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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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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쓴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은 현재 일본의 젊은이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일컫는 '사토리 세대'를 대상으로 삼는다. 불황에 의해 구직의 문은 좁아지고, 부의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희망 대신 어떻게 해봐도 될 리가 없다는 절망에 익숙해진 이들은 끝에 몰려 저항하고 폭발하기 이전에 불씨를 꺼버린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기성 사회를 비판하거나 의욕이 없는 젊은이들을 비난하는 등, 욕할 대상은 많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담담하다. 그들은 포기의 끝에서 새로운 삶을 찾는다. 이러한 삶의 윤리성에 대해 과연 옳다고 볼 수 있는가, 아니면 이러한 인식을 낙관이라고 끝내 저버릴 수 있을 것인가?

 

 

 

  미즈시마 히로코의 '여자의 인간관계'는 알기 어려운 여자언어에 대해 풀이하거나 여자들은~이렇다 라고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여자들의 일정한 무리짓기 현상을 분석하고 그 현상의 귀결을 '여자들의 특성'이라고 말하는 대신, 그들이 그렇게 될수밖에 없었던 사고 작동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어떤 변명이 아니다. <뒤틀린 여자>를 만들어낸 건 그 여자의 특성 때문이 아니라, 사회와 관습의 강요가 남긴 상처인 것이다.

 

 

 

 

 

 플로렌스 윌리엄스의 '가슴 이야기'는 언뜻 보면 남성들에게는 읽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실제로 이 책은 가슴을 가진 여성들 뿐 아니라 남성들도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딸의 딸들을 위해, 그리고 여성이 가진 신체에 대해 스스로 기피하는 대신 자신의 일부로 여길 수 있게끔.

 

 

 

 

 

 

 

 

 최광현이 지은 '가족의 발견'은 가족이 남긴 상처야말로 원초적이고 치유가 힘든 것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한다. 서로 다른 인간 군상들이 한 공간을 공유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설령 평등에 기반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물을지라도 실제로는 상위관계에 의해 철저하게 짜여진 '가족 사회'다. 현대 사회의 특성상 마지막 피난처는 가족이지만, 억압 또한 가족에서 나오므로 이러한 악몽의 순환은 번복된다.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가 지은 '달의 이면'은 레비 스트로스가 유독 아끼고 사랑했던 일본 문화에 대해 쓴 글들을 모았다. 일본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마냥 취하는 것보다는 일본에 대해 탐구해 보는 것이야말로, 이 적대관계를 깨트릴 수 있는 대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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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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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란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다. ㄴ이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면서 그를 평온하고 흥분시켰던 음악의 세계에 끼어들기 위해 애썼던 것도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다. ㄷ이 사금파리 밥을 먹으며 죽어갔던 여자애가 되면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착같이 애썼던 것도 하나의 몸짓이다. ㄱ이 물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물고기가 되고 싶어서,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안정된 삶을 꾸미려고 했던 것도 하나의 몸짓이다. 서글프게도 하나의 몸짓들에 불과하고, 그 몸짓은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ㄴ은 베이스 기타를 부수고, ㄷ은 끊임없이 도망친다. ㄱ은 자신이 생각했던 물이 어항에 불과했다는 걸, 결국에는 누군가의 시선 아래에서 끊임없이 헤엄치고 파닥거리면서 스스로를 기만해야만 한다는 걸 깨닫는다.

 

ㄱ, ㄴ, ㄷ 세 명은 어떠한 고유명사도 갖지 못하고, 그저 추상적인 기호로만 남는다. 그들은 실패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삶에 있어서 어떠한 빛나는 순간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누군가의 탓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서글프고 초라하다. 거기가 자신의 자리라고 오해했고, 껴줄 것이라고 섣부른 희망을 품었다. 그들이 품은 희망이 간절했던 만큼 절망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었고, 바닥으로 내팽개쳐지는 건 처절하리만치 참혹했다.

 

어쩌면 그래서 그 ‘풍경’이 가능했던 게 아닐까. 무언가 하나만 부각시킨다면 그림은 인물화나 다른 주제를 담은 그림이 되기 쉽다. 그림을 칭할 때, 가장 부담을 덜 느끼고 그 앞에서 편히 느낄 수 있는 그림이 있다면 바로 풍경화일 것이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자신이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름답거나 슬프다고 최소한의 감정적 판단만 내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절망한 자들이고, 그래서 그들은 ‘셋’이서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ㄷ이 둘을 보며 ‘치사하다’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서로를 받아들인다. 그 ‘치사함’을 느껴본 이들이기 때문에.

 

하지만 풍경화란 아주 짤막한 한순간을 담는다. 모네의 그림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인 그는 빛이 풀잎 위에서 빛나는 순간을,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모든 것들의 소리를 화폭에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전의 풍경화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풍경을 그리려고 애썼고, 그 풍경은 사실 ‘인위적인 몸짓’에 불과했다. 누구도 풍경을 온전하게 잡아 놓을 수 없다. 셋은 서로가 이루는 풍경에 안주하고 싶었지만, 그 풍경이 지속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믿지 못했다. 그들이 본래 의심이 많다기보다는, 그들이 풍경에 느꼈던 행복이 너무나도 절실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 행복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서 더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셋은 둘이 자신을 따돌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동시에 어느 한 명이 빠져나가 이 풍경이 깨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급급해 했다.

