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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길 - 상 ㅣ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복합적이다 못해 짐승스런 ‘D의 복합’과 ‘짐승의 길’,
그리고 마쓰모토 세이초에 대한 구구절절
작년, 아버지가 집에 한 번 오셨을 때 밑도 끝도 없이 ‘대남’이라는 책을 찾았다.1) 작가의 이름도 출판사도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상태에서 ‘대남’이라는 재목 하나만으로 단서를 잡아 인터넷을 뒤졌는데, 아무리 해도 나오지 않았다. 그 후로도 짬이 날 때마다 꾸준히 찾았지만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하여 도대체 우리 아버지가 찾는 ‘대남’은 무엇인가, 아버지는 왜 그 책을 찾는가 한참을 궁금해 하였었는데 올해, ‘짐승의 길’을 읽다 집나간(?) 대남이를 발견했다.
(전략)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동안 세이초는 꽤 많이 소개되었습니다. 단행본은 물론이거니와 오래전 외판용으로 무려 열 권짜리 세이초 선집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다소 엉뚱한 ‘大男’이라는 타이틀을 달고요.
왜 ‘대남’이냐고요?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한 제목이긴 하지요. 그런데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역사소설 ‘대망’을 떠올리면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해 ‘대망’의 인기에 편승하려 했던 거죠. 여기서 ‘대망’은 또 무슨 책인지 궁금해졌다면(아마 젊은 독자들 중에는 그런 분들이 있을지도) 애써 설명하기보다는 검색을 권해 드리겠습니다. 괜히 공부를 시키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말입니다.
p.333, 짐승의 길 下, 북스피어, 2012
짐승의 길 下편 뒤에 붙은 해설 ‘세이초, 고다마, 하루키-마쓰모토 세이초 재미있게 읽기’ 서두에서 문학평론가 조영일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2) 나는 이 서두를 읽고 “아아아앗!” 매우 흥분하였다. 그토록 기다리던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이 우리 아버지가 젊은 시절 흥분하였던 책이라니! 이런 부전자전을 보았나!3)
내 블로그 이웃들이나 나와 친한 사람들이라면 귀에 딱지가 않도록 나에게 ‘마쓰모토 세이초’ 이야기를 들었으리라. 실제로 나와 함께 일하는 언니는 미스터리 소설에 관심이 없는데도 가끔 “마쓰오 씨는 잘 있어?”라고 자기 멋대로 애칭을 붙여서는 가끔 안부(?)를 물어주더니, 이번에 책이 나왔다고 신이 나서 보여주자 정말 잘 됐다고, 축하한다고 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나는 거기다가 고맙다고 대답을.
사실 축하한다는 말을 들을 필요도,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을 필요도 딱히 없는 일면식 없는 관계인데 말이지.
아니, 관계는 있지. 나는 소설을 쓰는데, 마쓰모토 세이초 님처럼 되고 싶다는 관계 말이야.
자, 그렇다면 요즘 신문이나 인터넷서 하도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다들 알 것 같지만 그대로 마쓰모토 세이초 님이 어떤 분인가 짚고 가자.
마쓰모토 세이초 님은 우리나라 최초의 추리소설가 김내성, 일본 순수문학계의 거성 다자이 오사무와 동갑인 1909년생으로 다른 두 작가와 달리 마흔이 넘은 나이에 ‘사이고사쓰’로 데뷔하였다. 헌데 데뷔하고 나서 발표한 작품 ‘어느 <고쿠라 일기> 전’이 대중문학상인 나오키상 후보로 올라갔다가 떨어지고 대신 후보에도 오르지 않은 순수문학상 아쿠타가와 상을 타는 기염을 토한다. 이후 사회파 미스터리의 아버지라 불리며 우물에 독 풀듯이(?) 수많은 작품을 사람들에게 풀어놓는데, 마쓰모토 세이초 님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을 일일이 열거하려면 끝이 없을 정도다.
나는 이런 마쓰모토 세이초 님에 대한 이야기를 20대 중반인가, 처음 들었다. 당시의 나는 영화 시나리오 쓰기를 그만두고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기세 좋게 데뷔한 이후 자꾸 엎어지기를 반복하다 제풀에 꺾이기도 하였고, 자신의 실력이 도통 나아지지 않아 초조했다.
그러던 중 마쓰모토 세이초 님을 만났다.
계기는 문자 한 통.
꽤나 유명한 작가님께서 모 방송국서 상반기에 드라마를 내보내게 되었는데 함께 작업을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당연히 나는 귀가 쏠렸다. 무조건 뵙겠다고 했다. 바로 만나 뵙기로 하고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점차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현재의 내가 어떤 상태인 지 깨달았다.
