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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여지도 - 두 발과 땀으로 써내려간 21세기 대한민국 노동의 풍경
박점규 지음 / 알마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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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비게이션이 아닌 지도

 -박점규 '노동여지도'를 읽고-

 

 

 

 

 

우리는 모두 노동자다

    

  우리의 일은 당신의 돈보다 아름답다.’ 한국 사회에서 물건에 관련된 인간은 기존의 분류와 다른 양상을 띤다. 기존의 분류가 생산자와 소비자라는 두 축이었다면, 이제는 노동자와 소비자로 나뉜다. 생산자였던 사람들은 노동을 하는 입장이 되거나 노동을 소비하는 생산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 이분법은 동시에 계급화 과정을 수행한다. 노동자는 소비자에 비해 하층 계급이 된다. 이 계급적 표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몇몇 사람들은 노동자를 블루 칼라와 화이트 칼라로 나누면서 노동권을 면제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 했다. 사무직은 공부를 잘 한 이들의 성과이고, 그들은 자신의 육체를 사용해 땡볕에서 일하는 이들보다 우월하다는 논리를 세웠다. 그러나 노동 현장에서의 상해는 육체가 아닌 정신에서 더 많이 드러난다. 육체의 질환의 원인도 스트레스로 드러난다. 우리는 모두가 노동자이며, 이 명제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완벽한 소비자가 될 수는 없다.

  기존의 한국 현대사에서 노동자를 조망하는 시선이 주로 용역이나 공사장의 인부들, 공장에 머물렀다면 노동여지도의 시선은 그 편견을 극복하고자 한다. 가령 대전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소위 공부를 잘하는 박사들’, 그리고 회사원들까지. 공부 잘하고 성실해지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미래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은 헛말이 되어버렸다. 강남과 강북을 가르는 한강 물줄기는 마르기는커녕 점점 더 깊게 강바닥을 파내려갔다. 최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실린 강남 좌파였던 사람의 고백은, 그가 태생적으로 강남주민이었으며 김진숙 위원장 등 노동자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그 시간에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있었다는 진실을 토로한다. 이는 아주 사소하면서도 경악스러운 고백이다. 누군가는 생을 위해 투쟁할 때 누군가는 프랑스어를 공부한다. 자신들이 철저한 소비자라고 배워온 사람들은 그들이 노동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신문의 자극적인 보도에서 접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대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무시하는 것이다. 그들과는 아예 상관이 없다고. 그들은 부당해고를 당할 일도 없으며 원하는 일을 취사선택할 수 있을 것이고 집안에서는 그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지지해줄 것이라고. 그들은 노력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들 자신도 노동자라는 걸 깨닫는 것이다. 그들에게도 가능한 미래이거나, 멀어도 그들과 똑같은 한 인간이 당하는 현재이다.

    

 

번복되는 세기

    

  노동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모토였다면, 흔한 운동권의 도덕에의 강요에 그쳤을 것이다. 휴대전화가 스마트폰으로 바뀌고, 데스크톱이었던 컴퓨터가 태블릿 PC로 바뀌는 등 기술은 점차 진화해 왔다. 그렇다면 현실 또한 어떠한가. 토마스 모어가 처형당하는 와중에도 한 끝 주저함이 없이 주장했던 유토피아에 가까워지고 있는가?

  19961127일 평택시 에바다 농아원에서 농아원생들이 시위를 했다. 재단운영자가 다시 풀려 나와 재단을 장악하자 노동자와 학생들이 일어나 농아원생의 권리를 주장했다. 덕분에 최성창 일가를 축출하고 에바다 농아원은 진정한 복지기관이 되었다. 이어 2006년 평택시로 미군기지의 이전을 막기 위해 사람들이 투쟁했다. 이 반대투쟁의 주축이 된 건 노동자였다. 노동자들은 왜 이 투쟁에 참여했는가? 산업 발전을 외치며 새마을 운동을 하던 시절, 공순이들과 공돌이들은 사회의 도구가 되었다. 독일로 파견된 간호사들과 광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수출 산업을 위해, 달러를 위해 마음대로 쓰이고 내던져졌다. 그들이 생산자가 아니었기에 그들은 그들이 만든 것들을 온전히 다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은 이 부당함을 알기 때문에 그 부당함을 이해하는 이들과 연대했다. 그 당시의 한국문학에서 지식인들은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자신의 무력함을 자책하는 식으로 표현되곤 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노동자의 본질과 가치를 일깨우는 것이었다. 혹은 노동자들이 놓쳐버린 어떤 것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지적은 어느새 노동자의 우둔함을 부각시키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설령 의도가 그게 아닐지라도, 그들의 인본주의무식함의 탓으로 돌려버렸다. 쌍용자동차가 대한민국 1호 자동차 회사이고 그 공원들이 평택에서 일어난 수많은 시위에 참여하며 사회의 부당한 처우에 대해 항의했지만 결국 그들 자신이 내쫓길 처지가 되어버렸다는 것은 부당함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증거다.

