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 문제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85
카를 만하임 지음, 이남석 옮김 / 책세상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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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문제」로 번역된 이 책의 원제는 "Das Problem der Generationen"으로, '세대의 문제' 또는 '세대라는 문제' 정도의 의미로 읽힐 수 있겠다. 이 논문의 전체 내용과 관련하여 이 제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당대에 부각되었던 세대의 특징을 경험적으로 분석하고 있다기보다는, 세대라는 현상 일반의 특성을 정리하고 있다. 그리고 세대에 관한 기존의 논의들을 비판하고 세대를 학문적 대상의 영역으로 삼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을 사회학의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다. 본문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세대라는 현상이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매우 복잡하고 연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이어진다.


"…… 이러한 모든 것을 고려한다면, 자연법칙적인 규칙성과 더불어 작동하고 존재하는 세대요소는 정신적-사회적 수준에서 가장 정의하기 어렵고 간접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94)


나에게 이 결론은 다음과 같이 읽힌다. 세대론 같은 것 함부로 하지 말라. 대개의 세대론은 특정 세대의 성향을 주관적 관점에서 규정하거나 그들에게 기대하는 정치적 욕망을 투사하는 기능을 한다. 그런데 이들은 세대라는 현상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복잡성과 어려움을 충분히 감당하고 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만하임은 이러한 기존의 세대 연구를 비판적으로 보면서 세대라는 (당대로서는) 새로운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방법론적 지침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번역본과 관련해 사소한 평을 덧붙이면, 역자의 의욕과 성실성이 곳곳에 배어 있지만 과도한 역자 주가 독서의 흐름을 방해할 때가 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간혹 오역으로 생각되는 부분도 발견되는데, 이를테면 93쪽의 '시민화의 영역Zivilisationssphäre'는 단어 자체로 보건, 다음 줄에 이와 대비되어 사용된 "문화의 영역"에 비추어 보건 "문명 영역"이라 옮기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18세기 중후반 이래로 독일에는 문명과 문화를 대립하여 사용하는 사상적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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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국가 북한 - 카리스마 권력은 어떻게 세습되는가
권헌익.정병호 지음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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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서로 주목을 받고 있는 권헌익‧정병호의 『극장국가 북한』을 직조하고 있는 주된 이론가는 막스 베버이다. 폭력의 독점 및 관료제화를 통한 합리적 권력으로 카리스마적 권력이 이행한다는 것은 이 책의 시작과 끝을 이룬다. 합리적 권력에 대한 분석만으로 포괄하지 못하는 상징의 정치적 효과를 포착하기 위한 기어츠의 ‘극장국가’ 개념 역시 사실은 ‘의미’에 대한 베버의 강조에서 유래한 것이다. 베버 이론과의 깊은 공명 속에서 저자들은 소위 “세계에서 가장 격리되고 불가사의한 곳 중 하나”인 북한에 대한 이해를 시도한다.


하지만 나는, 카리스마 권력의 세습을 위해 동원된 예술정치와 극장국가의 기획에 대한 훌륭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북한에 대한 ‘이해’를 산출하는 데에는 결국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생각은 카리스마 권력의 일상화 테제를 강조하며 베버로 복귀하는 결론 부분에서 굳어졌다. 저자들은 북한 지도자가 세습적 카리스마를 추구함으로써 군 주도의 정치안보에 집중하며 경제를 경시하게 되었고, 애초의 사회주의적 이상으로부터도 괴리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진단은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이어진다.


“무엇보다도 북한의 새 지도부는 현대적인 정치적 권력과 권위의 본성을 거스르는 인위적인 예술정치의 힘에는 실제로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역사적 교훈과 진실에 대면해야만 한다. 카리스마 권력의 시간적 한계에 대해 그렇게 앞뒤 돌아보지 않고 오만하게 저항하는 것이 인민의 생명뿐 아니라 바로 그 정치적 예술이 영속시키고자 했던 권위 그 자체의 위엄과 전통에도 궁극에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 이러한 깨달음은 그 나라의 극장국가로서의 정치적 생명을 끝내는 행동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권헌익‧정병호, 2013: 279-280)


나는 이 명료한 주장과 메시지가 북한에 대한 이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설명과 이해가 필요한 지점에서 이해의 필요성을 해소시켜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북한에 대해 궁금한 점은 왜 그러한 정치체제를 국내외의 압력을 무릅쓰고서라도 계속해서 유지하느냐 하는 점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북한이 그러한 정치체제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설명과 이해의 시도를 가로막았다.