 

그래서 ㄱ은 ㄷ이 ㄴ을 밀어 넣을 때,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척했다. 우물이 완성되는 순간 ㄴ이 떠난다면, 그들의 풍경은 깨져버린다. 그녀는 우물을 파서 그 끝을 보려고 했던 ㄴ을 내심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ㄴ은 어떻게 하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죽은 화자로 과거를 끊임없이 회상하며 바라보는 존재일 뿐이다. 세 명 다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들이 이루었던 ‘소소한 풍경’을 되새기면서, 그 힘으로 현재를 살아간다. 그들은 과거 속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실에서는 ‘살인의 풍경’일지도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그 ‘소소’가, ‘사랑의 풍경’이다. 사랑을 증명하는, 끝내 그 누구도 포기할 수 없어 ‘밀어버려야 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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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알사냥꾼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염정용.장수미 옮김 / 단숨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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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리 소설의 미덕은 바로, 어떤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거꾸로 매달려 죽은 소녀, 양 눈이 파여진 남자, 회색으로 단단하게 굳어버린 소년의 시체. 일상에서 스스럼없이 마주치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죽어가는 모습이 눈앞에서 펼쳐진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분명 미쳐버릴 것이다. 하지만 추리 소설에서는 그런 장면들을 그리고 있고, 그 장면들은 영화화된다. 왜 그런 장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영화가 되고 텍스트가 되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일까. 모든 사람들이 다 살인마의 기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까. 풀 수 없는 원한을 품고 있기 때문일까? 굳이 사람들 속에서 지옥을 보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지옥은 언제나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사람들이 추리 소설을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조마조마하고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져도 결국에는 모두 다 수습되기 때문일 것이다. 셜록 홈즈와 존 왓슨은 늘 그렇듯이 자신들의 거실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몇 마디 말로 사건을 마무리할 것이다. 미스 마플은 뜨개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매그레 경감은 친절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내에게로 돌아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것이다. 모두들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몰타의 매’와 레이먼드 챈들러의 추리소설들은 점점 그 방향을 바꾼다. 이제 사건에 휘말린 탐정은 무사히 그 곳을 빠져나와 따뜻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정신없이 뒤섞이고, 탐정은 그 손놀림들을 주시하면서 어떻게든 ‘조커’ 카드를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의 카드들은 다 조커가 될 수 있다. 그들은 범인에게도 피해자에게도 공감하지 못한 채, 마치 버려진 선물 포장지처럼 나뒹굴게 된다. 그들의 삶도 비참해진다.


  ‘눈알 사냥꾼’의 초르바흐와 알리나는 행복해지지 못한다. 그가 바라던 이 추리 소설의 마지막은 율리안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씩씩하게 자라는 것이고 알리나는 초르바흐의 아기를 갖는 것이었다. 하지만 율리안은 프랑크를 죽인 아버지에 대해 불신의 눈빛을 보내고 알리나는 더 이상 임신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뒤, 눈을 뜨게 해줄 방법을 찾아 돌아다닌다.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소설이 충격적이지만 충격적이지 않은 이유는 결국 그 끔찍한 ‘사건’에서 나온 우리가, 과연 초르바흐의 상상대로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변화하리라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힘든 일을 통과하면, 낙원이 기다리고 있는가. 현재에 와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힘든 일을 하루하루마다 넘기고 있는데, 하루가 끝날 때쯤에 마주하는 건 전철 차창으로 비치는 삼십년쯤 더 늙어 보이는 나다. 외면하고 싶은 마음에 모두들 스마트폰 화면을 보고, 책을 읽는다. 레오나르트 슐리어가 자신의 딸이 죽은 그 때, ‘이리스’를 알아보기 위해 초르바흐와 계획을 짜다가 ‘비가 올까’라고 걱정하는 행동은 어떤 충격적인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다. 그것만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책이다.


  가장 초라하고도 연약한 방패, 우리가 지긋지긋해하던 일상이 도리어 사건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동전처럼 아주 사소하고 가벼운 일상은, 잃어버리는 순간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그걸 도로 찾아오기 위해 두리번거린다. 그 순간 일상은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 되어버린다. 이전의 ‘일상’이. 그렇다면 그 일상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 율리안이 고른 쥐 미스터 존스처럼, 초라하지만 어떤 보이지 않는 얇은 ‘끈’을 찾는 것이다. 율리안은 이전처럼 ‘고맙다’고 말하고,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는 걸 기억해 낸다. 초르바흐는 ‘믿는 것’이 자신의 약점이라는 듯이 말하지만, 동시에 그건 장점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추리소설들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이제는 따뜻하게 불이 켜진 난롯가도 없고, 자신을 기다리는 따뜻한 식탁도 없는데? 아주 희망적으로 해석해 보자면, 이 파국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매일매일 잃어가는 그 ‘소중한 것’에 대해, 끊임없이 요청하면서 인간은 살아남는다. 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현재의 추리소설들, 피체크의 소설이 주려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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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CAR MINI 마이 카, 미니 - 나를 보여 주는 워너비카의 모든 것
최진석 지음 / 이지북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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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러운 말이지만, 만약 이 사실을 밝히지 않고 넘긴다면 이 리뷰는 온통 거짓말투성이가 될 것이다. 나는 면허가 없다. 폭스바겐도 몰랐고 BMW라는 차종도 몰랐다. BMW에 미니라는 시리즈가 속해 있는 것도 몰랐다. 하지만 딱 하나, 어디선가 많이 본 차였다. 크지도 않고 뉴비틀처럼 앙증맞게 생긴 것도 아닌데, 유명 인사들이 많이 타고 다니는 차였다.


  때문에 책을 받았을 때 많이 걱정했다. 혹시나 내가 모르는, 차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들만 나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물론 나왔다. 엔진에 관해 비교해 놓은 표라거나 몇 기통, 혹은 조작법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들이. 하지만 그냥 넘기지 않았다. 단지 리뷰를 써야 한다는 의무에서가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읽혔기 때문이다. 그 전부터 미니의 종류들과 일화에 대해 말해주고, 엔진에 대해서도 마치 아이에게 알려주듯이 차근차근 말해주었다.

