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 4호선,
선바위역과 남태령역 사이에전력 공급이 끊어지는 구간이 있다.
숫자를 세어 시간을 재보았다.
십이 초나 십삼 초.
그사이 객실 천장의 조명은 꺼지고낮은 조도의 둥들이 드문드문비상전력으로 밝혀진다.
책을 계속 읽을 수 없을 만큼 어두워나는 고개를 든다.
맞은편에 웅크려 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갑자기 파리해 보인다.
기대지 말라는 표지가 붙은 문에 기대선 청년은 위태로워 보인다.
어둡다.
우리가 이렇게 어두웠었나.
덜컹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맹렬하던 전철의 속력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
가속도만으로 레일 위를 미끄러지고 있다.
확연히 느려졌다고 느낀 순간,
일제히 조명이 들어온다, 다시 맹렬하게 덜컹거린다. 갑자기 누구도파리해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나는 건너온 것일까?

"한강의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그림의 실재가 궁금했던 사람들은 이제 시집「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펼치면 된다."
_조연정(문학평론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녕하세요, 김민섭 씨 찾기 프로젝트를 아주 잘 보고 있습니다. 여행을 떠날 김민섭 씨가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혹시비행기표 외에 다른 부분 때문에 흔쾌히 여행을 떠날 수 없을까 하는 걱정이 들어 메시지를 드립니다.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여행을 떠날 김민섭 씨의 숙박비를 제가 부담하고싶은데요. 2일이니까 30만 원을 지원해 드리고 싶습니다.
비행기와 숙박이 해결되면 여행을 떠나기가 조금 더 수월하지 않을까 해서요. 업체나 그런 홍보 아니고요. 저는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저희 학교 학생이라면 대부분 집이 어려워서 시간과 비행기표가 있어도 다른부분의 여비 때문에 여행을 쉽게 가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생각이 들어 초면에 실례를 무릅쓰고 메시지를 드려 봅니다. 아드님의 수술이 잘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고등학교 교사인 그는 김민섭 씨의 숙박비를 자신이 부담하겠다고 했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은 대부분 집안형편이 어려워 시간과 비행기표가 있어도 여행을 가지 못

할 것이라고, 여행을 가고 싶은 김민섭 씨도 그래서 주저하고 있을지 모르니 2박 3일의 숙박비 30만 원을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대단히 다정하고 정중한 메시지였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줄 때 우리는 쉽게 오만해진다. 거기에뒀으니까 가져가세요. 싫으면 마시고요, 하고 자신도 모르는 갑질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흔쾌히 여행을 떠날 수 없을까 걱정이 된다고,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숙박비를 부담하고 싶다고, 그러면 여행을 떠나기조금 더 수월하지 않을까 한다고, 초면에 결례를 무릅쓰고메시지를 드린다고, 아드님의 수술이 잘되기를 기도한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 왔다. 한 개인의 격이라는 것은이처럼 받을 때가 아니라 줄 때 드러나는 법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단순히 이름이 같은 사람을 상상하고있을 때 그는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김민섭 씨에게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러니까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그들의 연약함을 보았고, 그들의 연약함을 사랑했고, 그에 그치지 않고 그들과 닮았을 누군가를 다시 상상해 냈다. 그가 타인을 상상하는 자리와 방식뿐 아니라 이와 같은 삶의 태도까지 모든 것이 놀라웠다. 나는 언제쯤 거기에 다다를 수 있을까. 그에게 감사를전하며 여행을 떠날 김민섭 씨가 방금 나타났다고 답신을

오카로 여행을 가는 사람에게 팔거나 기념으로 가지고 있어도 되었다. 그러나 그는 굳이 "갈 일이 없을 것 같아서."
라면서, 만나 본 일도 없는 타인에게 기꺼이 그것을 보내주었다.

