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 민음사 모던 클래식 49
샤리아르 만다니푸르 지음, 김이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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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탐, 속삭임, 한숨

-샤리아르 만다니푸르의 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를 읽고

 

 

 

코카콜라코프

 

글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맞춤법도 문단 정렬도 아니다. 글을 읽을 때 우리는 쓴 사람의 '생각'을 본다. 물론 문체가 통신어체거나 문단 끝이 들쑥날쑥하면 신경쓰이기는 한다. '생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내용과 형식에 치중한다. 그러나 '검열'은 이 내용과 형식의 표현을 자중한다. 풀밭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양들 사이를 울타리로 갈라 놓는 것이다. 이로써 자신의 사유재산이 다른 양들과 섞이지 않도록 보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나라 고유의 형식을 지키고 이어 나가는 것,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갈라 놓은 양들은 울타리 너머로 '나가려고' 시도한다.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넘는다는 나폴레옹의 말마따나 양들은 울타리가 거기 있기 때문에 나가려고 한다. 울타리 너머의 양들은 어떤가? 뿔은 제멋대로 치솟아 있고 털은 수북하거나 듬성듬성 나 있다. 제각기 모양이 다르다. 검열은 이 울타리 너머 양들을 '불량'으로 취급한다. 그들이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양과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는 양, 이 둘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렇다면 저 양은 양이 아니고, 이 양은 양이 아닌가? 양은 양이 아닌가?

'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에서 화자로 나오는 작가는 검열을 뚫고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출판하고자 한다. 그러나 검열관인 페트로비치는 사사건건 그를 막는다. 페트로비치는 어떻게 해서든 작가의 이야기를 '올바른 방향'으로, 판에 박힌 쪽으로 끌고 나가려고 한다. 작가들이 모두 같은 이야기를 쓸 수는 없다. 고전주의를 따른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는 작가 나름대로의 시선과 해학이 묻어난다. 하지만 페트로비치는 특정 ''에 그 내용을 맞추어 넣을 것을 명한다. 그리고 그 병에 이야기를 넣은 순간, 병마개로 막아 버린다.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지니가 병 속에 갇히듯 이야기는 갇혀 버린다. 사라가 대학에서 배우는 천년 전의 시들은 다 '정확한 의도'대로 '풀이'가 되어 있고, 사라는 그걸 외워야만 한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는 우리가 국어 시간에 배운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해설을 읽고 글의 의도를 외우는 것. 어떤 작가는 자신의 글이 수능 언어영역에 출제된 것을 보고서 신기한 마음에 풀어 보았다가 다 틀리는 영광을 맞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작가가 틀린 것인가, 아니면 시험 문제를 낸 사람이 틀린 것인가? 그 어느 쪽도 틀린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검열'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천년 동안 병마개에 막혀 보존되어 있다면, 와인처럼 숙성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그게 코카콜라라면? 미국 제국주의의 상징, 드럭스토어에서 약으로 팔다가 지금은 수많은 충치를 생산해 내는 해악으로 손꼽히는 코카콜라라면 어떨까?

사라와 다라는 와인이 아니다. 둘은 코카콜라에 가깝다. 그들은 배워서는 안 되는 것, 현대적 산물인 '사랑'을 배운다. '사랑'은 기존 이란 전통에서는 그냥 '존재'하는 것일 뿐, 그 존재를 입증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외국의 문물들로 '사랑'을 배우고, 늙어빠진 검열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기회를 노린다. 사라의 약혼자 '신바드'는 기존 이란 전통에 입각한 인물이다. 다라는 그 반대축에 서 있는 인물이다. 사라와 다라의 사랑은 '전통'에 얽매이는 순간, 굳어버린다. 다라는 사라와의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약혼자의 존재를 밝히는 사라도, 그 약혼자도 쉬이 용서할 수가 없다. 다라는 '신바드'를 죽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이는 사랑 이야기의 흔한 '비극적 요소'. 하지만 신바드는 다라의 존재를 안 순간, 포기한다. 그렇다면 다라는 행복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역시, '전통과 관습'이라는 검열에 의해 가로막힌다. 이들의 사랑은 이들의 사랑을 위한 병에 담겨야 한다. 막걸리는 단단한 자기 병에, 소주병은 초록색 유리병에, 맥주는 짙은색 유리병에 담아야 한다. 코카콜라는 알루미늄 캔에 담아야 하고. 각자 어울리는 용기가 따로 있다.

 

 

도덕성 저해 분야 전문가가 말한다.

"선생님, 영화를 더빙하는 과정에서 저들을 오래전에 생이별을 했다가 지금에야 다시 만난 남매로 만드는 것은 어떨까요? 그렇다면 저들이 함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영화 분야 전문가가 반대하고 나선다.

"선생님! 그렇지만 인디언 전통 방식으로 둘이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둘은 손을 맞잡고 인디언 천막으로 갑니다. 인디언 여자들은 이란 여자들이 결혼식에서 그러는 것처럼 웁니다."

도덕성 저해 분야 전문가가 대답한다.

"그 문제 역시 해결책이 있습니다. 영화를 더빙할 때, 인디언 하나가 이것이 오래전 생이별을 경험하고 이제야 다시 만난 형제자매들을 다시금 형제자매로 맺어주는 인디언 전통 의식이라고 말하게 하는 거지요."

X가 말한다.

"이 장면을 자르시오."

160

 

도덕성 저해 분야 전문가는 말한다.

"미국 감독들은 정신이 나갔습니다. 어떻게 눈도 안 보이는 병신이...."

순간, 그는 자기가 영화 분야 전문가와 똑같은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수습에 나선다.

(생략)

반미 분야 전문가가 말한다.

"중령이 비행기 조종석에 앉아 고층 건물 하나를 들이받았다면 훌륭한 영화가 되었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

243

 

그러나 검열은 이 '용기'들을, 그리고 그 내용물들을 일일히 검사하고 '올바름''그름', 두 쪽으로 나눈다. 그렇다면 코카콜라는 어디에 들어갈 수 있는가? 미국 제국주의의 산물이므로, '늑대와 함께 춤을'이 검열되고 잘려나가 원본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던 것처럼 변해야 한다는 것일까? 하지만 하나만 말해두자. 김 빠진 콜라는 맛이 없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

 

그렇다면 검열이 사라지는 순간, 모든 자유가 풀려나면서 사라와 다라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사실 이조차도 확신할 수가 없다. 검열이 사라진 후에는 있기 전보다 '결혼'이 더 쉬울 것이다. 하지만 과연, 결혼한다고 해서 사라와 다라의 사랑이 영원할까? 고전시 시린과 호스로는 아름답게 이어지고 끝났지만 사라는 응급실에서 '결혼 이후'의 시린을 본다. 남편 호스로에게 큰 상처를 입고 실려온, 신부 시린을. 사라가 '창녀'로서의 삶을 상상해 보는 건 다라와의 사랑을 소중한 그대로 이어나가고 싶어하는 마음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창녀''구매자'의 관계라면, 그들은 서로의 환상을 서로에게 뒤집어 씌운 채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세속적인 것, 집세와 내일 먹을 식량, 배급표, 직장에 신경쓰다 보면, 자칫하면 그들의 '사랑'이 오염되지는 않을까? 다라 또한 사라를 건드리지 못하고 '거리'를 둔다. 영원한 신부, 서정주의 시처럼 신랑이 손도 대지 않고 나가버린 방에 남은 신부는 화자가 손을 대는 순간 가루로 화해 사라진다. 환상 또한 그렇게 건드릴 수 없는, 물적인 것이다. 건드리는 순간 사라진다.

그렇다면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검열'이라는 존재는, 어쩌면 그들의 사랑을 더 아름답고 영원하게 해주는 것인가? 화자는 검열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작가들이 수많은 은유와 돌려 말하기를 사용한다고 말했다. 한번 걸린 것을 또 걸리게 할 수 없기에, 끊임없이 고심하고 고심한다고 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중동권의 시들의 은유는 그들의 '소심'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과감함, 검열에 맞서고자 하는 저항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검열'이라는 벽이 있기에 사람들은 그 벽을 넘으려고 애쓴다. 그렇다면, ''을 넘는다면 그들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인가?

 

1848년에 독일이 혁명 후 검열을 폐지했을 때 하인리히 하이네는 이렇게 썼다. ", 난 더 이상 쓸 수가 없다. 검열이 없는데 내가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검열과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검열 없이 글을 쓴단 말인가? 그동안의 스타일과 문법, 좋은 습관들이 모두 사라질 것이다!"

-마이클 키엘만, '우연한 걸작' 198

 

영화 '타인의 삶'에서 나오는 작가는 검열 때문에 그의 작품을 상연하지 못하거나 고쳐야 했다. 그래서 그는 저항 세력을 꾸린다. 하지만 막상 검열이 사라지고 나자 그는 미묘한 회의감에 빠진다. 이제 누가 그 '과감함'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하이네 또한 사라지는 검열에 대해 한탄했다. 어쩌면 페트로비치의 말을 반어법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페트로비치는 작가들을 닦달하는 '뮤즈'가 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사라는 다라와 곧 결혼할 사람인 척하고 웨딩드레스를 입으러 가고 다라는 사람들을 피해 전혀 낭만적일 수 없는 장소인 응급실에서 사랑을 표현한다. 가장 낭만적이지 않은 장소가 낭만적인 곳이 될 때, 그 때가 낭만 소설의 빛나는 순간이다. 이 빛나는 순간들로 인해 사라와 다라의 사랑은 점점 더 '숭고'해진다.

이렇게 검열관이 플롯 속으로 끼어드는 일은 허다하다. 일본 연극 '웃음의 대학'에서 검열관은 작가를 탄압하는 역할이었다가 이내 작가와 함께 대본을 쓰고 소통하는 인물이 된다. '뮤즈'가 되는 것이다. 그는 작가의 대본을 읽고 연기를 직접 해주기도 한다. 물론 가끔씩 제국주의적인 면모 때문에 찬물을 끼얹을 때도 있지만, 어찌 되었거나 검열관은 그 작가의 작품을 '인정하고' 그와 '소통'하게 된다. 그렇다면 페트로비치 또한 창조에 한 몫을 하는가? 만다니푸르는 페트로비치의 손을 빌릴 생각이 없었다. 페트로비치는 다라에게 '암살자'를 보내면서 이야기 속으로 끼어들고, 그로 인해 사라와 다라의 사랑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게다가 그는 더 나아가 '소설 속 인물'을 사랑하게 된다. 사라와 다라의 사랑에 '방해자'가 되는 것이다.

 

페트로비치는 말한다.

"제발 사라를 이 오입쟁이의 집에서 나오게 해 주십시오. 그녀를 집으로 보내요! 나 자신은 신바드를 중국에 보내 연필을 사 오게 할 겁니다."

"하지만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내 이야기의 플롯은 어떻게 하고요?"

"그렇다면 나는 당신이, 다라의 손이 그녀를 만지게 두는 것을 금지합니다."

454

 

"나는 이 이야기가 결국 훌륭하고 교훈적인 이야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창조성을 발휘해서 사라가 이 혐오스러운 다라와 끝내도록 하십시오."

458

 

'방해자'로 인해 또 사라와 다라의 사랑은 아름답게 빛날 것인가? 아니면 그 때문에 사라와 다라의 사랑은 '엉망'으로 끝날까? 작가는 사라와 다라의 사랑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검열''방해자'의 소재로, 그리고 미묘한 면에서 '보호자'의 소재로 쓰인다. 작가가 사라와 다라의 사랑을 위해 열심히 애쓰지만 만능 점쟁이의 말마따나 '주문'이라는 비현실적인 매체가 있지 않는 이상, 픽션에는 픽션으로 맞서지 않는 이상 가망이란 없다. 무엇보다도, 외부적 검열보다도 더 큰 방해물이 있으므로.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 쉽게 퇴치할 수 없는그들의 내부에.

