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5 - 사과와 링고
이희주 외 지음 / 북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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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여주길 바라고, 재워주길 바라고, 이유 없이 사랑 받고 싶어 한다. 다만 그럴 팔자와 아닌 팔자가 있는 거다. - P16

이런 일련의 일을 통해 그녀는 친절과 선의가 완성되는 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음을 배웠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친절과 선의는 있는 그대로 주고 있는 그대로 받을 수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만 유효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오염되고 변질되고 공중분해되면서 자신 혹은 상대를 다치게 만드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누구나 쉽게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취약했고 위험했고 다르기 까다로웠다. - P227

그녀는 오래되어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는 옛 여행지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자신도 그 낯선 곳들에 자신의 일부를 남기고 오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그렇다 해도 이젠 모두 사라져버렸을 것 같았다. 그건 그녀가 시간을 감각하는 방식이었다. 그녀에게 시간은 모든 걸 흔적도 없이 지우는 무언가에 가까웠다. 그 순간, 그녀는 무심코 거울을 보았고 약간 놀랐다. 그동안 자신에게서 사라져버린 것들이 한꺼번에 자각되는 기분이었고, 자신의 얼굴이 이상할 정도로 낯설었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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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짐승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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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파트에는 거울이 없다. 거울이 있다면 얼굴을 비춰보면서 주름살을 세고 그렇게 나이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오십 년 전이나 사십 년 전, 아니면 육십 년 전 그때는 가을이었다. 그것은 정확하게 알 고 있다. 내 생애의 에피소드에 또 다른 에피소드를 추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그때 나는 거울을 모두 깨뜨려버렸다. - P10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잊고 싶은 것을 기억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왜 많은 사람들이 체험할 가치조차 없었던 사소한 사건들을 기억 속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는 마치 사용된 인생의 증거로서 쓸모가 있다는 듯 백 번도 넘게 다시 그것을 뒤져 보여주는 것인지도 이해할 수 없다. 내 인생에는 잊히지 않아야 할 것들이 많지 않았다. 간직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만 모으면 내 인생은 상당히 짧은 인생이 되었다. - P15

사랑은 바이러스처럼 침입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 틀어박혀 조용히 머물러 있다가 어느 날엔가 우리가 충분히 저항력이 떨어지고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 그때 불치의 병이 되어 터져 나온다. - P24

독단조차도 지속적으로는 제대로 교육받은 지성이 필요하다. - P35

가끔 나는 베를린 장벽도 프란츠가 마침내 나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무너졌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놓쳐서 아쉬운 모든 것에 대해 위로받기 위해 매일 아침 브라키오사우루스 앞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면, 내 인생이 덜 불행하게 흘러갔다면, 그래서 브라키오사우루스 아래의 그 자리가 동시에 몬태나였고 뉴저지였고 매사추세츠 주 사우스해들리에 있는 플리니 무디의 정원이 되었던 일이없었다면, 그랬다면 프란츠가 그곳에서 나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 P43

전쟁이 없다면 남자들도 여자들과 똑같이 그저 인간일 것이다. 죽음에 대한 용기와 기사의 충성심같이 남자들의 것으로 간주되는 일정한 특성들이 오직 전쟁을 통해 규정되고 미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전쟁이 남자들을 말살시킴으로써 그들을 그렇게 소중한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남자들이 그렇게 끔찍한 행위들을 저질러도 여자들로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게 되었고 자신들에게 있어서 군인다운 특성들이 최고의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 P59

나는 자기 부모의 자손이라는 것을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을 많이 알지 못한다. 부모를 닮고 싶어 하는 사람은 더더욱 적다. 그와 반대로, 내가 알게 된 사람들 거의 모두가 부모와 닮아간다는 당연한 위협에 대해 기겁을 했다. - P60

청춘의 사랑은 단순히 젊은 시절에 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비교가 불가능한 것이다. 청춘의 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견주어 잴 수 있을 어떤 것도 아직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유일하게 그 사랑 자체를 위해서 존재한다. 그것은 아직 실망을 극복할 필요도 없고 이전의 행복을 능가하지 않아도 되고, 그 무엇도 반박하거나 수정하거나 대체하지 않아도 된다. - P75

