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는 올해 어버이날 카드에 이렇게 썼다.
"2020년 11월부터 삶에 책을 들이고 
2021년 5월부터 삶에글을 들였습니다. 
그 이후로도 차곡차곡 일과 삶의 대전제들, 즉 변하지 않고 사고의 기준이 되어줄 것들을 쌓아왔습니다. 
문장을 수집하기도 하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로 정리하기도 하면서요. 
돌이켜보니, 어머니의 말들, 삶의 고유성과 구체성을 이야기하는 것, 타자의 삶에 공감하고 그들이 되어보는 것, 불행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 등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더라고요. 
그래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해피 어버이날."

유아차를 탈 때부터 도서관을 드나들던 아이, 곤히 잠든것으로 엄마의 독서 생활에 기여했던 아기가 그때 제 엄마의 나이가 되자 책을 읽기 시작한다.

목적이 분명한 책들의 무게에 짓눌리는 느낌이 든다. 필연의 책장엔 우연이 발생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그랬을까. 나도 모르게 도서관으로 뛰어가서 서가 구석을 하릴없이 기웃거리곤 했으려나. 헛걸음을 뒤늦게 헤아려본다.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러면 잘 모르겠어요, 계획이 있었던 적이 없어서요라며 말끝을 흐린다. 줄곧 그리 살았다. 
중요한 건 당면한 글 한편을 무사히 잘 쓰는 일이었다. 그것만이 계획이고 목표였다. 

내가 읽은 건 필독서 목록의 책이 아니라 우연히 걸려든 한권의 책이었고 그 책을 나침반 삼아 한걸음씩 옮기다 보니 어느새 책을 열권 넘게 썼지만 책을 너무 많이 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는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은 책기둥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생의 목격자 양천도서관이 일러준다. 
너무 멀리 가지 말 것. 
헛수고와 헛걸음으로 우연 앞에 나를 풀어둘 것. 
어디를 가야 자기 존재가 피어나는지 몸은 안다.

1부는 관계와 사랑, 2부는 상처와 죽음, 3부는 편견과 불평등, 4부는 배움과 아이들을 키워드로 묶었다. 
특히 마지막 4장은 중·고등학교에서 만난 학생이나 교사에게 보내는글이 대부분이다. 
내 딴에는 중심에 있지 않기 위해, 굳어가지 않기 위해 찾아가는 곳이 학교다. 학교는 급진적인 질문이 가장 많이 터져나오는 장소다. 나는 학교만 다녀오면 아이들이 감당할 세상의 불의가 선명하게 감지되어 어지러웠고, 이 망할 세상에 아직은 희망이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고, 더 나은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한 것 같은 나의 무능을 탓하며 책을 팠다. 이 아이들이 직면한 현실이 더 타락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아이 몸에 박힌 기죽이는 말의 가시를 빼주고 싶어서, 그냥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마음이 바빴고 그 ‘뭐라도‘는 언제나 글쓰기였다.

‘질문이 있는 삶‘을 살도록 자극해준 책과 사람에게 감사한다.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해방이다. 인터넷에서 인종차별 철폐 집회 사진을 봤는데 흑인이든 피켓에는 이런 문구가 써 있었다. 

‘평화는 백인의 단어다. 해방이 우리의 언어다.‘ 모아놓고 나니 이 책에도 해방이란 말이 꽤 여러번 등장한다. 읽는 사람이 되고부터, 즉 고정된 생각과 편견이 하나씩 깨질 때마다 해방감을 느꼈기에 쓴 것 같다. 나도 해방을 우리의 언어로 삼는다. 

비록 앎이 주는 상처가 있고 혼란과 갈등이 불거지기도 하지만, 무지와 무감각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의 무신경함이 누군가의 평화를 깨뜨릴 수 있으며, 
적어도 약자의 입막음이 평화가 아님은 알게 되었다. 더디 걸리더라도 배움을 통한 해방은 내적 평안에 기여하고 낯빛과 표정을 바꿔놓는다고 믿는다. 해방은 평화를 물고 오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명절이 즐겁지 않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차례가 없어졌고 시가의 사슬도 저절로 풀렸습니다. 가부장제의 마지막 요새는 뜻밖에도 친정입니다.

엄마 없는 친정. 그건 살림하는 사람이 없는 집이라는 뜻이지요. 가사노동의 빈자리는 평소에는 주 2회 가사도우미의 도움으로 메우고, 외동딸인 내가 1년에 세번은 직접 맡습니다. 명절 두번, 엄마 기일 한번.

친정 가는 길은 늘 양손이 무겁습니다. 이번에도 육수에 떡국떡, 매생이와 굴, 불고기 잰 것, 문어 샐러드감, 잡채까지 식구들 먹을 음식을 챙겼어요. 한끼 양식입니다. 

없는 엄마일을 있는 딸이 합니다. 아버지는 안하고 오빠도 못하고

똑같이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수십년을 살았는데 그 능력은 딸에게만 전승됐습니다. 

왜 두 남자는 자기 식구를 위해 밥 한끼 차려주고 싶은 마음, 의지, 노력을 보이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아마 배달 음식으로 대체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일을 시키는 데도 만만찮게 신경이 소모되는 법입니다.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하고 일을 분배하는 거니까요. 또 어떤 톤으로 말해야 하는지, 거절당했을 때의 대처법은 무엇인지 대안까지 고려해야죠. 그러니 그냥 내가 하고 말자며 간소한 반찬 몇가지를 출장뷔페처럼 이고 지고 갑니다. 바꾸기보다 행하기를 택합니다.
마음이 힘든 것보다 몸이 힘든 편을 택하는 겁니다.

친정집은 좁아지고 있습니다. 현관에서부터 신발이 열켤레 넘게 나와 있죠. 엄마의 자랑이자 특기였던 식물 키우기. 엄마가 작은 식물원처럼 발코니에 가꿔놓은 수십종의 화초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거실은 택배 상자와 생수 묶음이 놓여 있어 복도처럼 돼버렸고, 식탁 위는 커피머신과 일회용 수저, 소스 같은 잔재들이 점령했고요. 냉동실에선 유통기한이 2년쯤 지난 냉동식품이 발굴되죠. 
음식 아닌 식품으로 꽉 찬 냉장고 택배 집하장으로 변해가는 집. 엄마의 부재 16년간 아주 서서히 틀어지고 살아가는 집을 지켜보고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특기는 무릅쓰기. 참고 견디기. 마음 없이도 임무 수행 모드의 가동이 가능합니다. 아버지는 여든다섯이 됐네요. 늙은 아빠와 아픈 오빠에 대한 연민이 크겠죠. 또살림 경력 30년, 한끼 밥상은 몇시간이면 뚝딱이니까요. 

밥은 이상해서 먹는 사람은 차리는 사람의 수고를 알기 어렵지만 
밥은 또 이상해서 먹는 사람을 보는 것으로 차리는 사람은 그 수고를 얼마간 보상받습니다. 해 먹이는 즐거움이 크죠. 
밥을 내가 밀어내려 해도 밥이 나를 잡아당깁니다. 그래서 갑니다.

나는 나를 이중으로 비난합니다. 아버지랑 먹을 밥 한끼 하는데 웬 불만이 그리 많아? 
왜 아직도 명절에 꼭 모여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어? 
이게 다 한쪽 성역할의 노동으로 굴러가는 가부장제 시스템 때문이라는 걸 알지만 어디다가 화를 내야 할지 몰라서 나를 야단칩니다. 꾸짖고 어르죠. 이번만 참고 지나가자. 아직 족쇄가 풀리지 않은 곳.

일전에 친구가 그러더군요. 네 엄마가 살아 계셨으면 일마나 좋았을까. 딸이 이렇게 작가로 열심히 활동하는 걸보셨어야 하는데! 

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네요. 엄마는 여름 넘도록 가사노동에서 해방되지 못했을 게 뻔하니까요. 육신의 노화가 착실하게 진행되는 와중에 세끼 식사를 차리고 반찬 투정을 들으며 살았을 엄마의 삶을 상상하고 싶지않습니다. 

가부장제는 엄마에게 집 아닌 다른 장소를 허락하지 않았고 집은 엄마에게 제대로 된 사랑과 안정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명절 때마다 딸은 사라진 엄마를 만나고 엄마와 함께 사라집니다. 엄마는 늘 내게 말했죠. "너는 없는 것처럼 컸다."
손이 하나도 안 가는 자식이었던 순둥이 딸.

 자신을 비존재로 만드는 건 여자들의 개인기이자 생존술입니다. 앞치마 두르고 시금치 뿌리의 흙을 살살 털어내던, 어딘가 기가 죽어 있는 며느리였던 나는 시댁에서도 가급적 없는 듯.이 지냈습니다.

