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 영원히 계속되면
누마타 마호카루 지음, 민경욱 옮김 / 블루엘리펀트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더 이상 모르겠어.

다른 사람과 같다는 게 뭔지,

행복이라는 게 뭔지.

 

p.415

 

 

  

가끔 그런 소설이 있습니다. 완벽하기만 했던 세상을 산산조각내버리는 소설요. 자신이 가진 패를 숨기지 않고 모두 보이며, 나에게도 그러하라고 말하는 소설이요. 

 

 

저는 옛날 이야기를 싫어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옛날 옛날 한 옛날에'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제 자신의 옛날 이야기입니다. 저는 제 자신의 이야기가 싫고, 감추고 싶고, 그저 지금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처음 만났을 때, 저는 발가벗겨졌습니다. 그 소설 안에는 제가 있었습니다. 저를 괴롭히던 모든 것이 그 안에 있었기에 저는 괴로워했습니다. 나는 이 소설에게, 소설을 쓴 작가에게 소리 없는 질문을 던졌고, 한참을 울다 책장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반짝이는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의 이름은 '그 누구도 너에게 살아도 좋다고 말할 권리는 없다'는 강렬한 한 마디였습니다. '살아있으라, 네가 원한다면 나는 이곳에 언제든지 있으니 나에게 기대라'는 진실된 속삭임이었습니다. 

 

저는 그 후로도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에서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최근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화차가 그러합니다. 사실 저는 화차를 요즘 나온 화차들이 아닌 붉은 표지의 책으로 봤습니다. 한 번 읽은 후 그 강렬함을 잊지 못해 다른 화차들을 찾아봤습니다.

저는 화차를 한 장, 한 장 읽으며 괴로워했고 어떻게 하면 이 괴로움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만 생각했습니다. 고민의 끝에는 지금의 제가 있었습니다. 그녀와 같은 글을 적고 싶다는 감히 누구한테 말도 못하는 어마어마한 목표를 품은 제가요. 이후 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을 혼자 글을 쓰며 제 자신이 글을 쓰고 싶어하는 마음과, 제가 원하는 글을 쓰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좌절하고, 방황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는 저 자신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손이 닿는 곳에는 언제나 이유가,

화차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저는,

또 한 권의 책을 만났습니다.

사랑하고 싶은 책,

'9월이 영원히 계속되면'을요.


 

 

이 책을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려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인터넷으로 표지를 보았을 뿐입니다. 내용을 훑어보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책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텅 빈 마음을 안고 도서관을 찾을 때마다 게시판에 보였던 이유, 파란 표지에 끌려 몇 번이고 그 책을 기웃거리다 삼 주가 지나서야 마침내 손에 들었을 때와 같았습니다. 

이유를 통해 상처를 드러내고, 다시 갈기갈기 찢고, 그 상처를 조금씩 치료해갔다면, 저는 이 책에서 저는 무한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닥쳐온 사랑에 저는 두려워 벌벌 떨었고, 눈물을 흘렸고,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누군가를 찾았습니다. 나를 사랑해줄, 그리고 내가 사랑할 누군가를.

 

오늘 저는 우연히 한 남자를 보았습니다. 그와 저는 아주 잠시, 스쳤을 뿐입니다. 정말 말 그대로 옷깃을 스치듯 그렇게 서로 눈을 마주쳤습니다. 그걸로 그만이었는데 이상하게 그와 저는 한참동안 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저도, 그 사람도 겁쟁이였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한참 바라보다 서로의 갈 길을 갔습니다. 평소 같으면 별 것 아닐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습니다. 제 안에 있는 무언가가 꿈틀거렸고, 저는 알 수 없는 가슴저림에 괴로웠습니다.

 

이 책은 그런 책입니다. 사랑을 잊은 누군가의 가슴을 뛰게 합니다. 사랑을 보여주고 사랑을 일깨웁니다. 사랑의 모든 것을 그립니다. 끔찍한 사랑, 달콤한 사랑도 모두 이 안에 있습니다. 운명같은 사랑도, 의미없는 사랑도 이 안에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미스터리로 풀어냅니다. 

 

 

유리로 만든 성과 사탕으로 만든 왕자와 공주님들, 우리는 그 안에 있었고 행복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행복도 불행도 알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완벽하고, 빛났기에 세상 모든 것이 그러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만난 순간 나의 모든 것은 변했습니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완벽해 보이는 것들'은 내가 '그렇게 보이도록 생각한 것'이며, 나는 그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작은 종이인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누군가 내 머리를 잡고 반으로 자르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렇게 잘려져 나갈 종이인형이라는 사실을요. 

 

진정한 사랑은 나를 일깨웁니다. 나에게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잡으라 합니다. 지금까지 신고 있던 굽 낮은 운동화를 벗고 하이힐을 신으라 합니다. 강한 힘에 이끌려 떨리는 처음 신는 높은 하이힐로 떠듬떠듬 걸으며 나는 발이 아프다, 다리가 아프다 울지만 당신은 듣지 않습니다.

 

당신은 앞을 보라고, 절망하고, 부딪히고, 다시 그곳에서 솟아오르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나를 강하게 만들었고, 나는 당신이 원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당신을 떠났고, 당신이 날 떠났을 때에, 나는 무너졌습니다. 당신을 찾았습니다. 홀로 남은 세상에서 나를 이끌어줬던 당신의 강인한 손을 찾았지만 이제 당신은 없었습니다.

 

아니, 당신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내가 알던 당신이 아니었습니다. 나를 이끌던 강한 손과 어깨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위축되어버린, 그런 당신은 결코 나의 사랑이 아니었고, 나는 이 때 다시 한 번 절망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대신 내 두 발로 일어섰습니다. 절망의 끄트머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신을 잊기 위해 나는 달렸고, 또 달려 지금에 도착했습니다.

