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 시대 열린책들 세계문학 77
이디스 워튼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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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 뉴욕 사교계의 성원으로 자라난 뉴랜드 아처는 자신의 삶에 불만을 품지 않고 당시의 시대가 요구하는 바람직한 여성상-자신과 어울리는 가문 출신에 순수함을 미덕으로 여기는 당시의 풍조에 순응하여 언제고 남편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는- 부합하는 메이 웰렌드와 약혼한다. 하지만 유럽의 부유한 귀족과 결혼하여 백작부인의 지위를 얻고 호화롭게 산다고 알려졌던 메이의 사촌언니 엘렌이 방탕한 남편을 떠나 뉴욕으로 돌아오자 뉴랜드 아처는 답답하고 고루한 뉴욕식 예법을 따르지 않는 그녀의 자유로움에 끌리게 된다. 

 

소설은 엘렌과 메이, 뉴랜드 아처 세 사람이 삼각관계 속에서 각자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 그 사이의 은밀한 긴장을 그린다. 과연 뉴랜드 아처가 허위로 가득찬 자신의 삶을 청산하고 자유를 상징하는 엘렌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것인지, 아니면 기존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하고 평생 진솔한 대화 따위는 기대할 수 없는 메이와 주저앉을 것인지 독자들은 마지막까지 궁금해하며 책장을 넘기게 된다.

 

밤이면 드레스 자락을 끌며 마차를 타고 오페라 극장으로 나가 박스석을 채우던 뉴욕 상류층의 이야기는 마치 꿈만 같아 예뻐보이기만 하는데 이디스 워튼은 그 뒤의 위선과 가식을 이지적인 문체로 차분히 그려낸다. 서사는 지금의 시각으로 보자면 다소 진부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지만 이디스 워튼은 뛰어난 필력으로 그런 진부함을 모두 씻어내고 오히려 그런 진부함을 발판으로 고전의 반열에 오를 작품을 써낸다. 그녀가 그 시대에 여성으로서 만년 57세에 이 작품을 썼다는 점을 생각하면 대단한 작가라는 평을 넘어 존경의 마음까지 솟아난다. 

 

작품의 여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엘렌은 뉴욕과 유럽을 오가며 자란 것, 당시의 구습에 의문을 가지고 반기를 든 점 등에서 이디스 워튼의 개인적 경험이 상당히 투영된 캐릭터라고 생각된다. 재능있고 아름다운 그녀에게 추근대며 들이댄 남자들이 어디 한 둘이었을까. 지루하고 멍청한 남자들에게 진절머리를 내며, 그래, 게 중에 용서가능한 수준의 남자 하나 있었다면 이런 모습 아니였을까 하고 이디스 워튼이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뉴랜드 아처를 그려낸 것 같다. 왕자님 같은 캐릭터가 아니다. '용서 가능한' 수준일 뿐이기에 엘렌의 자유로움을 사랑하는 그의 모습을 본 독자인 나의 반응이란 '좋은 건 알아가지고...'  


인류사에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 중 하나가 바로 아무리 똑똑한 여자라도 멍청한 남자의 사랑 앞에 굴복한다는 점 아니겠는가. 보통 워튼의 새드엔딩에 대해 현실적이라는 평을 많이 하는데 나는 이 두사람의 러브라인이야 말로 현실성의 정점이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워튼 여사는 그런 현실의 단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문학적 품위를 잃지 않고 정말로 아름다운 소설을 완성한다. 몇 년에 한번씩 두고 두고 읽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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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4-07-25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당장 찾아서 읽어야지,,,라고 만드시는 레일라니!!!^^

LAYLA 2014-07-29 12:52   좋아요 0 | URL
아롬님은 원서로 읽으시겠죠? 저도 언젠가는 원서로도 도전해보고 싶어요. ^^
 
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한성례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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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쓰기에 관한 그만의 철학을 담은 수필집을 먼저 읽고서 그래, 자세와 결기는 너무나 대단한데 그 결과물인 소설은 과연 어떤가 싶어서 읽은 책이다. 읽어본 간략한 소감이라면 그의 소설보다 수필집이 더 잘 팔리는데는 이유가 있구나 싶었다. 