물론 애초에 이 책의 저자들을 이끌었던 물음은 다른 것이었다. 어떻게 그러한 정치체제가 지속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 애초의 물음이었다. 그러한 정치체제를 지속하는 이유, 즉 행위에 대한 이해를 의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정치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물음이었다. 이런 까닭에 전반적인 설명의 방식은 기능적이고 사후적인 성격을 벗어날 수 없었다. 북한이라는 대상이 인류학적 현지조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제약이 크기는 하지만, 북한의 세습적 카리스마를 가능케 한 극장국가적 요소에 대한 이 책의 설명이 실제로 그러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지, 카리스마적 권력의 세습에 극장국가적 요소에 의존하고 있는지 조회해볼 수 있는 민족지적 자료가 없다는 것은 아쉬움이었다. 다시 한 번 언급하지만, 여러 제약 속에서 이루어진 분석임을 충분히 감안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제시하는 북한의 극장국가적 성격, 상징정치와 예술정치에 대한 해석이 고도의 내적 일관성과 논리적 정합성을 가지고 있을지는 몰라도 혹시 허공에 떠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을 불식시키기 어려웠다. 실제로 그것이 인민들의 생활에서 작동하고 있는지, 인민들에게는 어떻게 수용되고 어떤 반응을 산출하고 어떤 효과를 내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은 큰 한계였다. 그리고 이것은 북한이라는 연구 대상의 특수성이 갖는 제약을 감안하더라도, 그리고 바로 그러한 제약 때문에라도 좀 더 조심스럽게 제시되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이러한 의문은 초반에 이 연구가 다소 자명하게 상정하고 있는 지점으로 이어진다. 상징과 기억의 정치에 대한 이 책의 해석에 수긍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카리스마적 권력에 세습에 기여한 정도를 상대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국가로서의 북한이 대를 이어서 권력의 세습에 성공했다면, 그것은 상징과 기억의 정치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물적 기반과 토대, 재생산 능력을 갖춘 체계의 존재, 제도적 권력에도 공히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북한이라는 정치체제가 오롯이 상징과 기억의 정치에 의해 유지되어온 것이 아니라면, 상징권력과 제도권력 양자의 (시기에 따른) 비중을 고려하면서 분석하는 편이 좀 더 세련된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길이었다고 생각한다.


북한의 체제 유지에 기여한 물적‧제도적 조건을 간과하고 카리스마적 권력의 세습에만 주목하게 되면, 북한의 체제 위기에 대한 책임은 고스란히 (카리스마적 권력의 세습에 봉사한) 상징정치에게로 돌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이 책이 가진 비판 전략을 심하게 훼손시키는 지점이다. 북한이라는 정치체의 존속을 ‘카리스마적 권력의 세습’이라 규정하고 출발하게 되면, 베버의 권력론을 채택하게 된 이상 결론은 필연적으로 카리스마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의 무용함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위기’ 이전의 북한 정치체제가 보인 나름의 성과는 극장국가적 성격이나 예술정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국제정치적 조건과 국내적 권력의 합리화에도 일정부분 기인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 이전 북한의 극장국가적 성격과 예술정치의 성공적 측면을 부각함으로써, 이후 북한의 위기 원인은 극장국가적 성격이나 예술정치의 성격에 집중적으로 귀속되는 효과를 발휘한다. 이는 북한을 위기로 몰아넣은 데에 일조한 국제정치적 환경이나 인접 국가들의 태도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거세하였고, 이 작업이 역사성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을 상당부분 휘발시켰다.