눈물을 누르며 자아를 죽이고 밥을 차렸고요. 집에 와서 도망치듯 카페로 달려가 설움을 분출하듯 글을 썼었네요. 아, 말하다보니 맨날 똑같은 노래만 부르는 가수가 된 양 처량 맞고 쏠쏠한 기분에 젖고 맙니다. 나는 왜, 아직도, 명절 타령인가.
사실 ‘이런 이야기‘를 오래전부터 쓰고 싶었지만 쓰지 못했습니다. 기혼 유자녀 여성으로서 내적 분투의 기록이라면 이미 책 한권(『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서해문집 2016)으로 웬만큼 털어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책을 읽은 독자들은이런 리뷰를 남기기도 했죠. ‘명절 때 가져가는 책이다.‘ ‘밥에 묶인 삶이라는 구절에서 눈물이 터졌다. ‘누나를, 엄마를이해하게 됐다.

그런데 그 글을 쓴 나는 왜 여전히 이 모양인지, 몸이 뒤집힌 벌레처럼 ‘밥에 묶인 삶‘에서 허우적대며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만 같아서 심히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정말이지 아이들이 다 자라고 시가에 가지 않아도 명절이 힘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죄의식까지 엉겨붙습니다.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하고 있을 때, 리베카 솔닛 RebertaSolnit 이 쓴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을 만났습니다. 
그는 내게 각별한 작가입니다. 그의 책들을 거의 읽어왔기에 그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내 앞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는 작가죠. 

이번 책은 회고록입니다. 개인적 경험을 담았지만 솔닛의 주특기가 십분 발휘되었죠. 솔닛은 자신의 이야기를 여성이 겪는 집단적 경험의 맥락 속에서 서술합니다.
죄다 밑줄을 그을 지경이었는데요, 유독 이 문장이 달려들었습니다. "나는 망가진 사람이다. 우리 모두를 망가뜨리며 그중에서도 여성을 특정 방식으로 망가뜨리는 사회의 일원이다." (297) 나는 ‘망가진 사람‘이라는 선언이라니요.
나는 이 문장을 수치의 언어가 아니라 해방의 언어로 읽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망가졌기 때문에 망가뜨리는 것들에대해 쓸 수 있는 자격이 있고 망가진 것을 수선해야 하기 때

환승하듯 가족을 떠나 바로 가족으로 옮겨 탔을까.

‘가족‘이 삶의 화두가 됐다. 마치 공기처럼 삶에서 한번도 분리된 적 없는 그것. ‘보호‘보단 ‘제약‘이 연상되는 단어. 반사회적 가족이라는 책은 제목부터 나를 자극했다. 모두가느끼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금기가 들어 있을 것 같았지.
예감대로였다. 저자는 가족의 폐단을 세가지로 꼽는다.

첫째, 부와 빈곤을 세습하는 것. 

둘째, 사생활권이라는 미명 아래 개인의 개성과 인권을 억누르고 갈등 을 은폐하는것. 

셋째, 모성 역할과 가사노동에 여성을 속박하는 것.

난 한줄 한줄 빨려들었다. 흙수저 • 금수저란 말도 있듯이부모의 능력에 따라 자식의 신분이 결정된다. ‘계급 배치의 강력한 기관‘으로 가족이 기능하지. 
우리나라에서도 가정폭력은 뉴스의 단골 소재잖아. 부모는 자식을 독립된 인격으로 대하기보다 통제하고 간섭하지. 사람들은 그래도 가족밖에 없다고들 말하지만, 가족에게 가장 큰 상처를 받는 경우도 허다한 게 현실이다.
특히 가족이 ‘여성을 모성 역할과 가사노동에 속박한다‘


"먹지 마, 커지지 마, 멀리 가지 마, 많이 원하지 마."
꽤나 익숙한 명령이죠. 사랑이 다이어트 실패기를 두페이지나 되는 글로 썼던 것처럼 먹지 말아야 하고요. 사랑눈이 전문직이지만 직업적 야망을 갖지 않게 된 것처럼 남자보다 잘나가도 안 되고요. 사랑눈이 수업 하나 들으면서배우자, 아이, 동료들에 대한 죄의식에까지 시달리는 것처럼 나의 필요는 가족의 필요를 위해 포기해야 하고…이렇게 ‘하지 마의 세계‘에 갇힌 사람은 최초의 욕구가 발동했을 때 
‘잘하는 법‘을 고민하기도 전에 내가 이걸 해도 되는 사람인가, 하는 자기 의심과 싸우게 됩니다. 캐럴라인 냅이 떠올리는 자기 어머니의 모습도 다르지 않았죠. 
"애초에 자신에게 욕망하고 원할 권리가 있는지조차 확신하지못하고, 자신의 필요들을 부끄럽게 여기며, 심지어 그 필요들을 거의 인정조차 하지 못하는 젊은 여자를 상상하게 된다."(122~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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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에잠들어 있는 사람

그날 다시 전화를 걸면서 나는 「골짜기에 잠들어 있는사람(Le Dormeur du val)」을 떠올렸다. 어렸을 때 배운 아르튀르 랭보의 소네트였다.

초록빛 골짜기, 그곳에는 풀밭에 은빛 잔해를미친 듯이 쏟아내는 강이 노래하네.
태양은 우뚝 솟은 산에서 빛나네.
그것은 햇빛으로 넘쳐나는 작은 골짜기.

한 어린 병사, 입 벌리고 모자도 없이,
싱그러운 푸른 풀밭에 목덜미 담근 채

잠들어 있네. 구름 아래 풀밭에 누워 있네,
빛이 쏟아지는 초록색 침대에 창백한 모습으로,

글라디올러스 꽃에 발들을 묻은 채 잠들어 있네.
병든 아이가 미소 짓듯 웃으며 꿈꾸고 있네.
자연이여, 따뜻하게 그를 재워주기를,
그는 추워하네.

향기에도 그의 콧구멍 떨리지 않네.
햇빛 속에 그는 잠들어 있네, 평온한 가슴에 손을
올려놓은 채, 오른쪽 옆구리에 붉은 구멍 두 개가 있네.

시는 많은 시대를 거치면서도 전해지는 강력한 힘이 있다. 시를 지을 당시 랭보는 열여섯 살이었다.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이 한창이던 1870년도였다. 또 다른 시대. 또다른 전쟁. 또 다른 비극. 만일 랭보가 21세기에 시를 썼다해도, 시는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이 시는 지금 다라야의 처지를 이야기한다. 젊은 병사의 죽음과 맞선 저항의 표현, 마지막 안식을 향한 길에 울려 퍼지는, 평화로운 자연이 들려주는 선율의 위로.

베벨 광장(Bebelplatz)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때는 1933년5월 10일, 하룻저녁에 히틀러 정권은 나치 군대가 압류한 수천 권의 반체제 작품을 이 광장에서 불태우게 했다. 
이때 제물이 된 작품에는 체제 전복을 꾀한다고 판단된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혹은 지크문트 프로이트(SigmundFreud)의 책이 들어 있었다. 
그날 밤, 정권의 선전을 맡은괴벨은 신세계의 창조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다. 정권에 반대하는 책이란 존재할 권리조차 없는 세상이었다.

그 후 수십 년이 흐른 1995년, 이스라엘의 조각가 미하 울만(Micha Ullman) 이 이 장소를 다시 찾았다. 
울만의 부모는 독일의 수도를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울만은 책을 불태운 만행을 기억할 수 있도록, 광장의 포석 아래를 파서 가공의 도서관을 만들었다. 땅을 파고 유리판을 덮어서 만든 공간은 일부러 비워두었다. 
내려갈 수도, 들어갈 수도 없었다. 
텅 빈 책장들만 놓인 50제곱미터의 지하 공간을 자세히 살펴보려면 몸을 숙여야 했다. 지금 그곳은 ‘침몰한 도서관(Versunkene Bibliothek)‘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베를린에서처럼 다라야도 언젠가 그들의 베벨 광장을 가질 수 있을까? 

"다라야에 대해 제가 기억에 담고 싶었던 것들이 이런 장면이에요. 결속된 하나의 집단 미래를 건설하려는 공동의 바람, 새로운 생각을 지켜내는 것. 우리는 하나였어요. 결속과 연대감, 다른 도시에도 본보기가 될 수 있는 특별한 경험, 다라야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정신입니다."
샤디는 추억에 빠져들었고, 눈빛에는 향수가 깃들었다.
샤디는 다라야의 이야기를 모험담처럼 말했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해도 조금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요즘 바샤르 알 아사드는 우리를 패배자로 만들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그렇게 무자비한 포위 공격 속에서 4년을 버텨낸 것만으로도 저는 이미 대승을 거둔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뒤에서 한 여자 손님이 빵집이기도 한 이 작은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양팔에 선물을 한 아름 안고 있던 그 손님은 딸의 생일을 위해 ‘눈의 여왕‘과 ‘백설 공주‘
모양의 케이크 중에 무엇을 고를지 몰라 고민하고 있었다.
"더 힘든 건 그다음이에요." 샤디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금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해요. 비행기를 봐도 떨지 않고, 고요 속에 잠드는 법을 배워야 하죠.
갑자기 모든 것이 불변하고, 영원히 약속된 것이 되었어

모든 현실의 문이 잠겼을 때,
세상의 문을 열어준 책장 속의 책들
도서관은 그들에게 피난처이자 치유의 장소였다.

