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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번 우리반 아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연애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었다. 5학년이면 2학기쯤 되어 그런 특성이 나타나곤 했는데 얘네들은 3월부터 아주 노골적이었다. 한 학년 통틀어도 100명도 안되는 아이들이라 그런지 학급단위를 넘어선 연애를 즐겼다. 덕분에 쉬는 시간에 교실에 있으려 하지 않아 애써 마련한 놀이감들이 무용지물이었을 뿐 아니라 쉬는시간 생활지도에 무척이나 애를 먹었다.

후반부로 가니 학급 뿐 아니라 학년을 넘어선 연애를 감행하는 아이들까지 생겨났는데, 잠시의 좋았던 연애질이 파탄나면서 생긴 사건사고로 학년말을 화려하게 마무리했다. 그 사건을 조사하고 진술서를 읽으면서 혀를 끌끌 찼다. 니들이 사랑을 알아? 사랑이 무슨 게임이냐? 장난이냐?-_-


 

 

 

 

 

 

 

 

 

 

 

 

 


그즈음 천효정 님의 <첫사랑 쟁탈기>를 읽으면서 아이들과 사랑이야기를 좀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이 책 <내 짝꿍의 비밀>을 읽었다.

 

 

 

 

 

 

 

 

 

 

 

 

 

주인공 인철이, 선영이란 이름을 어디서 들어봤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선영이, 그리고 인철이의 경우>라는 책의 개정판이었다. 난 이 책을 분명히 읽었다. 그런데 내용이 별로 기억나지 않는 것이, 그때는 무심히 읽고 넘겼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눈에 확 들어왔다. 이런 내용을 찾고 있었던 거지.

성급하게 다가가며 이벤트를 하거나, 남들에게 관계를 과시하려 하거나,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심지어 요구하는 사랑이 아닌 점이 맘에 들었다. 스스로 사랑이라 부르지도 못하는 이 감정들은, 아이들 마음의 빈 구멍을 채워주고 그 마음으로 다른 이의 마음을 이해하게 해 주었다. 이것이 내가 선영이와 인철이의 감정을 사랑이라 인정해주고 싶은 이유다.

주제별 도서목록을 만들어 활용하는 것이 취미인 나는 이 책을 읽고 <초딩 연애도서 목록>을 만들어봐야 겠다는 의욕에 불탄다. 이 책을 처음에 흘려보냈듯이, 꽤 많은 책이 있었는데 기억이 다 나지 않는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너는 나의 달콤한 □□(이민혜), 첫사랑(이금이) 정도다. 기억을 되살려 조만간 꼭 작성해 보리라 다짐한다.

 

 

 

 

 

 

 

 

 

 

 

 


그렇게 해서 각자 더 끌리는 책을 골라 읽은 후에는 마지막으로 <종이봉지공주>를 꼭 읽어줄테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왜 로널드 왕자를 찼을까? 에 대해서 질문한 뒤 멋진 남자(여자)는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보게 할 거다. 나는 과연 멋진 남자(여자)인지도.

 

 

 

 

 

 

 

 

 



아이들아! 제발 멋진 남자(여자)가 돼라. 그리고 멋진 여자(남자)를 만나서 멋진 사랑을 해라. 니들이 말하는 찌질한 사람이 되지 말고. 나도 너희들의 사랑을 격려해 줄 의향이 충분히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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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아이들과 책읽기를 시작하는 단계에서 책읽기의 소중함, 필요성을 자연스럽게 다룬 책을 넣으면 좋다. 2학년에게는 <샤를마뉴 대왕의 위대한 보물>을 넣었었는데 아이들이 재미있어 했고 책이 왜 위대한 보물인가에 대한 생각나누기도 곧잘 했다. 다음에 또 하게 되면 한 장면을 스톱모션 또는 역할극으로 표현해보는 연극놀이 수업으로 발전시켜 보고 싶다.

   

 

 

 

 

 

 

 

 

 

 

3학년을 할 때는 최은옥 님의 <책 읽는 강아지 몽몽>을 넣었다.

