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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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가와 작품에 대한 모종의 의심을 갖고 묵혀두었다가 뒤늦게 읽었다. 팟캐스트와 기사 등에서 잠깐씩 접했던 작가의 인상과 이 작품을 좋아하는 주변의 사람들의 반응에서 나는 이들의 '착함'을 견뎌내기가 쉽지 않았다. 이 폭력적인 세계를 바꿔나가는 과정에서 민감한 윤리적 감수성의 역할이 무시될 수 없으며 그것이 중요한 출발이 되긴 하겠으나, 이 소박한 출발의 중요성만을 나지막히 읊조리는 모습들이 너무나 순진하고 나약하고 무책임해 보이기까지 했다. 


사소한 존재들의 의미에 대한 주목, 개별적 사연들에 대한 예의, 타인에 대한 귀기울임 등을 넘어서 내딛는 발걸음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끝까지 읽었지만 작품은 착함으로 일관했다. 황정은의 소설과 신형철의 평론을 읽고서 나는 이들의 윤리학적 세계 인식에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폭력적이지 않기 위해 폭력에 민감해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게 또는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이 세계에 대한 항의로 볼 수 있을까? 폭력적 세계에게 그것이 항의로 들릴까? 콩밭 매는 아낙네의 사연에 목이 매어 칠갑산 노래를 부를 수 없다거나, 가마의 생김새가 다 다른데 모두 가마라고 부르는 것이 '폭력'이라고 하는 부분에서는 동일성 사유에 대한 상투적이고 진부한 비판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의 세계가 폭력적인 이유는 우리가 폭력에 대한 예민함이 없는 사람들이어서인가? 아니면 이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이 폭력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어떤 힘이 있어서인가? 소설가는 그 힘의 정체를 밝혀주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 더러운 세계의 밖에서 윤리적으로 살아가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 한 몸 더럽히더라도 그 힘과 맞붙어 싸워야 하지 않는가? 혹자는 이 작품이 소설의 정치성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작품이라 했다는데, 내가 보기엔 오히려 최근 한국 소설의 비정치성을 잘 보여주는 전형이 아닌가 싶다. 정치학과 사회학을 버리고 윤리학으로 퇴각한 것이 정치성의 첨단이라 여겨지는 이 상황이야말로 문학이 폭력적 세계와 의도치 않게 공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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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1-02-10 17: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대한 가장 멋진 리뷰가 아닐까 싶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청루 2021-02-10 22:10   좋아요 0 | URL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주주의는 아무 곳에서나 다 적절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독일 대학의 전통에 따라서 대학에서 실시하는 학문훈련은 정신적 귀족을 훈련하는 것입니다.”(30)






고급한 인간류는 직업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명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그들은 시간 여유를 갖고, 서두르지 않으며, ‘준비 완료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137)





부르주아의 여유의 에토스와 쁘띠 부르주아의 선취지향에 의한 제한의 에토스를 대비할 수 있다. 전자는 세계가 자기에 대한 확신에 찬 관계로서, 그 결과 세계와 자기는 필연적인 것으로, 다시 말해 존재와 당위가 일치된 것으로 경험되는데, 이러한 일치는 건방진 태도, 우아함, 활달함, 기품, 자유스러움, 한마디로 자연스러움이란 자기에의 확신을 나타내는 내밀하거나 명백한 모든 형식에 토대를 제공하고 권위를 부여한다. 후자는 부름받았으나 선택받지는 못한 자들, 즉 의무라는 영원한 기원 속에서 미래모습을 언젠가는 실현하려는 그들의 상승지향을 기초하는 사람들의 엄격한 의지주의이다.”(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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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평화 대우고전총서 34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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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루한 역어, 불필요한 부록, 높은 가격... 국내 최고의 칸트 권위자의 번역시리즈임을 믿고 횡포를 부리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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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힐 2022-09-22 0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록이 풍부하면 더 좋은거 아닌가요. 역자랑 편집자 입장에서도 부록 넣는게 더 수고로울거고 비용도 드는데 후학을 위해 더 신경을 써준거 아닌가.. 자기 필요없는 부록이라고 역자의 횡포니 뭐니 하면 앞으로 더 좋은 역서가 시장에 나올까요.