북한을 바라보는 이 책의 시선은 기본적으로 이방인의 그것이다. 다시 한 번 언급하거니와, 이는 북한이라는 대상이 인류학적 현지조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 일정하게 기인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북한에 대해 이방인 아닌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베버가 말한대로 “시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저일 필요는 없”으며 북한을 이해하기 위해 북한으로 들어가는 것이 필수적인 것만은 아니다(Weber, 1913: 18). 이 연구에서 이방인의 위치가 문제되는 것은, 북한 외부의 상황은 주어진 것으로 놓고 이에 대한 비판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주어진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북한의 선택에만 문제를 제기하는 편파적 태도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해를 '해보려는' 시도라기보다는 '나를 이해시켜보라'는 '요구'에 가깝다. 극장국가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북한의 지도부는 과연 고려하지 않았을까? 그 지속가능성이 의문시됨에도 불구하고 북한 지도부가 극장국가와 상징정치, 예술정치, 대중동원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북한의 정치지도자로 하여금 그러한 선택을 하도록 하였을까? 설명이 요청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고, 이해가 필요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인류학의 목적은 곧 인간들 간의 의사소통의 세계를 넓히는 것”으로, “표면적으로는 불가해한 듯이 뵈는 사회적 현상들을 밝히는 해석”이다(Geertz, 1973: 25; 13). 하지만 인류학 연구를 표방하는 이 책은 북한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남겨두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 이해할 수 없는 짓을 그만두라고까지 요구하고 있다. 북한이 왜 극장국가의 성격을 고수하는 전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묻고 이해하려 시도하기보다는, 그들이 고집해 온 이상한 선택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우리는 이 책을 읽고나서도 여전히 북한을 이해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이해의 필요성마저 부정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결론에서 제시되는 강렬한 주장과 권고는, 저자들이 채택했던 막스 베버의 이론에 대한 근본적인 위반이기도 하다. 베버는 다음과 같이 쓴다.


“경험적-역사적 인과연쇄에 대한 마지막까지의 철저한 추적이, 역사학자가 ‘가치판단’을 시작하는 순간 중단되고 이 중단은 거의 예외 없이 이 저서들의 학문적인 성과에 손상을 입히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럴 경우에 역사학자는, 가령 역사적 행위자들이 가졌던, 그러나 역사학자 자신에게는 이질적인 이상들의 결과로 나타난 어떤 현상을 이 행위자들의 ‘실수’ 또는 ‘타락’의 결과라고 잘못 ‘설명’하게 되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이와 함께 그는 자신의 가장 고유한 과업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즉, ‘이해’라는 과업 말이다.”(Weber, 1917: 174-175)