  21세기의 노동사를 그렸다고는 하지만 이 책은 과거를 언급한다. 현재 뿐만이 아니라 과거도 언급하면서, 과거가 번복되는 양상이 현재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현재를 또다시 번복해 미래라는 현재를 만들어 낼 것인지 아니면 이를 깨닫고 굴레에서 벗어날 것인지, 그 선택은 누구에게 달려 있을까.

 

 

 

 슬픈 열대

 

  책을 읽는 사람들은 자신이 지식인이라는 뿌듯함 뿐 아니라 이 책을 시간 내서 읽을 수 있다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그 특권은 잘 쓰면 좋은 특권이 되지만, 나쁘게 쓰면 다른 사람을 해하는 특권이 되어버린다. 동정은 금물이다. 동정은 결국 사회가 원하는 계급화를 납득하게 만든다. 노동여지도가 원했던 건 굽어 살피는 동정이 아니다

 이 책의 말미에서 나오는 파주출판단지의 노동자와 편집자들은, ‘동정을 원하는 게 아니라는 걸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그들은 저항하고 있으며, 그 저항을 책으로 펴내고 있다. 책은 모르는 곳을 여행하는 지침서가 아니라 경고장으로 작동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빚이 있거나 상환 날짜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통지서로 깨닫는다. 카프카의 요제프 K는 자신과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한 법정에 출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어느날 아침 찾아온 불청객 사내들로 인해 알게 된다. 이건 부당한 진실인가? 아니면 우리가 여태껏 깨닫지 못했지만 우리를 천천히 조여 오고 있었던 목줄인가? 책은 인간의 지혜와 노고를 담은 정수라고 하지만, 책은 어떤 고귀한 상황에서 계시처럼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저 깊은 바닥, 바위와 흙이 뒤섞인 곳에서부터 끌어올려지는 약수와 같다.

  완벽한 포식자는 존재하는가? 적어도, 이 책을 경고장으로 받아들이게 된 사람들은 포식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책을 동정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완벽한 포식자라고 할 수 있는가? 그들은 아직 자신들이 포식자라고 착각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과 그에 따른 운동은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어떤 것도 완벽해진 것이 없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아직도 계속 진화해야 한다. 그 진화를 가로막는 건 완벽의 신화다. 이미 완벽함은 신화로 도래했고, 우리는 현 상황을 유지하기 위해 모두들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부한다. 우리는 거부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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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후마니타스. 2015.5

 ->현대 사회는 불안 사회다. 모든 감정에는 불안이 수반되고, 아무 것도 믿을 게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정부를, 사회를, 우리 주변 사람들을, 심지어 가족과 자기자신마저도 믿지 못한다. 불안은 불신을, 모든 불들을 낳는다. 불안이 이 세계에 불을 지르고 있다. 어디에서 이 불안이 나오는가? 레나타 살레츨은 이 불안이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라 이미 잠재되어 있었으며, 그 기폭제로 터진 지점에 대해 논의한다. 이 미시사로서 다루는 불안의 역사가 어떤 효력을 발휘할 지 현 상황에서 한번 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2. '예외', 강상중, 문학과지성사, 2015.5

 ->이유없이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사고들의 이유가 밝혀지면서 인간이 초래한 사건이 되어버린다. '예외'라고 칭하는 행위는 우리로부터 그것들을 배제해 안전해지려는 욕구에서 기인한다. 김상중은 경계의 사유를 통해 그동안 기민하게 그 모순을 지적해 왔으며, 이번 책에서는 사람들이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까지 더불어 '예외'로 만드는 권력의 작동 체계와 그로 인해 소외되는 것들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

 

