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전쟁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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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吊(조)를 쓰는 사람들이 弔(조)를 쓰는 사람들을 죽이고 글자를 없앴다.”(193면) 정말 놀라운 착안이고, 분석이었다. 만약 이게 정말 사실이라면,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얼마든지 그럴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는데 있다는 사실이다. <글자전쟁>이란 작품을 읽는 내내 속으로 ‘한자는 진정 중국이 만든 중국의 문자까?’라는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중국의 자전에서는 백두산을 어떻게 읽으라고 되어있지?

“지금 얘기하신 그대로 ‘백두산’이군요. 그런데……”

태민은 크나큰 충격에 빠졌다. 중국어로 백두산은 ‘백두산’으로 읽는 게 아니라 ‘바이토우샨’이라 읽는 읽는다.

“중국인들이 백두산을 ‘바이토우샨’이라 발음하지만 ‘백두산’이라고 발음해야 한다는 거 아니에요? 지금 교수님 말씀은.”

“내 얘기가 아니라 중국의 자전에 그렇게 발음기호가 되어 있단 말이네.”

“아니, 어째서 한국말이 그대로 중국 자전의 발음기호가 되어 있는 거죠?”

“어째서 그렇겠나?”

“설마... 한자는 지금의 중국인들이 만든 게 아니라는 뜻입니까?”

“아직 여기에 대해 확고부동한 이론은 없어. 하지만 어떤 글자가 있으면 그 글자는 가장 정확하게 발음하는 사람들과 깊은 관계가 있을 수 밖에.”(291면)

 

주지하다시피 동아시아에 속해 있는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 싱가포르 등의 국가들은 모두가 다 한자문화권이다. 비록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르고, 쓰는 말이 다르지만, 한자라는 공통된 문자를 통해 언어가 아닌 문자로 서로 의사를 주고받으며 소통할 수 있다.

한자는 뜻글자로 이루어진 문자이기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한자를 문자로 쓰는 국가들의 경우, 그 나라의 말을 몰라도 한자로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하다. 즉 글로 쓰는 필담으로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동아시아의 공통 문자가 바로 한자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남북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내려오는 동안 실로 오랜 세월 한자로 우리의 역사를 기록해 왔다. 세종대왕 대에 한글이 창제 되었어도 한자의 힘은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을 정도로 막강했다. 이처럼 오랜 시간 동안 한자를 사용한 민족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한자를 애지중지 여겼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복잡한 한자의 원 글자인 번체자(繁體字)를 그대로 사용하는데, 정작 한자의 나라라고 하는 중국은 한자(번체자)가 복잡하고 사용하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간체자(簡體字)라고 하는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그것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와는 사뭇 대조적이라 할 수 있는데, 과연 이렇게 줄이고, 약자로 쓰면서 과연 한자를 자기네 문자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지금 중국에서는 번체자를 모르는 중국인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많은 이들이 중국을 한자의 종주국으로 알고 있고, 살아왔으며 또 한순간도 여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진명 작가는 한자가 중국만의 문자가 아니었고, 또 한자를 처음 만든 나라 또한 중국이 아니었다라는 주장을 바탕으로 <글자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중국인, 중국 한나라 때의 문사들이 모르는 글자가 있다. 백제, 신라, 고구려, 옥저, 동예의 문사들은 다 아는 글자인데, 한자의 종주국인 중국의 문사들이 모르는 글자가 있다니, 吊와 弔에서 시작된 고구려와 중국 한나라 사이의 글자전쟁은 재상 을파소에 의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 글자가 바로 답(沓)자이다. 논을 뜻하는 답(沓).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소설 속의 주인공 태민은 수십억, 수백억을 벌어들일 수 있는 무기중개상이다. 실패를 모르고 항상 승승장구하던 그는 무기중개와 관련해서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구속 직전에 한국을 떠나 중국으로 달아나게 된다. 어렵게 중국으로 탈출한 태민은 그곳에서 북한 사람들을 이용하여 북한으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재산을 빼앗은 남한을 위협할 계획을 세운다. 이 와중에 태민은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에 자신이 직접 별명을 붙인 킬리만자로라는 사람에게 접근 하여 그를 이용하려고 하는 중에 뜻하지 않게 그와 관련된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데, 킬리만자로는 태민에게 usb를 전하고는 다음 날 시신으로 발견된다. 사실 태민이 접근하고자 한 킬리만자로는 북한 공작원이 아닌 남한의 소설가 전준우였고 전준우가 태민에게 건넌 유에비 속에는 전준우가 집필 중인 소설이 들어있었는데, 소설의 내용이 중국의 치명적인 약점이 되는 내용들이었다. 태민은 망설이다. 전준우의 죽음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음을 발견하고는 그의 죽음을 밝히는 과정에서 전준우가 남긴 소설을 읽다가 엄청난 사실을 발견하고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펼쳐지는 글자전쟁의 한 가운데로 말려들어 가게 되는데...