 

사랑이 사라진 9월이란 시간 속에.

 

 

우리 모두 다 사실은 알고 있다.

모든 게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정겹고 낯익은 것들이 사라지고 미지의 무언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p.411

 

 

 

모든 것이 끝난 나는 지금, 허무합니다. 그립습니다. '9월이 영원히 계속되면'이라는 이름의 당신을 만나 지금 난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아아, 야속한 당신은 갔습니다. 나를 이 허무한 새벽에 남겨두고 그렇게 떠났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당신을 두고 이제 또 누구를 만나 부딪히고, 싸우고, 제 발로 서 걸어가야 합니까.

 

그랬습니다.

저는 그렇게 사랑하였고,

지금도 저를 떠난 이 책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9월이 영원히 계속되면,

이라는 낯선 이름의 당신을요.

 

 

  

 

문을 닫으면 또 시작된다.

밤이 낮으로 이어지고

오늘이 내일로 이어진다.

 

요리를 하고

일을 하고

웃고

화내고

무엇을 만들기도 하고

잃기도 한다.

 

회색 바다 위를 떠다니면서도

그런 환영의 일상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 밖에 뭘 할 수 있을까.

 

p.422

 

 

 

사진과 함께 보는 리뷰는 요쪽 :

http://cameraian.blog.me/130139322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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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 2012-05-30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나 절절한 리뷰이네요. 미야베미유키를 사랑한저도 화차를 읽으면서 절절함과 함께 누군가를 사랑하면 헤어지면 그모든 감정이 책이라는 이름으로 대체 되어 있네요.
가슴아픈 계절 9월에 대한 사랑이 기대되네요. 저도 이책 꼭 읽어봐야겠네요.

난나 2012-06-02 20:22   좋아요 0 | URL
앗. 수비의기술 서평 달러 들어왔다가 발견했습니다. 예, 뭐 그렇습니다. 덧글 달려니 아잉 쑥스럽네요. 근데 저만 이렇게 재미나게 읽었을까 좀 두렵긴 합니다. 와 전 정말 재미났는데 말이에요.
 
활자 잔혹극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 / 북스피어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소는 오늘도 평소처럼 노트북 앞에 앉았다. 두 권의 책을 바라본다. 한 권은 1995년 영화로 만들어진 루스랜들의 소설 '활자잔혹극'이고, 또 다른 한 권은 곧 영화로 만들어질 '종료되었습니다'다. 변소가 보기에 이 두 소설은 전혀 다르다. 하지만 변소는 두 소설을 비교하는 데에 큰 흥미를 느꼈다. 그리하여 노트북 앞에 앉아서는 두 책을 비교해보겠다 실실 웃는다. 

 

 저는 단번에 많은 책을 읽습니다. 책달력을 보시면 아시다시피, 하루에 서너 권을 읽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독후감은? 안 씁니다. 귀찮거든요. 책달력이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어요. 그렇다면 이 책들 다 어쩔 셈이냐... 하다가 마침내 생각해낸 게 바로 책 vs 책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비슷한 책들을 몰아서 소개하자는 생각입니다.

 

 

 

첫 번째로 비교할 책은 이번 주에 읽은 두 권의 책 루스 랜들의 '활자잔혹극'과 박하익의 '종료되었습니다'입니다. 이 두 책은 상당히 구성이 다릅니다. 이끌어가는 형식도 전혀 다르고요.

 

하지만 저는 이 두 책을 비교하고 싶어졌습니다.

왜냐고요?

이제부터 천천히 풀어보겠습니다.

 

 

1. 반전.

 

'종료되었습니다'는 반전 소설입니다. 예전에도 몇 번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대부분의 반전이나 범인을 잘 맞춥니다. 때문에 안타깝게도 이번 '종료되었습니다'의 범인과 반전도 한참 전에 맞춰버렸습니다. 그만, 예전에 비슷한 영상물을 봤었던 터라. 이런이런. 당신도 맞출 수 있겠습니까? 그럼 도전하세요. 하지만 못 맞췄다고 나한테 뭐라고 하진 마세요. 그건 당신이 나보다 못난 탓이에요. 억울해요? 그럼 변소되세요, 알죠? 변소의 약자는 변태완소의 줄임말이라는 것. 웰컴투변소월드. 하지만 단언하건데, 이 반전은 흥미롭습니다. 분명 많은 분들이 감탄하시리라 믿겠습니다. 또 그 과정도 흥미진진하고요.

 

반면, 루스 렌들은 쿨합니다.

반전따위? 개나 줘버려!

이런 태도로 첫 장의 첫 문장부터 강렬합니다.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대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처음부터 범인을 까발립니다.  

 

 

2. 전개.

 

때문에, 루스렌들은 범인과 피해자가 만나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살인이 일어나는 장면까지 촘촘하고 세세하게 끌고 갑니다. 헌데 그 과정이 결코 지루하지 않습니다. 지리멸렬할 정도로 유니스 파치먼의 이야기를 하며, 어느새 우리는 유니스 파치먼의 안으로 빨려듭니다. 어째서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문맹이기 때문에 사람을 죽일 수 밖에 없었는가, 작가에게 서서히 설득당합니다.

 

박하익은 처음부터 시작합니다. 첫 장면에서 세상에나! 칠 년 전 살해당한 엄마가 나타나서는 돌연 아들을 죽이려고 듭니다. 아들이 자신을 죽였다면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알고 보니 엄마는 무시무시한 생명체가 되어버렸습니다. 일명 RV라고 불리우는 복수괴물이 돌아온 겁니다.

헌데 엄마는 아들을 죽이려 들어요.

