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신학 - 주권론에 관한 네 개의 장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2
칼 슈미트 지음, 김항 옮김 / 그린비 / 201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법학자로서의 슈미트'는 정치의 본질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흔히 오해되는 것처럼 정치의 본질은 적과 동지의 구분이라는 식으로). 그가 물었던 것은 정치적인 것과 정치적이지 않은 것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법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법 자체의 논리성이라는 견해, 예외상태에 대해서도 법의 한도 내에서 결정이 가능하다는 입장은 동어반복에 불과했다.  

정상상태/비정상상태를 나눌 때부터, 주권의 존재를 상정하는 순간부터 비로소 법이라는 것이 가능하다. 최초의 그 순간을 가정하지 않고서는 법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누가 결정할 것인가? 여기에는 답이 없다. 우리가 믿고 있는 정치세계는 합리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의 신학적인 성격을 인정해야만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슈미트를 처음 읽는데 어떤 경로로 그의 사상에 접근해야 할지 모르겠다. 김항 등의 논자들은 슈미트를 최신의 정치철학적 논의와 결합시켜 읽으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위태로워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푸코, 사유와 인간 - 푸코의 웃음, 푸코의 신념, 푸코의 역사! 산책자 에쎄 시리즈 4
폴 벤느 지음, 이상길 옮김 / 산책자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푸코의 글을 읽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공부란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그러나 실제 푸코의 삶이 내가 읽으며 느꼈던 것과 같이 '푸코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큰 의심을 갖고 있다.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가능한가?

"나는 지식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권력을 가진다는 것을 안다. 나는 또 안다. 진실이 세계를 해독할 수 있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만일 내가 진실을 안다면 변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을 말이다. 아마도 나는 구원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나는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내게는 둘 다 마찬가지다."(DE Ⅳ, p. 535.) 

"그런 이유에서(…) 나는 평생 동안을 환자처럼 일했다. 난 내가 한 작업이 대학제도 내에서 어떤 지위를 가질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내 문제는 나 자신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 자기만의 지식에 의한 스스로의 변화는, 내 생각에, 미학적 경험에 충분히 가까운 것이다. 자기 그림에 의해 스스로 변화할 수 없다면 화가가 무엇하러 작업하겠는가?"(DE Ⅳ, p. 536. Cf. p. 675. p. 42.)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모든 정신활동(그리고 나서야 그것은 응용될 수 있을 것이고, 예컨대 여론에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은 일종의 비인격성, 그리고 하나의 자아의 탄생에 동시에 다가가게 해준다. 비인격성 속에서 연구자 또는 작가의 자아는 사라지나. 한편, 새로운 자아는 아무런 지위도, 특질도, 얼굴도 없다. 그것은 불멸하지도 영속하지도 않지만(그 시간 동안 우리는 자신을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에 이질적이며 시간 바깥에 놓여있는 자아다. 자기 작업에 몰두하는 시간 내내 우리는 실제의 죽음을 잊는다. 우리는 영원하지 않을 것이고, 물론 잊힐 것이며, 소멸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격을 벗어나며 익명의 텍스트 안에서 물화된다. 마치 예술가 혹은 연구자가 이미 죽은 것인 양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푸코는 "나는 변화되거나 구원받거나 또는 아마도 죽을 것이다"라고 썼던 것이다. 그렇다, 죽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니체주의자에게 가능한 구원이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와 혼돈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따름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변화하기를 그치는 것, 혼돈스러울 수밖에 없는 외적, 내적 현실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를 멈추는 것, 그것은 죽은 사람처럼 사는 것이다."(212) 