 

소설은 고구려시대와 현대를 오가며, 대단히 숨가쁘게 전개된다. “큰 활을 진 아이와 풍장(風葬)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지 않고 나무 위에 걸쳐 두거나 바위에 눕혀두었다. 이를 풍장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한 이유는 땅에 묻어 썩히는 것 보다는 더 온전하게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풍장(風葬)이 소년이 활을 들고 나간 사실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시체를 내다버리긴 하지만 어제까지도 같이 지내던 가족이라 활을 들고 나가 부모의 시체를 지킨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129면)

활을 들고 나간 아이는 짐승이 행여나 부모의 시체를 훼손하는 게 가슴 아파 활을 들고 나가 지켰던 것인데. 여기에서 ‘조문하다’란 뜻의 ‘弔’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吊’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이 글자는 풍장과 관계가 있는 ‘弔’와 달리 매장과 관련이 있는 글자이다. 이처럼 <글자전쟁> 속에는 吊와 弔를 둘러싼 글자전쟁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풍장과 매장 문화의 대립과 원시 부족과 문명의 충돌이 함께 있었다.

글자, 한자는 어떻게, 어떤 원리로 만들어진 것인가? 소설 속에서 고구려의 국상인 을파소는 없어진 글자의 찾아내기 위해 편장에게 글자를 만들어 보자고 제안한다. 그러자 편안은 을파소의 말에 깜짝 놀라며, ‘사람이 어찌 글자를 만들어내겠습니까? 글자란 수천 년, 수만 년 세월을 두고 흘러온 것인데 어떻게 모르는 글자를 단번에 만들어내겠습니까?’라고 반문하니, 을파소는 ‘글자가 만들어지는 원리는 그렇게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다.’라고 하며, 편장과 함께 없어진 글자를 복원하게 되는데...

 

무기중개상 태민은 500억이라는 무기거래 후 발생하게 될 엄청난 커미션을 포기하고 글자전쟁의 비밀을 간직한 채 죽어간 소설가 전준우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밝히고, 중국 학자들과의 글자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을까?

이 소설을 손에 넣자마자 이틀에 걸쳐 정독을 했고, 완독을 했다. 먹고 자고 싸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직 글자전쟁을 읽고, 생각하는데 시간을 다 보냈다. 실로 오랜만에 정신을 집중하여 읽을 수 있는 정말 대단히 흥미롭고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중언부언 하지만, 글자전쟁, 이 작품은 매우 훌륭한 작품이었다. 제목만큼이나 정말 대단히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새삼 김진명이란 작가의 명성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글자전쟁>을 읽고 났더니, <삼국지>를 읽기 전에 먼저 읽어보라는 <고구려>란 작품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게 들었다. 조만간에 이 책을 탐독해 보려고 한다. 그러고 나서 <글자전쟁>을 다시 읽어보고자 한다. 두 작품 사이에는 뭔가 미묘한 연계성이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글자전쟁> 이 작품은 시간이 허락된다면, 원고지에 또박또박 정자체로 정성껏 한번 옮겨 적어보고 싶은 작품이기도 하다. 겨울 긴긴 밤 글자전쟁과 고구려 시리즈로 밤을 지새보는 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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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 - 정명공주와 광해군의 정치 기술
박찬영 지음 / 리베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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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인조 VS 정명공주