저자들이 북한은 “극장국가로서의 스스로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이를 매듭지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이해라는 과업은 중단되며, 이해의 목적인 비판도 불가능해진다(권헌익‧정병호, 2013: 276). 이해할 수 없는 타자와의 조우에서 이해와 비판을 시도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이해와 자기비판임을 우리는 베버의 경우를 통해 알 수 있다. 『극장국가 북한』 역시 비판적 실천으로서의 함의를 살리고자 했다면, 궁극적으로 저자들이 서 있는 지점에 대한 이해와 그 지점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야 했을 것이다. 폐쇄된 공간인 북한 외부에 있는 사람들로서, 어쩌면 지배적인 국제질서 속에 속한 사람으로서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와 비판을 시도했다면 어떨까? 북한을 보는 북한 외부의 시선은 어떠한가? 북한에 대한 북한 외부의 행위들은 어떠한가? 이들이야말로 북한의 사회적 행위가 지향되는 행동들 아닌가? 그렇다면 북한에 대한 이해는 북한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는 것 자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극장국가 북한』이 보여주고 있는 북한에 대한 시각 그 자체야말로 인류학적 연구와 이해,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극장국가 북한』은 가볼 수 없는 곳, 살아볼 수 없었던 시간에 대한 인류학의 난점과 가능성을 우리로 하여금 깊이 고민하도록 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근본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북한 연구에 대한 탁월한 저작으로서 이 책이 회자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혹시라도 저자 중 한 명인 권헌익 선생이 가진 세계적 명성이 이 책에 대한 관심을 일으킨 것이라면, 우리는 한국 학계의 식민성이라는 식상한 문제를 다시 한 번 곱씹어야 할지도 모른다. 북한학계와 사회과학계로부터의 진지한 비평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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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성과 자유 - 신자유주의 권력의 계보학 트랜스 소시올로지 9
사카이 다카시 지음, 오하나 옮김 / 그린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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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코의 생명정치에 대한 논의를 아주 거칠게만 이해하고 있던 나는 “생명의 관리가 정치권력의 책무로 대두된 사회”(『성의 역사1: 앎의 의지』, p. 155)에서 공권력에 의한 폭력(용산, 쌍용차)이나 심지어 기업화된 용역 깡패(컨택터스)가 난무하는 사태가 잘 설명되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사태에 도덕적으로 분개하기는 했지만, 즉각적 폭력을 통해 권력이 발휘되는 한국의 현실을 설명하기에는 70년대 후반에 나온 푸코의 이론도 너무나 최신의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작년에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사카이 다카시의 『통치성과 ‘자유’』(원제는 『자유론: 현대성의 계보학』)를 뒤늦게 읽으며, 한국 역시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의 권력 작동 방식을 보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카이는 푸코의 1976년 강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를 주로 참조하면서 “삶 속에 죽음이, 생명과 그것의 증진을 주요 목표로 하는 권력 바로 그 안에 죽음이 포개어진” 사태를 지적한다(본서, p. 161). 이른바 생명-권력에는 생명을 유지하고 증진시키는 작용뿐만 아니라 위험한 요소를 죽음으로 배제하는 작동 역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을 읽고 다시 『성의 역사1: 앎의 의지』를 펴보았더니,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람을 합법적으로 죽인다.”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단순히 ‘죽게 내버려 두는’ 것에서 더 나아가, 죽음에 이르도록 적극적인 힘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삶과 죽음이 교차하며 포개져 있다는 테마는 “개인이 단조롭고 평균적인 삶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죽음에의 인지”라는 식으로 이미 『임상의학의 탄생』에 등장한 바 있다(The Birth of the Clinic, p. 171). 하지만 이보다 더욱 중요하게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생명이 논의의 핵심을 차지하는 것에 동반하여 죽음도 (재)부상”한다는(본서, p. 174) 등의 일종의 ‘역설’이 푸코의 저작에서 일관되게 발견된다는 점이다. 해방이나 인도주의로 여겨졌던 것이 사실은 다른 방식의 처벌이나 억압임이 드러났고, 그토록 이성을 강조하는 서구의 근대 문명이 사실은 또 다른 비이성에 다름 아니었으며 결코 광기를 제압하지 못했다는 것이 『광기의 역사』와 『감시와 처벌』 등에서 푸코가 보여주었던 근대 문화의 역설이었다. 나아가 생명을 증진시키고 보호하는 것이 권력의 최대 화두가 된 시대라고 하지만 오히려 적극적으로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태가 발견되기도 하는 것이다.