 

 어쩌면 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들로서는 이 리뷰를 읽으면 책이 전문적인 드라이버용은 아니라고 오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판단을 내리기에는 이르다.


 자본주의 시대와 천편일률의 소비 패턴 속에서도, 유일하게 살아남는 것이 있다. 취향이다. 개성이다. 개성과 취향의 차이는 무엇일까. 개성은 어떻게든 사이에서 튀어 자신의 개별성을 인정받으려는 것이고, 취향은 타인과의 비교를 신경쓰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만의 ‘호’가 기준이 된다.


 타인과의 비교를 필요로 하는 순간, 우리는 타인에게 종속되어 버린다. 자신의 개성과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나빠진다. 자신만이 유일하다고 주장하면서, 끊임없이 타인을 곁눈질하는 것이다. 하지만 취향은 다르다. 타인이 자신과 같은 ‘호’를 지니고 있다면, 그건 반가운 일일 수도 있다. 불쾌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나와 타인을 구별하는 것, 그것은 개성이 아니라 ‘취향’이다.


 ‘미니’라는 차종도 그러한 ‘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BMW 시리즈 중에서는 저렴한 축에 속한다고 하고, 살짝 긁히기만 해도 ‘목숨’ 달린 일이라고 말하는 고급 차들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영국인들마저도 미니에 매혹된다. 왜일까. 그들은 개성과 취향의 차이를 알고 있다. 미니가 롤스로이스 부스 반대편에서도 당당하게 프로모션을 펼칠 수 있는 건 그런 자신감 덕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니를 타는 사람들은 ‘즐겁다’.

 


미니 부스의 풍경은 롤스로이스 부스의 엄숙하고 차분한 분위기와는 180도 달랐습니다. 미니의 목적은 미니 브랜드를 접하는 사람들이 세계 최고의 명차 앞에서도 전혀 주눅들지 않고 즐길 수 있도록 흥겨운 분위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미니는 신차를 소개하며 신기술을 홍보하거나 이 차가 가격 대비 성능과 만족도가 우수하다는 걸 굳이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저 미니와 함께 하면 ‘즐겁다’는 걸 직접 느끼도록 할 뿐이죠. 평범한 자동차 브랜드라면 섣불리 시도하지 못할 마케팅 전략이자 미니만의 철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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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미니는 어디에서도 어울린다. 롤스로이스가 물에 빠지고, 벽을 뚫고 나온다면 어떨까? 미니는 어떤 ‘지위’를 신경쓰지 않는다. 그래서 어디로든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존 쿠퍼와 몬테카를로 랠리에서 활약한 미니, 미니스커트와 어울리는 미니, 오픈카 미니, 영국 왕실의 미니. 경주에서부터 패션, 정치까지 다 오르내릴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재미난 점은, 미니가 등장하는 영화들을 꼽아 놓았다는 것이다. ‘이탈리안 잡’은 예전에 봤던 영화였다. 미니가 나오는 장면을 보니 생생히 기억이 난다. 지하철 역 계단을 오르내리는 미니들. 왠지 커다란 트럭이 나와야 할 것 같은 장면에 조그맣고 통통한 자동차가 나오다니. 좀 우스꽝스럽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만약 내가 언젠가는 면허를 따고, 자동차를 마련하게 된다면. 미니를 사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해 본다. 그렇게 된다면 과연 무슨 색으로 미니를 물들이게 될까. 짐작컨대, 일단 바탕은 코발트블루일 것이다. 김칫국도 너무 일찍이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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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5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석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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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지 않기에 씁쓸하고도 아름다운 고독의 하모니에 반박하는

포기했기에 씁쓸하고도 아름다운 제3의 하모니

 

그리고,

허들링Huddling

-가즈오 이시구로의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위안은 프롤로그지만, 위로는 에필로그다. 위안은 받는 순간 미소 짓게 되는, 예상치 못했던 작은 선물이지만 위로는 받는 순간 벅찬 기대를 하게 하면서 여는 순간 한숨을 부르는, 커다란 만큼 그 실망도 큰 선물이다. 두 단어는 비슷한 것 같지만, 그 무게나 사용에 있어서 상당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개나 고양이 같은, 인간과 직접적인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동물이나 사물들은 위안을 줄 수 있지만 위로는 주지 못한다. 오로지 인간만이 인간에게 위로해 줄 수 있다. 사람들은 은연 중에 위로를 통해 모든 걱정들이 해결되기를 바란다. 어떠한 난관을 타개할 수 있는 해결책을, 들으면 모든 시름이 사라지는 위로를 듣길 바란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위로를 자신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겨지는 이들에게 듣길 원한다. 예를 들자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신에게 '방법'을 구하는 걸 들 수 있겠다. 허나 근대, 모던 타임즈는 신을 연극 무대의 기계장치로 폄하하면서 그 지위를 격하한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덫에 걸려들게 된다. 이제, 누구에게 위로를 구한단 말인가?

'멘토 열풍'은 이 '위로를 구하는 이들'의 일면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유명하거나 능력이 있는, 성공한 이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나아가야 할 지 충고를 듣고자 한다. 단순한 위안이라면 굳이 멘토를 구하지 않더라도 주변에 있는 타인들, 부모들에게서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처한 덫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정답을 알기 위해 사람들은 안철수, 박경철 등 경제적-사회적 우위에 있는 멘토들을 원한다. 수많은 멘티들이 그런 멘토를 원하고, 결국 멘토들은 많은 멘티들에게 최대한 그들을 다 포괄할 수 있을 만한 답변을 내놓게 된다. 나쁘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멘토로서 애쓰고 있는 것이다. 다만 멘티들은 이에 부족함을 느낀다. 결국 더 많은 멘토, 더 많은 위로를 원하게 된다. 허나 어떤 위로도 '충분'해질 수 없다. 의무교육에서 오지선답의 삶에 익숙해진 그들에게, 모든 답을 다 불러 봤으나 결국 정답이 없다는 말은 원망과 좌절을 불러온다. 모 대통령은 수해민에게 '마음을 편하게 먹어요. 기왕에 (수해가) 된 거니까."라고 말한다. 허나 수해민은 그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편안하게 먹을 수 있어야죠." 섣부른 위로는 선이 아닌 악이 되며, 이보다 해가 된다.

