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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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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투르다는 죄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의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을 읽고-

 

 

 

 

 

하마를 구하라

 

하마들은 무슨 죄가 있었을까? 동물들에게는 아무 죄도 없다고, 리카르도는 말한다. 하마들은 무슨 죄가 있어서 살해당해야 했을까, 인간 세상은 그들의 덩치와 그 덩치를 감당하지 못하는 구조물들을 보라며, 결국 그들의 행동은 오로지 우리 안에서만 허용가능하며 관람 가능한 형태로만 승인할 수 있다고 간접적으로 주장해왔다. 뉴스에서 부호의 죽음이 환기한 것은 버려진 동물원과 덩달아 버려진 동물들이었다. 동물들은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선택되었고 버려졌다. 그것들은 사람들을 위협하되 어떤 해도 가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어떤 위협의 의도가 있었을까? 세상이 그것들을 적으로, 위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지극히 자족적인 기준에 의해서다.

리카르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는 누군가를 해치고 싶어하는 의도 따윈 없었다. 그가 해친 것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쏜 총이 누군가의 얼굴에 맞았다는 것, 그 하나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도와 꿈이 그가 지키려고 했던 세상을 짓밟아버렸다. 아바디아 대위 역시 마찬가지다. 죽은 그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사망자들을 만들었다. 리카르도의 아버지는 아바디아 대위에 대한 원망보다는 기계와 기계를 완벽하게 조종할 줄 안다고 믿는 인간들을 저주했다. 만사는 인간의 마음대로 흘러갈 수 없다. 무엇이든, 빈틈이 있다. 하마 역시 마찬가지다. 부자들의 동네에 하마를 구하라는 선심쓰는 플래카드가 걸렸을지언정 진짜로 하마를 구하려는 사람은 없다. 하마는 그의 의도와 달리 사살될 뿐이다. 거리에서 총을 맞고, 천천히 쓰러지면서.

''는 그 질문에 같이 꿰뚫렸다. 부모는 그에게 리카르도가 왜 총에 맞았는지, 그는 왜 같이 맞아야 했는지 캐묻지만 그는 대답할 수 없다. 부모는 그에게 세상 만사가 어떤 법칙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노라고 말한다. 그가 원망할 상대라고는 무력하게 죽어야 했던 하마밖에 없었다. 법학을 전공했던 그에게 세상은 법과 철칙, 판결과 선고로 명료하게 이루어진 법정과 같았다. 다만 그가 리카르도에게 끌렸던 것은, ''의 특이점, 바로 법정 이후의 존재에게 끌린다는 것이다. 그 매혹은 그를 안정의 세계에서 불안정의 세계로 내모는 역할을 한다. 그는 '아우라'의 세상에서 아우라의 박탈을 경험한다. 그는 이제 법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안티고네의 행동이 법적으로 정당한가? 만약 그랬더라면 안티고네의 이야기는 비극이 아니라 법정의 한 사례로 축소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한 편의 비극으로 남았다.

  

오렌지색 블랙박스

 

''는 질문들을 들춰보면서 수많은 것들을 깨닫는다. 블랙박스는 외양 때문에 블랙박스가 아니었다. '965'의 비밀들, 그 하나로는 완전하지 않은 조각들을 끌어모은 채-완성된 비밀이 아니라 여전히 산산조각난 채로-비밀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블랙박스인 셈이다. 하지만 그 블랙박스를 열고, 테이프를 꺼냈을 때 리카르도가 마주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는 무엇을? 그는 콘수에게서 그 테이프를 받아 들었고 리카르도가 어떤 절망을 느꼈을지 조금은 알지만 전부 알지는 못한다. 리카르도가 마주한 현실도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서평에서 어떤 확측도 하지 못한다. 리카르도와 엘레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상 마야와 ''의 추측에 불과하다. 이야기를 들려줄 이들은 죽었고 우리는 그 뒤에서 그 이야기들을 그럴듯하게 꿰맨다. 이야기는 너무 쉽게 신파로 치닫거나 어떤 비극의 전조를 내포한다. 마이크 바비에리와 엘레나는 어떤 관계였을까, 리카르도와 엘레나는 단 한번도 서로를 떠나려고 생각한 적이 없었을까. 마야가 기억하던 리카르도에게 또다른 모습이 있지 않았을까? 그 기나긴 시간, 일레인이 '수명이 다해 죽은' 리카르도를 다시 받아들이기로, 엘레나로 되돌아가기로 마음 먹고 단숨에 비행기를 타겠다고 결심한 기억은 무엇이었을까.

추락한 잔해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침묵하는 시체들 뿐이다. 조종사가 다급히 위로, 위로를 외쳤을 때 엘레나는 평온한 대신 다른 기분이었을 수 있다. 그녀는 점점 다시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 가라앉는 기분이란 리카르도와의 재회, 몇십년 전의 그녀로 기억하는 리카르도와 몇십년 전의 그로 기억하는 엘레나의 만남, 그게 설령 무엇이든 간에 기억의 간극은 그들에게 그들이 당했던 비극을 다시 한번 마주하게 할 뿐이다. 서로가 없이 마주해 왔던 불안들, 불행, 방황, 원망들.

리카르도가 엘레나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었던 사진은, 결국 그들이 다시 만나도 헤어질 수 있다는 어떤 암시이자 서글픈 배려였다. ''는 리카르도가 왜 그 사진을 굳이 찍었는지 알 수 없다. 아니, 그는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리카르도와 엘레나의 사랑이 결국 미완으로 끝났지만, 그들은 서로를 바라고 있었다는 것이 그와 마야의 미래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바램과 달리 아우라와 레티시아는 떠난다. 사라졌다.

