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리집>



방학을 마무리하며 독서모임은 영화관람과 함께 했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은 4학년 국어교과서에 들어왔으니 이번 교육과정동안 4학년을 거치는 아이들 중에는 안보는 아이들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문제삼고 싶지 않을만큼 괜찮은 영화긴 했다. 나는 솔직히 그렇게 좋진 않았지만 그건 내문제이고....

열화같은 성원으로 두번째 탄생한 이번 작품도 역시 화제작이 될 만하다. 잘 만든 작품이고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연기도 뛰어나다. 힘든 두 가정에서 살아가는 아이들, 가정의 문제를 어떻게든 극복해 보려는 아이들의 몸부림과 그 연대가 예쁘고도 안쓰럽다. 어른들을 향해서도 많은 말을 한다. 당신들이 당신들의 문제에 빠져 있을 때 아이들은 이런 마음이고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런 행동과 이런 궁리를 할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 안에도 당신들 못지 않은 우주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보는 내내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내 왼쪽의 관객은 아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명랑한 웃음을 보내셨고, 오른쪽에 앉으신 분은 공감의 한숨과 눈물을 흘리시는데 나는 화가 났다. 화의 포인트는 하나의 표정과 태도였다. 죄지은 것도 없이 쩔쩔매고 눈치보는 모습. 맞다. 선이도 저런 표정이었지.

나의 문제다. 나는 왜 <우리들>의 선이나 <우리집>의 하나가 비슷하게 보이면서 짜증이 치솟는 것일까? 아이들의 눈치보는 태도, 뭔가 돕겠다는 넘치는 오지랖, 능력은 안되면서 자기가 해야된다는 동동거림, 이런게 지켜보기 딱했다. 나는 가족 중심의 생활을 하는 편이고 가족의 가치를 높게 두는 편인데도 '얘야 깨진 항아리는 본드로 붙여봤자 소용없단다. 너무 애쓰지 마라.' 이런 말을 속으로 하고 있었다. 차라리 중학생인 하나 오빠가 부모에게 "아, 언제까지 싸울건데? 헤어지든가 빨리 결정을 하라고 쫌!" 하거나 동생한테 "지금 뭐하는거냐? 이래봤자 소용없거든? 하긴 어린 니가 뭘 알겠냐." 할 때 에구 그래, 너는 좀 살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또 한 가족 유미네는 좁은 셋방에 아이들만 놓아두고 부모 모두 공사일에 나가 있다. 그와중에 집주인은 또 방을 내놓고, 이사에 이골이 난 유미는 어떻게서든 막으려 하지만 쉽지 않은데... 결국 동네언니인 하나의 오지랖으로 부모님을 찾아나선 길. 그 험난한 길. 서로의 설움이 폭발해 서로 원망하고 울부짖고, 그리고 함께 잠들었다 돌아오는 길....
유미가 돌아서는 하나한테 묻는다. "언니, 우리가 이사가게 돼도, 계속 우리 언니 해줄거지?"
난 이 대사가 가장 고마웠다. 이 말도 없었다면 끝까지 화냈을 테다.ㅠ

돌아온 하나는 밥을 차린다. (하나의 밥타령과 음식만들기는 영화 전반에 계속 나온다. 같이 밥먹자... 내가 할게...) 그래, 같이 밥을 먹어서 식구라고 한다지. 경찰에 신고하고 들어온 가족들은 놀라고 어이없어하며 밥상에 앉는다. 밥 위의 계란후라이가 탐스럽다. 그리고 하나의 마지막 대사의 무게가..... 대단하다.

