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향거리
찬 쉐 지음, 문현선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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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 하면서도 그 창을 떠올리는 대신 잊어버려. 그래서 창에 먼지가 뽀얗게 쌓여 알아볼 수 없게 된다고. - P17

사람은 누구나 명확한 생활신조를 갖고 살아야 해. 한결같이 좇는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남한테 빌붙거나 남의 행동을 방해하는 건 부도덕하고 수치스러운 거야. 멍청하게 허송세월하다 늙으면 추억은 하나도 안 남고, 살아온 듯한 그림자만 남아. 후회할 거라고. 나는 평생 최고의 정신세계를 추구하며 물질적 기쁨을 모두 포기했어. 고난과 위험으로 가득한 길을 걷는다고. - P168

그러니까 이 세상은 선행을 좋아하는 사람들 때문에 엉망이 되는 거야. 그들은 자신의 값싼 동정심을전혀 아끼지 않거든. 누구를 만나든 위로하고 멋대로 격려해서, 그 안하무인의 무리가 벌을 받은 후에도 금방 일어나 원래 모습 그대로 자신들이 하던 일을 계속하게 돼. 비슷한 무리를 찾았다는 교만함에 자신감이 백배는 높아져 한층 더 심하게 굴기까지 하지. 우리가 평생 증오한 부류가 그렇게 선행을 즐기는 부류라고. - P212

그거 아나? 착각에 빠진 여자는 평범한 악당보다 파괴력이 훨씬 크고, 아무리 잔인한 일이라도 다 할 수 있어. - P235

불행하게도 세상 사람들은 너무 근시안적이고 삶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머리를 일깨우는 건 수탉한테 알을 낳으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이상과 포부를 가진 사람이 너무 적다는 사실을 통감합니다. 곳곳에 평범한 사람만 넘쳐나지요. 모든 사업이 중간에 가로채여져 미완성으로 끝나고 천재가 탄생하기도 전에 요절하며 앞날은 막막하기만 합니다. - P267

한 사람 일생의 운명을 결정하는 건 그 품성과 기질입니다. - P273

솔직히 말해서 엉덩이니, 가슴이니 하는 것은 핵심이 아니에요. 여자한테 제일 중요한 건 정신적 기질이니까. 기질이 없는 여자는 빈껍데기, 빛 좋은 개살구, 재떨이, 슬리퍼 같은 거예요. 외적 매력은 나이가 들면서 사라지지만 정신적 매력은 영원히 젊거든요. - 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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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이주혜 지음 / 창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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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숨을 토해내고 영원히 잠든 아버지의 육신은 무거웠다. 다시는 태어나지 마요. 그게 아버지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의 말이었다. - P29

자기야, 우리 장군이 심장 소리 좀 들어봐. 웅장웅장웅장, 이렇지 않아? 장군감 맞나봐. 앳된 임부가 옆에 선 남편의 손을 꼭 쥐고 달뜬 목소리로 말했을 때 정작 규의 귀에는 그 소리가 총성총성총성으로 들렸다. 부부가 뿜어내는 행복의 아우라가 규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아 자기도 모르게 밭은기침을 했다. - P49

번데기 한 뚝배기를 혼자 다 먹은 미예가 맥주잔을 시원하게 비우더니 벌게진 얼굴로 말했다. 참관수업 날 아이가 이름의 ‘태‘ 자를 ‘턔‘로 잘못 썼을 때 엄마들 사이에서 일렁이던 웃음이 자기에겐 비웃음으로 들렸다고.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조건이 나쁠 것 없는 아이가 공부에 소홀하면 그렇게 화가 날 수가 없다고.

돌이켜보면 그날 미예가 그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은 수라 언니가 딸에 대해 말한 직후였다. 수라 언니는 자기 딸이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하고 싶어하는 것도 없는 게으름뱅이 천둥벌거숭인데, 살아보니 어려서 공부 잘하고 커서 돈 잘 벌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그런 거 아무 소용 없더라며, 딸은 제가 좋아하는 일이나 하면서 크게 불행하지 않게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과 남편은 나중에 딸에게 카페 하나 차려줄 정도의 목돈이나 주고 끝내기로 했다고. 그 말 끝에 미예가 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때 미예는 속으로 수라 언니의 말에 발끈했던 - P113

걸지도 모르겠다. 언니, 속 편한 소리 좀 그만해요. 언니처럼 다 가진 사람이 뭘 알아요? 하지만 수라 언니의 말 가운데 내 관심을 끈 대목은 미예와 달랐고, 그 말은 그후로도 꽤 오랫동안 수라 언니에 대한 내 인상을 좌우했다. 나는 우리 딸이 크게 불행하지 않게만 살았으면 좋겠어. 저 사람은 어떤 큰 불행을 겪었기에 저런 소원을 갖게 되었을까? 그러나 이 고립의 밤에 혼자 소파에 누워 그날의 대화를 찬찬히 되짚어보니 언니가 방점을 찍은 단어는 다른 쪽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크게 불행하지 않게만‘ 살았으면 하고 바란 게 아니라 크게 불행하지 않게만 ‘살았으면‘ 하고 바랐던 게 아닐까 하고. - P114