 

 

전락

 

누가 평화봉사단을 원하는가? 엘레나는 평화봉사단으로서 어떤 이상을 실현하기를 원했다. 그녀가 리카르도에게 끌린 이유는, 그에게 끝끝내 매혹된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리카르도는 하늘을 알고 있다. 다만 그녀의 이상주의적인 측면보다 리카르도는, 마이크 바비에리에 더 가깝다. 바비에리는 리카르도에게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고, 그들이 이 세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존재들이라고 상기시킨다. 마리화나의 합법화라는 어불성설의 미래, 엘레나가 그에게 설복당한 것은 그녀 또한 그런 지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리카르도는 비행기에서 격추되는 대신 세상으로부터 격추된다. 세상은 그들을 주저없이 내리꽂고 파멸하게 만들었다. 엘레나가 탄 비행기가 격추하는 것은 결국 이 세상에서는 어떤 이상성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평화봉사단은 무엇에 봉사하는가? 평화, 평화. 그 어중간한 말들. ''는 엘레나와 리카르도의 이야기가 어떤 각도에서든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걸 안다. 그가 마야에게 아우라와 레티시아의 이야기를 숨기는 것은 바로 전염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 또한 리카르도의 질문에 함께 꿰뚫렸고, 리카르도가 원했던 이상과 그 격추를 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 또한 리카르도의 운명에 따라갈 순 없다.

하지만 세상은 불안하고, 아우라는 그에게 상처 받은 이상 되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을 알려준다. 그는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다. 그저 더이상 놓치지 않으려고, 태연한 척 가장하면서 살아야 한다. 아우라는 그에게 불안하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 또한 너무나도 불안하다고, 서로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깨달음은 너무 늦고, 희극보다 비극이 더 많다는 것은 비극이 우세하다는 것이 아니라 애석하게도 비극적으로 끝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연성의 승리, 그게 소설의 뒷표지에 실린 추천사처럼 사회가 원인일지 아니면 어떤 인간들의 이상과 꿈이 자만과 전락으로 끝나야 하는 우연 같은 필연의 법칙일는지는, 우리는 끝끝내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을 애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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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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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하게, 깜박이는

 -편혜영의 '홀'을 읽고-

 

 

 

 

 

 

 

 

의학 아닌 의지

 

수많은 링겔과 약품, 바늘과 칼은 그의 몸을 살아있게 했지만 오기의 정신을 세상으로 돌아오게 한 건 어떤 희뿌연 것이었다. 막연하고 말할 수 없는 그것, 사지를 움직일 수도 없고 도망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의 혀를 깨물지 않고 버텨나갈 수 있는가. 인간에게 가장 강렬한 게 생존의 법칙이라는 말만으로는 채 다 설명되지 않는다. 오기를 이 세상에 붙들고 있는 것은 바로 오기조차 알 수 없는 몸의 존재와 아직 살아 있다는 감각, 그리고 움직이기 시작하는 몸이 선사하는 희망 같은 절망, 혹은 절망 같은 희망이다.

그의 이름대로 그 뿐 아니라 그의 장모가 살아 있는 이유는 어떤 오기다. 그들은 무엇에든 질 수 없다. 아내와 장모보다 사실 오기와 장모가 더 닮았다. 장모는 긴 홀드레스와 커트러리를 정식으로 사용할 줄 알며, 예의범절과 시니컬한 유머를 던질 줄 안다. 그녀는 자신의 딸에게 집착한다. 그녀의 남편이 동료 교사와 연애 사건을 일으키면서 그녀 자신을 배신했고 그녀를 초라한 집구석에 처박히게 내버려두었지만, 그녀의 딸만큼은 그녀의 분신처럼 행복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반지를 바라보는 장모의 시선에는 자신이 이걸 가져도 되겠냐는 애도의 뜻뿐 아니라 그녀 자신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가질 수 없다는 소유욕이 드러난다. 만약 오기가 거절했더라도, 그녀는 그 반지를 가지지 않았을까? 오기의 호의는 장모에 대한 미안함이나 배려, 존중이 아니다.

오기와 아내의 삶은 그 둘만 아는 비밀이다. 장모는 그 비밀에 대해서 모른다. 그 비밀이 드러났을 때 장모는 오기를 묻어버리겠다는 듯 구덩이를 파지만, 오기가 그 구멍에 떨어졌을 때 느끼는 건 어떤 당혹감이나 장모에 대한 원한이 아니라 편안함, 편안함이다. 오기와 아내는 생에 대해 열렬하게 질투했지만 정작 그들이 원했던 어떤 것도 확실하게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이 사는 생은 타인이 보기에는 아름다운 쇼윈도우였지만, 실상은 텅 빈 쇼윈도우나 다름없다. 어차피 아내의 흥미가 바뀐다면 그 집도 바뀌게 될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가 절망했다는 걸 알고, 그래서 서로를 원망한다. 서로 원인인 양 다투지만 알고 있다. 그들이 서로의 절망을 가장 가까이 목격했기 때문에, 그래서 더 서로를 증오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한없이 가여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기의 자기

 

유골이 담긴 자기들, 장모는 물질들을 가져다 두고 오기를 심판하려 한다. 그러나 과연 오기는 장모에게 심판받을 자격이 있는가? 장모는 그에게 쓸데없는 자격지심이 없는 남자라고 말한다. 오기는 자신의 삶이 여태껏 이상주의자보다는 아버지에 가까운 속물이었다고 생각해왔다. 그는 아버지에게 반감을 느끼는 한편 아버지와의 공통점을 뼈저리게 느낀다.