영화를 보고 독서모임 선생님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가족은 소중한 게 맞지만 절대 깨져서는 안되는 절대구조는 아니지 않냐? 하나 보면서 짜증났다." 했더니 "물론 그렇지만 아이한테는 그 울타리가 우주였던 거지. 아이가 눈치보고 아양떨고 왜그러겠어. 살려고 그러는거야. 지도 살려고." 그 말씀을 하시며 눈물을 살짝 비치시는데 그제서야 나도 좀 울컥했다. 그리고 내가 '오지랖'이라고 표현한 것을 다른 샘은 '연대'라고 표현하셔서 심히 반성됐다.^^;;;;;

하나네 부모님이 어찌됐을지, 유미네가 이사를 갔을지 그건 독자의 상상의 몫이다. 최악은 유미네가 멀리 이사가고 하나네 부모가 이혼하는 거 아니겠나. 내 말은, 그래도 괜찮다는 거다. 그럴수도 있는거지. 근데 아이 마음을, 표정을, 태도를 봐주라구요. 살피고 다독이고 당당하게 펴주라구요. 니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라구요. 그리고 애가 뭘 해주면 맛있게 먹어주고 엄지손가락도 좀 치켜세워주고, 아이가 진정 좋아서 하는거면 취미로 살려주고 어찌될까봐 쩔쩔매서 하는거면 다른 취미로 밝게 지내도록 도와주라구요. 그정도는 해주세요. 나머지는 애들이 알아서 잘해요. 어른들은 '연대' 못해도 애들은 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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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캘러핸이라는 실존인물의 자서전을 영화화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전신마비 카툰 작가였다. 말그대로 '영화같은' 인생을 살다 갔다. 우리엄마보다 10년 젊으신데 10년 전 작고했으니 비교적 짧은 삶을 살다간 셈이다. 하지만 사는 동안 그 삶이 얼마나 힘겨웠을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결국 그는 절망을 이겨냈지만.... 그래도 내 마음은 끝내 편해지지 않았다. 절망을 극복하기보다는 아예 절망하지 않기를, 역경을 이겨내기보다는 아예 역경이 다가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쫄보인생이어서 그럴 것이다.

그는 어머니에 대한 3가지 정보를 알고 있다고 말했다.(내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수 있음)
1. 아일랜드계 미국인이다.
2. 빨간머리다.
3. 학교 선생님이었다.(엥....)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저를 원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그는 버려졌고 입양되었고 그곳에서도 환대받지 못했다. 그는 일찍부터 술담배를 했고 알콜중독자가 됐다.

상처받은 짐승의 몸부림은 처절하다. 그동안 받아마땅했던 모든 사랑과 위로와 관심과 어루만짐이 있어야 그 몸부림이 잦아든다. 그제서야 우리는 그의 눈을 바라보고 차분히 말을 건넬 수 있다. 누군가는 그 일을 해주어야 한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그걸 알지만 실제로는 잘 되지 않는다. 그가 이빨을 드러내고 있으니.

그의 짐승 몸부림에 난 미간을 찌푸렸다. 금단증세로 덜덜 떠는 손으로 병째로 술을 들이키고, 비틀거리며 걷고 아무말이나 하고 아무나 만나 위험한 일에 빠져들고... 만취된 두 사람이 차로 걸어갈 때 알아차렸다. 아 저렇게 해서 사고는 일어나는구나.... 그 결과는 너무 참혹했다. 병원에서의 시간, 온몸이 고정되어 겨우 말만 할 수 있는 그가 자원봉사자인 아누와 나누는 얘기가 너무 처절했다.(정확한 대사는 기억 안 남)
"하나님께 말한다면, 제발 마비가 되지 않게 해주세요."
"악마에게 말한다면, 내 영혼을 가져가도 좋으니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그러나 이미 그의 척추는 부서져 전신이 마비된 상태. 퇴원한 그는 휠체어에 앉아 방문간병인의 손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그리고 그 끔찍한 변화에도 알콜중독만은 그를 떠나지 않고 남아있었다. 그는 '알콜중독자 모임'에 나간다. 집단상담 같은 모임인데 인도자인 도니와의 대화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주옥같은 대사가 오고가는 동안 깜빡깜빡 졸아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대사를 많이 놓쳤다.;;;; 존은 도니가 제시한 12단계 프로그램을 하나씩 실행해나간다. 그와중에 환상속의 엄마를(그토록 원망하고 그토록 그리워하던) 보고 음성을 듣기도 하고, 음주운전으로 자신을 이꼴로 만든 친구를 만나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이때 그의 표정이 정말 편안해 보였다. 타인과의 화해(용서)는 그렇게 성공했다.