"책이라고?" 그가 놀라 되물었다.
전쟁 한복판에 책이라니, 사람 목숨도 구해내지 못하는 마당에 책을 찾아내는 것이 무슨 소용이람? 
마지못해 친구들을 따라 나선 아흐마드는 무너진 담장을 넘어 들어갔다. 현관문은 폭격으로 날아가고 없었다. 마루의 잔해들 사이로 책들이 흩어져 있었다.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은 그는 그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첫 번째 페이지를 넘겨 서툰 외국어 실력으로 몇 가지 익숙한 단어들을 읽었다. 
(--)사실, 중요한 것은 책의 주제가 아니었다. 
익숙한 대치 상황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
그는 미지의 세계로 도망치듯, 책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아흐마드는 천천히 책을가슴에 끌어안았다. 온몸이 떨려왔다. 그것은 지식의 문이 열리는 전율이었다.
"내가 처음 시위에 나섰을 때와 같은 해방의 전율이었어요."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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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동네 아이와 청소년들이 도서관으로 쳐들어왔다. 대부분 쥐덫만 놓인 초라한 집에서 나와 ‘바깥바
‘람을 쐬러 온 아이들이었다. 이들 중의 하나였던 암자드(Amjad)는 그것을 자신의 새로운 목표로 삼았다. 친구들은암자드에게 ‘사서‘라고 별명을 붙였다.
종이로 된 은신처가 잠시 소강상태를 거쳐 문을 다시 열자, 토론 또한 다시 시작되었다.

새로운 비디오가 도착했다. 발언자는 붉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그는 참가자들을 작은 무리로 갈라서 그 무러들에 퍼즐 조각처럼 생긴 판지 조각을 나누어주었다.
"다시 맞추는 데 45초 드리겠습니다." 
주어진 시간이 끝나자 한 조만이 환호성을 질렀다. 교사는 미소를 지었다. 
"당연한 결과네요. 퍼즐을 맞추기 전에 표본을 본 유일한 조였거든요."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머릿속에 정확한계획이 없다면, 여러분의 발상은 막연할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정한다면, 길을 잃을 위험이 덜한 것이죠" 그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그가 덧붙였다.

 "맹목적으로 무리를 따르지 마십시오. 새로운 장소, 새로운 공간을 개척하세요."
출구도 없이 포위된 도시에서는 역설적인 말이었다.
"중요한 것은 사고입니다. 누구도 자기 목적에 이용하고

자 당신을 마음대로 조작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나다." 단 한 번도 아사드나 다에시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그 속에 담긴뜻을 알아차렸다. 
획일적이며 거세된 사고를 거부하고, 매
"조된 진실의 함정에 빠지지 말라는 뜻이었다. 참가자들은머리를 끄덕거리며 자신의 수첩에 열심히 메모를 휘갈겨썼다.

갑자기 불이 꺼졌다. 방의 한쪽 구석에 설치해둔 오버헤드 프로젝터가 작동하면서 흰색 벽면은 영화관 스크린으로 변했다. 이 다용도 도서관에서는 사람들이 영화도볼 수 있었다! 
그날 상영한 단편영화 제목은 <2+2=5)였다. 처벌이 두려워 학생들에게 잘못된 더하기를 반복하도록 강요하는 어느 교사의 이야기였다. 억지로 거짓을 만들어내는 것에 관한 이 우화는 조지 오웰의 대표작 『1984에서 그려낸 ‘거짓 공식‘을 떠올리게 했다. 이란 출신의 감독, 바바크 아미리(Babak Amiri)가 만든 이 영화는 인터넷으로 내려받은 것이었다. 이 영화에는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영화 속에는 수학 수업이 끝날 무렵, 구석에 웅크리고있던 한 학생이 기존 질서에 도전했다. 강요된 그 숫자를

지우고 대신 자기 공책에 ‘4‘를 적었다. 영화가 상영되던 열람실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울려 펴졌다.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환호성에 흠뻑 빠져서 흰 벽면을 가득 채운 아랍어로 된 이 문장을 읽었다. "만일 세상이 무언가를믿는다면,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일까?"
다라야의 블랙홀 구석에 있는 이 젊은이들이 가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폐허로 둘러싸인 이 성소에서 이들은 참고 문헌을 넓혀가고, 새로운 사상들을 탐구하고, 어두운밤에 출구를 찾고자 밝힌 작은 촛불만큼 매일 조금씩 자신들의 문화적 지식을 더욱 풍부하게 다져갔다. 

지하의 은밀한 생활, 위에서부터 강요된 침묵이 열정과 용기를 담은고함으로 바뀌는 곳. 나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는 영화 속 마지막까지 저항한 그 어린 학생과 같은 열정이 있다. 아직도 유효한 일방적 결정에 도전하고, 대포 소리가 들린다고 포기하기를 거부하고, 어두운 전쟁의 실상을 앞으로 나아가려면 통과해야 할 시금석으로 바꾸었다.
영화 감상이나 강의 시간에 이들은 조국의 새로운 역사 한장을 써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 길이 험난하다는 것은 그들도 안다. 그 길은 망명 중인 저항자들에 대한 토론이나 제네바의 호화로운 호텔과

부패 스캔들하고는 거리가 멀다. 이들은 앞으로의 국기 색깔, 사회에서 이슬람의 위치, 장차 시리아에서 쿠르드족의 역할 등에 대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대신 소박하게 한걸음씩 진보하며 사고의 팔레트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나가기를 좋아한다.

아랍의 봄 초기 이슬람 국가 발전의 모범 사례로 여겨졌던 터키를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다. 다라야의 젊은이들은 어느 순간이 되면 ‘이슬람, 민주주의, 발전‘ 모두를 집대성할 수 있다고 믿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비판적 시각을 유지했다. "터키의 경험을 다른 나라에 적용할수 있을까요?" 잇따른 비디오에서 다라야의 투사가 자문했다. 그에게 분명하게 대답해준 것은 이븐 할둔을 앞세운 오마르였다. "네, 하지만 터키의 총리 에르도안(Erdogan)의실수에서 교훈을 얻는 조건에서만 그렇습니다." 또 한 번,
질문이 이어졌다. 저항에 뒤따르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변화를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떤 정권을 세워야 합니까? 이슬람의 정치가 민주주의에 녹아들 수 있을까요?
배움을 향한 이들의 갈증은 끝이 없었다. 어느 2월의 아침, 아흐마드는 나에게 또 다른 지하의 아고라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곳은 2015년 말 도서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처음으로 세웠다. 
극비로 운영하는 이곳은 스카이프를 통해 원격 화상회의를 개최하는 제2의 토론 장소가 되었다. 이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는 거대한 스크린을 마주하고 앉아 눈앞에 나타난 교수나 추방된 저항자들에게 무엇이든 하고 싶은 질문은 모두 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더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정책의 기준을 세울 기회였다.

"지난주에 우리는 비종교적 저항파인 부르한 갈리운(Burhan Ghalioun), 기독교 출신의 반대파 조르주 사브라(George Sabra) 등을 초청했어요."라고 아흐마드가 밝혔다.
"우리는 과거 지하디스트의 아들인 팔레스타인 출신 후타이파 아잠(Huthaifa Azzam)에게도 발언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주장했던 폭력과 단절한 사람입니다.
그의 말을 듣는 것은 우리 청년들이 급진적 사상에 관심을기울이는 것을 견제하려는 방편이었습니다."
안전상의 이유로 비밀리에 진행된 이런 강연을 담은 영상은 어떤 것도 외부에 노출되지 않았다. 정권의 관심을끌지 않으려고 그리고 무엇보다 폭탄을 퍼붓는 헬리콥터의 사정권에 들지 않고자, 주최 측은 토론회 날짜를 알릴

때 전통 방식을 취하여 입에서 입으로 전달했다.
"이것은 사람들이 늘 꿈꾸던 하나의 대학이에요. 미리 정해진 가이드라인 없이 검열도 받지 않고, 사방으로 열려있는 배움의 장소입니다." 아흐마드가 설명했다.

또한 이 은밀한 대학은 위반의 장소였다. 배움을 통한 위반, 다라야의 이 비판가들은 새로운 칸막이벽에 달린 칠판에 건설 중인 미래를 노래하는 가사를 적을 수 있었다.
가냘픈 선율, 어둠의 골짜기를 거쳐 죽음의 고비에서 헤매는 한 도시의 멜로디.

아흐마드는 당연한 일인 듯 말했다. 그의 나라는 전쟁중이다. 그의 도시는 깊은 혼란과 위기에 처해 있다. 다라야는 소란과 폭발, 화염에 휩싸여 있다. 그리고 그 ‘카르카
‘베(혼돈)‘의 한복판에서 아흐마드가 나에게 자기계발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집단보다 개인을 우선시하는 것이 유행이던 당시 서구 사회에서 인기를 얻은 이 책을 말이다. 

나는 요약본만 읽어봤는데,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이책은 개인의 성공 가능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길로 나아가려면 자아의 형성이 필수적이라고 이야기한다. 