소설은 어떤 확정된 스캔들도 내놓지 않는다. 그저 미완된 관계들, 실패한 관계들을 내놓는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마찬가지고, 어머니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역시 아내와 오기도 마찬가지이고, 오기와 제이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결국 현실에서 한계점을 찾고, 서로를 저주하거나 연민하며, 실패에 봉착한 자신들을 추스리느라 바쁘다. 이 무한한 이기주의적인 관계 끝에서 그들은 얼마나 더 이기적으로 굴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가?

장모의 어머니 유골함은 욘사마를 보기 위해 온 친척의 손에 의해 전해진다. 너무나도 사소한 이유에 의해 한 개인의 중요한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다루어진다. 간병인의 에피소드는 그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보이는 대신 그를 더 먼 곳으로 내팽개쳐두고 그가 가지고 있던 세상에 대한 양식을 짓밟는다. 그는 한낱 병신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어떻게 희망을 품고 그 희망이 짓밟혀가는 것을 지켜보는가, 40대가 되면 결국 죄를 짓기 좋은 나이라기보다는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것들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지켜보면서 그 허무한 것들을 부숴버리겠다고 히스테리를 부리거나 혹은 그 앞에서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 속물이 아니면 잉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믿고 있던, 어떤 시인의 시에서 나왔다는 그 표현은 끝끝내 시집에서 찾지 못한다. 오기는 그 의미를 충분히 설명하지만 어떤 책에서 나왔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이는 정말 시집에서 나온 것이거나 아니면 오기가 자신이 느낀 것을 시집에서 읽었고, 그 읽는 것을 들었노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후자일 경우 오기는 살아남겠다는 의지로, 자신의 사십대가 어떤 나이인지 이미 깨닫고 있으면서도 마주 보기를 피하면서 '오기'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결국 나약한 한 마디, 다스케테구다사이 뿐인 것을.

 

 

어떤 명멸

 

아내는 아름다운 집을 가지고 싶어한다. 그녀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삶을 꿈꿀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녀는 이전에 집에 살았던 치매에 걸린 노파와 기력이 쇠한 남편을 떠올리고, 그들의 암모니아 냄새 때문에 땅에서 아무 것도 자라지 않은것이라고 말한다. 그 서슴없는 태도는 그녀의 어떤 믿음, 삶에 대한 믿음에서 기인한다. 그녀는 자신만큼은 그 노부부처럼 남루하고 형편없게 되어버리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그녀는 새흙을 사서 섞고 꽃들을 심고 가꾼다. 정원을 가꾼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오기의 생각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행위에 불과한 것일까? 아내는 삶을 되찾고 싶어했다. 아름다운 삶을. 그녀가 잃어버렸다고 믿었던 삶을.

그들은 이사온 날 집안의 불을 다 켜두지만, 다음날 아침 그 불빛들이 다 꺼졌다는 것을 발견한다. 전구가 꺼진 것이 아니라 불빛이 '사그라든 것이다'. 이 명멸들, 전구는 그들이 끈 게 아니었지만 결국 꺼졌다. 아내는 '몰타의 매'에 인용된 한 남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의 전 아내가 그를 결국 찾아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만큼은 아마 소설에서 나오지 않았거나 그리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내는 그 이야기, 그 이후에 집중한다. 아내가 그를 찾았다면, 그들은 이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아내는 스스로 그 결말을 말한다. 그리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들은 에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꿈이 가득했고, 약간의 허영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가득 했던 때로, 그들에게 남은 건 환멸, 환멸 뿐이다. 다만 오기는 그녀를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한편 그녀가 무서워하는 것으로부터 그녀를 지켜주겠다고 생각했고, 혹은 그녀와 함께 있겠다고 생각했고. 다만 그가 그 환멸을 그녀와 다른 방식으로, 같이 뼈저리게 느꼈을 때. 그는 과연 서로에게 서로가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함께 있었다는 것, 그 불안을 껴안은 채로 서로를 원망하고 밀어내고 때리면서도, 이혼이라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이 모든 것이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들은 비로소 같이하게 되어버렸다. 그는 자신의 방향으로 핸들을 꺾어 살아남았다고 생각한다. 그건 사실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명백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명백한 사실이라는 것과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모든 것은 일방적인 추측과 판정, 기미들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선고 끝에서야 피고는 처벌되면서 법정으로부터 비로소 풀려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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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
모신 하미드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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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끗한 빈 손
 -모신 하미드의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법'을 읽고-