마지막 단계는 자신과의 화해(용서)일 터. 그는 이것을 무난히 해냈을까?

창피하게도 심각한 대화 도중 살짝 졸았던 이유는.... 이 영화는 극적인 역경극복 스토리가 아니다. 믿을 수 없는 변화가 한 순간에 일어나고 막 감격스럽고 그렇지는 않다. 그냥 그는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쩌면 선택지가 없으니까. 그는 용서했다. 어쩌면 용서하지 않는 것이 더 괴로우니까. 케이트 디카밀로의 동화 <생쥐기사 데스페로>가 생각났다. 데스페로가 자신을 버리고 사지에 밀어넣은 아빠를 용서할 때 작가가 뭐라고 했더라? 


["아빠, 아빠를 용서해요"
데스페로는 그 말을 하는 것이 가슴이 둘로 쪼개지지 않을 단 한가지 방법이라고 생각했단다. 얘들아, 데스페로는 자기 자신을 구하려고 그 말을 한 거야.]

그렇게 존은 자신을 구했다. 영화 전반에 걸친 그의 표정변화는 동일배우라 믿기 힘들 정도로 일품이라고 생각한다. 타락한 짐승일 때의 표정-사고로 절망할 때의 표정-쓸쓸한 표정-체념한표정-편안한 표정-복잡한 표정-그리고 사랑과 기쁨의 표정도.

다시 본다면 그의 카툰 내용에 집중하고 싶다. 시각정보에 약한 데다 졸기까지해서 카툰 내용까지는 잘 파악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사고와 처지에 대한 감정이입이 심해서 참 힘들게 영화를 봤다. 그는 용서하고 편안해졌는지 몰라도 내 상상은 거기까지 닿지 못했다. 난 '스페셜'하지 않아도 좋으니 '워리'하지 않게 살고 싶어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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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리언 울프의 <다시, 책으로>를 읽고 있다가 동화 <잃어버린 책>을 읽고 깜짝 놀랐다. 아니 어쩌면 같은 날 읽은 책의 주제가 이리 쌍둥이같단 말인가! 이 책은 마치 다시 책으로의 동화버전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장르가 전혀 다르니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 문제의식이란 책에 빠지지 못하는(깊이읽기가 안되는) 요즘 세대에 대한 안타까움이고 그 원인은 스마트폰 같은 디지털 매체들이 어린시절부터 이들을 장악하기 때문이다.


다시 책으로의 저자에 따르면 우리 뇌의 읽기 회로는 타고난 것이 아니며 후천적인 성취라고 한다. 게다가 뇌는 가소성을 가지고 있어 읽기방식에 따라 매우 다른 형태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해 세대에 가능하던 것들이 디지털 세대에서는 어렵거나 거의 가능하지 않은 일이 되어버릴 수 있다. 즉 잊혀진, 또는 쇠퇴한 기능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쇠퇴해가는 기능 중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공감과 상상력이다. <다시 책으로>는 제3장 [위기에 처한 깊이 읽기]에서 깊이읽기가 주는 다양한 능력들을 소개했는데 그중 공감에 대해 비중있게 설명했다.
"읽기라는 행동은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풀려나 타인에게로 옮겨가는 일이 일어나는 특별한 공간이었습니다."(80쪽)
"타인의 삶에 들어가 보는 것이 우리 자신의 삶에도 강력한 의미를 갖는다는..... 다시 자신으로 돌아올 때 우리는 더욱 확장되고 강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도 바뀌어 있습니다."(81쪽)
"타인의 관점을 취해봄으로써 우리가 지닌 공감의 감각이 방금 읽은 것과 연결될 뿐만 아니라 세계에 관한 우리 내면의 지식까지 넓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학습된 능력은 시간이 갈수록 우리가 인간다워지도록 도와줍니다."(82쪽)