 

그렇다면 아들이 엄마를 죽였을까요?

정말 그럴까요?

정말로요...? 

 

 

3. 영화.

 

처음에 밝혔다시피, 루스 렌들의 소설은 이미 영화화가 되었고, 박하익의 '종료되었습니다'는 영화화가 될 예정입니다. 박하익의 '종료되었습니다'는 영화화하기에 참 좋은 작품입니다. 일단 쉽게 읽히고요, 장면 하나하나가 박진감 넘칩니다. 근미래 SF에 우와! 액션이 넘쳐흘러요! 덕분에 무척 가독성이 좋고, 읽히기도 잘 읽힙니다. 때문에 잘 쓴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이 떠오르기도 하더라고요. 흐흐.

 

하지만 루스 렌들의 소설 '활자잔혹극'은 영화가 말아먹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류급 소설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자신의 매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활자 잔혹극' 역시 영화화되면서 작품의 깊은 주제와 세부를 잃어버렸다.

 

 - '활자잔혹극' 뒤에 붙은 장정일 님의 발문

'문맹과 문해 사이' 첫 장에서 발췌.

 

 

전 영화는 보지 않았지만 아쉽지는 않습니다. 왜냐고요? 장정일 님의 말씀대로 이 소설 안에는 깊이의 울림이 있고, 제 생각에도 그 울림은 영화화했을 때 사라질 듯했습니다. 영화에서 단 한 순간에 멈추는 장면이 소설에서는 한 장, 두 장, 심할 때엔 다섯 장, 열 장, 혹은 한 권 전체가 들어있을 때가 있어요. 저는 그 안에서 가끔 손 끝의 저릿함을 느끼는데요, 이 소설이 그랬답니다. 너무나 많은 의미가 곳곳에 숨어있어요. 단순한 '보기 위한 것'이 아닌 소설 그 자체, '읽기 위한 것'이요. 다른 이름으로 '주제'라 불리는 감동의 결정체 말이에요.

 

 

4. 주제

 

루스 렌들의 소설은 한 여자가 사이코패스가 된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를 통해 단순히 '읽고 쓰지 못하는 것'이 어떤 이에겐 인생 그 자체를 빌어먹을, 말아먹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여러 생각을 하게 합니다. 결말을 내고 시작해 놓고서는 마치 문맹이 아니지만 문맹보다 못한 나 자신을 일깨웁니다.

 

박하익의 소설은 피해자를 다시 한 번 생각케 합니다.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외로운 자 앞에서 웃지 마십시오.

외로운 자 앞에서 행복하지 마십시오.

 

- 박하익의 소설 '종료되었습니다' 중에서 발췌.

이 문장이 어느 순간, 어떤 인물이 하는지는 스스로 찾아보세요. 일부러 가르쳐드리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소설을 읽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설에서 우리가 집중하는 이유는 살인자입니다. 루스렌들의 소설 역시 그렇습니다. 살인자가 주인공이지요. 물론, 루스렌들의 소설 속 살인자는 더 큰 의미로 볼 때엔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살인자입니다.

 

박하익의 소설 속에는 피해자가 있습니다. 피해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가, 어떤 기분을 느끼는가, 살인이 일어난 후의 삶은 어떻게 흘러가는 과정을 스펙타클하게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살인자가 아닌 피해자를 보라고, 우리가 살인자가 될 확률은 지극히 낮지만 피해자가 될 확률은 매우 높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루스 렌들과 또 다른 방법으로 우리의 무지가 무엇인가 일깨웁니다.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지와 무구일지도 모른다. 태초의 낙원에서 인간을 타락시킨 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이었듯 무구함이야말로 신의 선물일지도 모른다. 몰라야 할 것을 몰라야 인간이다. 범죄성과 악마성, 그리고 수성과 대면해 버리면 영혼은 순식간에 변질되고 만다.

 

- p. 154, 종료되었습니다, 박하익, 노블마인, 2012

 

 

 

이렇게 두 권의 소설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어때요?

어딘가 좀 닮은 듯하고, 또 전혀 다른 듯한가요?

또 궁금한가요?

 

그렇다면 여러분도 읽어보세요.

둘 중 어떤 책을 고르든간에,

당신은 그 날 무척 즐겁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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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연애의 모든 것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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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묻고 시작합니다. 사랑, 해보셨습니까? 아직 안 해보셨습니까. 왜요? 아, 그렇구나. 아, 해봤어요? 어땠어요? 아, 그랬구나. 그렇다면 사랑이 뭐예요? 그거 하면, 밥 먹을 수 있나요? 우걱우걱. 사랑이 밥을 먹여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잠시 웃게 해주기는 합디다.

 

그리하여 세 번째 책 vs 책은 사랑, 사랑, 사랑 이야기입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와 이응준의 '내 연애의 모든 것'으로 사랑을 논해 봅니다.   

 

 

우리가 겪은 사랑과,

겪지 않은 사랑과,

앞으로 겪지 못할 듯한 사랑을요.  

 

 

1. 눈 맞았다.

 

 

우리가 서로를 열면

너는 너를 내게 그리고 나는 나를 네게,

우리가 깊이 빠져들면

너는 내 안으로 그리고 나는 네 안으로,

우리가 사라지면

너는 내 안으로 그리고 나는 네 안으로

 

그러면

나는 나

그리고 너는 너.

 

 

더 리더에 등장하는 연인은 자그마치 스물한 살 차이의 연상연하커플입니다.