 

 

 

 

 

 

 

 

 

 

 

 

   

비룡소문학상 대상을 받은 작품인데, 영웅이네 집 강아지는 여느 강아지와는 다르게 가족들이 모두 나간 시간을 좋아한다. 혼자 조용히 책에 빠지는 그 시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설정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동화인데 뭐.... 반면 주인인 영웅이는 게임에 빠져 책이라면 고개를 흔드는 흔히 볼 수 있는 초딩. 몽몽이는 어쩌다 다음 권이 궁금한 시리즈도서의 첫 권을 읽게 되었는데, 미치도록 궁금한 그 책의 다음권을 읽으려면 영웅이가 그걸 사게 하는 방법밖에 없다. 주인 영웅이에게 책의 맛을 알게 하려는 강아지의 눈물겨운 노력! 아주 맛깔나게 재미있다. 이 책을 읽고는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하고 싶을 것 같은 이야기를 써보게 했다. 영웅이 엄마가 영웅이에게, 영웅이가 수지에게, 몽몽이가 영웅이에게, 그러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몽몽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쓰게 했는데 아주 재미있는 내용이 많이 나왔다. 이것도 쓰는 데서 그치지 말고 번갈아, 또는 돌아가며 말하기를 해서 생각을 공유하거나 핫 시팅 기법으로 연극적 요소를 넣어서 진행하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오늘 발견한 책, <책으로 똥을 닦는 돼지> 이 책도 2,3학년 정도에게 적당해 보이는데 교사가 적당히 조절하면 전학년에 활용은 다 가능할 것 같다. 위의 책 <책 읽는 강아지 몽몽>의 저자가 똑같은 주제로 1년 후에 내놓은 책이다. 이 주제를 전달하려는 저자의 집념이 보이는 것 같다.^^ 하지만 주제가 같다고 책이 비슷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둘 다 재미 면에서는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제목으로는 이 책의 선호도가 가장 높을 것 같다. 선생님이 아주 어렸을 때, 신문지로 똥을 닦던 시기도 있었단다... 이런 이야기로 시작하면 난리가 난 교실의 모습이 연상된다.^^

여기에는 책의 즐거움을 독점하기 위해 책의 쓰임새를 엉뚱한 곳으로 돌려놓은 시장님이 나온다. 뱀 할머니에게 책이란? ‘그늘을 만들어주는 도구이고 곰 아저씨에게 책이란? ‘낮잠 잘 때 쓰는 베개이런 식이다. 물론 주인공 돼지 레옹에게 책이란? ‘똥 닦을 때 쓰는 종이였다.

우연한 기회에 레옹은 이 모든 것이 시장의 음모이며 책이란 읽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리게 되기까지,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하다. 결국 시장의 거대한 서재는 도서관으로 바뀌고, 모두들 도서관에 오가는 기쁨을 누린다.

 

이러한 이야기들 속에서 책읽기를 강요하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삐뚤어진 아이는 없겠지?^^ 난 그 누구에게도,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강요할 생각은 없다. 이러한 나의 태도가 교사로서 부족함을 유발할 때가 가끔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타고난 천성은 직업으로도 고치기가 힘들다. 대신에! 이렇게 찾고 있잖아. 강요하지 않을 방법을. 그러니 내가 강요하지 않는다고 그 누구도 나를 욕하지 마라.

 

결론이 이상해졌네..... 성급히 돌리는 결론 : 위의 세 책은 모두 재미있고 유익합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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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의 추억 중 주황색 계몽사 세계명작 전집과 관련된 것이 많다. 그 전집이 있는 집을 정말 부러워 했었다. 그런 친구 집에 놀러가려고 은근히 애쓰던 기억이 난다. 친구집에서 한 두권씩 빌려온 책들을 정말 소중하게 읽었던 기억도. 지금 4,50대이신 분들은 보면 아실 것이다. 이런 책들이다.

