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동네 아이와 청소년들이 도서관으로 쳐들어왔다. 대부분 쥐덫만 놓인 초라한 집에서 나와 ‘바깥바 ‘람을 쐬러 온 아이들이었다. 이들 중의 하나였던 암자드(Amjad)는 그것을 자신의 새로운 목표로 삼았다. 친구들은암자드에게 ‘사서‘라고 별명을 붙였다. 종이로 된 은신처가 잠시 소강상태를 거쳐 문을 다시 열자, 토론 또한 다시 시작되었다.
새로운 비디오가 도착했다. 발언자는 붉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그는 참가자들을 작은 무리로 갈라서 그 무러들에 퍼즐 조각처럼 생긴 판지 조각을 나누어주었다. "다시 맞추는 데 45초 드리겠습니다." 주어진 시간이 끝나자 한 조만이 환호성을 질렀다. 교사는 미소를 지었다. "당연한 결과네요. 퍼즐을 맞추기 전에 표본을 본 유일한 조였거든요."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머릿속에 정확한계획이 없다면, 여러분의 발상은 막연할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정한다면, 길을 잃을 위험이 덜한 것이죠" 그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그가 덧붙였다.
"맹목적으로 무리를 따르지 마십시오. 새로운 장소, 새로운 공간을 개척하세요." 출구도 없이 포위된 도시에서는 역설적인 말이었다. "중요한 것은 사고입니다. 누구도 자기 목적에 이용하고
자 당신을 마음대로 조작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나다." 단 한 번도 아사드나 다에시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그 속에 담긴뜻을 알아차렸다. 획일적이며 거세된 사고를 거부하고, 매 "조된 진실의 함정에 빠지지 말라는 뜻이었다. 참가자들은머리를 끄덕거리며 자신의 수첩에 열심히 메모를 휘갈겨썼다.
갑자기 불이 꺼졌다. 방의 한쪽 구석에 설치해둔 오버헤드 프로젝터가 작동하면서 흰색 벽면은 영화관 스크린으로 변했다. 이 다용도 도서관에서는 사람들이 영화도볼 수 있었다! 그날 상영한 단편영화 제목은 <2+2=5)였다. 처벌이 두려워 학생들에게 잘못된 더하기를 반복하도록 강요하는 어느 교사의 이야기였다. 억지로 거짓을 만들어내는 것에 관한 이 우화는 조지 오웰의 대표작 『1984에서 그려낸 ‘거짓 공식‘을 떠올리게 했다. 이란 출신의 감독, 바바크 아미리(Babak Amiri)가 만든 이 영화는 인터넷으로 내려받은 것이었다. 이 영화에는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영화 속에는 수학 수업이 끝날 무렵, 구석에 웅크리고있던 한 학생이 기존 질서에 도전했다. 강요된 그 숫자를
지우고 대신 자기 공책에 ‘4‘를 적었다. 영화가 상영되던 열람실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울려 펴졌다.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환호성에 흠뻑 빠져서 흰 벽면을 가득 채운 아랍어로 된 이 문장을 읽었다. "만일 세상이 무언가를믿는다면,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일까?" 다라야의 블랙홀 구석에 있는 이 젊은이들이 가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폐허로 둘러싸인 이 성소에서 이들은 참고 문헌을 넓혀가고, 새로운 사상들을 탐구하고, 어두운밤에 출구를 찾고자 밝힌 작은 촛불만큼 매일 조금씩 자신들의 문화적 지식을 더욱 풍부하게 다져갔다.
지하의 은밀한 생활, 위에서부터 강요된 침묵이 열정과 용기를 담은고함으로 바뀌는 곳. 나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는 영화 속 마지막까지 저항한 그 어린 학생과 같은 열정이 있다. 아직도 유효한 일방적 결정에 도전하고, 대포 소리가 들린다고 포기하기를 거부하고, 어두운 전쟁의 실상을 앞으로 나아가려면 통과해야 할 시금석으로 바꾸었다. 영화 감상이나 강의 시간에 이들은 조국의 새로운 역사 한장을 써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 길이 험난하다는 것은 그들도 안다. 그 길은 망명 중인 저항자들에 대한 토론이나 제네바의 호화로운 호텔과
부패 스캔들하고는 거리가 멀다. 이들은 앞으로의 국기 색깔, 사회에서 이슬람의 위치, 장차 시리아에서 쿠르드족의 역할 등에 대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대신 소박하게 한걸음씩 진보하며 사고의 팔레트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나가기를 좋아한다.