생존을 위한 반대

 오십 명 중 한 명이 죽는다는 병에 걸린 '당신'은 아파서 땅에 얼굴을 댄 채 움직이지 못한다. 아버지는 그런 '당신'에게 묻는다. 괜찮느냐고.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건 어쩌면 부모의 위안, 무즙이 아니라 보다 효과가 좋은 약, 포옹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오토바이나 새 자전거, 장난감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어리광을 피워도 된다는 생각까지도 가지기 어렵다. 아프다는 말 대신 당신은 '네'라고 답한다. 아픔을 고백할 수 있을 만한 여유는 없다. 자신에게 절실한, 고통을 표현하는 대신 그 반대를 대답한 순간부터 아버지에게 그는 강한 아이가 된다. 그의 형과 누나도 마찬가지로 그들이 살아내는 지리멸렬한 삶에 대해 두렵고 질리면서도 차마 솔직하게 고백하지 못한다. 자신의 뜻을 숨기고, 낯선 이들로부터 스카프로 젖가슴을 가리며, 페인트가 묻은 채 돌아다니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 
 자기계발서는 결국 '자기'가 스스로 성공해야 한다는 것을, 앞으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당신의 책임에 불과하다는 메시지를 강조하는 차원에서 끝난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도시로 나가 일하고 있는 아버지는 지주들이 지나갈 때마다 고개를 수그리는 데 개의치 않으며,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길 거부하는 수도원 사람들에게 반감을 보인다. 그들이 순응하며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계급 구조에서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그 질서에 순응하고 그 질서의 구조를 배운다. 아버지는 그래서 '당신'을 교육시켰다. 고등 교육까지. 아버지는 그들의 구조를 배우고 그들의 구조에서 '당신'과 아버지가 올라갈 수 있는 한계를 알고 있다. 아버지가 말하는 성공이란 당신이 말하는 성공보다 한참 낮다. 
 하지만 공부는 점점 할 수록 이상향에 가까워진다. '이상주의자를 조심하라'는 자기 계발서의 말은 이전의 팝 심리학, 생각이 모든 한계를 뛰어넘게 해준다는 이상주의에 대한 작가 나름의 '진짜 자기 계발서'의 수칙이라 할 수 있다. 이상주의자들은 커뮤니티에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고 약속하지만, 그 약속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어떤 효용성도 발휘하지 못한다. 사랑도 이상주의의 한 축이 되어버리는 이 상황에서 '당신'은 삶의 모든 충동에 반기를 든다. 
 그렇다면 이 반대는 흔한 신파 드라마의 한 부분이 되어버리는가? 작가는 '당신'의 감정에 쉽게 이입하지 않기 위해 애쓴다. 거리감을 두는 건 '자기 계발서'의 입장에서 당신의 모든 행동을 판단하고 훈계하기 위해서다. 당신은 듣지 못한다. 어쩌면 그 시선은 초자아의 시선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결국 그 생존의 법칙에 따라 더럽게 부자가 된다. 그렇다면 그 시선의 끝에는, 행복이 있을까?


실패한 두 사람

 애석하게도 그는 가족에게 버림받고 처남에게 배신을 당한다. 그가 지키려고 했던 가정이라는 공간은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에 의해 해체된다. 이에 그를 탓할 수도, 그의 아내를 탓할 수도 없는 까닭은 이 자기 계발서의 시선이 심각할 만큼 공정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를 사랑하지 못한다. 사랑하려고 애쓰지만 그 사랑은 아내와 그의 아들이라는 세 축을 기준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가 온전히,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는 버리고 싶었던 과거의 일환이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만 그와 함께 할 수는 없다. 그녀는 가족을 버렸고 과거를 버렸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보다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성공하기 위해 나비처럼 날아다닌다. 나비는 날개가 젖거나 무거워지면 날지 못하고, 까닥하면 사마귀에게 잡아먹힌다. 나비의 아름다운 날개에 반해 무작정 잡아서 박제를 시켜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녀는 그 손길에서 벗어나 살아남기 위해 아둥바둥 날아왔다. 그 필사의 몸부림을 알기 때문에 그와 그녀는 서로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들이 생각했던 성공을 향해서.
 하지만 그는 결국 가정을 잃었고 그녀는 충실한 오른팔을 잃었다. 그게 그들이 저지른 과오 때문이며 그들의 결말이 인과응보였다고, 우리는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저자였던 '부자 아빠'는 끝내 '가난한 아빠'가 되었다. 그들은 노력을 했고 성공을 거두었다. 그 노력은 분명히 더러운 노력들이었다. 그녀는 영화를 좋아했지만 영화에 출연하는 대신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했고 스폰서를 얻기 위해 애썼다. 그는 폭력배를 동원해 이웃집 소녀에게 시선을 받고 싶어했던 총잡이 소년을 죽여 라이벌에게 위협을 가했고 전쟁 군수 사업에 동참했으며 로비를 서슴치 않았다. 모든 동화는 그 끝을 말하지 않는다. 그저 행복하게 살았다고만 할 뿐, 그들이 그 뒤에 겪을 미래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소설의 잔인한 점은 바로 그 실패까지 다 기술해 버린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실패는 평가를 위한 실패가 아니다. 지나친 감정이입으로 그들의 모든 오점을 가려버릴만한 실패도 아니다. 


성공한 두 사람

 행복의 정점 이후를 기술하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다. 무엇이든 최고를 달리면 그 이후는 하락밖에 없다. 추락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다시 성공하지 못하거나 성공할 생각도 하지 못한다는 말은, 어떻게 보면 하나의 슬로건이거나 수치화의 결과다.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다 성공할 수 없다. 성공하기 위해 어떤 것을 버리고 취한다. 백설공주는 마녀를 죽이고 왕자와 결혼했지만, 그녀가 과연 새 어머니에 대해 원망만 품고 있었을지는 모른다. 그녀가 과연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있을지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완벽한 성공이란 너무 멀다. 우리의 손은 한정되어 있고 그 손에 쥘 수 있는 건 우리가 생각하고 바라는 것에는 다다르지도 못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은 가장 실패했다고 생각한 순간 서로가 놓친 것을 다시 쥘 수 있게 되었다. 손안에 들어 있던 것들이 다 빠져나가거나 그들 스스로가 놓은 순간, 바닥에 뒹굴어 너덜너덜해진 그 감정들을 다시 들어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다시 주운 그 감정은, '그래도 아름답다'. 
 생존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성공을 최우선으로 했던 그들은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안위보다 상대방을 걱정한다. 그녀는 혼자 남겨질 그를 걱정하고, 그는 혼자 남는 순간 떠나간 그녀를 생각한다. 그 때 그들은 온전하게 서로의 소유가 되면서 서로를 가진다. 문학은 그 실패를 아름답게 그린다. 그래서 지나치게 감상주의적이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지만, 이 자기계발의 시선은 공정하게 실패와 성공, 성공과 실패를 그린다. 그 시선이 한쪽에 치우쳤다고 누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더럽게 부자가 되었지만, 그들은 가장 깨끗한 빈 손으로 놓쳐버렸던 서로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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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내성적인
최정화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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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하게 짚어내는 불행의 전조들

