. 실제로 그는 경기장에서 럭스가 여타 다른 여자애들과 다를 게 없다는 걸 안 순간 '질린다'. 게다가 그들은 그 파티 이후로 영원히 그 '' 안에 갇히게 된다.

예전에도 그들은 그 집 안에 갇혔다. 첫번째 파티는 그냥 아기들의 생일 잔치와 같은 느낌이었다. 서실리아가 '빠지고 싶다'고 하는 건 그녀가 '죽고 싶다'기 보다는 '죽을 수밖에 없을만큼 지루한' 파티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를 위한 파티를 열어줬는데 왜 그녀가 싫증을 내는 것인가?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공구에 대해 설명해주고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보드게임이나 하는 파티가 무엇이 재미있겠는가.

자매들이 그 ''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틀은 더 단단히 죄여온다. 럭스가 꾀병을 부려 '병원'에 갔을 때도 그녀는 집에서 나오기 위해, 더이상 그 틀이 옥죄여지지 않도록 의사에게 거짓말을 해달라고 요청한다. 의사는 그 말을 들어준다. '꾀병을 부리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집', 어머니가 병원에 실려가는 럭스를 보면서 손을 흔드는 것도 왠지 무서운 징조로 보인다. 어차피 너는 '이 곳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라는 듯한 제스쳐로.

'관찰자들'은 그녀들에게 어떻게든 연락을 하려고 애쓴다. 검열당할 수 있는 말 대신 노래로, 그리고 행동으로. 자매들은 그 덕분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었을지는 모른다. 그녀들은 '대학'에 가면, 어른이 되면 이 틀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점점 지나가는 시간과 그에 비해 달라질 것 없는 현실은 그들을 좌절시킨다.

결국 그녀들은 그 ''에서 빠져나가기를 선택한다. 그들이 '관찰자들'에게 보낸 메시지는 단순히 그들의 탈출을 도와달라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이 '', ''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선언'이다. 하지만 관찰자들은 또다시 그들의 '메시지'를 오인한다. 그들은 그녀들을 '도와주겠다고' 그들의 집을 찾아가지만 사실 그건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방해'였다. 럭스는 자매들이 '떠날 수 있도록' 그들을 붙잡는다.

 

다만 나중에 우리가 깨달은 것은 그녀와 언니들이 평화롭게 죽을 수 있도록 우리를 그 자리에 붙들어 놓기 위해 그녀가 우리의 벨트를 끌렀던 거라는 사실이었다.

 

254

 

럭스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들이 진짜 '관찰자들'의 말대로 떠날 수 있다면, 그녀는 자매들의 죽음을 막고 함께 도망가기를 택했을 것이다. 허나 그들이 살아 있는 한 그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관찰자들' 또한 그들과 같은 어린애로 결국 '보호자'라는 틀에 옥죄이게 될 것이다. 그 틀에서 도망치는 방법은 죽음밖에 없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에서 델마와 루이스는 그들을 '강간'하려던 사내를 죽이게 된다. 실수든 고의든 간에 그들은 사실 '피해자'. 하지만 세상은 그들을 '살인마'로 몰아간다. 그녀들은 점점 세상의 틀에서 도망치다가 영락없이 경찰들에 의해 '범죄자'가 된 자신들을 보게 된다. 그들이 '범죄자'가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은 그들 자신밖에 없다. 결국 그들은 그 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차를 몰고 벼랑으로 '떠난다'. 자매들 또한 '죽음'으로 그 틀에서 빠져 나간다. 이제 그들은 자유롭다. 그들의 육신만이 어머니에 의해 '칠칠맞지 못한 터리즈'로 남아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과연 '죽음'밖에 답이 없었는지 묻는다. 어쩌면 그들의 희망대로 자매들은 '괜찮아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들을 죽인 건 '곧 나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병을 방치하고 격리시키기를 원했던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이 상황을 많이 봤다. 한 지역에서 어떤 ''이 나타나면 그 지역을 폐쇄조치부터 하고 그들을 전부 '병자'처럼 취급하는 것, 마치 그들이 '범죄'를 저지른 것마냥 구는 것. 그들이 겉으로 바라는 해결책은 '백신을 찾아내는 것'이지만 사실 진짜 바라는 것은 '병자들과 병이 모두 함께 죽는 것'이다. 병자가 입을 여는 순간, 그들이 진짜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자매들의 죽음은 우리가 모두 암묵적으로 바라던 '침묵',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의 '저항'이었던 셈이다.

 

 

 

 

 

실패자 셜록

 

앞에서도 말했듯이 리즈번 자매들을 '개별적인 존재'로 증명해 주는 건 '관찰자들'이다. 그들은 리즈번 자매들의 이름과 그들의 특징, 기호를 알고 싶어한다. 물론 처음에는 서실리아가 왜 죽었는지, 그녀의 '알리바이'에 대해 알고자 한다. 그러나 그 추측들은 '빗나간' 것이 된다. 그들은 어떻게든 그들의 죽음에 대해 필사적으로 캐내고자 한다. 그들의 '구출 시도''방해 시도'가 된다. 아이들의 태도는- 사실 '해석하고자 한다'는 것에서는 어른들의 태도와는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그들과 어른이 다른 점은 바로 '자매들'을 개별적인 존재로 인지했는지의 여부다. 아이들 또한 그들을 '하나의 덩어리'처럼 본다. 그 시선 때문에 자매들은 결국 같이 몰려 다닐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점점 그들의 차이를 파악하게 되면서 그들은 자매들을 '개별적인 존재'로 보게 된다.

'자매들'은 사실 그들의 '의뢰인'이자 '범인'이다. 관찰자들은 자매들에 대해 '알아내야 하고', 그로써 자매들을 도와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도움'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그나마 '도우려는 것'은 너무 늦다. 셜록 홈즈는 사람들의 말만 듣고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다. 가끔 직접 발로 뛰기도 한다. 관찰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셜록 홈즈처럼 그들의 우편물이나 학교 성적, 친구들에게 자문해 본 것들로 그들이 왜 죽었는지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고자 한다. 허나 그들은 사건의 진상을 아는 데에 실패한다. 셜록 홈즈는 '실패'한 것이다. 그들은 '실패'로서 깨닫게 된다. 진짜 '진상'은 알 수 없다는 것을.

김연수의 '한달을 더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 나오는 인물은 여자친구가 왜 죽었는지 알기 위해 그녀가 마지막으로 읽었던 책들을 찾아 읽고 낭가파르바트에 오른다. 하지만 그는 그 산에서 실종되고 만다. 그 실종에 대해 사람들은 또다시 수많은 '추측''단정'을 흩뿌린다. 그들은 그가 '등정에 실패'했다는 것으로 규정짓는다. 하지만 그를 사랑했던 왕오천축국전의 연구자는 그가 끝내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상상한다. 그녀는 '단정'짓지 않고 '상상한다'. 그녀의 상상은 터무니없지만 사실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의 '죽음'은 사실 '여자친구가 죽은 이유는 사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실패이면서도 성공이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면 '성공'으로, 혹은 '실패'. 그런데 어찌 한번에 단정지을 수 있단 말인가. 서실리아가 '정신병'으로 죽었다는 듯이.