율은 온이 교수로 일하는 대학교에 입학한다. 앞으로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너 그러다가 율이 영영 뺏긴다. 전 남편은 그 소식을 듣고 충고랍시고 말했다. 뭐든 뺏고 뺏기는 것밖에 모르는 종족. 저는 딸과 아내를 버렸으면서 남이 주워 가면 뺏겼다고 징징대겠지.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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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숍 - 느낌 좋고 감도 높은 도쿄 핫플레이스 87
이시은.서동희 지음 / 동아일보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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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주방용품을 파는 중앙시장이 있다면 도쿄에는 가파바시가 있다. 중앙시장이 지극히 서민적인 곳이라면 가파바시는 장인의 솜씨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이다. 일본 전역의 장인들이 만든 칼과 냄비를 비롯해 다양한 주방 도구를 합리적인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다와라마치 역 3번 출구로 나와 10분 정도 걸으면 꼭대기에 거대한 요리사 머리 모형이 있는 건물이 보인다. 그 건물이 가파바시 거리의 시작점이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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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즈워스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0
싱클레어 루이스 지음, 이나경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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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제목인 도즈워스를 처음 들었을 때 those words의 발음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이 책의 주인공인 성공한 미국인 사업가 새뮤얼 도즈워스의 이름이다. 도즈워스는 1900년대 초반 미국에서 제조업이 부흥하던 시기에 상업용 승용차를 제조하는 사업을 시작하여 큰 성공을 거두고 50언저리가 되자 자신의 회사만큼 진지하거나 멋진 차를 만들지는 않지만 대량생산의 측면에서는 더 큰 경쟁력을 가진 회사에 사업을 매각하고 아내와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여행에 관한 이야기이다.


도즈워스의 아내 프랜은 아직 많은 사람들이 마차를 타던 시절, 그러니까 도즈워스가 자동차 사업을 해보겠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비웃을 때 만난 여인으로 순수하고 아이같은 매력을 가진 사람이다. 처녀시절 유럽에서 생활해본 적도 있는 꽤 괜찮은 집안 출신의 프랜은 순수한 사랑으로 도즈워스를 택하고 도즈워스는 별 볼일 없는 자신을 택해준 프랜에게 보은하듯 충실하고 헌신적인 결혼생활을 한다. 그의 자동차 사업이 성공가도를 달렸기에 도즈워스는 큰 저택을 짓고 유모와 하인을 들여 프랜이 안락한 생활을 하도록 노력했고, 그 결과 프랜은 결혼하던 스무살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은 아이같은 외모와 마음을 지닌채로 마흔을 넘기게 된다. 도즈워스가 사업을 매각한 이후 유럽에 가자고 보챈 것은 프랜이다. 프랜은 더 늙기 전 마지막으로 인생을 마음껏 즐기고 싶었고 그 장소로는 교양과 지성이 넘치는 유럽이 합당하다고 주장한다. 


“내 말 들어봐! 이번이 우리 마지막 기회일 수 있어. 우리가 너무 늙어서 돌아다니기 싫어지기 전에 당신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때는 지금뿐일지도 몰라. 기회를 잡자! “난 마흔에, 아니 마흔하나에 인생을 끝내고 싶지 않아. 아무도 나를 서른다섯, 심지어 서른셋 이상으로 안 봐. 그리고 이 덜떨어진 도시에서 바보 같은 짓이나 하면서 영영 산다면 내게 인생은 끝난 셈이야! 그러지 않을래. 내 말은 그거야! 당신은 꼭 원한다면 여기 있어도 좋아. 하지만 나는 멋진 일을 할래. 나는 그럴 권리가 있어. 내겐 젊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이 5년이나 10년뿐이야. 마지막 탄창이라고. 그리고 난 그걸 허무하게 써버리지 않을 거야. 이해가 안 돼? 이해해줄 수 없어? 난 진심이야. 간절하다고! 내 목숨을 걸고 애원할게. 아니, 아니야! 요구할 거야! 점잖고 빠르게 다녀오는 단체 관광 정도론 안 된다는 뜻이야!”