아랍의 봄 초기 이슬람 국가 발전의 모범 사례로 여겨졌던 터키를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다. 다라야의 젊은이들은 어느 순간이 되면 ‘이슬람, 민주주의, 발전‘ 모두를 집대성할 수 있다고 믿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비판적 시각을 유지했다. "터키의 경험을 다른 나라에 적용할수 있을까요?" 잇따른 비디오에서 다라야의 투사가 자문했다. 그에게 분명하게 대답해준 것은 이븐 할둔을 앞세운 오마르였다. "네, 하지만 터키의 총리 에르도안(Erdogan)의실수에서 교훈을 얻는 조건에서만 그렇습니다." 또 한 번, 질문이 이어졌다. 저항에 뒤따르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변화를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떤 정권을 세워야 합니까? 이슬람의 정치가 민주주의에 녹아들 수 있을까요? 배움을 향한 이들의 갈증은 끝이 없었다. 어느 2월의 아침, 아흐마드는 나에게 또 다른 지하의 아고라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곳은 2015년 말 도서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처음으로 세웠다. 극비로 운영하는 이곳은 스카이프를 통해 원격 화상회의를 개최하는 제2의 토론 장소가 되었다. 이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는 거대한 스크린을 마주하고 앉아 눈앞에 나타난 교수나 추방된 저항자들에게 무엇이든 하고 싶은 질문은 모두 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더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정책의 기준을 세울 기회였다.
"지난주에 우리는 비종교적 저항파인 부르한 갈리운(Burhan Ghalioun), 기독교 출신의 반대파 조르주 사브라(George Sabra) 등을 초청했어요."라고 아흐마드가 밝혔다. "우리는 과거 지하디스트의 아들인 팔레스타인 출신 후타이파 아잠(Huthaifa Azzam)에게도 발언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주장했던 폭력과 단절한 사람입니다. 그의 말을 듣는 것은 우리 청년들이 급진적 사상에 관심을기울이는 것을 견제하려는 방편이었습니다." 안전상의 이유로 비밀리에 진행된 이런 강연을 담은 영상은 어떤 것도 외부에 노출되지 않았다. 정권의 관심을끌지 않으려고 그리고 무엇보다 폭탄을 퍼붓는 헬리콥터의 사정권에 들지 않고자, 주최 측은 토론회 날짜를 알릴
때 전통 방식을 취하여 입에서 입으로 전달했다. "이것은 사람들이 늘 꿈꾸던 하나의 대학이에요. 미리 정해진 가이드라인 없이 검열도 받지 않고, 사방으로 열려있는 배움의 장소입니다." 아흐마드가 설명했다.
또한 이 은밀한 대학은 위반의 장소였다. 배움을 통한 위반, 다라야의 이 비판가들은 새로운 칸막이벽에 달린 칠판에 건설 중인 미래를 노래하는 가사를 적을 수 있었다. 가냘픈 선율, 어둠의 골짜기를 거쳐 죽음의 고비에서 헤매는 한 도시의 멜로디.
아흐마드는 당연한 일인 듯 말했다. 그의 나라는 전쟁중이다. 그의 도시는 깊은 혼란과 위기에 처해 있다. 다라야는 소란과 폭발, 화염에 휩싸여 있다. 그리고 그 ‘카르카 ‘베(혼돈)‘의 한복판에서 아흐마드가 나에게 자기계발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집단보다 개인을 우선시하는 것이 유행이던 당시 서구 사회에서 인기를 얻은 이 책을 말이다.
나는 요약본만 읽어봤는데,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이책은 개인의 성공 가능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길로 나아가려면 자아의 형성이 필수적이라고 이야기한다.
파리·런던·뉴욕· 두바이 등의 비즈니스계에서는 앞다투어 이를 활용했다. 게다가 이 책은 아랍어를 포함한 서른여덟 개 언어로 번역된 바 있다. 그렇다고 다라야의 책장에서 이책을 발견하다니.……
"이 책은 우리에게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어쩌면 나침반 같기도 해요."라고 아흐마드가 말했다. 이렇게 다라야에서 삶은 이어지고 있었다. 소위 ‘신에 미친 사람‘으로 왜곡된 이들은, 다마스쿠스의 정권이 선동하는 고리타분한 사상이 아니라, 새로운 종교인 ‘자아‘를 계발하고 있었다. 살육에 목마른 무법자나 정권이 선전하고자 하는 이슬람의 도구 같은 이미지와 모순되는 개인적
인 과정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작품이 즐겨 읽는 도서목록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제일 처음 우리에게 그 책을 알려준 사람은 우스타즈어요"라고 아흐마드가 대답했다.