관찰자들에게 '해석'이 불가능했던 리즈번 자매들은 이제 정말 침묵하게 된다. 그녀들이 살아있다 하더라도 관찰자들이 그녀들을 끝까지 사랑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다만 그녀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차마 명료한 해석을 덧붙일 수 없기에 그녀들이 영원한 '미스테리', 그들의 '미결 사건'으로 남았다는 것 뿐이다. 관찰자들은 그렇게 그녀들을 끝까지 기억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건 오직 우리가 그들을 사랑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부르는 소리를 과거에도 듣지 못했고 지금도 듣지 못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나무 위 집에서, 가늘어져 가는 머리카락과 출렁거리는 뱃살을 하고, 그들이 영원히 혼자 있기 위해 간 방, 홀로 죽음보다 더 깊은 자살을 한 곳, 퍼즐을 완성할 수 있는 조각들을 영원히 찾아낼 수 없을 그곳에서 나오라고 그들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291

 

 

*실제로 처녀들, 자살하다작은 아씨들의 패러디 축소판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우선 아버지 리즈번은 작은 아씨들의 아버지처럼 전쟁에 나가 있지는 않으나 가정에 어떤 영향도 행사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매들의 경우 작은 아씨들과 다르게 다섯명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어머니에 의해 행동 규율에 알맞은 구식 숙녀가 되기를 강요받는다. ‘작은 아씨들의 경우 화목하고 소소한 이야기이지만, 그 소소함이 현대로 온다면 어떻게 될까? 무엇보다 그들은 큰 아씨들이지, 작은 아씨들이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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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통 민음사 모던 클래식 51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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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로 가는 길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의 '숨통'을 읽고-


인 오브 아프리카

아프리카라고 하면 우리는 으레 코끼리와 치타, 숨막힐 정도로 뜨거운 햇빛을 생각한다. 그 곳에 사는 원주민들은 검은 피부에 흰 이를 드러내며 웃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우성들이 한데 모여 미스테리한 의식을 거행하고, 몇몇은 거기에서 신성함을 느낀다고 호들갑을 떨기 마련이다. 혹은 유일신을 섬기는 모 종교의 교리와 어긋난다고 불손하게 볼 수도 있다. 허나 이는 과거의 이미지, 과거 중에서도 편견에 찬 시선이 포착해 낸 이미지일 뿐이다. 아프리카가 유럽 대륙에 알려지기 시작했을 무렵, 영국에서 가장 유행했던 사진은 아프리카 원주민 여자가 벌거벗은 채 서 있는 사진이었다. 원래 원주민들은 벗고 살기 때문에 수치심을 모르며 금수에 가깝다는 게 그들의 이론이었고 주장이었다. 이는 어디서 많이 본 도식이다. 예전 일제 강점기 때 외국에서 돌아다니는 사진들, 조선에 관한 사진들을 보면 정말 초라하고 위축된 모습들만 담겨 있다. 물론 몇몇 사진은 진심으로 조선이라는 동양의 나라에 관심을 가지고 찍은, 호기심의 렌즈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끈 사진은 각도며 앵글을 핍박받는 조선인에 맞추었다. 우리는 알지 않는가. 우리는 불쌍하지 않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멍청하지 않다. 무엇보다 그런 의도로 찍은 사진일수록 피사체와 눈을 맞추지 않는다. 피사체가 렌즈를 쳐다보는 순간, 보는 사람은 '보이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기 때문이다. '보는 사람'은 '보이는 사람'을 자기 식대로 이해하게 된다. 그로 인해 '충돌'이 생긴다.
가령 예를 들자면, 아프리카에서는 어떤 사람이 갑작스레 화를 내거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 '악마가 들렸다'고 말한다. 단순한, 미개한 부족의 미신으로 볼 수도 있다. 허나 '악마가 들렸다'라고 말하는 건 아프리카 사람들의 태도 중 한 면을 보여준다. 영국인들이 서로 만났을 때 애꿎은 날씨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아프리카인들은 '악마가 들렸다'라고 말하면서 '책임을 돌린다'. 화를 내는 사람의 성격 탓을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은 원래는 그런 성격이 아닌데 '악마'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쓸데없는 분쟁이나 맞붙어 화내는 걸 면할 수 있다. 흥미로운 말버릇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말버릇'을 미개한 것으로만 치부한다. '중매인'에서 나오는 남편이 미국에 융화되기 위해 '코코넛 밥'을 앞으로 짓지 말아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아프리카인들이 유럽과 미국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미개함'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올바른 '접근법'이 아니다. '점핑 몽키힐'의 에드워드가 아프리카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제대로 '이해'하고자 했다면 이 면을 간파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끝끝내 자신의 '시선'을 포기하지 못하고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역으로 '아프리카다움'에 대해 강의하고 있는 셈이다.
에드워드와 그의 아내는 '이해'한다는 태도를 취하며 자신들이 얼마나 관용적인 사람인지 보여주고자 한다. 그는 우간다인을 워크숍 리더로 선정하지만 진짜 리더는 에드워드다. 그는 그들의 '소설'에 대해 대놓고 '아니다' '틀리다'고 논한다. '아프리카다움'에서 벗어난다고 지적을 받은 세네갈인은 화를 내며 커밍아웃을 한다. 몇몇 사람은 충격을 받는다. 사실 어떤 사회에서든 아직까지 커밍아웃은 충격적인 것이다. 그들이 아프리카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그녀에게 '고급 보르도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셨다'라고 비꼰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세네갈인이 아니다. 에드워드는 아프리카를 이해하는 척 하면서, 진짜 '아프리카인'들을 깔보고 있다. 존중이 아니라 성급한 '일반화'의 결과인 셈이다. 이런 사태는 '숨통'에서 이웃들이 다람쥐가 사라진 것이 새로 이사온 아프리카인들 때문이 아니냐는 데에서도 볼 수 있다. '이해'라는 것을 무슨 '하사'해 주는 특권으로 보는 이상, 완전한 이해란 불가능하다. 게다가 그 그릇된 '이해'로 인해 어떤 일이 생겨나는가. 그릇된 이미지가 생긴다.


에드워드는 생각에 잠긴 듯 한참 파이프를 씹더니, 이런 유의 동성애 이야기는 아프리카의 진짜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어느 아프리카요?" 우준와가 불쑥 말했다.
남아공 흑인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에드워드는 더욱더 파이프를 씹어 댔다. 그리고는 마치 교회에서 얌전히 앉아 있으라는 말을 듣지 않는 어린애를 보듯 우준와를 쳐다보더니, 자신은 옥스퍼드에서 수학한 아프리카 학자로서 말하고 잇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참모습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아프리카라는 공간에 서양식 사고를 투영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말하고 있는 거라고 했다. 짐바브웨인과 탄자니아인과 남아공 백인은 에드워드가 말하고 있는 동안 고개를 가로젓기 시작했다.
"지금이 2000년일지는 모르지만 가족들에게 자기가 동성애자라고 고백하는 여자 이야기가 대체 얼마나 아프리카적이라는 거요?"
에드워드가 물었다.
그러자 세네갈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프랑스어를 속사포처럼 쏟아 내기 시작하더니 약 1분 동안의 일장 연설을 마친 뒤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세네갈인이에요! 내가 세네갈인이라고요!" 이 말에 에드워드는 똑같이 유창한 프랑스어로 대답하고 나서 다시 영어로, 부드러운 미소를 띠면서 "저 사람은 고급 보르도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셨나 보군요." 라고 말했고 몇몇 참가자들이 킥킥 웃었다.
-점핑 멍키힐. 145p-


