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얼굴을 찾아서 햇살어린이 22
루이스 새커 지음, 김영선 옮김 / 현북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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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일어나는 아이들 사이의 다양한 관계와 양상을 루이스 새커만큼 정확하게 꿰뚫고 묘사하는 작가를 보지 못한 것 같다. 

빨간머리 마빈 시리즈 중의 한 편인 <왜 나한테만 그래?>를 3학년 아이들과 읽었는데, 왕따가 일어나는 상황과 동조자 또는 방관자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주인공은 건강하게 극복을 했고, 그 명쾌한 해결이 현실에선 쉽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저학년 아이들과 이 문제를 생각해 보기에는 아주 좋은 이야기였다.

이 책은 350쪽이나 되는 분량이 말해주듯 저학년이 보기엔 무리가 있다. 5,6학년 또는 중학생이 보면 좋을 것 같다.

아이들에 따라 독서수준이 천차만별인데 이 정도의 책을 읽다보면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아이들에게 읽히려면 걱정스럽다. 5,6학년 중에 이 수준을 뛰어넘는 아이도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어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초라한 독서수준을 갖고 있다. 그건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어른들의 기대가 너무 높은게 문제지. 


제목으로 잡은 '잃어버린 얼굴'의 의미와 상징성에 감탄한다. 나는 '내 얼굴'을 가지고 살고 있는 걸까? 

베이필드 할머니를 마녀로 생각하는 동네 아이들은 그녀가 남편의 얼굴을 벗겨내서 거실 벽에 걸어놨으며 그 남편은 얼굴 없이 숨어 살다가 죽었다는 괴담을 주고 받는다.

할머니의 저주와 관련된 긴장감이 높아질 때, 독자들은 살짝, '뭐야... 그럼 데이비드도 얼굴이 어떻게 되는 건가?'라고 걱정할 수도 있는데

끝까지 읽어보면 명확해진다. 작가가 사용한 '얼굴'의 의미가.

사실은 끝까지 가지 않아도 중간쯤에서 아이들의 대화 중에 그 의미를 풀어 놓았다. 데이비드와 래리의 대화다.

"넌 방금 네 얼굴을 잃어버렸어."

"무슨 소리야?"

"모가 늘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잖아. 그거하고 같은 거야. 자신을 지키지 못하면, 일본 사람들은 얼굴을 잃었다고 말해. 방금 걔들이 우리 쪽으로 걸어 왔을 때, 우리도 걔들만큼이나 이 길을 걸을 권리가 있었어. 근데 넌 비켜셨잖아. 그러니까 얼굴을 잃은 거지."

얼굴을 잃어버렸다는 건, 나 자신을 지키지 못했다는 거다. 결국 나의 정체성을 포기했다는 거고.


역자는 이 책이 '또래압력'이라는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주인공 데이비드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찌질이처럼 보이기 싫어서" 로저 일당의 악행에 가담을 했다. 그 아이들에게 환영받지도 못하면서 늘 그 주변을 맴돈다.

어른들의 눈보다 또래의 눈이 더 무서운 사춘기 무렵의 아이들은 이렇게 어처구니 없어 보이는 이유로 막나간다. 또래의 눈이 더 무섭기 때문에 어른을 곤경에 빠뜨리는 것으로 주변의 환호를 받을 수 있다면 서슴지 않고 그 일을 한다. 그들이 타인에게 요구하는 '인권 존중'은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일 뿐 내가 남한테 할 필요는 없다는 듯이 행동을 한다. 주변인들은 화가 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아이를 비난하게 되고 아이는 거기에 상처받아 더 엇나간다. 악순환이다.


요즘은 학교폭력을 다룰 때 가해자보다도 방관자에 더 집중해서 접근하자는 이야기들을 한다. 또래 아이들이 방관자에서 벗어나 따가운 눈"총"을 쏘아주면 가해자들의 거침없는 악행에 제동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 힘은 어른들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이 또한 '또래압력'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니 또래압력은 부정적 압력도 있지만 긍정적 압력도 있다. 로저 일당을 쫒아다니던 데이비드가 부정적 또래압력에 놓여 있었다면 각자의 개성에 충실한 모와 래리와 삼총사가 되었을 때, 그들의 조언은 긍적적 또래압력으로 작용했다. 마침내 데이비드는 "너의 도플갱어가 네 영혼에 역류할 거야!" 라는 저주를 풀러 할머니를 찾아간다.