노인은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감에 맞서 다양한 감정들을, 프란츠에 대한 자의 정열과는 조금도 관련이 없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다양한 감정들을 고안해낸다. 동물 사랑, 어린이 사랑, 자연 사랑, 일에 대한 사랑과 신에 대한 사랑, 인간애, 음악애호, 일반적인 예술애호....교화된 인간은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사랑한다. 그는 개를 사서 개를 사랑한다. 개가 죽으면 개를 새로 사서 그 개를 다시 사랑한다. 나에게는 그것이 쉬웠다. 프란츠를 만나기 전에 나는 그 영원한 브라키오사우루스를 사랑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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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죽고 난 뒤에 아침에 눈을 뜨면 불안해서 등 뒤에 소름이 돋았다. 오늘은 어떻게 살아야 하지. 사무실에 나가면 돈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직원들은 이건 어떻게 해야 하냐 저건 어떻게 해야 하냐 내 입을 바라보는데 나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한편 떼인 돈 또한 많았다. 사람들은 엄마아빠의 장례가 끝나기 무섭게 입장을 바꿨다. 늘 책을 보고 공부를 하고 지식이란 단단한 근거 위에서 판단을 내리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밤이면 이대로 눈을 뜨지 않기를 바라며 잠들었다. 그리고 눈이 떠지는 순간 공포로 온 몸이 차가워졌다. 의사는 항불안제를 처방해줬는데, 그래서 그 뒤로 나는 눈을 뜨자마자 먼저 약부터 삼키고 불안을 가라앉히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 뒤로 어떻게든 시간이 흘러가며 나는 내가 변할것임을 알았다. 나름 똑똑하고 메타인지가 있는 사람이니까. 시간은 나를 살려주겠지만 동시에 나를 돌아버리게 만들겠지. 사람들에 대한 실망과 분노, 소송이 주는 압박감,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을 수소문하고 두드리는 절박감과 초조함. 아무리 숫자를 맞춰도 필요한 돈이 나오지 않을 때에는 카페에 앉아 눈물만 뚝뚝 흘리기도 했다. 사업장에 불이 났을 땐 불을 보러 나온 마을 주민들 앞에서 울면서 뒹굴었다. 제가 뭘 잘못했다고요. 제가 뭔 죄를 지었다고요. 연극 배우나 할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경매에 들어간다고 법원 문서를 받아보던 날 아침에는 쿵, 심장이 떨어지며 등 뒤 뿐만 아니라 두피까지 삐죽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지. 사실 나는 지난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순간순간 모든 기운과 지력을 닥친 일을 해결하는 데 사용한 나머지 기억을 저장할 여력은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과거를 떠올리면 막연한 고통만이 느껴질 뿐이다. 가슴이 쪼그라드는 것 같은 고통. 전화기를 붙잡고 변호사에게 매달리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 분주하고, 모르는 사람에게도 간절히 매달리고, 상대의 헛점을 찾기 위해 알지도 못하는 분야의 소송기록을 밤새도록 보고 또 보고. 어쨌든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고 기적같이 상황은 나아져갔다.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정말 운이라고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는. 아직도 나에게는 어마어마한 빚이 남아있지만 빚을 다 갚을 날을 고대한다는 점에서는 빚을 다 갚지 못하고 평생을 보낼 수 있다는 공포에 압도되었던 지난 날에 비하면 호사스런 처지이다.


작년 건강검진을 받으며 의사가 보호자가 같이 왔냐고 물었을때 아니라고 답했다. 보호자가 병원에 동행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냥 나에게는 보호자가 없는데. 어쨌든 당시의 소감이라면 놀라움이나 두려움, 서러움이 아니라 담담함이었다. 올 것이 왔구나 싶은 그런 심정. 보통의 사람이라면(예전의 나라면) 일 년에 한 두번 있을까 말까한 극도의 긴장, 큰 시험을 앞두었을 때나 하는 그런 강도의 긴장을 나는 매일 하며 살고 있고 그러니 암에 걸리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여러 추가검사 결과 나는 암은 아니었지만 신체의 여기저기에서 암으로 진행중인 비정상적인 조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대가 바뀌었네. 이젠 암이 되기도 전에 다 발견하다니. 나는 여전히 담담했고 아프면서 오래 살고 싶진 않다고 생각했고 내가 죽은 뒤 현실의 문제를 처리할 사람에게 당장 현금이 필요할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현금은 중요한 것이다. 


