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개가 왔다
정이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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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가 왔다/ 정이현 산문/ 한겨레출판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을까.

오늘 그리고 내일 또 내일에는.




책을 펼치고 처음 만난 문장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금 나지막이 소리 내 읽어보았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싸르르 가슴이 아려온다. 읽기 전과 후, 밀려오는 감정의 결과 깊이가 사뭇 다르니 어느새 ‘루돌‘이에게 빠져들었나 보다. ‘어리고 작은‘ 개가 몸과 마음이 다부져가는 시간을 지켜보니 절로 그렇게 되더라. 그러니 정이현 작가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하고 고맙고 기쁘고 애달플까. ’왔다’에 이어질 ‘갔다‘ 전에 그 아이의 어제를 제대로 알기 위해 애쓰고, 오늘을 채우기 위해 다가서고, 내일을 오늘로 만나기를 바라는 정이현 작가와 루돌이의 이야기는 마음을 데워주는 온돌이 되어주었다.








인근에 하천이 흘러 저녁마다 운동 겸 산책 겸 돌곤 한다. 반려견과 보호자를 종종 만나게 된다. 목줄을 찬 개, 안 찬 개, 대형견, 소형견, 중형견, 가족 총출동, 부부, 가족(대부분 엄마) 1인 등등 분류하자면 다양하다. 예전에 비해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정이 확연히 늘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우리 집 같은 경우 아이들은 반려동물을 간절히 원했지만, 나는 무서워하고 남편은 싫어해서 이제는 마음을 접은 상태다. 독립 후를 꿈꾸고 있다. 어렸을 때는 애견카페, 애묘 카페를 찾아 갈증을 해소시켜주곤 했다.

그래서 비슷한 성향의 정이현 작가가 갑작스러운 인연으로 덜컥 ‘어린’ 개를 입양하고 법적 보호자로 등록되어 실질상•명의상 주보호자로 자리매김해나가는 여정이 흥미로웠다. 서로 다른 종, 생면부지의 두 생명이 만나 온전히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되어가는 시간이 아름답고 뭉클하였다.


유기견, 동물보호소, 임시보호, 입양, 안락사.

‘늑대‘가 인간친화적인 동물인 ‘개’로 진화한 순간부터 인간과의 관계가 그들에게는 중요해졌다. 세상에는 행복한 개와 행복하지 않은 개가 있다는 저자의 표현처럼 인간의 보살핌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개는 행복하지 않다. 개의 순수한 눈망울과 활기차게 흔들리는 꼬리를 떠올리면 절로 미소가 지어지건만 악의를 내뿜는 사람들이 있어 가슴이 저리다.





정이현 작가는 어린 개와의 만남으로 달라지고 풍성해진 영역을 이야기한다. 단순히 개가 아닌 ‘루돌’이가 알려준 미지의 세계를 알아가는 수고와 기쁨을 전하고 있다. 개에 관심이 없던 자신이 입양한 개를 주보호자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겪은 일상적인 개인 이야기뿐 아니라 개로 연결된 네트워크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상황에 대한 사회 이야기까지 담고 있다. 반려견 용품을 공동 구매하는 펫플루언서, 동물 친화적인 마케팅을 하지만 제한이 있는 편의시설 등 ’상업적‘ 이용 혹은 활동에 대한 고민이 이 책과 맞물려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정이현 작가가 ‘어린 개가 아니었으면 모르고 살았겠지만 모르는지도 몰랐을 것들‘에 대하여 쓴 이 산문 덕분에 눈을 뜨고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쓸 사람이 생겨날 것이다.






‘어떤 몰이해는 경험의 결핍에서 나온다‘는 문장이 마음에 콕 박힌다. 이토록 친밀하고 밀도 높은 유대감을 나누는 정이현 작가와 루돌이가 부러울 지경이다. 주저 없이 자신을 ’엄마‘라 부르며 아무 조건 없이 어떤 이유 없이 서로를 마음껏 사랑하는 사이. 그 순수함이 아름답다.