우스타즈는 다라야 시민 저항 세력의 노장이었다. 이 불굴의 스승에게는 정말 수많은 방책이 있었다. "선생님은 그 책을 사이드나야의 감옥에 있을 때 처음으로 읽었대요. 새로운 발견이었죠! 이 혹독한 세상에서 약해지지 않으려고 선생님은 그 책을 처세술의 안내서로 삼았습니다. 그때부터 선생님은 그 책이 말하는 철학을 따르며, 우리도 그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그 사상적 지도자는 감옥 생활을 경험하며 미국의 자기계발서에서 영감을 얻었고, 감금 상태가 이어지면서 음지의 젊은 저항자들 역시 이를 활용하게 되었다. 서구 사회에서 이 책은 이혼 결별 · 실업 등의 일시적 위기에 효과적인 해법을 원할 때 찾는 책이다. 흔히 알려진 고통에 하는 단순한 조언이다.
하지만 감옥과 같은 다라야에서 시리아의 독자들은 이 책에서 뻔한 해답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환경 속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열쇠를 찾아냈다. 이 책은, 모든 것이 불안정한 시기에 안정감을 주는 동반자로서, 그들
이 만나지 못했던 심리 상담가와 같았다. 전쟁의 폭력으로일어난 불안감뿐 아니라 폐쇄된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데서 오는 위기에도 도움이 되는 완충재였다. 다라야의 일상 속에 만연한 전쟁이 ‘철창에 갇힌‘ 삶에서 생기는 고통 즉 언쟁과 질투 그리고 정치적 불협화음 등을 피하게 해주진 못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제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한 단체 생활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죠. 나와 다른 타인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또 우리 사이에 건전한 경쟁적기류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 등에 말이죠." 아흐마드는 처음에는 우스타즈가 준 요약본에 만족했다. 이 책의 원서는 건물의 잔해 속에서 되살려낸 책 목록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책 전체를 읽을 방법을 마련해준 것은 역시 인터넷이었다. 구글을 이리저리 검색한 끝에, PDF 파일이 그의 컴퓨터 화면에 나타났다. 그것을 내려받아 인쇄하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다라야에서 종이는 비싸다 못해 희귀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아흐마드는 종이 한 장에 책 네 장의 내용을 인쇄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빼곡하게 들어찬 깨알 같은 글씨의책은 혁명 전 외투 속에 숨겨 돌아가며 읽었던 은밀한 팸
플릿처럼 제본했다. "책을 읽으려면 눈을 찌푸려야 하긴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 책에 대해 토론합니다. 그것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 좋은 책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구에 부용하고자 2쇄를 만들어야 했어요. 덕분에 두 차례 강연 과정도 마련되었죠. 처음에는 도서관 내부에서 열렸고, 두번째는 새로 만들어진 지하의 토론 장소에서 열렸습니다. 이 강연을 스카이프를 통해 소개한 사람은 아랍 세계 전문가인 야시르 알아이티(Yasser al-Airi) 였습니다. 이 책에 대한강연은 정말 성공적이었어요!" 아흐마드가 인정했다.
귀퉁이가 접히고, 긁히고, 색이 바랜 이 책은 손에서 손으로 꾸준하게 전달되었다. 읽히고 또 읽히면서 하나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특히 더 많은 사상자가 있었던 2016년겨울, 이제 5년째로 접어드는 전쟁이 언젠가는 끝나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게 해주는 요소가 이 책에는 들어 있었다. 책의 내용에 빠져들면서, 전쟁을 일시적 차원의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정상적인 상태를 회복하고, 잔혹한 폭격과 늘 마주하는 죽음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이는포위가 이토록 오래 지속될지 예상하지 못했던 병사들의 조바심을 극복하는 일이기도 했다. 또한 무엇보다도, 끊임
없이 폭격이 이어지는 불안정한 상태가 문학이나 정치적 고찰에 관한 책 읽기를 포기하게 할 때, 더 실제적인 글 속으로 도피한 것이었다.
그것은 깊은 수렁의 끝에 놓인, 고통스러워하는 영혼을 쉬게 할 보이지 않는 소파와도 같았다.