유럽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도즈워스는 평생 자신의 일부이자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일'을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에 후련함과 동시에 불안함을 느끼지만 보채는 아내에 떠밀려 유럽이 자신에게도 좋은 변화를 줄것이란 막연한 합리화를 하며 짐을 싸 유럽으로 떠나게 된다. 하지만 인생의 후반부에 달콤한 휴식이 되어줄 것이라 기대했던 유럽여행은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도즈워스는 일과 성취로서 인정받던 미국에서의 자신이 유럽에선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우울함을 느끼게 된다. 프랜이 프랑스어로 통역을 해주지 않으면 택시기사를 부르거나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누가 인정해주고 말고를 떠나 빈둥대기만 하는 생활 자체가 고역이다. 반면 아내 프랜은 물 만난 고기처럼 신이 나서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만 고집하고 다람쥐 코트 같은 사치품을 사들이고 지인들의 소개를 통해 유럽의 저명인사들을 만나느라 정신이 없다. 이런 나날이 이어지며 도즈워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프랜의 속물성과 경박함을 인지하게 된다. 도즈워스의 상식으로는 물려받은 작위 외에는 별다른 성취 없이 빈둥거리며 지적인 사교라는 것만 하는 사람들이 영 사기꾼처럼 보인다. 반면 그의 아내 프랜은 그런 사람들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그들에게 잘 보이려 노력한다. '백작부인'이라거나 '몰락한 귀족'이라는 단어에는 떨치기 힘든 낭만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프랜은 그들과 어울리는 동안 식대며 리무진값을 모두 자신이 사용하고 아무렇지 않게 도즈워스에게 돈을 달라고 요구한다. 동시에, 자신의 남편은 아는 것이 없고 촌스럽고 지겹다는 식으로 대한다.


일반적인 요즘 독자의 기준에서 프랜의 행동은 과도하게 철이 없고 제멋대로이고, 반면 도즈워스는 자신이 이룩한 사회적 성취에 걸맞지 않게 과도하게 소심하고 아내에게 휘둘린다. 소설을 읽어나가는 동안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이 그 부분이었다. 도즈워스는 경제적으론 충분이 감당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둘이서 여행 내내 호텔의 스위트룸에 머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내에게 그 말을 하지 못한다. 오히려 방이 좋지 않다고 투덜거리는 아내를 위해 여기저기 호텔을 옮겨다닌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별 볼일 없는 사기꾼 같은 유럽의 저명인사들이지만 아내가 그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들과 어울리고 새벽까지 감기는 눈을 참으며 댄스파티를 다닌다. 자신은 이제 다른 도시로 떠나고 싶지만 아내가 아무것도 없는 몰락한 후작과 은근한 밀애를 주고 받고 있기 때문에 떠나기 싫다고 하자 더 이상 강요하지 못하고 혼자 다른 도시로 떠났다 다시 아내가 그리워 돌아온다. 그 모든 과정에서 프랜은 당당하고 그녀의 말에 기가 죽는 도즈워스의 모습은 가스라이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에 독자입장에선 소설의 개연성과 핍진성에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도즈워스가 뭐가 아쉬워서???


결국, 프랜은 그 시대의 멍청한 소설속 여주인공들이 그렇듯(ref.인생의 베일) 불륜남과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며 당당히 도즈워스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도즈워스는 끝까지 매달려보지만 사소한 호텔객실 예약 하나도 제 마음대로 해보지 못한 도즈워스가 유럽의 귀족이란 허울에 눈이 먼 프랜의 마음을 돌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둘은 헤어지고 도즈워스는 상심한 마음을 도저히 추스리지 못해, 그리고 미국에 돌아간다면 주변인들에게 받을 시선이 두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유럽 여기저기를 방랑하며 끝없는 외로움에 시달리게 되는데... 


큰 줄기의 서사로는 그리 복잡하지 않은 이야기가 500페이지도 넘게 이어진다는 건 그만큼 서술이 상세하고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한다는 것. 그만큼 지루한 측면도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노벨상을 수상했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것이고, 앞으로의 인생에서 웬만하면 내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는 책을 (고생스럽더라도) 읽어보자는 나름의 결심이 있었던 터라 열심히 읽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읽은 뒤에야 하는 알게 되었다. 이 책은, 도즈워스와 프랜의 사랑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작가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미국과 유럽의 이야기, 그러니까 미국의 유럽에 대한 근거없는 동경과 멍청하리만치 일방적인 애정, 반면 그 실체는 별 볼일 없고 허영과 무위로 존재하는 유럽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도즈워스가 유럽에서 경험하는 일은 단순히 프랜과의 다툼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가 겪은 다양한 일을 읽을 땐 지나치게 디테일하고 때로는 이런 것까지 묘사할 필요가 있을까 불필요하게 보이지만, 완독을 한 이후에 보자면 작가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형상화하기 위해 필요했던 아주 작은 조각들이었던 것이다. 그 시대만의 특수성이 소설의 디테일로 그려져 있지만 작가가 그리고자 했던 주제가 아주 명확하며 동시에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에 시대의 특수성이 21세기 독자가 독서를 하는데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지금도 미국은, 그리고 전세계인은 유럽을 얼마나 동경하는가? 지금도 유럽은, 얼마나 겉만 번지르르한가? 