 

   

 

우리 아빠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다. 그당시는 대부분 어렵게 살았고 외벌이 교사 또한 그랬던 것 같다. 월급날이 되면 아빠는 언니랑 내 손을 잡고 개천 길을 따라 국민대 앞 서점에 가서 문고판 책을 한 권씩 사주시곤 했다.(어릴 때 우린 정릉에 살았다) 그리고 아빠도 삼중당 문고 한 두 권을 사셨다.(삼중당 문고 또한 40대는 되어야 기억할 것이다.ㅎㅎ) 그렇게 책에 목말라하는 가족이었지만 전집을 사기는 어려웠다. 저 주황색 전집은 내 부러움의 추억이다.^^

 

그 중에 가장 재밌게 읽은 책을 꼽으라면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라는 책이다. 지금은 <라스무스와 방랑자>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다. 어른이 되어 이 책을 잡았을 때, 첫 장을 넘기기도 전에 어린 시절 독서의 추억이 물밀듯 몰려왔다. 라스무스가 고아원을 탈출하고, 남의 집 헛간에서 자다가 오스카를 만나고, 오스카가 나눠주는 우유와 거친 빵을 먹는 대목에서 침을 꿀꺽 삼키던 그 느낌까지도 생생하다.(지금은 '거친 빵'이라 말하지만 당시에는 어찌나 맛있을 것 같던지, "나도 한 입만." 이라고 하고 싶었다는)

 

어릴 때는 작가에 관심을 갖고 읽지는 않아서, 린드그렌이란 이름은 나중에야 알았다. 어른이 되어 아이들에게 책을 권해주는 입장이 되면서 린드그렌의 위대함을 알게 된 것이다. 그녀는 90이 넘도록 장수했고, 이미 고인이 되었다. 그러니 어떤 책들은 6,70년 전에 쓰여졌다. 그런 책들이 지금 읽어도 전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감동은 전혀 빛이 바래지 않는다.

 

그런데.... 이건 내 생각에 불과한 것일까. 10여년 전 본격적으로 독서지도를 시작했을 때부터 매년 빼놓지 않고 린드그렌의 작품을 목록에 넣어 함께 읽고 활동했다. 내가 받은 감동, 내가 느낀 그 재미를 아이들도 경험해보길 바랐다. 근데 갈수록 한계에 부딪히는 느낌이다. 나의 감성과 아이들의 감성은 다른가? 아이들의 선호 목록에서 자꾸만 밀린다. 뿐만 아니라 끝까지 읽기도 힘들어한다. 독후활동 해 놓은 것을 보면, 어쩌면... 이 가슴저리는 판타지에서 이렇게 아무 것도 못 느꼈다니.... 라고 실망하게 된다...ㅠ

 

사자와 형제의 모험에서의 그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가슴 뻐근하고 환상적인 분위기, 미오 나의 미오에서 가슴을 부여잡고 잠시 숨을 골라야 하는 그 안타까움과 긴장감, 이런 것들은 이제 요즘 아이들의 감성에 다가가기가 힘든 것이 되었나? 어릴 적 독서의 추억을 공유하는 언니와 나는 가끔 "이제 린드그렌이 아이들에게 안 먹혀~~ 너무 슬픈 일이야~~" 라며 한탄을 하기도 한다. 사랑이 움직이듯이 아이들이 취향도 움직이나보다. 엉엉... 그래도 포기하기엔 너무 아깝다. 한 두 번만 더 시도해 볼 거다. 어떤 책이 그 중 아이들의 마음에 다가갈까~~?

 

 

 

 

 

 

 

 

 

 

 

 

 

 

 

판타지 문학에 대한 책을 읽으면 서양 판타지의 전형으로 필리파 피어스의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와 이 책을 꼽은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톰의 정원의 환상적 느낌도 아름답지만 난 이책이 너무 아름다워 슬프다. 아니 너무 슬퍼서 아름다운가? 형제의 애틋한 사랑, 죽음 이후의 세계 낭기열라의 행복과 아름다움, 그곳에서 그들이 함께 겪어야 하는 모험, 그 과정의 긴장감 등 어느것 하나 흠잡기 어려운 명작이다. 그래도 이 책을 손에 잡는 아이들이 별로 없다. 창비어린이문고판(왼쪽)은 좋은 작품이 많은데 비하여 가독성이 떨어져 이제 개정판을 내야 할 것 같다. 그 중 몇 편은 이렇게 '재미있다! 세계명작' 시리즈로 다시 나왔다.(오른쪽) 혹시 칼라판? 하고 구입해 보았는데 그림도 예전판이랑 똑같다. 난 이 그림이 책의 느낌을 가장 잘 살린다고 생각하지만 각종 현란한 볼거리에 익숙해진 아이들의 눈길을 끌지는 못하는 것 같다. 어쨌든 구입했으니 학급문고에 넣으며 슬쩍 권해볼 생각이다. 과연....?