 

 

 

국경에 서서

 

이 소설이 매력적인 점은 바로 '검열'이라는 소재를 '깊게' 다루었다는 점이다. 검열을 다루었다는 건 검열에 통과될 만한 올바른 텍스트나 검열에 통과하지 못하고 끝내는 사형 선고까지 불러일으킬 과감한 내용을 말하는 게 아니다. '검열'은 곧 검열을 하는 과정과 그 검열되는 텍스트를 동시에 다 다뤄야 재현할 수 있다. 잘려나가는 텍스트들과 그에 따른 갈등, 시련, 분쟁.

검열이란 것이 무엇인가? 소설 속에 씌여진 일을 마치 '실제로 일어난 일'처럼 보고 심각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닌가? 소설을 그저 픽션으로 봐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 전통에 위배된다는 시선으로 보게 된다면 소설이야말로 '추방'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어떻게든 자신의 소설을 출판하고자 한다. 그래서 페트로비치에게 찾아가고, 그의 말을 듣고 그에게 맞서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그렇게 소설을 '쓰는 과정'을 씀으로서, 작가는 자연스레 '검열'의 존재를 드러낸다. 금지된 것을 금지되지 않게 쓰기 위해서, 금지된 것 또한 살아 있다는 것을 역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사라가 '창녀'가 된 자신을 상상하는 이탈 욕구는 '검열'에 걸려 사라진다. 하지만 이미 쓰여졌다. 줄이 그어진 문장들은 이미 '쓰여져 있다!' 그리고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을 일들도 '실제 일어난 것처럼 다루는 검열' 때문에, 망령처럼 소설 속 플롯을 떠돈다. 죽은 게 분명한 시인이 자연스럽게 페트로비치에게 말을 붙이고 점쟁이는 소설 안과 밖을 넘나들며 서술한다. 이란의 '검열'을 피해서, 합법과 위법의 위태로운 경계선을 걷는 것이다. 자칫하면 한 쪽으로 넘어질 수 있는. 페트로비치는 그 '검열' 안으로 들어오라고 청한다. 사라에게 바람직한 사랑을 이루게 해주고 싶어하며, 다라라는 '해악'을 경계하고자 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 반대로 다라의 사랑을 이뤄주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들의 알력 다툼만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검열은 사라와 다라의 안에도 있다.

 

"내가 만지게 두어도, 이 다라라는 인물은 너무 서툴고 혼란스러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제 분명 자기가 어떤 집에 터키옥 색으로 페인트칠을해 준 얘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려 할 겁니다."

455

 

그때, 마치 갑자기 무엇이 생각난 듯이, 그녀의 눈이 커진다. 그녀는 얼어붙는다.

"무슨 일입니까, 사라? 무슨 일이예요?"

"내가 마당으로 걸어 들어왔을 때 첫번째 본 것이 재스민 덤불이었어요......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것이 나를 무섭게 했어요. 이제는 마치 무서운 눈 한 쌍이 덤불 속에서 나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459

 

사라는 다라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약혼자'라는 존재를 어쩔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여긴다. 다라는 그런 사라를 갑갑해하고 이해할 수 없다고 하지만 다라 또한 '검열'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이웃이 자신과 사라의 사랑을 엿볼까봐 겁이 나서 계속 망을 본다. '위험'을 무릅쓴다기 보다는 그들 안의 '검열'의 눈을 피하기 위해. 하지만 막상 사라와 다라의 사랑이 이뤄질 수 있는 순간, 둘이서만 한 방에 있는 순간마저도 다라는 망설인다. 그의 안에 있는 '검열'의 관념이 그들을 뜯어 말리기 때문이다. 그건 옳지 않다, 옳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는 강박에 가깝다. 사라가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덤불 속에서 누군가의 '시선'을 보았다고 여기는 것, 이 시선은 진짜 다라의 이웃이 훔쳐보는 것일 수도 있고 페트로비치의 '참견'일 수도 있다. 혹은, 그들 안에 있는 검열의 눈일지도 모른다. 그들 자신밖에 느낄 수 없는. 이들은 '곱사등 난쟁이의 시신'을 피해 집안으로 도망칠 수 있다. 하지만 그 뿐이다. 그들 안에 있는 검열이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검열'된 사랑들에 대하여, 검열된 사람들에 대해 그 '관습'이 옳지 않고 버려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처벌'받을 때, 억울함을 느끼면서도 이내 수긍하고 받아들인다. 그들 무의식에 있는 '검열'의 뿌리 때문이다. 그 뿌리는 그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을 친친 감아매고, 그들의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사라와 다라가 현대 소설을 보고 영화를 봐도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그들을 옭아 매었던 '검열'은 그들을 '구세대'로 묶어둔다. 이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사실 페트로비치가 예상한 쪽에 가까워진다. 작가는 애쓴다. 그의 텍스트가, 그의 의도대로 갈 수 있도록. 허나 검열에 사로잡힌 텍스트는 작가의 의도대로 이뤄지지 못한다. 이것이야 말로 사랑 이야기의 비극이다. 아서왕 이야기에서 기사와 왕비는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죽음밖에 선택할 수가 없다. 작가가 이 '검열'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었던 것도 '검열'을 피한 외국에서 글을 썼기 때문에 가능했다.

현재 한국에서도 '검열'이 되살아나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는 사람'의 이름을 언급한 사람들이 법정으로 줄줄 끌려가고 있고, 사람들은 그들이 의도했던 대로 입을 다문다. 암호명조차도 쓸 수가 없다. 인터넷은 '한 꺼풀'만 들추면 다 드러난다. 원래는 드러날 수 없는 체계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인터넷의 운영을 누가 잡고 있는가? 권력과 자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수많은 '은유'를 쓴다. 특정 동물로, 혹은 대중적인 작품들로. 그래도 우리 내부에 검열을 들이진 말자. 그 검열로 인해 또다른 '비극'을 생산해 내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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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하우스 민음사 모던 클래식 50
니콜 크라우스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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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Gran Casa, Casa Grande (위대한 집, 거대한 집)

-니콜 크라우스의 그레이트 하우스를 읽고

 

 

 

 

모두가 디아스포라

 

인간은 그보다도 못한 무엇, 매일 서커스 공연장이 세워졌다 다시 허물어지는 빈 공터와 비슷했다.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모든 것이 바뀌고, 똑같은 공연은 한 번도 없는 그런 곳. 상황이 그 지경인데,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도 제대로 이해해 보겠다는 희망을 가져도 되는 걸까?

133

 

영국의 고슴도치들은 모두 어떻게 된 걸까? 어릴 때는 어디를 가도 쉽게 볼 수 있었는데, 그때도 종종 길가에 죽어 있는 고슴도치를 본 적은 있었다. 그 많은 고슴도치를 모두 죽여 버린 건 뭐였을까?(...)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큰 것 한 가지만 알고 있다고, 아르킬로코스는 말했다.

149

 

디아스포라란 누구인가? 원래 있던 곳에서 뿌리 뽑힌 채로 떠돌아다니는, 자의적이거나 타의적으로 '고향'에서 떠난 이들이다. 언뜻 보면 피난민들과 같지 않은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전쟁 피난민들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면이 있다. 새로운 주거지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되 자신의 전통과 삶의 방식은 지키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는 그들 자신이 여태껏 살아왔던 배경과 삶이 묻히지 않게끔 '실존성'을 증명하려는 행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실존성은 기존에 살고 있던 이들의 가치관과 달랐다. 미묘하게 다르다 해도, 똑같은 사이다라 해도 상표가 다르면 눈에 띄는 법이다. 아주 작은 차이로 인해, 혹은 큰 차이로 인해 이들은 눈에 띄는 인물들이 되어버렸다. '로마에 오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라는 말은 그럴듯한 말이기는 하나 잘 생각해 보면 무서운 면이 있다. 칼날로 내리치는 것이 아니라 은근히 '지켜야 한다'고 완곡하게 말하면서, 칼등으로 짓누르고 있는 게 아닌가. 칼을 세우든 눕히든 칼로 사람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디아스포라는 이 '시선'을 등지고 자신들의 '세계'를 지키고자 한다. 결국 사람들은 디아스포라에게 등을 돌리거나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게 되었다. 이 때문에 수많은 학살과 억울한 누명, 편견들이 생겨났다.

허나 시간이 지나면서, 소위 '세계화'라는 흐름이 생겨났다. 사람들은 서로의 나라와 문화를 존중하면서 소통하고 이해를 넓힐 수 있다는, 개방적이고 모던한 현대인이 되었다, 혹은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사람들은 '세계화'를 정반대로, 자신의 나라에 온 사람들에게 '로마에 오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라는 식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따른다면 '차별'할 이유가 없을 텐데, 사람들은 또다시 거기서 다른 점을 찾아내어 그들이 '틀렸다'고 지적한다. 과거 민족 정신으로만 똘똘 뭉쳤던 이들의 힘이 갈 곳을 잃어가자 이상한 틈으로 새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슬람 교도들에게 '일할 시간에 왜 기도를 하느냐'고 말하면서 그들을 답답하게 보는 것은, 그들의 생각을,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몰이해는 거울처럼 다시 되돌아 온다. 결국 소위 '개방적이고 모던'한 현대인들은 현대인들을 몰이해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스스로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기존에는 육체적인 디아스포라로, 육체적인 면만 해결되면 모든 게 다 해결된다고 생각했다. '심적 디아스포라'가 되고 나서야 진정한 해결은 없다는 것을, 딜레마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현대인들은 소외되었다. 도브의 아버지는 현대인의 소외에 관한 글을 읽고 있는 도브에게 물을 뿌린다. 이미 수용소에서 자신이 디아스포라였다는 것을, 그들의 몰이해가 그들에게 반사되어 돌아간 것일 뿐이라는 걸 아는 도브의 아버지로서는 도브가 못마땅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간과한 것이 있다. 도브는 수용소를 몰랐다. 유대인이기는 하나 육체적 디아스포라를 겪지 못하고 심적 디아스포라에 빠진, 끊임없이 헤매이는 방랑자가 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레이트 하우스'에서 나타나는 인물들은 모두 심적 디아스포라다. 나디아는 R이 떠난 후로 드라이버를 가지고 다니면서 집 안의 나사를 모두 조이려고 한다. 이 행위는 단순한 이별 후유증이 아니다. R이 떠난 후 나디아의 방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R의 가구들과 물건들, 이는 나디아의 ''에 포함되어 있었다. 허나 R이 나감으로써 나디아는 '공허'를 느끼게 되었고, 동시에 자신의 공간이 이대로 '무너져 내린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그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마치 배가 풍랑에 휩쓸릴까봐 끊임없이 갑판을 맴도는 선장처럼 '방어 행위'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의 방에 대해 '위화감'을 느끼고, 결국 그녀의 친구의 주선으로 다니엘 바스키의 가구들을 빌리게 된다. 그 가구들은 그녀의 '세계'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녀는 그 자신의 세계를 그대로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남편 S는 그녀의 세계로 들어오지 못한다. 끊임없이, 조심스럽게 노력하지만 그녀는 화분은 허락해도 S, 허락해주지 않는다.