'3인의 법칙'이라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교실을 뒤덮은 부정적인 또래압력에 대항하려면, 일단 3인이 있으면 가능하다는 거다. 3인의 힘은 지하철 승강장에 있는 모든 사람을 움직여 열차를 밀고 사람을 구해내는 일을 해냈다. 피해자를 고립시키는 것과 몇 명이라도 옆에서 지원해 주는 것과는 극명한 차이가 난다. 홀로 두면 구해 낼 수 없는 깊은 골짜기로 빠지지만 조력자의 힘은 상황을 반전시킨다. 문제는 이 법칙에 확신을 가지고 용기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데이비드가 저주를 풀러 갔을 때, 사실은 저주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그 대목이 내겐 가장 인상깊었다. 그동안 데이비드를 괴롭혔던 건 자신의 섬세한 양심과 죄책감이었던 것이다. 양심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스스로에게 벌을 내린다. "우리가 사는 이 냉정한 세계에서는 그게 저주일 수도 있지"라고 할머니는 말씀하신다. 하지만 독자들은 안다. 그건 극히 일부분만 그렇다는 걸. 혹은 전혀 사실이 아닐지도.


나와 이땅의 아이들이 내 얼굴을 잘 챙겨서 살 수 있길 바란다. 혹 남의 얼굴을 뒤집어 쓰고 있는 아이가 보이면 "얘, 그거 니 얼굴 아니야." 라고 말해줄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내게 있으면 좋겠다. 사실 그 반응이 난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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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처럼 문이 열리고 - 뉴베리상 수상 작가 케이트 디카밀로의 행복한 크리스마스 선물 날마다 그림책 (물고기 그림책) 22
케이트 디카밀로 글, 배그램 이바툴린 그림, 서석영 옮김 / 책속물고기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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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평이한 내용이다. 케이트 디카밀로와 같은 대가가 아니라도 쓸 수 있을 듯한 그냥 무난하고 평범해 보이는 이야기.

누군가는 "별거 아니네. 그냥 이웃을 돕자는 얘기야." 해버릴 수 있을 듯한 이야기.


근데 뭐지? 마법처럼 문이 열리고, 소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막혔던 대사가 큰 소리로 터졌을 때 울컥해지는 이 감정은?

소녀가 터뜨린 대사에서 벅차오르는 이 느낌은?


교회를 다닌 지 오래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성탄절이 예전처럼 설레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들 지도하는 일과 식사준비하는 일 등이 부담되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는 숙제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니 어린 시절, 그리고 젊었던 시절 성탄절을 준비하며 느꼈던 설렘이 그대로 다시 느껴진다. (미국과 우리나라의 성탄절 전야 풍경이 비슷하다.)


성탄절 공연에서 프란시스는 천사 역할을 하기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일주일 전 창밖으로 내다보는 풍경에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거리의 악사 할아버지와 원숭이다.

원숭이는 양철컵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동전을 얻고, 악사는 음악을 들려준다. 프란시스는 그 음악이 꿈속에서처럼 슬프고 아득하다고 느낀다.

프란시스는 궁금하다. '할아버지와 원숭이는 밤이 되면 어디로 가는 걸까?'

엄마에게 묻지만 엄마는 관심이 없다. 프란시스의 무대옷에만 신경을 쓴다.

밤 열 두시에 프란시스는 거실로 나와 손전등을 들고 거리를 내다본다. 그 시간에도 악사와 원숭이는 거리에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 그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하면 안되냐고 엄마에게 물었다가 핀잔만 듣는다.


드디어 프란시스의 연극이 있는 저녁이다. 엄마와 교회로 가는 길에, 프란시스는 악사에게 달려가 원숭이의 컵에 동전을 넣고 연극을 보러 오라고 초대한다.

"거리의 악사는 프란시스에게 웃어 주었지요. 그런데 두 눈이 슬퍼 보였어요."

프란시스는 그 눈을 가슴에 담았던 것 같다....... 연극은 시작되었으나 집중하기가 어렵다.


여기서 그림작가에 대한 평 하나.... 연극을 준비하고 있는 아이들 - 목동 역할을 하는 아이들과 천사 역할을 하는 아이들 모두... (아 참, 얼굴은 안보이지만 낙타 역할을 하는 아이들도) 모두들 어찌나 천사같이 예쁜지.... 설렘으로 공연을 준비하던 그 옛날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하다. 긴장한 프란시스의 표정, 환하게 외칠 때의 표정, 마지막 장에 차와 간식을 나누는 모든 이들의 흡족한 표정 등....  채도가 낮은 유화 느낌의 그림에 온갖 표정과 느낌이 살아있다. 


