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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맑스 - 미셸 푸코, 둣치오 뜨롬바도리와의 대담 디알로고스총서 1
미셸 푸코.둣치오 뜨롬바도리 지음, 이승철 옮김 / 갈무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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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와 이탈리아의 맑스주의자인 둣치오 뜨롬바도리와의 대담을 번역한 것이다. 번역의 원본이 된 영문판의 제목인 Remarks on Marx도 그렇고 『푸코의 맑스』라는 한국어 제목도 그렇고 무난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인터뷰어가 맑스주의자의 입장에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변을 듣는 형식이지만 대담 내내 푸코는 맑스주의와 더불어 구조주의에 대한 선긋기를 함께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푸코에 대한 가장 흔한 비판 가운데 하나는 그의 사상 속에는 저항의 가능성이 봉쇄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맑스주의를 비롯하여 강한 비판적 실천 지향을 보여왔던 이론적 조류에서 이러한 오해가 불거진 바 있는데, 이 대담에서 푸코는 그가 생각하는 실천 및 지식인의 역할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분명히 그에게 있어 실천의 개념은 이전까지의 그것과 구별된다. 푸코에게 "이론은 더 이상 실천을 표현하거나, 해석하는 것, 혹은 실천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며, 이론 자체가 하나의 실천이 된다(192). 

그의 저작에서 반복되어 제시되는 테마는 근대 문명의 출구 없는 우울함이다. 이성에 대한 광기의 승리, 죽음을 통해서만 밝혀지는 생명의 진실, 인간의 죽음(『말과 사물』 말미에서 개진되는 이러한 입장은 후기에 가서 번복된다. 본서 119쪽 참고) 등은 해방에 대한 일체의 전망을 봉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푸코는 자신의 "모든 연구는 절대적 낙관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면서 사태의 변화가능성을 신뢰한다(165). 다만 그가 생각하기에 세계의 문제는 지식인들이 정확한 처방을 내리고 그것을 따른다면 해결되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하고, 뿌리 깊은 것"이어서(155), 지식인의 역할은 그러한 "예언가와 입법자들이 침묵하도록"(151) 만드는 데에 있다. "규칙을 설립하거나 해결책을 제안하거나 혹은 이런저런 예언을 하는" 것은 오히려 "권력이 특정한 상황에서 작동하는 데 도움을 줄 뿐"이기 때문이다(150). 

유일한 가능성은 "권력관계 속에 위치한 사람들이, 실천과 저항, 반란을 통해 그것들로부터 탈출하고, 그것들을 변환시켜 더 이상 예속되지 않"는 방법뿐이며, 푸코는 그렇게 "탈출하고자 결심한 사람들 자신에 의해 고안되고, 계획될 수 있는 수많은 할 일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164-165). 실제로 그의 비판 개념은 "통치받지 않겠다는 의지"로 요약되기도 한다(「비판이란 무엇인가」 참고, 『자유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열망』에 수록).  

이러한 생각에서 푸코는 자신의 작업이 "비록 작은 규모일지라도 하나의 행위자"라고 말한다(46). 그는 새로운 진리를 주장하려 하지 않고, 우리가 진리 및 자기 자신과 맺고 있는 관계가 절대적이지 않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 자신의 책을 읽은 독자와 그 책을 쓴 자기 자신 역시 변하게 될 수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그가 글을 쓰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책은 "진리-책"이나 "논증-책"이 아니라 하나의 "경험-책"이 된다(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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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느 (구) 문지 스펙트럼 10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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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발자크의 작품이었다. 소설과 사회학이 분리되기 전으로, 그러니까 사회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지나게 되는 한 지점에 발자크의 이름이 놓여 있다. 19세기의 전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자 했던 그의 구상은 『인간 희극』으로 결실을 맺게 되는데, 이 책에 수록된 세 작품 중 「사라진느」는 1부인 '풍속 연구'에, 「미지의 걸작」과 「추방된 사람들」은 2부인 '철학적 연구'에 실려 있다. 세 작품은 모두 1831년에 발표된 것으로, 이미 발자크가 유명세를 얻은 이후의 작품이다. 하지만 당시 발자크의 나이는 30대 초반이었으며, 현재 시중에 번역되어 소개된 그의 작품들 중에는 시기적으로 이른 것에 속하는 듯하다. 발자크 입문으로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얇은 분량과 함께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인간 희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여러 작품들 속에 반복해서 등장하기 때문에 이처럼 발표 시기를 기준으로 해서 순차적으로 읽는 것이 최선의 감상법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른 텍스트를 읽으면서도 이전에 나왔던 인물이 어떻게 겹쳐지는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수시로 참조해 가면서 읽어야 할 것 같다. 이처럼 다양한 국면과 상황과 조건에 겹쳐져서 등장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가족의 일원인 동시에 직업집단의 일원이기도 하며, 신자이거나 사랑의 당사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들 전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야말로 사회학적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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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유럽통신
고종석 지음 / 문학동네 / 199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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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최인훈, 김승옥, 김현, 김우창, 정운영 이후에는 어떤 문장이 있을 것인가. 이들의 글은 여전히 저릿하거나 아름답지만 우리 시대의 느낌은 아니었고, 진중권과 박민규는 가벼웠으며, 우석훈은 거칠었고 김연수도 시원치 않았다. 누군가가 나의 처지를 대변해주기를 바라는, 그것도 그 대변의 껍데기인 문장에 의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세대의 허위의식인 듯도 하다.  