 -최정화, '지극히 내성적인'을 읽고-

 

 

 

 

 균열과 파열

    

 사건은 소리 없이 시작된다. 어느날 불현듯 찾아온 예감들, 그건 마치 저 위에서, 혹은 옆에서 사소하게 들려온 메시지처럼 가볍고 무책임하다. 최정화의 소설 속 인물들은 끊임없이 평범한 삶을 가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평범한 삶이란 무엇인가? 평온하게 살다가 평온하게 죽는 것, 황정은의 인물들이 원했던 것처럼 맛있는 과일을 실컷 먹고 잘 자는 삶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제는 너무 먼 것이 되어버렸다. 최정화의 인물들은 이 삶을 견디고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하고 두려워한다. 소설책 제목만큼이나 그들이 '내성적이기 때문'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여자가 자기가 나인 줄로 착각하고 내 구두를 신고 갔다고 말이에요."(구두, 26)라고 말하는 화자에게 그건 단순히 구두를 바꿔 신고 간 실수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고, "하지만 어쩐지 아내의 불평이 자신을 향한 것으로 들렸다. 그는 너무 오래되었다. 그들 사이는 너무 오래되었다고 말이다."(팜비치, 31)라는 말에는 그의 늘어난 뱃살에 대한 화풀이라고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입을 벌려 손가락을 집어넣고 윗니를 붙든 채 꿈지럭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 앞에 다가온 불운의 조짐을 보았다."(틀니, 78)는 사소한 예감은 점점 인물들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커진다. 커져버린 두려움은 마치 경사로를 굴러떨어지는 공처럼 가속도가 붙는다. 공의 속도를 늦출 수는 없다. 우리는 그 속도가 붙으면서 점차 공을 아래로, 아래로 끌어당기는 힘도 더해진다는 걸 안다. 공을 멈추려면, 그 경사로를 끊어버리면 된다. 그러면 공은 굴러 내려가는 대신 '떨어진다'. 황정은의 '낙하하다'라는 단편에서 화자는 점차 자신의 몸이 가벼워지고 상승하는 것을 느끼지만, 최정화의 인물들은 상승할 수 없다. 그들에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란 없다. 그들은 그저 콘크리트 바닥의 엷은 균열을 볼 뿐이다. 그들은 그 균열만 메꾸면 괜찮을 것이라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속삭이지만, 실제로 그들이 마주하게 되는 건 소리 없이 자라난 균열이 이르게 하는 파열이다. 균열은 일부분이지만, 파열은 그들의 인생을 쪼개어 산산조각낼 예감이다. '구두'에서 여자는 자신이 가사 도우미로 부른 여자와 묘한 거울상을 이루는 생활의 디테일과, 여자의 자신만만한 태도에서 자신의 불안과 함께 여자의 욕망을 읽어낸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한다. '보통은' '과민해서' '잘못 생각한 것'이라고 끊임없이 부정하던 그녀는 남편과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우월감'과 붙임성이 좋은 아이들을 키워낸 '화목한 가정'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면서 그 여자의 그림자를 떨쳐내는 듯하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다시 의심으로 돌아온다. 그건 그녀가 남편의 권고에 따라 전주로 가게 되었다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불안이다. "처음은 겨우 단 한알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전체가 끔찍한 냄새를 풍기게 된다는 거지요."(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 147) 그렇게, 의심은 뚜렷해지고 균열은 파열선이 된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이런 불안을 느끼게 되는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사건-우연한 사건에 의해 불행해지게 되는 인물들인가?

 

 

 

 

그래도 싼 사람들

     