청루 2022-09-22 09:48   좋아요 0 | URL
기미독립선언서, 국제연맹규약, 국제연합헌장을 넣어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요? 집에 인터넷이 되는데요? 누구나 큰 수고 없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정보를 굳이 실어놓고 값을 받는 것에 대한 불만입니다. 이렇게 몇 줄이라도 쓰는 게 불필요한 내용 없는 좋은 역서가 시장에 나오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빌러비드
토니 모리슨 지음, 김선형 옮김 / 들녘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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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 말미에서 세 번씩이나 강조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 이야기는 언어로 전달될 수 없는 정도의 고통을 경험한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이건 다른 사람한테 퍼뜨릴 이야기가 아니었다.”(455)

이건 다른 사람한테 퍼뜨릴 이야기가 아니었다.”(455)

이건 다른 사람한테 퍼뜨릴 이야기가 아니다.”(456)

 

노예농장에서 탈출한 주인공 세스(Sethe)는 노예사냥꾼들이 찾아오는 것을 보고 스스로 딸의 목에 톱질을 하여 딸이 노예생활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구해낸다. 자기 아이에게 줄 젖을 빼앗기고, 백인의 노리개가 된 아내에게 미안해서 손도 대지 않게 되고, 자신이 농장의 수탉보다 못한 것 같다는 절망을 갖게 되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혀 불에 구워져 죽어가고…… 자신이 보고, 듣고, 겪었던 인간 이하의 삶을 살게 하느니 차라리 죽음으로써 딸을 구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거 하나만 말해주세요. 깜둥이는 얼마나 많이 참아야 하나요? 말해주세요. 얼마나?”

참을 수 있을 만큼 참아야지.” 스탬프 페이드가 말했다. “참을 수 있는 만큼.”

왜요? 왜요? 왜요? 왜요? 왜요?”(394)

 

저 하얀 것들은 내가 가졌던 것, 내가 꿈꿨던 모든 것들을 빼앗아갔다.”

베이비 석스는 말씀하셨다.

그리고 내 심금을 다 끊어놓았어. 세상에 불운이란 건 없어. 오직 백인들이 있을 뿐이지.”(156-157)

 

이런 고통 속에서 살아가던 흑인들이 탈출하여 만든 마을이지만 오히려 그런 이들이기에 이웃의 작은 행복에도 질시를 느낀다. 세스의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한 잔치에서 모종의 오만함을 느낀 이웃들은 세스를 잡으러 온 백인들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아 세스가 자신의 딸을 죽이는 살인과정을 방조하는 셈이 된다. 이후 누구도 이 사건과 이 집의 인물들에 대해 말을 하기 꺼렸을 것이고 세스 일가는 마을에서 고립된다. 가장 고통스러웠떤 것은 아무래도 제 손으로 딸을 죽였던 세스였겠지만, 언니의 피가 묻은 젖을 물었으며 자기도 엄마 손에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엄마에 대한 사랑을 함께 느꼈던 덴버, 때마침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어서 세스의 행위를 막을 수 없었으며 이 사실을 폴 D에게 전해주어 자책을 하는 스탬프 페이드, 믿을 수 없는 살인 사건을 전해들어야 했던 폴 D, 그리고 환생해서 돌아온 빌러비드, 또한 이 일을 보고 들었으며 방조했던 모든 마을 사람들.

 

비록 노예제 밖에서(진정 밖이라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자신들의 공동체를 만들었을지언정 이들은 진정으로 해방된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으며, 자신들이 만들어낸 고통 속으로 스스로 휘말려 들어가 허우적대고 있다.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와 자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서로에 대한 미움과 경계를 풀고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억울하게 죽은 영혼과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을까. 이 책은 따라서 말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삶답지 않은 삶을 삶으로 만들어내는 것에 관한 이야기, 즉 구원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 구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부정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이 작품의 경우에는 노예제도에서 백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나 예외적인 백인의 시혜를 통해 스위트 홈같은 농장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구원은 자기 파괴를 감행하면서도 이 부정한 세계에서 통용되는 법이나 공동체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윤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세스와 같이 거대한 죄책감을 갖게 되거나 이웃들로부터 외면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침으로써 자신의 인간적 존엄성을 확인해주는 사랑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시이드는 목을 채운 쇠고랑에 대해 한 번 언급도 하지 않고 심지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짐승처럼 족쇄에 채워져 있다는 비참한 수치를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오직 이 여자 시이드만이, 그렇게 그가 남성다움을 지킬 수 있도록 해줄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사연을 그녀의 사연 옆에 나란히 놓고 싶었다.

시이드. 당신하고 나, 우리한테는 누구보다 어제가 많아. 이제 어떤 식으로든 내일이 필요해.”

그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그녀의 손을 잡는다.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당신, 당신이 제일 귀해. 시이드, 당신이.”

그의 든든한 손가락이 그녀의 손을 잡고 놓지 않는다.

내가? 내가?”

 

가장 나락으로 떨어짐으로써만 가장 높은 곳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 빌러비드는 비극적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오랜 시간 침묵으로 머물 수밖에 없었던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었던 80년 광주에서 절대공동체의 형성과 분화 과정을 그린 오월의 사회과학집필에 이 작품이 많은 영감을 주었다는 데에 수긍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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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김동춘 지음 / 돌베개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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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관련 연구가 많이 풍부해졌으리라 막연히 짐작해왔는데, 2000년에 초판, 2006년에 재판이 나온 김동춘 선생의 이 책은 여전히 한국전쟁 관련 단행본의 최신 목록에 올라 있다. 전쟁이 너무 쉽게 잊혀졌다는 것은 보수우익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진보 학계에서도 역시 통용될 수 있을 듯하다.