 

 

 

 

 

 

 

 

 

 

 

 

 

 

고아소년 보쎄는 입양된 가정에서도 사랑을 받지 못하고 늘 외롭게 지낸다. 어느날 저녁 심부름을 다녀오던 길에 보쎄는 공원 벤치 옆에 버려져있던 병 속의 거인을 꺼내주고 <머나먼 나라>로 가게 된다. 그곳에는 왕인 아빠가 계셨다. 한없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미오, 나의 미오"라고 말해주는 아빠. 그러나 사자왕 형제들처럼 미오에게도 악을 물리칠 사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려웠지만 거부하지 않았다. 그리고 미오는 마침내, 어둠의 기사를 물리치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 책의 가슴 미어지는 애절함은 마지막 장에 있었다. '테그너 공원의 나무 의자에는 보쎄가 앉아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 애는 머나먼 나라에 있으니까. 그 애는 머나먼 나라에 있어, 하고 나는 말한다.'

이건 뭔가? 이 모든 이야기는 외로운 보쎄의 상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었어? 사랑받지 못하는 조그맣고 마음 약한 아이가, 저물어가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 친아빠를 만나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고 가는 저런 멋진 상상을 하며 현실의 외로움을 잊기위해 필사적으로 애쓰는 모습. 이렇게 가슴아픈 반전이 또 있을까? 상상만 해도 애달펐다. 잠시라도 그 아이의 말벗이 되어주고 싶을 만큼.

그런데 아이들과의 도전에서 가장 실패한 책이 이 책이었다. 아이들은 이 책을 "재미없다" 라고 평가했다.....ㅠ 내가 너무 아끼는 책, 하지만 아이들에게 권하기는 좀 접어둔다. 이 책을 읽고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은 소수의 아이들만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 책은 위의 책들처럼 미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읽지 않아도 된다. 재미있고 유쾌하다. 환상적인 느낌은 없지만 어른들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제멋대로 살아가는 삐삐를 통해서 아이들은 대리만족과 후련함을 맛볼 것 같다. 이 책은 그동안 필독으로 활용해보진 않았다. 이미 읽은 아이들이 많은 것 같아서. 이번에 위의 책들 대신 활용해볼까 하고 살펴보다가 로렌 차일드의 그림과 함께 나온 책을 발견하고(오른쪽) 반가워했는데, 지금은 품절상태다. 시공주니어문고판 왼쪽도 좋지만, 오른쪽을 아이들이 더 좋아할 것 같은데.... 품절이 오래된 걸 보니 곧 절판되려나? 아쉽다.....

난 어렸을 때 이 작품을 <말괄량이 삐삐>라는 TV 드라마로 접했다. 위의 계몽사전집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이 주제가 또한 기억하실 것이다. "귀여운 괄량이 삐삐~ 어제도 말썽 그제도 말썽 오늘은 어떤 일을 할까요~"

책과 함께 이 옛날 고래짝 드라마를 보여 주면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파일을 구하느라 힘들었는데, 이런 바보! 유튜브에도 다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oqvlHw4UkI

지금 보니 자막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성우들의 연기는 휼륭하시지만 지금 보니 옛날 더빙은 참 촌스럽게 들린다.^^;;

 

 

 

 

 

 

 

 

 

 

 

 

 

위에 내가 계몽사 판으로 읽었다고 소개한 책이다. 이 책은 많이 활용해 보았다. 아이들의 반응은 딱 두가지로 갈린다. (1)너무 길어, 못읽겠어..(300쪽이 넘으니 길다면 길다. 이 정도 길이의 책을 감당 못하는 아이들이 의외로 상당히 많다는 사실) (2)우와, 완전 재밌어!(끝까지 읽은 아이들은 대체로 이런 반응을 보인다^^)

책이 두껍고 눈을 끄는 무엇인가가 없어도 읽다보면 책 속에 빠져들게 되는데, 그 빠져드는 지점까지 가는게 문제다. 그게 안되는 아이들은 내가 밀어 빠뜨릴 수도 없고 안타깝다. 이 책을 읽히면서 그런 생각을 가장 많이 해보았다.