’자유‘를 인생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온 작가의 변화가 놀랍다. 이제는 루돌이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 그는 루돌이가 자유의 형식과 내용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하도록 만들었다고 했다. 원하는 인생의 결을 유연하게 변하게 하는 이 다정한 존재는 압도적인 기쁨과 어렴풋한 슬픔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고 있다. ’어린‘ 개가 온 이후, 삶은 달라졌다. 그 충만함에 자꾸 눈물이 나고 자꾸 미소가 지어지니 신기하다.








한겨레 하니포터10기 자격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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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영
장다혜 지음 / 북레시피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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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웃을 일 없이 산 이가 어찌하여

저토록 맑게 웃을 수 있을까,

한 겨울 눈꽃처럼 새하얗게."


탁영/ 장다혜/ 북레시피





책을 읽다 보면 유독 떠나보내기 힘겨운 인물들이 있다. 장다혜 작가의 신작 [탁영] 속 백섬이 그렇다. 역병에 부모 잃고 매골승에게 의탁하게 된 다섯 살 때부터 수어의 최승렬 대감의 구곡재에서 구계로 살아가게 된 열 여덟 살까지 그는 참으로 기구하고 박복한, 짧디짧은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원망과 분노 대신 향기로운 꽃을 품고 정갈히 사는 게 중하다 여기는 이였다. 본디 영혼이 결곡하고 영롱하였으리라. 그에게 행해진 악행을 활자로 읽는 이조차 마음이 먹먹해 목이 메고 눈시울이 시큰거려 읽기가 버거웠건만 백섬은 마지막 순간까지 순수했다.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 희제와의 연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시대극을 좋아하고 서스펜스를 즐기는 이라면 ‘장다혜’ 이름 석 자를 새겨야 할 듯. [탄금] - [이날치, 파란만장]에 이어 [탁영]까지 작품 모두 흔들림 없는 필력과 눈을 뗄 수 없는 서사와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신분과 성별의 벽 그리고 재력과 권력을 쫓아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는 캐릭터의 폭주로 참혹한 파국에 이르게 되는 흐름에서도 주인공들은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절절한 그 마음에 손을 모아 간절히 힘을 보태게 된다.

조선시대를 동경하는 장다혜 작가는 작품의 배경이 전부 조선시대다. 비록 양반, 중인, 천민 등 신분의 차이가 분명한 시대라 하더라도 마음과 마음이 통해 서로에게 전해지는 한 사람, 정인에게 끌리는 것은 하늘도 어찌할 수 없다. 그러니 인간이 어이 막을 수 있으랴. 금와당 주인 희제는 속수무책으로 종 백섬에게 이끌리고 만다. 마음 주는 이들을 차례로 떠나보낸 후 허한 마음에, 누구에게도 다시는 주지 않겠다 다짐했던 마음에 불씨를 지펴 다정한 온기를 불어넣는다.





풍요는 우리네 생활을 윤택하게 해줄 수는 있겠지만, 결핍은 우리네 정신을 윤택하게 해준다. 무언가를 누리지 못하거나 갖지 못한 이는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만족감,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은 내일을 상상하고 이는 삶에 대한 고찰과 열정으로 이어진다. 백섬은 벗 한번 사귀지 못해본 피폐한 삶, 피가 아닌 마음씨와 성정이 닮은 누이 막단을 허망하게 떠나보내야 했던 퍽퍽한 삶 속에서도 온기를 꺼트리지 않고 품고 살아왔다. 그를 만나 금박장 희제는 비로소 삶을 달리 보게 되었다.