'홍로'의 초점 화자인 '', 자신의 삶에 어떤 변화도 끼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건 삶의 조력자다.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그의 평온한 생에 더 이상 참견하지 않는 여자. 자본 소유의 우열관계에서 그는 '이용순'이라는 여자보다 우위에 서 있다. 때문에 그는 그녀에게 이십만원, 삼십만원을 준다. 마치 껐다 켤 수 있는 라디오처럼 그녀를 이용한다. 그녀의 아들이 휴대폰을 팔든 인생을 말아먹었든 그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평상시 그녀의 목소리가 ''음이었다면 지금 그녀의 목소리는 ''이었다.(홍로, 116)" 그는 거짓말을 주문했고 이용순은 멋지게 거짓말을 해냈다. 이 연극을 끝내는 손은 점차 그가 아니라 이용순의 손으로 넘어간다. 그가 잘못한 것은 무엇인가, 돈으로 이용순을 사려고 한 점? 최정화의 소설 속 인물들은 너나할 것 없이 현실에 안주하고 있으며,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그들이 현재와 같으리라고 예상하던 미래의 상이 흔들리는 순간이다. "그런 일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의심 없이 그저 하던 대로 쭉 하는 것 말이다.(팜비치, 36)"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다면 변한 미래도 상상되지 않는다. 그들의 문제는 바로 '상상의 부족'이다. 그러나 그 부족함은 선천적인 부족함, 선천적인 악이 아니다. '부족함'은 바로 '포기'에서 온다. 그들은 어떻게든 이 소설에서 살아남으려고 하고, 그러기 위해서 그들 자신을 타인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려 한다. '집이 넓어지고 있어'의 화자가 "나는 그저 이렇게 고요하게 살다가 어느 날 전기 콘센트에 감전사하는 작은 소망을 갖고 있(집이 넓어지고 있어 247)"듯이,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폐쇄이고 감금이다. 타인에게 지기 싫다는 이유로, 어떤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억울함 때문에 끊임없이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이 삼인칭이지만 일인칭에 가까운 인물들의 해명 아닌 해명에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들은 그래도 싸다고. 하지만 과연 그렇게 쉽게, 그들과 그들을 읽고 있는 우리 자신을 분리해서 판정을 하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서사가 마냥 통쾌하지만은 않은 이유는, 그들이 그래도 싼 취급을 덜 충분히 당했다거나 불쌍하다기보다는, 우리도 비슷한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오가닉 코튼 베이비''그녀'"여전히 악몽을(오가닉 코튼 베이비 76)" 꾸며, "꿈의 내용을 더이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오가닉 코튼 베이비 76)"는 것, 그리고 "알코올의 기운"을 빌려 겨우 잠에 들고, "다시금 다가올 불행-목 디스크의 재발-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하루치의 긴장을 모두 잊고 마음껏 경추를 일그러뜨리(오가닉 코튼 베이비 76)는 모습에서 우리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뱀파이어형 인간이라며 자신을 소모하고 하소연하는 데에만 이용하는 사람들을 멀리하라는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지 않은지, 그래서 혹시 어제 친구가 내 연락을 받지 않은 것인지 두려워하고 이 정보를 보내준 사람의 의도를 의심한다. 그리고 우리는 점차 입을 다물고, 그녀처럼 다가올 불행들을 외면한 채, 꿈의 내용도 말하지 않고 위안거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의지하지 않으리라고 믿었던 어떤 최악의 것에.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동정하지 않는다. 다만 어느 순간 공감한다.

 

 

 

불행한 앎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얼마나 알아야 힘이고, 그 힘을 어떻게 쓸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거대하고 무거운 머리를 지탱하지 못하고, 어쩔 줄 모르면서 나아가기만 한다. 한때 어렸을 적 공상과학 영화에서 나온 외계인들의 머리는 그들의 가느다란 몸에 비해 컸다. 그 불균형은 그들의 기술이 인간들보다 더 우월하다는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적으로서 물리쳐지거나 혹은 친구가 되었다. 휴머니즘이란 이상한 곳에서 발동하게 된다. 적이 아니면 친구여야 한다. 앎에서도 마찬가지다. 앎은 그들의 체계를 나누고 그들의 편을 가른다. ‘팜비치의 화자는 진짜 팜비치에서 온 남자 앞에서 불안함을 느낀다. 그 남자는 팜비치가 무엇인지 알고 있고, 팜비치의 식대로 모든 것에 자신만만하게 나선다. 화자인 가 애써 가져온 상어튜브에 아이를 태우려고 할 때, 남자는 그를 저지한다. 그의 육아법이 마치 최선의 것인 듯. ‘파란 책의 여자에게 하이데거란 5센치미터의 두께에 푸른 바탕의 책에 불과했다. 그러나 남편의 친구, 전직 철학학도였던 남자가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순간 그녀는 상승의 욕구를 느낀다. 그 친구가 부여한 정체성이 그녀의 마음에 든 것이다.

  그녀의 오산이라면 바로 그 책을 읽었다고 자랑하는 게 아니라 그 책을 알고 싶어했다는 점에 있다. 그녀의 집에 오는 친구들은 대부분 그 책을 읽지 않았다. 그저 그 책을 집어들어 몇 장을 펼쳐보고 내려놓을 뿐이다. 약간의 찡그림과 함께. 그것은 이 인테리어가 아름답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의 모임에서 너무나도 이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 삶에 대한 고찰. 그들은 텅 빈 방을 상상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아름답게 꾸며지고 트렌드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 그녀도 쇼핑 윈도우의 삶을 살았다.

  그렇다면 그녀가 존재와 시간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녀가 계몽되고 진정한 삶으로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마치 인형의 집의 노라처럼? 우리는 그렇게 낙관할 수 없다. 그녀가 택하는 것이 최고의 윤리이고, 우리는 그 윤리를 짓밟는 현대 사회의 폭력을 본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녀가 들어간 세계는 또다른 인테리어의 세계다. ‘오가닉 코튼 베이비의 여자가 건강식품에서 요가로, 요가에서 유기농 제품으로, 이어 심리상담에 이르기까지 그녀 자신의 삶을 복구하고 안전해지려고 애썼으나 끝내는 그 악몽들을 떨쳐버리지 못했듯이, 그녀 또한 자신의 삶을 충족시킬 것이라고 믿었던 것들로부터 배반당할 것이다. 앎은 이제 삶의 어두운 부분을 밝혀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폭력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푸른 책은 하이데거도 멋진 소품도 아닌, 결국 푸른 책으로만 남을 것이다. 그 배반의 가능성을 품은 사소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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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 사육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1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승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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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전집