플릿처럼 제본했다. 책을 읽으려면 눈을 찌푸려야 하긴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 책에 대해 토론합니다. 그것은 성공하는 사람들의7가지 습관이 좋은 책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구에 부응하고자 2쇄를 만들어야 했어요. 덕분에 두 차례 강연 과정도 마련되었죠. 처음에는 도서관 내부에서 열렸고, 두번째는 새로 만들어진 지하의 토론 장소에서 열렸습니다. 이 강연을 스카이프를 통해 소개한 사람은 아랍 세계 전문가인 야시르 알아이티(Yasser al-Aii)였습니다. 이 책에 대한강연은 정말 성공적이었어요!" 아흐마드가 인정했다. 귀퉁이가 접히고, 긁히고, 색이 바랜 이 책은 손에서 손으로 꾸준하게 전달되었다. 읽히고 또 읽히면서 하나의 상 ‘징처럼 여겨졌다. 특히 더 많은 사상자가 있었던 2016년겨울, 이제 5년째로 접어드는 전쟁이 언젠가는 끝나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게 해주는 요소가 이 책에는 들어 있었다. 책의 내용에 빠져들면서, 전쟁을 일시적 차원의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정상적인 상태를 회복하고, 잔혹한 폭격과 늘 마주하는 죽음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이는포위가 이토록 오래 지속될지 예상하지 못했던 병사들의조바심을 극복하는 일이기도 했다. 또한 무엇보다도, 끊임
쭉한 벽면에 울리는 메아리 소리를 상상했다. 2 더하기 2는4 이지 5가 아니다. 진정한 학교, 그 어떤 필터도, 그 어떤거짓의 근시안도 없는 진실.
놀랍도록 ‘보이지 않는‘ 존재였던 여성들이 마침내 거리에 다시 나타났다. 암흑에서 빠져나온 그림자처럼, 여성들은 대피소 밖에서 새로운 위험을 무릅썼다. 그들은 인생의 지혜를 얻게 하는 사소한 수다를 떨며, 온갖 시련의 소란이 다시는 찾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뜬눈으로 지새운 밤, 놀란 아이의 그치지 않는 울음, 다시 깨지 않으려고 잠을 청하던 강박증도 이제 끝났다. 폭격이 있던 시절에는 젖을 먹일 수 없었던 젊은 어머니의 가슴에 밤낮으로 다시 젖이 돌았다. 용감한 어머니들은 녹이 슨 낡은 유모차를 밀며, 젖먹이들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며 다녔다. 포위된 이후로 약 600여 명의 아기가 태어났다. 대부분 지하 대피소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처음으로 자연의 빛을 맛보았다. 아이들은 울고 소리치며 재잘거렸다. 진실은 아이들의 입에서 나온다고 했다. 다라야에는 더는 민간인이 거주하지 않는다고 우기는 정부의 주장을 반박하는 데 제일 좋은 방법은 이 옹알이하는 아이들의 소리일 것이다. 지옥 같은 몇 달이 지나고, 다라야의 저항자들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들은 자신의 꿈을 떠올렸다.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인생에 대해, 결혼에 대해 그리고 직업에 대해서도 늘 자세하게 이야기해주는 아흐마드는 사람들의 소식을 전해주는 데 열중했다.
강사였던 우스타즈는 뜻밖의 휴지 기간을 이용해서, 이제야 약혼이나 결혼을 감히 꿈꾸게 된 사람들을 위해 부부 관계에 관한 조언을 담은새로운 세미나를 준비한다고 한다.
오마르는 도서관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임시 휴관이 끝난 뒤 오마르는 도서관에서 전보다 더 많은 책을 읽으며 새로운 강연도 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오는 배움과 나눔을 향한 갈증이었다. 발산하고 싶은 욕구이기도 했다. 폐허가 된벌판 한가운데에 축구장이 세워졌다.
대피소는 곧 폐쇄하고, 둑은 다시 평평하게 하고, 건물의 잔해는 치웠다. 열 명으로 된 여덟 개조가 꾸려졌다.
각조에는 병사, 행동주의자, 구경꾼이 모두 섞여 있었다. 임시로 마련한 계단식 좌석에 앉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티셔츠를 맞춰 입은 이들의 평화로운 행진이 이어졌다.