자신의 세계 안에 '혼자' 서 있으면서, 타인의 침입을 허가하지 않는 인물은 나디아 뿐만이 아니다. 로테 버그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의 남편 벤더는 S와 달리, 그 한계를 느끼고 로테의 세계 주변에서 '평화롭게' 맴돈다. 하지만 다니엘 바스키의 '방문'으로 인해 벤더는 그가 알던 아내의 세계 안에 '침입자'가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로 인해 벤더는 아내를 시험하고, 어떻게든 그가 예상하는 반응을 이끌어내려고 한다. 바스키가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굳이 출장을 가지만 결국 그녀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는다. 이 또한 그 자신의 세계에서 나온 시나리오일 뿐이라는 것을. 바스키와 아내의 관계는, 더 미묘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벤더는 아내가 '아기'를 낳았고, 입양시켰다는 것을 안 순간 자신이 알던 아내의 정체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과 동시에 '실망'을 느낀다. 다니엘이 그녀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아내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에 대한 실망. 그러나 그 예상은 또다시 어긋나 버린다. 와이즈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실마리가 될 수 있는, 모든 걸 걷어 젖힐 수 있을지도 모르는 연락처를 건네주지만 벤더는 그 연락처를 태워버린다. 결국 그녀의 세계 안으로 온전히 들어간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설사 그녀가 죽어서 이제는 고정된 무언가로 남았다고 할지라도-깨달았기 때문이다.

와이즈는 디아스포라의 흔한 예시로 들 수 있는 유대인이다. 그 또한 그만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요아브와 레아를 그의 세계 속에 가둔다. 그 곳은 태엽이 정지된 시계처럼 평화롭고 올바르다. 요아브의 연인 이자벨은 보이지 않는 막이 그녀와 와이즈 가족을 갈라놓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보그나가 유일하게 와이즈 가족 안에서 머무를 수 있는 허락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요아브와 레아를 위해, 집을 치우면서 그들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와이즈의 세계는 굳건했다. 결국 보그나는 '사라지고', 이자벨은 추방당한다. 또다른 유대인으로는 도브와 그의 아버지를 들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육체적인 디아스포라를 겪었던 사람이다. 그는 어떻게든 '뿌리'를 세우고자 한다. 그는 육체적인 추락을 겪어보았다. 그리고 정신적인 추락도. 하지만 그는 정신적인 '추락'은 끝이 없다는 것, 계속 떨어지고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육체성에 주목할 것을, 숨쉬고 먹고 움직이는 데 주력을 쏟을 것을 가르친다. 도브의 형인 유리는 그의 가르침을 따라 '행복하게' 산다. 하지만 도브는 다르다. 그는 죽음에 대해서, 정신적인 추락을 겪는다. 그의 전우가 죽고 전우의 아버지가 도브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순간, 도브 또한 자신의 삶의 이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도브의 아버지는 그런 도브를 잡아 올리려고 하지만 도브는 거부한다. 어쩔 수가 없다. 이미 떨어지기 시작한 이상, 바닥이 있기만을 기원할 수밖에는. 결국 추락하는 모두가 고슴도치가 될 것이고, 멸종할 것이다.

 

 

 

부재와 없음

 

하지만 그 책상은, 완전히 다른 물건이었다. 그렇게 단출하고 작은 방에서 그 책상만이 무슨 엽기적이고 위협적인 괴물처럼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었다. 거의 한쪽 벽 전체를 차지한 그 물건은 반대편에, 마치 사악한 자기장에 맞서려는 듯 불쌍한 모습으로 한데 꼭 붙어 있는 다른 가구들을 겁주는 것만 같았다. 짙은 색 나무로 된 책상에는 상판 위로 서랍들이 벽처럼 붙어 있었는데, 중세 마법사의 책상처럼 하나같이 실용적이지 못한 크기의 서랍들이었다. 어느날 저녁 아래층 화장실에 간 아내를 기다리는 동안, 그 서랍들이 하나만 제외하고는 모두 비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나니 정말 그 책상이, 그 유령 같은 책상이, 책상이 아니라 한 척의 배처럼 보였다. 어디에서도 육지를 만날 수 없다는 절망 속에,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에 더 어두운 암흑의 바다를 항해하는 배, 그런 생각 때문에 그 책상이 더욱 신경 쓰였다. 그건, 항상 그렇게 생각했는데 대단히 남성적인 책상이었다. 가끔 아내를 데리러 갈 때면, 열린 문 뒤로 마치 아내를 삼켜 버릴 듯이 버티고 서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그 물건을 보며, 설명할 수 없는 낯선 질투심을 느낄 때도 있었다.

117

 

내가 처음으로 그 방에서 잘 때, 책상 그림자에 가린 안쓰러울 정도로 작은 침대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깼지. 우리 위에 그 놈이 있었어. 어둡고 형체를 알 수 없는 그놈이 말이야. 한번은, 서랍을 열어 봤더니 거기 썩어 문드러진 미라가 들어 있는 꿈을 꾼 적도 있어.

342

 

모두의 세계에 자리잡은, 전염력이 높고 무시무시한 이 괴물은 무엇인가? 책상은 '연인'이 되기도 하고 '위협'이 되기도 하며, '파멸'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외형 때문에? 외형 뿐만이 아니다. 이미 모든 사람들이 책상에 대해 '한 마디'씩 덧붙임으로써, 여러 사람의 세계를 거쳐 가면서 책상은 무시무시한 괴물이 된다. 이는 그레이트 하우스’, 이 책의 제목과 같은 환상 체계를 지니고 있다. 이 위대한 집은 모두의 환상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끊임없이 커지지만’, 도브의 상어처럼 유한한 환상이다. 결국 모두들 깨닫게 될 것이다. 단순히 형용사를 앞 뒤로 붙인 것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을, 결국 허상, 그 뿐이라는 것을. 다니엘 바스키는 나디아에게 '로르카가 쓴 책상'이라고 말한다. 로르카가 쓰고, 다니엘 바스키가 쓴 책상. 나디아는 다니엘이 R처럼 영영 떠나는 게 아니라 책상을 맡겨둠으로써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희망은 그녀의 세계의 중추에 자리 잡는다. 그녀는 책상의 잠긴 서랍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 하고, 그 책상이 없어지자 ''을 못 쓰게 된다. 이 때문에 그녀는 책상을 대체할, 다니엘을 대체할 누군가를 무의식적으로 찾게 된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아담'은 딱히 매력적이라고 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녀가 레아를 보고 '다니엘'의 딸이라고 '확신'했듯이, 그녀는 아담에게 다니엘의 환상을 씌운 것이다. 하지만 아담은 다니엘이 아니었고, 그녀의 환상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그 반대로 로테는 남편인 벤더에게 책상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침묵'으로써 책상이라는 이미지를 더 '무겁게' 만든다. 벤더는 로테의 전 애인이 그녀에게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로테에게 ''를 내는 대신, 그 책상을 질투한다. 그가 그녀의 세계로 진입하지 못하는 이유가 로테 때문이 아니라, 그 책상 때문이라는 듯이. 그리고 그 책상이 다니엘 바스키에게 갔단 소리를 듣고, 그는 '안도' 대신 불안함을 느낀다. 책상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로테에게는 그 책상이 그가 생각하는 만큼 무겁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나디아와 달리 절필하는 대신, 창고에서 또다른 책상을 가져와 쓴 것처럼. 하지만 벤더는 로테의 '짐작'을 그대로 넘겨 버릴 수가 없었다. 그가 그동안 생각해 왔던 '책상', 그녀의 세계 중심에 떡 버티고 서 있는 그 괴물을 무시하는 순간 그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고 믿는 로테의 세계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와이즈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가구를 그대로 '되찾아 주는' 능력을 지닌 골동품상이다. '되찾은 물건'은 기존 물건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게 낡고 형편없는 상태가 되었을지라도. 와이즈는 그의 아버지가 끌려간 순간의 집을 그대로 복원시키려고 한다. 요아브와 레아 또한 와이즈의 세상 속에 갇혀 있는 셈이다. 만약 그 순간이, 다시 온전히 되돌아 온다면 어떨까? 그러면 '온전히' 소유한 것이 되는가?

잃어버리고, 되찾는다. 이 행위에 대해 지젝은 날카로운 지적을 던졌다. 현대인의 우울증 증세 중 하나는 바로 자신이 가지지 못하는 것을 가졌던 ''하면서, '잃어버린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라는 말을. 그로써 그 물건을 '소유'하고자 하는, 편협한 행동이라고 했다. 그게 책상이나 화장대 거울이라 할지라도, 물건은 완전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건이 기억의 조각이라고 믿고 그 기억의 조각을 '끌어 모은다면', 그 자신을 다시 세우거나 본질을 알아낼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되찾으려고 한다. 이는 결국 본질과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와이즈는 그의 가족으로서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레아와 요아브를 태엽 속 세상에 가둔다. 레아는 와이즈가 찾는 '마지막 기억의 조각'인 책상을 몰래 빼돌리고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면 그녀 자신의 본질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하지만 레아와 요아브는 와이즈가 죽은 뒤 깨닫게 된다. 결국 그들 자신의 뚜렷한 본질은 없다는 것을. 도브가 쓴 소설 속의 '상어'처럼, 사람들은 상어에 그들의 고통을 다 쏟아붓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상어는 언젠가는 죽는다. 소설 속에서 천천히, 수조에 물이 새서 죽어간다. 결국 그들을 정신적 추락에서 구해줄 '본질'이라는 발판은 없다. 고통은 온전히 그들의 것이 될 것이다.

결국 이들 모두 '부재''없음'을 착각한 것이다. '다르다''틀리다'를 오용하는 것처럼. 없다는 것은 정말 없는 것이고, 부재는 내 곁에 있던 무언가가 잠깐 떠났고 다시 '귀환'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없음은 그 자체로 절망, 절망이지만 부재는 미묘한 희망을 준다. 나디아는 다니엘을 '부재'한 상태로 만든다. 그의 책상을 지킨 채로, 다니엘이 언젠가는 '귀환'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녀의 친구가 전해준 대로 다니엘은 실종되었고, 다시는 돌아올 가능성이 없다. 왜 남편인 S에게는 그런 희망을 품지 않았는가? 남편인 S'살아 있고', 그녀의 희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온전히 소유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니엘은 부재했고, 그녀는 다니엘의 '부재'로 그를 '소유'했다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다니엘은 없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 그녀가 찾는 대리 환상은 '아담'이다. 아담은 그녀에게 '늙은 여자'라고 가차없이 쏘아붙이면서 그녀의 환상을 깬다.

로테와 벤더 또한 마찬가지다. 벤더는 로테가 아침마다 들어가곤 하는 '수영 구멍'의 끝없는 어둠 속을 들여다 보면서, 그녀가 잠깐 자신의 곁에 '부재'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애당초 그녀는 '없었다'. 그녀의 세계는 그가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재'처럼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고, 언젠가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진실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와이즈가 적어준 연락처를 버린다.

처음부터 나디아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녀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그녀의 본질이 '있다'라고 생각하기 위해서 '부재'의 상태로 바꿔 놓은 것이다. 그녀는 꿈에서 빨간 실을 잡아 당긴다. 그 끝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걸 믿으면서, 언젠가는 이 기묘한 행위가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허나 꿈에서 그 끝은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깊숙한 곳에 있는 실까지 끌어당겨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끊임없이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환상'으로, 그 실을 잡아당기는 것이다. 벤야민이라면 이렇게 '실을 잡아당기는 행위'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아도르노는 회의적이다. 과연 무엇이 남을 것인가? 와이즈는 '부재'가 아니라 '없다'는 진실을 절절히 깨닫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자카이가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하나의 개념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개념은 사실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은 그저 그 일부분이라고 예상되는 파편을 간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결국 하나의 진실을 드러낸다. '지금은 없다'는 것을. 부재가 아니라, 다시는 되돌아 올 수 없다는 것을. 결국 시니컬하고 회의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본질이라는 발판은 없다. 나디아가 무용수의 그림을 보고 '그 본질'을 소설로 써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그저 '눈가리개'밖에 되질 않는다. 무용수는 그녀에게 그림을 떼어버렸다고 했다. 이는 그녀에게 모욕감을 주기 위한 언사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모욕감을 느낀다. 이는 그녀가 내놓은 '본질'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추락은 계속 된다. 그 추락은 그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 휘말리게 한다. 나디아의 전 남편 S, 그리고 그녀의 차에 치인 도브도. 이 얼마나 잔인하고 헛된 희망일까.

