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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평점 :
고등학교 때 나는 엄청난 비만아였다. 최고 많이 나갔을 때엔 몸무게가 80kg를 넘었었다. 당시엔 심한 비만과 선천적인 이유로 디스크 때문에 제대로 된 운동은 무엇 하나 할 수 없었다. 체력장은 모두 패스였고 체육시간은 대체 왜 존재하는 걸까 그 존재의의를 진지하게 생각했었다. 몸무게가 서서히 빠져서 60kg대에 진입했을 때가 아마도 고등학교 2학년 혹은 3학년 때였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체중계를 싫어했거든.) 이유는 간단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별 생각 없이 했던 연극 덕에 자연스레 살이 빠졌다. 또 고등학교 2학년에 진입하면서 공부 대신 놀러 다니기에 맛을 들이는 바람에 더더욱 살이 빠져서 어떻게 60kg대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고 해서 날씬하다고 봐주기는 매우 힘들었지만 이때부터 체육시간의 존재의의를 생각할 정도로 싫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체육 시간에 적당히 몸을 풀기 위해 뛰는 게 언젠가부터 은근히 기다려졌다. 아마도 그 즈음부터 나는 걷기에 맛을 들였던 듯싶다.
달리고 싶다면 달리고 글을 쓰고 싶다면 글써라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어제 저녁, 상당히 화가 나는 일이 있었다. 가장 화가 나는 이유는 이 일이 나에게 일어났으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제 3자라는 입장이었고, 그 다음으로 화가 나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일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제 3자이자 중심일 수밖에 없는 일이라니 어불성설이지만 세상엔 그런 일이 참 자주 일어난다.) 나는 이 일을 접하자 일단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손에서 들고 있던 책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인상을 쓰며 바들바들 떨다가 끝내는 “씨발.” 단발을 내뱉으며 눈물을 찔끔 흘렸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려 이래저래 어찌해야 하지 중얼거리다 결국 한 일이 퇴근이었다.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책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읽을 책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공부해야 할 책은 더더욱 많았다. 때문에 화가 나는 반면 마음은 자꾸만 조급해졌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 내려야 할 전철역에 도착해서는 여전히 분이 안 풀린 마음으로 무작정 걸었다. 처음엔 모든 게 짜증이 나서 걸음이 급했다. 하지만 점차 규칙적으로 다리를 놀리자 서서히 머리가 침착해졌다. 짜증이 났던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알고 있었으나 차마 인정할 수 없었던 그 사실이 발끝에서 무릎으로, 무릎에서 허벅지로 걷고 있다는 감각과 함께 차올랐다. 이렇게 화를 낸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글을 쓰는 것뿐이라는 생각 말이다. 집에 도착했더니 온몸이 근질거렸다. 뭔가 입에 댔다가 맛만 보고 떼버렸다는 마음이 들어 옷을 갈아입었다. “엄마, 나 뛰러 나간다.”라고 말하고는 옷을 갈아입었다. 엊그제 지나가다 오천 원이라는 가격에 혹해 구입한 일명 ‘효리츄리링바지’와 엄마의 등산용 파란 점퍼를 입고는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분홍 운동화를 신고 무작정 나갔다. 코스도 잡지 않고 일단 뛰었다. 다음 날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면 어쩌나 두려운 마음이 머릿속에 가득했지만 그보다는 잡생각을 가라앉히는 쪽이 먼저였다. 뛰었다. 조금씩 호흡이 가빠왔다. 근육이 움직였다. 본래 팔이 이렇게 움직였었나 내 심장은 이렇게 뛰었었나 놀라워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엄마의 손을 잡고 가는 아이들 아빠와 함께 걸어가다 무등을 타는 어린 남자아이를 보며 음, 밤이야 밤인데 나는 달밤에 뛰고 있어 중얼거리면서도 뜀박질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계속해서 뛰다가 종착한 생각은 내 머릿속에 가득한 화의 정체였다. 처음엔 그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지금 이 상황에 대해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지나자 그보다 좀 더 뚜렷한 무언가가 보였다. 한 마디로 말해 나는 ‘칠칠치 못한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이 정도 일에도 중용을 찾지 못하는 내 자신이 싫어서, 여전히 대단찮은 작가인 내 자신이 싫어서 화가 났고 그 화를 이기지 못하여서 씩씩거리고 있었다. 아아,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무언가 뻥 뚫린 듯 마음이 시원해졌다. 그에 반비례하여 내 젖산은 지금 다리에서 꿈틀거리며 내일 아침만 되어 봐라 넌 이제 죽었다 후후후 비웃고 있겠지만.
얼마 전 무라카미 류의 책 두 권을 읽었다고 구구절절 서평을 올렸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두 권을 훑고 나니 어쩐지 이런 류의 책을 한 권 더 읽고 싶어졌다. 때문에 어린 시절 좋아했던 무라카미 류의 책 『그래 연애가 마지막 희망이다』를 읽어볼까 찾아보았다. 당연히 없었다(내 그럴 줄 알았다). 그렇다면 그 비슷한 책이라도 찾아볼까 기웃거렸는데 보인 책이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 책이었다(하루키와 류는 이름이 비슷하단 이유로 서점에 가면 늘 같이 있단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는 참 찰지다. 어느 정도로 찰지냐고 묻는다면,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가 운 적은 없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다가 운 적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울었는지 스스로도 의아하지만 나는 『먼 북소리』를 읽으며 정말 많이 울었었다. 때문에 이 책을 슬쩍 들었다가 그대로 사버렸다. 에세이니까 분명 좋겠지 하고는. 그랬더니 정말 마음에 들었다. 내가 저 위에 길고 길게 구구절절 내가 뛴 이야기를 적고 싶어질 정도로 그렇게 참 좋았다.