그렇다면 온전한 위로는 과연 가능할까?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들은 인물의 상처와 그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탐구한다. 음악은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소명제에서 예술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대명제까지, 그 방법은 자못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결말에서는 '실패'하게 된다. '나를 보내지 마'에서 소녀는 '네버 렛 미 고Never let me go'라는 노래를 부르며 사랑을 꿈꾸지만 그들을 장기로만 보는 사람의 귀에는 좀 더 발달된 과학이 죽음을 붙잡기 위한 노래로 들릴 뿐이다. 음악을 테마로 다룬 단편집 '녹턴'에서 조용하고 잔잔하게 되풀이되는 내용 또한 끝없는 실패를 그리고 있다. 그 실패는 너무 당연하고 허무해서, 몇몇 사람들은 이 단편집에 대해 '정적'이라고 평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이번 작품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로, 그 끝은 실패다. 허나 그 실패는 아름답다. 실패와 실패의 아름다움 앞에서 사람들은 작품의 성공과 실패 여부를 가린다. 실패 아닌 실패인가, 아니면 실패인 실패인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세 가지의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나란히 놓여 있지 않고, 독자가 본다는 전제 하에서-독자와 소통하면서 나온다. 어떤 하나에 대답하는 순간 그 부분에 대해 지적하는 듯한 또다른 질문이 나오고, 사람들은 어디에서 날아올 지 모르는 테니스공에 과민해진다. 실제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힘겹다고 느꼈고, 주변 사람들에게 괜히 짜증을 내기도 했다. 허나 테니스공을 쳐내지 않는 이상 경기는 끝나지 않는다. 그 테니스공은 바로 가즈오 이시구로가 우리에게 묻고자 하는 질문이며, 동시에 모던 키즈에서 모던 피플로 자라난 현대인들이 빠진-자기 자신의-덫이다.

 

 

괜찮아질 거야/힘내/넌 할 수 있어/난 널 믿어/넌 정말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내년에는 좋아질 거예요/정신 차려-이와 같은 흔한 위로들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인 라이더가 도착한 한 마을의 사람들은 라이더가 오기 전부터 그를 필요로 한다. 아주 소소한 시민단체와 만나는 일에서부터 백작부인의 집에 가서 레코드를 듣는 일, 그리고 지극히 사적인 일까지. 그들은 예술을 사랑하기 때문에 라이더 또한 사랑한다고 말한다. 허나 그들이 예술을 사랑하든 말든, 그들의 마을은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사실은 그들에게 상처가 된다. 어떤 훌륭한 예술가가 이 예술을 사랑하는 마을에 와서 꽃을 피우고, 또 이 마을에 그의 이름을 붙여 주지 않을까.

페더젠 의원과 호프만은 그런 염원을 품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한 바이올린 연주자에 불과한 크리스토프를 추켜세웠다. 허나 크리스토프가 마을에서 인정받는 바이올린 선생 리프리히를 '인정'하지 않는 순간, 크리스토프에 대한 그들의 평가는 손바닥 뒤집듯이 간단하게 바뀌고 만다.

 

"아아, 그렇군요. 리프리히 씨의 불행한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었지요. 리프리히 씨는 크리스토프 씨가 오기 전에 오랫동안 우리 도시에서 가장 존경받는 바이올린 선생이었답니다. 이 도시의 명문 자제들을 가르쳤고, 높은 평가를 받았지요. 그런데 크리스토프 씨는 첫번째 연주회를 마친 지 얼마 되기도 전에 누군가가 리프리히 씨에 대한 의견을 묻자, 리프리히 씨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답니다. 리프리히 씨의 연주도 그렇고 가르치는 방법도 마음에 안 든다고 말입니다. 리프리히 씨는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사실상 모든 걸 잃어버린 상태였지요. 제자, 친구, 사회적 지위...... 리프리히 씨 경우는 지금 내 머리에 떠오른 한 가지 사례일 뿐입니다. 우리가 크리스토프 씨를 처음부터 잘못 파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짐작하실 수 있겠지요?(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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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프라는 우상은 그들에 의해 철거되고 만다. 과거와 현재가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이 신의 존재를 스스로 부정하면서 손쉽게 ''을 바꿔치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마을의 도서관에서 무시받기 일쑤였던 늙은이 브로즈키를 그 다음 타겟으로 삼는다. 백작부인이라는 고귀해 보이는 인물의 주도 하에서. 브로즈키의 '예술'을 다시 한번 꽃피우겠답시고 호프만은 호텔의 휴게실을 브로즈키에게 내주며 목요일 밤 행사를 기획하고, 라이더를 초청하기까지 한다. 라이더의 '인정''연주', 목요일 밤 행사가 더 빛나고, 그들의 마을이 '특색'을 되찾을 수 있도록.

이와 같은 '마을 전체의 상처' 뿐만이 아니라 개개인의 상처 또한 라이더를 필요로 한다. 라이더의 옛날 지인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며 라이더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위로를 바란다. 제프리 손더스는 과거 라이더보다 우위에 서 있던 사람이었으나 어떠한 고난으로 인해 지금은 가난하고 외로운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는 자신의 외로움을 호소하고, 라이더가 난관에 부딪쳤을 때 라이더만이 괴로운 게 아니라고 말하며 역설적으로 그 자신의 상처에 대해 자랑한다. 피오나 또한 라이더에게 '우리를 실망시켰다'고 말하며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 사이에서 손상된 자신의 지위를 라이더가 되찾아 달라고 요구한다. 파크허스트는 자신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광대'가 아니며, 그걸 원치도 않는다는 걸 라이더가 알아주길 원한다. 허나 라이더가 그들을 위해 어떤 행동을 한다 해도 그건 다 '실패'로 돌아갈 뿐이다. 피오나와 함께 아파트 주민들을 만나러 가지만 그들은 라이더가 진짜 라이더라는 걸 알지 못하고 파크허스트는 라이더에게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쏘아붙인다.