도브의 아버지는 도브가 추락하지 않기를’, 차라리 추락한다면, 육체적으로 추락하기를 바란다. 육체로서 부딪친다면, 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정신으로 추락하는 순간, 끝은 없어진다. 동시에 끝이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도브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는 뒤늦게 깨달은 부성애가 아니다. 애당초 도브의 아버지는 도브를 사랑했다. 그 사랑은, 정신적으로 추락하기 시작한 도브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희망의 소실점

 

결국 희망은 없다. 와이즈가 연 책상 서랍에는 아무 것도 없다. 편지도 글도 없다. 괴물의 심장도 없다. 벤더가 처치하고 싶어했던 그 책상, 사실 그 책상은 괴물이 아니었다. 책상으로 인해 '문제'가 생겼고, 책상으로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는 모두가 그 책상에 덧씌운 '허상'일 뿐이었다. 와이즈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되찾아 주는 것', 진짜 사물이 아니라 그 사물에 대한 환상이다. '되찾는다'는 희망은 없다. 되찾아도 '본질'은 되돌아올 수 없다. 레아는 그녀의 아버지를 '이겨서' 관문을 통과해 '성인'이 되려고 하지만, 결국 역으로 아버지에게 사로잡힌다. '없다'라는 절망으로.

 

결국은 아버지가 이긴 거라는 사실을 이해했어요. 마침내 아버지는 우리가 당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 방법을 찾은 거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오빠와 나는 예루살렘의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삶을 멈추었죠.

160

 

그런 마주침을 경험하는 다른 사람들을 수도 없이 봤지만, 그 순간은 여전히 놀라웠다. 실망감, 그리고 잠시 후, 마침내 무언가가 서서히 가라앉는 듯한 안도감이 찾아왔다.

397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하나의 희망을 제시하고자 한다. 니콜 크라우스는 이 '그레이트 하우스'에서 최소한, 하나의 사랑만큼은 지켜내고 있다. 요아브와 이자벨, 이 둘은 서로를 사랑하며 그 사랑으로서 자기 자신을 붙잡는다. 뿌리를 내릴 땅이 없다면, 서로에게 뿌리를 내리면 된다. 물론 풍랑에 휩쓸려 정처없이 어디론가 떠내려 갈지라도 그들의 존재는 '부러지거나' '흩어지지 않는다'. 요아브는 이자벨에게 열대 지방으로 가서 주스를 팔면서 살자고 말한다. 이는 단순히 헛된 환상 같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확신'에서 나오는 말이다. 둘이 이런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이유는 요아브와 이자벨 둘 다 '존재의 위기'를 겪고 있던 시기에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 이자벨은 그녀의 한계에 맞부딪치고 그녀 자신의 '본질'이 과연 굳건한 것인지 스스로 질문해 보고 있었을 때, 요아브만이 그녀를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해 주었다.

벤야민은 희망이란 우리가 사는 세상 바깥, 소실점에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 소실점을 향해 간다. 하지만 그 소실점을, 완전히 소유할 수는 없다. '순간'만을 겪을 수 있을 뿐. 그 순간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람들은 '순간''기억'으로 바꾸어 '잃어버린다'. 첫사랑의 순간을 잊지 못하고 내내 연연하다가 다시 찾으려고 여행을 떠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읽은 적 있다. 그 남자는 첫사랑과 대면하지만, 그가 생각했던 만큼의 '기쁨'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실망한다. 차라리 찾지 말 것을, 왜 첫사랑을 다시 보고자 했는지를 후회한다. 결국 '환상'이란 없다. 레아는 아버지에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서 깨진 후, 요아브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자벨'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역설적이면서도, 결국에는 희망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인 것이다. 요아브는 이자벨에게서, 이자벨은 요아브에게서 각자의 '대답'을 찾는다. 서로가 서로의 대답이 되어 주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중요한 행위로 작용하고 있다. 로테의 아들을 입양한 피스크 부인은 아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 ‘지켜주는 엄마로 만들고자 한다. 그녀는 로테가 다시 찾아와서 아이를 돌려달라고 할까봐 겁을 내고 아이에게 끊임없이 정을 쏟는다. 하지만 죽음,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조용해진다. 죽음이 한계인 것이다. 도브의 아버지가 죽음이후에 대해서는 생각할 게 없을 것이라고 말하듯이. 오로지 인간은 살기 위해서움직인다고. 피스크 부인은 테디가 로테의 아들이 아니라 바로 그녀의 아들이었음을 말한다. 이미 로테가 친어머니라는 환상보다 테디, 육체적으로 그녀와 더 가까웠기 때문에. 연결고리가 진짜이든 아니든 간에 서로 붙잡은 순간진실이 된다. 요아브와 이자벨은 아기를 낳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할 것이다.

 

온 세상에서 그분만이 제가 느낀 슬픔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고서야 깨달았네요. 피스크 부인이 말했다. 그분도 절대 모를 거라고, 제 아들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이에요.

373

 

 

자신에게 맞는 어떤 여자, 어쩌면 여러 명의 여자들을 만나면 그 대답을 찾기 위해 그 아이가 자신을 쏟아부을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언젠가 또 다른 아이가 태어날 것이다.

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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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1-08-07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로 관계없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개체들이,
보이지 않는 인드라 망에 걸린 듯,
서랍 열 아홉 개의 책상과 얽힌 이 위대한 집이 우리 사는 세상일까요?
아주 멋진 리뷰를 잘 읽고 갑니다.
 