자신을 와이파이 렌탈 업체의 대표라고 소개한 누군가는 "휴대용 포켓 와이파이를 대여해 드리고 싶습니다. 홍보로 비추어질 것 같아 상표를 지우고 무료로 대여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고, 누군가는 "후쿠오카 타워에서 본야경이 참 좋았습니다. 김민섭 씨도 볼 수 있으면 하는데,
제 주머니에 입장권이 한 장 남아 있네요. 보내 드리고 싶습니다."라고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93년생 김민섭 씨의 여행을 돕고 싶어 했다. 그들이 왜 그랬는지 그때는 잘 알지 못했다.
페이스북 메시지가 갑자기 많이 도착했다. 「오마이뉴스」를 시작으로 이름을 알 만한 열 군데 가까운 매체에서취재 요청이 왔다. 아니, 제가 책을 냈을 때도 이렇게는 안하셨잖아요. 일단 줄을 서세요.

저를 왜 도와주신 겁니까?" 놀랍게도 그들의 답은 거의 비슷했다.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면서도 그랬다. 그래서 나도 93년생 김민섭 씨에게 그 말을 돌려주기로 했다. 그에게 말했다.

"그냥, 당신이 잘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의 말을 단순히 돌려주었다기보다 언젠가부터 나도 그런 마음이 되고 말았다. 이 평범한 청년이 여행을 잘다녀오면 좋겠다고. 그러면 왠지 그가 앞으로 잘 살아갈수 있을 것 같았고, 그뿐 아니라 그와 닮은 평범한 청년들이 모두 잘될 것 같았고, 무엇보다 나도, 우리도, 모두 잘될것 같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93년생 김민섭 씨가 여행을 잘 다녀와서 잘 졸업하기를, 잘 취업하기를, 그리고 그가 잘되기를 많은 사람들이 바랐다. 그러면서 아마도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잘되기를 모두 바랐을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잘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라는 말 뒤에는 ‘그러면 저도 우리도 다 잘될 거예요.‘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나는 나를 도왔던 사람들이 "당신이 잘되면 좋겠다고생각했어요."라고 했을 때, 그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

식사를 하는 동안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직원들의 옷차림이 무척 편안해 보인다고 하자 72년생 김민섭씨는 모두가 그렇게 다닌다고 했다. 여름이 오면 모두 슬리퍼에 반바지 차림인데 그 모습을 봤어야 한다면서 웃었다.

같은 건물의 한국 회사로부터 항의가 들어온 일도 있다고했다. 분위기를 흐리니까 정장은 아니더라도 옷을 좀 갖춰입어 달라고. 그러나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건물에는 금융 기업들이 많이 입주해 있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그들은 넥타이를 정갈하게 조여 매고몸가짐에 신경 쓰는 모습이었다. 

72년생 김민섭 씨는 자신이 왜 한국 기업에서 외국계 기업으로 이직했는지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다. 그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나이가 마흔이 넘어가면 ‘관리직·사무직‘이 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개발직· 생산직‘에 남아 있으면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게 된다. 

그러나 외국계 기업의 경우는 그처럼 정해진 답을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관리직과 개발직을 선택할 수 있다. 
그는 미국에서 예순 살이 다된 개발자가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본 순간, 이직을 결심했다고 했다. 더 공부하기 위해 미국 본사

로 가고 싶다고도 했다. 몇 사람의 취향을 위한 채식에서부터 자유분방한 옷차림, 그리고 삶과 노동의 선택에 이르기까지, 이것은 비용의 차이가 아니라 아마도 문화의 차이일 것이다. 타인의 결을 인정하고 구조적으로 수용할 만한그 여유가 부러웠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나는 그동안 한 권의 책을 더 썼고, 김동식이라는 작가의 소설집을 기획했고, 정미소라는1인 출판사를 만들었다. 아이도 수술을 잘 받았다. 바쁜 나날들이었다. 두 김민섭에게서 반가운 연락이 왔다. 