사람이 사림을 만나 마음을 열고 사귀어 ‘벗’이라 부를 수 있는 관계에 이르기를 소설 [탁영]은 잘 보여주고 있다. 서로에 대한 지극하고 진지한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쌓여 비밀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진정 듬직한 기둥이 되어주는 것이다. 이런 벗을 만나는 일은 백섬이, 희제가, 칼두령 마도진이, 익위 방호가, 복순 어멈 원영이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게 만들었다. 팔딱거리는 심장처럼 절로 눈이 가고, 손이 가 마음이 머물러 자신보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게 하였다.





서늘하고 탐욕스러운 권력 투쟁의 장에서 우정과 연모와 사랑 그리고 정을 나누는, 선한 이들이 진실을 밝히고 잘못을 바로잡으려 사력을 다하는 여정이 숨 가쁘게 펼쳐진다. 진실을 파헤치려는 측과 왜곡하려는 측의 쫓고 쫓기는 싸움, 죽고 죽이는 혈투를 벌이는 가운데 인물들의 감정선이 섬세하게 그려져 흡입력을 한층 더 높여준다.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버린 인생사 소용돌이 속에서 진실이 가져온 고통을 감내하며 기꺼이 바로잡고자 애쓰는 아름다운 사림들의 분투기에 가슴을 부여잡게 된다. 어느새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고 애통한 탄식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다. 제목이 ‘탁영’이라 슬픈 결말을 예상했지만, 너무나 비극적이다. 꽃그늘을 바라는, 의미 없이 살고자 한다는 그를 보내기가 참으로 아리다.



사회에서 정한 신분이 아니라 타고난 성정과 갈고닦은 심성으로 곁을 내어주고픈 벗을 사귀고, 마음을 나누는 고운 이들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바로 여기 있다! [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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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억 번째 여름 (양장) 소설Y
청예 지음 / 창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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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억 번째 여름/ 청예 장편소설/ 창비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품은 우리의 무지를 크게 꾸짖는 듯 강력하고 묵직한 세계관을 선보인다. 찬란한 빛 아래 티탄처럼 거대해진 자연 생태계를 마주한 신인류 네오인 두 종족의 생존기가 처절하게 전개된다. 서로 다른 강점을 지닌 채 태어난 두 종족, 미미족과 두두족은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살아갔다. 하지만 반복된 여름은 두두족과 미미족의 차이를 심화시켰고 끝내 갈라놓았다.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행성의 자연과 상관없이 쾌적한 실내에서 편안한 일상을 영위하는 두두족은 그 에너지를 자연재해로부터 채집하는 임무를 미미족에게 부여하고 식량을 제공하였다. 강인한 체력으로 농경과 노동을 담당했던 미미족은 두두족이 과학기술을 공유하지 않아 원시적인 움집과 두두족이 허가하는 도구만을 사용하여 생활하게 되었다. 이런 관계 또한 고대 선조의 예언으로 불안한 상태였다.








고대 선조가 남긴 ‘두 가지 흔적’을 찾기 위해 신인류 네오인 중 유일한 해독가인 ‘이록’과 미미족의 족장인 ‘주홍’은 콜로나 시찰을 나간다. 일억 번째 여름이 절대 오지 않기를 염원하며.


주홍과 이록, 일록과 연두, 백금과 주홍. 살리고 싶은 사람이 있는 이들은 절실해졌다. 용감하고 가여운 영혼들은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속이면서까지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갔다.