그레이트 하우스 민음사 모던 클래식 50
니콜 크라우스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Gran Casa, Casa Grande (위대한 집, 거대한 집) -니콜 크라우스의 ‘그레이트 하우스’를 읽고 모두가 디아스포라 인간은 그보다도 못한 무엇, 매일 서커스 공연장이 세워졌다 다시 허물어지는 빈 공터와 비슷했다.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모든 것이 바뀌고, 똑같은 공연은 한 번도 없는 그런 곳. 상황이 그 지경인데,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도 제대로 이해해 보겠다는 희망을 가져도 되는 걸까? 133 영국의 고슴도치들은 모두 어떻게 된 걸까? 어릴 때는 어디를 가도 쉽게 볼 수 있었는데, 그때도 종종 길가에 죽어 있는 고슴도치를 본 적은 있었다. 그 많은 고슴도치를 모두 죽여 버린 건 뭐였을까?(...)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큰 것 한 가지만 알고 있다고, 아르킬로코스는 말했다. 149 디아스포라란 누구인가? 원래 있던 곳에서 뿌리 뽑힌 채로 떠돌아다니는, 자의적이거나 타의적으로 '고향'에서 떠난 이들이다. 언뜻 보면 피난민들과 같지 않은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전쟁 피난민들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면이 있다. 새로운 주거지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되 자신의 전통과 삶의 방식은 지키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는 그들 자신이 여태껏 살아왔던 배경과 삶이 묻히지 않게끔 '실존성'을 증명하려는 행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실존성은 기존에 살고 있던 이들의 가치관과 달랐다. 미묘하게 다르다 해도, 똑같은 사이다라 해도 상표가 다르면 눈에 띄는 법이다. 아주 작은 차이로 인해, 혹은 큰 차이로 인해 이들은 눈에 띄는 인물들이 되어버렸다. '로마에 오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라는 말은 그럴듯한 말이기는 하나 잘 생각해 보면 무서운 면이 있다. 칼날로 내리치는 것이 아니라 은근히 '지켜야 한다'고 완곡하게 말하면서, 칼등으로 짓누르고 있는 게 아닌가. 칼을 세우든 눕히든 칼로 사람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디아스포라는 이 '시선'을 등지고 자신들의 '세계'를 지키고자 한다. 결국 사람들은 디아스포라에게 등을 돌리거나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게 되었다. 이 때문에 수많은 학살과 억울한 누명, 편견들이 생겨났다. 허나 시간이 지나면서, 소위 '세계화'라는 흐름이 생겨났다. 사람들은 서로의 나라와 문화를 존중하면서 소통하고 이해를 넓힐 수 있다는, 개방적이고 모던한 현대인이 되었다, 혹은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사람들은 '세계화'를 정반대로, 자신의 나라에 온 사람들에게 '로마에 오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라는 식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따른다면 '차별'할 이유가 없을 텐데, 사람들은 또다시 거기서 다른 점을 찾아내어 그들이 '틀렸다'고 지적한다. 과거 민족 정신으로만 똘똘 뭉쳤던 이들의 힘이 갈 곳을 잃어가자 이상한 틈으로 새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슬람 교도들에게 '일할 시간에 왜 기도를 하느냐'고 말하면서 그들을 답답하게 보는 것은, 그들의 생각을,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몰이해는 거울처럼 다시 되돌아 온다. 결국 소위 '개방적이고 모던'한 현대인들은 현대인들을 몰이해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스스로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기존에는 육체적인 디아스포라로, 육체적인 면만 해결되면 모든 게 다 해결된다고 생각했다. '심적 디아스포라'가 되고 나서야 진정한 해결은 없다는 것을, 딜레마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현대인들은 소외되었다. 도브의 아버지는 현대인의 소외에 관한 글을 읽고 있는 도브에게 물을 뿌린다. 이미 수용소에서 자신이 디아스포라였다는 것을, 그들의 몰이해가 그들에게 반사되어 돌아간 것일 뿐이라는 걸 아는 도브의 아버지로서는 도브가 못마땅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간과한 것이 있다. 도브는 수용소를 몰랐다. 유대인이기는 하나 육체적 디아스포라를 겪지 못하고 심적 디아스포라에 빠진, 끊임없이 헤매이는 방랑자가 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레이트 하우스'에서 나타나는 인물들은 모두 심적 디아스포라다. 나디아는 R이 떠난 후로 드라이버를 가지고 다니면서 집 안의 나사를 모두 조이려고 한다. 이 행위는 단순한 이별 후유증이 아니다. R이 떠난 후 나디아의 방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R의 가구들과 물건들, 이는 나디아의 '방'에 포함되어 있었다. 허나 R이 나감으로써 나디아는 '공허'를 느끼게 되었고, 동시에 자신의 공간이 이대로 '무너져 내린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그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마치 배가 풍랑에 휩쓸릴까봐 끊임없이 갑판을 맴도는 선장처럼 '방어 행위'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의 방에 대해 '위화감'을 느끼고, 결국 그녀의 친구의 주선으로 다니엘 바스키의 가구들을 빌리게 된다. 그 가구들은 그녀의 '세계'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녀는 그 자신의 세계를 그대로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남편 S는 그녀의 세계로 들어오지 못한다. 끊임없이, 조심스럽게 노력하지만 그녀는 화분은 허락해도 S는, 허락해주지 않는다. 자신의 세계 안에 '혼자' 서 있으면서, 타인의 침입을 허가하지 않는 인물은 나디아 뿐만이 아니다. 로테 버그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의 남편 벤더는 S와 달리, 그 한계를 느끼고 로테의 세계 주변에서 '평화롭게' 맴돈다. 하지만 다니엘 바스키의 '방문'으로 인해 벤더는 그가 알던 아내의 세계 안에 '침입자'가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로 인해 벤더는 아내를 시험하고, 어떻게든 그가 예상하는 반응을 이끌어내려고 한다. 바스키가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굳이 출장을 가지만 결국 그녀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는다. 이 또한 그 자신의 세계에서 나온 시나리오일 뿐이라는 것을. 바스키와 아내의 관계는, 더 미묘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벤더는 아내가 '아기'를 낳았고, 입양시켰다는 것을 안 순간 자신이 알던 아내의 정체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과 동시에 '실망'을 느낀다. 다니엘이 그녀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아내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에 대한 실망. 그러나 그 예상은 또다시 어긋나 버린다. 와이즈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실마리가 될 수 있는, 모든 걸 걷어 젖힐 수 있을지도 모르는 연락처를 건네주지만 벤더는 그 연락처를 태워버린다. 결국 그녀의 세계 안으로 온전히 들어간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설사 그녀가 죽어서 이제는 고정된 무언가로 남았다고 할지라도-깨달았기 때문이다. 와이즈는 디아스포라의 흔한 예시로 들 수 있는 유대인이다. 그 또한 그만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요아브와 레아를 그의 세계 속에 가둔다. 그 곳은 태엽이 정지된 시계처럼 평화롭고 올바르다. 요아브의 연인 이자벨은 보이지 않는 막이 그녀와 와이즈 가족을 갈라놓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보그나가 유일하게 와이즈 가족 안에서 머무를 수 있는 허락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요아브와 레아를 위해, 집을 치우면서 그들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와이즈의 세계는 굳건했다. 결국 보그나는 '사라지고', 이자벨은 추방당한다. 또다른 유대인으로는 도브와 그의 아버지를 들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육체적인 디아스포라를 겪었던 사람이다. 그는 어떻게든 '뿌리'를 세우고자 한다. 그는 육체적인 추락을 겪어보았다. 그리고 정신적인 추락도. 하지만 그는 정신적인 '추락'은 끝이 없다는 것, 계속 떨어지고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육체성에 주목할 것을, 숨쉬고 먹고 움직이는 데 주력을 쏟을 것을 가르친다. 도브의 형인 유리는 그의 가르침을 따라 '행복하게' 산다. 하지만 도브는 다르다. 그는 죽음에 대해서, 정신적인 추락을 겪는다. 그의 전우가 죽고 전우의 아버지가 도브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순간, 도브 또한 자신의 삶의 이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도브의 아버지는 그런 도브를 잡아 올리려고 하지만 도브는 거부한다. 어쩔 수가 없다. 이미 떨어지기 시작한 이상, 바닥이 있기만을 기원할 수밖에는. 결국 추락하는 모두가 고슴도치가 될 것이고, 멸종할 것이다. 부재와 없음 하지만 그 책상은, 완전히 다른 물건이었다. 그렇게 단출하고 작은 방에서 그 책상만이 무슨 엽기적이고 위협적인 괴물처럼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었다. 거의 한쪽 벽 전체를 차지한 그 물건은 반대편에, 마치 사악한 자기장에 맞서려는 듯 불쌍한 모습으로 한데 꼭 붙어 있는 다른 가구들을 겁주는 것만 같았다. 짙은 색 나무로 된 책상에는 상판 위로 서랍들이 벽처럼 붙어 있었는데, 중세 마법사의 책상처럼 하나같이 실용적이지 못한 크기의 서랍들이었다. 어느날 저녁 아래층 화장실에 간 아내를 기다리는 동안, 그 서랍들이 하나만 제외하고는 모두 비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나니 정말 그 책상이, 그 유령 같은 책상이, 책상이 아니라 한 척의 배처럼 보였다. 어디에서도 육지를 만날 수 없다는 절망 속에,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에 더 어두운 암흑의 바다를 항해하는 배, 그런 생각 때문에 그 책상이 더욱 신경 쓰였다. 그건, 항상 그렇게 생각했는데 대단히 남성적인 책상이었다. 가끔 아내를 데리러 갈 때면, 열린 문 뒤로 마치 아내를 삼켜 버릴 듯이 버티고 서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그 물건을 보며, 설명할 수 없는 낯선 질투심을 느낄 때도 있었다. 117 내가 처음으로 그 방에서 잘 때, 책상 그림자에 가린 안쓰러울 정도로 작은 침대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깼지. 우리 위에 그 놈이 있었어. 어둡고 형체를 알 수 없는 그놈이 말이야. 한번은, 서랍을 열어 봤더니 거기 썩어 문드러진 미라가 들어 있는 꿈을 꾼 적도 있어. 342 모두의 세계에 자리잡은, 전염력이 높고 무시무시한 이 괴물은 무엇인가? 책상은 '연인'이 되기도 하고 '위협'이 되기도 하며, '파멸'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외형 때문에? 외형 뿐만이 아니다. 이미 모든 사람들이 책상에 대해 '한 마디'씩 덧붙임으로써, 여러 사람의 세계를 거쳐 가면서 책상은 무시무시한 괴물이 된다. 이는 ‘그레이트 하우스’, 이 책의 제목과 같은 환상 체계를 지니고 있다. 이 위대한 집은 모두의 환상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끊임없이 ‘커지지만’, 도브의 상어처럼 유한한 환상이다. 결국 모두들 깨닫게 될 것이다. 단순히 형용사를 앞 뒤로 붙인 것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을, 결국 허상, 그 뿐이라는 것을. 다니엘 바스키는 나디아에게 '로르카가 쓴 책상'이라고 말한다. 로르카가 쓰고, 다니엘 바스키가 쓴 책상. 나디아는 다니엘이 R처럼 영영 떠나는 게 아니라 책상을 맡겨둠으로써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희망은 그녀의 세계의 중추에 자리 잡는다. 그녀는 책상의 잠긴 서랍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 하고, 그 책상이 없어지자 '글'을 못 쓰게 된다. 이 때문에 그녀는 책상을 대체할, 다니엘을 대체할 누군가를 무의식적으로 찾게 된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아담'은 딱히 매력적이라고 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녀가 레아를 보고 '다니엘'의 딸이라고 '확신'했듯이, 그녀는 아담에게 다니엘의 환상을 씌운 것이다. 하지만 아담은 다니엘이 아니었고, 그녀의 환상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그 반대로 로테는 남편인 벤더에게 책상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즉 '침묵'으로써 책상이라는 이미지를 더 '무겁게' 만든다. 벤더는 로테의 전 애인이 그녀에게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로테에게 '화'를 내는 대신, 그 책상을 질투한다. 그가 그녀의 세계로 진입하지 못하는 이유가 로테 때문이 아니라, 그 책상 때문이라는 듯이. 그리고 그 책상이 다니엘 바스키에게 갔단 소리를 듣고, 그는 '안도' 대신 불안함을 느낀다. 책상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로테에게는 그 책상이 그가 생각하는 만큼 무겁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나디아와 달리 절필하는 대신, 창고에서 또다른 책상을 가져와 쓴 것처럼. 하지만 벤더는 로테의 '짐작'을 그대로 넘겨 버릴 수가 없었다. 그가 그동안 생각해 왔던 '책상', 그녀의 세계 중심에 떡 버티고 서 있는 그 괴물을 무시하는 순간 그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고 믿는 로테의 세계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와이즈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가구를 그대로 '되찾아 주는' 능력을 지닌 골동품상이다. '되찾은 물건'은 기존 물건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게 낡고 형편없는 상태가 되었을지라도. 와이즈는 그의 아버지가 끌려간 순간의 집을 그대로 복원시키려고 한다. 요아브와 레아 또한 와이즈의 세상 속에 갇혀 있는 셈이다. 만약 그 순간이, 다시 온전히 되돌아 온다면 어떨까? 그러면 '온전히' 소유한 것이 되는가? 잃어버리고, 되찾는다. 이 행위에 대해 지젝은 날카로운 지적을 던졌다. 현대인의 우울증 증세 중 하나는 바로 자신이 가지지 못하는 것을 가졌던 '척'하면서, '잃어버린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라는 말을. 그로써 그 물건을 '소유'하고자 하는, 편협한 행동이라고 했다. 그게 책상이나 화장대 거울이라 할지라도, 물건은 완전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건이 기억의 조각이라고 믿고 그 기억의 조각을 '끌어 모은다면', 그 자신을 다시 세우거나 본질을 알아낼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되찾으려고 한다. 이는 결국 본질과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와이즈는 그의 가족으로서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레아와 요아브를 태엽 속 세상에 가둔다. 레아는 와이즈가 찾는 '마지막 기억의 조각'인 책상을 몰래 빼돌리고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면 그녀 자신의 본질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하지만 레아와 요아브는 와이즈가 죽은 뒤 깨닫게 된다. 결국 그들 자신의 뚜렷한 본질은 없다는 것을. 도브가 쓴 소설 속의 '상어'처럼, 사람들은 상어에 그들의 고통을 다 쏟아붓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상어는 언젠가는 죽는다. 소설 속에서 천천히, 수조에 물이 새서 죽어간다. 결국 그들을 정신적 추락에서 구해줄 '본질'이라는 발판은 없다. 고통은 온전히 그들의 것이 될 것이다. 결국 이들 모두 '부재'와 '없음'을 착각한 것이다. '다르다'와 '틀리다'를 오용하는 것처럼. 없다는 것은 정말 없는 것이고, 부재는 내 곁에 있던 무언가가 잠깐 떠났고 다시 '귀환'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없음은 그 자체로 절망, 절망이지만 부재는 미묘한 희망을 준다. 나디아는 다니엘을 '부재'한 상태로 만든다. 그의 책상을 지킨 채로, 다니엘이 언젠가는 '귀환'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녀의 친구가 전해준 대로 다니엘은 실종되었고, 다시는 돌아올 가능성이 없다. 왜 남편인 S에게는 그런 희망을 품지 않았는가? 남편인 S는 '살아 있고', 그녀의 희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온전히 소유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니엘은 부재했고, 그녀는 다니엘의 '부재'로 그를 '소유'했다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다니엘은 없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 그녀가 찾는 대리 환상은 '아담'이다. 아담은 그녀에게 '늙은 여자'라고 가차없이 쏘아붙이면서 그녀의 환상을 깬다. 로테와 벤더 또한 마찬가지다. 벤더는 로테가 아침마다 들어가곤 하는 '수영 구멍'의 끝없는 어둠 속을 들여다 보면서, 그녀가 잠깐 자신의 곁에 '부재'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애당초 그녀는 '없었다'. 그녀의 세계는 그가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재'처럼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고, 언젠가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진실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와이즈가 적어준 연락처를 버린다. 처음부터 나디아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녀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그녀의 본질이 '있다'라고 생각하기 위해서 '부재'의 상태로 바꿔 놓은 것이다. 그녀는 꿈에서 빨간 실을 잡아 당긴다. 그 끝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걸 믿으면서, 언젠가는 이 기묘한 행위가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허나 꿈에서 그 끝은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깊숙한 곳에 있는 실까지 끌어당겨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끊임없이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환상'으로, 그 실을 잡아당기는 것이다. 벤야민이라면 이렇게 '실을 잡아당기는 행위'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아도르노는 회의적이다. 과연 무엇이 남을 것인가? 와이즈는 '부재'가 아니라 '없다'는 진실을 절절히 깨닫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자카이가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하나의 개념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개념은 사실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은 그저 그 일부분이라고 예상되는 파편을 간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결국 하나의 진실을 드러낸다. '지금은 없다'는 것을. 부재가 아니라, 다시는 되돌아 올 수 없다는 것을. 결국 시니컬하고 회의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본질이라는 발판은 없다. 나디아가 무용수의 그림을 보고 '그 본질'을 소설로 써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그저 '눈가리개'밖에 되질 않는다. 무용수는 그녀에게 그림을 떼어버렸다고 했다. 이는 그녀에게 모욕감을 주기 위한 언사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모욕감을 느낀다. 이는 그녀가 내놓은 '본질'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추락은 계속 된다. 그 추락은 그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 휘말리게 한다. 나디아의 전 남편 S도, 그리고 그녀의 차에 치인 도브도. 이 얼마나 잔인하고 헛된 희망일까. 도브의 아버지는 도브가 ‘추락하지 않기를’, 차라리 추락한다면, 육체적으로 추락하기를 바란다. 육체로서 부딪친다면, 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정신으로 추락하는 순간, 끝은 없어진다. 동시에 끝이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도브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는 뒤늦게 깨달은 부성애가 아니다. 애당초 도브의 아버지는 도브를 사랑했다. 그 사랑은, 정신적으로 추락하기 시작한 도브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희망의 소실점 결국 희망은 없다. 와이즈가 연 책상 서랍에는 아무 것도 없다. 편지도 글도 없다. 괴물의 심장도 없다. 벤더가 처치하고 싶어했던 그 책상, 사실 그 책상은 괴물이 아니었다. 책상으로 인해 '문제'가 생겼고, 책상으로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는 모두가 그 책상에 덧씌운 '허상'일 뿐이었다. 와이즈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되찾아 주는 것'은, 진짜 사물이 아니라 그 사물에 대한 환상이다. '되찾는다'는 희망은 없다. 되찾아도 '본질'은 되돌아올 수 없다. 레아는 그녀의 아버지를 '이겨서' 관문을 통과해 '성인'이 되려고 하지만, 결국 역으로 아버지에게 사로잡힌다. '없다'라는 절망으로. 결국은 아버지가 이긴 거라는 사실을 이해했어요. 마침내 아버지는 우리가 당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 방법을 찾은 거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오빠와 나는 예루살렘의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삶을 멈추었죠. 160 그런 마주침을 경험하는 다른 사람들을 수도 없이 봤지만, 그 순간은 여전히 놀라웠다. 실망감, 그리고 잠시 후, 마침내 무언가가 서서히 가라앉는 듯한 안도감이 찾아왔다. 397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하나의 희망을 제시하고자 한다. 니콜 크라우스는 이 '그레이트 하우스'에서 최소한, 하나의 사랑만큼은 지켜내고 있다. 요아브와 이자벨, 이 둘은 서로를 사랑하며 그 사랑으로서 자기 자신을 붙잡는다. 뿌리를 내릴 땅이 없다면, 서로에게 뿌리를 내리면 된다. 물론 풍랑에 휩쓸려 정처없이 어디론가 떠내려 갈지라도 그들의 존재는 '부러지거나' '흩어지지 않는다'. 요아브는 이자벨에게 열대 지방으로 가서 주스를 팔면서 살자고 말한다. 이는 단순히 헛된 환상 같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확신'에서 나오는 말이다. 둘이 이런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이유는 요아브와 이자벨 둘 다 '존재의 위기'를 겪고 있던 시기에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 이자벨은 그녀의 한계에 맞부딪치고 그녀 자신의 '본질'이 과연 굳건한 것인지 스스로 질문해 보고 있었을 때, 요아브만이 그녀를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해 주었다. 벤야민은 희망이란 우리가 사는 세상 바깥, 소실점에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 소실점을 향해 간다. 하지만 그 소실점을, 완전히 소유할 수는 없다. '순간'만을 겪을 수 있을 뿐. 그 순간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람들은 '순간'을 '기억'으로 바꾸어 '잃어버린다'. 첫사랑의 순간을 잊지 못하고 내내 연연하다가 다시 찾으려고 여행을 떠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읽은 적 있다. 그 남자는 첫사랑과 대면하지만, 그가 생각했던 만큼의 '기쁨'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실망한다. 차라리 찾지 말 것을, 왜 첫사랑을 다시 보고자 했는지를 후회한다. 결국 '환상'이란 없다. 레아는 아버지에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서 깨진 후, 요아브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자벨'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역설적이면서도, 결국에는 희망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인 것이다. 요아브는 이자벨에게서, 이자벨은 요아브에게서 각자의 '대답'을 찾는다. 서로가 서로의 대답이 되어 주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중요한 행위로 작용하고 있다. 로테의 아들을 입양한 피스크 부인은 아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지켜주는 엄마’로 만들고자 한다. 그녀는 로테가 다시 찾아와서 아이를 돌려달라고 할까봐 겁을 내고 아이에게 끊임없이 정을 쏟는다. 하지만 죽음,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조용해진다. 죽음이 한계인 것이다. 도브의 아버지가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생각할 게 없을 것이라고 말하듯이. 오로지 인간은 ‘살기 위해서’움직인다고. 피스크 부인은 ‘테디’가 로테의 아들이 아니라 바로 그녀의 아들이었음을 말한다. 이미 로테가 ‘친어머니’라는 환상보다 ‘테디’가, 육체적으로 그녀와 더 가까웠기 때문에. 연결고리가 진짜이든 아니든 간에 서로 붙잡은 ‘순간’ 진실이 된다. 요아브와 이자벨은 아기를 낳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할 것이다. 온 세상에서 그분만이 제가 느낀 슬픔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고서야 깨달았네요. 피스크 부인이 말했다. 그분도 절대 모를 거라고, 제 아들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이에요. 373 자신에게 맞는 어떤 여자, 어쩌면 여러 명의 여자들을 만나면 그 대답을 찾기 위해 그 아이가 자신을 쏟아부을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언젠가 또 다른 아이가 태어날 것이다. 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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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 사용 설명서
전석순 지음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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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저, 현시창, 그뿐.

