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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엄마 ㅣ 휴먼어린이 고학년 문고 8
정연철 지음, 김진화 그림 / 휴먼어린이 / 2019년 11월
평점 :
3일간의 연휴, 보통 연휴도 아닌 성탄절 연휴인데도 마음이 밝지 않았다. 벌써 1년이 간거 실화인가? 집근처 작은 시네마 겸 까페에서 영화 한편 보고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 커피 마시며 책읽다 오는 그 작은 취미 하나가 사치라고 1년내내 한번을 못가게 한 코로나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와중에 한해를 보내게 생겼구나. 연휴 첫날인 성탄절에 교회도 못가고 두문불출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다행히 연휴 전날, 개점휴업 상태인 도서관을 그래도 꾸준히 활용하는 나를 위해 사서샘이 메시지를 보내 주셨다. "2학기 신청도서 왔어요. 한번 내려오세요."
정연철 선생님 책 2권을 골라왔다. 한권은 작년에, 한권은 올해 나온 책. 작년에 나온 책부터 읽어봤다. 세 편이 담긴 단편집이었다. 각 편은 단편 치고는 길었다.
첫편부터 몰아쳐오는 느낌이 있었다. 이게 정연철 선생님 작품의 장점인 것 같다. 작위적인 설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현실감? 지어낸 이야기라기보다는 그냥 어느 이웃의 쏟아내는 이야기를 듣는 느낌. 상황도 그렇고 대사도 그렇다. 리얼체(?)라고 하겠다.^^
세 편에서 공통된 키워드를 끌어올린다면 '역지사지'라고 하고 싶다. 평범한 주인공들, 그리고 그들과 다르지 않은 나 또한 역지사지를 거쳐야만 비로소 상황에 대한 깊은 이해가 가능해진다. 처음부터 안다면 좋겠지만 그건 훌륭한 사람인 경우고, 평범하고 좀 부족한 사람들은 이렇게 부끄러움을 느끼며 살아간다.
[저팔계 가족]에서 나현이는 폐렴으로 입원했다. 소아병동 8인실의 바글바글함 속에는 온갖 진상들이 있었다. (그 진상들의 묘사가 또 리얼) 거기서 나현이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된다. 죄책감도 없이 괴롭히던 그 아이를. 병실에서 최고 진상이라 경멸하던 '저팔계 가족'의 저팔계마저도 나현이가 넘어졌을 때 손을 내밀어줬다. '그동안 왜 그랬을까. 도대체. 난.' 그 병실의 한 병상에는 누워만 있는 예진이가 있었고 움직이지 못하는 딸 옆에 24시간 붙어있는 그 엄마의 모습은 조용히 슬프기만 하다. 퇴원을 앞두고 예진이를 위해 두손모아 기도하는 나현이의 모습은 작가가 그려내지 않은 나현이의 다음 행보를 상상하게 한다. 세상의 많은 예진이와 예진이 엄마들을 응원하는 마음과 함께. 등장인물들이 많은만큼 많은 감정들이 교차하는 이야기였다.
[목격자를 찾습니다]의 발단은 태민이가 얻은 자유롭고 행복한 하루다. 시골 친척 결혼식에 따라가지 않은 태민이는 내맘대로 하루를 손에 넣게 되었는데... 그 하루의 끝에 뺑소니 교통사고를 목격하게 되고... 그건 악몽으로 계속 태민이를 괴롭힌다. 목격자! 두려움으로 그 장면을 외면했지만 며칠 후 태민이에게도 목격자가 필요한 순간이 왔다. 미치고 팔딱 뛸 상황에 필요한 건, 증거와 그 증거 확인에 협조해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거기에 내 말을 무조건 믿어주는 친구가 있으면 금상첨화. 얼마나 고맙고 얼마나 속이 시원했을까? 이제 태민이의 선택은 정해진 것이다.
표제작인 [사춘기 엄마]에서 모녀는 만날 싸운다. 여기서 모녀란 한영이의 엄마와 그 엄마, 그러니까 외할머니다. 둘다 딱하다. 여기서 팩폭을 날리며 역지사지를 이끌어내는 사람이 한영이. 그런데 난 좀 놀랐다. 지나가는 말이긴 했지만 한영이가 엄마 결혼 전 사고쳐서 낳은 아이란 점. (고학년쯤이면 이정도 내용은 괜찮으려나?) 그니까 지금 아빠는 남동생한테만 친아빠인 거다. 이 책에서 유일하게 비현실적인 인물이 있다면 바로 아빠였다. 애딸린 미혼모랑 결혼해, 오갈데 없는 장모님 받아줘, 두사람 신경전 속에서 눈치껏 행동해, 기분 풀어줘, 친딸 아닌 한영이한테도 차별 안해.... 이런 남자가 있다고? 요즘 페북 보면서 중간중간 딸려나오는 '네이트판'을 몇 개 봤더니 이런 남자는 천연기념물도 아니고 그냥 세상에 없을 것 같다.^^;;;;;;;; 사춘기여야 할 딸(손녀)한테 팩폭 맞고 수그러진 사춘기 엄마와 사춘기 할머니가 이제 딸의 사춘기를 받아줄 여유가 생긴다면 좋겠지. 다 사느라고 그렇다. 사는게 다 그렇기도 하고. 딸래미가 저렇게 잘 큰것만 해도 큰 걱정 하나는 던 것이다. 돈이야 뭐 원래 아껴가며 사는거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읽어주고 싶은 작품은 첫번째 이야기다. 분량에 비해 인물들이 꽤 많이 등장했는데, 그들의 스치듯 지나간 감정들도 가깝게 다가왔다. 내가 가장 절절하게 느낀 건 식물인간이 된 딸을 간병하는 예진이 엄마의 마음이었고, 아이들은 나현이의 후회 쪽에 집중해주면 어떨까 생각해봤다.
완벽할 수 없는 게 인간이라면 부끄러움을 아는 존재이긴 했으면 좋겠다. 이것만 알아도 중간은 간다. 이 책은 우리 안에 부끄러움을 이끌어내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부끄러움을 드러낼 자신감을 주는 책일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