프란시스의 차례가 되었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모두가 초조해하며 숨죽이고 기다리는 그 순간,

마법처럼 문이 열리고,  원숭이를 안은 할아버지가 들어선다. 안심한 프란시스의 입에서 드디어 대사가 나온다. 천사의 메시지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커다란 기쁨의 소식을 가져왔노라!"

한 마디 덧붙이기까지.

"커다란 기쁨의 소식을."


30년이 넘는 교회 생활 동안 아마 이 구절을 20번은 넘게 들어봤을 것이다. 그런데 그림책에 박혀 있는 이 구절에서 비로소 내 마음이 격동할 줄이야.....

한국 교회는 오늘도 기쁨의 소식을 외치고 있으나 그 울림은 강단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만 겨우 퍼져나갈 뿐이다. 예배당 문턱을 절대 넘지 못한다.

그래서 쿼바디스라는 영화는 수백억을 지어 만든(수천억인가? 잘 모른다) 어떤 큰 교회를 비판하며 영화를 시작한다.(이 영화를 꼭 볼 생각이었는데 보진 못했다. 주워 들은 내용이다.)

복음이 더이상 복음이 아니고 시궁창에 처박혀 비웃음과 질타를 받고 있는 요즘, 작은 천사 아이의 입에서 나온 한 구절에서 난 '복음'을 들었다.

예수님이 오셨다. 그가 오신 이유는 '너희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도 아니고 '너희들끼리 사소한 일이 뭔 대단한 일인양 내 이름을 걸고 핏대 올려 싸워라'는 더더욱 아닐 터.

할아버지가 들어오신 것, 그리고 성탄의 기쁨을 모두가 함께 나누는 것. 이 자리에 예수님이 함께 계신 것. 그것이 복음일 것이다.   

 

펼친 화면에 그려진 마지막 장면엔 모두가 평화스럽게 웃고 있다. 할아버지도 엄마도 아직도 연극 분장을 다 벗지 못한 아이들도, 서빙을 하느라 분주한 집사님(?)들도. 원숭이까지도.

어떤 이유에서든 할어버지가 소녀의 초대를 거절했다면, 또는 현관 앞에서 차단 당했다면 이 장면에 웃음은 있되 평화는 빠졌을 것이다. 사람들은 뭐가 빠졌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했을 테지만.

이기적인 복음을 만들어 그것으로 자기 앞가림을 하는 자들 때문에 예수님은 오늘도 수난 당하시고 이 소박한 기쁨의 자리에도 예수님의 자리가 없는 것 같다. 정말 슬픈 일이다.


그리고 이 모든 말은 나를 향하여 하는 말이다. 얼마 전 햑교에서 벌점을 받은 아들에게 내가 이런 말을 했었다.

"너는 기독교를 개독교로 만든 자들과 니가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 마라. 니가 속한 집단의 사소한 규율도 지키지 못하면서 교회 다닌다고 말하기 창피하지도 않냐?" 

사실 이건 나에게 돌려야 할 말이다. 그래서 어디 가서 교회다닌다는 말을 잘 못한다. 그냥 조용히 찌그러져 있는게 도와주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편안함에, 게으름에, 욕심에, 집착에 그 무엇이든 어딘가에 매몰되어 있으면 예수님이 주신 복음을 받아들이기 무척 어렵다. 나는 저 중 여러가지에 해당한다. 언제쯤 나는 그것을 깰 수 있을까. 언제쯤 이 소녀의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 이 그림책은 심각한 도전을 나에게 던진다. 주제에 욕심을 좀 내자면 나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에 던지는 도전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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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스 버딕과 열네 가지 미스터리 - 14명의 경이로운 작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레모니 스니켓 외 지음, 크리스 반 알스버그 그림, 정회성 옮김 / 웅진주니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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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야기 만들기 수업을 좋아한다. 국어 수업에서 이 활동이 나오면 난 최대한 시수를 늘려 충분하게 수업을 한다. 그건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수업이라는 명분보다도 내가 좋아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쓰기를 즐기지 않는 아이들도 이 수업에는 흥미롭게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아이들도 좋아하고 나도 좋아하니 수업도 잘 되고, 일석 삼조쯤 되었던 셈이다.