가장 많이 말해지는 것, 누구나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그러한 사태의 부재 또는 희박성을 전유 또는 은폐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억압임에도 해방이라고 말하도록 하는 것, 합리성의 증대라고 말하도록 하는 것, 이성의 승리라고 생각하도록 하는 것, 생명이 중요하다고 여기게끔 하는 것은 모두 권력의 작용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담론적으로 구성된 현실에 속지 않는 것, 나아가 담론적 현실에서 벗어나 그 바깥에서 담론의 형성과 배치를 관찰하는 것이 이러한 권력에 저항하는 주요한 방법이 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쟁점은 Foucauldian의 논의에 있어서 사회학의 위상에 대한 것이다. 푸코의 저작에서는 그가 맑스와 베버를 열람했다는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사회학’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주로 그가 염두에 두는 것은 뒤르켐이다. 흔히 뒤르켐은 맑스, 베버와 함께 사회학의 창시자 가운데 한 명으로 비중있게 언급되지만 푸코의 관점에서 뒤르켐과 그 이후의 사회학은 근대 권력이 행사되기 위하여 동원되는 지식에 불과하다. 단적으로 푸코는 『성의 역사1: 앎의 의지』에서 뒤르켐의 주저인 『자살론』을 암시하면서, “생명의 관리가 정치권력의 책무로 대두된 사회에 대해 최초로 경악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현상”으로서의 자살이 “사회학적 분석의 영역으로 들어간 최초의 행위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 주목한다(155). 이 때 사회학은 개인의 비정상적 일탈이거나 예외적 현상이며 나아가 권력에 대한 유일한 저항으로 여겨졌던 자살의 규범적 법칙성을 탐구하고, 궁극적으로는 자살률을 적절한 선에서 관리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사회학은 권력이 작동하고 행사되는 데에 차질이 없게끔 복무하는 앎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신생 학문으로서 현실 세계의 이해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회학을 이렇게 간단하게 처리해버리는 것을 보노라면 푸코의 방법이나 시각이 가진 힘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베버 등 다른 흐름을 염두에 둘 때, 그리고 뒤르켐의 그것이라 하여도 사회학을 그저 권력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앎으로 이렇게 쉽게 단정할 수 있는 것인지는 보다 신중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사회학의 의의에 대해서 19세기 말의 그것보다 진일보한 어떤 다른 대답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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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사회과학 - 사회과학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재구성한 5월 광주의 삶과 진실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6
최정운 지음 / 오월의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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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학부 때 처음 읽었었는데, 최근에 출판사를 바꾸어 새로 출간되어 다시 읽었다.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 이 책의 수준과 진가를 다시 느끼게 되었다. 사회과학이 5·18을 그리고 사회적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야 하는지를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나온 한국 사회과학자의 저서 가운데 단연 최고이며 굳이 따지자면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보다 앞에 놓여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새로 출간된 이 책이 부디 널리 읽혔으면 한다.


"그간 우리는 진상규명을 부르짖으며 '사실'들에 매달려왔다. 그러한 사실들이란 주로 제삼자가 밖에서 본 모습을 말한다. '200명 죽었다'. '2000명 죽었다' 등의 이야기는, 사실 'one little Indian, two little Indian……'처럼 밖에서 본 모습을 말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14시 30분, 금남로에 시위대 3000, 제봉로에 1500……' 등의 경우는 높은 곳에서, 헬리콥터에서 본 모습을 말한다. 이러한 '사실'은 우선 시위를 진압하려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것일 것이다. 그리고 '누가 발포를 명령했는가?'에 대한 답은 그 사람을 법정에 세워 사형 언도를 받아내는 데 필요한 사실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역사적 '사실'이라고 흔히 부르는 것은 대부분 '남'의 사실이지, 우리 자신들의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비록 아직 정확한 사망자의 숫자도 알려져 있지 않은 처지지만 그러한 숫자 말고도 우리에게는 분석해야 할 사실들이 너무나 많다. 말하자면 이미 5·18 진상의 95% 이상은 시민들의 증언을 통해 다 드러난 것이 현실이며 군부의 핵심 자료가 없다고 해서 연구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어불성설일 것이다."(23)


"5·18은 구조주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구조를 만든 사건이었고 모든 인간적 사회적 요인들을 다시 배열시킨 사건이었다."(26)


