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문학의 이해 고려대학교출판부 인문사회과학총서 31
오탁번, 이남호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부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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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세상을 표현하는 매우 고급한 수단이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언어로 다 옮길 수는 없다. 언어는 유한하고 세상은 무한하다. - P36

우리가 서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러한 생략된 부분 또는 비지정영역의 많은 부분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짐작과정을 서사적 추론이라고 말한다. 서사의 이해에서 서사적 추론, 즉 서사적 틈새를 채워 맞추는 일은 필수적이다. 이런 점에서 서사를 이해하는 일은 그림조각 맞추기 놀이에 비유될 수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개수가 모자라는 그림조각을 가지고 전체 그림을 맞추어 그리는 일인데, 그럼조각이 없어 빈 곳은 스스로의 상상력으로 채워넣어야 하는 것과 흡사하다. - P41

일반적으로 민담이나 전설이나 전래동화와 같은 옛날 이야기들은 그림조각 맞추기가 수월하다. 그것들은 비지정영역을 많이 갖고 있긴 하지만 그 영역은 대개 서사적 연속성에 별로 요구되지 않는 영역이거나 아니면 소박한 상상력으로 채워질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현대소설은 오히려 비지정영역을 적게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채워넣으려면 상당히 구체적인 체험과 정보 그리고 고급한 상상력이 요구된다. 이것은 현대소설을 옛날 이야기들보다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하나의 요소이기도 하다. - P41

지혜나 교훈이라는 것은 이미 육질이 분해된 후의 영양소와 같은 것이어서 독서의 즐거움과는 직접 관련이 없거나 적다. - P45

거의 모든 서사는 사건의 중간에서 시작된다. 서사가 끝나는 곳도 사건의 중간이다. 사건은 그 뒤로도 계속되지만, 서사는 그 뒤의 이야기를 하지 않음으로써 결말을 짓는다. 옛날이야기들은 대개 주인공의 결혼이나 죽음으로 끝이 난다. 서사가 끝이 나더라도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뿐이지 그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서사의 끝은 사건의 완전한 종결이 아니라 어떤 ‘기대감의 충족‘이라고 할 수 있다. - P85

문학 역시 삶의 고통과 슬픔을 간접 체험시켜 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문학을 통해서 슬픔과 고통을 간접 체험하게 되고, 그것에 대한 내성을 키우게 된다. - P210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소설병에 걸리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이야기에 빠지는 것은 특정한 현실적 목적 때문이 아니다. 그냥 이야기의 재미를 기대하고 또 그것에 빠지는 것이다. 서사문학 속에는 단순한 오락적 재미에서부터 심오한 진리를 맛보는 재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폭넓은 즐거움과 이로움이 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소설병 혹은 이야기병에 걸리는 것을 두려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진해서 걸리기를 희망해 왔던 것이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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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쇼핑을 좋아해 쏜살 문고
무라카미 류 지음, 권남희 옮김 / 민음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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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남자의 거짓말은 인생을 즐겁게 해 준다. 죄가 없다. - P32

살라미와 보리된장은 서민적이어야 맛있다는게 내 지론이다. 누군가 서유럽 살라미를 기념 선물로 사 가고 싶어하면 나는 반드시 드라이브인의 살라미를 추천한다. - P55

쇼핑을 안 하면 차츰 쇼핑이 즐겁다는 뇌이 회로가 끊어져 쇼핑 때위 상관없어진다. 이를테면 멋진 넥타이를 발견해도 별 생각이 없다. 참고로 섹스도 비슷하다. 줄곧 섹스를 하지 않으면 성적 욕구 자체의 회로가 끊긴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 그런 건 주의해야 한다. 그러니 경제적으로 파탄 나는 경우를 제외하고, 갖고 싶은 상품이 있으면 사는 편이 좋다. 특히 외국에서는 또 다음에 올 때 사야지, 망설이지 말고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바로 사야 한다. - P67

쇼핑이 기분을 좋게 해 주는 이유는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어서만은 아니다. 갖고 싶은 것을 고르고 사는 행위는 자본주의적인 자유의 상징이다. - P130

명품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소속된 조직에서 개인으로 이행하는 과도기 사회에서, 자신의 경제력과 감각을 어필할 수 있는 유효한 아이템이 됐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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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의 종소리 스가 아쓰코 에세이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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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은 "열두 살 때 처음으로 타자기를 받았을 때"라고 이야기를 꺼내서 깜짝 놀랐다.