구스타프와 소피, 보리스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라이더의 '가족'이다. 라이더는 그들을 내버려 두고 여행을 다니며, 그들에게서 도피한다. 그리고 이 마을에서 그들과 마주했을 때 라이더는 어떻게든 그들을 '위로'하려고 한다. 보리스에게는 9번 선수를 찾아주려 하고 구스타프에게는 소피와 다시금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소피에게는 그가 더이상 여행을 떠나지 않고 머무를 것이라는 안정감을 주기 위해서.

라이더 또한 '위로'를 필요로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위로'해 주지 않는다. 제프리는 그에게 '엄살을 부린다'고 말하고 소피는 위로해주는 듯하면서도 이내 자신의 문제로 돌려 버린다. 보리스와 함께 9번 선수를 찾기 위해 아파트로 가는 버스를 탔을 때, 그는 이 모든 상황이 곧 있으면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된다. 버스는 사람을 싣고, 그 사람이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 준다. 그렇다면 라이더 또한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아파트에서 그는 9번 선수를 찾지 못하고 오히려 마을 주민의 '공격'을 받게 된다. 그는 이 모든 '혼란', 슈트라트만 양의 탓으로 돌려 버린다. 슈트라트만 양이 그에게 이런 버거운 일을 맡길 것이었다면 라이더 자신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행정적 도움' 또한 줄 수 있어야 했다. 이 소설에서 사람들을 위로하고자 하는 사람은 콜린스 여사와 라이더, 둘밖에 없다. 라이더는 결국 자신의 상처에만 골몰한 사람들에게 분노를 터뜨리고 만다.

 

"이 작은 도시에서 당신들이 이런 문제를 갖고 있다는 게 과연 놀랄 만한 일인가요? 당신들 가운데 일부는 그 문제를 '위기'라고 부르더군요. 이 도시에서 그렇게 많은 시민이 그토록 불행하고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는 게 이상한 일인가요? (중략)바꿔 말하면 당신들은 이 도시 공동체의 하찮은 내부 혼란에만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습니다. 거기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우리한테는 최소한의 예의조차도 보이고 있지 않단 말입니다."

 

434

 

왜 위로를 받으려고만 할 뿐, 위로하려고는 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들은 크리스토프가 입게 될 상처는 신경쓰지 않았다. 호프만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브로즈키의 '성공'을 꾀하는 척하면서 그의 '실패'를 바랬다. 호프만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였다. 호프만은 아내와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목요일 밤 행사를 '실패'시켜야 하고, 그 실패로 성공까지 가는 길을 조금 더 지연시켜야만 한다. 만약 성공에 이르게 된다면, 아내는 자신을 떠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브로즈키는 타격을 입는다. 또한 콜린스 여사와 브로즈키가 서로를 '위로'하려고 다가선 순간, 브로즈키의 '위로'는 콜린스 여사에게 향할 뿐 타인에게 향하지 않게 된다.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다. 9번 선수를 잃어버린 보리스에게 아파트 주민은 부부 싸움을 상세하게 묘사해 주며, 그 말을 듣지 않게 하려는 라이더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소리친다. 그들은 위로하려 하지 않는다.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현실'이라는 이름의 오만한 공포를 휘두르며, 그들이 아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외친다. 그리고 그들 자신의 상처가 더 크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행동 앞에서 사람들은 지극히 냉담해진다. 라이더 또한 소설이 전개되어 갈 수록 사람들의 요구에 지쳐가고, 위로하고자 하는 '의지'를 상실한다. 자틀러 기념관에서 찍은 사진으로 인해 그는 자신의 '지위'가 격하되었다고 생각한다. 페더젠 또한 그의 그런 행동이 결함이었다고 지적한다. 라이더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는 변명하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콜린스 여사 또한 수많은 이들의 '걱정'을 들어주었으며 끊임없이 '위로'를 했다. 그로 인해 그녀는 누군가의 '상처'를 짊어지는 데에 진력을 냈고 끝내 브로즈키의 요청을 거부하고 만다. 수많은 위로들이 있었으나 어떤 위로도 '완전한 해결책'이 되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위로 앞에서 끊임없이 '그게 아니다'라고 부정하면서, 위로하는 이들의 의지마저 꺾어놓는다. 호프만은 그 자신의 불행한 결혼 생활에 대해 한탄하며, 그 모든 탓을 '슈테판'에게 돌린다. 슈테판이 사실 진짜 연주를 잘 한다 할지라도, 호프만 자신이 느끼는 불행 때문에라도 슈테판은 '실패자', 희생양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라이더는 슈테판의 진면목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려고 하지만 호프만은 계속 부정한다. 라이더는 호프만이 정한 시나리오에 따라서만 움직여야 한다. 호프만의 허락을 벗어난, 가령 슈테판을 인정하는 등의 벗어난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벗어난 행동은 호프만 자신의 혼란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호프만 씨, 슈테판은 아주 재능있는 젊은이입니다....."

"그런 말씀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고 있는데, 그런 인사치레로 나를 모욕하지 마세요!"