갑자기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이 되었다. 이제 미래는 상상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현재를 사는 것에 다시 의미가 생기게 되었다. 이제 마을에
서는 입는 옷마저 화사해졌다. 담벼락도 다시 찾아온 봄을 노래했다. 거리의 모퉁이마다 부서진 인도의 끝에, 때로는 들쭉날쭉한 건물의 구석에시의 구절과 반짝이는 스텐실 그림, 언어의 방패들이 등장했다. 그래피티 예술가인 아부 말리크 알샤미 (Abu Malik LShami)는 물감으로 천연색의 희망을 그리고자 마을을 돌아다녔다. 폭격의 여파로 무너진 어느 건물에 파란색과 노란색의 옷을 입은 네다섯 살 소녀의 크로키를 그렸다. 죽은이들의 해골이 쌓인 언덕 위에 앉은 소녀는 오동통한 손으로 ‘희망(HOPE)‘이라는 글자를 대문자로 썼다. 이 벽화는낙관주의를 권고했다. 전쟁을 조롱하는 형태로 기성 질서를 비판하는 흔적을 남겼다.
아흐마드가 사진에 담은 또 다른 벽화가 내 관심을 끌었다. 그것은 창문이 부서진 어느 교실이었다. 형체만 겨우남은 책상과 고철로 된 의자 들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부 말리크 알샤미가 뒤쪽 칠판에 분필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끄적거렸다. 나는 아랍어로 된 그 문장을 해독했다.
"옛날에는 제발 학교가 무너졌으면 좋겠다고 농담했다. 그런데 정말 학교가 무너졌다." 이 자조는 또 다른 방패막이였다. 내 시선을 조금 더 왼쪽으로 움직이자 그림이 이
어졌다. 그림에는 맨발에 누더기를 입고 배낭을 멘 한 소년이 핏빛의 검붉은 글씨로 ‘다라야‘라고 적고 있었다. 나는 또 다른 행동파인 그래피티 예술가, 마이드 모하다마니(Madjd Mohadamani)를 떠올렸다. 그가 2016년 2월 19일에군대의 탱크가 쏜 포탄에 맞아 사망했다고 아흐마드가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또 반사적으로 반아사드의 그래피티를 그렸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2011년 봉기의 불씨가 되었던 다라의 청소년들이 떠올랐다. 그 그림은 이 모든 이에게 보내는 경의와 같았다. 또한 "우리는 깨어 있다."라고 외치고 싶은 바람이기도했다. 이들의 멍든 내상에도 불구하고, 다라야는 기어코 인생을 예찬하고자 했다.
주방 세제와 같은 생필품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건강을 지키고 전염병을 예방하는 데 필요한 세정제도 부족합니다.
우리, 다라야에 사는 여성들은 다음과 같이 요청을 드립니다마을 모든 지역에서 포위를 즉각 철회할 것. 도로를 개통하고 생필품, 식량, 의약품, 수돗물, 옷, 신발, 청소 용품 등의 공급을 재개할 것. 우리는 타격을 입은 모든 사람에게 즉각 원조의 손길을 보내줄 것을 유엔과 인권 기구에 요청하는 바입니다. 기자 여러분께서는 다라야에 관한 기사를 써주시고, 기근이 전면적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우리 마을의 상황에 대해주의를 환기해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우리는 굶어서 죽는일이 벌어지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갓난아기와 연로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견디지 못하고 숨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께 부탁합니다. 너무 늦기 전에 필요한 도움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편지 말미에 삽입된 서명을 하나하나 읽어나갔다. 사우산, 카디야, 아지자, 무나, 이크람, 사마르, 나자, 아말, 말락, 아마니, 키나즈, 사미라, 라마, 하이파, 파테마, 마하,
메르자트 누르 주마나, 아프라, 가다, 쿨루드, 와르다, 루브나 아메나, 아트・・・・・・ 세상을 향해 보내는 최후의 구조 요청처럼 피로 쓴 이름의 행렬. 내가 알기로 이것은 ‘보이지 않는‘ 존재였던 여성들이 침묵을 깨뜨린 첫 번째 사례였다.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될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며, 익명에서 벗어난 여성들 그들이 오래전부터 지켜온 신중함을 깨뜨려야 할 만큼 이들을 짓누르는 절망의 무게를 감히 헤아려보았다. 이 편지는 환심을 사거나 속이거나 조작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는 있는 그대로였다.
나는 그들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 나는 그들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그들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가정주부, 교사, 조산원, 운동가. 나는 이들의 일상에서 고통을 읽었다. 그 피로, 유산, 조산, 생리대 부족 등의 상황을 안다.
나는 놀란 아이들이 밤에 오줌을 싸고, 불안한 어머니들은 불면증에 시달리며 어둠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것을 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이 모든 불행은 전사의 용기를 북돋우고자 전쟁이 은폐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남성의 승리 뒤에는여성의 고통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