 

광해군은 어떤 왕이었을까? 단순히 무도한 폭군이었을까? 기존에 역사 교과서에서 배웠던 광해군은 친형과 이복동생을 죽이고 대비인 어머니를 폐서인 한 무도한 폭군으로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된 임금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광해군는 연산군과 더불어 “조(태조, 세조, 정조)”나 “종(세종, 성종)”이 아닌 “군”으로 불리운 임금이었다. 그런데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광해군에 대해서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광해군은 연산군과는 달리 폭군도, 암군도, 혼군도 아니었다. 그는 어지러운 시대,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정세의 변화와 흐름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와 같은 난세에서 조선을 반석에 세울 수 있었던 탁월한 외교 정치적 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임금이었다고 한다. 몇 해 전에는 이병헌, 한효주가 열연했던 영화 광해에서 광해군의 이러한 이미지를 어느 정도 보여주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광해군은 온전하게 그 임금의 지위를 다 누리지 못하고 반정파에 의해 폭정을 일삼은 폐륜 군주로 낙인이 찍혀 임금의 지위에서 폐위되고 말았다. 이 책은 광해군 시대에 비참한 삶을 살았던, 선조의 정실에게서 태어난 정명 공주와 광해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명공주의 시선으로 본 광해, 16세기 조선이라고 할 수 있다.

 

1592년 4월 13일 16만 8,000여 왜군이 조선으로 물밀들이 밀려왔다. 4월 29일 믿고 있던 신립의 패전 소식이 도성에 전해지자, 조정은 공포에 휩싸였다. 왜군은 북진을 계속했고, 선조는 더 이상 도성에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날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는 사실이 공표되었다. 광해군은 세자로 책봉된 다음 날 새벽, 선조를 따라 경복궁을 나서 북으로 북으로 피난을 가야만 했다.

 

광해군은 원래 왕이 될 수 없었던 왕자였다. 그러나 왕이 되도록 정해진 사람이 또한 광해군이었다(81면). 임진왜란이라는 7년 전쟁이 그에게 세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고,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그를 왕으로 만들어 주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세자에 책봉되어 분조(조정을 둘로 나눔)를 이끌며 국난을 극복하는데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전란이 평정될 즘 부왕 선조는 정비인 인목대비에게서 적장자인 영창대군을 생산한다. 이에 광해군은 세자 자리에서 위기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부왕인 선조가 오래 살아서 영창이 보위를 이어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장성하게 되면, 현재 자신의 세자 자리가 위태로울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자신은 폐세자가 되고 영창이 세자가 되어 보위를 이어 받을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광해군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 광해군의 입장에서는 부왕이 선조가 빨리 죽어야만 했다. 그런데 실제로 선조는 죽었다.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광해군은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조선의 군왕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선조가 죽었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아직 적장자인 영창을 생산한 대비가 남아 있었다. 왕이 갑작스럽게 죽을 경우, 비록 세자가 책봉되어 있어도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비로부터 왕을 인정한다는 교지를 받아야만 비로소 즉위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인목대비는 영창의 생모로 아들의 미래를 위해 고민하고 갈등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왕위를 자신의 친자인 3살짜리 영창에게 전하느냐? 아니면 장성한 세자 광해군에게 전하느냐?