 

열다섯 살의 '나'는 감기가 걸려서 길을 잃고 헤매다 한나라는 여인을 만납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이 둘은 소년의 풋풋한 사춘기적 망상(?) 덕분에 사랑에 빠집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엔 사랑이 아니었어요. 소년은 잘 빠진 암말같은 한나와 '자고 싶었을' 뿐이고, 한나는 한나대로 '성욕의 분출구'가 필요했어요. 때문에 둘은 연결되었고, 서서히 빠져듭니다. 그렇게 서로의 몸을 탐닉해가다 서서히, 서로를 사랑하게 됩니다.

 

가끔 인생을 살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질 때가 있는데, 그래요. 이 둘이 그랬습니다. 이 둘은 결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도 그렇게 빠져들었고, 둘이 서로를 음미하게 되는 첫 번째 계기가 바로 책이었습니다.

때문에 이 소설의 제목은 책 읽어주는 남자입니다.

 

 

 

사랑은 가끔 사소한 오해에서 시작됩니다. '내 연애의 모든 것'은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단 두 명밖에 없는 진보노동당 대표 최고의 미녀 노처녀 국회의원 오소영과 여당 국회의원이지만 아직 때가 덜 탄 김수영, 국회의사당출입기자 사이에서 인기투표 1위와 2위를 양분한 이 둘은 시뻘건 정체불명의 무생명체 덕에 만납니다. (정확한 명칭을 적지 못한 것은 양해해 주십시오. 요걸 말하면 어쨌든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저렇게 적었습니다.) 이 시뻘건 정체불명의 무생명체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두 남녀를 엮습니다. 사실 첨엔 사랑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시뻘건 정체불명의 무생명체는 시뻘겋다 못해 새카맣기까지 한 막막한 상황을 연출하고, 둘은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몇 번이고 만나다가 투명인간은 아니지만 투명하며 가끔은 무기가 될 수 있는 어떤 액체의 주선으로 끌립니다. 이 액체 역시 앞의 시뻘건 정체불명의 무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전혀 의도가 없었으나, 둘은 사귀게 됩니다. 무생명체와 액체의 중매로요.

 

'내 연애의 모든 것'을 보기 전에 꽤나 리뷰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리뷰에서 발견한 것이 '이 두 사람이 왜 사랑에 빠졌는지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였는데요, 저는 나이가 실제로 주인공들과 비슷한 노처녀라 그런가, 아 너무 와닿았습니다. 사랑이란 그렇습니다. 무생명체와 액체의 주선으로 빠지기도 합니다. 복잡하고 자존심이 세고 소심하면서도 겉으로는 강한 척하는 사람일수록 더더욱 그렇습니다. 자존심이 세기 때문에 달려드는 사람에게 약하고, 소심하기 때문에 얼떨결에 말려드는 사랑에 약합니다. 때문에 저는 그만, 너무나 이해를 잘 해 버렸습니다. 이 두 남녀의 사랑을. 제가 오소영 같은 사람이라서 말이에요. 저도 모르게 그만, 저 상황이라면, "아 김수영처럼 대시하면 나도 얼결에 넘어가겠다."라고 중얼거렸습니다. 

 

 

 

 

2. 오해와 장애물 들.

 

 

인간들은 저마다 예외없이 거대한 벽과 마주 서 있어요.

그걸 부숴야 해요.

그래야 앞으로 나갈 수 있어요.

 

 

 

'내 연애의 모든 것'의 장애물은 로미오와 줄리엣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복잡하기 짝이 없는 허울 좋은 국회입니다. 겉으로는 으르렁거리는 서로의 정당은 이 둘의 사랑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둘이 사랑한다는데 어찌나 귀찮게 하는지 모릅니다. 때문에 둘은 사랑하다가도 싸웁니다. 서로의 믿는 것이 다르니까요.

 

'더 리더'는 그보다 더합니다. 이 둘 사이엔 스물한 살이라는 어마어마한 나이차가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가 좋습니다. 때문에 일부러 여자가 일하는 곳에도 갑니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에게 아는 체를 하지 않습니다. 서운합니다. 여자가 자기에게 아는 체를 해줄 줄 아는데, 여자는 남자를 모른 체합니다. 남자는 화를 냅니다. 그러자 오히려 여자가 말합니다.

 

"너, 내가 창피한 거잖아! 그래서 아는 척 안 했잖아!"

 

이 얼마나 안타까운 오해입니까.

 

남자는 자신이 너무 어려서 여자가 자신을 창피하리라 생각했는데, 반대로 여자는 자신이 너무 나이가 들어 남자가 자길 창피해 하리라 생각한 겁니다. 일상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저 역시 그러했습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저와 똑같은 이유로 상대방이 절 오해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게 뭔가 싶더군요.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게 되더군요. 오해를 풀려고 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혹시라도 자신이 솔직하게 말했다가 더 큰 상처를 받을까봐 내면으로 움츠리게 됩니다.

 

두 소설 속의 주인공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오해를 풀지 못했습니다.

오해를 풀기 보다 서로를 떠나자 생각합니다.

미련이 가득한 채 미련하게요.

그 오해의 다른 이름은,

 

 

 

 

3. 비밀

 

 

 

입니다.

 

두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는 숨긴 비밀이 있습니다. 더 리더의 비밀은 이야기의 중심을 꿰뚫습니다. 이 비밀 자체가 소설을 묵직하게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여자의 비밀입니다. 여자는 남자가 상상치도 못할 비밀을 갖고 있었고, 그 비밀을 들킬까 너무 두려워서 그만 떠나버립니다. 더더욱 자신을 상처입혀버립니다.

 

 

 

내 연애의 모든 것의 비밀은 주인공들의 연애 자체입니다. 둘이 사귄다는 사실을 다른 이들이 알았을 때의 사회적 파장, 서로가 서로를 만나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운 마음에 "우리는 연애 중입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고 숨습니다. 적인 척, 서로를 포장합니다. 그러면서 서로를 보며 서로만이 아는 애뜻한 편지를 주고 받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그게 서로에게 주는 연애편지라고는 전혀 생각치 못합니다.