 

그 외 이런 책들도 있다.

 

 

 

 

 

 

 

 

 

 

 

 

 

 

 

 

 

 

 

 

 

 

 

 

 

 

 

 

 

린드그렌을 거부하는 아이들아! 진정한 즐거움은 표면에 있는 경우가 드물거든. 조금만 참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봐. '이런 신세계가 있다니!' 할 거라니까. 내가 장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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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식 선생님이 1930년생이니 우리나이로 86세시다. 1951년부터 교직생활을 하셨다니 만약 초등학교 때 나의 선생님이셨으면 그때 이미 지금의 내 경력보다도 많은 중년이셨다는 것. 그런 분이 아직까지도 활발하게 수업에 대한 연구를 하시고 후배들을 가르치시고 책을 써서 전파하고 계시니 존경스럽다. 난 올해들어 부쩍 '내가 앞으로 10년 더 할 수 있을까?', '아이들 감당하기 힘들고 학교와 동학년에 민폐될 거 같으면 그만둬야 될 텐데' 요런 생각들을 하곤 하는데, 우리 아버지보다도 연세 많으신 선배님이 아직도 이렇게 열심히 살고 계시다니. 그분 눈엔 아직도 내가 '애송이'에 불과할테니, 그래, 나 지금부터 더 노력해도 되지 않을까? 

 

 

 

 

 

 

 

 

 

 

 

 

 

 

처음 읽은 이분의 책은 <수업기술의 법칙>이다. 그 때 이런 리뷰를 썼었다.

 

첫 장을 읽으면서 저자가 말하는 ‘수업기술의 법칙’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교사들은 모두들 나름대로의 수업기술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이 공유되어 있지 않고, 효과가 검증되지도 않았다. 이 나름의 수업기술들 중 임상적, 객관적으로 효과가 검증되어 어디에서나 보편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수업기술을 ‘수업기술의 법칙’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면서 의료계의 표준처방과 비교하여 교사들의 수업기술의 법칙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대부분 공감한다. 우리 교사들이 모두들 나름의 수업기술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이 모든 수업을 커버하기에는 부족하고 사실상 검증되지 않은 수업기술을 오랜 시간 고수하는 교사들도 있다. 따라서 저자와 같이 교사들의 온갖 수업기술을 수집하여 그 중에 효과가 확실한 것들을 검증하여 수업기술의 매뉴얼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정말로 의미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저자의 표현과 같이 ‘누가 적용하더라도 보통의 어린이 전원이 능동적으로 참가하여, 결과적으로 소정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수업기술’이 과연 존재할까 하는 의문이 조금 있다. 그래서 저자도 ‘보통의’라는 단서를 단 것인가? 현 교실에서는 ‘보통’이 아닌 학생들이 너무나 많이 존재한다. ‘보통의 어린이’들만 데리고 수업한다면 현재 내가 가진 수업기술만으로도 무리 없이 수업을 해나갈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보통’이 아닌 아이들까지 아울러 수업을 해야 하는 작금의 현실인데 거기에 대한 대안이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고 이 책을 읽어나갔다. 솔직히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가지고 있는 수업기술이라는 것이 정말 보잘 것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그것도 나름의 소득이라면 소득이겠다. 특히 처음에 소개된 ‘자기 나름의 생각 확립’에 대한 내용을 읽으며 가장 핵심적인 것도 생각지 못하고 있던 나의 수업기술이 부끄러웠다. 교사가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내용을 지도하기에 앞서, 아이들이 나름대로의 생각을 확립해 놓는 일은 정말 중요하다. 그것이 배움의 원동력이고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동안 나의 수업은 어떠했나? 아이들이 준비되었건 안 되었건 내가 준비한 것을 쏟아놓는 수업은 아니었나? 받을 만한 아이들은 그것을 받지만 준비 안 된 아이들은 받지 못한다. 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화를 내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었을 뿐이다. 받을 준비가 되도록 하는 것도 교사의 역할이었으니 말이다. 