3. '오늘도 괜찮으십니까', 울리히 벡, 도도, 2015.5

 ->'위험사회'와 '사랑은 지독한 혼란'을 쓴 울리히 벡의 칼럼 모음집. 울리히 벡은 '짧은 글'로서 일상을 '따라 읽기'nachrichten를 시도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오늘도 괜찮은지', 그게 정말 괜찮은지 묻는다. 아주 가벼워보이는 글들일지 모르나 어떤 무게를 담기에 울리히벡은 정중하며, 또한 사실 울리히 벡의 시선은 날카롭기 때문에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의제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4. '보통이 아닌 몸', 로즈메리 갈런드 톰슨, 그린비, 2015.5

->미국에서 장애가 어떻게 제시되어 왔는지 그 문화사를 들춰보는 책. 사람들은 쉽게 '정상'이라는 말을 쓰며 장애인들을 배제해 오려는 시도를 했다. 문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장애인'을 희화화하거나 지나치게 극화시키면서 그들을 하나의 소재로 삼은 바 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인권에 대해 말해야 한다면, 이전부터 너무나도 당연시되어 온 장애인의 문제에도 당연히 읽어야 하는 게 아닌가? 사실상, 우리는 그렇다면 정상인인가?

 

 

5. '중국인 이야기' 4권, 김명호, 한길사, 2015.5

->현대 사회에서 중국은 점점 끓어오르고 있다.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 시리즈는 쉽고 간결하게 중국 근대사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현 시대의 중국까지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중요하다. 단순히 중국 문화사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 이제는 세계사와 관련된 문제로 조망해야 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6. '점심메뉴 고르기도 어려운 사람들', 베리 슈워츠, 예담, 2015.5

->'선택'의 문제, 이 페이퍼를 쓸 때도 선택에 고민했었다. 우리는 이제 가장 유리하고 가장 똑똑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강박 하에 공부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봐 왔다. 결국 우리는 이로 인해 타인에게는 만족스러울지 몰라도 우리 자신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은 선택을 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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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수치심]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지음, 조계원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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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과 이후의 감각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을 읽고

 

 

    

 

 

 

 

 우리는 아주 쉽게, 모든 일의 변명을 감정으로 돌리곤 한다. 감정이란 인간만 지니고 있는 장점이자 단점이다. 감정은 모든 발견과 창조를 가능하게 했다. 어쩌면 에덴의 이야기에서, 뱀이 더 악한 존재로 표상되는 이유는 뱀이 하와에게 진실을 말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뱀은 하와마저도 속여 넘겼다. 그래서 뱀은 모두에게 미움을 받게 된 것이다. 만약 하와가 신과 동등해지는 지혜를 얻었더라면, 그녀는 에덴에서 쫓겨나지 않았거나 쫓겨났더라도 척박한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뱀이 알려준 사과는 지혜가 아니라 그들에게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고, 하와가 제일 먼저 느낀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그녀는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이전까지는 신경 쓴 적이 없었다. 그들은 새로운 감정을 발견했고, 그 감정을 토대로 낯선 황무지로 나아가 살게 되었다.

 

 인간은 모두가 함께 살기 위해서 사회의 발전을 이끌어 왔다. 법은 그러한 시도들 중 하나다. 인간을 보호하는 틀로 작동하지만, 법은 완전한 기둥이 되지 못한다. 언제쯤 쓰러질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지지대와 같다. 법은 주관성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고려와 판단이 되고자 한다. 법은 하나의 진리가 될 수 없으며, 계속 수정되어야 한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를 내세우는 함무라비 법전이 고대의 유물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건, 그러한 모토가 모든 이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명제로는 모든 사례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함무라비 법전의 심플한 법령은, 두꺼운 법전들로 늘어나고 변형되었다.

 

 법은 점차 비대해지고 강력해졌다. 법에 의해 감정은 단점이 된다. 감정은 법에 비해 비합리적인 근거이며, 개인의 주관을 형성하면서 동시에 편견과 혐오를 낳는다. 혐오는 한 사람의 존재를 근거하는 기반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의 존재를 부정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인간의 감정은 합리적인 체계를 주장하는 법의 사회에서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 된다. 이들은 계속 하찮은 감정을 고려해 주어야 하고, 형을 어느 정도 마지못해 탕감해 주어야 한다. 그들은 혐오와 두려움을 구분하고 혐오는 범죄에 필요충분 조건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며, 두려움은 당사자들을 쉬이 동정하게 만든다. 감정은 이들에 의해 인간의 장애물이 된다.