우선 72년생 김민섭 씨는 미국 본사로 발령이 나서 샌프란시스코에 있다고 했다. 미국에 함께 놀러 오라고 했는데 그게 언제가 될지는 잘 모르겠다. 
93년생 김민섭 씨는 대학을 잘 졸업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졸업식 사진 속의 그가유독 멋진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아서 이유를 묻자, 그는 최우수 졸업생이 되어 총장에게 상을 받았다고 했다. 

한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이처럼 그를 잘되게 만들고야 마는 모양이다. 그것을 증명하며 살아 내고 있는 그가실로 고마웠다. 그는 "제가 잘되기를 바란 사람이 너무 많았으니까요. 그 덕분이에요." 하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선물을 하나 해 주고 싶다고 했다. 1인 출판사를 만든 것으로아는데 혹시 로고가 없다면 자신이 디자인해 주겠다고 제119

헌혈, 달리기, 소심한 고소, 김민섭 씨 찾기
세상에 지친 당신을 위로하는 작고 선량한 재치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 모두가 지녀야 할 인간다움이 배어 있는 사람, 그게 바로김민섭 작가다. 이 책은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김민섭만의 방법을 보여 준다.
화려한 에피소드나 복잡한 철학 없이도 즐겁고 깊이 있고 따스한 책이다.
사람이 무서워 가시를 세우며 지냈던 내게 사람의 가치에 대해 알려 준 이 책을 많은사람들이 읽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조금 더 김민섭다워진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훨씬 더 살 만해질 것 같다!
-핫펠트(싱어송라이터)

"우리가 겪은 나눔과 응원이. 삶이 두려울 때 도움이 되기를 바라요."
‘김민섭 씨 찾기 프로젝트‘ 후원자분과 제가 주고받았던 메일에 있던 문장입니다.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라는 말이 품고 있는 따스한 생각들이, 두려운 세상 여행중에 이 책을 만난 당신에게 닿기를, 그리고 당신을 통해 더 멀리 퍼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끝끝내 다 잘될 테니까요.
-93년생 김민섭ESEO-LA-AQUחו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주위에 배울 게 많은 사람을 찾아 봐.
가족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운이 좋은 거야.
가까이 그런 친구가 있다면 굉장히 운이 좋은 거야.
배울게 많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야.
배울게 많은 친구가 훌륭한 친구야.

어른이 되면 아무것도 안 배워도 될까?
그렇지 않아.
세상이 가만히 정지해 있지 않거든.
새로운 일들이 날마다 일어나.
새로운 생각들, 새로운 지식들, 새로운 기술들이 생겨.
배우는 것은 끝이 없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양심에 관하여

오늘날 양심은 곤경에 처한 듯 보인다. 많은 ‘양심 자전거‘가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듯이 양심은 믿을 만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세상에서 잘 단련된 사람들은 ‘믿는 것은 좋지만 감시가 더 낫다‘는 견해를 밝힌다. 

양심에 제기될 수 있는 혐의는 두 가지다. 하나는 자의성이고, 다른 하나는 위장된 사회권력의 성격이다. 
양심은 판단하는 개인만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 양심에 의거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양심이라고 여길 가능성에 노출된다. 
사실 생각해보라. 양심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양심이란 것은 결국 개인에게 저장된 규범적 판단들의 어떤 집합이 아닌가? 만일 그 집합의 설정이 개인의 권한에 달려 있다면, 양심의 자의성은 불가피해 보인다.
양심이 자의적이 아니라면 그것은 타인들이 기대하는 규범이 내재화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양심에 호소한다는 것은 정말 그 개인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내재화된 규범을 ‘불러내는‘ 것이다. 
양심은 권력이 개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의 비용을 줄이기 위해 개인의 내부에 장착시킨 규범 칩chip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런데 이것이 양심에 관한 우리의 막연한 이해를 제대로 개념화한 것일까? 
나는 부분적으로만 그렇다고 생각한다. 