파리·런던·뉴욕· 두바이 등의 비즈니스계에서는 앞다투어 이를 활용했다. 게다가 이 책은 아랍어를 포함한 서른여덟 개 언어로 번역된 바 있다. 그렇다고 다라야의 책장에서 이책을 발견하다니.……

"이 책은 우리에게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어쩌면 나침반 같기도 해요."라고 아흐마드가 말했다.
이렇게 다라야에서 삶은 이어지고 있었다. 소위 ‘신에 미친 사람‘으로 왜곡된 이들은, 다마스쿠스의 정권이 선동하는 고리타분한 사상이 아니라, 새로운 종교인 ‘자아‘를 계발하고 있었다. 살육에 목마른 무법자나 정권이 선전하고자 하는 이슬람의 도구 같은 이미지와 모순되는 개인적

인 과정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작품이 즐겨 읽는 도서목록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제일 처음 우리에게 그 책을 알려준 사람은 우스타즈어요"라고 아흐마드가 대답했다.

우스타즈는 다라야 시민 저항 세력의 노장이었다. 이 불굴의 스승에게는 정말 수많은 방책이 있었다.
"선생님은 그 책을 사이드나야의 감옥에 있을 때 처음으로 읽었대요. 새로운 발견이었죠! 이 혹독한 세상에서 약해지지 않으려고 선생님은 그 책을 처세술의 안내서로 삼았습니다. 그때부터 선생님은 그 책이 말하는 철학을 따르며, 우리도 그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그 사상적 지도자는 감옥 생활을 경험하며 미국의 자기계발서에서 영감을 얻었고, 감금 상태가 이어지면서 음지의 젊은 저항자들 역시 이를 활용하게 되었다. 
서구 사회에서 이 책은 이혼 결별 · 실업 등의 일시적 위기에 효과적인 해법을 원할 때 찾는 책이다. 흔히 알려진 고통에 하는 단순한 조언이다. 

하지만 감옥과 같은 다라야에서 시리아의 독자들은 이 책에서 뻔한 해답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환경 속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열쇠를 찾아냈다. 이 책은, 모든 것이 불안정한 시기에 안정감을 주는 동반자로서, 그들

이 만나지 못했던 심리 상담가와 같았다. 전쟁의 폭력으로일어난 불안감뿐 아니라 폐쇄된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데서 오는 위기에도 도움이 되는 완충재였다. 다라야의 일상 속에 만연한 전쟁이 ‘철창에 갇힌‘ 삶에서 생기는 고통 즉 언쟁과 질투 그리고 정치적 불협화음 등을 피하게 해주진 못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제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한 단체 생활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죠. 나와 다른 타인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또 우리 사이에 건전한 경쟁적기류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 등에 말이죠."
아흐마드는 처음에는 우스타즈가 준 요약본에 만족했다. 이 책의 원서는 건물의 잔해 속에서 되살려낸 책 목록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책 전체를 읽을 방법을 마련해준 것은 역시 인터넷이었다. 구글을 이리저리 검색한 끝에, PDF 파일이 그의 컴퓨터 화면에 나타났다. 그것을 내려받아 인쇄하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다라야에서 종이는 비싸다 못해 희귀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아흐마드는 종이 한 장에 책 네 장의 내용을 인쇄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빼곡하게 들어찬 깨알 같은 글씨의책은 혁명 전 외투 속에 숨겨 돌아가며 읽었던 은밀한 팸

플릿처럼 제본했다.
"책을 읽으려면 눈을 찌푸려야 하긴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 책에 대해 토론합니다. 그것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 좋은 책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구에 부용하고자 2쇄를 만들어야 했어요. 덕분에 두 차례 강연 과정도 마련되었죠. 처음에는 도서관 내부에서 열렸고, 두번째는 새로 만들어진 지하의 토론 장소에서 열렸습니다.
이 강연을 스카이프를 통해 소개한 사람은 아랍 세계 전문가인 야시르 알아이티(Yasser al-Airi) 였습니다. 이 책에 대한강연은 정말 성공적이었어요!" 아흐마드가 인정했다.

귀퉁이가 접히고, 긁히고, 색이 바랜 이 책은 손에서 손으로 꾸준하게 전달되었다. 읽히고 또 읽히면서 하나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특히 더 많은 사상자가 있었던 2016년겨울, 이제 5년째로 접어드는 전쟁이 언젠가는 끝나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게 해주는 요소가 이 책에는 들어 있었다. 책의 내용에 빠져들면서, 전쟁을 일시적 차원의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정상적인 상태를 회복하고, 잔혹한 폭격과 늘 마주하는 죽음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이는포위가 이토록 오래 지속될지 예상하지 못했던 병사들의 조바심을 극복하는 일이기도 했다. 또한 무엇보다도, 끊임

없이 폭격이 이어지는 불안정한 상태가 문학이나 정치적 고찰에 관한 책 읽기를 포기하게 할 때, 
더 실제적인 글 속으로 도피한 것이었다. 

그것은 깊은 수렁의 끝에 놓인, 
고통스러워하는 영혼을 쉬게 할 
보이지 않는 소파와도 같았다.

플릿처럼 제본했다.
책을 읽으려면 눈을 찌푸려야 하긴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 책에 대해 토론합니다. 그것은 성공하는 사람들의7가지 습관이 좋은 책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구에 부응하고자 2쇄를 만들어야 했어요. 덕분에 두 차례 강연 과정도 마련되었죠. 처음에는 도서관 내부에서 열렸고, 두번째는 새로 만들어진 지하의 토론 장소에서 열렸습니다.
이 강연을 스카이프를 통해 소개한 사람은 아랍 세계 전문가인 야시르 알아이티(Yasser al-Aii)였습니다. 이 책에 대한강연은 정말 성공적이었어요!" 아흐마드가 인정했다.
귀퉁이가 접히고, 긁히고, 색이 바랜 이 책은 손에서 손으로 꾸준하게 전달되었다. 읽히고 또 읽히면서 하나의 상
‘징처럼 여겨졌다. 특히 더 많은 사상자가 있었던 2016년겨울, 이제 5년째로 접어드는 전쟁이 언젠가는 끝나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게 해주는 요소가 이 책에는 들어 있었다. 책의 내용에 빠져들면서, 전쟁을 일시적 차원의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정상적인 상태를 회복하고, 잔혹한 폭격과 늘 마주하는 죽음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이는포위가 이토록 오래 지속될지 예상하지 못했던 병사들의조바심을 극복하는 일이기도 했다. 또한 무엇보다도, 끊임

쭉한 벽면에 울리는 메아리 소리를 상상했다. 2 더하기 2는4 이지 5가 아니다. 진정한 학교, 그 어떤 필터도, 그 어떤거짓의 근시안도 없는 진실.

놀랍도록 ‘보이지 않는‘ 존재였던 
여성들이 마침내 거리에 다시 나타났다. 
암흑에서 빠져나온 그림자처럼, 여성들은 대피소 밖에서 새로운 위험을 무릅썼다. 
그들은 인생의 지혜를 얻게 하는 사소한 수다를 떨며, 온갖 시련의 소란이 다시는 찾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뜬눈으로 지새운 밤,
놀란 아이의 그치지 않는 울음, 다시 깨지 않으려고 잠을 청하던 강박증도 이제 끝났다. 폭격이 있던 시절에는 젖을 먹일 수 없었던 젊은 어머니의 가슴에 밤낮으로 다시 젖이 돌았다. 
용감한 어머니들은 녹이 슨 낡은 유모차를 밀며, 젖먹이들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며 다녔다. 포위된 이후로 약 600여 명의 아기가 태어났다. 대부분 지하 대피소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처음으로 자연의 빛을 맛보았다. 아이들은 울고 소리치며 재잘거렸다. 진실은 아이들의 입에서 나온다고 했다. 다라야에는 더는 민간인이 거주하지 않는다고 우기는 정부의 주장을 반박하는 데 제일 좋은 방법은 이 옹알이하는 아이들의 소리일 것이다.
지옥 같은 몇 달이 지나고, 다라야의 저항자들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들은 자신의 꿈을 떠올렸다.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인생에 대해, 결혼에 대해 그리고 직업에 대해서도 늘 자세하게 이야기해주는 아흐마드는 사람들의 소식을 전해주는 데 열중했다. 

강사였던 우스타즈는 뜻밖의 휴지 기간을 이용해서, 이제야 약혼이나 결혼을 감히 꿈꾸게 된 사람들을 위해 부부 관계에 관한 조언을 담은새로운 세미나를 준비한다고 한다.

오마르는 도서관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임시 휴관이 끝난 뒤 오마르는 도서관에서 전보다 더 많은 책을 읽으며 새로운 강연도 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오는 배움과 나눔을 향한 갈증이었다. 발산하고 싶은 욕구이기도 했다. 폐허가 된벌판 한가운데에 축구장이 세워졌다.

대피소는 곧 폐쇄하고, 둑은 다시 평평하게 하고, 건물의 잔해는 치웠다. 열 명으로 된 여덟 개조가 꾸려졌다. 