"5·18이 왜 필연적으로 일어났어야만 했고, 방지할 수 없었던 구조적 원인에 의한 사건이었다는 논거는 5·18이라는 특정한 사건의 경험적 연구에서 도출된 결과라기보다는 사회과학의 언어구조, 특히 맑시스트 정치경제학 언어구조에 근거하고 있다. 즉 5·18에 대한 사회과학 담론은 서양의 실증주의 사회과학 담론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담론은 5·18을 특정한 사건으로 보지 않고 여러 사건 중의 하나 또는 '구조적 조건'의 발현으로 보아 사건으로서의 5·18을 매몰시켰다는 것이다. …… 우리 사회에서 맑시즘에 경도되어 있는 사회과학은 분명히 5·18의 소산이다. 5·18에 대한 복수를 생각하고 거대한 투쟁과 혁명을 기대하고 그 가능성을 생각하던 시점에서 맑시즘의 경제결정론과 계급투쟁론이 우리 지식인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5·18의 투쟁주의가 배태한 우리의 사회과학은 자신의 출생의 역사를 다시 쓰며 자신의 모태를 매장해버렸다."(77)


"우리는 그가 5·18의 역사 쓰기, 사회과학 쓰기에서 '진상규명'을 의식하여 그간 사망자의 숫자, '발포 명령자는 누구였다?', '누구의 명령으로 공수단이 작전을 했는가?' 등의 이른바 '사실'에 치중해왔고,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지 않는 것에 좌절을 느껴왔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사실'들이란 주로 밖에서 본 모습들로서 법적인 의미와 중요성이 있는 사실들이며, 우리가 이러한 사실들에 매달려왔다는 것은 5·18의 '진상규명'을 복수의 수단만으로, 제삼자에게 복수를 구걸하기 위한 제물로만 생각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5·18의 진상은 광주 시민 모두에게, 그리고 그 참담한 '시대정신'에 참여했던 모든 국민들에게 명쾌한 것이며, 그 '진상'마저 우리가 군부에게 의존하고 있다면 그것은 과연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거짓이 우리의 진실을 박탈할 수는 없다. 5·18의 진상은 엄연히 우리 몸 안에 있는 것이며 그들이 숨기고 있는 사실들은 진상의 아주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이 글의 목적은 우리의 진실만으로 5·18에 대한 글쓰기 그리고 5·18을 계기로 한 우리의 사회과학을 다시 시도하기 위함이다."(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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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 이 사람을 보라 - 학문과 지식은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
김덕영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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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많이 아쉬운 책이었다. 저자가 독일에서 하빌리타치온을 취득한 귀한 연구자임을 생각할 때 아쉬움은 더 크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어느 한 인물을 다루는 책은 속성상 위인전이나 영웅전이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면서 "만에 하나 독자들이 이 책을 위인적이나 영웅전으로 읽는다면, 그것은 온전히 공부가 좁고 얕은 나의 책임"이라고 밝혔다(9). 짐멜과 베버의 사회사상에 대한 연구 및 번역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는 그에게 공부가 부족하다고 할 자격이 내게는 부족하지만, 이 책은 나름의 관점을 가지고 인물을 평가한다기 보다는 베버에 대한 찬양에 가까웠던 것이 솔직한 감상이었다. 따라서 적어도 나에게는 베버라는 인물의 종합적인 면모나 그의 사상에 대한 폭넓은 이해에 이 책은 그다지 큰 기여를 하지 못하였다. 중간중간 제시되는 정보들이 부수적인 도움이 되었을 뿐이다.

 

내게 베버가 매력이 있는 것은 그가 사태의 복잡성을 인정한다는 점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어떤 사태를 무조건적으로 찬양하거나 지지하지도 않았으며 전적으로 반대하지도 않았다. 단지 그 사태가 불러일으킬 혹은 근거하고 있는 다양한 결과와 입장들을 고려할 뿐이다. 따라서 저자가 "대학과 학문 그리고 지식인의 근대성을 확보하라!"는 문장으로 베버가 시사하는 바를 요약한 것에 대해서는 쉽게 동의할 수 없다(348). 그는 사태의 객관적인 파악을 위해서는 이 세게의 비합리적인 영역, 이를테면 신념과 같은 것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분화를 포함한 현대의 많은 현상들을 그저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대가로 치르면서' 진행되고 있는가?"를 물었기 때문이다. (「사회학 및 경제학에서 가치중립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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