양심에 대한 위와 같은 이해는 ‘자유‘와 ‘규칙‘에 대한 특정한 이해에 기반하고 있다. 자유는 분명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자유의 본령이 자의성에 있다고 여기며, 자의는 자유와 가장 먼 것이라는 고상한 자유의 형이상학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적 의미에서의 자유는 다르다. 사회적 삶이라는 조건하에서 애초에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의미한 자유는 사회적 삶의 조건하에서의 자유이다. 그래서 사회적 의미에서의 자유를 이야기할 때는 ‘규칙‘의 문제를 우회할 수 없다. 타인들과의 삶은 (거의) 언제나 규칙들에 따라 조정되기 때문이다.

규칙 밖에서 살 수 없다면, 사회적 의미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내가 따르는 규칙이 ‘나에게 제정의 권한이 주어졌더라도 그렇게 만들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규칙‘일 때다. 양심을 이런 ‘자유의식‘과 연관시키면 양심은 위에서 언급한 자의성이나 내재화된 권력과는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양심에 호소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자신이 만든 규칙에 따른다면어떻게 판단하겠는가‘를 묻는 것이다.

양심을 이렇게 이해하면, 우리가 어떤 사람의 양심에 호소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규칙에 대한 반성적 태도를 가질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반성적 판단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양심을 기대하는 것은 수취인을 잘못 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반대로 양심에 비추어 판단할 자격을 부여받은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반성적 일관성reflectiveconsistency‘을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다. 자신이 양심적인 존재임을 통용되는 규칙에 언제나 합치하는 식으로 증명할 필요는 없지만, 규칙을 어길 때는 충분한 근거 위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 장기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양심은 자연적 현상도, 초자연적 현상도 아니다. 그것은 반성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사회적 삶의 한 양식이다.

양심을 이렇게 이해하면 양심과 관련된 우리들의 경험 하나를 조금 더 잘 설명할 수 있다.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을 경우 우리는 두고두고 괴롭다. 꿈에서조차 괴롭다. 왜 그런가? 만약 양심이 내재화된 사회적 권력일 따름이라면, 나는 양심에서 멀어질수록 자유롭다고 느낄 것이다. 그래서 양심의 고통은 나의 사고에 각인된 권력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양심은 자신이 자유롭고 존중받을 만한 존재라는 의식과 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의에 관하여

예의는 긍정적 역할기대에 맞는 행위 양식을 말한다. 긍정적 역할기대는 관계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서로 몸이 스치는것조차 싫어하는 것은 애인으로서의 예의가 아니지만, 친밀하지 않은 사람이 자꾸 가까이 다가서는 것 역시 예의가 아니다. 

예의가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다. 그것은 서로의 역할대에 대해서 서로가 자유롭게 동의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때다. 

반면 예의가 족쇄일 때도 있다. 그것은 나에게 내가 동의할 수 없는 역할기대를 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기를 요구할 때다. 
신분지배의 사회에서 하층계급에게 요구되는 예의가 그랬고 남성지배 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예의가 그랬다.

그래서 많은 경우 예의를 파괴하는 것 자체가 혁신의 시작이었다. 
어법과 인사 방식, 복장을 의도적으로 달리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자극적인 이유는 그것이 단지 패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의의 부정적인 면 때문에 예의를 전부 다 버리

려는 것은 잘못이다. 

예의 없이는 자유로운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를 지켜가기가 불가능하다. 한두 사람만 예의를 지키지않아도 사람들은 곧 경찰이 필요하다고 말할 것이다.

아침에 산책을 나갔는데 누군가 밤새 산책로에 똥을 싸놓았다. 분개했지만 치우기로 했다. 그것 때문에 나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 산책길을 기피한다면 똥을 싼 사람에 의•해 최대의 피해를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 치웠으면 그 사람이 두고두고 미웠을 텐데, 치우고 나니 그렇게 밉지 않았다. 다음에 안 그러기를 바랄 뿐. 너무 급해서 그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면서 과거를 떠올렸다. 내가 귀갓길에 토해놓은 흔적을 보고 혹시 누군가가 거기서 더러운 오물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청년기의 방황과 고뇌를 읽었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하고 또 부끄러웠을까.