 

106

 

 

Music takes all people to the heaven

 

플라톤은 '음악'을 두고 모든 예술들 가운데 가장 수학적이고 이데아에 가까운, 진정한 '예술'이라고 여겼다. 그만큼 '음악'은 어떤 논리가 개입하기 힘든 예술이다. 예술 분야 중 가장 많은 '장르'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생활의 어떤 소리도 음악이 될 수 있다. '고정된 형식'은 나오는 즉시 반발을 받고, 어떠한 음악도 '상위권'에 머무를 수 없다. 또한 논리적인 언어가 '소통의 장벽'을 두고 있는 반면 음악은 귀만 있다면, 혹은 귀가 없어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을 가능할 수 있게 해준다.

마을 사람들이 '음악'을 그들의 마을을 되살릴 '예술'로 지정한 것도 그 이유에서다. 그들의 상처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아프고 시리다.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기에는 라이더의 사적인 '위로'로는 불가능하다. 결국 그들은 '음악', 그들의 '연주'로 치유받고자 한다.

허나 크리스토프의 실패 뒤, 사람들은 회의를 느낀다. 극장에서 라이더는 페더젠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소개받는다. 그들은 술에 취한 채로 카드놀이를 하며, 영화에는 별 관심도 없어보인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는 이미 너무 많이 튼 고전 영화다. 라이더 또한 그 영화를 좋아한다. 라이더는 그 영화를 감상하고 싶어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테오는 크리스토프에게 빼앗긴 로자 클레너에게 빠졌던 과거의 자신을 부정한다. 크리스토프가 추락한 이상, 로자 클레너와의 추억은 이제 그에게 어떠한 '이점'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다시 브로즈키라는 우상을 세우려는 페더젠에게 '반박'한다.

 

"당신은 거짓말을 둘러댔어요! 무려 17년 동안이나. 17년 동안이나 크리스토프가 제멋대로 일을 처리해도 문제 삼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고요. 그래 놓고는 이제 와서 우리한테 브로즈키를 내놓는 겁니까? 브로즈키라니! 라이더 씨, 이젠 너무 늦었어요."

 

173

 

페더젠은 테오의 반박에 '반박'하며, 라이더와 함께 극장 밖으로 나간다. 그들이 나갈 즈음에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만능로봇 HAL은 해체되기 직전을 앞두고 있었다. HAL은 발달된 시대의 증거물이자 모든 사람들의 꿈-우주로 나가고자 하는-이다. 허나 HAL이 인간을 죽인 순간, HAL에게 걸었던 모든 기대는 사라지고 만다. 결국 사람들은 HAL을 파괴한다. 이는 이 마을에서도 되풀이되는 '비극'이다. 극장에서 이 영화를 계속 상영하는 것은 그렇기에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라이더는 계속 '위로하기'를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어째서, 그는 위로를 멈추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이는 지극히 원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예술이란 무엇인가 왜 사람들은 예술로 위로를 받고자 하는가? '천재'라는 개념만 봐도 알 수 있다. 천재는 하늘이 내려주신 인재, 즉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에 가까운 인물이다. 사람들은 '천재'를 받들고 질투하며 동시에 사랑한다. 천재들 또한 그들 자신이 천재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들은 신에 더 다가가고자 하며, 그들의 예술은 그럴 수록 점점 더 가치있게 되는 것 같이 보인다.

허나 신은 인간과 다르다. 신에게는 '고향'이 없다. 라이더는 '좁은 세계'를 거부한다. 그의 가족과 소피, 보리스를. 하지만 그는 '인간'이다. 모차르트는 천재였으나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그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인간들은 '천재'가 인간 쪽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다. 그렇게 되는 순간 ''으로부터의 위로는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호프만 부인 또한 '현실'을 인식하면서도, 계시처럼 내려오는 '위로'를 원한다.

 

"갑자기 끈이 툭 끊어져 두꺼운 커튼이 바닥으로 떨어지면 새로운 세계가, 햇볕과 따스함으로 충만한 세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처럼 말이에요. 이런 걸 믿는 제가 미친 건가요? 그 오랜 세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한순간, 정확한 한순간이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걸고 믿는 게 미친 짓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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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그녀의 갈망을 단순히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 것으로 치부하는 건 속단이다. 문학 속의 수많은 여인들, 보바리 부인과 테레즈들도 '새로운 세계'를 원했다. 그들의 '갈망'을 헛된 여인네들의 공상이라고 치부할 순 없다. 모든 사람들이 위로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이 여태까지는 잘못이었고, 앞으로는 훨씬 더 좋아질 것이라는 위로를.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의 상처에만 탐닉할 뿐, 타인의 상처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속칭 '오지랖 넓게' 타인의 상처에도 관여하는 라이더는 크리스토프가 자신의 말은 듣지 않으려 하는 데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느끼는 염증보다 더 심한 '반감'을 느낀다. 허나 라이더가 꿈꾸는 예술은 모든 이들을 위로하는 것이지, 그 자신을 위로하지는 못한다. 이는 수많은 이들이 되풀이했던 질타, '현실을 직시하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라이더는 천재 피아니스트지만, 그는 신이 아닌 인간이다. 그는 과거 부모님의 불화 앞에서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못한, 무력한 어린아이였다. 그는 결국 가족과 소피, 보리스를 뒤로 하고 여행을 떠난다. '좁은 세계' 대신 '넓은 세계'로 나가겠다는 핑계를 대면서. 허나 브로즈키는 '넓은 세계'에서 하잘것없는 사람이 되는 대신 자신의 '좁은 세계', 콜린스 여사에게로 돌아오고자 한다. 브로즈키가 지휘할 수 있게 된 순간은 바로 그가 그 자신의 상처를 인식했을 때부터였다.