그렇게, 다 읽고 나서 보니 이 책이 사랑에 관한 책으로 홍보되고 있다는 것이 조금 웃기긴 하지만(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흥미를 느껴 읽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결론적으로는 내 기대와 달랐다는 점이 억울하지 않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외로움에 절망한, 쉰이 넘은 나이에도 하는 행동은 젊은 베르테르 같은 로맨티스트 도즈워스가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되는지는 책으로 읽어보시길. (그렇다. 미국인들은 엄청난 실리주의자이지만 그 실리에 대한 추종과 열망이 너무도 강렬해서 도리어 순수해 보이는 지점이 있다는 점...) 


*재미있었던 게 하나 있는데, 미국인들이 주고 받는 농담에 유럽에 장기로 다녀온 친구에게 '얼음이 있는 미국이 그립지 않았던가?' 하는 농담이 있다는 것. 100년도 더 전에도 유럽은 얼음이 없었고 지금까지도 한국인들이 돈을 쥐어주겠다 함에도 아아를 파는 것에 그리 소극적이라는 것이 정말...정말... 유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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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내추럴해지는 방법 - 와인과 삶에 자연을 담는 프랑스인 남편과 소설가 신이현의 장밋빛 인생, 그 유쾌한 이야기
신이현.레돔 씨 지음 / 더숲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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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의 꽃은 술이다."
이 말은 레돔과 그의 와인 메이커 친구들이 늘 하는 말이다. 누가 한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명언이다. 태초에 농부가 비바람과 뙤약볕 아래 허리를 구부려 일하는 것은 무엇보다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다. 한 톨의 쌀과 밀은 생존에 꼭 필요한 것이라는 경건함이 있다. 그러나 농업의 끝은 여기가 아니다. 인간이 배를 채운 뒤 처음으로 술을 마시게 되었을 때 그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하면 입가에 미소가 감돈다. 얼마나 설레고 즐거웠을까. 술은 그런 것이겠지. 생존이 아닌 휴식과 즐거움을 위한 액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문학도 그렇다. 둘 다 생존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술 안 마셔도 살 수 있고, 글 안 읽어도 잘 살 수 있다. 살기 위한 것이 아닌 가외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다. 술을 빚거나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인생 무용지물의 아름다움에 취한 사람들이다.

- P25

세상을 바꾸기 위한 글도 있고 삶을 개척하고 인격을 함양시키거나 지적 수준을 높여 주는 등의 실용적인 글도 있지만, 문학의 순수한 존재 가치는 나만의 조용한 기쁨을 느낄 때다. 침대맡에 앉아 두꺼운 소설책을 읽으며 밤새 인물들을 따라가는 것은 생존과 관계없다. 술을 마시는 것 또한 그렇다. 무용한 즐거운 짓에 빠지는 것이다. - P26

"사람들은 머리 위 하늘은 자주 보면서 ‘아, 하늘이 맑아서 참 좋아!;감탄하며 즐거워하지.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 하늘은 그토록 좋아하면서 왜 발밑의 땅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지 모르겠어. 하늘 보듯이 땅도 좀 보면 안 되나? ‘아 땅이 포슬포슬 건강하고 귀여워서 너무 좋아!‘ 이런 말 좀 하면 안 돼?" - P66

사람들은 향긋하지 않은 와인을 용서하지 않겠지만 농부는 안다. 포도는 인간을 위해 늘 상냥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 P130

그는 이 언덕에 살다가 사라진 모든 나무를 아쉬워한다. 특히 늙은 떡갈나무는 미생물을 폭발적으로 많이 가지고 있어 주변의 병든 식물들을 치유해 준다고 한다. 식물들의 뿌리는 본능적으로 떡갈나무가 있는 곳으로 향해 가는데, 거기에 가면 온갖 좋은 박테리아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온갖 전통요법을 알고 조제해 주는 동네 할아버지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아이가 아프면 무조건 동네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엄마처럼 식물들도 몸이 아플 때는 떡갈나무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것이다. - P219

의사를 전달하는 것만이 언어의 목적은 아니다. 그것을 가지고 춤을 출 수 있어야 한다. 먹고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프랑스어로는 내 맘대로 까불 수가 없으니 물고기는 늘 헐떡거리며 목이 말랐다. 프랑스가 아무리 좋다 해도 한국이 아무리 살기 힘들다 해도 이곳에 돌아오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언어다. 모국어를 다시 찾아 그 강에서 헤엄치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었다.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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