<잃어버린 책>은 올해 웅진주니어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작년 수상작인 <걸어서 할머니집>이 너무 좋아서 이 상에 대한 신뢰도를 갖고 구입했다. 역시 좋았다. 책속 주인공들과 교감할 정도의 독서경험이 있는 아이라면 흠뻑 빠져들 것이다. (요즘 그런 아이가 별로 없다는 문제점에서 <다시 책으로>가 나왔겠지만...) 주인공들의 책속 친구인 클로디아(클로디아의 비밀), 윌버(샬롯의 거미줄), 비버(사자와 마녀와 옷장), 토끼(에드워드 툴레인의 신기한 여행)을 아는 아이라면 더욱 반색을 하겠지. 특히 사자와 마녀와 옷장, 에드워드 툴레인의 신기한 여행은 나에게도 아주 특별한 독서경험이었기에 나도 이 책이 무척 반가웠다.


대비되는 두 친구가 나온다.
용미. 엄마의 미용실 구석에서 책과 대화하며 어린시절을 보냈고 4학년인 지금까지도 매인 곳 없이 자유롭게 지낸다.
한나. 극성맞은 엄마의 스케줄에 맞춰 사느라 너무나 지쳐있다. 무거운 첼로가방에 처진 어깨.
용미는 가출을 꿈꾼다.(반항이 아니라 모험의 개념이다.) 소신있던 용미엄마도 한나엄마의 협박에 넘어가 용미를 학원에 집어넣은 어느날, 가출은 감행된다. 어쩌다보니 한나도 같이.

여기서부터는 판타지다. 버스에서 잃어버린 책을 찾으러 분실 책 보관소에 오게 된 순간부터. 거기엔 아이들을 기다리던 옛 상상속의 주인공들이 있었고, 독자들에게 끝내 잊혀져 먼지가 되어버린 주인공들이 있었다. 두 소녀는 한나의 첼로를 빗자루 삼아 모험을 떠난다. 모험 속에서 우리는 까마귀 아브라삭스도 만나고 트롤, 마귀할멈도 만나고 '책의 마녀'도 만나볼 수 있다.

모험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다시 미용실 창고를 아지트로 삼았다.(미용실 창고엔 철거직전의 분실책 보관소에서 가져온 책들이 한가득) 이곳에서 아이들이 하고 있는 일이 책소개 동영상 촬영과 공유라는 점도 놀라웠다. 아니 이거야말로 <다시 책으로> 8장에서 주장하는 '양손잡이 읽기 뇌 만들기'와 일맥상통하는 것 아닌가? 아이들이 공유한 경험이 친구들에게 흘러들어 새로운 독자를 만들어내듯이, 이 책으로 호기심이 자극된 독자들이 더 깊은 독서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그리하여 모든 아이들이 상상속의 친구들을 만들고 때로 그 친구들에게 위로와 격려,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면 좋겠다. 빨간머리 앤이 영원한 것은 그녀가 지금까지도 누군가의 친구가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친구를 공유한 친구들의 이야기는 또 얼마나 신나고 끝이 없는지.... 그럴 여유를 아이들에게 주는 세상이면 좋겠다. 눈앞에 스마트폰은 좀 치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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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리아 칼라스>

더숲 상영 시간표를 보다가 이 영화를 골랐다. 난 음악에 재능이 없지만 음악영화는 좋아한다. 그리고 세기의 디바라는 마리아 칼라스의 음악과 일생이 궁금했다.