 

왜냐하면, 오소영은 그 편지를 국회의사당에서 읽거든요.

 

무슨 편지냐고요?

 

책을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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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아래 봄에 죽기를 가나리야 마스터 시리즈
기타모리 고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낯선 작가가 피는 에 상륙했습니다.

벚꽃처럼 덧없우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때요,

봄이 져 여름이 오기 전에 이런 소설 한 편?

 

 

 

 

책달력에서 몇 번이고 밝혔다시피, 저는 코엑스 반디앤루니스를 애용합니다. 직장이 코앞인데다 반디앤루니스 북셀프나 기프트카드제도가 마음에 들기 때문인데요, 이 책 역시 책 한 권 뚝딱 해치우고 나서 이번엔 또 뭘 볼까, 기웃거리다가 발견한 아름다운 책이었습니다.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은 미리 들었어요. 블로그 이웃으로 피니스 아프리카에의 네이버 블로그 http://finisafricae.co.kr/ 를 추가해 놓았거든요. 이벤트도 진행해서 여러 분들이 지원하셨고, 몇 분은 책을 받으시기도 했고요.

 

 

피니스 아프리카에의 전작들은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입니다. 책이 워낙 두껍다 보니, 받고 나서 포기하시거나 한 분들이 많으신 줄로 압니다. (흐흐) 또 생각보다 평이 갈려서 "별로야!" 하시는 분도 많다고 알고요.

 

하지만 저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실 저도 처음엔 좀 지겨웠어요. 스틸라이프, 처음에 영 정이 안 가서 몇 번이고 놓았다 들었다 했습니다. 하지만 북스피어 전 편집장 k모양이 적극 추천했으니 믿고 끝까지 봤다가... 이야 마지막에 감동 한 움큼 받아버렸습니다. 대성통곡 했네요. 덕분에 이번에 나온 치명적인 은총은 무조건 구입해버렸고 마지막에 빙긋 웃으며 다음 편을 기대하였답니다. 음, 이상한 것은 말이에요. 제가 울었다는 스틸라이프보다 치명적인 은총을 더 많이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이것 참,

 

하지만 저는 뭐, 영화 토이스토리 3 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대성통곡한 여자니까요. "안 돼! 안 돼!" 소리지르면서요. 것도 극장서. (아, 생각하니 또 슬프네.)  

 

헛소리가 길어지니 그만하고요, 소설로 돌아갈게요. 꽃 아래 봄에 죽기를은 연작집입니다. 연작집에 대해서는 에전에도 한 차례 포스팅했었지요?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는 '맛있는' 책, 한 입 드셔보실래요?

http://cameraian.blog.me/130103211328

 

 

아, 전에 적고 나서 이 한 미스터리 하시는 분들이 누구인가 궁금하신 분들이 꽤 계셨지요? 이제 와서 밝히자면, 한국미스터리작가모임-일명 한미모- 연말모임이었고, 저 말씀을 하신 분은 계간 미스터리 편집장이신 박광규 선생님이셨습니다. 정말 뵙기 어려운 분을 뵈어서 감개무량하였었습니다. ㅠㅠ

 

이때 본문에 적었다 시피 연작은 일종의 연계고리가 있는 소설이고, 시리즈는 에피소드가 연결되는 소설입니다. 예를 들어 미야베 미유키의 '나는 지갑이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행각승 지장스님의 방랑' 구지라 도이치로의 '금요일 밤의 미스터리 클럽'요.

  

읽은 분들은 바로 "아!" 하고 감이 오시죠? 특히 이중 '행각승 지장스님의 방랑'과 '금요일 밤의 미스터리 클럽'은 이번에 기타모리 고의 '꽃 아래 봄에 죽기를'과 마찬가지로 안락의자탐정이 주인공이랍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위에 예시로 든 두 작품은 '바'를 중심으로 '바의 손님'이 안락의자탐정이라는 점이고, 꽃 아래 봄에 죽기를은 '맥주바'를 중심으로 '맥주바 주인장' 구도 데쓰야 아저씨가 안락의자탐정이랍니다.

 

그런데 배경이 되는 맥주바 가나리야, 참 음식이 맛납니다.

 

 

"좋은 오리고기가 들어와서 남은 비곗살로 맑은 장국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파뿌리를 넣어서 의외로 개운한 맛이 납니다. 알코올 때문에 혀도 조금 지쳐 있으시죠?"

p. 89

 

대화를 하는 동안에도 구도의 손이 멈추는 일은 없다. 카운터 밑의 냉장고에서 팩을 꺼내 작은 보조 도마 위에서 칼질을 하더니 언제 꺼냈는지, 옅은 남색의 야마구치산 작은 도기에 담는다. 그 접시를 쓰마키에게 내밀었다.

"현지에서 좋은 문어가 들어왔기에 훈제해서 마리네marine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pp.100~1

 

"모양 좋은 송어를 받아 왔는데, 지금은 송어에 기름기가 빠지는 시기라 조금 손을 뎄습니다."

접시 위에 길이 30센티미터는 충분히 되어 보이는 커다란 히라키가 놓여 있었다.

"전갱이가 아니라 송어로 히라키를 만들었어?"

"저는 훈제를 만든다고 해 봤습니다만, 어떻습니까?"

구도가 이렇게 웃는 얼굴로 내놓는 요리 가운데 맛없는 요리는 결코 없다. 세 사람은 재빨리 훈제를 집어 들었고, 사람들 입에서는 한숨인지 탄식인지 알 수 없는 감탄의 소리가 흘러 나왔다. 물론 요리는 다른 손님에게도 나누어졌고 같은 반응이 나왔다.