최근 학계는 푸코의 통치성 논의가 한 번 휩쓸고 지나갔으며, 기든스, 벡, 바우만 등의 후기근대 논의가 새로 주목을 받고 있는 듯하다. 이들의 견해는 분명히 다르지만 양자 모두 명시적인 폭력과 권력보다는 미시적인 차원의 권력이 일상에서 작동하는 방식에 주목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 역시 이 흐름 속에서 공부를 하고 논문을 써왔으므로 그 자장에서 벗어나 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자유로운 개인들의 활동 속에서 생겨나는 권력 효과라거나 생활정치 등의 논의가 (적어도 한국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다소 억지스럽다는 근본적인 반감이 생기고 있었다. 비판할 권력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이론적 분투를 통해 비판대상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는 느낌이랄까... 물론 아직은 조심스러운 이야기이다.


반면 전쟁이나 혁명과 같은 '사건'은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가시적이고 명백하고 즉각적인 폭력과 물리력을 통해서 사회를 형성·변화·파괴시킨다. 현대 한국의 사회는 식민지, 전쟁, 독재, 광주, 87년을 겪으며 형성되었고, 자유주의 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권력의 모습이라거나 사회문제는 사실 매우 최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한국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 거대한 사건들을 반드시 짚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저자인 김동춘 선생은 어느 정도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한국전쟁 연구가 주로 '전투'의 측면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왔으며, 그것의 배후에 있는 '정치'의 문제, 그리고 전쟁이 사회에 미친 효과, 즉 실제로 민중들이 경험했던 전쟁의 측면은 억압된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 연구의 출발점이다. 『전쟁과 사회 』라는 이 책의 제목은 이러한 의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전쟁과 사회의 관계를 설명하는 연결고리는 다소 투박하게 여겨지는 곳이 많다. 여기엔 몇 가지 연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저자는 한국전쟁에 관한 최근의 연구들이 수정주의와 전통주의의 대립을 넘어서야 한다고 강조는 하지만 실제로는 "브루스 커밍스를 과도하게 의식하면서 그에 대한 암묵적 비판으로 일관하고 있거나 대체로 미국의 자유주의 혹은 주류적" 관점을 옹호하고 있다고 비판한다(39). 그는 공개된 자료의 비대칭성, 사회주의권의 붕괴, 미국의 신패권주의 등의 영향에 알게 모르게 편승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 이러한 관점은 많은 부분에서 한국전쟁의 발발과 영향에 대한 책임의 소재가 미국과 이승만에게 귀속되게끔 한다. 이는 사실에 부합하는 면이 많기도 하고 역사적 정의에 대한 독자의 도덕감정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보수적이거나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던 기존의 논의들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이 정도로 써도 되나' 싶은 불안감이 들 때도 있었다. 셋째, 전쟁과 사회의 관계를 논함에 있어서 저자는 한국이 여전히 전쟁으로 인해 형성된 국가와 사회임을 상기시키면서 다소 단정적으로 한국사회의 성격을 규정한다. 이를테면 '피란사회'와 같은 용어들은 분석적이라기보다는 규정적 언술이어서 논지가 다소 투박하게 느껴지도록 하는 감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요인들보다도 근본적인 사정은 따로 있다. 그것은 저자가 택하고 있는 이론적 관점이나 논지 전개 방식이 아니라 한국전쟁 그리고 그것의 연장인 현대 한국사회라는 대상 자체와 마주하면서 가질 수밖에 없는 어떤 감정에 기인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쓴다. "필자는 이 작업을 진행하면서 이성적이고 냉정한 연구자로서의 균형감각을 견지할 수 없었다. 슬픔과 분노가 사회과학적 추론을 압돟였으며, 누군가에 의해 반드시 시작되어야 한다는 내면의 목소리가 필자를 밀어붙였다. 전쟁통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꿈에서도 나타나, 자다가 벌떡 일어나기도 했다. / 앞서 말한 전북 남원의 학살 현장에서 만난 노인들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으며, 전쟁 시 국군으로 참전했다가 부상당하고 지금까지 국가로부터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 경북 울진의 한 노인의 힘없는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연구자로서 객관성과 진실을 끝까지 추구하려는 생각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굴곡으로 얼룩진 한국 현대사를 연구하는 데는 역시 '냉정함'이 견지될 수 없었다."(59)


여러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저자 스스로 표방하고 있는 몇 가지 미덕이 있다. 한국전쟁기 정부와 미군, 그리고 이들의 묵인 하에 이루어졌던 학살에 대한 진실을 파헤침으로써 억압된 앎을 끄집어 내는 것, 그리고 미국의 시각, 정부의 시각, 군대의 시각이 아니라 전쟁을 감당해야 했던 일반 민중의 시각에서 전쟁을 서술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과연 무엇이 진정 우리의 시각이고 무엇이 민중의 관점인지 앞으로 더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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