그의 안에 있는 아프리카의 이미지가 어떤 것인지, 우준와는 그의 태도로 짐작하게 된다. 적어도 그의 안에 있는 '아프리카'라는 환상은 아프리카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 '점핑 몽키 힐'이라는 이름과 달리-원숭이가 드글드글할 것만 같은데-원숭이가 한 마리도 없는 것처럼. 에드워드의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 진짜 아프리카에 사는 그들은 아프리카 밖에 사는 사람들처럼 생활고를 겪고, 머리카락 손질법을 궁금해 하며 맥주를 잘 마신다. 에드워드는 그런 '생활'을, 그가 살고 있는 유럽과 비슷한 생활을 못 견뎌 한다. 그리고 우준와에게 거리낌없이 성적 농담을 한다. 우준와는 처음에는 의아해하다가 나중에는 진담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경악한다. 만약 그가 우준와나 세네갈 여자처럼 아프리카 여자들이 아니었다면, 영국 여자였다면 그런 성적 농담을 할 수 있었을까?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점핑 멍키 힐'에서 에드워드는 희화화된 이미지로 그려진다. 이 '에드워드'는 작가로 하여금 분노하게 한, 과거에 만난 한 인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가 진짜 주목하고자 하는 대상은 따로 있다. 바로 그런 '아프리카다움'을 강요받으면서도 입을 열지 않는 아프리카인들이다. 그들은 우준와가 그런 성희롱을 당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에드워드의 태도가 얼마나 부당한지 알면서도 입을 다문다. 에드워드의 추천을 받기 위해서다. 동의하지 않고 침묵한다고 해서 '거부'가 될 순 없다. 침묵은 동의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결국 '아프리카다움'을 강요하는 에드워드도 문제지만, 진짜 문제는 '아프리카다움'을 강요받으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아프리카인, '미국다움'을 강요하는 '중매인'의 남편, 아프리카인들이다.


케냐인은 에드워드가 그 납작한 막대기처럼 생긴 아내의 몸 위로 올라갈 때 속으로는 우준와를 생각했으리란 건 첫날부터 빤히 보였다고 말했다. 짐바브웨인은 에드워드가 우준와를 쳐다볼 때는 늘 추파를 던지더라고 말했다. 남아공 백인은 에드워드가 백인 여자는 절대 그렇게 쳐다보지 않을 거라고, 왜냐하면 그가 우준와에게 느끼는 감정은 존중이 결여된 욕망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들 알고 있었어요?" 우준와가 물었다. "다들 알고 있었어요?"
-점핑 멍키힐, 146-147p-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는 단편들마다 이 점을 거듭해서 지적하고 있다. 그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아프리카를 코끼리와 정글북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꽤 '충격적'인 사실일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인들의 아프리카는 얼마나 다른가? 그리고 침묵하는 아프리카인들, 그들은 어떤가? 단순히 타인에게 '화'만 내는 것이 아니라, 아다치에는 아프리카인들에게도 반성적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그 '반성적 성찰'은 '타인의 강요'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도 있겠지마는, 더 나아가서는 아프리카인들의 정체성 문제를 다룬다. 아프리카인들과 유럽인들은 다른가? 서로 '다르다는 것'으로 인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 이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순간, 편견은 더 강화된다. 상대주의적으로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만큼 쉬운 게 없다. 하지만 동시에 어느 한쪽이 없어지고 나면, 다른 한쪽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만다. 상대주의적으로 서로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건 결국 어느 한쪽이 사라져 버리면 끝인 것이다. 한 명이 밥 먹으러 가버리면 다른 한 명은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있게 되는 시소처럼. 그렇다면 이 불안한 시소의 감정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로미오와 줄리엣

아프리카인과 유럽인들은 사는 환경도 다르거니와 가지고 있는 전통도 다르다. 세계화로 인해 서로의 문화를 더 잘 알게 되었지만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다. 사실 이렇게 따지자면 개개인이 다 다른 주체다. 어떤 주체는 카프탄(아프리카 전통 의상)만 입고 다닐 수 있고 어떤 주체는 동성 애인을 사귈 수 있다. 허나 그 '다르다'에 대해 어떤 이유를 따지게 된다면 어떨까. 우리는 '이해'를 하기 위해서 그런 주체들에게 '왜'냐고 묻는다. 어떤 거창한 역사적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이유라고 할 것까지는 없는 단순한 기호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몇몇은 그 이유들을 '이유답지 않다'고 말하며,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간주해 버린다.
'숨통'의 아쿤나와 '그'는 분명 서로 다르다. 허나 '그'는 아쿤나의 이름 뜻에 대해서도, 그리고 아프리카에 대한 어떤 성급한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그저 아프리카에 대해 '어느 정도만' 알고 있다고 말할 뿐이다. 다는 아니다. 그는 아쿤나와 그가 '다르다'라는 것만을 인지하고 있을 뿐이다. 아쿤나는 그런 그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 또한 아쿤나가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의 부모님도 아쿤나에게 반감을 드러내지 않고, 그냥 '여자친구'로서 대한다. 하지만 분명 둘을 갈라놓는 장벽이 있고, 아쿤나는 답답함을 느낀다. 가령 아쿤나가 그녀의 아버지가 '은시(똥)'처럼 보였다고 말했을 때, 그는 아쿤나를 위로하면서 말한다. '그런 사람들은 극소수일 뿐이라고'. 어떤 수단으로든 상대방을 깔아 뭉개고 그 상황을 즐거운 오락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소수일 뿐이라고. 하지만 아쿤나에게는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 그녀가 만난 사람들 중 '그'와 같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그런 세상을 겪으면서 살아왔다. 그의 위로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녀의 '고백'은 그저 '어린아이의 떼쓰기'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이 이 이야기를 마치자, 그는 입술을 오므리면서 당신의 손을 잡고는 당신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당신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 세상이 자기 같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고, 혹은 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갑자기 화가 났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에게, 이해해야 할 것은 하나도 없다고, 그냥 사는 게 원래 그런 거라고 말했다.
-숨통. 163


그녀는 애써 그의 말을 부인하면서 그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한다. 어느 한 쪽의 이해에 편입되는 순간, 그와 그녀 사이의 평등한 관계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필사적인 행동'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녀가 그의 부모님에 대해 '찬사'를 할 때, 그는 그녀에게 '부모님에 대해서 진짜 사실을 모른다'고 반박한다. 그녀가 그에게 '실용적이지 않은 선물은 필요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배꼽빠지게 웃을 뿐이다. 그는 정말 그 물건들이 그녀의 '기호'에 맞는지 생각하지 않고, 그저 그녀가 '가난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만, 그를 나이지리아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기를 꺼린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만, 그와 사사건건 '충돌'하면서, 그와 다른 그녀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된다. 그 정체성은 그녀의 숨통을 조여온다. 결국 그녀는 그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는 그녀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냐고 묻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둘은 현대의 로미오와 줄리엣 같다. 과거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서로 '다른 것'은 없었다. 오직 그들의 장애물은 서로에게 적대적인 가문들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동반자살이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쿤나와 그의 집안은 서로에게 적대적이지도 않고, 둘은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어찌 보면 과거의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훨씬 더 유리한 상황이다. 하지만 둘은 '다르다'. 다르기 때문에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간극이 있다. 다르다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시소처럼 불안한 상황이 된다. 이 불안함은 아쿤나를, 더 나아가 그와의 관계의 숨통을 '조인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은 다시 한번 그와 그녀가 '다르다'라는 것을, 그 다름은 결국 극복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표명한다. 결국 그녀는 스스로 그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과거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들 자신을 죽음으로 던져 스스로의 정체성을 세상에 밝혔지만, 아쿤나와 그는 죽을 수도 없다. 어쩌면 그녀가 영주권이 유효한 1년 안에 다시 돌아와서 그와의 '다름'을 다시 한번 극복하려고 시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일종의 '유예 기간'을 두면서, 동시에 그에게도 그 자신의 감정을 수습할 것을 간접적으로 '권한다'. 가장 가능해 보이는 사랑의 끝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사랑은 최고의 비극이 된다.