 

 그러나 모든 주관성과 비합리성을 배제한 인간, 그 끝에는 로봇밖에 없다. 로봇은 두려움도 감정도 느끼지 않는다. 그저 입력된 대로 행동할 뿐이다. 그러나 과연 그게 합리성이라고 할 수 있는가? 어떤 회로들이 다 맞아떨어진다는 것, 그건 결국 로봇의 기능을 한정짓는처사가 되어버린다.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저자는 강력하게 경고한다. 그들의 자유가 과연 어떤 자유인지 파악해야 한다고. 자기 자신을 위한 자유인지 아니면 타인을 위한 자유인지를. 결국 법이라는 것은 어떤 개인의 사고에 불과하다.

 

 과도하게 말하면 개인의 사고, 조금 더 완화해 말하면 몇몇의 사고다. 법은 모든 이들을 다 포옹하지 못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대책이 배심원제이고, 배심원들은 그들의 능력을 다해 마음으로 느끼고, 끊임없이 생각한다. 법의 냉정한 판단은 법의 전문가인 판사와 검사가 할 일이다. 배심원들은 고민한다’. 그들은 어떤 판결을 명확하게 내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동정과 연민의 구분이 필요한 지점은 이 때부터다. 연민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는 시선이며, 이해하는 척하지만 이해하지 못한다는 간극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반면 동정은 기존의 부정적인 함의와 다르다. ‘

 

 동정의 서술어는 동작을 포함한다. ‘거리를 둔 동정은 공감과 이해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닥칠 수밖에 없었던 일과, 그에 대한 반응에서 발생한다. 물론 이 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좁혀질 수 없으며, 결국 실패라는 타이틀을 달 수도 있다.

 

 하지만 동정은 혐오와 수치심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혐오가 사건 전의 감각이라면, 수치심은 사건 후의 감각이다. 판결은 혐오와 수치심을 온전히 판단해낼 수 없다. 결국 배심원들의 선택이 필요한 셈이다. 죄를 짓게 된 원인과 죄를 마무리하는 끝. 수치심의 발생은 인간 존재 기반을 흔들리게 한다.

 

  사람들이 비극에 대해서 더 분노하고 슬퍼하는 이유는 이 수치심 때문이다. 그들은 알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기울어져 가는 배를 볼 뿐이었다. 그리고 모두들 삶에 대한 혐오를 지니게 되었다. 삶은 아무 것도 도와주지 않는다. 살아가려고 아등바등 노력해봤자 남는 건 방치일 뿐이다. 수치심은 전국에 만연한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다시 혐오의 사이클로 되돌아온다. 우리는 서로를 혐오하고 동시에 자신을 혐오하면서 이 세상을 견뎌나가야 한다. 세상은 전쟁터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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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언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음식의 언어 -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인문학 음식의 언어
댄 주래프스키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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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로 읽는 음식

 -댄 주래프스키의 '음식의 언어'를 읽고

 

 

 

 

 

 

 

앙트레의 가치

  

앙트레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다른 의미로 쓰이지만, 프랑스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프랑스어가 메뉴에 쓰인다는 건 가격대가 상승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미식의 도시가 프랑스로 대표된 만큼, 프랑스어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근원이 된다는 점에서 프랑스어는 자본주의에 편승하는 훌륭한 대상이다. 앙트레의 어원과 현대에서 어떻게 변용되어 왔는지 그 맥을 짚어본다는 것은 과거의 시장에서 지금의 본격적인 자본주의 사회로까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역사를 짚어본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가격대가 높을수록 단어는 점점 길어지면서 근사해 보이는 단어를 쓰고, 진짜라고 주장하는 대신 암시한다. 반면 싼 음식은 긍정적이고 모호한 형용사를 쓰고 진짜라고 주장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격대의 차이를 변명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그들의 가치를 정당화하고자 한다. 이러한 얄팍한 술수에 대해 메뉴판을 제대로 읽어낼 것을 주장한다. 언어에게 휘둘리는 대신 언어를 파악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언어를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고, 포장지처럼 몇 번이고 둘러서 안에 있는 걸 쓸데없이 기대하게 만든다. 자본주의의 기점은 미국-아메리카로, 모든 음식들이 모이고 흩어진다고 여겨지며 결국 모든 음식의 기원을 없애고 자본으로 환산한다. 이로 인해 언어는 압살당한다. 언어가 압살당하면서 음식 또한 안전하지 못하게 된다. 언어와 음식 간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 모든 것이 아메리카가 되는 상황을 극복하는 방안은 바로 언어의 회복에 있다.