예의를 갖추고 타인에 대해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며 기다려주는 것은, 종종 상대의 정말 불쾌한 행위에 대한 가장 훌륭한 대응이 된다.


신념 때문에 고통스럽더라도 신념은 내 마음대로 어찌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생각이란 선전이요, 전략 이상의 것이 아니다. 나는 신념의 주인이 아니다.
오히려 신념이 나의 주인이다. 

그래서 자신의 믿음을 어떤 다•른 편익과도 바꿀 수 없어 차라리 목숨을 버리고자 하는 순교가 아마 신념의 가장 순수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수세적 신념과 달리 공세적인 신념은 의심해 볼 만하다. 

공세적인 신념은 그 뒤에 신념 외의 다른 이익이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큰소리로 외쳐댈수록 근거 없음을 은폐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공세적 신념은 많은 경우 신념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비슷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최대의 희생을 요구하기 위한 전략이다.

그러니 신념은 갖기도 어렵고 위험하기도 하다. 지적인 부담을 담당해야 하고 신념이 요구하는 희생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제대로 된 신념은 우리에게 확고한 기반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찰과 고독, 희생을 감내하라고 요구

한다. 
그러나 설명과 증명을 위한 지적인 부담과 그것을 지키기 위한 희생을 기꺼이 감수할 용기가 있는 신념을 갖는 것,
그것은 인간의 가장 존중할 만한 모습이다.

그러나 너무 쉽게 신념을 말하는 자를 경계하라!


따지고 보면 관용은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 어떤 제재 수단을 가지고 있을 때만, 그러니까 내가 어떤 의미에서 강자일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상대로부터 해를 입을까 봐 상대의 행동을 묵인하는 것은 관용이 아니라 회피나 타협이다.

 ‘착한 내가 참지‘라는 농담은 현실에 만연한 회피와 타협을 반영하는 것 같다.

그런데 위에서 우리는 강자야말로 약자에 대해서 자신의 말과 행동을 자제하기가 어렵다고 하지 않았던가. 여기에 바로 관용의 어려움이 있다. 

혹시 누군가는 "나를 일단 강자의 위치에 올려다오. 그러면 내가 얼마나 관용적인지 보여주지"
라고 냉소적으로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자신이 입힌 피해보다는 자신이 입었거나 입을 수 있는 피해에 민감하기 때문에,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주목하고 신경 쓰고 있을 뿐이다.

 자신이 타인에게 행사하고, 행사할 수 있는 억압과 구속은 쉽게 눈에 띠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강자의 힘을 ‘상처 입힐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할 경우, 이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

심지만 모두 강자다. 세상에서 정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다. 대등한 시민 사이는 물론이고,
어 어린 자식도 부모가 정서적으로 자신에게의존적이라는점을 이용해서 부모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학생과 선생의관계도 마찬가지다. 선생은 성적을 매길 수 있는 권한이 있기때문에 학생의 눈에는 강자로 보인다. 그러나 스포츠 클럽에•서라면 선생은 젊은 제자가 부럽기만 할 것이다. 아무튼 누구•에게나 자신보다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그가 보통의 위치에서 관용적인 태도를 갖지 못한다면, 그가 더 강자의 위치에 올라섰을 때 관용적인 태도를 가지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러니까 관용은 강자만을 위한 윤리가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윤리인 것이다.

더 이야기를 진행하기 전에 내가 ‘관용의 역설‘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사태를 분명히 하고자 한다. 관용은 바로 관용이 필요한 곳에 충분하게 있기 어렵다. 마치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에서의 화폐처럼 말이다. 