개인적 취향의 문제가 물론 가장 클 것이다. 누구는 이 짧은 문장들이 아름답고 시적이라 하고 또 누구는 치밀하고 날카롭다고 하지만, 소설에서 서사구조를 가장 중요시하는-다시 말하자면 우선 재미있고 봐야 하는-나 같은 독자에겐 문장이고 뭐고 중편의 길이도 길게 느껴질 정도로 지루하였다. 그나마 첫번째 중편 '달에 울다'는 괜찮은 편이었다만 두번째 중편 '조롱을 높이 매달고'는 진짜 언제 끝나나 싶어 시간 죽이는 기분으로 책장을 넘겼다. 


또 한가지 맘에 들지 않았던 점은 그의 주인공들이 니나 내나 다 어슷비슷한 캐릭터라는 점인데 이건 그가 한 수필에서 자신은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며 삶을 마주하는 사람만을 주인공으로 택할 뿐, 게으름쟁이들은 소설의 주인공으로 그릴 만한 가치도 없다는 식으로 그만의 소설론으로 설파한 적이 있어 캐릭터들의 유사성 자체는 그리 당혹스러운 부분은 아니었다. 문제는 사실 그 주인공 캐릭터들이 본질적으로는 마루야마 겐지의 자아가 확장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 한 자가복제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그가 자신의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서 비슷비슷한 캐릭터를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자아가 너무 강한 탓에 그리는 캐릭터가 어느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에세이에서 그가 너무도 비장하게 소설론을 펼친 탓에 그의 캐릭터들이 모두 유년기의 여자를 잊지 못하고 남은 생 내내 그 여자의 흔적을 삶 한구석에 묻히고 살아가는 모습은 오히려 좀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하였다. 그렇게까지 지키려고 하였던, 소설로 그리고자 하였던 모습은 저런 남성들의 판타지에서 나아가지 못한 것인가? 하는.


그의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인기있는 이유도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큰 목소리로 떠들고 싶은 것이 마루야마 겐지란 사람 개인의 자아 그 뿐이라면 독자입장에선 알쏭달쏭 추상적인 소설보다는 직구 에세이가 더 쉽지 않겠는가. 물론 소설은 그의 문장이 취향이 맞는 사람에겐 아주 예쁘다는 이점이 있다. 에세이는 대중에게 고루 먹힌다는 이점이 있다.


어마어마한 문학상을 받고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으니 물론 대단한 사람이고 대단한 글이겠지만 지금으로선 이 이상의 평을 하지 못하겠다. 독자란 참 쉽다. 속세와 등지고 소설만을 위해 자식도 낳지 않고 평생 수도하듯 산다는 작가의 글을 이리 쉽게 평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작가가 평생 케이크만 먹고 오페라와 발레만 보며 향락하며 살더라도 우선 글이 재미있고 독자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것이 소설가의 자세를 다지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 않겠냐는 것이 바로 이 이기적인 독자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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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한성례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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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구는 똑똑한 개다.
우리가 껴안고 있는 동안, 조금 떨어진 곳에서 주위를 살피고 있다. 그러나 야에코가 너무 큰 소리를 내거나 하면, 살며시 다가와 내 발바닥을 핥기도 한다. 내가 웃으면 야에코도 웃는다. 우리 웃음소리는 위로는 달까지, 아래로는 깊이 흐르는 수맥까지 닿는다.

야에코 위로 폭염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그 위에는 타서 눌은 하늘이 있고, 조금 더 위에는 타다 문드러진 태양이 눌어붙어 있다.

맞선 보는 자리에서 나는 직설적으로 물어보았다. 도시 아가씨가 농사꾼 집에 시집오기 쉽지 않은데, 무슨 깊은 사유라도 있나요? 그러자 그녀는 사과를 재배하면서 사는 것이 어렸을 때부터 꿈이라고 대답했다.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 여자는 아무 것도 모른다.