내가 처음 시도했던 방법은 문장을 하나 던져 주고 모둠의 아이들이 릴레이로 이야기를 완성하는 방법이었다. 예를 들면 "숲 속에 다람쥐와 곰이 살았어요." 라든가 "어느 날 우리 반에 새 친구가 전학을 왔어요." "아침에 눈을 뜨니 사방이 조용했어요." 등등.... 중간에 삼천포로 빠지게 만들거나, 갑자기 김을 빼놓거나, 예전에 말 많았던 어떤 드라마처럼 모든 주인공을 죽게 만들거나 등등의 부작용이 있기도 했지만 대체로 아이들은 나를 웃게 만들고 때로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게 만드는 이야기들을 만들어 냈다.


두번째 방법은 스토리큐브라는 교구를 이용해 이야기를 만드는 방법이었다. 이건 특히 열광하는 몇몇 아이들이 있었다. 늘 뒷목 잡게 만들던 아이가 갑자기 반듯해져서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했더니 하교시간에 알림장을 내민다. 학교생활 잘했다고 써달란다. 그러면 엄마가 스토리큐브를 사준다고 했다고.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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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각 면에 다양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9개의 주사위가 한 세트다. 주사위를 던져 나오는 그림으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게임이다. 여기에서 난 그림을 단서로 이야기를 만드는 수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마지막 세 번재 방법은 그림카드를 활용한 수업이었다. 그림이 환상적이고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면 더욱 좋다. 그런 그림카드가 어디 있을까 찾다가 보드게임에서 찾아냈다. <딕싯>이라는 게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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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딕싯이라는 보드게임인데 여기에 84개의 그림카드가 들어 있다. 그림은 환상적이면서도 무한히 열려있고 다의적이다. 이걸 알게 되어 무척 기뻤다. 당장 구입해서 집에서는 보드게임을, 학교에 가져가서는 국어수업을 했다. 맘에 드는 카드를 한 장씩 고르고 그 그림을 문장으로 표현하게 한다. 그리고 그 문장을 시작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만든다. 2학년 아이들과 이 수업을 했는데 너무나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많이 나와서 그동안 이놈들 땜에 속썩었던 걸 한 방에 용서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물론 등장인물 다 죽이기 등의 엽기적 결말을 좀 차단한 고심의 결과이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니 아이들과 함께 했던 그 수업들이 떠오른다. 책이 만들어진 과정이 비슷한 맥락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해리스 버딕이라는 작가는 14점의 그림을 가지고 편집자를 찾아갔고, 그림에 딸린 이야기의 원고를 다음날 가지고 오기로 하고는 30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각 그림에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한 문장이 딸려 있을 뿐이다. 해리스 버딕이 가져오려고 했던 이야기는 대체 어떤 이야기였을까? 궁금증을 참을 수 없게 만든다.(이 궁금증은 바로 알스버그가 만들어 놓은 장치가 아니겠는가? 책장을 몇 장 넘기면서도 이게 대체 뭔 소린가 눈치 채지 못하는 곰탱이가 바로 나이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실제로 그 그림책은 미국 초중생들의 글쓰기 수업에 널리 활용된다고 한다. 교사들이 생각하는 아이디어는 국경을 넘어서도 비슷하구나 생각했다. 그림카드 수업까지 해봤으니 나도 그림책을 활용한 수업을 한번 고민해 봐야겠다.


그 14점의 그림들을 단서로 하여 쓰여진 이 책은 작가 구성부터 놀랍다. 사실 난 외국 소설의 작가는 잘 몰라서 14명을 다 아는 건 아닌데... 스티븐 킹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쇼생크 탈출의 원작자이고, 웨이싸이드 아이들을 쓴 루이스 새커는 올해 우리반 아이들과 재미있게 읽은 『빨간 머리 마빈 시리즈』의 작가고, 엇, 린다 수 박은 『사금파리 한 조각의 그 린다 수 박? 거기에 케이트 디카밀로까지! 


그 뿐 아니라 작품을 읽으며 몰랐던 작가에 대한 궁금증까지 생겨났다. 표지그림으로 쓰인 <또 다른 장소, 또 다른 그림>을 이야기로 쓴 작가 코리 닥터로우는 SF 전문 작가라고 한다. 그래서인가. 그 상상력이란.... 비상한 사람의 상상력은 나같은 범인이 따라가기에 버거울 정도다. 이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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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이어졌는지 모를 철로 위로 네 명의 아이들이 탄 수동차가 보인다. 수동차에는 돛이 달려 있고 한 아이는 항해복을 입고 있다.