당신은 당신이 영주권자임을, 1년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영주권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러자 그는 자기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않냐고 말했다. 당신, 돌아올 거야? 돌아올 거냐고.
당신은 고개를 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가 공항까지 당신을 태워다 줬을 때 아주아주 오랫동안 그를 꽉 끌어안았다가 놓아 주었다.
-숨통. 168-169p



우리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네

그렇다면 이 '다르다'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극복할 수 없고, 극복하려고 뛰어넘기를 시도하다가 되려 그 속에 빠져버릴 만큼 절망적인 '간극'일까? 작가가 만약 여기서 그치고 만다면 이 소설집은 그저 기나긴 '하소연'에 지나지 않는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는 하소연만 하는 작가가 아니다. 그녀의 단편소설집은 사실 하나의 장편 소설 구성과 같다. 결국에는 어떤 '결론'이 나오고야 말기 때문이다. '고집 센 역사가'의 느왐그바는 아프리카 전통 사회 속에서 살다가 남편을 잃는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유럽 문물을 받아들인다. 단순히 그 유럽 문물이 더 위에 있으니 그걸 배워야 한다는 식은 아니다. 그녀는 그의 아들이 '유럽식'을 좇으면서 '유럽'을 상위에 두는 데에 불안감을 느끼고, 그를 혼내기까지 한다. 이마 음무오 의식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아니퀜와에게 그녀는 그가 '그녀의 아들인지 백인의 아들인지'를 물으면서 혼을 낸다. 아니퀜와는 결국 이마 음무오 의식을 치르러 가지만, 그는 계속 '유럽식 사고'만을 주장한다. 그녀의 아내 음그베케에게 강요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아니퀜와에게는 '유럽식 사고'가 그가 태어난 아프리카를 부정할 수 있을 정도로 더 강하고 위압적인 것, '옳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느왐그바는 그런 그를 비웃고 안타까워한다. 아니퀜와는 그와 '유럽'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는 '마이클'로서 살고자 하지만, 진짜 '마이클'로서 살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아니퀜와는 아니퀜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니퀜와의 '설득'은 마을 사람들에게 '강요'로 읽힐 뿐이고 아내는 마을 여자들에게 폭행을 당한다. 오도널 신부만이 그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데,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다른 주체'이고 그 또한 다르다는 것을 알기에 강요하지 않는다. 느왐그바는 이 모든 사태가 짜증난다. 오도널 신부같은 유럽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자랑스런 아들, 아니퀜와 때문에.

아니퀜와는 자기 아내가 또다시 그런 일을 당하면 모든 원로를 감옥에 집어넣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찌만, 오도널 신부는 다음번 신방을 왔을 때 원로들을 방문하여 음그베케의 행동을 사과하고 혹시 기독교도 여자들은 옷을 입은 채로 물을 길으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원로들은 거부했지만-오이의 물을 원하는 자는오이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오도널 신부에게 정중했다. 그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그들의 자식인 아니퀜와처럼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집센 역사가. 277p


하지만 음그베케는 희망을 가진다. 그녀의 손자, 혹은 손녀가 남편 오비에리카의 환생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손자 은남디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손녀 아파메푸나는 오비에리카의 환생으로 태어난다. 아버지인 아니퀜와는 딸이 음그베케의 아프리카에 물들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아파메푸나는 '그레이스'로서 살다가 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던지게 되며, 그녀 스스로 '나이지리아'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한다. 마치 연어처럼 그녀는 그녀가 오래전에 흘러왔을, 기억하지도 못할 '근원'을 향해 뛰어 올라가는 것이다. 음그베케의 희망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그레이스는 교수상을 받을 때, 학회에서 심각한 얼굴을 한 사람들에게 나이지리아 남부의 이조족, 이비비오족 이보족, 에피크 족에 대해 얘기할 때, 후한 보수를 받으면서 국제 기구를 위해 상식적인 내용의 보고서를 쓸 때, 할머니가 자신을 내려다보면서 즐겁게 키득키득 웃는 모습을 상상할 것이다. 그레이스는 상패들과 친구들과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장미 정원에 둘러싸여 살던 말년에 이상하게 뿌리를 잃은 듯한 기분을 느끼고는 라고스 법원으로 가서 법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그레이스에서 아파메푸나로 개명할 것이다.
고집 센 역사가. 282-283p


이는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의, 소설가로서의 '각오'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녀는 '유럽'을 향해 완고히 등을 돌리지 않는다. 그녀는 세계화 앞에 서 있는,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유럽을 받아들여야 함을 아는 현대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녀는 그녀 자신이 '나이지리아'의 핏줄임을 잊지 않는다. '잊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역사가들은 '중립적'인 입장에 서서 역사를 기술해 왔다. 그들에게 그들의 관점을 바꾸게 하기란 사실 하늘에 별따기만큼이나 어렵다. 그들의 관점은 그들 나름대로의 '정체성'이자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느 기점에 서서, 어느 사상과 관념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역사는 달라진다. 그 사람들에게 비난을 퍼부어 봤자 소용 없다. 키케로와 시오노 나나미의 관점이 다른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만약 아니퀜와처럼 그 상하관계에 스스로를 속박하는 순간, '역사가'로서의 자유는 사라진다. 영국인보다 더 영국인다운 아프리카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프리카의 '역사'를, 공적으로 혹은 객관적으로 서술해야만 하는가? 그건 아니다. 사람은 살면서 '변화한다'.


새로운 삶, 그녀에게 새로운 삶을 줬던 것은 우곤나였다. 그녀는 자신이 새로운 신분, 새로운 정체성에 적응해 가는 속도에 깜짝 놀랐었다. "제가 우곤나 엄마예요." 그녀는 유치원에서, 교사들에게, 다른 학부모들에게 그렇게 말하곤 했다. 우문나치에서 있었던 장례식에서 그녀의 친구들과 가족들이 모두 똑같은 무늬의 앙카라 드레스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어느 분이 어머니시죠?"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고개를 들고 잠시 경계하다가 "제가 우곤나 엄마예요." 라고 말했었다.
-미국 대사관. 185-186

연어도 뛰어오르면서 온 몸에 상처가 난다. 그래도 연어는 뛰어오르거나, 죽는다. 연어는 상처입어도 연어지만 뛰어오르기 전과 후의 연어는 서로 다른 연어다. '우곤나 엄마'로서의 정체성은 그녀가 스스로 부과한 그녀의 정체성이며, 그녀는 그것을 자랑스러워 한다. 그래서 우곤나를 잃었을 때 그녀는 순간 자신을 '상실'한 것으로 여긴다. 어떻게든 다른 곳에서 새롭게 그녀의 정체성을 '고정'하기 위해서 미국으로 망명을 가고자 하지만 그러면 그녀가 자랑스러워했던 '우곤나 엄마'로서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만다. 이는 개인의 역사다. 개인의 역사에 대해 '면접관'에게 아무리 설명해 봤자 면접관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도 그녀는 '우곤나 엄마'로서의 정체성을 고집한다. 아다치에, '아파메푸나'는 차라리 '고집 센 역사가'가 되기를, '우곤나 엄마'로 남기를 바란다. 뒤떨어진 것처럼 보여도 굳건하게 뒤를 향해 돌진하면서 온 몸으로 '깨닫고' '변화'에 고개를 돌리지 않는 이가 되기로 마음 먹는다. '숨통'은 결국, 아다치에의 '선언들'이자 그녀의 몸에 새겨진 '현대의 나이지리아 역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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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 펭귄클래식 109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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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조르주 페렉 '사물들'을 읽고-