"열두 살 때라고요?"
"그래요."

자기 타자기를 갖다니, 당시 우리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사치였다. 그런데 더넘 수녀님은 아무렇지 않게 ‘열두 살 때 받았다‘고 말해버리는 것이다. 아무리 미국인이 부자라 해도 꽤 귀하게 자란 것이 틀림없었다. 놀란 우리를 완전히 무시하고 수녀님은 말을 이었다.

"처음으로 타자기를 받았을 때,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앨리스, 잘 기억해둬라. 타자기와 만년필과 칫솔만은 절대 다른 사람한테 빌려줘선 안 된다." - P75

됴코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무렵, 두 명의 여자 친구와 셋이서 매일같이 만나 이야기를 했다. 한 사람은 경제학을, 또 한 사람은 철학을 전공했는데 우리의 화제는 공부를 제외하면 거의 매일 똑같았다. 여자가 여자다움이나 인간의 존엄을 희생하지 않고 학문을 계속하려면, 혹은 결혼만을 목표로 두지 않고 사회에서 살아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 셋 다 가톨릭 신자였고, 가족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에 진학하고 또 대학원까지 간 탓에 대상이 분명하지 않은 부채의식을 느끼는 때가 잦았다.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시집이나 가. 싫으면 수도원에 들어가든가. 한 선배가 그런 말을 했을 때도 반발심이 들었다. 스스로 길을 만들어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당시 읽었던 생텍쥐베리의 문장이 나를 동요시켰다. "스스로 대성당을 짓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완성된 대성당에서 편하게 자신의 자리를 얻으려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 P155

그리스도의 오심을 세상에 널리 알린 세례요한은 성인이 되자 홀로 황야로 떠나 고행하면서 그리스도를 애타게 기다렸는데, 그리스도처럼 화려하게 제자들을 거느리지도 못하고 이렇다 할 일화도 남기지 못한 채 헤롯 왕의 진노를 사 처형당하는 것으로 고독한 생애를 마쳤다. 어찌 생각하면 그는 삶의 열매가 아니라 과정에만 정열을 불태운 사람이었다. - P164

어머니는 아홉 남매 중 끝에서 두번째로, 오빠 넷, 언니 셋, 그리고 여동생 하나가 있었다. 추억담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오빠들과는 거의 교류가 없던 나와 여동생은 만난 적 없는 외삼촌들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무사의 자손답게 읽기 어려운 한자로 된 개성적인 이름을 지닌 외삼촌들 주변에는 데이고쿠 대학의 은시계며 전국육상선수권 등, 늘 얹짢은 기색으로 우리 일상을 불깋하게 위협하던 아버지에게서는 들을 수 없던 반짝거리는 ‘공훈담‘이 몇 개씩 따라다녔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그들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공상을 자극했다. - P243

죽음을 앞두고도 아버지는 여전히 젊은 날의 여행을 생각하고 있었다. 파리에서 심플론 고개를 넘어 밀라노, 베네치아, 트리에스테까지, 분주한 시간 속을 달려 도시의 소란에서 소란으로 젊은 그를 데려다준 푸른 열차를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움켜쥐고 있던 와곤릿 사의 파란색 침대차 모형과 흰색 커피잔을, 병자가 놀라지 않도록 살며시 침대 옆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곁눈으로 그것을 보던 아버지의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갔다.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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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편혜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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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때 미술을 전공했다는 오대표는 지금은 인테리어 편집숍을 운영한다고 했다. 더불어 그 집에는 그런 개성뿐 아니라 ‘서사적 윤기‘라 부를 만한 것이 곳곳에 포진돼 있었다. 한쪽 바닥에 무심하게 놓인 현대 회화 액자와 아프리카 대륙에서 온 걸로 추측되는 나무 조각품들, 은은하게 색이 바랜 진짜 아라비아산 카펫까지... 오대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연은 물건 하나하나에 깃든 집주인의 시간과 체력, 미감과 여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 P98