아이는 평소에 이런 의문을 갖고 있다. "공간에서는 거의 모든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데, 어째서 시간은 한 방향과 한 가지 속도로만 움직이는 거지? 더 빨리, 더 느리게 갈 수는 없나? 그리고 뒤로 갈 수는 없어?"

"만약 시간이 모든 방향, 모든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면 은하계 저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공간이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것은 인간이 아직 증명하지 못한 미지의 문제다. 작가는 상상력을 통해 가능한 장면을 우리 앞에 형상화 해놓는다. 그 모든 것이 주어진 그림과 문장, 제목을 반영하고 있다. 입을 헤벌리고 읽었다. 와우~ 놀랍다.


린다 수 박의 <하프>도 맘에 들었다. 그림이 흑백인데도 숲의 느낌이 얼마나 싱그럽고 고요하며 환상적인지. 한 쪽의 바위 위에 놓여 있는 하프. 저 건너 멀찌감치서 그것을 바라보는 한 소년. 제시된 문장은 이것이다. "진짜였어. 소년은 생각했다. 진짜 있었어."

'진짜' 뭐가 있었을까? 그건 숲의 음악이었다. 그 음악은 마법과 주문, 마법에 걸린 자매의 우애와 노력으로 만들어졌다. 그게 소년을 울게 했고 위로했다. 

작가는 현대 사람들이 마법을 믿지 않기 때문에 마법사들이 암암리에 조용히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적절한 시기, 우연, 운좋은 발견 등을 통해서....

나도 가끔 그렇게 생각하며 살고 싶다. 모든 기대가 사라지고 '마땅히 해야 할 일'만 내 앞에 놓여져 있을 때 특히 그렇다. 그럴 때 난 가 본 적도 없는 그 숲을 그린다.


<오직 사막뿐>을 쓴 M.T.앤더슨도 잘 모르는 작가인데 이 이야기를 읽다가 영화트루먼 쇼의 결말 부분을 볼 때와 비슷한 충격을 받았다안에서 빛이 흘러나오는 호박의 그림이 가장 인상적인데 이야기 또한 가장 강력하게 인상적이다.

 

케이트 디카밀로는 여기서도 특유의 아련한 슬픔을 자아낸다그의 작품 <3층의 침실>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그렇게 강한 이미지를 주진 않았지만 아픈 소녀의 손을 잡아주고 소녀의 동생을 안전한 곳에 데려다 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든다.

 

마지막 편인 <메이플 거리의 집>이 스티븐 킹의 작품이었는데 왜 그의 작품이 영화로 많이 제작되는지 알 것 같았다짧은 작품 속에서도 시한폭탄의 초침이 재깍거리는 듯한 소리가 독자의 심장을 울린다.

 

어떻게 보면독자의 몫으로 남겨두었으면 좋았을 상상력의 여지를 작가들이 채워버렸다는 아쉬움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다하지만 상상력의 여지는 무한하니까... 상상력의 씨앗은 또 어디서든 뿌려질 것이다.


내가 상상력을 추구하는 건, 아니 인간이 상상력에 큰 가치를 두는 것은 그것이 세상을 살맛나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상상력이 과학문명을 발전시킨 면도 있고 간혹은 악의적인 상상력이란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상상력은 이 세상에 의미를 불어넣고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며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보게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들 안의 상상력을 발견할 때 기특하고 기쁘다.

그런데, 내 안에는 얼마나 되는 상상력이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쪼그라진 형체만 발견하게 될까 두려워 펼쳐 보지 않은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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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자 괴물전 책콩 저학년 3
유순희 지음, 이영림 그림 / 책과콩나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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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의 아줌마인 나는 이제 과자를 싫어하고 아이들이 과자 먹는 것을 자제시켜야 마땅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과자를 좋아하고 마트에 가면 꼭 과자를 몇 봉 사서 주방 수납장 한 칸에 넣어둔다. 그 중 절반은 내가 먹고 절반은 아들이 먹는다. 요즘은 사실 조금 덜 먹기는 하는데... 과자가 싫어져서 라기보다는 너무 비싸서다. 질소과자... , 여기서 그 얘기는 하지 말자.

