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일주일을 - 히드로 다이어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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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세상에는 오직 작가만이 적당한 언어를 찾아 표현할 수 있는 면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번쩍거리는 마케팅 팸플릿은 어던 맥락에서는 대단히 효과적인 소통의 수단이 되었겠지만, 한 작가의 목소리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진정성까지는 늘 전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12쪽

부자들일수록 짐이 적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지위와 주로 다니는 여행지 덕분에 이제는 어디에서나 무엇이든 살 수 있다는, 눈에 자주 띄는 경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이다.-43쪽

산업화의 초기에는 노동력에 동기를 부여하기가 아주 쉬웠다. 한 가지 기본적인 도구, 즉 채찍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채찍으로 노동자를 힘껏 후려쳐도 아무 일 없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는 더 열심히 돌을 캐고 노를 저었다. 그러나 일을 하는 사람이 원한을 꾹꾹 누르며 복종하기보다는 스스로 크게 만족해야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직업들-21세기 초에는 이런 직업들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이 나타나면서 규칙도 바뀌어야 했다. -51쪽

나는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네로 황제를 위하여 쓴 '분노에 관하여'라는 논문, 그중에서도 특히 분노의 뿌리는 희망이라는 명제가 떠올랐다. 우리는 지나치게 낙관하여, 존재에 풍토병처럼 따라다니는 좌절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하기 때문에 분노한다. -57쪽

우리가 미학적이거나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기쁨을 끌어내는 능력은 이해, 공감, 존중 등 그보다 더 중요한 여러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요구를 먼저 충족시켜야 한다는 사실에 위태롭게 의존하고 있다. 우리가 헌신하고 있는 관계가 몰이해와 원한으로 물들어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드러나면 우리는 종려나무와 하늘색 수영장을 즐길 수가 없는 것이다. -76쪽

가지각색의 색깔과 글자체로 이루어진 이 지폐들은 지도자, 독재자, 창건자, 바나나 나무, 작은 요정들로 장식되어 있다. -105쪽

나는 앞으로 빠른 시간 안에는 콩코드 룸에 다시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서글픔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슬픔을 희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구역에 꽤나 자주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철저한 증오를 기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브리오슈를 바닥에 깐 포르치니 버섯 한 접시를 앞에 두고, 이 라운지가 사실은 족벌 등용과 다양한 속임수 덕분에 자격도 없으면서 이곳에 들어올 권한을 얻게 된 독점적 지배자들의 은신처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나 꼼꼼하게 살펴본 결과 안타깝게도 내 눈에 띄는 증거들은 그 위로가 되는 명제를 뒷받침하기는커녕 모순만 일으킨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주위에 있는 손님들은 부자의 상투적인 틀에 전혀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들이 아주 평범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시골의 엄청난 땅을 상속한 나약한 상속자들이 아니라, 마이크로 칩과 스프레드시트가 사람들 대신 일을 하게 하는 방법을 궁리해낸 보통 사람들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옷을 입고 맬컴 글래드웰이 쓴 책을 읽는 이들은 지능과 정력 덕분에 부자가 된 -125쪽

엘리트였다. 이들은 공급 사슬의 불규칙성을 교정하는 엑센츄어에서 일을 하거나, MIT에서 소득 비율 모델을 구축했다. 텔레커뮤니케이션 회사를 창업했거나 솔크 연구소에서 천체물리학을 연구했다. 우리 사회가 풍족한 것은 대체로 가장 부유한 시민들이 부자들은 이럴 것이다 하는 대중의 통념대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약탈만 해서는 절대 이런 종류의 라운지(세계화되고, 다양하고, 엄격하고, 테크놀로지에 익숙했다)를 지을 수 없다. 기껏해야 금을 바른 쾌락의 궁전이나 몇 동 지어놓고 다른 곳의 봉건적이고 후진적인 풍경은 그대로 두었을 것이다. -127쪽

그 방을 돌며서 비행기 객실의 초기 디자인들을 꼼꼼히 살피며 받은 느낌은 출간된 책의 초고를 볼 때 받은 느낌과 비슷했다. 잘 다듬어진 당당한 산문도 처음에는 주춤거리는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출발했음을 확인하는 즐거움이었다. 무엇이 되었든 첫 시도에는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위로가 됨직한 교훈이었다. -133쪽

요즘 여행자는 화요일에는 아부자에 있다가 수요일에는 히드로의 새 터미널의 보조 비행장 끝에 있을 수도 있다. 어제 점심에는 아프리카 뻐꾸기 소리를 들으며 우세 지구에서 튀긴 바나나를 먹었지만, 오늘 아침 8시에는 히드로에 와 있다. 기장은 코스타 커피 체인 옆의 게이트에서 777기의 쌍발 엔진을 끈다.