사과 농사가 어떤 것인지 모른다. 이런 마을의 인간관계라든가 들일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른다. 만일 그 여자가 이 모든 걸 알고도 결정했다면, 그녀가 살아온 28년은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나을 만한 사연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나는 야에코에게 단지 최초의 남자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와 생각하면 그렇다. 그녀의 네 번째 사내까지는 안다. 그러나 그 뒤에 어디의 누구하고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우연히 알게 된다 해도 밤에 잠 못 이룰 정도로 화가 나지는 않는다. 나는 변했다. 내가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마음이 놓인다.

사람들은 잘 때마다 쇠약해진다.
그들은 매일 실컷 먹고 마시는데도, 오히려 살아갈 힘을 잃어간다.

친구를 멀리 하고 직장 동료나 아는 사람들과 모두 거리를 두고, 자신을 고립된 상태로 둘 것. 예술을 한다는 것은 혼의 문제와 접하는 것이므로 행복과 안정에 가까워지면 그만큼 거기서 멀어진다. 진실로 문학을 목표로 한다면, 고독을 향해 고독을 누르고 고독을 초월하라. 자신 이외의 곳에서 힘을 구하려 하지 마라. 불안, 분노, 고독감, 슬픔을 돌진해나가면 손대지 않은 문학의 금광이 펼쳐지고, 밟지 않은 봉우리들이 솟아 있다. 자폐가 아닌, 앞을 향한 '개인'. 앞을 향한 '활'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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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4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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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할 권리가 없는 인간에게 존재할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실업가들의 자비에 힘입은 바 크다. 비생산적인 말을 늘어놓는 학자나 축음기나 다름없이 항상 같은 말만 늘어놓는 교사가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돈은 어디서 오는가? 수억의 돈을 자유자재로 만들어내는 실업가들이 내놓는 티끌 같은 돈 부스러기로 연명해가는 사람이 바로 학자다. 문학자다. 교사이기도 하다.

돈의 힘으로 살아가면서 돈을 비방하는 것은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욕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나카노 군은 부유한 명문가에서 태어나 따뜻한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세상의 온갖 비바람은 그저 고타쓰에 앉아서 유리문 너머로 바라본 풍경에 불과하다. 유젠의 무늬도 알고 있다. 금병풍의 선명한 색깔도 알고 있다. 은촛대의 반짝거림도 마찬가지로 친근하다. 살아 있는 여인의 아름다움은 더욱 그의 눈에 잘 들어온다. 부모의 은혜, 형제 사이의 정, 벗에 대한 믿음, 이런 것들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꽉 막힌 사람은 물론 아니다. 다만 그가 살고 있는 반쪽 세상에는 지금까지 언제라도 밝은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햇살이 비치는 반쪽 세상에 살던 사람이 한쪽 발로 땅을 밟으며 이 발아래에 나머지 어두운 반쪽 세상이 있다고 깨닫는 것은 지리학을 배울 때뿐이다. 걸어 다니면서 우연히 깨달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 어두울 거라고 느끼고 진정으로 오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구애받는 것은 고통이다.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통 그 자체는 피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그러나 구애받는 것의 고통은 하루에 끝날 고통을 5일, 7일로 연장하는 고통이다. 불필요한 고통이다. 피하지 않으면 안된다.

같은 학교의 졸업생이기 때문에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교육의 형식이 비슷한 것을 교육의 실체기 비슷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같은 대학의 졸업생이 동일한 수준이라면 대학의 졸업생은 죄다 후세에 이름을 남기든지 아니면 죄다 사라져야 하는 것이지요. 자신만이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자 기를 쓴다면 설령 같은 학교 졸업생이나 그 밖의 사람들은 후세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다고 가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미 그런 가정을 하고 있다면 자신과 다른 사람은 같은 학사라고 해도 크게 차이가 난다고 스스로 인정한 것이 아닙니까? 크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자부하면서 다른 사람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번민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난 이름처럼 미덥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만족을 얻으려고 세상을 위해 일하는 것뿐입니다. 그 결과가 악명이 되든, 오명이 되든, 아니면 광기가 되든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이렇게 일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것이 바로 내가 걸어야 하는 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인간에겐 자신의 길을 따라가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인간은 길의 동물이기 때문에 길을 좇는 것이 가장 존엄하다 생각합니다. 길을 좇는 사람은 신 역시 피해야 합니다. 이와사키의 담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지요. 하하하하