 

과자 괴물전이라 하니 밥보다 과자를 좋아하는 아이가 등장하고, 과자 괴물이 나타나 어찌어찌하여 이 아이의 나쁜 버릇을 고쳐주는 이야기가 아닐까 예상했다. 처음은 비슷한 듯 했다.... 그러나 갈수록 나의 예상과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다. 난 이런 상황을 즐긴다. 나의 예상과 멀어질수록 높은 점수를 준다.^^

 

유순희 님은 신작이 나왔나 내가 가끔 검색해 보는 작가들 중 한 명이다. 지우개 따먹기 법칙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화 중 한 편이고 우주 호텔의 느낌도 참 좋았다. 이 책 또한 느낌이 좋다. 유순희 님 특유의 따뜻하면서도 눈물겨운 그 느낌이 있다. 게다가 이 책은 아이들이 잘 아는 시중의 다양한 과자가 등장하고 재미 또한 뒤지지 않으니, 2학년 정도를 맡았을 때 감질나게 읽어주면 아이들이 졸졸 쫓아다니며 더 읽어달라 조를 것 같다. 특히 특정 과자의 맛을 묘사한 그 부분들에선 아이들의 눈이 스스르 감기며 고통을 참는 비명이 터져 나올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부분 말이다.

홈런볼을 전자레인지에 살짝 돌려서 먹으면 초콜릿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서 아주 맛있는데. 그걸 입에 넣고 혓바닥과 입천장으로 녹이면 단맛이 목구멍에서 가슴까지 퍼지는데.”

과자에 관한 한 작가가 나보다 고수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이런 부분에서 해 본다. 난 이렇게까지 정성스럽게 과자를 먹어 본 적은 없는데.

 

이렇게 과자 맛을 음미하며 먹는 과자돌이 형제 금동이와 은동이는 별사탕을 구하러 땅 위로 나온 새끼괴물과 만난다.(새끼괴물은 의도치 않게 과자괴물이 되었다) 별사탕... 아주 어릴 때, 과자라곤 그거밖에 없었던 뽀빠이 과자에 몇 개 들어있던 별사탕... 그냥 설탕 뭉쳐놓은 거라 지금은 있어도 안 먹지만, 그래도 추억이 떠오르는 그 별사탕... 그 별사탕을 찾으러 온 새끼괴물의 사연이 참 눈물겹다.

 

특별한 음식이 아니라도, 누군가와의 사연이 담기면 그에게는 특별한 맛이 된다. 그 맛을 아빠괴물은 요술 맛이라고 표현했다. “그 때 할머니의 눈은 달빛처럼 그윽하고 따뜻했지. 그 때의 별사탕 맛은 요술 맛이었어. 아무리 울적해도 별사탕만 먹으면 행복해졌으니까.”

작가는 후기에서 출산 때 밤새 끓여 새벽어둠을 뚫고 달려온 친구의 미역국 맛이 요술맛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난 갑자기 궁금해져서 남편과 아이들의 카톡방에 바로 질문을 올렸다. “만약 엄마가 죽든가 해서 없다면 어떤 음식을 볼 때 엄마 생각이 젤 많이 날까요?”

그러자 아들의 즉답이 날아왔다. “난 곰탕!” 아들은 곰탕을 좋아한다. 며칠 동안 먹어도 물리지 않나보다. 그래서 사골 끓이는 거 무척 번거롭지만 밤새 거품과 기름 걷어가며 가끔 끓인다. 주로 웬수지간으로 지내는 모자 사이지만 내가 죽으면 곰탕을 보고 눈물 한 방울은 흘려 줄 건가 보다. “엄마가 주방 수납장 한 칸에 넣어놨던 과자라고 대답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달콤한 별사탕 맛으로 이 이야기는 끝이 났다. 이 이야기를 읽고 아이들이 과자가 먹고 싶다라든가 앞으로는 과자를 조금만 먹어야겠다라고 감상을 쓴다면 난 좀 실망할 것 같지만, 그래도 아이들과 함께 한 번 읽어보겠다. 이 책은 좀 무식한 표현으로 안전빵이라서(아이들이 좋아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뜻) 목록에 넣고 잘 써먹어야겠다. 내 목록에 이렇게 한 권 한 권 책이 추가될 때마다 나도 별사탕을 먹은 듯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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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씹어 먹는 아이 - 제5회 창원아동문학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61
송미경 지음, 안경미 그림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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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이 없거나 아주 빈약하거나 교훈을 주려는 의도가 너무 뻔히 들여다보이는 동화를 읽으면 나도 이정도는 쓰겠다 라는 아주 말도 안되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한다.(물론 쓸 수 없다. 그걸 몰라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어떤 작가는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든다. 어디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 진짜로 작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구나.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재밌게 읽는 거로구나.....