피로에도 불구하고 감각은 완전히 깨어나 모든 것을 흡수한다. 빛, 도로 표지, 바닥 광택, 피부색, 쇳소리, 광고. 마약을 한 상태이거나, 갓난아기 또는 톨스토이가 된 것처럼 감각이 날카롭다. 갑자기 고향이 다른 어디보다 낯설게 느껴진다. 이제까지 돌아다녔던 다른 땅에 의해서 세세한 모든 것들이 상대화되었기 때문이다. -173쪽

우리는 사회 생활에서는 힘과 강인함을 투사하며 많은 시간을 보낼 수도 있지만, 결국은 지독하게 연약하고 위태로운 피조물들이다. 우리는 더불어 사는 수많은 사람들 대부분을 습관적으로 무시하고 또 그들 역시 우리를 무시하지만, 늘 우리의 행복의 가능성을 볼모로 잡고 있는 소수가 있다. 우리는 그들을 냄새만으로도 인식할 수 있으며, 그들 없이 사느니 차라리 죽는 쪽을 택할 것이다. -191쪽

그러나 주차장의 가차 없는 형광등 불빛 밑에서 시민답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면서, 우리는 애초에 여행을 떠났던 이유를 떠올릴 수도 있다. 일상생활에서 쉽게 말려들곤 하던 천박하고 성난 분위기에 제대로 저항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는 것 아니었던가. -199쪽

여행자들은 곧 여행을 잊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은 사무실로 돌아갈 것이고, 거기에서 하나의 대륙을 몇 줄의 문장으로 압축할 것이다. 배우자나 자식과 다시 말다툼을 시작할 것이다. 영국의 풍경을 보며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다. 매미를 잊고, 펠레폰네소스 반도에서 보낸 마지막 날 함께 품었던 희망을 잊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다시 두브로브니크와 프라하에 흥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해변과 중세의 거리가 주는 힘을 다시 순수한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내년에는 어딘가에 별장을 빌려야겠다는 생각을 또 해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잊는다. 우리가 읽은 책, 일본의 절, 룩소르의 무덤, 비행기를 타려고 섰던 줄,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 등 모두 다.그래서 우리는 점차 행복을 이곳이 아닌 다른 곳과 동일시하는 일로 돌아간다. 항구를 굽어보는 방 두 개짜리 숙소, 시칠리아의 순교자 성 아가타의 유해를 자랑하는 언덕 꼭대기의 교회,무료 저녁 뷔헤가 제공되는 야자나무들 속의 방갈로. 우리는 짐을 싸고, 희망을 품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 욕구를 회복한다.곧 다시 돌아가 공항의 중요한 교훈들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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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채우다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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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좋아하시네. 그거야 자기 남편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소리지. 그렇게 돈 잘 벌고 잘 나가는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넙죽 내놓고 싶은 여자가 어디 있겠어? 배 아파서 순순히는 못 내놓지."
"맞아요, 아가씨. 아가씨가 순진해서 사랑한다는 소리에 쩔쩔매는 거예요. 우리 나이 이제 사십이에요. 지금 우리가 사랑 때문에 살아요 어디? 우리는 지금 사랑타령할 나이가 지났어요. 알고 보면 결국, 돈이에요. 그 여자도 분명히 그럴거에요."

전혜원의 애끓는 호소를 올케들에게 직접 보여줄 수도 없고, 대략난감이었다. 나이 사십이 무슨 인생의 저주이길래, 곱게 자란 이 여인들은 사랑에 이렇게 돌같이 무감해졌는가?-110쪽

성민과 함께 살아온 십년 동안 우리를 정의했던 하나의 단어를 고르라면 그건 '평화'였다. 그 단어가 '사랑'이 아니라서 불만이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작은오빠와 우리 미친 가족들이 그렇게 삶을 들까불러댔는데도 그는 끄떡없었다. 내가 낙관과 비관의 양극단을 초 단위로 오가며 진상을 떨어도, 그러거나 말거나 무던하고 평화로운 게 성민이었다. 우리 사이엔 많은 결핍이 존재했지만, 그 수많은 구멍들을 성민은 타고난 안정감으로 훌륭하게 채웠다. 우리 미친 가족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한 점이 바로 그것이었고 나는 바로 그런 성민을 좋아했다. 나는 성민과 한평생을 함께하리라는 데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275쪽