그가 그 자신의 상처를 인지하고, 그의 주변을 둘러싼 호프만의 계략을 인지한 순간 어느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은 브루노의 죽음을 추앙하지만 브로즈키는 브루노가 그저 ''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무덤의 미망인은 그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남편의 죽음을 부정하고자 라이더에게 신경을 쓰지만, 라이더에게 아무리 신경을 써도 그 슬픔은 메워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라이더를 탓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호프만은 라이더를 탓하는 대신 미망인에게 '라이더'를 신경쓸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슬픔에 신경쓰라고 말한다. 그의 광기어린 연주 앞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던 아름다움 대신 '실재 너머의 진리'를 인지하게 된다. 객관적인 현실 너머에는 우리가 인지하고 싶지 않아했던 실재가 있었고, 실재 너머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진리가 있다. 그건 바로 그들 모두가 '위로'를 받고자 했던, 지극히 이기적이고 연약한 '인간'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라이더가 결국 좌절감을 느끼게 되는 것도 바로 그 '지극히 이기적이고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훌륭한 연주를 하려고 했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에게는 연주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으며 환대를 받으며 도착해야 할 그의 부모님은 오지 않는다. 또한 구스타프는 죽었고 소피마저도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만다. 그가 이 모든 상황을 타개할 해결책으로 내놓은 '연주'는 시도조차 해보지도 못하고 그는 실패한다. 그는 좁은 세계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좌절한다. 신과 인간의 간극 앞에서, 예술가는 좌절하게 된다.

소설에서 묘사하는 공간은 이와 같은 부조리와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라이더가 다른 장소인 줄 알았던 곳은 사실 호텔이었고 연주회장까지 가는 길 앞에는 벽이 둘러서 있다. 게다가 그 벽은 관광 상품이기까지 하다. 그가 찾아다녔던 슈트라트만 양의 사무실은 연주회장과 전혀 다른 분위기를 띄고 있으며 소피와 보리스, 그가 카르빈스키 미술관에서 나가려고 여는 문들에서는 이상한 것들이 튀어나온다. 마치 앨리스가 토끼의 집에 떨어졌을 때처럼, 그들이 나갈 수 있는 문은 진짜 출구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작은 문'이었다. 또한 라이더가 '위안'을 얻는, 그를 어디로든 데려다 줄 '버스' 또한 결국 노선대로 순환할 뿐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 소설의 모든 것들은 예술마저도 '위로'는 불가능하고, 사람들은 계속 자신의 상처에만 탐닉하며 위로하려는 이들은 위로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내 곁에 있어줘

 

왜 사람들은 '위로'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상처가 나면 마데카솔을 바르고 그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혹은 타인에게 보이지 않도록 대일밴드를 붙인다. 타인에게 약점을 보이고 싶지 않아하면서도 약점을 드러내 공공연히 위로를 받고자 하는 이와 같은 행위에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결국 모두 서로를 위로하다가 지쳐버리고 계속 자신의 상처가 타인보다 더 크다는 것을 드러내기만 할 뿐인데.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 '위로'라는, 헤어날 수 없는 덫에서 나름대로 두 가지의 대안을 제시한다. 첫번째는 바로 '포기'. 위로를 포기하고, 위안을 택할 것. 브로즈키는 콜린스 여사에게 찾아가 다시 돌아와 달라고 말한다. 콜린스 여사는 그에게 '어떻게 자신에게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둘 사이의 해묵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하지만 브로즈키는 '옛날 이야기'는 그만두자고 말한다. 해봤자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가 없으니 대신 '애완동물'을 기르자고 말한다.

 

"그게 나한테 어땠는지 당신은 알 수 있을 거요. 얼마나 힘들었는지.... 때로는 너무 끔찍해서 죽고 싶었소. 그냥 끝내 버리고 싶었소 하지만 이번에는 길이 보였기 때문에 계속한 거요. 내가 다시 지휘자가 되면 당신은 돌아올 거다. 다시 옛날처럼 될 거다. 아니, 어쩌면 옛날보다 더 좋아질지도 모른다.... 때로는 끔찍했소. 벌레 같은 자식들....더 이상 어떻게 해야 그걸 증명해 보일 수 있을지 모르겠소. 우리는 자식이 없소. 그러니 동물을 키웁시다."

 

63

 

둘 사이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들여다 봤자 서로의 상처만 들쑤시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브로즈키는 이를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서로의 상처에 집중하는 대신, 전혀 다른 것에 집중하자고 말한다. 서로 '집중'하는 게 아닌, 서로 '공유'하는 것을 통해 사랑을 이어나가자고 하는 것이다. 공격적인 두 직선 위로 하나의 점이 생기고, 삼각형이 생긴다. 그 삼각형을 통해 그들의 관계는 입체적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행위는 브로즈키가 말했듯 그 자신의 상처를 인식하는 데에서 있다. 타인의 상처에 탐닉하거나 자신의 상처에 탐닉하거나, 어떤 것도 결국 상처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상처가 어떤 것인지 인지하는 순간, 다른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추진력을 얻게 된다. 브로즈키가 이전에 잘렸던 그 자신의 다리를 인식하고, 그 다리에 더 깊은 상처가 생겼어도-설사 다리미판으로 목발을 대신했더라도-그는 지휘하려고 한다. 이는 그가 그 자신의 상처를 극복했다는 것을, 콜린스 여사와 함께 '동물'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아이''동물'은 다르면서도 같다. 슈테판 또한 호프만이 원했던 '해결책'이었다. 허나 호프만은 슈테판을 인정하지 않는다. 슈테판은 그들보다 '오래 살 것'이며, 그들의 의지와는 다른 쪽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슈테판은 호프만과 이 '마을'을 극복하고 넓은 세계로 나가겠다고 말한다. 그건 라이더가 정해준 '위로'가 아니었다. 슈테판 자신이 정한 것이었다. 슈테판은 그래도 라이더를 원망하지 않고, 그에게 감사를 표한다. 라이더는 그에게 '위안'을 주었기 때문이다. '동물'은 말이 없고 인간보다 비교적 짧은 삶을 산다. 물론 그들의 죽음 앞에서 인간은 슬퍼한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 있는 순간, 그들은 인간에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애정을 보여주며 인간 또한 그걸 알기 때문에 '지나친 기대'를 하지 않는다. '기대'하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저 콜린스 여사와 함께, 둘이 함께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으면서.