송미경 작가는 내게 그런 작가들 중 한 명이다. 복수의 여신에서 그 맛깔스러운 문장과 상큼한 내용에 끌렸고 광인수술보고서에서 그의 실험정신과 주제의식에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이번 작품을 읽으며 드는 느낌은 이제 참신한 상상력을 넘어 기묘한 4차원의 세계를 보는 느낌이다. 이 작가에게는 어떻게 이런 게 보일까? 어딘가에 숨어 눈에 띄지 않거나 눈에 띌까 두려운 이런 내면들을 어떻게 들여다 보았으며 어떻게 이해했을까?


돌 씹어 먹는 아이 』라는 엽기적인 느낌의 표제작을 비롯하여 7편이 실린 단편집이다. 나의 경우에, 단편은 읽고 나면 다른 책들과 내용이 뒤죽박죽 되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내용이 짧은 만큼 여운도 짧다는 뜻이 되겠다. 그런데 이 책의 단편들은 워낙 느낌이 독특해서 다른 작품들과 쉽게 섞일 것 같지가 않다. 그림작가 안경미의 독특한 그림도 한 몫을 하는 것 같다.


첫 작품 제목은혀를 사 왔지』다. 혀를 사다니, 소 혓바닥으로 뭘 해먹는단 소리는 들어봤지만 그 혀는 아닐 게 아닌가? 정육점은 아닐테고 어디서 혀를 판다는 거지? 

"시장에 갔어." 라는 간결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일 년에 한 번 삼일간 열리는 '무엇이든 시장'에 말이야." 화자인 시원이는 이 시장을 둘러보다 결국 건방진 당나귀가 파는 '혀'를 사 온다. "왜 하필 혀를 사 왔냐고? 난 혀가 없거든."

이 어린 아이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거나 말하고 싶지 않은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처럼 말하고 싶은 날도 있는 것이리라. 드디어 혀가 장착되었다. 속사포처럼 날리는 독설들은 상대를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양심 없는 동네 빵집 아저씨, 늘 시비 걸고 괴롭히던 친구들, 어린 아들의 공부에 모든 것을 맞춰 놓은 엄마에게까지. 그리고 다음 날, 아이는 시장에 다시 간다. "나는 그곳에 돗자리를 펴고 내 책가방, 가방속 책들, 신발주머니와 실내화를 펼쳐놓았어. 마지막으로 나는 내 혀를 꺼내어 가장 앞줄에 놓았지."

하루의 속시원한 독설이 이 아이에게 가져다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이는 왜 하루만의 독설에 만족하고 혀를 도로 팔았을까? 글쎄, 난 잘 모르겠다. 속 시원한 말이 단지 속 시원하지만은 않은 사람도 있는 법... 그런 사람들은 그냥 갈구지만 않아도 착하게 살 수 있는데.... 착한 사람을 가만 두지 않고 괴롭히는 이 사회는 참 몹쓸 사회다. 시원이가 혀 아닌 더한 것을 사오려 하기 전에 제발 가만히 놔두길 바란다. 많은 걸 요구하는 게 아니다. 그냥 가만히 놔두기만 하라고.


『나를 데리러 온 고양이 부부』에서는 능청스럽고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난다. 고양이 부부가 지은이네 집에 들어와 자기네가 친부모라며 딸을 데려가겠다고 당당히 요구하는 것이다. 엄마는 지금 혼자서 김장을 담그고 있는 중이라 입으로만 화를 낼 뿐 적극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고양이 부부의 모습을 지켜보던 지은이는 정말 내가 저들을 닮은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쿠키를 먹다 소파에서 잠든 모습을 보면서.... 나도 간식을 먹은 후에 소파에 널브러져 잠드는 것을 좋아하는데... 엄마는 늘 학교 다녀오면 곧바로 숙제와 학습지를 해야 한다고 하고 낮잠이란 있을 수 없지.... 평온하고 나른한 모습에서 동질감을 찾은 지은이는 고양이 부부를 따라나선다. 고양이 부모의 말들.

"우린 절대 바쁘지 않아. 가끔 사람한테 쫒기기는 하지만 말이야."

"우린 음식을 모아 두지 않아. 그저 좀 덜 먹는 날이 있긴 하지만. 대수롭지 않지." 