1. 인간의 목소리로 그런 고음을 그렇게 아름답게 낼 수 있다는 게 경이롭다. 전에 지휘자 선생님이 "내가 힘들면 듣는 사람이 편하다" 이런 뜻의 말씀을 하셨는데 관중의 귀에 편안한 고음을 내는 성악가의 몸은 호흡유지에 엄청난 힘을 쏟고 있는 것이다.(물론 프로들은 그런게 표시나지 않지만) 한 곡도 어려운데 수많은 관중의 주목을 받으며 긴 시간 연주해야 하는 공연은 성악가들에게 얼마나 큰 부담일까. 인생후반에 쇠약해진 그녀는 무대에 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노래는 목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술(특히 성악)을 한다는 건 엄청난 자기관리다. 잘은 모르지만 조수미 씨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 그녀는 마리아(인간,여자)와 칼라스(공연자) 두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이야기했다. 칼라스로서의 삶은 최고에 올랐지만 마리아로서의 삶은 행복하지 못했던 것 같다. 자신을 환호하는 관중 속에서도 그녀는 외로웠던 것 같다. 환호하는 저 많은 사람들도 공연이 끝나면 자신의 가족 곁으로 돌아갈 뿐 지친 그녀의 옆에 있어줄 사람들은 아니니까.... 문득 그녀의 외로움이 이해되었다. 그녀의 옆에는 늘 개가 있었다.(우리집 개처럼 쫄랑거리는 푸들이라 내 눈에 확 들어옴) 개의 존재가 내겐 그녀의 외로움의 표상으로 느껴졌다. 사랑도 하고 싶고 아이도 낳고 싶다고 했던 칼라스는 결혼도, 뒤늦게 찾아온 사랑도 다 상처로만 남았다.

3. 특출한 재능은 축복일까? 물론 그렇다. 하지만 본인 입장에서는 힘겨운 운명일수도 있겠다. 세기에 한명이라는 재능. 그것도 전세계에서. 얼마나 대단한가? 근데 그 재능을 나에게 주겠다면... 생각좀 해봐야 되겠다. 평범한 행복. 비범한 외로움. 뭘 선택해야 할지 말이다. (물론 평범해도 외롭다.^^;;; 하지만 외로움의 차원이 다르지 않을까.)

4. 이 세기의 소프라노 역할을 누가 맡았을까? 했는데 다큐영화였다. 오래된 자료영상만 가지고 한 인생을 조명하는 음악영화를 만들다니 그것도 대단하다.

그녀는 외로움과 불안, 우울 속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음악은 아직도 우리 곁에 있고 여전히 경이롭다. 그리고 그 재능을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그녀의 식탁에서 떨어진 빵부스러기라도 주워먹겠다는 지망생들이 줄을 섰을 것이다. 나야 뭐 그런 것조차 아니고 그래도 평생 득음은 한번 해봤으면 하는 소망이 있는데... 동학년 언니가 "나 올해 애들한테 소리지르다가 득음했잖아." 하셨는데 난 27년을 소리질러도 득음의 문턱에도 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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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도서관에서 읽은 그림,동화책들 - 특히 어른들이 봐야되는- 소개>

동화나 그림책 중엔 아이들을 대하는 어른의 태도를 꼬집는 책들이 있다. 그 책을 아이들이 읽어도 물론 재미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른이 읽는다면.... 재미 외에 뭔가 깊은 생각거리가 있으리라.

평화도서관에서 2시간을 일행과만 머물면서 이런저런 책들을 펼쳐보았다. 2시간은 긴 시간이 아니기에 얇은 책, 주로 그림책 위주로 보았다. 아주 재미있게 본 그림책이 있었으니 <너무너무 공주>라는 책이었다. 엇, 작년에 나온 책인데, 왜 여태 몰랐지? 허은미/서현이라는 놀라운 작가진인데 말이다.


서현 님의 그림은 역시 편안하고 친근하고 귀엽다. <진정한 일곱살>을 지으신 허은미 님의 글도 쉬우면서 재밌다. 그러니까 글도 그림도 쉽고 재미있다는 건데.... 읽기에 따라선 뭔가 묵직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임금님은 늘그막에 얻은 공주를 너무나 사랑했다. 서현 작가가 그린 공주는 너무나 밝고 해맑다. 책에선 공주를 이렇게 표현했다.
"놀고 싶을 땐 놀고, 자고 싶을 땐 자고
웃고 싶을 땐 웃고, 울고 싶을 땐 울었어.
좋은 건 좋다 하고 싫은 건 싫다 했지."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다. 하지만 임금님은 걱정했다. 까막까치들의 노래에 그 이유가 있다.