 

p.177  

 

때문에 자꾸만 일본드라마 '심야식당'이 떠올라요.  

 

이 일본 드라마에 보면 정말 맛난 음식들이 많이 나오지요? 혹시 일본 드라마를 모르는 분들은 아래의 링크를 따라가 보세요. 제 이웃이신 카르페 디엠님이 올린 심야식당 리뷰입니다.

 

 

[심야식당] 심야식당 6화, 가츠동 - 가족이란 이름의 따뜻한 음식, 오야코동

http://blog.naver.com/violette00/30137591817

 

 

심야식당처럼 맥주바 '가나리야' 역시 음식과 사람, 맥주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이 맥주바서 무엇보다 손님을 끄는 것은 바로 사건입니다. 맥주바 가나리야의 주인장 구도 데쓰야는 놀라운 추리력의 소유자입니다. 손님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이야깃속에 숨은 비밀을 찾아냅니다. 첫 번째 작품이자 표제작인 '꽃 아래 봄에 죽기를'과 마지막 작품 '물고기의 교제'는 완벽하게 수미쌍관을 이루면서 이 작품이 어찌하여 훌륭한 연작집인지, 또 상을 탈 수 밖에 없었는지를 조용히 증명합니다. '마지막 거처'는 확 빨아들이는 구조와 마지막 한 장면이 압권입니다. 저도 모르게 코를 킁킁거립니다. 주인공이 받은 '감동섞인 음식'이 향기로 다가옵니다. '일곱 접시는 너무 많다'와 '살인자의 빨간 손'은 사람의 오해와 상상력은 어디까지 뻗어나가는가, 하지만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케 하고, '가족사진'엔 가상과 현실 사이를 교묘히 오가며 사람사이의 인연을 지키게 하는 힘을 보여줍니다.

물론, 그 힘을 보여주는 것은 가나리야의 주인장 구도 데쓰야입니다.

 

아아, 이 책을 읽고 나니 더할 수 없이 이곳, 가나리야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가나리야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나리야를 배경으로 한 책이 또 나오면 좋을텐데 생각해 보지만, 그것 역시 불가능합니다.

작가가 작고했기 때문입니다.

 

 

작가 '가타기리 고'는 48세의 젊은 나이로 2010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슬프고 아련한 일입니다.

 

때문에 다시 한 번 연작집의 제목을 입에 새깁니다.

아래 에 죽기를.

어쩐지 이 제목이, 이 책이 제 마음속에 다시 한 번 깊은 꽃기운을 불어넣고 갑니다. 죽음과 생명이라는 기묘한 데자뷰를 그리는 봄처럼, 그렇게요.

 

 

 

 본문에 언급되는 책달력은 다음 링크를 따라가세요.

 

2월 책달력 : http://cameraian.blog.me/130132914381

3월 책달력 : http://cameraian.blog.me/130135384637

4월 책달력 : http://cameraian.blog.me/130137647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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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길 - 상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복합적이다 못해 짐승스런 ‘D의 복합’과 ‘짐승의 길’,

그리고 마쓰모토 세이초에 대한 구구절절

 


  작년, 아버지가 집에 한 번 오셨을 때 밑도 끝도 없이 ‘대남’이라는 책을 찾았다.1) 작가의 이름도 출판사도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상태에서 ‘대남’이라는 재목 하나만으로 단서를 잡아 인터넷을 뒤졌는데, 아무리 해도 나오지 않았다. 그 후로도 짬이 날 때마다 꾸준히 찾았지만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하여 도대체 우리 아버지가 찾는 ‘대남’은 무엇인가, 아버지는 왜 그 책을 찾는가 한참을 궁금해 하였었는데 올해, ‘짐승의 길’을 읽다 집나간(?) 대남이를 발견했다.



 

  (전략)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동안 세이초는 꽤 많이 소개되었습니다. 단행본은 물론이거니와 오래전 외판용으로 무려 열 권짜리 세이초 선집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다소 엉뚱한 ‘大男’이라는 타이틀을 달고요.

  왜 ‘대남’이냐고요?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한 제목이긴 하지요. 그런데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역사소설 ‘대망’을 떠올리면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해 ‘대망’의 인기에 편승하려 했던 거죠. 여기서 ‘대망’은 또 무슨 책인지 궁금해졌다면(아마 젊은 독자들 중에는 그런 분들이 있을지도) 애써 설명하기보다는 검색을 권해 드리겠습니다. 괜히 공부를 시키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말입니다.

 

p.333, 짐승의 길 下, 북스피어, 2012



  짐승의 길 下편 뒤에 붙은 해설 ‘세이초, 고다마, 하루키-마쓰모토 세이초 재미있게 읽기’ 서두에서 문학평론가 조영일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2) 나는 이 서두를 읽고 “아아아앗!” 매우 흥분하였다. 그토록 기다리던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이 우리 아버지가 젊은 시절 흥분하였던 책이라니! 이런 부전자전을 보았나!3)

 

  내 블로그 이웃들이나 나와 친한 사람들이라면 귀에 딱지가 않도록 나에게 ‘마쓰모토 세이초’ 이야기를 들었으리라. 실제로 나와 함께 일하는 언니는 미스터리 소설에 관심이 없는데도 가끔 “마쓰오 씨는 잘 있어?”라고 자기 멋대로 애칭을 붙여서는 가끔 안부(?)를 물어주더니, 이번에 책이 나왔다고 신이 나서 보여주자 정말 잘 됐다고, 축하한다고 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나는 거기다가 고맙다고 대답을.

 

  사실 축하한다는 말을 들을 필요도,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을 필요도 딱히 없는 일면식 없는 관계인데 말이지.