-오에 겐자부로 '오에 겐자부로'를 읽고-

 

 

 

 

 

비열한 자는 누구

  

나는 정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일들에 있어 열중하기에는 너무 젊었던가 너무 늙었다. 나는 스무살이었다. 기묘한 나이였고 완전히 지쳐 있었다.”(기묘한 아르바이트, 12)

 

  오에 겐자부로의 데뷔작이라고 할 만한 기묘한 아르바이트의 매력은 150여 마리의 개를 죽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인물 간의 대화에 있다. 이들은 돈을 받기 위해 일하면서 나름 이유들을 끌어다 붙인다. 생물학과 공부에 의의가 있을 것 같다거나 각기병에 좋은 약을 사먹겠다는 것이다. 사자의 잘난 척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다들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하지만 이 이유만으로는 살육의 현장에 버티고 앉아 있다는 이 행동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대학원생과 여자 대학생, 화자인 나와 개백정은 끊임없이 자신을 정당화하거나 상대방이 비열하다고 비난하기에 바쁘다. 그러나 그 비난은 곧바로 부정되는데, 가령 대학원생이 개백정에게 괜한 가식적 동정심을 베풀지 말라고 하자 개백정은 그에게 개를 죽이지도 못한다고 공격하고, 이어 대학원생이 몽둥이로 개를 내려치는 장면이다. 그러나 대학원생은 결국 개를 죽이지 못한다. 화자인 내가 개를 죽이자 또다시 비난이 잇따른다. 공격도 하지 못할 만큼 엉망이 된 개를 죽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순적인 대화들이 맞물리면서 조용한 분노들이 곳곳에서 끓어오른다. 사자의 잘난 척기묘한 아르바이트의 문제 의식을 보다 더 예리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쓴 것이라고 하지만 그 층위가 다르다.

  기묘한 아르바이트의 인물들은 타인을 비열하다고 비난하면서도 정작 자신 또한 그 비열한 주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앞 작품이 고발이라면, 뒤의 작품은 재판 후를 말한다. 이는 오에 겐자부로가 삶의 습관이라고 제목을 붙인 후기에서 밝힌 바, 일종의 시대 정신이 반영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오에 겐자부로가 시대 정신이라고 말한 것은 나쓰메 소세키의 인물들이 자결을 택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그 시대의 목격자가 되는 것이다. 두 작품은 전후 일본에서 대학생으로 살아가게 된 이들의 입장에서 쓰이고 있다. 그들은 희망할 기운조차 없다. 작품에서 번복되서 나오는 묘사와 감정 표현은 지쳤어라는 고백이다.

  사자의 잘난 척에서 죽은 이들은 완전한 사물이 된다. 사물은 영속한다. 화장한 이들은 가루가 되어 흩날릴 뿐이다. 그들은 자유롭게 유영하거나 가라앉고, 혹은 화자에게 언제든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고 속삭인다. 그들은 산 사람들을 속박하는 모든 관계와 의무로부터 벗어난다. 죽은 군인은 화자에게 다음 번 전쟁은 너희 차지라고 말한다. 승리하지 못한 전쟁은 패전국 아니면 승전국이라는 판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교수는 돈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그에게 부끄럽지 않느냐고 묻지만, 그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건 돈 때문에 이런 일을 한다는 게 아니라 죽은 소녀의 클리토리스를 힐끔힐끔 쳐다봤기 때문이었다.

 비열함은 곳곳에 있고, 그 비열함을 무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고발하고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이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애꿎은 희망들을 저지하는 것이다. 희망하기에 그들은 너무 지쳤고, 절망하기에도 지쳤다. 교수는 그들에게 절망을 요구하지만 늙은 스무살들은 절망할 기운조차 없다. 결국 그들은 죽은 이들이 잘난척한다고 여길 만큼, 속박에서 풀려난 이들을 부러워한다. 그들이 수행했던 죽음이나 작업들이 쓸모없는 것으로 밝혀졌을 때, 그들은 또다시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돌리려고 애쓴다. 결국 모두가 비열하다고 서로를 비난할 때, 그들 스스로 비열하다는 비판을 되돌려 받는 셈이다.

 

 

 

  사악함의 보존

    

 이요의 여동생 마짱은 이 세상을 두려워한다. 세상은 이요를 잠재적 성범죄자로, 저주받은 이로 여긴다. 이요를 피해자로 만들고 장애가 있는 오빠를 잘 챙기는 선량한 여동생이나 누나로 만든다. 하지만 마짱에게 이요는 짐이 아니다. 마짱은 이요를 감당할 수 있을만한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말한다. 마짱이 다른 이들보다 더 선량하기 때문일까? 마짱은 선량하지 않다. 그녀는 세상이 말하는 도덕적인 기준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세상은 이요가 얼마나 깔끔한 지 모르고, 이요가 얼마나 에 난감해하는지 모른다. 그저 이요를 한 마리의 훈련된 개처럼 여길 뿐이다. 때문에 마짱은 이요의 야뇨증이 나은 걸 기뻐하지 않는다. 부모는 그녀에게 곤란하지 않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말하지만, 마짱은 곤란하지 않게 된 사람이 누구냐고 되묻는다.

  하지만 마짱의 믿음이 늘 견실한 것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들은 정신지체아인 오빠를 돌보는 어린 여동생의 미담으로 끝날 것이다. 마짱은 이요를 지켜주려는 한편, 이요에 대해 끊임없이 생겨나는 의심을 무마하지 못한다. 그녀는 이요가 다니는 길목을 쫓아다니며 치한과 유사한 행동을 했을 때 이요를 강아지 부르듯이 대한다.