 

 




 



 





프라다는 프라다를 입는다

 





 단테는 신곡에서 인간이 태어난 이유로 지와 덕을 갖추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세기에 걸쳐 지와 덕을 갈망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지와 덕은 찾아지지 않았다. 지와 덕은 수많은 딜레마와 수많은 모습으로 나타났고 사람들은 불안해졌다. 결국 인간은 지와 덕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지와 덕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지와 덕을 갖추지 못한 예술 작품은 예술이 아닌가? 2차 세계대전, 인간이 지와 덕을 상실하고 야만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을 때, 사람들은 무너졌다. 푸른색 줄무늬 파자마를 입고 머리를 민 사람들에게 정체성이란 팔목에 새겨진 수인번호, 지워버리고 싶기만 한 과거였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얼마나 교활하던가. 몇몇은 잃어버린 서정을 회복 가능한 것으로 치환시켰다. 바로 사물들로.

 광고주들은 사람들에게 전쟁이 끝났으니 사람들은 이제 자유롭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다만 그 전에 전제 조건이 있는데, 바로 광고하는 사물을 사야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풀을 빳빳하게 먹인 하얀 식탁보 위에 은으로 된 식기류들, 그리고 접시에 놓인 고소한 버터와 따끈따끈한 토스트를 보면서 침을 흘렸다. 그리고 이내, 이렇게 따끈따끈하게 토스트를 구울 수 있는 토스터기 광고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지갑을 꺼내들게 되는 것이다. 토스터기를 산다고 해서 식탁보가 깨끗해지는 것도 아니고 은 식기류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토스터기를 삼으로써 안정감을 느낀다.

 ‘안정감만 느끼면 좋으련만,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이전에 있었던 계급제를 소비에 적용시키게 된다. 그리고 그 소비의 계급제로 사람들은 오랫동안 불행해 한다. 졸업하는 여대생에게는 중고가의 명품백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명품도 다양해서 프라다 뿐만 아니라 베르사체, 타임 등 가지가지다. 명품백을 살 형편이 되지 않는다면? 명품백을 사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라면 오히려 양호한 경우다. 명품백을 능히 살 수 있는 사람을 보면서, 나는 왜 저럴 수가 없는지 비하하는 순간

 사태는 더 심각해진다. ‘박탈감 의욕을 불러 일으키는 게 아니라 자괴감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은 그녀들을 두고 된장녀 혹은 속물이라고 말한다. 분수에 맞지 않는 짓을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분수라는 말은 어찌 보면 허망하고, 화가 찔끔 나는 말이다. 무언가 원하는 게 있다 해도 분수에 맞지 않으면 포기해야 한다,놓아야 현명하다. 이 말은 소비의 계급제를 합리화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속물이라고 손가락질하면서 짝퉁 진퉁을 갈라놓는 사람이야말로 속물일지도 모른다. 애당초 누가 먼저 충동질을 했는가?

 

 




 



로코코, 로코코, 로코코!

 





 ‘사물들의 인물들, 제롬과 실비는 소비의 계급제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그들은 익스프레스지를 비판하면서도 그 소비 방식에는 귀를 기울인다. 동시에 자신들이 속물이 되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익스프레스지의 사설을 비난하고, 이내 안심해서 우쭐대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그들 개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영화 타인의 삶에서 주인공은 예술가로서 억압된 사회에 저항하고자 한다. 그의 예술은 그래서 저항과 자유, 리베라를 주장한다. 허나 막상 그 억압이 풀리고 나자 그는 묘한 공허감을 느낀다. 그의 아내는 억압된 사회 때문에 죽었고 그의 예술은 억압된 사회에 의해 억압되었다. 이 사실들은 억압된 사회에서 현재의 저항으로써 의미를 가진다.하지만 억압이 풀린 지금은, 다 지나간 과거일 뿐이다. 당시 간부였던 사람이 그에게 묻는다. 이제 행복한가? 주인공이 추구했던 자유가 손에 쥐여졌다. 하지만 그는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자유를 막상 손에 쥐었지만 눈 앞에 보이는 건 혼란 뿐이었다.

제롬과 실비가 처해 있는 상황 또한 비슷하다. 그들은 골리즘의 도래를 알리는 모임과 거리 시위에 나서는 등 그 당시 사회의 유행하는 상에 자신의 정체성을 고착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한계를 느끼고 만다.

 





그들은 군중 틈에서 춥고 비도 내리는데, 바스티유, 나시옹, 오텔 드 빌 같은 음울한 거리에서 자신들이 도대체 뭘 하는 것인지 자문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이 중요하고, 필요하며, 둘도 없이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증명할 만한 무엇인가를 원했다. 두려움에 찬 노력이 의미 있고, 자신들이 필요로 하던 그 무엇이기를, 자기 자신을 알게 해주며, 변화를 가져다주고 살게끔 해주는 무엇이기를 원했다. 하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진짜 삶은 다른 곳에 있었다. 멀지 않은 장래에 온갖 위험, 알아채기 어려운 덫, 주문에 싸인 계략과 같이 훨씬 미묘하고 은밀한 형태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조르주 페렉 '사물들' 75p-

 





 그들은 자유를 획득하고자 했다. 가장 쉬워보이는 방법은 아마도 그 당시 일어나던 시위였을 것이다. 허나 그들이 원하는 건 그 시위로 얻는 자유가 아니었다. 시위의 취지가 좋다 해도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한 시위는 자유가 아니라 억압이 된다. 결국 그들은 그저 몽상의 자유만을 즐길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이름 모를 사촌이 억대의 유산을 자신에게 물려주거나, 복권에 당첨되거나. 그 몽상만은 무해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안정된 생활을 깨뜨리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로코코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시대였다. 허나 로코코가 성행하는 만큼 서민들은 궁핍해졌고 비참해졌다. 왕족들은 가짜 목장에서 양털을 깎고 우유를 짜면서 서민 놀이를 즐겼다. 그들에게 서민들의 생활이란 재미있는 것, 그 자체였다. 하지만 혁명이 일어나면서 이 환상은 깨진다. 프랑스의 환상은 이렇게 깨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환상에 사로잡혔다. 단지 무해해 보인다라는 이유로. 하지만 그 무해함이 그들을 '유해'하게 만들었다.

 실비와 제롬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스스로가 자유롭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쇼윈도우와 진열창이 보여주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녹슨 그릇은 진열창에서 무엇보다도 세련된 재떨이가 되고,그 재떨이만 있다면 영국의 젠틀맨이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들이 시골의 풍요로움을 보면서 감탄하지만, 끝끝내 귀농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시골의 풍요로움은 눈에 보이는 노동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는 오로지 방문자 자격으로만 몽상할 수 있다.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도시에서 떠나는 순간, 그들의 환영의 공급은 중단되리라는 것을.