-전석순의 철수 사용 설명서를 읽고



 

제품 표준 규격에 관한 안내문

미국에서 일어난 사례다. 한 할머니가 물에 젖은 고양이를 말리려고 전자렌지에 넣고 돌렸다고 했다. 그 결과는 보나마나, 차마 묘사할 수 없는 비극이 벌어졌다. 할머니는 고양이 묘를 만들어줬다. 그리고 앞으로 전자렌지에 고양이를 넣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을까? 아니, 할머니는 전자렌지를 만든 회사에 소송을 걸었다. 그 이유인즉슨 전자렌지 사용 설명서에 고양이를 넣지 말라는 문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승소했고 회사에서는 설명서에 울며 겨자먹기로 그 항목을 집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우스운 일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끔찍한 비극이기도 하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두 가지다. 사용 설명서를 꼼꼼하게 적을 것, 그리고 지금 눈 앞에 닥친 비극을 내 탓에서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릴 수 있게 사용 설명서를 잘 읽어 보는 것. 그 제품을 만들지 않은 이상 고장나거나 뭐가 잘못 되면 '모른다'고 오리발을 내밀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논지는 정당해 보인다. 어떤 제품을 사용할 때에는 분명히 그 제품의 사용 설명서가 필요하며, 그 사용 설명서를 읽어야만 모근 제거기에 '쿨러'를 빼먹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 리뷰 또한 상대적인 것이니 온전히 그것으로만 판단하지 말라는 것도 맞다. 없는 용도를 다그치지 말고, 작동이 안 된다고 마구잡이로 두들겨선 안된다는 것도 맞다. 결국 설명서를 잘 읽고 원래 제품에 있는 용도를 잘, 오랫동안 기다리면서 쓰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물건은 오래 가지 못한다. 물건의 탓이 아니다. 사용하는 사람이 질리게 되기 때문이다. 눈을 잠깐 감았다 뜨면 신제품이 나오는 세상에서, 카메라가 달린 핸드폰은 이제 인터넷까지 되는 핸드폰에게 죽 밀려나 버린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단순히 시장의 법칙과 그에 따라 파생되는 비극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하지만 지금 비극의 주인공은 '제작자''사용자'도 아닌, '제품'이다. 그리고 더 비극적인 건 이 '제품', 제품으로 취급받아서는 안 될 '인간'이라는 점이다. 과연 인간이 제품이 될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현대 사회에서는 그렇게 통용되고 있다.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취업을 해야 하고 취업을 하지 않으면 '인간'이 되지 못한다. 무슨 인간 규격요건이 따로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취업의 선을 넘기 위해서는 일정 정도의 스펙이 필요하다. 이 스펙은 입사 지원서, 자기 소개서, 면접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둔갑한다. 그 스펙이 얼마나 뛰어나냐에 따라서 회사는 이 사람을 '구매'할 지 안 할지 선택한다. 그러나 그 스펙은 사실, 그 사람 자체를 드러낼 수가 없다. 그래서 이들은 필연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된다. 초라하다고 여겨지는 자신의 알몸뚱이를 가리기 위해.

 

면접은 일종의 성능 테스트인 셈이었다. 이력서에 기록된 성능만큼 작동이 잘 되는지 테스트해 보는 것이다. 처음에는 서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보는 테스트가 면접인 줄 알았다. 그런데 면접이 진행될수록 철수는 이게 거짓말을 얼마나 잘 하나 보는 성능 테스트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철수 사용 설명서, 24p-

 

철수는 그래도 어떻게든 '살기 위해서' 세상의 표준 규격에 자신의 스펙을 맞춰 보려고 애쓴다. 책의 생김새를 보라. 갈색의 재생지 표지는 밋밋해 보이지만, 이는 우리가 잘 쓰는 종이 봉투의 일반적인 색깔이다. 너무 평범해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리고 그 안에 철수가 들어 있다. 철수는 마치 피규어 인형처럼 그려져 있다. 어디다가 똑 떼서 장식해 두는 물건처럼 보인다. 안을 열면 초록색의 때수건. 다른 책들에 비해 뭔가 생활고가 묻어나는 디자인이다. 다른 책들은 화려하거나 세련되고 모던하게, 제각기 눈에 띄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이 책은 뭔가,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처럼 구질구질한 삶을 닮았다. 그러면 생활면에 있어서는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지 않을까? 철수는 좋은 제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철수의 취업도, 가족도, 사랑도. 매번 엇나가고 만다.

 

 

자기 계발 권하는 사회

철수의 비극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피아노 선생님이 자를 세로로 세워서 때렸을 때부터? 아니면 자신에게는 어머니가 바라는 그 어떤 유전자도 없다는 점에서? 애당초 철수의 말마따나 냉장고한테 세탁을 시킨 것 자체가 잘못이다. 그리고, 인간이 만든 것이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을 때부터 시작된 비극이다.

영화 '매트릭스'를 보면, 인간이 만든 기계 문물들은 인간들을 점차 정복해 나가고 나중에는 그 우위관계를 뒤집기까지 한다. 인간은 기계가 만든 매트릭스라는 가짜 세상 속에 살면서 기계들의 양분이 되어준다. 그들이 꿈 속에서 오만 노력을 한다 해도 결국은 '기계의 밥'이 될 운명이다.

철수와 철수의 누나, 그리고 수많은 이들은 결국 그들이 만들어낸 '제품'의 규격에 스스로를 맞춰가면서 제품이 된다. 개조가 가능하고, 좀 더 좋은 기능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기계. 현대 사회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의 장르는 소설도 시도 사회비평도 아니다. 바로 자기계발서다. 자기계발서는 마치 우리가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거나 딱 하나 빼먹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계발서를 읽으면 조금 더 기능을 '추가'할 수 있을 것만 같고 무언가를 깨달은 신제품이 될 것만 같다. 사회는 사람들에게 그런 '신제품'이 되라고 강요한다.