비교적 성실하게 내 일을 미루지 않고 사회의 상식과 규범에 맞추어 살아온 나는, 나와는 달리 너무나 자유로운 영혼인 아들을 이해 못해 끙끙 앓는다. 방학인 요즘 모처럼 새벽교회에 갔다가 이른 아침부터 도시락 두 개 싸들고 하얀 입김을 뿜으며 학원버스를 기다리는 한 무리의 아이들을 보고 들어온 날, 아직도 한밤중인 아들을 향해 거의 저주에 가까운 한숨을 뿜어낸다. 이 아이의 방학 하루 일과는 거의 백수들의 그것에 가깝다. 점심때 쯤 나가 한밤중에 들어온다. "시간대를 바꾼 것 뿐인데 엄마는 왜 한숨이냐"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사람이 쉬기도 해야지" 라고 뻔뻔스럽게 말하는 이 아이는 이제 고3이다. 분명히 내가 낳긴 했는데 영혼의 부모는 고양이가 맞는 것 같다. 고양이 엄마~ 당신이 얘 좀 책임져 줘. 밥은 내가 먹일게.


표제작인 『돌 씹어 먹는 아이』의 내용은 제목만큼이나 엽기적인데, 문학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이미 작가의 것이 아니라 했다. 해석의 자유는 독자들한테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이걸 어떻게 해석할까 상상해보니 웃음이 나온다. 설마 조약돌 하나를 입에 넣고 살짝 깨물어 보려나?

"저는 돌 씹어 먹는 아이예요." 

라고 아이가 가족 앞에서 고백했을 때, 그 다음 장면을 감동적이라고 해야 하나, 갈수록 태산이라고 해야 하나, 블랙유머가 넘친다고 해야 하나.

"나도 네게 할 말이 있다. 나는 흙 퍼 먹는 아빠야."

오 마이 갓! 그만 했으면 좋겠다. 근데 작가는 그만 하질 않는다. 너무해!

가족들 몰래 얼린 못을 케첩에 찍어 먹는 걸 즐겼던 엄마, 지우개를 먹다 최근에는 더한 것을 먹기 시작한 누나... 그들은 울며 서로를 위로하다 뒤엉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4단 찬합에 도시락을 싸서 가족은 소풍을 떠났다. 4단 도시락에 들어 있는 메뉴를 이제 더이상 엽기적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자신의 메뉴를 권하거나 강요하지 않으면 모두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다. 


『지구는 동그랗고』는 내게 너무 어려웠다. 그들을 실제 인물로 머리 속에 그려보니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건 작가가 바라는 바는 아닐 것이다. 나도 세상을 다 산 것은 아니어서 때로는 이해가 안되거나 별로 이해하고 싶지가 않은 상황이 있다.

『아빠의 집으로』를 읽을 때는 엄마의 심정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젤 가슴아픈 작품이었다. 걱정스러웠다. 앞으로 잘 살겠지?

『아무 말도 안했어?』에서 나는 작품의 전체 내용보다도 아무도 못 듣는데 병우만 듣는 그 '바보' 라는 소리에 꽂혔다. 수민이는 아무 말을 안했을 수도 있지만 병우의 감각은 분명히 그 소리를 들었던 거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억지를 쓴다고 다그치기만 할 게 아니라 얘기를 들어줘야 하겠구나. 얼마 전 읽은 교육서적에서 "인간은 소속감과 자존감을 느낄 때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데 이것이 충족이 안되면 생존을 위한 행동(소위 어긋난 행동)을 하게 된다."라는 대목을 메모해 두었던 게 갑자기 생각났다. 이런.... 동화를 읽고 교육서적과 줄 긋는 이런 분석질은 적절치 못한데.... 하여간에 내 곁에 병우가 나타나면 일단 눈쌀을 찌푸리지 말자고 다짐을 해 둔다.

『종이 집에 종이 엄마가』는 사실 엄청난 이야기다. 어린 미솔이가 겪은 일의 10분의 1도 나는 이나이 될 때까지 겪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쿨하면서도 따스하다. 미솔이가 그 나이에 겪기에 너무 엄청난 일을, 그래도 따뜻하게 겪어서 참 다행이다. 


쓰다 보니 일곱 편에 대한 감상을 다 말해 버렸다. 작가의 의도와 다르거나 다른 이들의 느낌과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당연한 것이기도 하고.

 

이야기 주머니를 가진 작가가 부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위기철 님은 <이야기가 노는 법>이라는 책에서 동화작가는 억지로 되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그저 작가로 살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야기가 이야기를 쓴다', '이야기는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이런 뜻의 말을 하기도 했다. 잘 모르는 내가 봐도 그런 것 같다. 살아있는 이야기가 작가의 이야기 주머니 속에서 꿈틀거릴 때, 또 맛있게 써서 내어놓으시길 기다린다. 이 책, 참 특별한 느낌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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