이는 음식의 이름, 언어가 명명된 순간을 되짚어 올라가는 지점에서 가능해진다. 처음으로 이름이 붙여진 장소와 유래를 알게 된다면 영어식 표기는 힘을 잃는다. 가령 케쳡의 경우, 우리가 흔히 아는 토마토 케첩이 아닌 중국의 오래된 생선 소스라는 걸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케첩이 KETCHUP이 아니라 케(오래 저장된 생선)+(소스)이라는 중국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통해 케첩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한다. 케첩이 아메리카에 오게 된 건 자본주의가 벌린 시장이라는 경로 덕분이었다. 외국의 음식들은 새로이 변종되면서 새로운 맛을 이끌어냈다. 이걸 가능하게 한 건 부르주아였다. 언어의 회복은 동시에 우리가 잊고 있었던 자본의 가능성을 확보하게 해준다. 자본은 바로 새로운 융합의 가능성을 환기한다.

 

 

  

돌멩이 수프의 가능성

  

돌멩이 수프의 일화는 사실 단추 수프 일화의 변용처럼 읽힌다. 한 나그네가 굶주린 채 어떤 마을에 당도한다. 그 마을은 너무 인색해서 나그네에게 빵 한 조각도 주지 않는다. 나그네는 사람들에게 가장 맛있는 수프를 끓여 보이겠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단추를 끓이면 맛있는 수프가 된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그는 어떤 재료들을 조금씩 추가해야 한다고 말하고, 사람들은 그의 말에 홀려 이것저것 집어넣는다. 수프의 건더기는 풍성해지고 국물은 진해진다. 마을 사람들은 수프를 나눠먹는다. 그들은 가장 맛있는 수프를 끓이는 방법을 알아냈다. 바로 공동체였다. 서로를 배려하고 도우며, 함께 살아나가고자 하는 마음’. 그게 수프를 맛있게 만든 것이다. 또한 맛있는 걸 먹고 싶다는 강한 마음도 그 요인에서 빠지지 않을 것이다.

자본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끊임없이 상하관계를 만들어냈지만,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걸 접하고 계급이라는 사다리를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세비체가 덴푸라였고 시크바즈였다는 맛의 뿌리는, 어떤 경계도 없이 거대한 바다를 자유로이 오가는 생선들처럼 그들 또한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발견에서 온다. ‘이민은 새로운 삶을, 새로운 타자들을 만나게 해주는 기회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배제하고 거부하면서 안온한 공동체적 삶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영국의 국민 음식이라고 불리는 피시앤드칩스는 한때 모든 사람들에게 타자로 머물렀던 유대인들의 생선 튀김에서 유래한다. 그들은 그로서 영국인이 된다. 국경은 사라지고, 맛있는 음식으로 통일된다.

어떤 음식의 유래를 찾는다는 건 그 음식의 소유권을 어떤 특정한 나라에 귀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가령 소시지는 독일 것이라거나 이탈리아 것이라는 다툼은, 그 나라에서 지니는 소시지의 규격의 고유성을 강조할 수는 있어도 새로운 가능성은 부여하지 못한다. 코코넛 매커룬이 프랑스의 고급 과자 마카롱이 된 것처럼, 새로이 번역되고 복사본이 없는 대상-시뮬라크르로서 창조될 수 있는 것이다.

아메리칸 셰프의 경우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경력을 쌓아오던 한 셰프가 평론가의 공격에 무너지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그는 늘 주어진 메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 갈등하며, 결국 레스토랑을 박차고 나간다. 그는 평론가에게 화를 내며 자신의 요리는 이게 아니며, 요리는 조금도 모른다고 비판한다. 그가 행복해질 수 있는 수단은 푸드 트럭도 고급 레스토랑도 아니다. 바로 국경과 모든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요리의 가능성이었다.