당시의 나는 글을 전혀 쓰지 못했다. 아니, 쓰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몰랐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미야베 미유키 님의 ‘이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이런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하고는 닥치는 대로 미야베 미유키 님의 소설을 찾아 읽을 때였다. 말 그대로 청춘과 방황의 도가니탕에 빠진 내가 이런 대단한 작가님과 일을 할 수 있을까?
만나는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미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만나 뵈었는데 또 한 번 이건 아니다 싶었다.
이 분이 찾는 건 보조작가였다, 동업자가 아니라.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기회다. 이분은 이미 정상의 자리에 올라선 분이니까, 보조작가로 일해도 얻는 게 많으리라. 그렇게 같이 작업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다른 일을 맡을 수 있었을 것이고. 하지만 그 때엔 너무 어려서(20대 중반)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더더욱 안 하겠다는 마음을 굳히고는 솔직하게 내 상태를 말했다. 시나리오를 써야할지 모르겠다. 요즘엔 미야베 미유키 님 소설을 읽는데 참 재미있어서 그런 걸 써보고 싶어졌다 라는 이야기를.
“그렇다면 해야지.”
작가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건방을 떨었는데 무어라 안 하시고 오히려 “열심히 써라. 그렇게 쓰다 보면 다시 써진다.”라고 말씀하시더니 두 명의 작가를 가르쳐주셨다. 그 두 명의 작가가 바로 마쓰모토 세이초와 모리무라 세이이치였다.
허나 나는 이 두 사회파 미스터리 거장들의 책을 읽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왜냐하면 작가님은 한자로 적어주셨고, 한자를 그대로 읽어 이름을 불러주셨던 게다. 松本淸張과 森村誠一이라고. 나는 덕분에 도대체 이 작가들이 누구인가 의아해하면서 혼자 되는대로 책을 읽어대다가 가까스로 두 작가님을 찾아냈는데. (그 사이에 읽은 책들의 숫자는 묻지 마. 괴로워.) 이렇듯 찾아낸 두 작가님들의 책, 특히 마쓰모토 세이초 님의 책은 날 무척 행복하게 했다. 그러고는 몇 년 후 일본드라마에 입문, 닥치는 대로 미스터리 장르의 일드만 찾아보는데 또다시 마쓰모토 세이초란 이름이 자꾸만 거론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내가 재미나게 본 일드는 죄다 마쓰모토 세이초 소설 원작이었다! 악녀시리즈인 ‘검정가죽수첩’, ‘나쁜 녀석들’, ‘짐승의 길’에 ‘야광의 계단’, 단편으로는 ‘얼굴’, ‘의혹’ 등 끝이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했더니 곧 탄생백주년이라서 방송국들이 알아서 그리하고 있다고. 게다가 방송국뿐이 아니라 나라 곳곳에서 이런 식의 행사를.
세상에나!
그제야 난 마쓰모토 세이초가 얼마나 대단한 작가인지 깨달았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죽고 나서도 사랑받는 작가였다. 교과서에 나오고 끝인 작가가 아니라 사람들이 여전히 찾아 읽고 싶은 작가, 박물관을 세우고 몇 년에 걸쳐 축제처럼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게 하는 작가! 짐승의 길이 아니라 변소의 길이 그 안에 있었다. 결심했다. 나는 마쓰모토 세이초 님처럼 되고 싶다, 저렇게 기억에 남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워낙 대단한 결심이라 부끄러워 어디다 말하진 못했지만.
이때에 처음 접했던 일드들 중 하나인 ‘짐승의길’은 정말 탁월했다. 일본배우 요네코라 료코가 주연을 맡았는데 아, 그 표독스러운 연기란! 때문에 난 이 작품을 무척 기다렸다. 그러다 이번에 ‘짐승의길’이 무려 세이초월드 첫 탄으로 나온다는 말에 얼마나 반갑던지!
‘짐승의 길’ 줄거리는 간단하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여자가 조금이라도 잘 살아보겠다는 마음으로 수상한 제의를 받아들은 이후 온갖 의혹에 휩싸인다는 스토리.
일드와 소설은 느낌이 상당히 다르다. 일드는 화려하고, 여주인공 타미코는 강했다. 흔들림 없이 자신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소설은 달랐다. 소설 속의 여주인공은 사랑스럽고 겁이 많은, 죄를 지었는데도 미워할 수 없는 불쌍한 여자였다. 주변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며 아주 작은 욕망을 이뤄내려 노력하는 작은 여자. 인생이라는 이름의 산에서 길을 잃고 타박타박 되는대로 걸어 다니다 우연히 발견한 짐승의 길에 들어선 여자, 그 여자 안에는 내가 있었다. 우리가 있었다. 미워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런 여자였다, 내가 만난 다미코는.