아무리 대비라도 선왕이 정한 장성한 세자를, 그것도 임진왜란이라는 어마어마한 전란을 극복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세자를 쉽게 폐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광해군을 따르는 세력들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영창에게 보위를 넘기려면, 세자 광해와 대결을 벌어야 했다. 이기면 살아남지만, 지면, 죽음이었다. 결국 인목대비는 자신의 어린 친자식들을 목숨을 보장해 주는 대가로 광해군에게 왕권을 넘겨준다. 광해군은 그렇게 왕이 되었다. 하지만, 권력이란 그 누구하고도 나눌 수가 없는 것. 영창이 성장하면서 덩달아 광해군은 불안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다음 보위는 마땅히 자신의 아들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세상의 시선은 그렇지가 않았다. 자신이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는 원래 자신의 자리가 아니었다. 마땅히 영창대군이 있어야 할 자리였다. 순리대로라면, 영창이 성장할 때까지만 자신이 앉아 있을 수 있는 자리였다. 그리고 영창이 정사를 돌 볼 나이가 되면, 마땅히 주공이 그랬던 것처럼 왕의 자리를 원래 주인인 어린 동생에게 돌려 줘야했다.

하지만 이미 권력의 단맛을 본 광해군에게는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왕좌를 탐하는 이는 누구라도 역적이었고 죽여야만 했다. 이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세월이 어떠했던가? 아무리 원래의 주인이라도 이대로 넘겨 주기엔 너무 억울했을 것이고 아까웠을 것이다. 자신의 피를 이은 자손들만이 대대손손, 자자손손 이 자리에 올라야 했고 또한 오르기를 갈망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광해군은 영창을 죽일 수 밖에 없었다. 영창은 살려두면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다음 대가 문제였다.

영창대군, 선조의 정실에게서 난 적장자인 그가 죽은 이유, 죽어야 했던 이유는 단 하나 밖에 없었다. 왕자라서, 그것도 정실 부인에게서 난 적장자라서 죽을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선조가 급작스럽게 병사하지 않고 영조 만큼만 살았더라도, 그는 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광해 일파는 영창대군이 탄생하자마자 눈엣가시처럼 생각하고 어떻게든 처지하려 했다. 이들은 영창대군이 자라는 것을 보고 큰 변을 일으켜 단숨에 없애 버리기 위해 날마다 모의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영창대군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그저 모든 일에 꼬투리를 잡아 시비하고 박대했다. 계축일기의 기록이다.

 

영창대군은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아무것도 모르고 결국 권력 투쟁 속에서 죽었다. 하지만, 광해군의 적은 따로 있었다. 광해군 스스로도 선조의 5번째 아들인 정원군의 장자였던 능양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광해군은 그렇게 보위에 있은 지 15년 남짓 만에 자신의 이복동생의 아들인 조카 능양군의 반정에 의해 폐위 되고 말았다.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아들 영창을 죽인 광해가 집권하는 동안 인목대비와 정명공주는 서궁에 유폐되어 죽은 사람처럼 숨죽여 살았다. 인조의 반정 명분이 바로 인목대비였다. 광해군과 정명의 대결은 다시 인조와 정명의 또다른 대결로 이어진다. 읽을거리와 볼거리가 풍성한 책이다. 다만 지도나 사진을 좀 크게 실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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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을 보다 1~3권 세트 - 전3권 - 이미지와 스토리텔링의 조선사 여행 조선왕조실록을 보다
박찬영 지음 / 리베르스쿨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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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종합

 