하지만 스팀 다리미가 뿜어낼 수 있는 스팀을, 다리미에게 강요해봤자 스팀은 눈꼽만큼도 나오지 않는 것처럼 원래 없는 사람들에게 강요해봤자 소용이 없다. '불가능한 것을 되게 하라'가 현 사회의 모토이고 수많은 이들이 달달 외워다니는 문구라고는 하지만, 달걀 백판을 가져다가 바위에 대고 깨도 바위는 쪼개지지 않는다. 만약 쪼개진다면 그건 달걀을 들고 깬 사람의 힘 때문이 아니라 달걀의 성분이 작용을 했거나 바위 밑에 있는 지질의 문제일 뿐이다. 이런 시선이 회의적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애당초 달걀한테 바위를 깨라고 한 게 잘못이다. 달걀은 바위를 깨고 싶다고 한 적도 없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달걀과 같은 신세다. 주먹이 달걀한테 바위를 깨라, 고 하면 달걀은 바위를 깨지 못하더라도 제 몸은 투신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달걀한테 입이 달렸다면 달걀이 '차라리 니 주먹을 써라 짜샤'라고 빈정거렸을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는 아무 탈 없이, 아주 조용히 잘 흘러가고 있다. 그러니까 사실 이 사회의 대다수는 최승호의 북어처럼 입이 없는 존재들이다. 입이 있고 말을 한다 해도 그냥 '어 달걀이 말을 하네' 정도로 여기고 곧장 바위로 투신시키거나 '불량품'이라고 마트 서비스 센터에 전화해서 상품권을 받아낼 뿐, 듣지 않을 거다. 결국 그냥 입 다물고 주먹이 시키는 대로 바위를 깨려고 하거나 저 바위를 깨는 게 내 운명이라고 여기는 수밖엔 없다.

철수 또한 그렇다. 사실 철수는 취업을 너무너무 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피아노를 너무너무 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공부를 너무너무 하고 싶지 않았을수도 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그걸 강요했다. 마치 그게 그의 삶의 목표인양. 어떤 이의 '상품 리뷰'에서는 철수에게 그림을 그리는 능력이 있는데, 의외라고 말한다. 의외다. 그러나 철수는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듯이, 설명서에서는 그림에 대한 언급 한 마디 하지 않는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고, 가능할지도 모르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 유용함과 무쓸모로 나누는 것. 이 잔인한 이분법은 너무 단순해서 영화에서만 등장할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어쩌나. 현실이다.

 

엄마는 어떻게든 철수가 쓸모 있는 제품이 되길 바랐지만 제품의 기능을 끝내 찾지 못했다. 찾아볼수록 나타나는 건 일시적이거나 심각한 이상 뿐이었다. 주요 기능만 찾았더라도 철수는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적어도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아니 최소한 숨기지는 않을 자식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철수 사용 설명서, 53p-

 

그러나,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그렇다면 이 이분법적 현실은 철수의 위에 있는, 표준 규격을 제시하는 이들과 철수 같은 제품군으로 나뉘어지는가? 그런데 어쩌나, 이건 틀렸다.

한 인터넷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읽은 적 있다. 백화점 직원들이 '극존칭'을 남발하는데 이는 국어 문법에도 맞지 않으며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쾌하게 만든다고. 하지만 이 극존칭을 쓰지 않으면 고객에게 '건방지다'고 클레임이 들어오는 일이 잦아진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으로 유세 떠는 거냐고 혀를 찼다. 하지만 그 돈은 또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 고객 또한 누군가의 '직원'이고 제품이다.

그러면 이 제품들의, 최종적인 사용자는 누구인가? 다이아몬드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은? 과연 존재할까? 사실 모 대기업의 회장도 결국에는 하나의 제품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다이아몬드의 정점으로 기어오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손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이아몬드도 없고 끝도 없다. 결국 '꼭대기', '맨 위'는 허상일 뿐이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철수를 떠나간 여자들은 '철수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 하거나 '왜 내 뜻을 몰라주느냐'고 한탄한다. 하지만 사용설명서의 냉정한 설명대로 '너무 큰 기대를 품지 않는 것', 오히려 완전한 사랑을 포기하는 데에서 역설적으로 완전한 사랑이 온다. 가장 가까운 가족조차도 속 마음을 몰라주는 상황에서, 타인이 자신에게 지속적인 사랑을 베풀어주길 바라는 것. 분명히 무리이건만. 텔레비전과 소설에서는 그 사랑이 비교적 쉽고-물론 위기와 고난이 닥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예 없는 것보단 있는데 뜸들이는 게 더 쉬운 편이다. 찾을 필요는 없으니까-간단한 것처럼 나온다. 사람들은 그런 매체들을 보면서 아이유의 오빠가 되길 바라고 샤이니의 누나가 되길 바란다. 가능하다고 믿는다. 철수는 노력한다. 하지만 그의 사랑도 어느 정도에 가면 바닥이 난다. 그러면 충전할 시간이 필요한데, 충전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마치 그 충전 시간조차도 사랑이 진짜가 아니라는 보증 방법이라도 된다는 듯이 군다. 이 때문에 피해를 입는 건 상대방이 아니라, 부족하다고 비난을 받는 쪽이다. 결국 다이아몬드의 정점도, 드라마처럼 완전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꽉 차기만 한 사랑도 허상이다. MBC에서 한 '욕망의 불꽃'이라는 드라마의 인물, 모든 것을 다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기업 총수마저도 욕망의 노예일 뿐이었다. 이 악순환을 깰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가 있을까. 

어쩌면 철수가, 철수는, 철수이기에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악순환은 보험금을 타겠답시고 아버지를 죽이는 비인간적인 행위로 깰 수 없고, 스펙을 맞춰서 기업에 들어간다고 해도 깰 수 없다. 결국 철수는 이 소설 속에서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낸다.

어쩌면 조금 더 견디는 편이 나았을까.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조금만 더 견뎠다면, 뭐든 다 괜찮아졌을까. 철수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소리를 질렀다. 언젠가 뉴스에서 봤던 원인 모를 냉장고의 폭발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유리컵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유리 깨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잠깐이나마 어깨 위에 얹혀 있던 것이 날아가 버린 듯했다. 하지만 쫓자마자 다시 날아든 새처럼 그것은 곧 철수에게로 돌아왔다. 어쩐지 이전보다 훨씬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 마치 친구라도 데리고 온 것처럼.

(중략)

그들은 미리 입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거의 비슷한 억양으로 철수에게 말하곤 했다.

"너 미쳤니?"

여러 사람의 목소리인 것 같으면서도, 그것은 아주 익숙한 한 사람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철수사용설명서 202-203p-

이 감정은 사용설명서에서 '고장', '과부하'로 인식된다. 단순한 '해프닝'일 뿐이다. 어찌 보면 이 소설의 결말은 현실에서 이탈을 해야만, '소설의 낭만성'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컵을 집어던지고 박민규의 '고마워, 너구리야'처럼 너구리가 되겠다고 나선다거나. 아니면 실낱같은 희망을 찾는다거나. 하지만 이 '철수 사용 설명서'에는 꿈도 희망도, 없다. 요즘 세대 말로 하자면 그냥 '현시창(현실은 시궁창)'인 셈이다. 이 소설은 한 편의 블랙 코미디다. 결국 철수는 제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수를 제품으로만 다룰 뿐이다. 이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무책임하다'고 볼 수도 없고, 제품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면 '너 미쳤냐'고 일갈하는 현실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책임감이 있다'고 볼 수도 없다. 그저 무릎이 아플 뿐이다. 마치 '소설의 낭만' 속에 파묻혀 있고 싶은 이들의 등을 밀어 현실로 넘어뜨리는. 직시하고 싶지 않지만 직시해야 할 소설의 '현실' 때문에. 결국 우리는 현실에서 '온전한 제품'이 될 수 없고, 현실에서는 '고장난 제품'일 뿐인 자신을, 제품이 될 수 없는 자신을 되돌아 봐야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아니면 그 누구도 열어주지 않을, 외롭고 쓸쓸한 상자 속에서.

철수는 조금 더 자 두려고 눈을 감다가 문득 깨닫는다. 철수 사용 설명서를 쓸 수 있는 사람도, 그걸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사람도 결국은 한 사람이라는 것을.

-철수사용설명서 221p

사용 설명서라는 허무맹랑한 것을 작성해서라도 이 사회 안에 들어가겠다는 것, 이 때문에 읽으면서 솔직히 답답했다. 블랙 코미디, 현실에 가까운 블랙 코미디는 사실 어떤 비극보다도 가장 잔인한 비극이다. 웃다가도 이내 입을 다물게 되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이 소설은 블랙 코미디이고, 현실에 가까운 블랙 코미디다. 희망보다는 비극의 비중이 더 크다. 작가는 어떤 '방법'도 제시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어떤 방법도 완전한 해결책이 될 수는 없으므로. 철수가 취업을 하고, 유용한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 주말 드라마의 해피 엔딩을 맞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소설에 희망은 없지만-마지막 부분에 '여자'에 대한 판단을 미뤄야 하겠다는 점에서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현실은 있다. 가슴이 무겁고 적어도 '소설' 속에서는 행복하고 싶다는 이들을 현실로 밀어 넘어뜨리지만, 그래도 직시해야 할 현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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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쇼 가족 변주곡 민음사 모던 클래식 47
레이철 커스크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세상이라는 거대한 무대, 가족이라는 화목연극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의 번복되는 멜로디, 그리고 드러나는 실재-

 

 

끊임없이 상승하는 카논

 

바흐는 황제를 위해 같은 멜로디로 번복되는, 끊임없이 위를 향해 올라가는 카논을 만들었다. 어떤 성부가 더해져도 상관없다는 듯이, 그래봤자 이 멜로디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듯이. 브래드쇼 가족은 하나의 곡을 이루고 있다. 토머스가 말한 대로 그의 형인 하워드가 장조라면 레오는 단조. 그리고 토머스는 부엌에 머무르면서 집안을 살펴보는, 무게중심을 잡는 통주저음(낮은 음으로 곡 전체의 균형을 잡음) 역할을 맡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예민하게 관찰한다. 그리고 '진짜'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과연 이 멜로디는 진짜인가? 직장인인 토머스와 주부였던 토니가 서로의 위치를 바꾸었을 때도 멜로디는 둘의 위치가 바뀐 것 뿐, 생활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는 듯이 흘러간다. 이들은 바뀐 후나 전이나 조화로워 보이고, 더 행복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이 멜로디를 진짜라고 할 수 있을까? 토머스는 계속 '진짜'가 무엇인지 묻는다. 그리고 '진짜'처럼 보이는 것들을 질투한다. 예술은 무엇이고, 진짜 행복이란 건 무엇인가? 예술은 그를 스쳐지나가기만 하는 것 같다. 그는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는 이그네이셔스와 벤자민의 '추억'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 이해의 간극으로 그가 인식하는 현실과 실재 간의 차이를 느낀다. 그는 이그네이셔스와 벤자민은 '진짜 예술가'이고 자신은 '예술가'가 아닌, 진보적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은 시계처럼 규칙적으로 보이고, 진보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다다이즘과 팝아트, 온갖 초현실주의 미술들이 현실을 앞질러 미래를 뛰어간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과거를 돌아보게 한다. 고장이 났거나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은 물건들의 사용설명서를 모두 찾아내 다른 것으로 대체시키는 것, 그것이 진보라면 진보는 너무 쓸쓸한 것이다. 예술은 그 때문에 진보와 멀리 떨어져 있다. 예술은 고장이 났거나 더 이상 가지고 있지 말아야 할 물건들을 내보인다. 이 물건들은 곧 '진보'라는 것이 거짓말이라고 말해주는, 실재다. 토머스는 '예술은 자신을 스쳐지나갈 뿐'이라고 여기지만, 사실 예술은 언제나 그의 곁에 있다. 그러면서 그에게 '진보'가 사실은 쳇바퀴 안에서 계속 뛰어가는 것임을, 같은 멜로디 안에서 번복될 뿐인 생을 상기시켜 준다.