"나를 충동질한 동기로 말하자면, 그건 아주 간단했다. 몇몇 사람들이 보기엔 그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호기심인데, 어쨌든 유일하게 약간은 고집스럽게라도 실행될 만한 가치가 있을 그런 유의 호기심이다. 알아야만 하는 것을 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호기심인 것이다. 앎에 대한 열정이 지식의 획득만을 보장할 뿐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되도록이면 아는 자의 일탈을 확실히 해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삶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생각하고, 사람들이 보는 것과 다르게 인지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아는 문제가, 계속적인 인지나 생각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순간들이 있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 자기 자신과의 유희는 뒤에 숨어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내게 말하리라. 그리고 그 같은 유희는 기껏해야 효력을 발생하고 나면 스스로 사라져버리는 준비작업의 일부라고 말하리라. 하지만 그렇다면 오늘날 철학은-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철학적 활동인데-무엇인가? 그것은 사고에 대한 사고의 비판 작업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대신에 어떻게, 그리고 어느 만큼까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지를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철학적 담론이 밖으로부터 타인들을 지배하고 그들에게 그들의 진리가 어디에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찾는가를 말해주고자 할 때, 혹은 순수하게 실증적으로 그들의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다고 자부할 때, 그 철학적 담론은 얼마간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그보다 바로 그 철학적 사고 속에서 철학과는 무관한 지식의 훈련에 의해 변화될 수 있을 것을 탐구하는 것이 철학의 권리인 것이다. '시도'-이것은 의사소통의 목적에 맞게 타인을 단순화시키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진실의 작용 속에서의 자기 자신을 변형시키는 시험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데-는 철학의 살아있는 본체이다. 적어도 철학이라는 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전과 같은 것이라면, 다시 말해 그것이 사고에서의 '고행', 자기의 훈련이라면 말이다."(『성의 역사2: 쾌락의 활용』, p. 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 ROUTLEDGE Critical THINKERS(LP) 16
사라 밀스 지음, 임경규 옮김 / 앨피 / 200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셸 푸코의 사상에 대한 매우 평이한 입문서로, 그의 사상적 궤적에 있어 특정 시기나 주제에 쏠리지 않고 전반적인 소개를 하고 있다. 푸코의 영향을 받은 페미니즘, 사회학, 문학 등의 영역에서의 논의도 함께 녹여내고 있어 푸코 사상의 숲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것 같다.  

저자는, (그리고 역자도 이러한 입장에 동의하는데) '저자-기능'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푸코의 사상을 교조화 시키는 것을 경계한다. 자신의 모든 책들은 도구 상자에 불과하다는 푸코의 말을 인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처럼 용도의 방향이 열려있는 푸코 사상이 단순화되어 사용되는 것을 경계한다. 그리고 이러한 조심성은 의도적으로 그에 대한 비판적 견해들에 지면을 할애함으로써 드러난다. 다만, 그 비판들은 논쟁의 첨예한 전선까지 나아가지 못하거나 몇몇 제한된 논자의 의견에 국한되어 있거나 주로 페미니즘 영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입문서로서 가지는 친절한 소개의 미덕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비판적 균형감각에의 강박은 간혹 이 책이 보여주고 있는 푸코 사상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의심스럽게 만든다. 몇 군데 예를 들어보자.  

75쪽에서 저자는 알튀세의 이데올로기론과 푸코의 이론을 비교하면서  "푸코의 모델이 가지는 장점은 각 개인을 언제나 속기만 하는 바보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주체로 분석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는 유명한 명제로부터 이러한 이해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과 동시에 그러한 능동성과 주체성이 권력의 작용에 공모하고 있는 기만이라는 점이야말로 푸코가 더욱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이와 비슷한 일면적 이해를 야기할 수 있는 부분은 85쪽에서도 반복된다. "그는 수동적 피해자로서의 개인 개념을 극복하고자 시도한다."

83쪽에서는 『피에르 리비에르』에 대한 내용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저자는 말하기를, "푸코는 이 자백서에 대해 논평할 때조차 가치판단을 유보하고, 대신 이를 …… 담담한 어투로 서술한다. 바로 이 무덤덤한 자세가 푸코적 분석의 핵심"이라 하고 있다. 가치판단을 유보하는 담담한 태도 운운하는 표현은 반사적으로 막스 베버를 떠올리게 만드는데, 푸코를 이렇게 받아들인다면 난감해진다. 푸코는 정치적인 지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글은 그러한 지향을 위한 전략적 효과를 내기 위한 나름의 실천이었다. 다만 푸코가 염두에 두고 있는 전략적 효과는 특정 담론의 수준에서 어느 쪽이 옳고 그르냐는 차원이 아니라 담론 공간 전반을 아우르는 형세에 대한 비판에 있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저자가 이러한 측면에 대한 이해가 미진하다는 의혹은 곧 이어 등장하는 부분에서도 제기된다. 그는 이러한 무덤덤한 자세가 "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이 지니는 체계성을 은폐시킬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더 문제성이 있는 부분은 푸코가 처참하게 살해된 리비에르의 어머니와 형제, 누이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해 침묵했다는 것이다. 푸코가 이 사건을 선택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컨대, 그는 피에르 리비에르를 옹호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라며 다소 저급한 비판을 하고 있다. 푸코는 리비에르의 범행이 옹호되어야 한다거나 살인 피해자들의 권리를 묵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학, 법률, 정신의학 등 상이한 담론들 속에서 범죄와 범죄자에 대한 처분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보고자 했던 것이었다.  