1권은 고려의 신하이자 장군이었던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을 건국하게 되는데, 이후 안정적인 왕위 세습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5째 아들인 이방원이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치른 후 왕이 되는 과정과 이후 문치의 조선을 열고자 했던 세종의 치세 그리고 이어지는 문종 사후 왕위 자리를 탐한 문종의 아우인 수양의 피 비린내나는 왕위 찬탈, 요순으로 불린 아버지 성종과 폭군이 될 수 밖에 없었던 비운의 왕자 연산군, 신하들의 반정에 의해 왕이 된 중종까지 조선이 건국 후 정착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특히 조선의 역사와 운명을 바꾸는 일대 사건인 왕자의 난과 같은 비극은 태조와 태종의 욕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26세의 이방원, 11살의 이복동생에게 세자 자리를 내주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만이라도 양보를 했더라면, 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태조와 태종은 둘 다 욕심이 많은 인물들이었다. 이 업보로 인해, 단종애사가 일어나게 된다. 태종은 왕이 되기 위해 배다른 어린 이복 동생들을 죽였고, 수양은 왕이 되기 위해 친 형님의 아들인 친 조카, 그것도 세자가 아닌 군왕 이 된 조카를 왕위에서 끌어내려 죽이고 말았다. 책을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거져 얻어지는 것도 없고, 정치란 게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하나를 내 주거나 잃게 된다는 사실을.. 이 밖에도 조선전기에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과 기록들이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 되어 있다. 이 책을 통해 조선전기에 일어난 다양한 사건과 기록을 공부하며 역사 공부의 재미와 감동은 물론 해박한 역사적 지식과 처세의 교훈까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다 2권의 주요 내용은 왜의 침략으로 벌어진 7년 전쟁, 임진왜란과 임란 후 명청 교체기 조선의 외교정책과 연관이 있는 두 번의 호란, 즉 청의 침략으로 일어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야기가 핵심이다. 초기에 비해 중기로 넘어오면서 조선의 국력은 형편없는 지경에 이른다. 일본의 침략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청나라의 침략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조선의 국력과 군사력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이 건국되기 바로 직전, 고려 말 최영이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과 세종 때 이종무가 대마도를 정벌하여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에 비하면, 조선중기에 이르러 군사력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만 하다. 특히 임진왜란 한 가운데 있었던 선조의 경우, 칼과 총을 든 왜적들에게 무기가 아닌 시로 그들을 상대하려 한 행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하지만, 유성룡, 이산해, 이항복, 이덕형, 이순신 같은 명신하, 명장이 있었기에 국난을 그나마 이겨내고 수습할 수 있었다. 그때 만약에 국난을 극복해 내지 못했더라면, 지금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조선왕조실록을 보다> 권지2를 통해 조선중기에 역사 현장 속으로 여행을 떠나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다> 3권은 조선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즉 조선후기에서 대한제국 시대까지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3권은 숙종실록부터 시작되는데, 숙종은 내가 알기로 참으로 대단한 임금이다. 숙종은 백성들의 삶을 직접 보기 위해 암행이나 미행도 많이 다녔고 또 김만중이 지은 소설 사씨남정기의 롤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숙종은 아버지 현종의 뒤를 이어 14살 어린 나이에 즉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비의 수렴청정도 받지 않고 바로 정치 10단 아니 정치 고수의 노련한 신하들을 좌우에 벌려 두고 친정을 시작했다. 단종과 비교해 보면, 그가 얼마나 노련한 정치가였는지 대번에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단종은 숙종보다 2살이 어린 나이인 12살에 즉위했지만, 12살이나 14살은 지금 우리 아이들 기준으로 봤을 때 초등학교 5학년, 중학교 1년으로 둘 다 어린 소년이기는 매 한가지다. 숙종은 어린 나이였음에도 노련한 중신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카리스마를 내 뿜으면 조정을 이끌어 나갔다. 숙종의 재위기간은 무려 46년간 이어지는데, 많은 업적을 남긴 반면, 스캔들 또한 대단했었다. 장희빈과 무수리 최씨, 두 인물 모두 숙종시대 계통과 관련해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다. 장희빈은 인현왕후와의 대결에서 패한 후, 지아비인 숙종으로부터 사약을 받아 자신이 친아들인 세자(훗날 경종)가 보는 앞에서 죽었다. 장희빈의 아들은 숙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왕이 되는데, 그가 바로 경종이다. 하지만, 경종은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충격 때문에 정사를 제대로 펴지 못했고, 이 사건 때문에 심적으로도 또한 대단히 큰 충격을 받아서였는지 석연치 않은 병증으로 일찍 세상을 떴다. 경종의 뒤를 이어 그의 배다른 동생,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등극 과정에서 문제가 좀 있었다. 암튼 그가 바로 조선 최고의 재위기간을 자랑하는 영조이다. 영조는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재위기간 내내 엄청난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는 노론에 의해 얻어진 거나 다름없었기에 당색이 골수 노론에 가까웠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른 비극이 시작되었으니, 아버지와 당색이 서로 달랐던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는 왕이 되어보지 못하고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8일만에 굶어죽었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불꽃이 완전히 꺼졌던 것이 아니었다. 영조의 손자이면서, 사도세자의 아들이 우여곡절 끝에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정조인데, 그는 즉위식에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포를 하였다. 조선은 정조가 재위하면서 비로소 다양한 문물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정조는 조선의 르네상스를 연 임금으로 평가 받게 된다. 정조 이후 조선은 급속도로 무너지게 되는데, 그 배경에는 60년 세도정치의 부정부패가 있었다.