각조에는 병사, 행동주의자, 구경꾼이 모두 섞여 있었다. 임시로 마련한 계단식 좌석에 앉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티셔츠를 맞춰 입은 이들의 평화로운 행진이 이어졌다. 

갑자기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이 되었다. 이제 미래는 상상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현재를 사는 것에 다시 의미가 생기게 되었다. 이제 마을에

서는 입는 옷마저 화사해졌다.
담벼락도 다시 찾아온 봄을 노래했다. 거리의 모퉁이마다 부서진 인도의 끝에, 때로는 들쭉날쭉한 건물의 구석에시의 구절과 반짝이는 스텐실 그림, 언어의 방패들이 등장했다. 그래피티 예술가인 아부 말리크 알샤미 (Abu Malik LShami)는 물감으로 천연색의 희망을 그리고자 마을을 돌아다녔다. 폭격의 여파로 무너진 어느 건물에 파란색과 노란색의 옷을 입은 네다섯 살 소녀의 크로키를 그렸다. 죽은이들의 해골이 쌓인 언덕 위에 앉은 소녀는 오동통한 손으로 ‘희망(HOPE)‘이라는 글자를 대문자로 썼다. 이 벽화는낙관주의를 권고했다. 전쟁을 조롱하는 형태로 기성 질서를 비판하는 흔적을 남겼다.

아흐마드가 사진에 담은 또 다른 벽화가 내 관심을 끌었다. 그것은 창문이 부서진 어느 교실이었다. 형체만 겨우남은 책상과 고철로 된 의자 들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부 말리크 알샤미가 뒤쪽 칠판에 분필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끄적거렸다. 나는 아랍어로 된 그 문장을 해독했다.

"옛날에는 제발 학교가 무너졌으면 좋겠다고 농담했다. 그런데 정말 학교가 무너졌다." 이 자조는 또 다른 방패막이였다. 내 시선을 조금 더 왼쪽으로 움직이자 그림이 이

어졌다. 그림에는 맨발에 누더기를 입고 배낭을 멘 한 소년이 핏빛의 검붉은 글씨로 ‘다라야‘라고 적고 있었다. 나는 또 다른 행동파인 그래피티 예술가, 마이드 모하다마니(Madjd Mohadamani)를 떠올렸다. 그가 2016년 2월 19일에군대의 탱크가 쏜 포탄에 맞아 사망했다고 아흐마드가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또 반사적으로 반아사드의 그래피티를 그렸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2011년 봉기의 불씨가 되었던 다라의 청소년들이 떠올랐다.
그 그림은 이 모든 이에게 보내는 경의와 같았다.
또한 "우리는 깨어 있다."라고 외치고 싶은 바람이기도했다.
이들의 멍든 내상에도 불구하고, 다라야는 기어코 인생을 예찬하고자 했다.

주방 세제와 같은 생필품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건강을 지키고 전염병을 예방하는 데 필요한 세정제도 부족합니다.

우리, 다라야에 사는 여성들은 다음과 같이 요청을 드립니다마을 모든 지역에서 포위를 즉각 철회할 것.
도로를 개통하고 생필품, 식량, 의약품, 수돗물, 옷, 신발,
청소 용품 등의 공급을 재개할 것.
우리는 타격을 입은 모든 사람에게 즉각 원조의 손길을 보내줄 것을 유엔과 인권 기구에 요청하는 바입니다.
기자 여러분께서는 다라야에 관한 기사를 써주시고, 기근이 전면적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우리 마을의 상황에 대해주의를 환기해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우리는 굶어서 죽는일이 벌어지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갓난아기와 연로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견디지 못하고 숨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께 부탁합니다. 너무 늦기 전에 필요한 도움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편지 말미에 삽입된 서명을 하나하나 읽어나갔다.
사우산, 카디야, 아지자, 무나, 이크람, 사마르, 나자, 아말,
말락, 아마니, 키나즈, 사미라, 라마, 하이파, 파테마, 마하,

메르자트 누르 주마나, 아프라, 가다, 쿨루드, 와르다, 루브나 아메나, 아트・・・・・・ 세상을 향해 보내는 최후의 구조 요청처럼 피로 쓴 이름의 행렬.
내가 알기로 이것은 ‘보이지 않는‘ 존재였던 여성들이 침묵을 깨뜨린 첫 번째 사례였다.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될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며, 익명에서 벗어난 여성들 그들이 오래전부터 지켜온 신중함을 깨뜨려야 할 만큼 이들을 짓누르는 절망의 무게를 감히 헤아려보았다. 이 편지는 환심을 사거나 속이거나 조작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는 있는 그대로였다.

나는 그들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 나는 그들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그들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가정주부, 교사, 조산원, 운동가. 나는 이들의 일상에서 고통을 읽었다. 
그 피로, 유산, 조산, 생리대 부족 등의 상황을 안다. 

나는 놀란 아이들이 밤에 오줌을 싸고, 불안한 어머니들은 불면증에 시달리며 어둠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것을 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이 모든 불행은 전사의 용기를 북돋우고자 전쟁이 은폐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남성의 승리 뒤에는여성의 고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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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주를 딛는 틀은 첫바퀴다. 대개는 나무들을 만들어 쓰지만,
내가 어렸을 적 우리 집에서는 그물망이 빠져나간 천체를 사용했다. 정결한 무명 자루에 뜨거운 콩을 담아 그 둥근 테두리 안에넣은 다음 깨끗한 흰 버선을 신고 가만히 올라서서 꼭꼭 디뎠다.
뜨거울 때 디뎌야 콩이 잘 으깨지므로 엄마는 발바닥이 뜨거워간간히 바닥으로 내려서곤 했다. 그래도 뜨겁다거니 힘들다거나졸립다거니 내색하지 않았다. 밤새 메주를 디뎌도 엄마는 졸린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안동의 옛사람들을 지배하던 유교 정신의 본질은 경이었다. 우주 만물 앞에 고개를 숙이고 정성을 다하려는마음가짐이었다. 위대한 사상들이 대개 그렇듯이 유교 역시 까다로운 예법의 껍질을 벗기고 들어가보면 본질은 아주 심플한것이었다.
최근 우연한 기회에 《대학》의 한 구절을 다시 읽었다. 어려운한자가 전혀 없이 간결하고 명료했다. 《대학》은 격물치지가 수신의 바탕이고, 수신해서 제가하고 제가해서 치국하고 치국해서 평

단계별 공부법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는 책이었다. 유교의 공부란 과거시험이 목적이 아니다. 덕을 쌓아 군자 혹은 선비가 되는 것이 목적이다. 사서와 삼경은 소가 풀 뜯어먹는헛된 소리들이 아니라 덕을 쌓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명기해둔 간명한 지침서였다.

현대 교육이 그걸 왜 그토록 어렵고 멀게만 느끼게 만들었는지돌아보면 의아할 뿐이다. 그건 다름 아닌 삶에 정성을 다하는 태도가 인간의 근본이란 소리였다. 마주치는 우주만물을 가벼이 대하지 말고 정성을 다해 들여다보면 거기서 앎이 나온다는 소리였다.

사서와 삼경을 다 읽지는 않더라도 어려서 잠깐 <천자문>과 <소학을귓전으로 듣기만 해도 그 본질은 여린 영혼 안에 각인된다.
안동의 삶이 지향하는 것은 분명히 출세가 아니었다. 되레 출세하고 벼슬이 높아지는 것에 살짝 혀를 차는 경향이 있었던 것같다. 그러니 벼슬이 높다고 그 앞에 고개 숙일 리가 없다. 돈을많이 벌었다는 것은 더욱이 살짝 하류로 쳐버린다.
몸에 붙은 껍데기가 아니라 그 안에 쌓인 덕이 얼마만 한지를먼저 따지는 정신. 그걸 일컬어 쉽게 선비 정신이라고 불렀겠지만 이 도도한 자본과 물질의 시대에 그런 정신이 도대체 어느 정도 먹힐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고, 현재의 안동에서 그 정신이얼마나 발현되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다. 아무튼 그 격물치지와수신제가 사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사이를 다리 놓는 것이