 

다음으로는 우리가 수업기술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도입기술과 발문기술에 대하여 알려주고 있다. 참고할 만한 내용이 많았으며 도입과 발문이 왜 중요하고 수업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도입이야 시간상으로 따지면 5분이면 충분하지만 그 5분의 역할이 40분을 좌우하며, 따라서 5분을 위한 희생(고민과 시간투자)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토론 수업에 대한 내용으로 한 장을 할애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내용도 매우 알차다고 느꼈다. 특히 기계적인 찬반토론 외에 수업 중에 나온 의문점을 가지고 토론하는 방식이 인상깊었다. 마지막 내용은 전원참가 수업에 대한 것이다. 이 내용은 협동학습에서 본 내용들이 있어 그 중 익숙했지만, 처음 접하는 방식도 있어 또한 새로웠다.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을 흔히 하는데 수업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늘 한다. 그래서 사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수업기술의 법칙’이라는 정의에 약간의 심리적 반발감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누가 해도 성공할 수 있는 수업기술이라니, 어떻게 그런게 있을 수 있나?) 교과전담을 했던 경험을 비추어보면 이 반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던 수업이 저 반에서는 도통 들어먹히지 않는 경우도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업에는 교사요인이 100%는 아니요, 학생요인(?)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요컨대,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지가 귀를 틀어막고 있다면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이런 나의 생각이 무척이나 위험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일부 사실일지라도, 그걸 전제로 수업에 임하면 안 될 것이다. 전원 참여에 전원 성취, 실현이 매우 어려운 꿈일지라도 교사라면 이것을 향하여 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수업기술에 대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와 함께 수업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던져준 이 책에 감사한다. 교사는 그만두는 날까지 고민을 끼고 살아야 한다는 현실을 절감한다.

 

 

이번 여름방학에는 최근에 나온 <모두가 참여하는 수업에는 법칙이 있다>를 읽었다.

 

 

 

 

 

 

 

 

 

 

 

사실은 앞에 소개한 <수업기술의 법칙>을 몇 년 전에 읽어 내용이 가물가물하다. 이 책을 읽으니 앞 책에서 중요한 부분은 다시 다루고 있고 거기에 새로운 내용들을 더 추가하신 것 같다. 두 책 모두 가장 핵심적인 것은 수업 도입 때 전원이 문제의식을 가지게 해야 한다는 것, 학습에 임하기 전에 일단 '자기 나름의 생각'을 만들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자기 나름의 생각' 이라는 것은 사고의 응결핵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요즘 자주 쓰는 용어인 참여수업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다. 앞의 책을 읽고 이 부분은 몇 번 시도를 해보았으나 지속적이지 못하고 체계적이지 못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부분을 확실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 되겠다는 다짐을 몇 번이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쓰고 있던 배움공책 정리 방법을 개선해봐야 될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드는 생각은 "내가 어릴 때 받았던 교육이 구식이고 잘못된 것이 아니구나, 오히려 요즘 수업에서 트렌드를 따르느라 놓치는 것이 많구나" 라는 것이었다. 저자가 80대 노령이라서 그런 것일까?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동안 내가 기본을 못보고 넘긴 탓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나 어릴 때는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우리집이든 친구집이든 모여서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일단 숙제장부터 꺼냈다. 국어숙제는 거의 매일 있었다. 날말뜻 10개, 비슷한 말 10개, 반대말 10개(갯수는 정확하지 않다^^), 줄거리 간추리기 정도가 기본이었다. 이런말 몹시 쑥스럽지만, 지금 아이들 중에 나 초등학교 때 정도의 어휘력과 요약능력을 가진 아이들은 흔치 않다. 이게 교육의 문제가 아닐까? 그동안 나는 왜 내가 잘했던 거라 생각했던 거지? 나는 왜 나를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들처럼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했으면서 아이들이 못한다고만 생각했던 것일까?

