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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엄지손가락 지문
리처드 오스틴 프리먼 지음, 원은주 옮김 / 시공사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당신은 ‘탐정의 7대 도구’를 기억하시나요? - 붉은 엄지손가락 지문 서평
내가 초등학교를 다녔을 때, 갑작스런 탐정 붐이 일었었다. 어디서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티비에서는 국산 소년탐정극-검은 별도 이때!-과 외화 탐정시리즈를 방영했고, 나는 탐정물이 하는 시간마다 티비에서 떨어지지 않았었다-지금도 마찬가지다. 정확히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많은 탐정물들 중 어린아이들이 탐정단을 결성해 활약하는 외화시리즈가 있었다. 나는 그 시리즈를 보며 “탐정이 될 테닷!”하고는 동생과 친구들을 끌고 있지도 않은 뒷산 보물을 찾아 탐험에 나갔다 갑작스레 폭우가 쏟아져 매몰될 뻔도 하고, 꽝꽝 언 집 앞 개천 속에서 (역시) 있지도 않은 살인사건의 증거를 찾겠다고 하다가 빠지기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러고 참, 잘도 놀았다 싶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때의 나는 너무 어렸으며, 말 그대로 ‘깡’이 있었고, 애들에게 ‘뻥’을 치는 데에도 탁월한 소질이 있었던 듯하다-이러니 지금 탐정소설을 쓴다고 앉았겠지.
어쨌든, 이렇게 즐거운 탐정라이프를 즐겼던 나에게는 반드시 갖고 싶고, 가져야만 했던 아이템이 있었다.
‘탐정의 7대 도구’
... ... 그런데 7대 도구가 뭐였더라. 우선 돋보기가 있었고 ... ... 탐정 수첩이 있었던가? 나침반?
아아, 기억 안 난다. 기억 좋은 사람들은 이거 보자마자 기억해내겠지.
그런데 말이야, 내가 기억이 안 나는 이유는 난 이거 없어서 아냐?
엄마가 안 사줬다, ‘탐정의 7대 도구’ 젠장!
어째서 ‘안 사줬다’고 말하느냐, 문방구에서 ‘탐정의 7대 도구’를 팔았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이라면 누구나 탐정이 되고 싶어 했고-피구왕 통키가 나오기 전까지만. 그 후엔 다들 불꽃슛을 쏘려고 했다- 하나쯤은 ‘7대 도구’를 갖고 싶어 하기 마련이건만, 우리 엄마는 “여자애는 그런 거 갖고 노는 거 아냐!”라고 말씀하시며 사주지 않았고-설마 이 부분에서, “여, 여자셨어요?”라고 묻는 사람 없겠지? 없어야 하는데-, 나는 다른 아이들의 탐정도구들을 가끔 강탈해서 내 것인 양 쓰고, 안 돌려주려다 주먹다짐을 하기 일쑤였는데.
붉은 엄지손가락 지문을 읽으며 이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했다.
물론, 이 책에 탐정의 7대 도구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지문첩’이라는 게 나오걸랑.
지문첩, 말 그대로 지문을 모아놓은 수첩으로, 이 소설의 중심에 선 도구다.
사건은 간단하다. 집안에서 다이아몬드가 사라지는 도난사건이 일어났고, 두 조카 중 한 명인 루벤이 범인으로 지목 당한다. 그 이유는 그의 엄지손가락, 것도 피가 묻은 엄지손가락 지문이 금고에서 발견됐기 때문인데. 처음엔 누구의 지문인지 몰랐으나 이 ‘지문첩’에 찍힌 지문과 비교한 후에야 루벤이 범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보통 탐정물이라면 범인이라고 지목 당하기까지 상당히 오래 걸리겠지만, 붉은 엄지손가락 지문은 이미 지목당하고 시작한다. 그 후에, ‘과연 그가 범인이라는 사실이 타당한가?’를 증명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이 과정이 마치, 과학이나 수학에서 하나의 명제를 증명해가는 과정과 비슷하여 흥미롭다.