이상은 혼입니다. 혼은 형태가 없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인간의 혼이 행위에서 발현하는 것을 어렴풋하게 보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아쉽게도 현대 청년들은 이것을 보지 못합니다. 이걸 과거에서 찾아도 없고, 현대에서 찾으려 하면 더더욱 없습니다. 여러분은 가정에서 부모를 이상으로 삼을 수 있습니까? 학교에서 교사를 이상으로 삼을 수 있습니까? 사회에서 신사를 이상으로 삼을 수 있습니까? 사실상 여러분은 이상을 갖고 있지 않아요. 집에서는 부모를 경멸하고, 학교에서는 교사를 경멸하고, 사회에 나와서는 신사를 경멸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경멸하는 것은 식견입니다. 그러나 이들을 경멸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원대한 이상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에게 아무런 이상도 없이 다른 사람을 경멸하는 것은 타락입니다. 현대의 청년은 도도하게 날로 타락하고 있습니다.

이상이 있는 사람은 걸어가야만 하는 길을 알고 있습니다. 원대한 이상이 있는 사람은 큰길을 걸어요.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과는 달라요. 어떤 일이 있어도 이 길을 걸어냅니다. 방황하고 싶어도 방황할 수 없습니다. 혼이 이쪽, 이쪽 하고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성공을 목적으로 인생이라는 길에 서 있는 사람은 이미 사기꾼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는 일 그 자체에 따라 전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단순히 여러분의 이름을 통해 전하려고 하는 것은 경박한 짓 입니다.

학문, 즉 사물의 이치를 이해하는 것과 생활의 자유, 즉 돈이 있다는 것은 서로 독립해 있어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학자이기 때문에 돈이 없는 것입니다. 돈을 벌기 때문에 학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학자는 돈이 없는 대신에 사물의 이치를 이해하고, 상인은 그런 이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대가로 돈을 법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돈이 있는 곳에 이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오해하고 있어요. 저 사람은 부자고 세상 사람들이 존경하니 이치 또한 분명 알고 있을 것이고, 문화 역시 제대로 즐기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문화를 즐길 여유가 없기 때문에 돈을 벌 시간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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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4-07-08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부분에 밑줄긋기를 했네요. ㅎㅎ 이 책 정말 좋았어요!

LAYLA 2014-07-10 13:38   좋아요 0 | URL
다 좋죠
소세키느님
ㅠㅠ

transient-guest 2014-07-09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못본 소세키 책이네요. 아직까지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가장 최고로 꼽네요.

LAYLA 2014-07-10 13:38   좋아요 0 | URL
전 아직도 '그 후'가 최고이고 그걸 넘어설 작품은 없을거 같아요
고양이로소이다도 좋긴 한데
소세키는 좀 우울해야 제맛(?)인거 같기도 하구요
 
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5월
품절


무릇 젊음이란 육체와 정신의 허세이며, 혹은 그 반대로 세상물정 모르고 벌여놓은 일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미숙함의 상징이 아닌가.-12쪽

자신의 마음을 질책하고 싶을 때는 육체를 질책하는 길이 최상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정리된다. -20쪽

재능 있는 감독이 비참한 입장에 몰리자 반권력적인 포즈를 취하며 당사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조자한 사상 영화를 만들었고, 그런 것들은 이미 영화라고도 할 수 없는 엉터리였다. 대형 영화사를 뛰쳐나오면서까지 만들어야 할 작품이 결코 아닌데도 그들은 그 작품의 광고를 위한 문구가 훨씬 멋지게 느껴질 정도로 구질구질한 영화를 세상에 내놓아 비난을 면치 못했다. 그리하여 지금은 텔레비전의 안방용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해 눈물을 머금거나 저널리즘적 사회정의에 영합하여 먹고살고 있는 것을 보면 내 청춘 시절의 추억이 한층 씁쓸해진다. -101쪽

