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날 밤 우리는 ㅣ 시공주니어 문고 3단계 84
이나영 지음, 해랑 그림 / 시공주니어 / 2023년 9월
평점 :
사건과 서사 자체는 크지 않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을 구성하고 연결하는 데서 이나영 작가님의 내공을 느끼게 됐다. 다양한 시선에서 사건과 관계를 조망하고, 긴장감을 갖고 마지막까지 책장을 넘기게 하는 힘이 역시 대단하다.
사춘기 여학생들의 관계 이야기는 이미 많이 읽어서 약간은 식상한 느낌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많이 읽어서라기보다는 그 상황 자체가 멀미나도록 싫은 내 성격 탓인 것 같다. 아니, 관계... 거기에 왜 목 매냐고... 애고 어른이고 간에 그런 사람 너무 피곤해. 피곤하니까 되도록 안 만나고 싶고. 그러나 높은 확률로 만날 수밖에 없지.
이 책은 6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 다른 아이들이 화자다. “이레가 폐가 지붕에서 떨어졌다.” 라는 한 문장이 서문처럼 나오고 그 다음에 민아, 희서, 나정, 주미, 가은, 마지막으로 이레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뒤로 갈수록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고 마지막 이레 장에서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구성이다.
첫 장 민아. 내가 가장 싫어하는 스타일이 바로 얘다. 자존감이 낮으면서 약한 아이에게 갑질하는 걸로 눈속임을 하는 아이. 무리를 만들어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아이. 무리의 결속이 깨질까봐 속으로는 두려워하는 아이.
희서. 민아보다 약하지 않지만 부모끼리 가깝고 어릴 때부터 절친이라 바늘과 실처럼 붙어있는 아이. 이 아이가 독자 노선을 걸으며 두루두루 친구를 사귀었다면 건강한 관계가 되었을 텐데 좀 아쉽다.
나정이. 나는 이런 애도 싫어. 삼총사가 깨질까 봐 전전긍긍하고 눈치보며 갑질을 유발하는 아이. 갑질의 토양이자 영양분이 되어주는 아이.
이 삼총사의 학급에 이레가 전학 왔다. 당당하고도 센스있게 자기소개를 하는 이레는 첫날부터 돋보였다. 민아가 바로 손을 내밀었다. 이레는 고마운 마음으로 그 손을 잡았고 사총사에 편입되었다. 자유로운 영혼인 이레가 이렇게 무리에 고정되어 있어서 좋을 게 없는데. 본인도 힘들고 속상할 때가 많았는데 전학 온 이레로서는 처음의 구도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았던 걸까. 참 아쉬운 점이다.
4장과 5장에 등장하는 아이들이 4총사 멤버가 아닌 제 3자이며, 객관적인 시각을 제공하는 아이들이다. 먼저 주미는 공부벌레이고 부반장이다. 부모님의 강압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인의 성취욕도 보통이 아니라서 1분 1초를 쪼개가며 선행학습을 비롯 온갖 공부를 하는 아이다. 이 아이의 숨막히는 일상에 잠깐의 여유로운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그건 이레와의 만남이었다. 물론 4총사가 함께하지 않는 늦은 시간에.
다음은 가은. 육상부 선수라 교실에서는 거의 잠만 자고 존재감이 없는 학생이다. 달리기가 너무 좋지만 생각만큼 성과는 나지 않아 힘들다. 교실에선 친구가 없다. 그러다 우연히 이레와의 시간을 갖게 되면서 마음이 가까워졌다.
이런 관계들 속에, 중심사건은 앞에서 나왔듯이 이레의 추락 사건이다. 이레는 왜 폐가에 갔을까? 지붕에는 왜 올라갔으며 거기에서 왜 떨어졌을까? 이야기는 이레가 추락하고 병원에 입원한 후 며칠동안 서술한 각 화자들의 회상과 심리를 담았다. (아참,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는 설정) 이레는 민아가 내민 손을 잡고 사총사에 들어갔지만 얼마 못 가 따돌림을 당하며 조용히 상처받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추락사고는 누군가의 계략인가? 우연인가? 사총사의 나머지 세 친구는 왜 병문안을 가지 않는가?
모든 해답은 마지막 이레 장에 다 나온다. 사건의 전모가 걱정한 것만큼 악한 것은 아니어서 한시름을 놓았다고 할까. 하지만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정도의 아이들의 못됨과 욕심, 시기, 비겁함 등은 다 들어있다. 하지만 우리들의 희망은 아이들의 저런 모습이 고정불변은 아니라는 점. 아이들에게는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그 문을 열면서 이 작품은 바로 끝난다.
인간이 각양각색인 것을 어찌하랴. 그들이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다 가진 바, 사람들 사이에선 다양한 화학반응들이 일어난다. 이야기를 읽는다고 나에게 일어날 일이 안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조금 더 멋있게 대응할 수는 있겠지. 내가 선 위치를 파악하고 거기 머물러야 하는지 빠져나와야 하는지 좀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겠지. 나는 어떤 친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