수학과 과학에서는 보통. ‘X는 Y이다, 라는 명제의 타당성을 증명하여라.’ 라는 식으로 문제가 나오는데, 붉은 엄지손가락 지문은, ‘루벤이 범인이다, 라는 명제의 타당성을 증명하여라.’ 로 진행된단 말이지. 또 이야기의 흐름 역시 손다이크 박사의 증명과정으로 진행되고.
그 때문에 이 이야기가 과학 수사의 원조란 말이지.
하지만, 손다이크 박사가 증명하는 과정만 주구장창 보여주면 지겨워지리라. 화학 공식에, 무슨 상수에, 이런 것 나오면 누가 좋아하겠냐고! 다행히(?) 이 이야기는 손다이크 박사의 시선이 아닌 저비스 박사, 셜록 홈즈로 따지자면 왓슨의 시선으로 진행되는데, 그 문체가 참으로 유쾌하다.
동시에, 사회파 미스터리의 성격을 띠는 부분도 꽤 있는데.
예를 들어 이런 부분.
(내가 볼 때엔 이 부분이 스포일러가 아닌 듯한데, 작품을 천천히 꼼꼼하게, 작은 하나하나까지도 놓치지 않는 분이라면 뛰어넘는 편이 낫다.)
P.100
손다이크는 나와 함께 길을 걸어가며 통탄했다.
“저 불쌍한 친구가 감옥에 갇히는 수모를 겪기 전에 구해줄 수 있으면 좋았을 것을.”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니고 그냥 용의자일 뿐이잖아. 그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아직 법률상으로는 결백한걸.”
난 이렇게 대답했지만 설득력은 없는 대답이었다.
“친애하는 저비스, 자네도 나도 그건 그저 결의법에 불과하다는 거 알잖나. 법률상 미결수를 결백하다고 간주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뭐가 있나? 치안 판사가 그 친구를 어떻게 부르는지 들었지? 법정 바깥이라면 혼비 씨라고 부르겠지. 홀로웨이에서 루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자네도 알잖아. 교도관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을 받고, 숫자가 붙은 죄수복을 입고,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나 들여다볼 수 있게 문에 작은 구멍이 나 있는 감방에 갇히게 되겠지. 양철 그릇에 양철 나이프와 스푼으로 식사를 하고, 주기적으로 감방에서 불려나와 런던 슬럼가 출신들이 대부분인 죄수들 무리에 섞여 운동장을 돌 테지. 루벤이 무죄로 판명이 난다 해도 교도소에 갇혀 있는 동안 그가 겪었을 모욕이나 손해에 대한 보상이나 사과도 없이 풀려날 거야.”
“그래도 난 사법 제도란 필요악이라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요는 무죄추정이란 건 순전한 소설이란 말일세. 체포당한 순간부터 용의자는 범죄자 취급을 받으니까. 하지만... ...”
손다이크는 지나가던 이륜마차를 불러 세우며 결론을 내렸다.
“이 토론을 뒤로 미루지 않으면 병원에 늦겠어. 자넨 어떻게 할 건가?”
1907년 당시의 사회적인 배경으로 볼 때에, ‘무죄추정’에 대한 토론은 상당히 센세이션 했으리라. (당시의 사법제도 등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실례는 A. 코난 도일의 네 사람의 서명에서도 한 차례 언급된다. 살인자가 노예처럼 섬으로 끌려가 나머지 생생을 노동하며 지내야 한다고 푸념하는 부분.) 이 부분 말고도 신랄하게 사회를 비판하는 부분이 꽤 있다. 당시의 시대상황 등을 떠올리며 보면 더더욱 재미있을 듯한데.
그 때문에 책 표지에서는 과학수사의 원조라고 했지만, 나는, 이 책을 (감히) 사회파 미스터리의 아버지 격이라고 말하겠다.
그런고로, 나처럼 마쓰모토 세이초, 미야베 미유키, 모리무라 세이이치 등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강추. 정말 재미있게 읽었음. 번역도 매우 훌륭하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