 

물론 지금과 그때의 상황은 다르니 그런 숙제를 내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단원의 성취수준만 건드려 주면 됐다고 생각하고 교과서의 분량에 짓눌려 본문을 소홀히 다룬 경향이 있었던 것을 인정한다. 음독, 어휘 지도 이 두 가지를 선생님은 매우 강조하셨는데 나는 그 부분 매우 소홀했던 것을 인정하고 앞으로 바로잡으려고 한다.

 

요즘의 수업이론들은 모두 '전원 참여수업' '사고력을 키우는 수업'을 지향하고 있다. 여러 이론들의 홍수 속에서도 갈피를 못잡고 있던 나는 이 노령의 선생님께서 또박또박 친절하게 가르쳐주시는 내용에서 비로소 몇 가지 단서를 붙잡는다. 전원 참여 수업도, 사고력 수업도 모두 기본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허공에 뜬 것은 언제든 가라앉을 것이다. 난 올해 아이들의 생활지도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빼앗겨 솔직히 수업의 발전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다. 언젠가 배움의 공동체 연수를 듣다가 "수업 안에서 다른 문제도 해결된다(수업이 변해야 학교가 변한다)."는 취지의 말씀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2학기에는 수업에 좀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싶다. 제발 그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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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당연한 말이다. 말은 상처를 주라고 있는게 아니다.

소통하며 이해하고 더욱 사랑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말은 상처를 주라고 있는거야!" 라고 피를 토하듯 외치는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도처에 있다. 정치판에도 있고, 온라인에도 넘친다. 동료들 중에도 있고 상사들 중에도 있다.

 

아이들은 어떨까? 올해 우리반에는 그런 아이가 있다. 이 아이가 쑤셔대는 비수로 상처받거나 빈정 상하는 아이들이 꽤 있다. 담임인 나도 그 중의 하나라면 믿으려나? 그런가 하면 이 아이를 좋아하고 따르는 아이들도 꽤 된다. 운동을 잘하고 웃기기도 해서 주로 드센 남자아이들의 구심체 역할을 한다. 그뿐이 아니라  여자아이들 중에도 때론 상처받으면서조차 이 아이를 미워하지 못하는 가련한 녀인네들이 있다. 소위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청순가련형 녀인들이다. 난 젊었을 때부터 이런 취향과는 거리가 멀어서, 가슴을 감싸안고 쓰러지면서도 이 아이에 대한 애정을 놓지못하는 녀인네들을 보니 솔직히 속이 터진다. 

 

이 아이는 쌍시옷이나 쌍기역이 들어간 소위 쌍욕들을 그렇게 많이 하진 않는다. 대신에 "니 주제에~" "병신아 꺼져" "장애 찐따 같은게" 와 같이 상대방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막말들을 서슴지 않고 한다. 표정과 제스처까지 곁들이면 누구도 상처 안받고는 못배긴다. 오죽하면 어른인 나도 상처받았다고 하지 않는가?

위안이 있다면, 지금은 조금씩 좋아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가끔은 "이 녀석도 어린애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카리스마도 없는 담임인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든다. 때론 그 녀석의 투정에 공감도 해주고 솔직히 내 감정을 얘기해주기도 한다. "널 처음 봤을 때 솔직히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데 비상한 재주를 가졌다고 느꼈다. 이러저러이러저러 했을 때이다. 그렇게 하면 누구든 상처받는다. 나도 너무나 불쾌했었단 말이다. 그게 너의 의도는 아니지 않니? 그리고 그건 인간에 대한 예의와 관련된 문제다." 이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어쨌든 지금 이 녀석은 날 무서워하지는 않되 일정선을 지키려 눈치는 보고 있는 중이다. 그게 고맙기도 한데.......

 

사건은 또 터졌다. 학급대항 운동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이 아이(A라고 하겠다)한테 받은 상처가 큰 B라는 아이가 있다. B는 특히 운동에 약하다. 같이 경기를 하면 좀 답답할 수 있다. 그리고 특히 이렇게 경쟁을 하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것까지도 감싸주고 격려하는 게 친구고, 반듯하고 배려있는 사람의 태도이지 않나?