더 나아가 다음 페이지에서 그는 "의도적으로 사회에 물으를 일으키고 타인의 권리와 생명을 앗아간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이렇게 프롤레타리아 집단이나 폭도 혹은 살인자의 권력을 옹호하는 것은 분명 논란의 여지가 있다."며 푸코가 '타자'의 사례 그리고 과학의 지위에 이르지 못한 미성숙한 지식을 자신의 주요 분석 대상으로 삼는 이유에 대한 무지를 공개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를 옹호하는 것이 문제라는 견해에 대한 당파적 논박은 미뤄두더라도 말이다.) 

이러한 몇 가지 유형의 오해 혹은 몰이해를 드러내는 부분은 이후에도 꾸준히 등장한다. (87, 97, 174, 213, 214)

그리고 아마도 오역이라 여겨지는 실수도 보인다. 125쪽 하단 인용문의 위에 있는 문장 중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에서……"는 "르네상스 시대의 ……"로 바뀌어야 한다. 바로 밑의 인용문이 유사성의 에피스테메에 속해 있는 16세기까지의 시기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147쪽의 첫 문장 "그는 자신의 분석 작업을 비판이 아니라 단지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규정한다."는 문맥상 다음과 같이 고쳐져야 한다. "그는 자신의 분석 작업을 단지 설명이 아니라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고 규정한다." 

140쪽에서 저자는, "푸코의 작업이 이론적인 측면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그의 글이 이렇게 과장되는 순간"이라고 쓴다. 많은 비판자들이 지적하는 푸코 사상의 허황됨과 불가능성의 지점이야말로 동시에 그의 이론이 겨냥하고 있는 위태로운, 하지만 동시에 절묘한 입지점이었다. 이 긴장을 항상 느끼면서 글을 썼을 푸코의 원전으로 직접 나아가지 않고서는 저자에 대한 비판적 거리두기와 총체적 이해를 동시에 추구하는 모든 입문서의 목표는 결코 성취될 수 없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학자
배수아 지음 / 열림원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작가의 말'에 작가 스스로 요약해 놓은 이 책의 줄거리는 딱 5줄이다. 별다른 사건과 서사적 장치가 구비되어 있지 않더라도 관념의 투쟁을 기록해 놓은 소설을 읽는 마음은 흡족하다. 혁명가의 삶을 그린 소설이라면 작품과 함께 호흡하는 방법은 추체험이라는 앙상한 가능성뿐이지만, 관념소설의 경우 나의 관념을 작동시키면서 그 조용하지만 치열한 삶의 과정에 간접적으로나마 동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훨씬 더 자유롭고 선명한 존재"(173)가 되리라는, "지고한 관념의 성(城)"(208)으로서의 자유를 맛보겠다는 열망이 소설 속 '나'의 관념을 지탱하는 유일한 힘이다. 이 열망은 사실 몽상이어서 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쥔 채 사방을 노려보는 고통스러운 자세를 유지하느라 지하감옥의 죄수보다 조금도 더 자유롭지 못"(197)한 역설을 감당해야 할 수도 있다.  

학문과 자유의 전당이라는 대학이 그것과 거리가 멀다는 것은 지금은 낭만화된 시선으로 회고되는 80년대에도 마찬가지였고, 정치적 자유를 부르짖는 목소리들이 기실은 "정신의 궁극적인 해방"(209)으로서의 자유를 모욕하는 것임을 이 소설은 웅변하고 있다. 그런 껍데기의 자유, 일차원적인 자유 마저도 거세되고 있는 대학과 사회의 모습을 상기할 때 이 작품은 그 관념성에 '이상주의'라는 또다른 수식어를 추가해야 할 것이다.  