 





 




 



(Kick)의 필요성

 





 슬라보예 지젝은 현대인의 우울증에 대해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우울해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를 상실했고,  상실은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에게는 애당초 그 상실된 물건조차도 없었다고. 그들은없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가장 쉬운 방법을 쓰는 것이다. 바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 ‘없다 상실로 바꾸는 건 간단하다. 결국 둘 다 지금은 없는 것이니까. 하지만 상실 없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 그것만큼은 힘들고 고통스럽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셉션에서 주인공 코브는 없는 아내를 꿈 속에 등장시킨다. 그의 동료는 그에게 그런 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현실에는 분명 없는 아내가 꿈 속에서는 상실된 아내로 바뀌기 때문이다. ‘코브는 결국 위기에 처한다. ‘상실은 인간을 파멸로 몰아간다. '상실'에 사로잡힌 순간, 있던 것까지도 '없어진다'. 코브는 '상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의 아이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간절하게 '킥(Kick)'을 원한다.

 실비와 제롬 또한 그들에게 분명 없는 것을 당연히 있어야 할 상실로 바꾼다. 이 때문에 그들은 불행하다.튀니지로 가서 해안과 모래사장을 누리려 한다. 하지만 튀니지에 산다는 것은 그런 해안과 모래사장 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소리다. 그들은 스팍스에 살면서 그 없는 것 상실로 바꾸기 위해, 애써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결국 없다는 현실을 깨달을 뿐이었다.

 





스팍스를, 우울한 거리를, 그 무의 상태를 탈출하고 싶었다. 파노라마 같은 전경과 지평선, 폐허에서 무엇인가 깜짝 놀라게 홀릴 만한 것, 이미지를 반전시킬 만한 열기로 가득한 경이로움을 찾고 싶었다. 궁전과 사원, 극장의 잔해, 혹은 뾰족한 봉우리 높이에서 초록 오아시스를 발견할 때나 긴 백사장이 이쪽에서 수평선 저쪽으로 반원을 그리며 펼쳐지는 광경을 만날 때면 그들의 탐험이 보상을 받는 듯했다. 하지만 대개는 스팍스로부터 수십,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똑같이 음울한 거리와 사람들로 들끓는 수수께끼 같은 시장, 똑같은 석호와 추레한 야자수, 다를 바 없는 척박함을 발견할 뿐이었다.

 





120-121p

 





 충분히 깨달을 만큼 깨달았으면 이제 바뀔 때가 되지 않았는가 의문을 품어봤을 것이다. 소설의 끝에서 인물은 변화하기 마련이라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실비와 제롬은 결국 환상의 공급이 활발하게 유통되고 있는 파리로 되돌아간다. 책 앞부분에서 이상적인 집에 대한 묘사, 그 이상에 사로잡혀서. 그들은 환영에 다가가기 위해없다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환상에 가까이 가봤자 결국, 그들이 맛보게 될 식사는 밋밋할 것인데도.

 제롬과 실비가 좇은 건 환영이었고, 그 환영을 추구하기 위한 모든 수단들 또한 어디로도 빠져나가지 못하고환영을 향해 한데 묶인다. 그래서 진실된 것이다. 마지막에 인용된 카를 마르크스의 말은 그래서 더더욱 진실되어 보이고 왠지 비꼬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진리 환영이라고 바꾸면 묘하게도 들어맞는다. 만약 그들에게 '킥'을 권한다면, 그들이 들을까? 하지만 이들이 원하는 진리가 '환상' 그 자체라면, 그 또한 하나의 진리가 아니겠는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문구를 보라. 제롬과 실비에게 '시험'은 바로 스팍스였다. 그들은 '스팍스'에서 '파리'로 돌아오고, 시험에서 '해방'된다. 이런 아이러니한 면 덕분에, 이들은 아마도 행복해질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을 것이다. 그게 과연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수단은 결과와 마찬가지로 진리의 일부이다. 진리의 추구는 그 자체로 진실해야 한다. 진실한 추구란 각 단계가 결과로 수렴된 수단의 진실성을 의미한다.

                                                                                        -카를 마르크스

 





수단은 결과와 마찬가지로 환영의 일부이다. 환영의 추구는 그 자체로 환영적이여야 한다. 환영적 추구란 각 단계가 결과로 수렴된 수단의 환영성을 의미한다.

                                                                                      -???

 

 

 

 

 

 

*그 행복하지 않은 원인을 보이지 않는 손에 돌리는 것도 불합리한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 충동질을 한 쪽이 누구였던가? 불쌍한 구조들, 탄생만으로도 죄를 짊어졌고 행복하지 않은 이들은 면죄부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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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09-12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브지님은 여자분이세요? 초면에 이런 거 물으면 실례인가요?^^;

리뷰쓰신 책들이 죄다 관심 책이라서 몇 없지만 들어와서 읽었어요. 반갑습니다.^^

이브지 2011-10-17 10:02   좋아요 0 | URL
네 여자입니다 ㅋㅋㅋ 한참 전에 댓글 달아주셨는데 이제서야 봤네요. 반갑습니다!
 
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 민음사 모던 클래식 49
샤리아르 만다니푸르 지음, 김이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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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탐, 속삭임, 한숨

-샤리아르 만다니푸르의 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를 읽고

 

 

 

코카콜라코프

 

글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맞춤법도 문단 정렬도 아니다. 글을 읽을 때 우리는 쓴 사람의 '생각'을 본다. 물론 문체가 통신어체거나 문단 끝이 들쑥날쑥하면 신경쓰이기는 한다. '생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내용과 형식에 치중한다. 그러나 '검열'은 이 내용과 형식의 표현을 자중한다. 풀밭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양들 사이를 울타리로 갈라 놓는 것이다. 이로써 자신의 사유재산이 다른 양들과 섞이지 않도록 보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나라 고유의 형식을 지키고 이어 나가는 것,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갈라 놓은 양들은 울타리 너머로 '나가려고' 시도한다.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넘는다는 나폴레옹의 말마따나 양들은 울타리가 거기 있기 때문에 나가려고 한다. 울타리 너머의 양들은 어떤가? 뿔은 제멋대로 치솟아 있고 털은 수북하거나 듬성듬성 나 있다. 제각기 모양이 다르다. 검열은 이 울타리 너머 양들을 '불량'으로 취급한다. 그들이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양과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는 양, 이 둘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렇다면 저 양은 양이 아니고, 이 양은 양이 아닌가? 양은 양이 아닌가?

'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에서 화자로 나오는 작가는 검열을 뚫고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출판하고자 한다. 그러나 검열관인 페트로비치는 사사건건 그를 막는다. 페트로비치는 어떻게 해서든 작가의 이야기를 '올바른 방향'으로, 판에 박힌 쪽으로 끌고 나가려고 한다. 작가들이 모두 같은 이야기를 쓸 수는 없다. 고전주의를 따른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는 작가 나름대로의 시선과 해학이 묻어난다. 하지만 페트로비치는 특정 ''에 그 내용을 맞추어 넣을 것을 명한다. 그리고 그 병에 이야기를 넣은 순간, 병마개로 막아 버린다.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지니가 병 속에 갇히듯 이야기는 갇혀 버린다. 사라가 대학에서 배우는 천년 전의 시들은 다 '정확한 의도'대로 '풀이'가 되어 있고, 사라는 그걸 외워야만 한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는 우리가 국어 시간에 배운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해설을 읽고 글의 의도를 외우는 것. 어떤 작가는 자신의 글이 수능 언어영역에 출제된 것을 보고서 신기한 마음에 풀어 보았다가 다 틀리는 영광을 맞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작가가 틀린 것인가, 아니면 시험 문제를 낸 사람이 틀린 것인가? 그 어느 쪽도 틀린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검열'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천년 동안 병마개에 막혀 보존되어 있다면, 와인처럼 숙성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그게 코카콜라라면? 미국 제국주의의 상징, 드럭스토어에서 약으로 팔다가 지금은 수많은 충치를 생산해 내는 해악으로 손꼽히는 코카콜라라면 어떨까?