아니, 관계는 있지. 나는 소설을 쓰는데, 마쓰모토 세이초 님처럼 되고 싶다는 관계 말이야.

 

 

  자, 그렇다면 요즘 신문이나 인터넷서 하도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다들 알 것 같지만 그대로 마쓰모토 세이초 님이 어떤 분인가 짚고 가자.

 

  마쓰모토 세이초 님은 우리나라 최초의 추리소설가 김내성, 일본 순수문학계의 거성 다자이 오사무와 동갑인 1909년생으로 다른 두 작가와 달리 마흔이 넘은 나이에 ‘사이고사쓰’로 데뷔하였다. 헌데 데뷔하고 나서 발표한 작품 ‘어느 <고쿠라 일기> 전’이 대중문학상인 나오키상 후보로 올라갔다가 떨어지고 대신 후보에도 오르지 않은 순수문학상 아쿠타가와 상을 타는 기염을 토한다. 이후 사회파 미스터리의 아버지라 불리며 우물에 독 풀듯이(?) 수많은 작품을 사람들에게 풀어놓는데, 마쓰모토 세이초 님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을 일일이 열거하려면 끝이 없을 정도다.

 

  나는 이런 마쓰모토 세이초 님에 대한 이야기를 20대 중반인가, 처음 들었다. 당시의 나는 영화 시나리오 쓰기를 그만두고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기세 좋게 데뷔한 이후 자꾸 엎어지기를 반복하다 제풀에 꺾이기도 하였고, 자신의 실력이 도통 나아지지 않아 초조했다.

 

  그러던 중 마쓰모토 세이초 님을 만났다.


  계기는 문자 한 통.


  꽤나 유명한 작가님께서 모 방송국서 상반기에 드라마를 내보내게 되었는데 함께 작업을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당연히 나는 귀가 쏠렸다. 무조건 뵙겠다고 했다. 바로 만나 뵙기로 하고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점차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현재의 내가 어떤 상태인 지 깨달았다.

 

  당시의 나는 글을 전혀 쓰지 못했다. 아니, 쓰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몰랐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미야베 미유키 님의 ‘이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이런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하고는 닥치는 대로 미야베 미유키 님의 소설을 찾아 읽을 때였다. 말 그대로 청춘과 방황의 도가니탕에 빠진 내가 이런 대단한 작가님과 일을 할 수 있을까?

 

  만나는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미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만나 뵈었는데 또 한 번 이건 아니다 싶었다.

 

  이 분이 찾는 건 보조작가였다, 동업자가 아니라.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기회다. 이분은 이미 정상의 자리에 올라선 분이니까, 보조작가로 일해도 얻는 게 많으리라. 그렇게 같이 작업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다른 일을 맡을 수 있었을 것이고. 하지만 그 때엔 너무 어려서(20대 중반)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더더욱 안 하겠다는 마음을 굳히고는 솔직하게 내 상태를 말했다. 시나리오를 써야할지 모르겠다. 요즘엔 미야베 미유키 님 소설을 읽는데 참 재미있어서 그런 걸 써보고 싶어졌다 라는 이야기를.

 

  “그렇다면 해야지.”

 

  작가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건방을 떨었는데 무어라 안 하시고 오히려 “열심히 써라. 그렇게 쓰다 보면 다시 써진다.”라고 말씀하시더니 두 명의 작가를 가르쳐주셨다. 그 두 명의 작가가 바로 마쓰모토 세이초와 모리무라 세이이치였다.


  허나 나는 이 두 사회파 미스터리 거장들의 책을 읽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왜냐하면 작가님은 한자로 적어주셨고, 한자를 그대로 읽어 이름을 불러주셨던 게다. 松本淸張과 村誠一이라고. 나는 덕분에 도대체 이 작가들이 누구인가 의아해하면서 혼자 되는대로 책을 읽어대다가 가까스로 두 작가님을 찾아냈는데. (그 사이에 읽은 책들의 숫자는 묻지 마. 괴로워.) 이렇듯 찾아낸 두 작가님들의 책, 특히 마쓰모토 세이초 님의 책은 날 무척 행복하게 했다. 그러고는 몇 년 후 일본드라마에 입문, 닥치는 대로 미스터리 장르의 일드만 찾아보는데 또다시 마쓰모토 세이초란 이름이 자꾸만 거론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내가 재미나게 본 일드는 죄다 마쓰모토 세이초 소설 원작이었다! 악녀시리즈인 ‘검정가죽수첩’, ‘나쁜 녀석들’, ‘짐승의 길’에 ‘야광의 계단’, 단편으로는 ‘얼굴’, ‘의혹’ 등 끝이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했더니 곧 탄생백주년이라서 방송국들이 알아서 그리하고 있다고. 게다가 방송국뿐이 아니라 나라 곳곳에서 이런 식의 행사를.

  세상에나! 

 

  그제야 난 마쓰모토 세이초가 얼마나 대단한 작가인지 깨달았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죽고 나서도 사랑받는 작가였다. 교과서에 나오고 끝인 작가가 아니라 사람들이 여전히 찾아 읽고 싶은 작가, 박물관을 세우고 몇 년에 걸쳐 축제처럼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게 하는 작가! 짐승의 길이 아니라 변소의 길이 그 안에 있었다. 결심했다. 나는 마쓰모토 세이초 님처럼 되고 싶다, 저렇게 기억에 남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워낙 대단한 결심이라 부끄러워 어디다 말하진 못했지만.


  이때에 처음 접했던 일드들 중 하나인 ‘짐승의길’은 정말 탁월했다. 일본배우 요네코라 료코가 주연을 맡았는데 아, 그 표독스러운 연기란! 때문에 난 이 작품을 무척 기다렸다. 그러다 이번에 ‘짐승의길’이 무려 세이초월드 첫 탄으로 나온다는 말에 얼마나 반갑던지!