동물아이의 닮은 점은 역설적으로, 둘 다 어느 정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물은 동물 나름대로의 짧은 수명인간과 소통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아이는 어느새 자라서 아름다워질 것이며’, 그들에게서 독립해 나갈 것이라는 걸’. 호트만과 호프만 부인의 아들인 슈테판은 그들에게 얽혀 있었고 이 마을에 묶여 있었다. 허나 슈테판이 한 인간이 되기를 선택하면서 그는 그들에게서 끝내 독립하게 된다.

하지만 콜린스 여사는 브로즈키가 '자신의 상처'를 극복한 것을 본 순간 깨닫는다. 그녀는 브로즈키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의 우위에 서 있는 척했지만 사실은 그녀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다. 사실 그녀는 타인을 위로할 만큼 '우위'에 서 있는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브로즈키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친다.

그리고 라이더 또한 마찬가지로 거절당한다. 구스타프의 죽음 뒤에 소피는 더이상 누구의 위로도 받기를 거부한다. 구스타프가 예전에 소피를 위로하기를 '포기'하고, 둘 사이에 오랜 시간동안 그 '오차'를 극복하기 위해 수많은 말과 행동이 있었지만 결국 위로는 실패했다. 소피는 더이상 라이더를 포옹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보리스는 다르다. 보리스는 라이더에게서 오는 '위로''위안'으로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라이더가 준 책을 보며 감탄하고 9번 선수를 찾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이 소설에서 그에게 진심으로 괜찮다고 하는 사람은 보리스 뿐이다. 보리스는 소피에게 그들은 '같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위안'을 위해서다. 허나 소피는 끝내 거부한다.

거부당한 라이더는 그러면 브로즈키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허나 아직 두 번째 대안이 있다. 그는 그를 '다른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데려다 주는 '전차'를 탄다. 그리고 그 '버스'에서 그의 부모님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한 사내를 만난다. 그는 그의 부모님을 봤다고 '확신'하지는 못한다. 대신 그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그에게 ''을 먹으라고 한다.

 

우리는 서로 마주 앉아 음식을 먹으면서, 축구나 그 밖에 우리가 좋아하는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밖에서는 태양이 점점 높이 떠올라, 거리와 우리가 앉아 있는 창가를 환히 비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을 완전히 끝냈을 때, 음식도 배불리 먹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모두 끝냈을 때, 그제야 비로소 전기공 사내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아쉽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면서, 내가 내릴 정류장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나도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고,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털어 낼 것이다. 우리는 악수와 함께 작별 인사를 나눈 다음-그는 자기도 이제 곧 내려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그동안 앉아 있던 자리를 떠나, 승강구 주위에 모여 있는 쾌활한 승객들 틈에 끼어들 것이다. 이윽고 전차가 멈춰 서면, 나는 그에게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고 나서 전차에서 내릴 것이다. 이제는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지고 헬싱키로 떠날 수 있겠다고 확신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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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라이더는 헬싱키에서도 또다시 '좌절'을 맛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다. 이 희망은 확실하지 않다. 확실함을 포기했기 때문에, 희망은 성립 가능하다. 지나치게 영리한 현대인들이 '온전한 것'을 포기하는 대신, '온전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 이 사소한 포기 하나만으로도 세상은 따뜻해진다. 자신의 어려운 사정에만 한탄하는 것을 포기하고 타인을 도우려고 애쓰는 것,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는 대신 타인의 상처를 감싸는 것. 우리는 이타적인 타인만을 원할 뿐, 이타적인 자신을 꿈꾸지는 않는다. 지극히 이타적일 필요도 이기적일 필요도 없이 '불완전한 상태', 애매한 상태로 놓여 있는 건 어떨까.

현대의 수많은 화젯거리들이 그러하고, 한국의 '정치'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젊은 세대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 중 자신이 좌우파라고 분명히 밝힐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왜 가릴 수 없을까. 좌우파들이 비판하는 것처럼, 그들 자신의 정치 의식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일까? 오히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정치 의식', 주관성이 뚜렷하기 때문에 어느 쪽에도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들은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대신 자유롭다. 이로 인해 얻는 단점도 있으나, 그만한 장점도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소설의 결말을 온전히 내놓는 대신 애매하게 끝내며, 사람들에게 애매한 방향을 가리킨다.

나는 이 두 가지 방안 중 어느 하나가 정답이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가즈오 이시구로보다 더 애매하게, 나는 그 중도를 제시하고 싶다. 바로 허들링(Hudding)이다. 현재 극찬리에 방영중인 남극의 눈물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나오는 펭귄들이 추위를 피하기 위해 하는 행동이다. 이는 본능적이고, 그래서 아름답고 그래서 슬프다. 아무 것도 모르는 타인에게 의지해야 하고 그 의지는 우리를 추운 밖으로 밀어낼 수도, 따뜻한 안으로 들여보낼 수도 있다. 허나 확실한 것은 허들링의 특성상 언젠가는 추위와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걸 인지하고 있어야만 타인과의 허들링이 가능하다. 포기함으로써 생존의 가능성을 찾는 것.

물론 그 방향이 온전한 '해답'이 되지는 않는다. 허나 그것이 '해답'이 아니라는 것을 안 순간, 적어도 그것은 '해답'까지 인간이 스스로 나아갈 수 있게끔 북돋아 준다. 3의 점, 희망의 소실점을 향해서, 우리는 천천히 움직일 것이다. 서두르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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