공부의 궁극적인 목표로 '자유'를 상정하고 있으면서도 그 목표는 자꾸만 그야말로 궁극의 어떤 지점으로 밀려나는 느낌이다. 정신적 투쟁을 감행하고자 하는 용기는 그 모험이 가져올 위협들 앞에 점점 침식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쪼그라드는 나의 모습을 목격하고 정당화하면서 궁극의 어떤 지점에 세워둔 자유의 크기는 점점 줄어드는 느낌이다. 자유에 대한 모험을 감행한 사람만이 그에 대해 배울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독학자는 소설을 통해 결코 온전히 경험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에 틀림없다. 과연 언젠가는 나도 독학자의 기록을 가지게 될 수 있을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증여론 한길그레이트북스 32
마르셀 모스 지음, 이상률 옮김 / 한길사 / 200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에 대한 흔한 그리고 얕은 해석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멜라네시아와 북서부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처럼 선물교환이나 증여가 무시로 행해지던 태고 사회의 미덕으로 회귀해야 현대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함의에 대한 (역시나 가벼운) 비판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선물교환과 증여의 문화도 결국엔 자신의 위신이나 돌아올 반대급부에 대한 기대에 힘입은 것으로, 결국에는 정치적 권력이나 경제적 조건의 함수에 불과한 것이며, 따라서 모스의 저작은 효용에 대한 타산적 계산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 대안을 제시하는 데에 실패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호혜성과 강제성이라는 대립적 성격이 결합되어 있는 '전체적인 사회적 사실'로서의 증여에 대한 모스의 분석을 일면적으로만 해석한 결과이다.  

그러나 모스의 분석에 있어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선물교환 행위의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거나 증여 행위의 도구성을 부각시키는 것보다는 이러한 문화의 가능성의 조건을 간파하는 것이다. 이는 원시 사회의 인간들이 현대 사회의 인간들보다 더 관용적이었다는 단순한 설명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모스는 포틀래치 등 원시 부족들의 증여 행위를 분석하면서, 증여자와 증여되는 물건, 증여자와 수증자 사이에 존재하는 영적 교감을 민감하게 묘사하였다. 수증자가 증여자에게 보답을 하지 않으면 화를 당하는 것도 증여받은 물건에 아직 증여자의 영혼이 담겨 있기 때문이며, 어떤 물건을 증여받았을 때는 증여자의 혼도 함께 받게 되는 것이어서 위험을 갖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증여 행위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자아가 확인된다는 점에서 태고 사회에서 개인의 모습은 사물과 타인 그리고 사회적 활동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근대적 개인이 자신의 비어있는 '내면'을 발명하고 그 공간을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채우고자 하는 이상을 지닌 것과 비교해 보면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현대 사회와 태고 사회의 차이는 상품교환과 선물교환의 차이도 아니고 타산적 행위와 관용적 행위의 차이도 아니다. 문제는 세계관과 주체성의 차이이다. 다른 사람과 문화 속에서 얽혀 살면서도 궁극적인 지점에 가서는 고독한 존재로 남아 있어야만 하는 근대인과, 전일적인 세계 속의 만물과 일체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원시인의 모습이 양자의 근본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학자인 엘리아데 역시 이러한 원시인의 세계를 잘 포착한 바 있다. "원시인에게는 현실의 모든 차원이 완전히 열려 있어서, 예컨대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바라보기만 하고 느끼는 감동이 현대인이 느끼는 가장 '내밀한' 개인적 체험과 같이 강렬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상징의 운동 덕분이겠지만, 원시인의 진정한 실존은 결코 현대 문명인이 직면한 단편적이고 소외된 실존은 되지 않는다."(『종교형태론』, p. 571.)

그렇다면 현대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 『증여론』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좁은 개인의 체험지평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 및 사물들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는 점이 될 것이다. 사태에 대한 이러한 진단은 근대를 '탈주술화'로 정의한 막스 베버의 테제와도 부합하며, 대도시의 삶에서 불가피하게 요청되는 무관심성을 포착한 짐멜이나, 아우라의 소멸을 말한 벤야민의 견해 등 기존 사회과학의 이론에 풍부함을 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증여론』의 결론에서 모스는 이러한 함의를 충분히 부각시키는 데에 실패한 것 같다. 그는 현대 사회에서도 태고 사회에서의 증여 문화가 여전히 발견되고 있다고 하여 자신의 저작이 실천적 측면에서 읽힐 수 있는 맥락을 축소시켜버렸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태고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증여 행위의 윤리적 측면만을 부각시켜서 타인과 세계에 대한 '신화적 상상력'(오명석, 「선물의 혼과 신화적 상상력」참고)이라는 이론적 함의를 거세한 측면이 있다. 그 스스로 이 책을 '방대한 연구의 단편' 내지는 예비적 작업 등의 지위로 한정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풍부한 가능성들이 묻혀버린 느낌이라 아쉬움이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