내가 언젠가는 돌아버릴거 같은데, 그 예언 또한 서서히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요즈음 느낀다. 냉소, 괴팍함, 예술에는 흥미가 떨어지고 어떤 책을 봐도 그다지 읽고 싶지가 않다. 글을 쓰고 싶지도 않고 써봐야 무언가 이상하다. 맞지 않는 블럭조각을 억지로 끼워 맞춘듯. 이 또한 그다지 슬프지 않다. 예정했던 일이 예정했던 시기에 일어나는 것처럼, 아 역시. 그렇구나 싶을 뿐. 그렇지만 올해의 김승옥 문학상 수상집이 나왔나 검색을 해보다 이제는 아는 이웃들이 모두 떠나가고 조용하고 텅 빈 서재브리핑을 보다가 옛 이웃들이 궁금하여 글을 써본다.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을. 예전에 내가 사용하던 비밀의 대나무숲 이곳에. 저는 아직 이렇게 살아있고 나의 이웃들도 모두 안녕하시길. 


*보시는 오랜 이웃님들이 계시다면 잘 지내시는지 댓글을 남겨주세요. 아마 이 글은 곧 비공개가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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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2025-10-17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LAYLA 님 네임을 보고 오래 전에 제 서재에 들리시고 댓글로 얘기 나눈 분인가 해서 확인해 보니 맞았습니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셔서 무슨 말을 쓸까 주저했습니다. 다만 쓰신 글을 보며 마음 아픔을 느꼈음을 적고 싶습니다. 알라딘 서재라는 허약한 공간에서 스치듯 글로 만났지만 그래도 어딘가에서 혼자 계실 때 LAYLA 님께 티끌같은 에너지라도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건강 잘 관리하시길 바랍니다.

2025-10-17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0-17 1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0-18 2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5 - 사과와 링고
이희주 외 지음 / 북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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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의 빈티지 엽서가 너무 좋아서 완독하자마자 다시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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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앰버슨가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0
부스 타킹턴 지음, 최민우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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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들은 A급의 고전이 되지 못했나 고찰하는 재미가 있는 휴머니스트 문학전집. 이번 책은 산업혁명기에 몰락한 가문을 다루고 있다. 책 소개를 보면 부잣집 아들이 자신의 어머니와 썸녀의 아버지가 젊은 시절 연인이었음을 알게 되며 갈등이 생긴다고 적혀있고, 그러니까 그 갈등과 막장 뒤에 몰락이 온다는 것일텐데. 도파민 터지게 하는 소재모음에 당장 책을 주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독서를 이어나가는 과정은 무척 느렸는데, 그러니까 사실 도파민이 그다지 싹 돌지 않았던 것.


A급 문학에서 몰락은 인간의 욕망으로 스스로 자초한 것이어야 한다. 돌이킬 수 없어야 하고 도망갈 수 없어야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인간의 몰락은 표면적으로는 부잣집 도련님의 오만함 때문인것처럼 그려지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몰락은 산업혁명기 시대의 변화 때문이다. 주인공과 주인공의 가문은 말에서 자동차로 빨리 갈아타지 않은 탓에 가세가 기울어간다. 


일론 머스크를 신으로 모시는 이들이 존재하는 21세기를 사는 사람으로서 이 책을 읽으며 흥미로웠던 건 주인공의 사랑이나 갈등이 아니라 이 책에서 그리는 시대였다. 정확히 150년쯤 전에 지금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고, 테슬라 주주들은 자신들이 포드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 같지만 과연 그럴지? 그리고 그 것이 이 책의 패착요인이었다. 어느 독자가 문학을 읽으며 이런 감상을 느끼고 싶겠는가?


몰락한 부잣집 아들의 바닥을 생생히 그려냄으로서 그 시대 독자들이 원하던 권선징악을 잘 구현한 것이 인기의 요인 아니었을까? 하지만 안타깝게 사람의 기대에 부응해서 그린 작품은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A급 고전은 되지 못한다는 그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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