그런 책이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참 할 말이 많아지는 책. 때문에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무언가를 내 안에서 뽑아내고 싶은 책. 이 책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말 그대로 내가 쓰고 싶게 만들다 못해 달리고 싶게 만드는 책이었다.
소설을 쓰자고 생각을 하게 된 날짜를 정확히 기억해낼 수 있다. 1978년 4월 1일 오후 1시 반 전후였다. 그날, 진구 구장의 외야석에서 나는 혼자 맥주를 마시면서 야구를 관전하고 있었다. 진구 구장은 내가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금방 걸어갈 수 있는 곳에 있어서, 나는 그 당시부터 꽤 열성적인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팬이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봄바람은 따뜻하게 스쳐 지나가는 더 바랄 것 없는, 아주 기분 좋은 봄날의 하루였다. 그 무렵 진구 구장의 외야에는 벤치 시트가 없이, 경사면에 그저 잔디가 깔려 있을 뿐이었다. 그 잔디에 누워서, 차가운 맥주를 홀짝거리며, 때때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느긋하게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관객은―늘 그렇듯이― 많지는 않았다. 야쿠르트는 시즌 개막 경기의 상대로 히로시마 카프를 홈구장에서 맞이하고 있었다. 야쿠르트의 투수는 야스다로 기억하고 있다. 작은 몸집의 땅딸막한 투수로, 아주 치기 힘든 변화구를 던진다. 야스다는 1회 초 히로시마 타선을 무실점으로 간단히 막아냈다. 그리고 1회 말 선두 타자인 데이브 힐튼(미국에서 막 건너온 새 얼굴의 젊은 외야수였다)이 좌측 방향으로 안타를 쳤다. 배트가 강속구를 정확히 맞추어 때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구장에 울려 퍼졌다. 힐튼은 재빠르게 1루 베이스를 돌아서 여유 있게 2루를 밟았다. 내가 ‘그렇지, 소설을 써보자’라는 생각을 떠올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의 일이다. 맑게 갠 하늘과 이제 막 푸른빛을 띠기 시작한 새 잔디의 감촉과 배트의 경쾌한 소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 하늘에서 뭔가가 조용히 춤추듯 내려왔는데, 나는 그것을 확실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pp.52~3)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책에서 자신이 서른 살에 말 그대로 ‘문뜩’ 소설이 쓰고 싶어져 그냥 썼다고 말한다. 그러고 얼마 후에 또 갑자기 달리고 싶어져 ‘그냥’ 달렸다고 적는다. 누군가가 하라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며 그렇게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며 이 두 가지가 참으로 닮았고, 어찌 보면 장편소설은 마라톤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물론 열여섯 살이라고 하면, 아마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무척 골치 아픈 나이다. 세세한 일이 하나하나 맘에 걸리고,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우쭐해지거나 콤플렉스를 느끼거나 한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주워 담을 것은 주워 담고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결점이나 결함은 일일이 세자면 끝이 없다. 그래도 좋은 점은 조금은 있게 마련이고, 가진 것만으로 어떻게 참고 갈 수 밖에 없다’라고 하는 인식에 이르게 된다. (p.234)
내가 조금만 더 어렸을 때 이 책을 읽었다면 이 부분에서 “그렇지 않아요.”라고 말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혈기왕성했을 때엔 앉은 자리서 몇 십 장이고 글을 써내릴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이가 들어 이제 빼도 박도 못하는 30대 중반이 되어버리자 생각이 달라졌다. 한없이 제로에 가까운 가벼운 사상으로 가득했던 나도 나이라는 진득함이 몸속에 차버리자 이제는 진중함이 어떻게든 자리를 잡아 체중계의 눈금을 슬그머니 올려버리려는지 그리 쉽게 글을 쓸 수가 없게 됐다. 지금도 봐라. 작년부터 고민하던 그 장편을 아직도 고민하며 새롭고 재미나게 만들겠다고 여전히 책만 들입다 파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이 책을 읽고 있다 보니 많은 위안을 얻었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혹은 뛰고 있는 이 길이 결코 틀리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달까.
그래서 나는 달리기를 주위의 누군가에게 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달리는 것은 근사한 것이니가 모두 함께 달립시다” 같은 말은 되도록 입에 담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만약 긴 거리를 달리는 것에 흥미가 있다면, 그냥 놔둬도 그 사람은 언젠가 스스로 달리기 시작할 것이고, 흥미가 없다면 아무리 열심히 권한다고 해도 허사인 것이다. 마라톤은 만인을 위한 스포츠는 아니다. 소설가가 만인을 위한 직업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누군가에게 권유를 받거나, 요구를 받아 소설가가 된 것은 아니다(만류를 당한 적은 있지만). 느낀 바가 있어 내 멋대로 소설가가 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누군가 권한다고 해서 러너가 되지는 않는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그렇게 될 만해서 러너가 되는 것이다. (pp.73~4)
이 책을 읽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제대로 뛰어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뜀박질 자체가 아닌 또다른 목적이 있었다. 20대 때라면 누구나 그렇듯 다이어트 때문이었고(그러다 목적에서 이탈해서 그냥 걷고 싶어서 계속 걷기는 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쭈욱.) 30대에는 제대로 뛰어본 기억 자체가 잘 나지 않았다. 등산이나 뭐 사진을 찍느라고 열심히 걸어본 적은 있었으나 ‘달리기’만을 목적으로 뛴 적은 전무했다. 때문에 나는 내일도 좀 뛸 생각이다. 지금 젖산이 내 종아리를 압박하려는 기세로 봐서는 분명 지독한 근육통이 찾아오겠지만 그래도 좀 뛰고 싶다. 아아, 달리고 싶다. 그리하여 뻥 뚫린 가슴으로 글을 쓰고 싶다.
지금 이 순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