난젓‘, 명태와
무가 빚어낸 싱그러운 단맛

무가 제철이다. 알다시피 제철 채소는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하다. 철마다 맛있는 채소를 길러내는 땅에 발을 딛고 산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황홀하다. 어쩌면 이승에 생명을 얻어 사는 보람은그걸로 충분한 건지도 모른다. 그 외의 것은 모조리 덤이다. 영화를 보는 것도, 옷을 지어 입는 것도,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마주앉은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도, 운 좋게도 사랑하는사람과 아이를 만드는 것도, 그 아이가 내게 방긋 웃는 것도 땅에발을 디디는 기쁨 이후에 감각하는 덤에 속한다. 누구의 삶이든이 덤이 더 크니 생명을 얻어 지상에 둥지를 튼다는 것은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 그러나 우린 덤에 취해 정작 본질을 잊고 산다.
심각한 어리석음이다.
생의 본질! 그건 가을무의 푸른 어깨에 있다. 땅속에서 서너 달뿌리를 박고 자라면 무는 땅기운을 받아 지면 위로 불쑥 솟아오른다. 거기 맑은 바람과 햇볕이 듬뿍 쏟아진다. 간간이 내려주는빗물을 빨아 마신다. 무를 키운 지풍화수는 바로 내 생명의 본질이기도 하다. 나 역시 무처럼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게다가 땅과 바람과 햇볕과 물 없인 하루도 살 수 없다.
땅 위로 솟아 햇볕을 받은 무는 점차 제 머리 위로 드리운 싱그러운 무청의 빛깔을 닮는다. 가을이 되어, 햇살과 바람 속에 서서 그 푸른 무를 한 입 와사삭 깨물어 먹는 일, 그런 순도 백퍼센트의 기쁨이 또 있을까. 사람은 그런 순수하고 완벽한 순간에 영원에 닿는다. 그런 순간을 만끽하는 이들만이 우주와 생명의 비밀스런 뜻을 포착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무는 채소지만 전엔 과일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았다. 가을무는달고 물이 많아 웬만한 배는 곁에 얼씬도 못했다. 겨우내 우리집부엌에서 채 썰어지고 깍둑 썰어지고 어슷 썰어진 무가 너댓 접은 족히 됐으리라. 무 요리 중 내가 특히 좋아한 건 ‘난젓‘이었다.
난젓! 그건 ‘난타‘의 ‘난‘과 같은 항렬로 마구 두드린다는 의미였다. 겨울이 깊어지면 엄마는 난타공연하듯 도마를 리드미컬하게 두들겼다. 도마 위에 올려진 건 무가 아니라 ‘명태‘ 였는데 안

정서를 담는 말은 실은 대개 여성어였다. 

엄마는 어른을 만나면 일단 첨절 안계시냐고 물은 다음 신관이 어떠시냐고걱정스런 얼굴을 했고 헤어질 때는 소관하시라고 고개를 숙였다.
엄마 곁에 서서 나는 그 ‘첨절‘과 ‘신관‘과 ‘소관‘이란 말을 곱씹으며 어른들의 근심스럽고 엄숙하고 복잡한 세계를 두렵게 기웃거렸다. 안동에 가도 할매들 외엔 이젠 아무도 그런 말로 인사하지 않는다. 

첨절이란 별일이고 신관이란 얼굴이고 소관이란 볼일이다. 그런 말이 그토록 몸에 착 밴 세대는 엄마로서 끝나버렸다.
텔레비전이 안방마다 보급되면서 지역 말은 억양만 남아 있고 어휘들은 급히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그 책의 어느 페이지에 "정개미에 연변 붙이나? 불가가뜨거우이 내가 좀 부끄마"라는 말이 등장했다. 한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만약 쟁개미란 말과 연변이란 말을 아예 몰랐다면 이런 반응이 나왔을 리 없다. 그리고 만약 일상어로 내가 그 말들을죽 사용해왔다면 역시 이런 반응이 나오진 않았을 거다. 분명 알고 있다가 잊어버린 말들이었다. 30년 혹은 40년 동안 한 번도 쓰지 않은 말이었기에 사람에게 이토록 격렬한 반응을 불러왔던 것이다. 온다는 것은 인류학적인 수수께끼 아닌가.
그랬다! 우린 프라이팬을 쟁개미라고 불렀다! 그 위에 팥소를넣어 부치는 밀가루떡을 연변이라고 불렀다! 어원 같은 건 난 모르겠다. 그런 말이 있었고 그런 말을 잊었다. 왜 잊었는가. 남들이

"님은쑥을 캐겠지"


볕에 앉아 쑥을 캐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피채소혜 일일불견 여삼추혜....… 아마도 시경에 나오는 시일 텐데 처음 배운 건 고등학교 한문 시간이었다. "피채갈혜彼일일불견一日不見 여삼월혜如三月 피채소혜 일일불견-8不見 여삼추혜如三秋兮 피채애혜彼采艾兮 일일불견一日不見 여삼세혜如三歲兮.

포털의 검색창에 ‘피채소혜‘를 쳐보니 금방 요렇게 검색된다. 허무할 정도로 빠르고 정확한 인터넷의 배신감이여. 나의 떠듬떠듬기억을 배신하고 아련하게 곰삭은 추억을 배신하고 뒤통수에 내리쬐는 《시경》의 역사를 배신하는구나.

인터넷엔 여러 해석이 난무하지만 우리 한문선생님이셨던, 그때 내 눈에는 이미 칠십이나팔십쯤 돼 보였던 봉구 할배는(실제로는 아마 50대?) 눈을 감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해석하셨다.

"님은쑥을 캐겠지
하루만못보아도
가을이 세 번 지난것 같구나."

우리가 "우와~우와~" 소리 지르자
봉구 할배는 일갈하셨다.
"역시 《시경》은 음란해서 못쓰겠어. 어린 계집아들한테는 가르칠 게 못 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얼굴에는 주름 가득한, 찢어질 듯한 미소를 지으셨다. 
쑥 캐고 앉았으면 예전에 돌아가신 봉구 할배 그립다.

나의 <오감도>

뒤란한켠에 손바닥만한 쑥밭이 있다. 작년 여름 이후 부쩍 지저분해지던 쑥대궁이를 뽑지 않고 방치한 것은 오늘 같은 봄날에 어린 쑥을 뜯어 먹으려는 전략(?)이었다. 

그제도 듣고 어제도 뜯고 오늘 아침에도 뜯었다. 두어 줌만 뜯어와서 통밀가루에 슬슬굴려찜솥에 잠깐만 올리면 쑥버무리 요리 끝~이다. 그제와 어제와오늘 마주앉은사람이 매번 달랐지만 다들 맛있다고 말했다.

나는 ‘쑥버무리‘라는 제목의 <오감도>를 한번 써보고싶다는 유혹에 시달렸다.

"열세 명의 아이가 도로를 질주하오 첫 번째 아이가 맛있다고 그러오 두 번째 아이도맛있다고 그러오세 번째 아이가 맛있다고 그러오열세 번째 아이가 맛있다고 그러오....쑥밭은 막다른 골목 안에 있는 아니 막다른 골목 안이 아니어도 좋소 열세명의 아이가 도로를 질주하지 않아도 좋소 쑥밭에 나란히 앉아있어도 좋소쑥밭에 나란히 누워 있어도 좋소, 어깨 위에 볕이 나른히 내리쬐어주어도 좋소 열셋의 아이는맛있는 아이와 맛있어 하는 아이와 그렇게뿐이 모였 다른 사정은 없는 것이 차라리낫겠소"
올봄이 가기 전에 열세 번째 아이까지 쑥버무리를 먹여 나의 <오감도>를 완성해야 할텐데, 이 비 오고 나면쑥이 너무 쇠어버릴까 걱정이다.

쑥을 뜯으며 엄마를 생각하다

제비꽃과 민들레 사이에 앉아 쑥을 뜯으면서 엄마 생각을 합니다. 어깨와 머리통에 봄이 따끈따끈 내려앉아요 엄마뿐 아니라 고모 생각, 예령이 생각, 할머니 생각, 한달막씨생각도 합니다. 봄볕에 나앉아 쑥을 캐던 우리 집안 여자들이요. 다들 나보다 먼저 여길 떠나버렸지만 어디선가 쑥 캐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듯한 여자들이요. 
예령이 빼고는다들 허리 한번 못 펴고 힘겨운 인생을 살았지만 엄마도 고모 할머니도 한달막 씨도그리 고통스럽지는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비로소 합니다.
이런 봄볕 속에 쑥을 캐는 한나절을 해마다 몇 차례씩 누려왔다는 것만으로 인생은 응분의 위엄을 획득하는 것 아닐까요 

공기 가득 미만한 볕이 되어 내 머리통을 간질이는 엄마, 엄마보다 진화된 삶을 살겠다는 결의가 내겐 이혼이었고 이혼 후 과연 내 일상은 격상했어요 
비로소 아무 곳에도 끄달리지 않을 수 있게 됐어요, 쑥을 캐다 말고 낮잠이 들어도 쑥속에 잡티가 들어도 개똥이 묻어도……… 온전히 내 책임 내 자유~한 세대 전 우리 집안 여자들의 책임과 자유를 전부 합한 것보다 나는 더 자유롭고 더 강력해졌어요 

난 걷고 싶을 때 걷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춥니다. 하루 한 편의 시 혹은 에세이를 쓰고 이틀에 한장 그림을 그리면 나는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요. 
시장이 확보된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의 느슨한 생산력으로도 내 한 입에 거미줄 치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뜻이지요.