관용은 상대에게 어떤 제재를 가할 수 있지만 스스로 삼갈 때만 성립하는 것인데, 바로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야말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쉽게 하지 않는가. 
바로 관용이 필요하고 또 있어야 할 곳에 관용이 자리 잡기 어렵다는 사실, 이 ‘관용의 역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리고 어떻게 대처할까? 

강자의 자기절제에 호소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도박이다. 그래서 강자가 행사하는 자의적 폭력에 맞서는 제재 수단을 강구하는

stewing

나는 근현대사회에서 중요한 사회비판의 유형들이, 번영의또래인 빈곤 위험을 유지시키는 굴종, 풍요의 기반인 무책임문제시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사회 일부(부르조식 제급)의 번영이 얼마나 임금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그등의 고난에 바탕한 것인지를 실감한 사람들은 노동자의 해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사회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남성들이 위엄과 자존심을 지키고 사는 사회가 얼마나 여성들의 굴종에 바탕한 것인지를 실감하는 사람들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고 남성만큼 선택적이 될 때 세상이 바뀔 것이라고 믿지 않을 수없다. 그들은 여권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날 산업사회의 물질적 풍요가 얼마나 자연에 대한 무책임한 남획(종 다양성 감소, 부존자원 고갈, 오염증가 등)에 의존하는가를 아는 사람들은 생태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계가 달라져야 한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생태주의

•자 또는 최소한 환경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사회 일부의 번영 독점, 남성의 특권적 위치, 산업사회의 무책임성을 문제삼는 의식이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비판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고난과 굴종의 위치에 선자, 자연의 훼손에 의해 삶의 존립 기반을 빼앗긴 자는 자신의 위치에 의해 비판적 잠재력을 형성한다. 때로 그들•은 답답하리만치 자신들의 이익과 반대되는 방식으로 행동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스스로 상황을 문제삼기 시작할 때 세상의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된다.

•비판적 이론가란 스스로의 경험을 바탕으로, 또는 빈곤과 굴종에 선 자들과의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또는 자연을 책임의 영역으로 여겨야 하는 경험을 바탕으로 이 세계에 대해,
그리고 이 세계를 정상화하거나 최종화하려는 입장들에 대해 거리를 취하는 데서 출발한다. 

비판적 사유란 세계에 비판적 거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있는‘ 비판적 거리에 자신을 접속함으로써 성립한다. 이론가의 과제는 저거리를 정당화의 물음에 연결시켜, 그 거리를 해소하는 것이다.

타인의 복지를 향상시키며 자연의 남획을 방지할 수 있다면, 자신의 풍요와 특권적 위치를 (최소한 어느 정도라도) 제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비판적 사유자가 될 수있다. 비판적 이론가는 컨설턴트가 아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기업 내에서 해고 문제를 다루는 협의체가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국가가 해고된 사람들을 재취업 훈련과 복지를 통해서 흡수해야 한다. 

물론 그런 재원은기업과 일자리를 가진 사람들로부터 조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진화 과정에서 형성된 하나의 (그리고 현재로서는 최적의) 해법이다. 무척 중요한 진화적 성취다.

이제 묻는다. 

기업은 그런 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가? 오히려 주로 방해를 해오지 않았는가? ‘
해고할 수 있는국가를 만들려고만 했지 ‘해고해도 좋은‘ 국가를 만들려고는 안 하지 않았는가. 

만일 그렇다면 기업은 해고의 자유를 말할자격이 없다. 
국가더러 농성을 해산시켜달라고 하는 것은 협•잡꾼이 되라는 것이다. 

보험을 들지 않은 사람은 사고처리 비용을 스스로 부담해야 하듯이, 복지국가 형성을 막아온 기업도 해고 후유증을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주주들에게 거액의 배당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니, 
노동자들이 해고를 감수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고공농성을 슬픈 마음으로 지지한다. 
그런 농성을 사라지게 하는 농성이 되길 바라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