고종 이후, 근대로 이어지는 개화기는 불과 100년 전의 일이다. 사실 우리와 가까운 시대이고 현재의 오늘이 있게 하는데 결정적인 시기였기 때문에 더 잘 그리고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그렇지만 못하다. 사건이 워낙에 복잡하고, 또 개입된 나라들 또한, 청과 일본을 넘어 미국, 영국, 러시아, 독일 등의 열강들이 앞두어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이 시대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이 시대를 정확하게 공부할 수 있어 너무 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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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을 보다 3 - 이미지와 스토리텔링의 조선사 여행, 숙종~순종 조선왕조실록을 보다 3
박찬영 지음 / 리베르스쿨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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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을 보다> 시리즈는 책 소개의 말처럼 그야말로 조선사 보물 창고라는 표현이 아주 적절하고 어울린다. 책 속에 수록되어 있는 다양한 그림, 지도, 사진, 가계도 등은 본문의 내용을 보다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세 권의 책 속에 조선왕조 500년 그리고 근대의 모습까지도 고스란히 다 담겨져 있다. 책의 내용 또한 대단히 쉽게 되어 있는데, 책의 독자층을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고르게 맞추려는 의도에서 모든 내용들을 풀어 놓아 이해가 쉽다. 사실 전문용어, 한자말 등의 역사용어는 전공자가 아닌 이들에게는 낯서고 어렵다. 그런데 초등학생 뿐만 아니라 다양한 독자층을 배려하여 이 용어들을 쉽게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왕조실록이란 텍스트는 정작 재위 당시 조선의 왕들은 볼 수 없는 책이었다. 실록은 사관이 직필사관의 원칙에 따라 있는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였는데, 혹시나 왕이 자신에 대해 안 좋게 쓴 기록을 보게 되면, 이를 왜곡하고 훼손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왕이라 하더라도 실록만큼은 절대로 볼 수 없도록 엄격하게 법으로 규정을 해 놓았다. 그런데 조선시대 만인지상의 지위에 있었던 왕도 보지 못한, 볼 수 없었던 그 기록을 지금 우리는 자유롭게 보고 있으니, 아 이 얼마나 아이러니하고 통쾌한가?