  세상은 이요를 방사능 유출로 인해 태어난 돌연변이처럼 대한다. 이요는 이해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런 난해함은 러시아의 백치 유로지비처럼 계급의 상층부로 올리는 대신, 사회적인 소통이 불가하다는 이유로 동물과 비슷한 바닥으로 내려놓는다. 마짱은 이요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요의 이해할 수 없음이 세상에서는 사악함으로 치부된다는 것을 안다. 그 사악함에 대해 부정하고 싶더라도 그녀 자신이 갈등을 겪지 않고서는 이를 부정하겠다는 의식조차도 느낄 수 없게 된다.

  마짱, ‘가 영화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부분은 바로 안내인의 아내가 하는 고백 장면이다. 안내인의 아내는 절망하면서도 황금색 스카프로 아이의 머리를 가리며, 그들을 떠나지 못하겠노라고 고백한다. ‘는 이요 때문에 괴로워한다. ‘는 자신의 부모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요가 정말 사악한 존재라면, 마짱은 그를 벌레 대하듯 대해야 하는가?

  이요에게 는 마짱이다. ‘는 이요에게서 떨어져서 그를 돌연변이로, 장애아로 대하는 다수의 사람들 편에 서는 대신 사악함으로 치부되는 이요의 편에 선다. 그 이유는 나의 희생정신 때문만이 아니라, 이요 또한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요는 발작하면서 보이는 환영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짱을 지키기 위해 움직인다. 세계는 문명화되면서 논리가 아닌 비논리적인 이분법을 가했고, 이요는 사악하므로 계몽되거나 훈육되어야 할 존재다. 하지만 이요가 그렇게 된다면, 이요가 당할 폭력들은 마짱이 사랑하는 이요를 훼손시킬 것이다. 마짱은 이요를 사랑하며, 믿는다. 그녀가 믿는 것은 혈육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이 아니라 이요를 믿는 그 자신의 보존이다. 마짱은, 나는 이요를 뿌리치지 않는다. 그로 인해 그들은 이 세상에서 사악한 존재로 남기를 선택한다.

 

 

  삶의 습관, 습관의 삶

    

  신곡의 벨락콰는 차근차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대신 중도에 머무른다. 그의 행동을 죄악으로, ‘게으름으로 규정지을 수도 있다. 원래 인생이 탄탄대로였던 유리에가 발걸음을 멈춘 건 그 중간이었다. 단테가 벨락콰의 유혹을 받았듯이, 유리에 또한 상상임신에 가까운 상황에서 멈춤의 유혹을 받는다. 중간은 어디로든 갈 수 있고, 어디로도 갈 수 없는 모순된 위치다. 유리에는 에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며 붙든다. ‘는 유리에에게 긴급 피난처나 다름없는 존재다. 하지만 는 유리에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벨락콰의 게으름은 그의 삶이 가지는 습관이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습관예술이 이미 습관이며, 그 예술 행위는 삶을 견디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습관은 우리에게 하여금 익숙해진 삶을 유지하게 만드는 한편 그 삶을 옥죄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오에 겐자부로의 습관은 고쳐 쓰는 것이다. 그는 어떤 결론을 곧장 내는 대신, 계속 유예한다. 유리에는 그에게 10분 늦었다고 말하지만, 그는 재치있게 10년이나 늦었다고 말한다. 그는 그때부터 유리에를 계속 유예해 왔다.

  사람들의 수많은 편견 중 하나를 들자면, 작가의 초기와 중기에 속한 작품들만 보고 후기 작품은 보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이 있다. 초기에는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애쓰고, 중기에는 노련해지며, 후기에는 이미 익숙해진 방법으로 익숙한 메시지를 말하는데 그 익숙함이 곧 지루함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에 겐자부로는 후기 작품까지 다다르면서 계속 중간에 머물러 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직시하고, 시대를 마주한다. 자폐아인 그의 아들과 소통하려고 애쓰면서 그는 그를 규정짓는 세계로부터 맞서 싸우고자 한다. 그의 싸움은 어떻게 본다면 아들을 지키기 위한 부정이자 세상에 대한, 사그라들지 않는 소통 욕구에서 기인한다.

  불을 두른 새에서 오에 겐자부로는 그가 내내 삶의 지침으로 믿고 살았던 시의 해석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실상 해석의 정확함은 일종의 모순을 지닌다. 텍스트는 수많은 해석을 낳으며, 그 해석들은 제각기 다 정당성이 있다. 다만 어떤 한 해석만이 좀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나 오에에게 남은 것은 어떤 회한이다. 그는 나의 영혼의 공유를 믿으면서 친구를, 아들을 마주 보았지만 친구는 죽고 아들은 휘파람 새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나의 영혼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그대로 느끼는 것일까. 그는 온몸을 던져 아들을 구했을 때, 그리고 아들을 진정시킬 때 느낀다. 그는 분명히 아들에게 닿았다’. 그건 어떤 나의 영혼의 복사판이라기보다는, ‘나의 영혼이 가닿는 순간일 것이다.

  그는 쉽게 어떤 희망을 포기하면서도, 끊임없이 그 과정들을 고쳐 쓰고 있다. 오에 겐자부로는 희망을 버리는 한편, 절망이라는 논리적 계단의 끝까지는 다다르지 않으려고 한다. 그 여정은 투쟁이고, 계속 중간에 머무르는 것이며, 단편집의 굵기에 애석하게도-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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