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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왕이 된 남자
이주호.황조윤 지음 / 걷는나무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두 명의 광해를 만나다.
흥행 1위, 예매 1위. 개봉 26일 만에 800만 관객 돌파.
영화도 소설도 모두 다 재미있는 “광해, 왕이 된 남자” 소설로 먼저 만나다.
지난 추석 연휴동안 손에 꼭 끼고 있었던 책이 “광해 왕이 된 남자”였다.
귀성길 버스 안에서도, 지하철 안에서도 책을 펼칠 수 있는 곳, 자투리 시간만 허락되면 어김없이 광해를 읽었다. 원래는 영화로 먼저 보려고 찜 해 두었었는데, 여타의 사정으로 보지 못하고 있다가 추석 전에 다행히 책이 배송되어 와서 연휴를 함께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다 아는 이야기. 하지만 그 다 아는 이야기의 알맹이 실체는 전혀 달랐다.
진짜 왕보다 더 왕 같은 가짜 왕 하선,
진짜 왕보다 더 백성들을 생각하고,
진짜 왕보다 더 뜨거운 마음을 가졌던 가짜 임금 하선.
진짜 왕보다 더 조선을 아끼고 사랑했으며 그 조선을 지키고자 했던 가짜 임금 하선과
비운의 대문장가이면서 풍운아였던 홍길동전의 저자 교산 허균.
그들이 꿈꾸었던 조선, 그들이 만들고자 했던 조선은 어떤 나라였을까?
하선 曰 : 오늘은 전하께서 안 보이십니다.
허균 曰 : 편찮으시다.
하선 曰 : 아니, 어디가???
허균 曰 : 당분간 네가 대역을 해 줘야겠다.
하선 曰 : 얼마동안이나?
허균 曰 : 열흘이다.
그가 다스렸던 15일 간의 조선은?
폭군이 아닌 탁월한 외교 전문가로 평가받는 광해는 진짜 광해가 아닌 또 다른 광해였던 것이다.
소설은 실록에서 사라진 15일간의 기록에서 두 명의 광해를 만나게 해 준다.
진짜 임금 광해
“마셔라”
열다섯 나이의 사월이 떨리는 손을 내밀어 국그릇을 잡았다.
“빨리 마셔라. 마시지 않고 뭘 하느냐!”
“죽여 주시옵소서.”
“너희들 입에도 못 넣을, 독이 든 음식을 감히 과인에게!”
광해의 머리속에는 오로지 한 생각만이 남았다.
……
“유정호야말로 충신이지. 강직한 내 처남. 유정호 정도는 내주어야지. 그래야 저들도 내 말을 들을 것 아니오.”
허균은 변해 버린 광해를 바라보았다. 세자 시절, 전장을 누비며 다치고, 배곯고 피폐해진 백성들을 성심으로 돕고 이끌었던 광해는 사라졌다. 오로지 백성을 해치는 자들을 향해 말을 달렸고, 검을 휘둘렀고, 백성을 먼저 생각했던 강직한 세자는 어좌에 오르면서 죽어버렸다.
가짜 임금 하선
하선이 튕겨나듯 용상에서 일어섰다.
“뭐요? 이 땅이 오랑캐에게 짓밟혀도 상관이 없다고? 이런 찢어 죽일!”
박충서의 시선과 하선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절대 피하지 않는 하선을 보며 박충서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정전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냉랭했다.
“그깟 사대의 명분이 무엇이오. 대체 무엇이길래 2만 명의 백성을 사지로 내몰면서 눈도 깜빡하지 않는 것이오? 조선의 관리라면, 백성들이 부모라 칭하는 왕이라면 그리 해서는 안 됩니다.……그대들이 무엇이기에, 사대가 무엇이기에 귀하디 귀한 목숨을 빼앗으려 하는 것이오! 과인은 그들을 살려야겠소.”
하선이 독을 품은 눈빛으로 대신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대들이 죽고 못 사는 사대의 예보다 내 나라, 내 백성이 열 갑접, 백 갑절은 더 소중하오!”
허균은 대신들과 하선을 보았다. 일국의 왕이라 칭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용상 위의 주상을 보았다.… 하선의 노한 얼굴만을 보았다.
아무도 믿을 수 없었던 진짜 왕.
진짜 왕보다 더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했던 가짜 왕.
“네 놈이 사월이를 죽였다.”
“아니옵니다. 전하 이건 모략이옵니다.”
“네 놈이 수라에 독을 타라 시켰던 기미나인의 이름이 사월이다.”