난 엄마처럼 자취하는 시동생을 위해 안동읍까지 신작로 30리 길을 장작을 머리에 이고 걸어가지 않아요. 
고모처럼 조카를 위해 전신거울을 등에 지고 대명동에서 산격동까지 골목길을 질주하지 않아요. 
한달막씨처럼 취나물과 고사리를 뜯기 위해(장에 팔아 돈을 벌기 위해서였고 실제로 한달막 씨는 왜 많은 돈을 통장에 모았다고 소문났지만 결국 그 돈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저세상으로 갔지요) 하루 열두시간씩 산길을 헤매 돌지않아요

나도 긴 시간 걷고 질주하고 헤매 돌지만 시동생을 위해서도, 조카를 위해서도 더군다나 돈을 위해서는 천만 아닙니다. 
두 발로 걷는 행위가 나를 우주와 밀착하게 만들고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철학적 경험이 되어 흡족한 들숨날숨의 리듬을 만들어내기때문이지요 

이건 내가 이제 별로 욕구가 없는 인간, 물질이든 정신이든 바라는 게 많지 않은 인간이 되었다는 증명일지도 모르겠어요. 
이 상태가 언제까지 유지될는지는알수없지만 어쨌든 봄볕 아래 쑥을 캐려고 엎드린 오늘 내게는 세상이 돈짝만합니다. 
우리 집안 여자들 다 불러내 잔치라도 벌이고 싶습니다. 그런데 나말고는 남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군요 아, 엄마가 반대하면 한달막씨는 부르지 않을게요 
근데 아이 낳고 살았던 아버지의 ‘작은‘을 저쪽세상의 엄마가 간단히 내치지는 않을거라는 믿음, 이건 대체 뭐지요?

글쓴이 김서령

칼럼니스트, 안동 출생. 경북대 국문과 졸업. 한때는 국어교사였다가 신문, 잡지에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남의 이야기 듣기를 즐겨 급기야 사람을 만나 얘기 듣는 것을 직업으로 삼게 됐다. 지금은 사라진 잡지 《샘이 깊은 물》에서인물 인터뷰의 매력에 눈떠 인터뷰 칼럼을 주로 써 왔다.
천생 글쟁이이고 이야기꾼이었던 그는 숱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과일이 서리를 맞아야 단맛이 돌고 향기를 풍기듯,
인생도 고난 속에서 익어간다고 믿었다. 

향토색 짙은 우리말을 마침맞게 구사하는 그의 글은 단아하고 그윽하면서도 생기발랄하고 영롱해서 많은 이들이 우리 시대의 일절로 꼽았다. 수년째 투병한 끝에 2018년 10월 영원한 자유,
를 찾아 떠났다. 

펴낸 책으로 여자전》, 《안동 장씨, 4백년명문가를 만들다》, 《김서령의 家》, 《김서령의 이야기가 있는 집>, <삶은 천천히 태어난다》, 《참외는 참 외롭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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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치 이놈이 얕은 맛이 있어 놔서・・・・・・큼큼・・・….."
점잖은 어른이 생선 가시를 깨끗이 발라 드신 건 체면을 잊은행위다. 어쩌면 혀에 대고 쪽쪽 빨았을지도 모른다. 상상만으로도 불경스럽다. 얕은 맛이란 그렇게 혀에서만 단, 달게 먹고 난후엔 조금 민망해지는 그런 맛이다. 간사해서 사람의 혀를 지배하는 맛이다. 어쩌면 살짝 ‘죄‘의 냄새가 깃든! 식욕이 성욕과도흡사하게 허망하고 말초적인 맛이다.

그러나 깊은 맛은 반대다. 먹고 나서 전혀 죄스럽지 않다. 빈접시가 부끄러울 리도 없다. 양념장이 없으면 아무 맛도 느끼지못하는 그런 종류의 밍밍한 맛이다.

얕은 맛이 혀가 느끼는 맛이라면 ‘깊은 맛은 위가 느끼는 맛이다. 어쩌면 ‘깊은‘과 ‘얕은‘이란 수식은 그것을 느끼는 신체 부위의 심천 때문에 붙여진 것일 수도 있겠다! 

돌연 든 생각에 무릎을 치다 말고 나는 얼른 손을 내린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얕은 맛은 어린아이들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면 깊은 맛은 나이 들어야 제대로 아는 맛이다. 마치 여자들이 아이를낳고 난 후에야 미역국 맛을 제대로 아는 것처럼! 그렇다면 맛의심천이란 신체 부위의 심천이 아니라 연륜의 심천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배추적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은 이들은 처녀들을 빼고는 모두 외로움에 사무쳐본 적이 있는 이들이었다.

여섯 살인 나도 몰래 삼키는 외로움이 엄연한데 염치만 다락같이 높고 곡간은 텅 빈 어매 아배를 가진 스무나믄 살 처녀들이 아픔을 모를 리야!

아픔은 사람을 사무치게 만든다. 그리고 사무침은 사람을 의연하게 만든다. 그래서 임하의 아이들은 열 살만 넘으면 대개 의젓해졌다. 그 의젓함은 특히 여자들이 더했다.

어른 중에도 간혹 자발없고 참을성 없는 이들이 있긴 했다.
 누가 무슨 일에 울고 짜고 요란을 떨면
"쯔쯔! 생이라 그렇지!"라며 바야흐로 속이 익어가는 과정을 가엾게 여겼다. 

생속이란 아픔에 대한 내성이 부족하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생속의 반대말은 썩은속이었다. 속이 썩어야 세상에 관대해질수 있었다. 산다는 건 결국 속이 썩는 것이고 얼마간 세상을 살고난 후엔 절로 속이 썩어 내성이 생기면서 의젓해지는 법이라고배추적을 먹는 사람들은 의심 없이 믿었던 것 같다.
그렇게 조금씩 속이 썩은 사람들끼리 둘러앉아 먹는 것이 배추적이었다.

날것일 땐 달았던 배추도 밀가루를 묻혀 구워놓으면 밍밍하고 싱거워졌다. 생속을 가진 사람은 배추적의 맛을 몰랐다. 
배추적을 입에 넣어 "에이 뭔 맛이 이래? 싱겁고 물맛만 나네!" 하면 자기 속이 생속이라는 고백이었다. 곱게 자란 처녀들이 그랬고 남자들도 대개는 그랬다. 
하긴 남자들 상엔 배추적 같은허드렛 음식은 아예 올리지도 않았다.


이번엔 썰 차례다. 엄마가 어느새 부엌에서 칼을 가져왔던가.

칼은 시커멓다. 자루로는 마늘을 다지고 칼등으로는 견과류의 껍질을 으깨고 손잡이 쪽 날로는 무 껍질을 긁고 가운데 날로는 채소를 자르며 날 끝으로는 깡통을 따는, 가히 만 가지 기능을 가진 칼인데 겉모양은 그저 음전하고 덤덤하다.
우리집 일꾼 황씨가 담배건조실에 불 때면서 날을 야물게 벼려준 칼이다. 

며칠 전나는 저 칼로 객구물을 받아먹었다. 그래서 저 칼날의 맛을 안다.

칼날은 선뜩하고 비리고 아렸다. 곡식과 소재와 길짐승과 날짐승과 갯것들의 맛을 나는 모른다고 할 수 없다. 엄마젖을 떼고 암죽을 먹고 쌀미음을 먹고 조금씩 밥알을 씹을 줄 알게 되면서 내가맛본음식의 가짓수는 아마 백을 훌쩍 넘을 것이다.

그러나 칼 맛은 그 어느 것과도 달랐다. 왜 사람이 금속류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인지를 나는 절로 납득했고 왜 칼이 사람에게 두려움을 주는지를 스스로 터득했다. 

그건 지구 깊숙이 숨은 금지된 광석의 맛이었다. 뜨겁지 않았지만 혀가 델 듯 아렸고 갯것이 아니지만 구토가 솟을 듯 비렸다.

엄마가 그 칼을 들어 접힌 밀가루 반죽 위에 올려놓는다. 나는반사적으로 숨을 죽인다. 훌륭한 숙수가 써는 국수발은 가늘고길어야 하지만 그보다 먼저 칼 땀이 고르고 촘촘해야 한다. 아니촘촘하게 썰어야만 발이 가늘어진다.

부엌을 내려다보는 것을 실은 나는 꽤 좋아하고 있다.
큰 솥과 동솥이 걸린 기다란 부뚜막과 그 아래 불길이 비쳐 나오는 깊은 아궁이와 큰 솥 곁에 묻힌 열 말들이 물두멍과 물두멍위의 조왕단지와 쌓아놓은 땔나무 더미와 천정 아래 용 이빨처럼뚫린 살칭(광창)까지를 한눈에 조망하는 시점은 날 묘하게 매혹한다. 

두렵고도 벅차고, 불안하고 또 설렌다. 남이 모르는 것을 나만 내려다보고 있다는 은밀함이 있다. 현재가 아닌 오래고 먼 시간, 이 부엌에서 지은 밥을 먹고살던 조상들이 줄줄이 뒷산으로돌아가 묻혔던 시간, 일년에 한 번씩 생전에 먹던 그 밥을 먹으러 뒷산에서 사당을 거쳐 제상 위에 올라가 슬그머니 앉던 시간,
내가 다시 그리로 돌아가 누울 먼먼 미래의 시간, 지금 내가 보는풍경 안에 그것들이 서로 겹쳐지고 있는 것을 나는 느낀다.