짐승의 길을 모두 읽고 해설까지 단번에 읽었다. 당시의 나는 소설 마감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읽기 시작하니 멈출 수가 없었다. 기다리던 작품이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말 그대로 ‘읽는 맛’때문이다.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찰진 맛이 있다, 이 책엔. 이 책을 읽고 나니 나도 모르게 화차가 마구 떠올랐다.
곧 영화로도 개봉하는 화차, 이제는 누구나 다 알 듯한 이 내용을 그래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한 여자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다. 갑자기 사라진 여자의 인생을 뒤쫓다 보니 상상도 못했던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것인데.
이 여자의 인생, 짐승의 길에 나오는 다미코와 참으로 닮았다. 이 여자 역시 다미코처럼 산을 헤맸다.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어두운 산을 헤매대 결국 짐승의 길에 들어섰다. 때문에 미야베 미유키는 마쓰모토 세이초의 장녀이리라. 그녀는 짐승의 길을 알고 있고, 또 그러한 작품에 버금갈 놀라운 작품을 써냈으니, 나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짐승의길...이 아니라, 사회파 미스터리의 길로 안내했으니.
다음으로 손에 든 D의 복합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제길 D의 복합적인 재미를 봤나!라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릴 정도로 흥미로웠다.
줄거리를 한 줄로 설명하자면 민속학잡지에 글을 연재하게 된 작가 이세가 가는 곳마다 수수께끼의 사건이 쫓아다니더니 나중엔 살인까지 터져서 ‘도대체 이게 뭥미?’ 하면서 사건을 쫓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그 과정이 참으로 흥미롭다. 단순하게 쫓기만 하는 ‘짧은 호흡’이 아니라 쫓는 내내 일본 민속학에 대한 이야기를 차근차근 펼쳐낸다. 일본의 수많은 설화들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레 ‘산마처럼 비웃는 것’이나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허나 그만큼 괴기스럽거나 구체적으로 그 상황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고, 박학다식이라는 말로밖에 표현될 수 없는 학문을 접하는 것이 무척 즐겁다. 열차시간표 트릭이 툭 튀어나와도 상관없을 정도로 정밀한 등장인물들의 동선은 어떻고! 나는 새삼 마쓰모토 세이초에게 감탄해버렸다.
개인적인 즐거움도 있었다. 책을 읽다 보니 이번에 출간할 내 첫 번째 장편소설 ‘홈즈가 보낸 편지’에 필요한 자료들이 많이도 쏟아졌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에서 죄인의 형무기록을 확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구체적인 과정에 대한 자료 찾느라 고생 좀 했는데 이럴 수가! D의 복합 주인공이 형무기록을 찾으러 돌아다니지 뭐야! 짐승의길에서는 등장인물들 중 한 명인 비리형사 히사쓰네가 내가 원하는 자료 찾으러 가스미가세키며 나카타초에 오가고! 나도 모르게 책을 읽으며 소리쳤다. 아니 이 무슨 D의 복합적인 짐승스런 은혜가 다 있어!
마지막으로 D의 복합에서 내가 무척이나 공감할 만한 부분이 나와서 그대로 덧붙인다.
물론 막대한 적자가 나면 그만두겠지만, 당분간 어느 정도의 결손은 계산에 넣고 있을 것이다. 이세도 연재를 시작한 이상, 인정상 어떻게든 이 잡지를 키워주고 싶어졌다.
p.79 D의 복합, 마쓰모토 세이초, 모비딕, 2012
내 마음이 이렇다. 이번 세이초 월드가 아주아주 잘 되어서 우리 마쓰모토 세이초 님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수없이 많이 쏟아졌으면 좋겠사와요.
꼬리.
마지막으로 서평 끝까지 보고 이런 거 묻는 사람들 있을 거야.
“언제 출간하는데요?”
나도 몰라.
그냥 기다려. 내가 설마 공지 안 때리겠어?
(1)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가 찾은 책은 대남이가 아니라 대물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북스피어서 출간한 책들을 보내드렸다. 우리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자세하게 알고 싶은 사람들은 아래의 링크를 따라가라.
筆寫의 追憶 http://cameraian.blog.me/130089450254
(2)
조영일 선생님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또 링크를 따라가라.
와우북, 무사히 다녀오다. http://cameraian.blog.me/130093678995
(3)
여기서 부전자전은 아버지와 자식이라는 뜻으로 썼다. 아버지와 아들로 해석해서 내 성정체성을 무너드리지 말거라.
서평 원문 :
http://cameraian.blog.me/1301317093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