삶에는 '사랑한다'와 '사랑하지 않는다' 사이에 아무런 경계가 없어지는 그런 지점이 있었다. 그에게 그곳이 나무가 쓰러진 고속도로였다면, 나에게는 산꼭대기에서 붉은빛이 번져가는 이 산성이었다. 그날 그가 전혜원에게 죽도록 사랑한다고 말했어도 인생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흘러갔을 것이다. 내가 오늘 성민에게 죽도록 사랑한다고 말했어도, 인생은 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흘러갔을 것이다. 시간과 방향의 감각이 없어지는 그런 공간에서는, 인간이 무엇이 부딪쳐 어디로 가든 아무 차이가 없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고속도로를, 또 산성을 지나쳤다. 한번 지나치고 나면, 또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살게 된다. -297쪽

사람들은 보통 작은오빠가 미쳤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원조는 김덕만 사장이었다. 돈을 잘 버니까 미친병이 크게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빠는 평생 돈을 잘 벌었기 때문에 철들 기회가 더 없어서, 미친 증세로 따지자면 작은 오빠의 열 배였다. -310쪽

사람의 마음이란 몸을 덮고 있는 얇은 막을 뚫고 쉽사리 뛰쳐나가는 성질이 있었다. -5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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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하트 - 제1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정아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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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터 뒤에 여러 종류의 담배가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뒤 편의점을 한 바퀴 돌았다. 냉장고 옆쪽으로 10대로 보이는 남녀가 간이 식탁 위에 컵라면을 올려놓고 같이 먹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입 좀 다물고 먹어. 후루룩 짭짭, 그게 뭐냐? 여자애가."
"남 말 하네. 너 먹는 소리가 백배는 더 크거든요."
"뭐? 너? 이게 어디다 대고 반말이야. 너 오빠한테 자꾸 그러면 확, 한 번 더 해버린다."
말과 동시에 남자애가 여자애의 허리를 확 당겨 안았다. 여자애가 꺄악, 소리를 지르며 간이식탁을 붙잡았다. 그 바람에 라면 용기가 떨어지면서 옆으로 지나가던 내게 국물이 쏟아졌다.
"엄마!"
얼른 옆으로 비켜섰지만 이미 추리닝 윗도리에 라면 가락과 야채 조각이 다닥다닥 달라붙은 뒤였다.
"어머, 어떡해."
눈을 동그랗게 뜬 여자애가 남자애 품으로 파고들었다.
"죄송합니다."
남자애가 여자애를 당겨 안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서로 꼭 끌어안고 나를 응시하는 남녀. 무슨 대단한 적군이라도 만난 것처럼 서로를 보호하기에 여념이 없다. 나는 두 사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여자애 얼굴은 군데군데 화장이 지워져 있고, 남자애 얼굴에는 자신-470쪽

감이 넘친다. 막 성관계를 마치고 나온 연인들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분위기. 인생의 비밀스러운 곳을 함께 탐험하고 온 이들 사이에서만 오갈 수 있는 긴밀하고 친근한 분위기였다. 순간 가슴이 뻐근해지도록 질투심이 치솟았다. 이 아이들,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건전한가. 술에 취해 몸을 섞은 뒤 단절로 대응했던 태환과 나보다는 편의점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성관계를 암시하는 말을 타인이 알아챌 정도로 함부로 내뱉는 이들이 백배는 더 건강하고 아름다우리라. -4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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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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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바라나시는 유달리 일본인과 한국인 관광자들에게 인기 있는 곳이다. 거리를 걸어가면 여기저기 일본어와 한국어로 쓰인 간판과 홍보문구가 눈에 띄고 심지어 일본어와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장사꾼들도 만날 수 있다. 그 이유에 대해 그리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바라나시가 가지고 있는 신비롭고 영적인 분위기가 동양인들이 그리는 인도의 이미지에 부합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고 뭉뚱그린 추측을 해보았을 뿐. 그런데 인도의 갠지스 강을 배경으로 고통받는 인간의 구원에 대해 이야기 하는 '깊은 강'을 읽고서, 적어도 일본인들의 바라나시 사랑에는 이 책이 한 몫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일본인이라도 이 책을 읽고서 바라나시에 가고 싶었을 것이다. 