  ‘짐승의 길’ 줄거리는 간단하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여자가 조금이라도 잘 살아보겠다는 마음으로 수상한 제의를 받아들은 이후 온갖 의혹에 휩싸인다는 스토리.

 

  일드와 소설은 느낌이 상당히 다르다. 일드는 화려하고, 여주인공 타미코는 강했다. 흔들림 없이 자신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소설은 달랐다. 소설 속의 여주인공은 사랑스럽고 겁이 많은, 죄를 지었는데도 미워할 수 없는 불쌍한 여자였다. 주변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며 아주 작은 욕망을 이뤄내려 노력하는 작은 여자. 인생이라는 이름의 산에서 길을 잃고 타박타박 되는대로 걸어 다니다 우연히 발견한 짐승의 길에 들어선 여자, 그 여자 안에는 내가 있었다. 우리가 있었다. 미워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런 여자였다, 내가 만난 다미코는.

 

  짐승의 길을 모두 읽고 해설까지 단번에 읽었다. 당시의 나는 소설 마감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읽기 시작하니 멈출 수가 없었다. 기다리던 작품이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말 그대로 ‘읽는 맛’때문이다.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찰진 맛이 있다, 이 책엔. 이 책을 읽고 나니 나도 모르게 화차가 마구 떠올랐다.


  곧 영화로도 개봉하는 화차, 이제는 누구나 다 알 듯한 이 내용을 그래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한 여자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다. 갑자기 사라진 여자의 인생을 뒤쫓다 보니 상상도 못했던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것인데.

이 여자의 인생, 짐승의 길에 나오는 다미코와 참으로 닮았다. 이 여자 역시 다미코처럼 산을 헤맸다.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어두운 산을 헤매대 결국 짐승의 길에 들어섰다. 때문에 미야베 미유키는 마쓰모토 세이초의 장녀이리라. 그녀는 짐승의 길을 알고 있고, 또 그러한 작품에 버금갈 놀라운 작품을 써냈으니, 나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짐승의길...이 아니라, 사회파 미스터리의 길로 안내했으니.

 

  다음으로 손에 든 D의 복합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제길 D의 복합적인 재미를 봤나!라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릴 정도로 흥미로웠다.

 

  줄거리를 한 줄로 설명하자면 민속학잡지에 글을 연재하게 된 작가 이세가 가는 곳마다 수수께끼의 사건이 쫓아다니더니 나중엔 살인까지 터져서 ‘도대체 이게 뭥미?’ 하면서 사건을 쫓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그 과정이 참으로 흥미롭다. 단순하게 쫓기만 하는 ‘짧은 호흡’이 아니라 쫓는 내내 일본 민속학에 대한 이야기를 차근차근 펼쳐낸다. 일본의 수많은 설화들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레 ‘산마처럼 비웃는 것’이나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허나 그만큼 괴기스럽거나 구체적으로 그 상황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고, 박학다식이라는 말로밖에 표현될 수 없는 학문을 접하는 것이 무척 즐겁다. 열차시간표 트릭이 툭 튀어나와도 상관없을 정도로 정밀한 등장인물들의 동선은 어떻고! 나는 새삼 마쓰모토 세이초에게 감탄해버렸다.


  개인적인 즐거움도 있었다. 책을 읽다 보니 이번에 출간할 내 첫 번째 장편소설 ‘홈즈가 보낸 편지’에 필요한 자료들이 많이도 쏟아졌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에서 죄인의 형무기록을 확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구체적인 과정에 대한 자료 찾느라 고생 좀 했는데 이럴 수가! D의 복합 주인공이 형무기록을 찾으러 돌아다니지 뭐야! 짐승의길에서는 등장인물들 중 한 명인 비리형사 히사쓰네가 내가 원하는 자료 찾으러 가스미가세키며 나카타초에 오가고! 나도 모르게 책을 읽으며 소리쳤다. 아니 이 무슨 D의 복합적인 짐승스런 은혜가 다 있어!

 

 


  마지막으로 D의 복합에서 내가 무척이나 공감할 만한 부분이 나와서 그대로 덧붙인다.



  물론 막대한 적자가 나면 그만두겠지만, 당분간 어느 정도의 결손은 계산에 넣고 있을 것이다. 이세도 연재를 시작한 이상, 인정상 어떻게든 이 잡지를 키워주고 싶어졌다.


p.79 D의 복합, 마쓰모토 세이초, 모비딕, 2012



  내 마음이 이렇다. 이번 세이초 월드가 아주아주 잘 되어서 우리 마쓰모토 세이초 님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수없이 많이 쏟아졌으면 좋겠사와요.





꼬리. 

마지막으로 서평 끝까지 보고 이런 거 묻는 사람들 있을 거야.

“언제 출간하는데요?”

나도 몰라.

그냥 기다려. 내가 설마 공지 안 때리겠어?

 

 

 

 

 

 

(1)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가 찾은 책은 대남이가 아니라 대물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북스피어서 출간한 책들을 보내드렸다. 우리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자세하게 알고 싶은 사람들은 아래의 링크를 따라가라.

 

筆寫의 追憶 http://cameraian.blog.me/130089450254

 

(2)

조영일 선생님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또 링크를 따라가라.

와우북, 무사히 다녀오다. http://cameraian.blog.me/130093678995

 

(3)

여기서 부전자전은 아버지와 자식이라는 뜻으로 썼다. 아버지와 아들로 해석해서 내 성정체성을 무너드리지 말거라.

 

 

서평 원문 :

http://cameraian.blog.me/130131709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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