다만 이연은 웃고 떠드는 와중에도 그들에게서 알 수 없는 힘을 느꼈다. 상대에게 직접 가하는 힘이라기보다 스스로를 향한 통제력이라 할까, 오랜 시간 ‘판단‘과 ‘선택‘이 몸에 밴 이들이 뿜어내는 단단하고 날렵한 기운이었다. - P106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 그녀의 늙고 지친 몸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번져나갔다.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온 그녀에게 그런 일이 또 일어났다니.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후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고 되고 마는 데 나이를 먹는 일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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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 내 마음의 문장들
다자이 오사무 지음, 박성민 엮고옮김 / 시와서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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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이렇게 말했다.

"소설이 시시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나한텐 그냥 좀 답답할 뿐이야. 단 한 줄의 진실을 말하겠다고 백 페이지의 분위기를 만들고 있잖아."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정말이지 말은 짧을수록 좋아. 그걸로 믿게 할 수만 있다면." - P61

아름다움은 남이 가리켜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혼자서, 문득 발견하는 것입니다. - P80

어른이란 외로운 사람이다. 서로 사랑하고 있어도 조심하면서 남남처럼 서먹서먹하게 대해야 한다. 어째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답은 간단하다. 보기 좋게 배신을 당해 큰 창피를 겪은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사람은 믿을 수 없다. 이 발견은 청년이 어른으로 옮겨가는 첫 번째 과정이다. 어른이란 배반당한 청년의 모습이다. - P95

사람은 순간순간 움직이는 마음의 모습 전부가 진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가기 것도 아닌 어떤 비열한 상념을 자신의 타고난 본성으로 착각하고 괴로워하는 심약한 사람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비열한 희망이 마음속에 얼핏 떠오르는 일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시시각각, 온갖 미추의 상념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사라지고, 또 떠올랐다 사라지고, 그러면서 사람은 살아갑니다. 그럴 때 추한 것만을 진짜 모습이라 믿고, 아름다운 희망도 인간에게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은 잘못입니다. 순간순간 움직이는 마음의 모습은 전부 ‘사실‘로서 존재하지만, 그것을 ‘진실‘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 P107

민주주의의 본질, 그것은 사람마다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인간은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또는 ‘인간은 인간을 정복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부하로 삼을 수 없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발상의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 P121

혁명은 사람이 편하게 살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비장한 얼굴의 혁명가를 나는 믿지 않습니다. - P156

인생이란 한결 같이 남들과 싸우는 것이고, 그 사이에 틈틈이 뭔가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 P161

진정한 사상은 예지보다도 용기를 더 필요로 하는 법입니다. - P173

세월은 인간의 구원이다.
망각은 인간의 구원이다. - P177

다들 자신만의 요리법을 자랑하지. 인생에 양념을 하는 거야. 추억으로 살아갈지, 지금 이 순간에 몸을 맡길지, 그게 아니면 장래 희망 같은 것으로 살아갈지, 의외로 그런데서 인간의 멍청함과 영리함의 차이가 생기는지도 모르지. - P181

인간이란 비참하고 불쌍합니다. 성공했다느니 실패했다느니, 똑똑하다느니 멍청하다느니, 이겼다느니 졌다느니 하며 눈에 쌍심지를 켜고 애를 쓰면서 아침부터 밤까지 진땀을 흘리며 뛰어다닙니다. 그리고 점점 나이를 먹습니다. 그것뿐인 일을 하려고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요. 벌레나 마찬가지군요. - P218

생활인의 강함이란, 아니요, 하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아니요, 라고 말해야 할 때, 아니요, 라고 분명히 말하는 것, 그렇게 할 수 있게 됐을 때, 나는 생활이라는 것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P246

당신에게 모험심이 없다는 것은 당신에게 믿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는 것이 천합니까? 믿는 것이 나쁩니까? 아무래도 당신 같은 신사들은 믿지 않는 걸 자랑스러워하며 사니까 어찌할 도리가 없군요. - P248

원래 다자이는 남을 대접하기를 좋아하고, 남에게 대접 받는 건 싫어했다. 대갓집에서 자란 타고난 성품일까.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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