첫 단편을 쓰기 전에 나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목표로 하는 이미지의 7,80퍼센트에 육박하는 작품은 열두 편 중에 고작해야 두 세 편 정도일 것이라고. 즉 네 편에 한 편꼴로 그런 대로 쓸 만한 작품이 나오면 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세 편만 쓰면 되지 않느냐고들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렇게는 안 된다. 그 서녀편을 써내기 위해 나머지 여덟, 아홉 편이 필요하다는 것을 요즘에야 깨달았다. -111쪽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줄줄이 엮어내려다 끝내 한 줄도 쓰지 못한 시기가 있었다. 잠자코 기다리다 보면 무슨 수가 생길 것이라고 믿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이거다 싶은 테마가 떠오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정작 펜을 쥐고 쓰기 시작하면 뜻한 바의 문장이 나오지 않아 도중에 펜을 던져버리는 일이 많았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끊임없이 쓰는 일이 납득할 수 있는 작품을 탄생시키는 지름길이었다. 다른 길은 없는 듯했다. 그러니 일단 쓴 작품은 좋건 나쁘건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현명한 처사였다. -111쪽

일류 고등학교와 일류 대학교를 졸업해본들 그 앞에 어떤 나날이 기다리고 있겠는가. 심심하면 "학생 시절이 그나마 제일 좋았어"란 말을 뱉어내는 샐러리맨 신세가 고작 아닌가.

샐러리맨은 상부에서 떨어지는 명령 때문에 개인적으로 아주 중대한 일마저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지나치게 많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전근 명령을 받았다. 새로 이사한 고장은 실로 한심한 곳이었다. 어린 내가 화가 치밀 정도였다. 자기 마음에 드는 장소에서 살 수도 없다니, 이거야 너무 굴욕적인 입장이지 않은가 싶었다. -144쪽

젊은 사람이결론을 ㄴ린다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이다. 기껏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봐야 학교 공부 정도가 아닌가 학교에서 몇 년 공부한 정도로, 만족할 만한 대답이 안 나온다고 해서 왜 인생의 전부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인가. 그런 일은 길고 긴 인생에 있어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에 손에 넣지 못하면 끝장이라고 생각할 만한 것이 과연 있을 까. 그것을 잃으면 끝장이라고 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이 과연 있을까. 있다. 그것도 하나나 둘도 아니라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하나나 둘을 잃었다고 해서, 손에 넣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뭐 그리 대수로운가. -156쪽

신슈에 낚시를 하러 오는 사람들은 무슨 이유인지 유료 낚시터에 가고 싶어한다. 그러고는 낚시터가 복잡하면 오늘은 운이 없다는 둥 투덜대면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돌아간다. 왜 낚시터가 복잡하다고 포기해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낚시터 바로 옆에 진짜 곤들매기와 산천어가 어슬렁 헤엄쳐다니는 강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강 낚시가 훨씬 재미있는데도 말이다.

선생이나 부모가 열심히 가르치는 길이 유료 낚시터 같은 길이 아닐까. 그리고 젊은이들은 유료 낚시터에만 물고기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157쪽

물론 부모나 선생은 자기 자식이나 제자가 안정된 길을 걸어주기를 바란다. 그러고는 입을 모아 '성실이 제일'이라고 떠들어댄다. 절대로 도산하지 않을 대기업이나 관공서에 ㅇ비사하여 아무튼 성실하게몇십 년 일하면 퇴직금도 받고 연금도 받을 수 있다는 논리다.

과연 그런 삶만이 성실한 것일까. 그것만 가지고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바랐던 안정의 결과가 주위의 눈치만 살피고 하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일도 제대로 못 하게 되어 점차 인간미를 잃어가는 것이라면 어쩔 것인가.