'구원'을 이야기하는 종교성 짙은 글이라, 처음에 너무 좋아 빨려들어가면서도 결국 뻔한 설교로 마무리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었다. 캐릭터 하나하나가 고통받는 이유에 대해서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 고통을 설마 신의 은총이란 거짓말 같은 것으로 다 해결해버리는 것은 아니겠지.하는 걱정. 책에는 4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죽으며 다시 환생하겠다 말한 아내를 찾아 인도로 온 이소베, 병에 걸려 정신없는 와중에 돌보지 못해 굶겨죽인 구관조를 가슴에 품은 누마다, 전쟁터에서 인육을 먹고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는 기구치, 대학시절 장난으로 유혹했던 찌질한 남자를 잊지 못하고 권태에서 허우적 대는 미쓰코. 가장 흥미로웠던 건 미쓰코의 이야기이다. 그저 놀려먹기 위해, 잠시간의 무료함을 잊기 위해 카톨릭 신자를 유혹하고 당신이 믿는 신이란 게 뭐냐고 놀리고 아무렇지 않게 차 버렸는데 그 뒤로 그녀는 참을 수 없는 삶의 권태에 부닥칠 때마다 그 답답하고 멍청했던 남자를 떠올리게 된다. 현대인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란 건 이런 것들이 아닐까 싶었다. 생사가 달린 사건사고라면 차라리 그에 매몰되어 살아지겠는데 부족한 것 없으면서도 마음이 허한 고통, 이유도 없고 답도 없이 생을 덮치는 권태라는 괴물. 


작가는 구원을 이야기한다. 구원이되, 내가 지금껏 본 구원과는 다른 구원. 물 같은 구원, 공기 같은 구원,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는 구원, 시나브로 스며드는 구원. 신을 믿지는 않지만 이런 종류의 구원은 충분히 존중의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읽어나갈 수 있었다.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지만 최소한 진짜를 향한 작가의 마음이 책에서 느껴져서, 그래서 그게 너무 좋았다. 그리고 그래서 가슴이 아팠다. 


가트 근처의 길에는 오늘도 아이들 외에 손가락을 죄다 잃은 문둥병 환자들이 늘어서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손가락 없는 그 손과,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천으로 짓무른 피부를 감춘 남녀가 누마다와 미쓰코에게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냈다. 


"똑같은 사람인데." 


참다못한 누마다가 울먹이다시피 말했다. 


"이 사람들도....똑같은 인간인데."


미쓰코는 응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관광객인 우리가 무얼 해 줄 수 있겠는가 하는 목소리가 마음 깊숙이 들려온다. 산조나 누마다 같은 값싼 동정은 미쓰코를 안절부절못하게 한다. 사랑의 흉내 짓은 더 이상 원치 않았다. 진정한 사랑만을 원했다.

 

사랑의 흉내 짓은 더 이상 원치 않는다는 절규같은 저 마음가짐이 책에서 읽힌다. 그리고 죽음을 앞둔 대가는 자신이 평생 천착했던 구원이란 주제에 대해 보이지 않게 써내려 간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그 여운이 아주 오래 갔다. 사진과 그럴듯한 말 몇 줄로 쉬운 감수성 자극하는 책 말고, 가슴이 아파서 갠지스 강을 찾고 싶단 생각을 하게 만든는 이런 책을 가진 일본 국민들이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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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8-13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년 봄에 네팔에 갔을 때 카트만두 시내에 있는 스와얌부나트를 들른 적이 있었답니다. 그 때 사원에서 한참이나 머물며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바라나시'를 향해 곧장 발걸음을 옮기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주체하기 힘들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네팔 사람들만 하더라도 인도와 이웃하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내세'에 대한 엄청난 확신 때문에, 이승에서의 삶이 아무리 비참하고 괴롭더라도 '환생 이후의 또다른 삶'을 위해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혹은 그리 큰 희망도 품지 않고) 아무런 불만없이 그저 주어진 삶을 '행복하게' 사는 듯한 모습들을 보고 정말 많이 놀랐었답니다.