허균은 하선의 등을 보며 생각했다. 사월이 대신 죽은 것은 하선이 왕이라서가 아니었다. 하선이 자신의 궁박한 사정을 살펴주고 어미의 소식을 대신 알아봐 주라고 마음을 써 줬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사람답게 봐 주는 하선이었기에 능히 대신 죽을 각오를 한 것이었다.
눈 앞의 하선, 이자는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대신해서 죽은 사월이 가여워 분노하고 있는 것이었다.
만약 진짜 주상께서 이 상황에 처했다면 어떤 이유로 분노하셨을까. 왕인 자신을 죽이려 했기에 분노하시지 않았을까. 사월의 존재 따윈 전혀 관심도 두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석영!! 자네가 누구를 위해 개처럼 뛰는지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다. 조선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그 이름을 대라.”
“모르옵니다.”
“아니다! 모른다! 억울하다! 네놈의 입에서 언제까지 그 소리가 나오는가 보자.”
진짜 왕이 되고 싶은가?
“국문을 멈추십시오.”
“임금을 독살하려 한 자요. 어찌 국문을 멈추라 하시오?”
허균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호통쳤다.
“네가 진짜 임금인 줄 아느냐! 지금 조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하는 소리냐? 육조와 의정부, 양사까지 모든 중요 기관의 대신들이 박충서와 손을 잡았다.”
“그만 용포를 벗고 궁을 떠나게.”
하선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갈 수 없소. 내 이제까지 천한 것으로 비루하게 살았지만 지금은 아니오. 사월이를 죽인 자를 벌하지 않고는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겠소!”
하선은 임금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들만 골라 하는 자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하선은 좋은 임금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컸고, 명으로 파병하는 문제에서 보았듯이 외교적인 자질도 갖추고 있었다. 한 번 마음먹은 것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뚝심도 있었다. 이런 하선을 자신이 옆에서 보좌해 준다면 어떨까. 더러운 피는 자신의 손에 묻히고 백성을 위한 선정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주변을 만들어 준다면 어떨까. 신분제의 폐해에 갇힌 인재들에게도 조정의 문을 열어 능력 있는 관리들이 많아진다면 어떨까. 허균이 결심한 듯 눈을 떴다.
“임금이 되고 싶소? 사월이라는 아이의 복수를 하고 싶다면,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저들을 용서치 못하겠다면, 백성을 하늘처럼 섬기는 왕이 되겠다면, 그것이 그대가 꿈꾸는 왕이라면, 그 꿈을 내가 이뤄 드리리다.”
꼭 닮은 진짜 왕 광해와 가짜 왕 하선
광해군 8년 끊임없이 독살과 죽음의 위협을 느끼던 광해는 자신의 대역이 필요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천민 광대로 살아가는 하선이었다. 너무나 닮은 외모. 놀란 것은 광해뿐 아니라 하선도 마찬가지였다.
“따라 해 보아라. ‘게 아무도 없느냐.’”
“따라 해 보아라. ‘게 아무도 없느냐.’”
일순간 정적이 편전을 가득 메웠다. 하선이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삭막한 침묵을 깨트린 것은 광해의 호쾌한 웃음소리였다.
“제법이구나”
광해 8년... 역사에서 사라진 15일간
이병헌, 한효주 주연의 광해, 개봉하면 볼려고 딱 찜해 두고 있었는데, 책 출간과 동시에 영화가 개봉 되면서 책으로 먼저 만나게 되었다. 펼쳐 드는 순간,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광해군에 대해서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분이 “광해군”을 지은 한명기 교수인데, 그는 광해군이란 인물에 대해서 완전 새롭게 인식하였다. 광해군은 연산군과는 달리 폭군(暴君)도, 암군(暗君)도, 혼군(昏君)도 아니었고, 그는 어지러운 시대,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의 정세와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그 어지러운 세상에서 조선(朝鮮)을 반석에 세울 수 있었던 탁월한 외교 정치적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군주였다고 말이다. 그런데 한명기 교수가 주장했던 그 광해는 소설에서 진짜 광해가 아닌 가짜 광해 하선이었던 것이다. 기막힌 픽션과 역사 반전이 아닐 수 없다.
광해 8년, 1616년 2월 28일... “숨겨야 할 일들은 조보(朝報)에 내지 말라 이르다.”
역사에서 사라진 15일간의 기록... 그 때 조선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광해, 왕이 된 만자... 소설로 먼저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