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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훌 - 제12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ㅣ 문학동네 청소년 57
문경민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2월
평점 :
도서관에 갈 때마다 이 책이 있으면 빌려야지 했는데 언제나 대출중이더니 연휴동안 읽을 책을 대출하러 갔던 이번엔 운이 좋았는지 있었다. 소설은 시간이 많을 때 읽기 제격이다. 하지만 이 책은 시간하고는 굳이 상관없었다. 무척이나 빠르게 읽힌다. 심지어 삭신이 쑤셔서 누워서 읽었는데도 끝까지 한번에 읽었다. 보통 누우면 한두장 넘기다 잠들게 마련인데.^^;;;;
고통을 회피하는 나는 고통스러운 이야기도 좀 꺼리는 편이다. 고통과 참혹함으로 점철된 이야기에 매몰되면 감정이 낭비되는 느낌이 든다. 감정도 에너지여서 말이다. (에너지가 부족해 간신히 살아가는 형편이라) 이 책에도 고통이 들어있다. 화자인 유리는 십대지만 오십대인 내가 져보지 못한 인생의 짐을 지고 살아간다. 그 고통을 조용히 참고 숨기며 유리는 성인이 되어 홀로 설 날만을 기다린다. 그런데 이놈의 얄궂은 인생이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는다. 또 빵빵 터지는 예기치 못한 일들. 참혹하고 난감하고 슬프고 괴로운 일들.
하지만 나는 인상을 쓰지 않고 끝까지 읽었다. 작가는 참 따뜻한 분인 것 같다. 유리의 얼마 안되는 주변인들 또한 작가처럼 좋은 사람들이다. 나는 거기서 안도했다. 뭐 엄청난 선의를 베풀어서가 아니고 옆에 있어 주는, 걱정해주되 호들갑은 떨지 않는, 조심스럽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같이 있을 때 편한 사람들 말이다. 교실이라는 정글 속에서 손잡고 울타리가 되어주는 동아리 4총사, 그리고 나보다도 나이가 많은 담임선생님. 이들이 없었어도 유리가 버틸 수 있었을까. 아닐 것 같다. 결국 상처를 주는 것도, 살게 하는 것도 다 사람이구나.
많은 작품에서 교사가 비열하거나 인격파탄인 것과는 다르게 이 책의 고향숙 선생님은 인격자다. 교실 정글에서 때로 코너에 몰려 위태롭기도 하지만 특유의 지혜와 강단으로 어찌어찌 버텨낸다. 속사연이 확실히 나오진 않지만 험난한 삶을 살아온 것 같은 선생님은 유리의 인생사를 캐묻기보다는 자신의 인생사를 슬쩍 들려주며 용기를 준다.
“그 정도면 죽을 만큼 힘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보다 더 독한 일들이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더라. 일단 우리는 전쟁은 겪고 있지 않잖아. 지독한 곳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내가 겪은 일로 죽어 버리겠다고 말하기는 나는 좀 그래. 하지만 유리야. 사람마다 느끼는 고통은 각각 다른 것 같더라. 감당해 낼 여건도 다르고, 설령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죽음을 선택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함부로 말할 수는 없을 거야.”
유리의 인생이 다른 평범한 아이들과 달라지기 시작한 건 ‘입양’부터다. 이 책의 주인공 중 2명이 입양된 아이들이다. 말하자면 입양을 핵심 소재로 잡고 쓰여진 작품이다. 작가의 말에 보면 입양 가족의 마음을 작가는 이렇게 헤아렸다. “한 아이와 평생을 함께하기로 한 우리의 결심을 대상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선지 작가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문장과 서사에서 느껴졌다. 비입양가족들이 행복과 불행을 겪을 수 있듯이 입양가족도 마찬가지다. 그중에서도 유리는 매우 특수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상황을 인정하고 단정하게 자신의 삶을 이끌어가며 평범한 삶을 향해 묵묵히 나아가는 유리의 단단함이 인상적이다.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은 입양 엄마 서정희 씨. 멘탈도 튼튼하지 못한 사람이 왜 입양은 했으며, 왜 몇 년 키우지도 못하고 할아버지에게 맡겨 버렸으며, 그 후에 또 어떤 사연으로 갓난아기를 안고 유리 앞에 나타난 건지, 그 아기(연우)는 또 왜 그리 방치한 채 키우고 비극을 맞아 결국 날아가려는 유리의 날개를 붙드는 존재로 나타나게 한 건지.... 무책임하고 막 사는 사람, 내가 제일 싫어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어서 짜증이 났다. 하지만 결말의 반전을 보니 또 미워할 순 없었다. 고향숙 선생님 말씀처럼 남의 인생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내가 유리였다면 유리와 같은 선택을 하진 않았을 것 같다. 나는 버리고 날아가는 쪽을 택하겠다. 하지만 날아가는 게 꼭 날아가는 게 아니고 주저앉는 게 꼭 주저앉는 건 아니다. 혼자 있어서 꼭 자유로운 것도 아니고 함께 있다고 꼭 속박되는 것도 아니다. 입양가족들을 보아도 그렇다. 그들은 왜 여러 가지를 감수하고 함께 있는 것을 선택했을까. (물론 자격도 없는 인간들이 선택한 결과가 비극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뉴스에서 보기도 하지만)
인생의 경우가 하도 다양하고 복잡하니 간단하게 말을 할 수 없다고밖에 표현을 못하겠다. 내가 볼 때 가장 고마운 존재는 유리네 자율동아리 4총사였다. 자기 상처를 굳이 펼쳐서 보여주진 않더라도 서로 적당히 감안하여 보듬으며 일상을 함께 유쾌하게 보내는 이들. 가장 힘든 순간엔 옆에 있어주는 이들. 우리 인생에서 절대 필요한 존재는 이런 이들이 아닐까. 피가 섞였니 안섞였니가 꼭 중요할까.
작품 속 가장 불행한 존재는 엄마가 해주는 밥 멀쩡히 얻어먹고 다니면서도 담임선생님의 소문을 약점잡아 수업을 망치려드는, 친구들의 입양 사실을 꼬투리잡아 공격하는 인간 말종 녀석들이다. 이런 것들은 쉴드를 쳐줄 필요가 없다. 길 가다가 코깨져서라도 정신을 차리길 바란다. 4총사들은 얘네들보다 훨씬 행복할 것이다. 훌훌 날 수 있는 존재들은 가볍고 더 멀리 볼 수 있으니까. 그래서 세상은 조금이라도 공평할 것이다. 나도 박박 기지 말고 좀 훌훌 날아오를 수 있다면 좋겠다. 가벼워지려면 비워야겠지?
청소년문학상 대상작인 이 책을 청소년들에게 강력 추천. 그리고 교사들에게도 추천한다. 초등학생들과 읽기엔 좀 어려울 것 같아 아쉽고 아까울 정도로 좋은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