사라와 다라는 와인이 아니다. 둘은 코카콜라에 가깝다. 그들은 배워서는 안 되는 것, 현대적 산물인 '사랑'을 배운다. '사랑'은 기존 이란 전통에서는 그냥 '존재'하는 것일 뿐, 그 존재를 입증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외국의 문물들로 '사랑'을 배우고, 늙어빠진 검열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기회를 노린다. 사라의 약혼자 '신바드'는 기존 이란 전통에 입각한 인물이다. 다라는 그 반대축에 서 있는 인물이다. 사라와 다라의 사랑은 '전통'에 얽매이는 순간, 굳어버린다. 다라는 사라와의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약혼자의 존재를 밝히는 사라도, 그 약혼자도 쉬이 용서할 수가 없다. 다라는 '신바드'를 죽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이는 사랑 이야기의 흔한 '비극적 요소'. 하지만 신바드는 다라의 존재를 안 순간, 포기한다. 그렇다면 다라는 행복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역시, '전통과 관습'이라는 검열에 의해 가로막힌다. 이들의 사랑은 이들의 사랑을 위한 병에 담겨야 한다. 막걸리는 단단한 자기 병에, 소주병은 초록색 유리병에, 맥주는 짙은색 유리병에 담아야 한다. 코카콜라는 알루미늄 캔에 담아야 하고. 각자 어울리는 용기가 따로 있다.

 

 

도덕성 저해 분야 전문가가 말한다.

"선생님, 영화를 더빙하는 과정에서 저들을 오래전에 생이별을 했다가 지금에야 다시 만난 남매로 만드는 것은 어떨까요? 그렇다면 저들이 함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영화 분야 전문가가 반대하고 나선다.

"선생님! 그렇지만 인디언 전통 방식으로 둘이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둘은 손을 맞잡고 인디언 천막으로 갑니다. 인디언 여자들은 이란 여자들이 결혼식에서 그러는 것처럼 웁니다."

도덕성 저해 분야 전문가가 대답한다.

"그 문제 역시 해결책이 있습니다. 영화를 더빙할 때, 인디언 하나가 이것이 오래전 생이별을 경험하고 이제야 다시 만난 형제자매들을 다시금 형제자매로 맺어주는 인디언 전통 의식이라고 말하게 하는 거지요."

X가 말한다.

"이 장면을 자르시오."

160

 

도덕성 저해 분야 전문가는 말한다.

"미국 감독들은 정신이 나갔습니다. 어떻게 눈도 안 보이는 병신이...."

순간, 그는 자기가 영화 분야 전문가와 똑같은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수습에 나선다.

(생략)

반미 분야 전문가가 말한다.

"중령이 비행기 조종석에 앉아 고층 건물 하나를 들이받았다면 훌륭한 영화가 되었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

243

 

그러나 검열은 이 '용기'들을, 그리고 그 내용물들을 일일히 검사하고 '올바름''그름', 두 쪽으로 나눈다. 그렇다면 코카콜라는 어디에 들어갈 수 있는가? 미국 제국주의의 산물이므로, '늑대와 함께 춤을'이 검열되고 잘려나가 원본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던 것처럼 변해야 한다는 것일까? 하지만 하나만 말해두자. 김 빠진 콜라는 맛이 없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

 

그렇다면 검열이 사라지는 순간, 모든 자유가 풀려나면서 사라와 다라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사실 이조차도 확신할 수가 없다. 검열이 사라진 후에는 있기 전보다 '결혼'이 더 쉬울 것이다. 하지만 과연, 결혼한다고 해서 사라와 다라의 사랑이 영원할까? 고전시 시린과 호스로는 아름답게 이어지고 끝났지만 사라는 응급실에서 '결혼 이후'의 시린을 본다. 남편 호스로에게 큰 상처를 입고 실려온, 신부 시린을. 사라가 '창녀'로서의 삶을 상상해 보는 건 다라와의 사랑을 소중한 그대로 이어나가고 싶어하는 마음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창녀''구매자'의 관계라면, 그들은 서로의 환상을 서로에게 뒤집어 씌운 채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세속적인 것, 집세와 내일 먹을 식량, 배급표, 직장에 신경쓰다 보면, 자칫하면 그들의 '사랑'이 오염되지는 않을까? 다라 또한 사라를 건드리지 못하고 '거리'를 둔다. 영원한 신부, 서정주의 시처럼 신랑이 손도 대지 않고 나가버린 방에 남은 신부는 화자가 손을 대는 순간 가루로 화해 사라진다. 환상 또한 그렇게 건드릴 수 없는, 물적인 것이다. 건드리는 순간 사라진다.

그렇다면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검열'이라는 존재는, 어쩌면 그들의 사랑을 더 아름답고 영원하게 해주는 것인가? 화자는 검열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작가들이 수많은 은유와 돌려 말하기를 사용한다고 말했다. 한번 걸린 것을 또 걸리게 할 수 없기에, 끊임없이 고심하고 고심한다고 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중동권의 시들의 은유는 그들의 '소심'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과감함, 검열에 맞서고자 하는 저항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검열'이라는 벽이 있기에 사람들은 그 벽을 넘으려고 애쓴다. 그렇다면, ''을 넘는다면 그들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인가?

 

1848년에 독일이 혁명 후 검열을 폐지했을 때 하인리히 하이네는 이렇게 썼다. ", 난 더 이상 쓸 수가 없다. 검열이 없는데 내가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검열과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검열 없이 글을 쓴단 말인가? 그동안의 스타일과 문법, 좋은 습관들이 모두 사라질 것이다!"

-마이클 키엘만, '우연한 걸작' 198

 

영화 '타인의 삶'에서 나오는 작가는 검열 때문에 그의 작품을 상연하지 못하거나 고쳐야 했다. 그래서 그는 저항 세력을 꾸린다. 하지만 막상 검열이 사라지고 나자 그는 미묘한 회의감에 빠진다. 이제 누가 그 '과감함'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하이네 또한 사라지는 검열에 대해 한탄했다. 어쩌면 페트로비치의 말을 반어법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페트로비치는 작가들을 닦달하는 '뮤즈'가 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사라는 다라와 곧 결혼할 사람인 척하고 웨딩드레스를 입으러 가고 다라는 사람들을 피해 전혀 낭만적일 수 없는 장소인 응급실에서 사랑을 표현한다. 가장 낭만적이지 않은 장소가 낭만적인 곳이 될 때, 그 때가 낭만 소설의 빛나는 순간이다. 이 빛나는 순간들로 인해 사라와 다라의 사랑은 점점 더 '숭고'해진다.

이렇게 검열관이 플롯 속으로 끼어드는 일은 허다하다. 일본 연극 '웃음의 대학'에서 검열관은 작가를 탄압하는 역할이었다가 이내 작가와 함께 대본을 쓰고 소통하는 인물이 된다. '뮤즈'가 되는 것이다. 그는 작가의 대본을 읽고 연기를 직접 해주기도 한다. 물론 가끔씩 제국주의적인 면모 때문에 찬물을 끼얹을 때도 있지만, 어찌 되었거나 검열관은 그 작가의 작품을 '인정하고' 그와 '소통'하게 된다. 그렇다면 페트로비치 또한 창조에 한 몫을 하는가? 만다니푸르는 페트로비치의 손을 빌릴 생각이 없었다. 페트로비치는 다라에게 '암살자'를 보내면서 이야기 속으로 끼어들고, 그로 인해 사라와 다라의 사랑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게다가 그는 더 나아가 '소설 속 인물'을 사랑하게 된다. 사라와 다라의 사랑에 '방해자'가 되는 것이다.