고종석에 대한 기대는 내가 읽은 거의 유일한, 그리고 그의 가장 최신작인 소설 『독고준』에 힘입은 바 크다. 나 역시 최인훈과 그 의식의 분신임에 틀림없는 독고준에 대한 허황된 동류의식을 갖고 있는 터여서, 그들에 대한 오마주를 작품화한 고종석의 감수성에 대한 신뢰를 형성하게 되었다. "망설임은 저의 운명입니다."(52)라거나, "감상주의는 제 삶의 일용할 양식이고, 제 존재의 버팀목입니다."(66)라는 다소 뻔뻔한 고백 겸 선언 겸 과시에 대해서도 오히려 공감을 표했던 것은 그런 이유때문이었다.  

이 책은 장편소설 『기자들』을 제외하면 아마도 가장 이른 시기에 그가 펴낸 책이 될 것이다. 그가 1959년 생이라고 하니 이 책 속에 들어 있는 서간문을 썼던 1994/95년은 그가 삼십대 중후반이었을 무렵일 것이다. 불혹에 다가서는 나이이지만 여전히 자신의 의식과 견지 위에서 열정을 갖고 있을 시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글 속에 드러나는 고종석의 목소리는 이미 노회하여 노년에 접어들어가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성찰적 주체의 체험 형식이 무능과 미숙이라는 사회학적 연구도 있지만(김홍중, 「근대적 성찰성의 풍경과 성찰적 주체의 알레고리」,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그에게서 보이는 노회함의 흔적이 성찰의 어쩔 수 없는 그림자라기에는 조금 들떠있는 느낌이었다.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인문·사회과학의 교양으로 가득차 있는 것(물론 그는 이처럼 서신의 형식에 수신자의 이름을 빌어서 매문을 하는 것에 대한 미욱함을 수차례 밝히고 있다), 각종 고유명사로 채워진 지면의 시각적 불친절함, 빠리와 유럽 곳곳의 정취에 대한 애정을 은폐하듯 드러내는 것 등은 그의 망설임과 감상주의가 자연스런 성찰의 일부라기보다는 혹시 의도적으로 연출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들게 하였다. 이 책은 아마도 가십성 교양을 보충하려는 욕망의 대상으로 소비될 것이라는 점을 그는 몰랐을까(혹은 개의치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허영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삼십대 중반의 고종석이 쓴 이 책이 밉지만은 않았다. 그의 옛 동료 누군가는 그가 "삶에 능하지 못하고 글읽기와 글쓰기에 능하다고 비아냥"거렸다는데(182), 이처럼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간다는 몰락을 자조의 가면으로 가리고서 자랑하는 그 자아도취가 한편으로는 순수해 보였기 때문이다. 감상주의와 허영은 이 순수함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애초의 기대가 많이 깎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후에 그의 글쓰기가 어떤 식으로 변해왔는지 추적하면서 읽어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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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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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김연수의 소설은 처음이었다. 그가 '적어도 안타는 치는 작가'라는, 평단과 대중의 인정을 폭넓게 얻고 있기에 이것을 밝히는 것에 살짝 주눅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89학번인 그의 소설은 보통 90년대의 세대 의식 속에서 평가받는데, 어느 정도는 그런 것 같았다. 제목도, 배경도, 그리고 기억, 후일담,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이야기, 체온, 욕망, 연애, 연결과 인연 등의 키워드들도. 

우리는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문학동네에 연재할 때의 제목) 존재라거나, 세계는 "여러 겹의 세계이며, 동시에 그 모든 세계는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믿자!"(374)는 선언은 변증법에 대한 신념을 말랑말랑하게 데운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기억과 이야기의 형식으로 씌어지고 있지만, 그 밑바탕에는 독자인 불특정의 '너'에게 인생이란 어떤 것이고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를 이제 막 청년기를 지난 주인공의 목소리를 빌어 작가가 가르쳐주려는 것 같아서 이물감이 느껴졌다. 자신은 굉장히 유연하고 젊은 시절의 마음가짐을 잃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 덜 완강해서 오히려 더 힘든 90년대 초 학번 선배들의 꼰대를 보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전반부의 연애담은 훌륭했고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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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위한 선언
알랭 바디우 지음, 서용순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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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의 『철학을 위한 선언』을 읽었다. 바디우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플라톤과 하이데거의 사상, 횔덜린과 첼란의 시, 68혁명과 마오이즘, 칸토어와 코언의 집합론, 그리고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뒤로 제쳐두고, 불가능과 종언과 TINA(There is no alternative) 따위만이 운위되는 시대에 새로운 시작과 가능성을 말하고 있어서 흡족했다.  

위기와 몰락이 장신구로 전락하거나 상품처럼 팔려나가는 저간의 모습이 내게는 꼴사나워 보였다. 20대 세대 담론은 위기에 처한 20대의 현실을 끊임없이 말하면서 팔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 없었고,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몰락의 표정을 사랑했다는 신형철의 평론은 중산층 여대생들의 화려한 문화적 교양의 액세서리로 읽혔다. 위기를 소비하는 사람은 뭔가 돌파구를 마련해야 할 정도로 절박하지 않았고, 몰락에 매료된 자들은 그 자신이 그런 몰락을 감당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나는 이들이 비겁하다 생각했지만, 이들보다 떳떳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선언』에서 바디우는 현대의 방향상실성에 따른 철학의 종언에 대해 "탈대상화, 탈정향은 오늘날 더 이상 시적 은유 안에서 진술돼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탈정향은 개념화될 수 있다"며 철학의 가능성을 역설한다.(109) 또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만 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무기력에 대해 "반대로 우리는 그것을 명명해야 하며, 그것을 식별 불가능한 것으로 식별해야 한다."는 사고의 전환을 선보인다.(138) 부정성의 소멸이나 비판성의 약화 따위가 최근 한국인들의 의식구조에서 보이는 현상이라고 생각하면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서 나는 진정한 부정과 비판의 정신은 다시금 그 부정성을 지양하고 긍정과 가능성으로 나아간다는 변증법의 진리를 다시금 신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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