<조선왕조실록을 보다> 3권은 조선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즉 조선후기에서 대한제국 시대까지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3권은 숙종실록부터 시작되는데, 숙종은 내가 알기로 참으로 대단한 임금이다. 숙종은 백성들의 삶을 직접 보기 위해 암행이나 미행도 많이 다녔고 또 김만중이 지은 소설 사씨남정기의 롤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숙종은 아버지 현종의 뒤를 이어 14살 어린 나이에 즉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비의 수렴청정도 받지 않고 바로 정치 10단 아니 정치 고수의 노련한 신하들을 좌우에 벌려 두고 친정을 시작했다. 단종과 비교해 보면, 그가 얼마나 노련한 정치가였는지 대번에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단종은 숙종보다 2살이 어린 나이인 12살에 즉위했지만, 12살이나 14살은 지금 우리 아이들 기준으로 봤을 때 초등학교 5학년, 중학교 1년으로 둘 다 어린 소년이기는 매 한가지다. 숙종은 어린 나이였음에도 노련한 중신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카리스마를 내 뿜으면 조정을 이끌어 나갔다. 숙종의 재위기간은 무려 46년간 이어지는데, 많은 업적을 남긴 반면, 스캔들 또한 대단했었다. 장희빈과 무수리 최씨, 두 인물 모두 숙종시대 계통과 관련해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다. 장희빈은 인현왕후와의 대결에서 패한 후, 지아비인 숙종으로부터 사약을 받아 자신이 친아들인 세자(훗날 경종)가 보는 앞에서 죽었다. 장희빈의 아들은 숙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왕이 되는데, 그가 바로 경종이다. 하지만, 경종은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충격 때문에 정사를 제대로 펴지 못했고, 이 사건 때문에 심적으로도 또한 대단히 큰 충격을 받아서였는지 석연치 않은 병증으로 일찍 세상을 떴다. 경종의 뒤를 이어 그의 배다른 동생,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등극 과정에서 문제가 좀 있었다. 암튼 그가 바로 조선 최고의 재위기간을 자랑하는 영조이다. 영조는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재위기간 내내 엄청난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는 노론에 의해 얻어진 거나 다름없었기에 당색이 골수 노론에 가까웠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른 비극이 시작되었으니, 아버지와 당색이 서로 달랐던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는 왕이 되어보지 못하고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8일만에 굶어죽었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불꽃이 완전히 꺼졌던 것이 아니었다. 영조의 손자이면서, 사도세자의 아들이 우여곡절 끝에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정조인데, 그는 즉위식에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포를 하였다. 조선은 정조가 재위하면서 비로소 다양한 문물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정조는 조선의 르네상스를 연 임금으로 평가 받게 된다. 정조 이후 조선은 급속도로 무너지게 되는데, 그 배경에는 60년 세도정치의 부정부패가 있었다.

고종 이후, 근대로 이어지는 개화기는 불과 100년 전의 일이다. 사실 우리와 가까운 시대이고 현재의 오늘이 있게 하는데 결정적인 시기였기 때문에 더 잘 그리고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그렇지만 못하다. 사건이 워낙에 복잡하고, 또 개입된 나라들 또한, 청과 일본을 넘어 미국, 영국, 러시아, 독일 등의 열강들이 앞두어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이 시대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이 시대를 정확하게 공부할 수 있어 너무 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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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을 보다 2 - 이미지와 스토리텔링의 조선사 여행, 인종~현종 조선왕조실록을 보다 2
박찬영 지음 / 리베르스쿨 / 201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만큼 역사를 공부하기 좋은 시절이 또 있을까 싶다. 인터넷, 역사 드라마, 애니메이션, 사극 영화, 만화, 역사 저널, 역사 다큐, 다양한 계층을 위한 역사서적 등은 어렵고 복잡한 역사를 쉽게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지난 학창시절 중 ․ 고등학교에서 배웠던 역사, 국사는 무조건 외워하는 공부였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많은 학생들이 역사라는 말만 들어도 기겁을 하거나 짜증을 내면서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덩달아 역사 공부도 등한시 하였고 또 입시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아닌데, 고조선, 삼국시대, 통일 신라 후 남북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까지 거의 2000년이 넘도록 이어져 내려온 유구한 역사이다 보니, 그 기록들이 얼마나 많고, 또 외워야 할 내용은 얼마나 많겠는가? 더군다나, 미래가 아닌, 과거의 기록을 왜 골치 아프게 외워야 한다는 말인가? 중고교 학창시절에는 나 역시도 역사, 국사란 과목에 관해서는 그다지 큰 관심과 비중을 두지 않았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시험 칠 때마다 머리에서는 쥐가 나고, 넌덜머리가 났었던 것 같다. 역사 흐름에 있어서 중요한 년대는 지금도 헷갈린다. 또 특정 인물의 생애,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도대체 나랑 친하지도 않은 이 사람의 생년몰은 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왜 기억을 해야 하는가?