밖은 하마 어스름이 깔린다. 커다란 발을 가진 밤이 성큼성큼걸어올 때가 됐나 보다 밤은 푸르고 깊다. 낮에 움직이던 것들은 다 잠이 들고 대신 밤에 움직이는 것들이 슬금슬금 잠을 깨는 시간이다. 

두렵고 놀라워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보려 하지만 나는 낮에 깨어있는 족속이다. 그래서 밤이 큰 발로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하면 도무지 무거운 눈꺼풀을 이길 수가 없다.

엄마가 동솥 뚜껑을 연다. 그러자 희뿌연 김이 갑자기 솟아 눈앞에 있던 풍경이 모조리 지워져버린다. 엄마 모습도 김 속에 감춰져 사라져버린다. 나는 깜짝 놀라 "엄마"를 외친다. 

그 순간
생에 감사했다

맛은 추억이다. 맛은 현재의 나를 돌연 다른 시점으로 공간 이동하게 만든다. 

귀로 듣는 음악이 그렇고 코로 맡는 향기가 그렇듯!

혀 또한 지금 그 위에 오른 것만 감각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은 순간순간 시공간의 다른 차원과 층위를 경험할 수 있게 디자인되어 있다. 

감관을 예민하게 열어놓기만 하면 그런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신기하고 황홀한 일이다.

그 황홀은 ‘진달래꽃 화전‘ 같은 자그만 부침개 위에서 일쑤 화르르 피어난다. 
진달래는 봄에 맨 처음 피는 꽃이다. 

납작 엎드린 냉이의 뿌리는 길고 굵다. 제 몸의 대여섯 배 이상땅속으로 깊이 뿌리박은 그놈을 많이는 말고 열댓 뿌리만 캔다.
뿌리가 상치 않게 조심해야 한다・・・・・・.

나는 지금 냉이 뿌리 내음을 뭐라고 말할지 적절한 말을 찾지를 못하겠다. 분명 향기는 향기인데 꽃이나 과일향과는 다르다.
꽃향이 코로 맡는 종류라면 냉이향은 피부로 맡는 종류다. 꽃향이 뇌에서 작동하는 감각이라면 냉이향은 몸에서 작동한다. 꽃향이 가볍게 공중을 떠돈다면 냉이향은 무게를 지녀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캐는 중에 이미 냉이는 자기를 캐는 존재를 행복감에 휩싸이게 만든다. 땅의 정기를 물질화한 것이 바로 냉이다. 냉이의 향은대지의 비밀스런 뜻이고 본질이다. 

어린 나는 미처 그걸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알지 못한 채로도 꼬챙이를 땅속 깊이 쑤셔 넣으면서 등에 내리쬐는 입춘을 앞둔 봄볕 속에서 지상과 천상이 바로이어지는 듯한 완벽한 순간을 맛봤다. 

그 충일과 자족은 순전히 냉이향이 전해준 화학작용이고 신비 체험이었다.

캐온 냉이로 국을 끓이는 건 엄마다. 엄마는 냉잇국에 된장을풀지 않는다. 된장이 냉이향을 지우는 걸 용납할 수 없어서였다.
대신 날콩가루를 쓴다. 열댓 뿌리 냉이에 콩가루를 다박다박 무친다. 그걸 동솥 한켠에 담고 그것만으로는 양이 적으니까 채 썬무를 곁들인다. 

엎드려 비로소 몹시 우셨다. 아이가 죽었을 때도 남편이 사라졌을 때도 경황이 없어 울지 못했던 울음을 비로소 마음껏 우셨다.

아침저녁 빈소에 상식상을 지어 바치는 시어른 삼년상이 끝나고 여든이 됐을 때 고모는 내게 말하셨다. "야야 살아보니 인생이참 허쁘다." 살아보니 인생이 참 허쁘다, 라고 토로하신 후 고모는 다시 십 년쯤을 더 사셨다. 

그 나머지 십 년은 오롯이 나를 위한 세월이었다. 시어른 밥상을 차리는 대신 철따라 끊임없이 생겨나는 나물을, 곡식을, 양념을, 장아찌를, 김치를, 젓갈을, 부각을, 정과를, 다식을 모조리 내게로 보내고 또 보내셨다. 돌아가신다음까지 냉동실에 굴러다니는 묵나물 덩이가 서른 개도 넘을 만큼. 나는 이걸 녹여 입안에 넣을 수 있을까. 입에 넣어 먹지 않으면 그럼 이걸 어떻게 하나.

냉동실 문 앞에 하염없이 서 있다. 

허쁘다는 말은 기쁘다와 슬프다와 고프다와 아프다를 다 녹여 비벼놓은 말이다. 삶이 ‘삶은 나물‘보다 못할 리야.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다 사라져버렸을 리야.

냉동실 문을 잡고 삶과 죽음의 어처구니없음을 생각하는 날,
민들레 꽃씨는 휭휭 날고 뭔 새는 줄곧 쪼롱쪼롱 울고 줄에 넌 빨래는 바람에 화르륵 화르륵 뒤집힌다. 나는 오늘 저 시래기를 녹여 멸치를 대가리 채 부숴 넣고 시래기국을 한 솥 끓여볼까.
해 지고 난 후 고개 숙이고 후루룩거리며 마셔볼까. 서울이라면친구들 몇 불러 독한 술을 함께 하련만. 
ㅜㅜ

고요한 시간겸허한 마음으로

사래 긴 콩밭 위로 이제 막 아침볕이 쏟아질 때, 수염이 마르는 옥수수를 골라 꺾을 때,

푸른 겉치마를 벗기고 얇은 속치마를 살짝 열어젖힐 때, 속살이 여물었는지를 확인하며 실없이 설렐 때 털털하고 허우룩하게 거기 서 있던 옥수수 한그루, 아무렇지도 않던그가 문득 미덥고 정다워질 때.

늙은오이를 아름 가득 묵직하게 안고 올 때, 오이에서 노각으로 생명의 차원을 바꿔버린 열매를 목격할 때, 노각의 몸통을 훑고 지나간 굵고 우아한 주름을 발견할 때 그게슬쩍 눈물겨워 콧등을 문지를때.

가지의 가짓빛을 곰곰이 들여다볼 때, 보라라고 단정할 수 없는 깊은 어둠에 괄목할 때,
가짓빛 치마 가짓빛 새벽 가짓빛 머리카락 잊었던 관형어들이 새삼 그립게 떠오를 때.

물섬에서 늙어가는 청둥호박을 두어 덩이 발견할 때, 줄기에 돋은 가시가 손등을 쓰라리게 할 때, 꼭지에서 피 같은 푸른 진이 주르륵 흘러내려 내 상처를 덮을 때, 불볕 아래 토마토가 익어갈 때, 눈부신 빛깔에 진저리칠 때.

바지랑대 끝에서 빨래가 말라갈때, 못견디게 휘날리다 이윽고 아우성을 멈출때.
이럴 때가 고요한 시간이랍니다. 이럴 때가 고요한 시간이랍니다.

개결한 명태 보푸름에서 슴슴한 무익지까지깊은 단맛 ‘난젓‘ ・・・ 새근한 ‘중편‘...
...

온순하고 착한 ‘호박 뭉개미‘
우리 시대 문장가가고담하면서도 발랄한 글로 되살려낸슬쩍 서러운 고향의 맛.

웅숭깊고 영롱한 삶의 향기

좋은 문장이 고플 땐 김서령을 읽곤 했다. 그녀가 문득, 지상에서 사라진 지금도 그렇다. 불면증 등여러 이유로 4, 50대 15 년간 매일 한 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 
그 기간 동안 시집을 제외하고 좋은 문장이 고파서 되풀이 읽은 산문은 대개는 김서령이었다. 내밀한 끌림이 있었고 읽으면 단정해지고 맑아졌다. 문장이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글의 모든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김서령을 통해 알았다.

당대의 문장가란 수식을 넘어서는 치유적 힘이 그녀에겐 있었다. 탁월한 문장가 중에서 문장보다 실제 사람이 더 끌렸던 이는 내겐 김서령이 유일하다. 
이 책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김서령 선생에게 자발적 추천 독후감을 쓰겠다 청탁하려 했다. 
제목도 정해놨다. 잃어버린 우리의 문장을 찾아서 ‘잃어버린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시리즈에 사람들이 질화로처럼 기댔던 건 
거기 ‘우리‘가 있어서였다. 
나는 김서령의 문장이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이별로 그 청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녀의 영원한 부재 후 처음 나오는 책. 그녀가 여기 있든 없든 그녀의 문장이 주는 치유적 힘은 여전하다. 
사람은 가고 문장만 남았는데 그 문장 속에 김서령은 생생하게 남아 있다. 
‘한국의 문장가‘로 평가받은 자신의 문장보다 아름다웠던 여인, 서령 씨, 잘 가요, 후 체험처럼 이 책으로 당신의 아름다움을 만끽합니다. 당신의 문장과 한 세월을 공유할 수 있어서 고마웠고 행복했습니다. 
당신을 자주 펼치는 것으로 다정하게 추억할게요.
- 이명수(심리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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