 

페트로비치는 말한다.

"제발 사라를 이 오입쟁이의 집에서 나오게 해 주십시오. 그녀를 집으로 보내요! 나 자신은 신바드를 중국에 보내 연필을 사 오게 할 겁니다."

"하지만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내 이야기의 플롯은 어떻게 하고요?"

"그렇다면 나는 당신이, 다라의 손이 그녀를 만지게 두는 것을 금지합니다."

454

 

"나는 이 이야기가 결국 훌륭하고 교훈적인 이야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창조성을 발휘해서 사라가 이 혐오스러운 다라와 끝내도록 하십시오."

458

 

'방해자'로 인해 또 사라와 다라의 사랑은 아름답게 빛날 것인가? 아니면 그 때문에 사라와 다라의 사랑은 '엉망'으로 끝날까? 작가는 사라와 다라의 사랑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검열''방해자'의 소재로, 그리고 미묘한 면에서 '보호자'의 소재로 쓰인다. 작가가 사라와 다라의 사랑을 위해 열심히 애쓰지만 만능 점쟁이의 말마따나 '주문'이라는 비현실적인 매체가 있지 않는 이상, 픽션에는 픽션으로 맞서지 않는 이상 가망이란 없다. 무엇보다도, 외부적 검열보다도 더 큰 방해물이 있으므로.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 쉽게 퇴치할 수 없는그들의 내부에.

 

 

 

국경에 서서

 

이 소설이 매력적인 점은 바로 '검열'이라는 소재를 '깊게' 다루었다는 점이다. 검열을 다루었다는 건 검열에 통과될 만한 올바른 텍스트나 검열에 통과하지 못하고 끝내는 사형 선고까지 불러일으킬 과감한 내용을 말하는 게 아니다. '검열'은 곧 검열을 하는 과정과 그 검열되는 텍스트를 동시에 다 다뤄야 재현할 수 있다. 잘려나가는 텍스트들과 그에 따른 갈등, 시련, 분쟁.

검열이란 것이 무엇인가? 소설 속에 씌여진 일을 마치 '실제로 일어난 일'처럼 보고 심각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닌가? 소설을 그저 픽션으로 봐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 전통에 위배된다는 시선으로 보게 된다면 소설이야말로 '추방'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어떻게든 자신의 소설을 출판하고자 한다. 그래서 페트로비치에게 찾아가고, 그의 말을 듣고 그에게 맞서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그렇게 소설을 '쓰는 과정'을 씀으로서, 작가는 자연스레 '검열'의 존재를 드러낸다. 금지된 것을 금지되지 않게 쓰기 위해서, 금지된 것 또한 살아 있다는 것을 역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사라가 '창녀'가 된 자신을 상상하는 이탈 욕구는 '검열'에 걸려 사라진다. 하지만 이미 쓰여졌다. 줄이 그어진 문장들은 이미 '쓰여져 있다!' 그리고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을 일들도 '실제 일어난 것처럼 다루는 검열' 때문에, 망령처럼 소설 속 플롯을 떠돈다. 죽은 게 분명한 시인이 자연스럽게 페트로비치에게 말을 붙이고 점쟁이는 소설 안과 밖을 넘나들며 서술한다. 이란의 '검열'을 피해서, 합법과 위법의 위태로운 경계선을 걷는 것이다. 자칫하면 한 쪽으로 넘어질 수 있는. 페트로비치는 그 '검열' 안으로 들어오라고 청한다. 사라에게 바람직한 사랑을 이루게 해주고 싶어하며, 다라라는 '해악'을 경계하고자 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 반대로 다라의 사랑을 이뤄주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들의 알력 다툼만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검열은 사라와 다라의 안에도 있다.

 

"내가 만지게 두어도, 이 다라라는 인물은 너무 서툴고 혼란스러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제 분명 자기가 어떤 집에 터키옥 색으로 페인트칠을해 준 얘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려 할 겁니다."

455

 

그때, 마치 갑자기 무엇이 생각난 듯이, 그녀의 눈이 커진다. 그녀는 얼어붙는다.

"무슨 일입니까, 사라? 무슨 일이예요?"

"내가 마당으로 걸어 들어왔을 때 첫번째 본 것이 재스민 덤불이었어요......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것이 나를 무섭게 했어요. 이제는 마치 무서운 눈 한 쌍이 덤불 속에서 나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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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는 다라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약혼자'라는 존재를 어쩔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여긴다. 다라는 그런 사라를 갑갑해하고 이해할 수 없다고 하지만 다라 또한 '검열'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이웃이 자신과 사라의 사랑을 엿볼까봐 겁이 나서 계속 망을 본다. '위험'을 무릅쓴다기 보다는 그들 안의 '검열'의 눈을 피하기 위해. 하지만 막상 사라와 다라의 사랑이 이뤄질 수 있는 순간, 둘이서만 한 방에 있는 순간마저도 다라는 망설인다. 그의 안에 있는 '검열'의 관념이 그들을 뜯어 말리기 때문이다. 그건 옳지 않다, 옳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는 강박에 가깝다. 사라가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덤불 속에서 누군가의 '시선'을 보았다고 여기는 것, 이 시선은 진짜 다라의 이웃이 훔쳐보는 것일 수도 있고 페트로비치의 '참견'일 수도 있다. 혹은, 그들 안에 있는 검열의 눈일지도 모른다. 그들 자신밖에 느낄 수 없는. 이들은 '곱사등 난쟁이의 시신'을 피해 집안으로 도망칠 수 있다. 하지만 그 뿐이다. 그들 안에 있는 검열이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검열'된 사랑들에 대하여, 검열된 사람들에 대해 그 '관습'이 옳지 않고 버려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처벌'받을 때, 억울함을 느끼면서도 이내 수긍하고 받아들인다. 그들 무의식에 있는 '검열'의 뿌리 때문이다. 그 뿌리는 그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을 친친 감아매고, 그들의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사라와 다라가 현대 소설을 보고 영화를 봐도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그들을 옭아 매었던 '검열'은 그들을 '구세대'로 묶어둔다. 이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사실 페트로비치가 예상한 쪽에 가까워진다. 작가는 애쓴다. 그의 텍스트가, 그의 의도대로 갈 수 있도록. 허나 검열에 사로잡힌 텍스트는 작가의 의도대로 이뤄지지 못한다. 이것이야 말로 사랑 이야기의 비극이다. 아서왕 이야기에서 기사와 왕비는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죽음밖에 선택할 수가 없다. 작가가 이 '검열'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었던 것도 '검열'을 피한 외국에서 글을 썼기 때문에 가능했다.

현재 한국에서도 '검열'이 되살아나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는 사람'의 이름을 언급한 사람들이 법정으로 줄줄 끌려가고 있고, 사람들은 그들이 의도했던 대로 입을 다문다. 암호명조차도 쓸 수가 없다. 인터넷은 '한 꺼풀'만 들추면 다 드러난다. 원래는 드러날 수 없는 체계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인터넷의 운영을 누가 잡고 있는가? 권력과 자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수많은 '은유'를 쓴다. 특정 동물로, 혹은 대중적인 작품들로. 그래도 우리 내부에 검열을 들이진 말자. 그 검열로 인해 또다른 '비극'을 생산해 내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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