다시 한번 선생의 눈을 보라. 다시 한번 부모의 눈을 보라. 입으로는 거창한 말을 줄줄 내뱉으면서도, 그 표정이라니, 도대체 무언가. 왜 활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인가.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이 그런 표정의 인간이 되는 것을 뜻하는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확실한 보장이라도 있다면, 이번 인생은 이 정도로 해두고 두번째 세번째 인생을 마음껏 누리자고 느긋한 태도를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란 한 사람에게 한 번밖에 없는 것이다. -159쪽

상사의 통신과에서 텔렉스 오퍼레이터로 일하던 시절의 나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어떤 회사 조직이든 그 안에 속해 있는 사람은 삶의 보람이 어쩌니저쩌니 해보아야 결국은 허망한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서 일한다는 점에서 서로가 아무 다를 바 없는 비참한 존재들이다. -172쪽

내가 소설을 쓰게 된 동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결국 어느 것 하나 명확하지 않다. 전직, 돈의 필요성, 자유에 대한 동경, 어느 것 하나 틀리지는 않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듯하다. 그런 이유만으로 그만한 정열을 기울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신이 들렸다든가, 무슨 계시가 있었다든가 하는 말은 너무 거창해서 꺼내기가 부끄럽지만, 당시 내 안에 싹트기 시작한 강렬한 힘은 그런 식으로 펴현하지 않으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청춘의 힘이란 그렇게 감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먼 훗날 생각해도 믿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소하더라도 어떤 목적이 생겼을 때, 거기에 끝없이 힘을 쏟아부을 수 있으며, 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것. 그것이 청춘의 힘이며 동시에 청춘의 위험한 일면인지도 모르겠다. -192쪽

어느 쪽이 타당한 것인지는 나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나 자신을 거역하며 살고 싶었다. 자연 그대로 살고 싶다든가, 자신을 속이지 ㅇ낳고 살고 싶다는 희망은, 늙어 더이상 움직일 수 없는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나 매달릴 법한 말이었다. -220쪽

이십대는 친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시절로 보인다. 이십대란, 혼자서 많은 일을 해내기 위한 힘을 체득해야 하는 귀중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득도 해도 안 되는 어중간한 친구를 잔뜩 갖고 있어봐야, 그저 외로움이나 달랠 수 있을 뿐이다. 지리멸렬한 만남을 거듭한다면 자립과 독립으로부터 멀어지고 말 따름이다. -236쪽

무슨 일을 시작하든 우선 고독이라는 강을 건너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강을 건너기 이전에 토해낸 언어는 모두 넋두리이거나 주절거림일 따름이다. 그 강을 건너지 않고 제아무리 거창한 말을 입에 담는다 해도, 무슨 대단한 짓거리를 한다 해도 그것은 결국은 어린애 장난이다. 그 강을 건너면서,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싫다는 가치 평가를 내려선 안 된다. 싫어도 건너야만 한다. 건너편 강기슭을 노려보면서 단숨에 몸을 날리는 수밖에 ㅇ벗다. 그 다음은 강물 속에서 온몸으로 몸부림치면 된다. 그 몸짓은 실로 멋대가리 없다. 강기슭에서 바라보는 인간들은 조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그냥 웃게 내버려둬라. 건너편 기슭에 도달하고 나서 그들에게 웃음으로 되돌려주면 된다.

청춘이란 달콤한 향기에 취해 천국같은 나날을 보내는 젊은이들도 많다. 그들이라고 전혀 고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강을 건너려 하지 않는다. 가능하면 평생 건너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건너지 않으면 불필요한 고뇌가 항상 따라다닌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고뇌의 횟수와 내용은 오히려 나날이 불어난다. -250쪽

젊음에 부여된 그칠 줄 모르는 체력과 한결같은 기력은 놀기에 전념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강을 끝까지 건너라고 있는 것이다.