 

    

 

 

폴리애나 효과-마무리는 디저트

  

불꽃놀이와 화약에 사용되었던 초석 기술은 달콤한 셔벗과 아이스크림을 만든다. ‘전쟁이 아닌 먹을 것에 귀중한 초석을 쓴다는 것이 낭비처럼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덕분에 웃는다.’ 덥고 짜증이 나는 와중 시원하고 달콤한 것을 먹으면서 더위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불행은 각자 다르고, 일반화할 수 없으며, 쉽게 공감할 수도 없다. 사람들은 서로의 불행 때문에 서로를 미워하고 공격하고 싸운다. 불평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태어났지만, 아주 쉽게 불행해지곤 한다. 부정적인 단어는 이미 부정적인 현실을 가정한 다음 행사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쉽게 상품이 되지 않기 위해 의심하고 애쓰려고 한다. 가령 레스토랑에서 진짜 우유 생크림이라고 걸어 놓았다면, 우리는 다시 점원에게 묻는다. 이게 진짜 생크림이냐고. 그리고 우유 생크림에 대해 아는 모든 의심들을 점검해 본 뒤 거들먹거리면서 진짜인지 아닌지 판단을 내린다. 이를 통해 그들은 속지 않으려고한다. 속지 않는다는 게 좋은 것이라면,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 또한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일까? 좋은 것과 행복한 것은 다르다. 달콤한 디저트가 이를 썩게 만드는 것처럼. 하지만 이미 우리는 모두가 대상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우유 생크림에 대한 정보들을 찾아보고 이를 암기하고 속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 우유 생크림을 산다. 그런데 우리가 우유 생크림을 좋아한다는 확신이 있는가? 어떤 사람은 우유 생크림이나 생크림보다는 버터 크림을 좋아할 수도 있다. 음식의 가치는 사실상 자본이 세워놓은 계급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종족이라고 저자는 말하지만, 현대 사회는 디저트를 금지한다. 살이 찔 수 있다는 것과, 낭비라는 이유에서다. 이에 화답하듯 디저트가 비싸지는 것은 단순히 손이 많이 가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디저트는 자본의 기준을 뛰어넘는다. 아주 조그만 주제에 손이 많이 가고, 재료도 쉽게 낭비된다. 우리는 달콤한 콤포트를 만들기 위해 설탕 반 그릇을 후라이팬에 붙고 그게 다 졸아서 자작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디저트는 자본주의의 원칙에 따르는 척 금가루를 두르거나 유명한 셰프에게서 나오는 척하지만, 사실상 자본주의에 위배되는 음식인 셈이다.

그러니까, 그냥 잊지 말고 디저트를 주문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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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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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레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읽고-

    

 

 

어둠에게 말 걸기

 

처음에는 농담으로 시작되었다가, 마지막에는 당혹스러울 만큼 처참한 죽음과 강간으로 끝난다. 카프카의 소송에서 요제프 K는 모르는 이유로 소송을 통고받는다. 무례한 두 남자가 그의 아침식사와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를 순식간에 두렵고 낯선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요제프 K는 소송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무죄를 입증하려고 한다. 하지만 죄를 알지 못하는 이상 그는 자신이 무죄라는 걸 입증하지 못한다. 결국 그는 개처럼 죽는다.’ 카프카의 소설을 접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여러 가지겠지만, 그 중 대다수는 요제프 K에게 동정심을 보이면서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낙천주의자들이다. 솔닛이 가장 경계하는 사람들은 그녀에게 그녀가 쓴 책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백만장자 남성이나 자신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뜨거운 라떼를 쏟는 남성이 아니다.

낙천주의자들은 자신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고 믿으며,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기 쉬운 법이라는 오류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하지 않는다. 모든 혁명들이 약속했으나 회피하고 지나간 것, 그 미지의 대륙은 바로 여성이었다. 지나치게 우상화하거나 비하하며 인지하기를 거부한다. 여성들의 거절은 그들에게 하나의 심판처럼 다가오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무자비하고 이유 없는 심판, 그러나 그 심판을 여는 소송 주체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다른 누가 그들의 존엄성에 소송을 건 것이 아니다. 이 연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극을 만들고 수행하는 모든 역할은 다 그들 자신이다. ‘거절은 그들의 거울에 상처를 내는 것이고, 이러한 모욕을 견디지 못한다. 그 모욕은 바로 그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고백에 대한 거절, 그들 자신의 존재가 부족하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믿는다. 나아가 그들은 딜런 패로처럼 자신을 거절한 누군가를 거절할 가치가 없는사람으로 만들며, 그들이 고백했던 사실을 하나의 실수로 만들어 버린다. 그로 인해 그들은 다시 고결해진다고 믿지만, 사실상 그들은 자기 자신이 무너질 수 있었던어떤 순간을 겨우 회피한 것에 불과하다.