대학에 와서 인문학을 전공하면서 내 전공과 관계되는 부분에 국한 해서 역사에 관심을 두고 공부했었는데, 시근이 들어서인지 어느 날부터 이 역사라는 과목에 재미와 매력, 중요성을 느끼지 시작했다. 시작은 아마도 이덕일이라는 역사학자가 쓴 책을 읽게 되면서부터 였던 것 같다. <사도세자의 고백>이란 책과 <조선왕 독살사건>, <조선선비 살해사건> 등의 시리즈로 이어지는 책들을 접하게 되면서부터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이들 책을 보게 된 건, 사극 드라마를 시청하게 되면서 과연 그 일들이 사실일까 하는 추측과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 같다. 아무튼 이후 나는 자연스럽게 다른 역사분야의 책들에도 관심을 가지면서 틈틈이 공부를 하였다. 그러다가 언젠가 ebs 모 인문학 강좌에서 섬진강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국민 교사 김용택 선생님의 강연을 듣게 되었는데, 강연 중에 이런 말씀이 귀에 들렸다. ‘자국의 국민으로서 자국의 역사에 대해 무지하고 알지 못하면, 이는 정신적 불구자다’ 아마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청소를 하면서였던지, 아니면 뭘 다른 걸 하면서 들었던 것 같은데 암튼, 나는 그 하던 것을 중단하고 텔레비전에 비선을 고정하고 강연에 몰입해서 들었다.

당시 선생님의 이 말은 나에게 굉장히 충격적으로 들렸고, 이후 우리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고려나 그 이전의 삼국시대보다는 비교적 근대와 가까운 조선에 특히 관심을 가지고 되었고, 2000년 대 초반에 휴머니스트 출판사에서 출간된 박시백 화백의 만화 조선왕조실록을 접하게 되면서, 조선시대를 들여다 보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이후 영화든, 만화든, 전공서적이든 간에 가리지 않고 보게 되었다. 특히 박시백 선생님의 만화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조선왕조의 큰 맥락과 흐름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입문하려고 하는 지인들이 있다면, 두말 않고 권해 주는 책이 바로 이 만화책이다. 그런데 이번에 르베르스쿨에서 아주 흥미롭고 재밌게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책이 출간된 것 같다. 만화에서 다 보여주지 못한 내용을 이 책과 함께 공부를 한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다는 2권의 주요 내용은 왜의 침략으로 벌어진 7년 전쟁, 임진왜란과 임란 후 명청 교체기 조선의 외교정책과 연관이 있는 두 번의 호란, 즉 청의 침략으로 일어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야기가 핵심이다. 초기에 비해 중기로 넘어오면서 조선의 국력은 형편없는 지경에 이른다. 일본의 침략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청나라의 침략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조선의 국력과 군사력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이 건국되기 바로 직전, 고려 말 최영이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과 세종 때 이종무가 대마도를 정벌하여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에 비하면, 조선중기에 이르러 군사력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만 하다. 특히 임진왜란 한 가운데 있었던 선조의 경우, 칼과 총을 든 왜적들에게 무기가 아닌 시로 그들을 상대하려 한 행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하지만, 유성룡, 이산해, 이항복, 이덕형, 이순신 같은 명신하, 명장이 있었기에 국난을 그나마 이겨내고 수습할 수 있었다. 그때 만약에 국난을 극복해 내지 못했더라면, 지금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조선왕조실록을 보다>를 통해 조선중기에 역사 현장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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