카트만두 시내에도 조그만 강가에 화장터(파슈파티나트, Pahupatinath)가 있었는데,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거길 가보지 못한 게 지금도 아쉽네요. 언젠가는 비행기 위애서 내려다 보기만 했던 그 거대한 갠지스 강과 바라니시를 가 볼 날이 있겠지요. 바람과 구름과 강물처럼 자연스러운 구원 얘기는 참으로 억지스럽지 않아서 더욱 절실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 같아요.

LAYLA 2013-08-20 10:53   좋아요 0 | URL
세계인구 기준으로 힌두교 신자가 기독교 신자보다 많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어요.

카트만두에도 화장터가 있군요? 네팔은 가보지 못했는데 전 거꾸로 다음엔 네팔에 가보고 싶네요. 바라나시는 인도에서도 제가 가본 곳 중 가장 더러운 도시입니다. 더러움과 성스러움이 공존하는, 그래서 참 호불호가 갈리는 곳이지요. 저는 개인적으론 별로 였는데 그래도 어쩔수 없는, 제 불호에도 불구하고 이미 하나의 아이콘으로 잡은 장소라 엔도 슈샤쿠를 읽으며 이런 식으로 기억을 곱씹어 보게 되네요 ^^

라로 2021-04-02 0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이 옛날에 읽으셨군요!! 레일라님이 읽었는데 내가 왜 자랑스럽지? ㅎㅎㅎ

LAYLA 2021-04-03 21:33   좋아요 0 | URL
라로님~! 요즈에 읽으세요? 저는 좋아서 두번 읽었어요^^
 
하늘과 땅 - 산도르 마라이 산문집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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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사람들

나는 무익한 것도 느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 과감하게 무익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만을 존중한다. 우리는 모두 지나치게 목표 지향적이다..... 아주 유능하다. 나는 용기있게 '나' 또는 '아름답고 무정한 권태여, 나는 너를 사랑한다' 같은 말들을 생각하는 사람들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현실적인 가능성과 관련하여...'라는 말로 하루를 시작하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 것처럼 구는 사람들은 절대로 높이 사지 않는다. -11쪽

운명

사람들은 언제나 운명이 번개와 번득이는 불꽃, 티파니와 북, 트럼펫을 거느리고 천둥처럼 요란하게 들이닥친다고 믿는다. 그러다 어느 날 운명에 부딪히면 그 매너가 훨씬 더 섬세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폐암, 빈곤, 굴욕, 아니면 치명적인 사랑이 살며시 나타나 문을 두드리고는 정중하게 허락을 청한다.

"들어가도 될까요?"

그러고 나서야 들어온다. -63쪽

연민

동물들은 연민을 안다. 그것은 원시적인 연민, 더듬거리는 외마디 연민이다. 내가 어쩌다 삶이나 문학 논쟁에서 한 방 먹거나 아픈 곳을 찔리면 개는 정확하게 내 상처를 안다. 개는 다가와서 내 무릎에 머리를 올려놓고, 다 안다는 듯이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며 말없이 슬기롭게 위로한다. "기운을 내, 곧 다시 좋아질 거야." 개는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결코 좋아질 리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동물의 연민은 고매하고 용감하다. 그들은 위로하는 게 아니라 확인할 뿐이다. 이런 객관성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편안하게 한다.-77쪽

당장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
이십 년 전부터 구상해온 소설을 드디어 쓰자. 그동안 나는 이 과제를 미루려고 수십 권의 다른 책을 썼다. 또 중국과 그린랜드로 여행을 하고, 가족을 일구어 적어도 아이를 셋은 낳고, 이따금 로빈슨과 카사노바처럼 자유로운 삶을 구가하고, 인간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확실한 것을 알려주는 삼사천권의 책을 읽고, 독립하기 위해서 돈을 벌고, 더 독립적이 되기 위해서 모든 물질적인 욕구를 포기하고, 죽음과 친근해지고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이제 이런 일들을 더 미루지 말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 이런 것들을 성취하지 못하거나 소유하지 못한 삶은 덧없고 의미없다. 이 모든 것은 내 의무이고, 또 당장 나한테 필요한 일이다. 인간은 죽음이 가까이 오면, 출발 오 분 전에야 짐을 꾸리지 않은 것을 알아차린 여행자처럼 허둥지둥 서두르기 시작한다. 그러니 자, 지금 시작하자. 당장, 우리 삶을 꾸리자. -84쪽

절대로 가격을 흥정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삶.-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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