침묵이 긍정이라는 말만큼 폭력적인 관념이 어디 있는가? 물론 거울이야 침묵한다. 만약 누군가가 칼을 들고 다른 사람을 죽이려 할 때, 그에게 신이 그만두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그 누군가는 사람을 죽여도 되는가? 신의 침묵 또한 긍정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닌’, 오딧세우스는 키클롭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버린다. 오딧세우스는 생존을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린다. 이는 거짓 행동이다. 그러나 동시에 오딧세우스는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진실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주목했던 것은 바로 개와 늑대의 시간, 그들을 분간할 수 없는 어떤 야만적인 시간이었다. 버지니아를 강하게 했던 건 바로 그런 어둠에 대한 그녀의 통찰과 꾸밈없는 시선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강 바닥에 가라앉게 한 것도 그런 어둠이었다. 레베카 솔닛은, 버지니아 울프부터 수전 손택까지 죽 이어져 온 계보들을 가볍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둠에 대해 한 장을 할애한다. 우리는 불빛으로 이 어둠을 쫓아내려고 하지만, 어둠은 우리의 발밑에 끈질기게 붙어 있다. 그걸, 이 책에서는 맨스플레인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세월

  

영화 세월The hours에서는 세 여성들의 에피소드가 교차된다. 버지니아 울프와 현대의 댈러웨이 부인, 그리고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나올 법한 아름다운 금발 머리의 전업주부. 저항적인 작가와 레즈비언으로서의 삶을 개척하고 모두에게 인망이 높은 중년 여성, 그리고 순종적인 전업주부 사이에서 우리는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여긴다. 그 쉬운 공통점은 그들의 심연적 공통성을 지적한다. 그들은 아무런 권리도 없다. 그들이 찾아내고 소중하게 지키고 싶었던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시간에 의해 떠밀려 가버리고 상실된다. 그들을 페미니스트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그들이 바란 것이 아주 사치스러운 것이었다면, 좀 더 쉽고 구체적으로 비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바란 건 아주 소박한 것이었고, 그래서 당혹스러운것이 된다. 그들이 원한 건 자기만의 방이었다. 그들이 원했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다 밀집해 있는, 평온하고 조용한 자기만의 방. 그러한 소박함은 공격의 정당성을 무너뜨리고 그들의 전투력마저 해체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더 격렬하게, ‘페미니스트라고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노예제에 대해, 로맹 가리가 묘사했던 장면이 있다. 백인들은 흑인들이 자신의 집을 뒤집어 엎고, 아내를 강간하며, 아이를 죽일 것이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흑인들이 원하는 건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명백해지는 순간, 백인들은 더 맹렬하게 흑인들을 미워하게 된다. 흑인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의 증오는 점점 더 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크게 부풀어 오른다. 학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여성들은 어떤 욕구에 대해 말하는 대신 입을 다물고 나대지 않는 것이 모범이라고 여겨지게 된다. 그렇다면 나대는 남성은 어떠한가?

언어의 힘은 강력하다. “‘우리는 단어의 힘을 이용해 의미를 묻어버릴 수 있지만, 의미를 드러낼 수도 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언어는 사소하지만 동시에 양분하는 강력한 벽이 된다. 화성과 금성에서 각기 따로 왔다고 우스갯소리처럼 말해지기도 하고, ‘우정은 불가능하다고 말해진다. 가장 최악의 사례는 이 언어의 힘을 폭력이라고는 인지하되 여성들을 피해자로만 보는 남성의 시선이다. 그들에게 여성은 동등한 동료가 아니라 불쌍하고 가여운 피해자에 불과하다. 그들은 평등을 말하지만, 사실상 그러한 평등하지 않은 현실을 역으로 강요하게 된다. 만약 여성이 그들을 동정하는 순간, 그들은 견딜 수 없게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원자이자 공감할 수 있을만큼 넓은 인식관을 가진 자신이라는 환상에 빠져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 동정을 모성애나 싸구려 감수성으로 폄하하는 시도들은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시도들이 남성적인 것으로 포장되는 순간, 그러한 방어가 얼마나 끔찍한지 우리는 새삼 알 수 있게 된다.

프로이트는 환자로서의 여성이 자신의 판단과 가능한 대처를 넘어서는 순간부터 그들을 거부한다.’ 그러한 처사에 대해 폭력이라고 비판하는 대신, 프로이트 자신의 연약함을 바라보라. 이는 모든 인간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이다. 심지어 여성 자신마저도.