카논은 멜로디를 번복하며 끊임없이 상승한다. 소설에서 카논은 '일반적인 역할 분담'을 논하면서, 전업 남편과 전업 아내를 주장하면서 상승한다. 이에는 긴장감마저 감돈다. 그들은 스스로의 역할 분담에 충실하게 임하면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지만, 그 행복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일 뿐이다. 만약 이 소설이 행복하게 끝났다면, 이 소설은 흔한 것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허나 레이철 커크스는 행복에서 멈추지 않았다. 욕망이라는 것은 어떤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이다. 그 금지된 것에 우리는 다가가고 싶어하지만, 다가가는 순간 해를 입게 된다. 금지된 것은 사실 우리가 상상하는 한에서 존재할 뿐이다. 실재로 금지라고 붙은 상자를 열어봤을 때, 우리는 실망하게 된다.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거나 우리가 기대한 것 이하의 물건이 들어 있다. 이 때문에 욕망은 실현될 수가 없다. 실현된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욕망을 품었던 자는 절망하게 된다. 토머스는 예술을 하고 싶었지만 예술의 실재는 너무 잔인했고, 토니는 공적인 일에서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게 자신의 욕망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욕망은 그녀가 생각한 것처럼 찬란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든 '만족하는 척' 해야 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뤘기 때문에, 차차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뜨거운 음식을 먹다가 찬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잠깐 아랫배가 찌르르 울리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자리를 바꾸고 온전한 구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 자리의 어두운 면까지도 포옹할 줄 알아야 한다. 토니는 토머스에게 전화를 걸면서 그가 부디, 그녀가 출장을 가서 이 낯선 호텔에서 느끼는 이질감과 소외감을 이해해주길 바라지만 토머스는 이해하지 못한다. 소통의 불가능성, 이 어두운 면을, 토니는 인지하지만 이해하지는 못한다.

 

남편은 그녀가 겪은 곤경 중 어느 부분에서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 역시 절대로 그에게 설명을 할 수 없는 것이, 이야기를 하자면 이름이 없는 무엇, 굳이 표현을 하자면 그것이 무엇이다가 아니라, 무엇이 아니다라는 확인 과정을 거쳐야 하는 어떤 것에 관한 욕망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 자체가 남편의 반응이 필요한데, 토머스는 궁금해 하지 않는다. (...) 어쩌면 남편도 그녀에게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86

 

결국 그들은 최대한 힘을 짜내서, 이 연극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연극은 막 뒤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무대에 나가 있는 이상, 배우들은 서로의 막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서로가 쓴 가면을 보면서 그들의 감정을 얼추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그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파열선이 생긴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그의 자전적인 에세이 '무너져 내리다(Crack-up)'에서 '그가 40대의 만찬 때 마주 하리라고 생각했던 요리가 나오지 않았던 것'처럼, 현실에서 자신이 예상한 것과 다른 결과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아무리 뒤를 돌아보아도, 둥그런 원처럼 원만해 보였던 자신의 일상은 어느새 파열되어 있었고 어디서부터 그 파열이 시작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고. 토머스와 토니, 하워드와 클로디어, 레오와 수지, 스완 부부와 브래드쇼 부부는 애써 그 파열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토머스와 토니는 더더욱, 그들이 위치를 바꾼 만큼 생은 훨씬 더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보' 되어야만 하고, '진보'는 좋은 것일 거라고.

하지만 토머스는 깨닫는다. '진보'는 좋은 것이 아님을. 그리고 그들이 품은 환상과 실재가 얼마나 다른지.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딸 알렉사가 아팠을 때 그들은 그 간극을 역력하게 본다. 하지만 그 파열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들은 처음으로 온전하게 되돌아갈 수 없다. 알렉사의 들리지 않는 한쪽 귀가 다시 들리게 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의 끝은 '원래대로' 돌아온다고 하지만 이는 원래대로 복구할 수 없다는 것을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원래대로 돌아온다고 해도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하워드와 클로디어 부부의 경우에도 그들은 조화로워 보이고, 점점 성장해 가는 아이들과 귀여운 애완견 스키틀과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 또한 갈등을 안에 품고 있다. 그들의 미래라고 볼 수 있는 브래드쇼 부부의 모습을 보면서, 클로디어는 '하워드'의 활동공간이 집안으로 들어오게 된다면 어떻게 될 지 깨닫는다. 시어머니가 시아버지의 머리를 내리치는 것을 보면서. 하워드는 자신의 폐에 생긴 게 암이 아니라 그냥 푹 쉬면 낫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삶의 굴레에서 '이탈'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스키틀의 죽음으로, 그들의 멜로디에는 미묘한 '불협화음'이 끼어든다. 이 불협화음은 지나간다고 해서 잊혀지지 않는다. 잊혀진다면, 이는 거짓말이다. 결국 클로디어와 하워드는 끊임없이 좌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를 알면서도, 이 연극을 계속 해나갈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으로 굴러나가기 위해서.

 

 

아이즈 와이드 셧

 

세상이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그들은 연극을 계속 해나간다. 올가는 '살아가는 척'을 하는 토니와 토머스의 방을 보면서 역겨움을 느낀다. 누가 자고 일어났다는 것을 역력하게 보여주는, 어지럽혀진 방 안. 하지만 토머스의 '사적인 속옷'만은 깨끗하게 접혀 있다. 이는 '깨끗한 방 안'을 역으로 뒤집은, '더러운 방'으로 그들이 '바쁘게 살고 있다'는 무대를 보여준다. 하지만 토니와 토머스, 그리고 브래드 쇼 가족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연극을 하고 있다. 토니에게 작업을 거는 카슨마저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역할을 규정짓지 못한다면 연극 배우는 배우가 되지 못한다. 이 때문에 토니의 어머니는 토니를 앤토니어라고 부르며, 그녀의 위치가 제대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전업 아내', 토머스는 '전업 남편'으로. 레이철 커크스는 '현실'을 그리면서, 그 현실 내에서도 엄격하게 나뉘어지는 연극 속 역할을 드러냈다. 그녀는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역할명''연극'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연극에서는 정해진 상황과 정해진 대사가 있다. 만약 이를 어길 시에는 연극 전체가 깨져버리고 만다.

실제로 알렉사가 하워드의 집에서 다쳤을 때, 토니는 그저 검은 옷을 입었을 뿐인데 마치 모든 죄를 사해줄 것 같은 '신부'의 역할을 맡고 하워드와 클로디어는 그 신부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해 바치는 고해자가 된다. 이는 그들의 화해를 뜻하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이 모든 죄를 저질렀다는 것으로 회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타인에게 죄를 회개해 달라고 말하면서 모든 게 '해결'된 것처럼 가려 놓는 것이다.

토니는 이를 우습게 여긴다. 하지만 그녀 또한 그런 덫에 빠져 있다. 그녀도 토머스에게 이상적인 역할을 씌워 놓았다. 클레어를 잊지 못하고, 절대적이고 위대한 사랑을 하던. 그녀에게 키스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사람. 허나 그는 클레어를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토니는 당혹스러워 한다. 그녀가 생각하는 '토머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토머스는 묻는다. '그러면 진짜 답이 뭐였을까'라고. 어떤 답도 진짜 답이 될 수는 없다.

수지와 레오는 집안의 눈치를 보며, 브래드쇼 부부가 '소고기'를 준비해 두었다고 말할 때 그들이 채식주의자라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문다. 그리고 딸 매들렌이 '수지'가 속이 좋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그녀가 담배까지 피웠다는 것을 말하자 재빨리 드러난 진실을 감추고자 한다. '교육을 잘 받아서' 입을 잘 다무는 알렉사를 '착하고 얌전한 아이'라고 말하면서. 매들렌과 알렉사, 아이들은 감추는 데에 익숙하지 못하다. 그래서 입을 열고 말하려고 한다. 그럴수록 어른들, 이 연극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불쾌함을 느낀다. 스완 부부 또한 알렉사가 이 연극에서 '제때'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에 불만을 느낀다. 클로디어 또한 자신의 예술을 위해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그저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녀는 제대로 된 예술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것을 '하워드'의 탓으로 돌린다.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는 게 가장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도중에 커크스는 노골적으로 극본 형식을 사용해 클로디어와 하워드의 분쟁을 연극 대사로 보여준다. 이 대사들은 엇갈리고 부딪친다. 나중에 클로디어는 하워드의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고, 하워드는 클로디어를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허나 이는 표면적인 것일 뿐이다. 갈등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자기가 낳은 아이에게도 마찬가지다. 토니와 토머스는 그들의 딸인 '알렉사'를 사이에 두고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를 한다. 어느 쪽으로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서 자기가 잡은 쪽을 잡아당긴다. 솔로몬의 공정한 판결은 이 곳에서 어떤 효력도 이루지 못한다. 마지막 순간 알렉사가 병원으로 실려간 순간에서야 '아이'에 대한 생각을 뒤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을 뿐이다. 클로디어는 로티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로티가 벗어 놓고 나간 '코트'를 로티처럼 여긴다. 코트는 그나마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고, 그녀가 직접 먼지를 털어 주는 등 보살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티는 스스럼없이 기존의 역할에서 벗어난다. 이상한 치마를 입고 아이들과 어울려 다닌다. 클로디어는 그녀의 딸을 '알아보지' 못한다.

 

여학생들의 팔과 다리와 웃음이 모두 하나로 뒤범벅이 된 것만 같다. 모두 가방을 들고, 팔찌와 귀걸이를 하고, 바람에 휘날리는 긴 머리까지 하나로 뒤섞여 누구 머리칼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다. 그중 한 명이 그녀의 시선을 끈다. 클로디어는 한참을 들여다본 후에야, 로티를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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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외도를 고백한다. 남편은 이를 이해한다고 말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한다. 완벽해 보였던 그들 부부 사이에 뭔가 빈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아내는 남편에게 '이 모든 것을 덮어버리자', 섹스하러 가자고 말한다. 완벽한 생활을 위해서 이들은 진짜 속내를 덮어버렸다. 레오는 새로운 코트로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감춘다. 그는 '지난 해에 입었던 코트'를 기억하지 못하고, 새로운 코트로 새롭게 그 자신을 위장한다. 그는 연극조로 말하는 여자와 남자를 경멸하지만, 그 또한 한 명의 훌륭한 연극 배우일 뿐이다. 토머스는 톨스토이의 '크로이처 소나타'를 읽는다. 그는 아내가 전화를 꺼놓은 동안 그를 배신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또한 한 때나마 그런 유혹에 넘어갔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계속 관심있게 바라보는 시선을 등지고, 다른 곳을 쳐다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없었던 것'으로 치부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가족의 시작과 끝은 유사하나, 완전히 유사하지는 않다. 원래 있던 진실을 취소시키는 순간, 그들은 깨닫게 된다. 가족이라는 원 안에 어떤 파열선이 생겨났는지를. 그리고 그 파열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현실은 가족 소설들처럼 화합이란 불가능하고, 그저 재빨리 다른 장막으로 가리는 수밖에는 없다. 냉정하게, 곡이 끝나면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맞춰 허겁지겁 박수를 칠 수밖에 없듯이.

 

가끔 저녁에, 둘은 서로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고, 그때마다 토머스는 그 눈에 죄책감이 가득한 것을 본다. 그런 표정은 우연한 것이었다. 그저 어쩌다 눈이 마주치고, 놀라고, 순간 무언가가 들통난다. 둘 사이의 새로운 어떤 단절, 마치 맨 처음 눈이 마주친 낯선 사람들처럼, 그건 경험에서 오는 죄의식, 오직 낯선 사람 앞에서만 드러낼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둘은 각자 무엇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는지는 앞으로도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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