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엔 실연당한 친구의 집으로 갔다. 갑자기 밥 먹으러 오라기에 누군가 옆에 있어주길 바라는구나 싶어 찬바람을 뚫고 친구의 한옥집으로. 등유곤로를 놓고 그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은 친구의 집은 손님이 온다며 바닥도 절절 끓게 보일러를 돌려두어서 무척이나 훈훈했다. 전구가 하나 나갔다며, 은은한 노란 빛으로 감싸인 서촌의 작은 한옥집. 이런 안락함을 느낄 수 있다면 겨울도 나쁘지 않구나 싶을 정도로. 친구가 해준 밥을 먹고 친구가 일본에서 사온 고급 양갱을 디저트로 먹고 친구가 새로 산 몇달치 월급의 오디오로 김추자의 레코드를 들으며 바닥에 뒹굴거리니 귀가 녹고 엉덩이는 바닥에 붙어버렸다. 밤이 깊어질수록 더 엉덩이를 떼기가 어려웠다. 친구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뭐 견뎌야지 어쩌겠어." 나이가 있어서 지난 상처들이 있어서 상대가 너무 소중해서 얼마나 그는 얼마나 소중하게 그녀를 대했던가. 소중했던 만큼 깨어진 그 날이 더 날카로울 거 같아서 내 마음도 아팠지만 그는 정말로 꾸욱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썸 한 달만 타다가 깨어진 애들도 죽겠다고 그래요. 나 아파 죽겠다고 난리를 친다구요. 그런데..." 그런데 얼마나 아프시겠어요. 란 말이었는데 그래도 아무말이 없다. 그렇다면... 그래서 우리는 아무 이야기를 했다.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 살림 이야기(무선 청소기를 일렉트로룩스 신상으로 살 것인가 다이슨으로 살 것인가), 비수기 우리의 시간을 어찌 보낼 것인가,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밥벌이 방편, 85년 신촌 그랜드 백화점 꼭대기에서 했던 들국화 투어 콘서트, 야 이 엘피판은 너보다 나이가 더 많잖아...
집으로 돌아와서는 보고 싶은 사람과 오랜 전화 통화를 하였다. 그 사이 마음이 변한건가 나 혼자 초조하였는데 목소리를 들으니 그대로인거 같아 마음이 놓였다. 5년 전 우리가 처음 만나 함께 갔던 찻집에 들렀다 하였다. 이제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그 곳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 주었다. 별로 기억나는 대화의 내용은 없다. 그런데도 새벽 4시 반까지 끊어지는 전화를 몇 번이나 다시 연결하여 붙들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내 마음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별볼일 없는 이야기를 몇 시간이나 이어가게 하는 맹목적인 애정의 힘. 전화를 끊을 즈음에 그 사람의 농담섞인 냉소에 내가 "넌 못됐어. 그런데 나한텐 잘해줘." 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넌 착한데 나한테만 못되게 굴잖아." 라고 답했다. 우리는 조심스럽다. 아주 조심스럽다. 잘 웃지 않고 말도 잘 하지 않는 그 사람의 마음을 나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확인한다. 실망스런 디저트를 아무렇지 않은 척 조용히 먹는 나를 보고 "마음에 들지 않아? 즐거워 보이지 않잖아." 라고 할 때라던지.
오늘 물건 대금을 파운드로 송금하러 갔더니 트럼프 덕분에 환율이 올라 은행 직원이 내 계좌에서 돈을 빼며 "파운드가 이리 비쌌나요?" 라고 하였다. 더 일찍 송금하지 못한 나의 탓이지 싶어 얼마나 손해를 보았나는 두드려 보지도 않았다. 나는 트럼프의 승리에 분노하고 힐러리가 여성이라서 진 것이라고 씩씩거리는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트럼프는 미국이니 힐러리와 경합이라도 한 것이지 한국이었음 지지율 60-70%로 당선될 사람 아닌가? 한국에서 자칭 진보니 노빠니 페미니스트니 하는 사람들 중 외노자를 혐오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특히 페미니스트라고 나서는 젊은 여성들이 매매혼이나 성매매, 성폭행 등의 이슈를 근거로 동남 아시아 출신 외국인들에게 얼마나 큰 적개심을 품고 있는지 보면 클린턴 저리가라 수준이다. 남의 일이니 이성이 작동하지 내 나라의 대통령이라면 외노자 척결하겠다 외치는 후보에게 큰 지지를 보냈을 것이다. 자기안의 혐오는 보지 못하고 다른 나라 정치에 선비질 하는 걸 보면 참 어이가 없다. 힐러리의 승리를 여성의 패배라고 편협하게 해석하는 것도 별로 와닿지 않는다. 페미니즘의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보는 건 세상을 보는 새로운 창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창으로만 세상을 본다며 그것역시 또 하나의 도그마 아닐까. 힐러리의 패배에는 수많은 요인이 있고 그녀의 성별은 하나의 이유일 뿐이다. 힐러리에게 좆만 달렸어도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란 말...그건 힐러리에게도 모욕일거 같은데 또 남의 일이니 사람들은 참 말을 쉽게 한다. 너에게 좆이 달렸으면 니 인생이 180도 달라졌을거 같아?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내일은 집안 대청소를 하고 커버레터를 업데이트 하고 저녁은 친구의 아이 돌잔치에 갈 것이다. 부지런해야 하는 하루. 추위 때문에 몸이 힘들지만 하루하루 견뎌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