 

 

 

우먼스플레인

우리는 아주 쉽게, 같은 피해자로서의 여성에게 공감할 수 있고 그들 또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여성들이 착각하는 지점은, 그 곳이 안전하다는 생각이다. 스테퍼니 스털의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 나오는 한 여대생은 현모양처를 꿈꾸며, 현모양처가 해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 또한 맨스플레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각이 맞으며, 맨스플레인이 강요하는 대로 시끄러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평온한 사회 시스템 그대로 지속되기를 바란다. 맨스플레인은 페미니즘에 대해 어떤 알레르기 증상을 보이는가? 그들은 유별난 반응이라고 생각하며, 괜히 시끄럽게 만든다고 여기며, 아주 쉽게 나는 안 그런데라고 말한다. ‘과자를 받고 싶은 욕망, 강력하다. 그들에게 표백제를 하사하며 여성들을 과민하고 섬세한 이들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이러한 상황 앞에서 미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쉬운 것은 그들에게 동화하는 것이다. 역으로 그들의 사고를 이용하고, 그들의 이미지에 장단을 맞춰주는 것. ‘여자니까라는 이유로 모든 걸 용서받는 것.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면 그녀는 남성들의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들이 바라보는 여성다운 여성으로.

여성들만이 뒷담을 하고 서로를 흉보며, 관계를 깬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은 남자들만의 환상에 불과하다. 그들은 여성에 대한 험담을 해도 그게 험담이라고 인정하는 대신, 정당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비판이 상대방이 모르게 이어진 이상 험담이라고 말하면, 그들은 차마 말하지 못한 이유를 대며 변명한다. 여자들은 여자들에게 허용된 싸움만을 해야 한다. 허용된 이미지와 허용된 행동만을 고집해야 한다. 그러한 억압 속에서 그들은 미쳐버릴 것만 같다고 느껴도, 자신 곁에 있는 비슷한 누군가가 고통을 당하는 걸 보면서 견뎌낸다. 그렇게 그들은 같이 미쳐간다.

 

우리 문화에서 소녀들은 그들 자신을 왜곡하여 점점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운 위치로 몰아간다. 우리는 소녀들에게 대담하면서도 소심하고, 육감적이면서도 야위고, 성적 매력을 풍기면서도 얌전하라고 말한다. 서두르라고 하면서 기다리라고도 한다. 그런 식으로 몰리면 소녀들은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와해된다.

    

레이철 시먼스 소녀들의 전쟁’ 158

 

남성이나 여성이나 어떤 공동체외의 존재를 두려워하고 제거하려 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들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이상,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이상 괴짜가 된다. 솔닛을 비롯한 수전 손택, 그리고 다른 여성들의 경우 페미니스트 여성이자, ‘시끄러운 여자로 언급될 수 있다. 그리고 또 그들과 같다고 자신하는 여성들에게 침묵하는 여성은 순종하는 여자로 치부될 수 있다. 둘 다 한 인간에 대해 존중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비판은 잘 하나, 이해하지 않는다. 이 이해는 바로 상대방의 가치관이 얼마나 옳은지 판단하는 데에서 오는 게 아니라, 그들의 강점과 약점이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그들을 한 인간으로서 받아들이는 데에서 온다. 물론 이는 상하적 인식, 동정심이 아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비판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다 끝마쳤고, 그걸 갑옷처럼 온 몸에 두른 채 달려든다. 어디로? 그 비판을 통해 자신을 어떤 이상적인 인간으로 만들어 갈 수 있으며, 그게 자신의 존재를 입증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비판은 너무나도 쉽다. 찌르는 방법만 알면 된다.

찌르기는 쉬우나, 고치는 건 어렵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는 건 순식간이지만, 고치는 건 단번에 할 수 없다. 이는 여성과 여성의 관계 뿐 아니라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여성이 부당한 상처를 받아왔고 여성의 공동체적 공감을 통해 치유가 가능했다 치더라도, 그 치유의 한계치가 있다. 붕대로 감아도 피는 여전히 흘러나오고, 상처는 흉터로 남는다. 그래서 맨스플레인이라는 용어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우리가 마주해야 할 것은 우먼스 플레인이라는 상처의 흔적, 서로에 대한 존중과 연대일지도 모른다.

솔닛의 책은 맨스플레인에 대해서 말하고 남성을 비판하는 것처럼 읽힐 수 있지만, 사실상 솔닛이 말하는 것은-우스꽝스러운 일화 속에 숨겨진 상처의 흔적, 그 흔적을 회피하지 말라는 강력한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치료'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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