연습을 할 때, 의외로 B가 크게 표나지 않게 그럭저럭 하고 있어서 안심을 했다. 그게 담임의 불찰이었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긴장한 B는 연습 때 하던 것의 반의 반도 못했다.  A의 다그침이 쏟아졌다. 욕은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해! 저렇게 하라고! 와 같은 감정섞인 고함에 B는 그만 얼어붙었다. 마비된 사람처럼 아무 것도 하지 못했고, 우리 팀은 당연히 패했다. 씩씩거리며 자리로 돌아가는 아이들을 보는 B의 심정이 참담했으리라. 몇몇 괞찮은 녀석들이 다가와 B의 어깨를 두드리며 괜찮다고 위로했다. B도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뒷모습이 아무래도 불안해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그리고 도서실에서 이 책을 찾아 읽었다. 마음이 많이 아팠다. 마침 국어도 말의 영향에 관련된 단원을 할 차례라 아이들과 함께 읽으려고 대출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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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상처를 주라고 있는게 아니랍니다 / 엘리자베스 베르딕 / 지식더미

 

여러분의 말은 여러분의 것이랍니다.

무슨 말을 할지, 그리고 어떻게 말할지는 여러분의 마음에 달렸어요.

여러분의 말은 누군가를 다치게 할 수도 있고,

누군가를 도와 줄 수도 있어요.

 

말은 상처를 주기 위해 있는 게 아니에요. 누군가 여러분을 상처받게 하는 말을 했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아마도....

슬프거나,

몹시 화가 나거나,

겁에 질릴 거예요.

아니면 머릿속이 뒤죽박죽 되거나,

할 말이 없어지지요.....

 

다음날, 수업시간이 되어도 아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1교시 쉬는 시간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아이가 학교 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한단다....

이틀간 엄마랑 집에서 지내면서 쉬고 월요일에 등교하겠다고 한다. 마음이 더 무거웠다. 이 아이가 받는 말의 상처를 완전히 차단해 줄 수는 없다. 이 아이의 환경을 무균실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은 그 어머니나 나나 마찬가지다. 그저 나는 이미 일어난 일을 최대한 교육적으로 이끌어갈 수밖에 없다. 국어시간이 되어 "오늘은 그림책으로 국어수업을 시작합니다"라고 했다. 이 책을 중간쯤 보여줬다. 그리고 어제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들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조용히 얘기를 들었다. 이 책의 뒷부분으로 마무리를 했다. 너희들이 일부러 나쁜 말을 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어떤 말이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는 줄을 알았으면 같은 상황에서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된다고 당부했다. 아이들은 기운없는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을 했다.


내내 고개를 숙이고 얘기를 듣던 A와 눈이 마주쳤다. 학기초에 보이던 반항적이고 불만이 가득한 눈빛은 사라져있다. 그런 눈빛이 이제는 내 마음 한구석을 아프게 한다. 대신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2년 전 얘기를 꺼낸다.(2년 전에도 A와 B는 같은 반이었고 많은 사연들이 있었다) 아무도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았으며 자신은 억울하게 혼난 적도 많단다. 잘못을 날카롭게 지적하시는 당시의 담임선생님께 이 아이는 아직도 한이 맺혀 있다. 야, 그럼 제정신 박힌 선생이면 당연히 피해자 편을 들지 가해자 편을 들겠냐?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일단 삼키고, 그 이야기는 우리 둘이 하자. 라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다문다. 울 듯한 표정이다. 조만간 이 아이가 쏟아놓는 말을 일단 무조건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감당이 될까?^^;;; 모르겠다. 이런 바보같은 선생이 또 있으려나...........


스토리는 없이 교훈을 열거하는 방식의 이 책은, 평상시 같으면 그냥 넘겼을 책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으니 이 책의 제목에 꽂히게 되었다. 무엇이 됐든 아이들의 수면에 작은 돌 하나 던져주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솔직히 든다. 어른들은(나는) 얼마나 말을 조심하면서 산다고..... 이 책의 제목을 참 잘 지었다. 그냥 제목만 기억하겠다. 말은 상처를 주라고 있는 게 아니에요....... 이 책을 읽어봐야 될 어른들이 아이들보다 훨씬 더 많지만 그들이 내 말에 귀 기울일 일은 없으니, 나는 나를 바라보고 앉아 있는 이 아이들과 함께 이 책을 읽으며 고민하며 살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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