"평범해, 평범해. 공주가 평범해.
얼굴도 평범해. 성격도 평범해.
머리도 평범해. 너무너무 평범해.”

딸바보 임금님은 공주란 모름지기 비범해야 한다고 기대했던 것이다. 저렇게 아이다운 공주에게 뭔가 비범함은 없었다. 너무나 걱정된 임금님은 잉어의 세가지 소원 수염을 샀다. 쭈글쭈글 늙음을 담보로 걸고.... 소원 한가지를 사용할 때마다 임금님은 기운없고 주름패인 노인이 되어갔다. 그 댓가로 공주는 비범해졌을까?

첫 번째 소원 "세상에서 가장 예쁜 공주가 되게 하라." 공주님은 예쁜 대신 날카로워졌다.
두 번째 소원 "가장 착한 공주가 되게 하라." 공주는 착한 대신 빛을 잃고 시들시들해져갔다.
안타깝게 지켜보던 임금님은 마지막 소원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 소원은 무엇이었을까? 책에 직접 나오진 않는다. 그 소원을 아이들과 짐작해보는 대화도 재미있을 것 같다. 하여간 마지막 소원을 쓰고 공주는 행복해졌다. 그 모습은 첫 장면의 딱 그 모습이다. 평범하고 해맑은....

"내가 너를 위해서 어떻게 했는데!!"
드라마에서 자주 들어본 절규의 대사다. 쭈글쭈글 늙어버린 임금님처럼 부모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자녀의 성공(남보다 앞선 성취)에 걸지만 결국 모두 불행하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지 못하는 억울한 부모는 저런 절규를 하게 된다. 이런 모습은 크게 혹은 작게 우리 사회에 아주 흔한 풍경이다.

비범함의 욕구와 평범함의 만족은 아주 균형을 잘 맞추어야 할 문제다. 자식이 아니라 본인의 문제일 때도 그렇다. 타고난 성향도 작용하기 때문에 뭐라 단정해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비범함이 사랑의, 자존감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중요한 사실> 그림책 마지막 장의 문장 "너에 대해 중요한 사실은 너는 바로 너라는 거야." 처럼 "너이기 때문에, 너 자체로 소중해."라는 메세지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두번째로 읽은책은 <스티커 토끼> 이 책은 아이들을 '규정'하는 어른들을 꼬집는다. 이 아이는 까탈쟁이, 얘는 순둥이, 얘는 싸움닭, 독불장군, 까불이, 투덜이....

20마리 아기토끼의 엄마아빠가 며칠 집을 비우며 할머니에게 아기들을 맡겼다. 할머니는 부모의 설명을 참고해 아이들 등에 스티커를 붙였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스티커가 날아가버려 그건 헛일이 되어버렸는데, 지내며 보니 스티커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결국 딱지붙이기(규정짓기)의 무의미함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데 나의 경험은 이 주제에 대하여 살짝 이의를 제기한다. '규정짓기'의 위험성에는 백번 공감하지만 아이들의 성향에 대한 이름짓기가 전혀 무의미하거나 백해무익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에게는 '누가봐도 그러한' 면이 없지 않다. 그걸 가지고 맞네 틀렸네 옳으네 그르네 착하네 못됐네 하는게 문제지 아이들이 고유의 특성을 가지고 있고 그게 상당히 고정적인 것은 사실이다. 물론 변화의 가능성은 열려 있으니 그 가능성 안에서 아이들을 봐야 한다는 점을 잊지는 말아야 한다.

그 외 조용한 밤, 무슨 벽일까?, 두둑의 노래 등도 인상적인 책이었다. 먹고 산책하고 수다떠느라 북스테이지만 북에는 많이 집중하지 못했다. 뭐 그런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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