언제든 그 강을 건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오산이다. 서른을 넘으면 절대로 건널 수 없다. 건너고 싶어도, 이미 체력이 따라오지 않는다. 그 다음은 변명할 말을 찾으며 늙어가든지, 아니면 얕은 개울물에 발이나 담그고 빠진 척하며 즐기는 도리밖에 없다. -250쪽

...그들은 종종 "우리들은 영화를 사랑합니다"라고 말한다. "나에게서 영화를 빼놓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라고도 말한다. 패기는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것은 영화 그 자체가 아니다. 영화만들기에 따라다니는 주변적인 것, 예컨대 대학교 기숙사나 축제 같은 들뜬 분위기에 빠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기야 이런 지적은 다른 세계에도 적용된다. 문학을 사랑해 마지 않는다고 하는 작자들이 문학을 썩게 하고, 나라를 사랑해 마지않는 자들이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다. -259쪽

흔히 역작이라고 불리는, 몇 년 동안이나 질질 늘여 쓴 연재소설이나, 도중에 다른 소설을 쓰면서 느긋하게 쓴 장편소설을 읽다 보면, 여기저기 균형을 잃은 톤 때문에 작품의 질까지 추락하고 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러한 불균형이 오히려 바람직한 효과를 빚었다는 예는 거의 없다.

인간의 마음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주변의 사소한 변화에도 영향을 받는다. 날씨의 맑고 궂음, 바람의 세고 약함 등에 흔들리며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엉뚱한 행동을 저지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소설가에게는 그런 변화가 문장으로 바로 드러난다. 하루나 이틀 정도라면 몰라도, 칠 개월 동안이나 일관된 정신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읽는 쪽에서는 대여섯 시간이면 삼백매짜리 소설을 독파한다.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일관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독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 소설을 접하고 있는 대여섯 시간이지, 작가가 칠 개월 동안 들인 공력은 애당초 상관없는 일이다. -271쪽

내뱉는 말은 차원이 높은데 그들이 쓰는 글은 한심하리만큼 차원이 낮은,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294쪽

글 솜씨를 유지하고, 그 이상으로 향상시키려면 매일 연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좀 숙달됐다 싶어 연습을 게을리 하면, 금방 둔해집니다. 머리는 이전과 동일한 속도로 치는데, 손가락이 따라와주지 않는 것이죠.

안목은 쇠퇴하지 않기 때문에 타인의 소설을 읽고 이러니저러니 비평은 할 수 있어요. 눈이 제 구실을 하고 있으니 손에 별 이상이 없을 것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이제 실컷 놀면서 충전을 했으니, 이쯤에서 소설을 해볼까 하고 생각하고 막상 펜을 쥐고 써보지만 한심한 문장밖에 안 나와요. 안목이 그대로 있으니까 자기 자신의 글이 얼마나 한심한지는 압니다. 아니까 당황하죠. 아연실색합니다. 하지만 자존심이 방해를 합니다. 결국 초보자와 같은 스타트 라인에 설 수가 없습니다. -295쪽

세상 사람들은 소설가의 재능에 대해서, 가령 보통 사람들이 열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나 둘쯤 더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일쑤인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언급하는 것이지만, 소설가는 오히려 하나나 둘쯔 결여되어 있기가 십상이죠. 성격적으로 불완전한 사람이란 이야기죠. 그 불완전함이 즉 소설을 쓰게 하는 힘인데 정도 차이는 있겠지요. 어중간하면 연애소설을 쓰는 작가가 될 것이고, 설사 정신의 깊은 계곡으로 내려가거나 높은 산으로 올라가는 시도를 하더라도 안이하게 자살이란 결론을 얻는 것으로 끝나겠죠. -314쪽

창조적인 일을 하고 조금이나마 나은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려 한다면, 단조롭고 평범한 나날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방탕한 생활 속에서 빼어난 작품이 튀어나온다는 식의 신화를 믿는 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 바보다. -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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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04-13 0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있는 작가라서 인용글 찬찬히 읽어보았는데 공감이 가는군요. '소설가' 자리에, 되고 싶은 어떤 것을 넣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책 읽어봐야겠어요.

LAYLA 2014-04-14 19:54   좋아요 0 | URL
요즘 이 작가 에세이가 대중의 관심을 받는것 같더라구요. 이렇게 소설가로서의 각오가 대단한데 에세이로 주목받는다는 게 좀 아이러니하긴 하죠..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