‘희생’을 가슴에 품고 사는 주홍과 두두족 족장 아버지와 미미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고대 언어 해독을 할 수 있냐 없느냐로 그 운명이 결정된 이복형제 일록과 이록 그리고 채집자로 선택된 백금과 연두 모두 ‘쓰임’에 몰두한다. 하지만 그들의 부모들은 다음 세대인 자녀들에게 다른 삶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려 애쓴다. 살아남기 위해 절박한 아이들에게 사는 기쁨을, 있는 그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것을,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전하고자 했다. 진정 살아있다! 소박한 하루가 반복되도록 내버려두어 감각하며 안 심심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부모의, 어른의 바람은 건조한 세상에 부는 한줄기 바람처럼 아이들의 삶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밤을 겪어보지 못한 낮의 시간이 삶의 전부인 등장인물들에게 어둠꽃, 행성의 뒤통수 구역인 어둠의 세계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예언 속 종말의 상징,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미미족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고단한 투쟁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키고 싶은 사람을 위해 기꺼이 희생한다. 그 먹먹한 여정 끝에야 비로소 구인류가 신인류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분명해진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청예 작가가 글 곳곳에 심어둔 단서들이 의미가 되어 튀어나왔다. 검은 폭포, 에너지의 정수, 궁극의 원천, 멸망, 멸족 그리고 정체불명의 도형들. 고대 선조의 예언처럼 선량한 지혜가 깃든 종족에게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었다. ‘낡은 한 종족의 멸망‘은 사랑과 욕심이 한자리에서 움터 분간할 수 없게 된 이기적인 종족의 멸망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보완하니까."




“우리는 중간값의 산물이니 그 자체로 완벽하단다. 차이 속에 존재하는 공통점을 찾으라”는 이록의 어머니 말처럼 결핍되어 있기에 완벽해진다. 같이 있어 비로소 완벽해지는 이들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활짝 피어나 우리를 깨어나게 한다. 연쇄적인 사랑과 희생, 그 빛이 지금의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하고자 힘 있게 반짝거리고 있다. 일억 번째 여름이 지나고서야 새로운 시작을 노래할 수 있었던 이들의 간절함이 우리를 들끓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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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토마토, 기막힌 가지
박찬일 지음 / 창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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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토마토, 기막힌 가지/ 박찬일 에세이/ 창비




박찬일 셰프가 전하는 입맛 도는 인생 이야기 [망할 토마토, 기막힌 가지]이다. ‘에세이가 묵은지’라는 나민애 교수의 표현처럼 에세이는 깊은 맛을 지닌 장르이다. 현실에 기반을 둔, 경험하고 체화되어 재생산되는 문장들이라 더 친숙한 호흡으로 흡수할 수 있다. 작가의 기억과 감정에 독자의 시간이 더해져 특별한 공감대가 형성된다.








이탈리아에서 요리를 배운 박찬일 셰프는 갖가지 식재료들로 물리적•시간적 한계에 구애받지 않고 풍성한 이야기를 맛깔나게 요리하여 우리에게 선사한다. 유래와 요리법, 그에 얽힌 추억 한 스푼이 더해진 요리는 감히 값을 매길 수 없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식사 한 끼 나누는 게 쉽지 않을 만큼 바쁘게 흘러가는 오늘날, 엄마의 손맛. 집밥 등 눈가를 촉촉하게 만드는 아련한 기억부터 왁자지껄 어울려 나누던 흥겨운 기억까지 재생시켜주었다. 그의 추억 한 그릇이 나의 그리움 한 그릇이 되고, 익숙한 식재료가 색다르게 변신하기도 한다. 세계 각국의 재료들이 생생하게 눈앞에서 펼쳐진다.



이 책을 비롯하여 권여선 작가의 <술꾼들의 모국어>, 스탠리 투치의 <음식으로 본 나의 삶>, 공저집 <요즘 사는 맛> 등등 읽으면서 새삼 음식과 삶의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느꼈다.




You are what you eat.

먹는 건 사람의 기억을 구성한다.

나아가 그 사람의 인생도 만들어 간다.

부디 홍어 한 점으로

우리가 더 너그러운 사람이 되기를.




비슷한 속담이나 격언이 나라마다 존재한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당연한 것 같다. 음식을 먹는다. 음식과 먹는 행위가 인간의 삶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생각해 본다. 그렇기에 박찬일 셰프도 이런 글을 남겼으리라.







그가 소개하는 식재료와 우리네 역사, 지역 이야기는 지나간 시간들을 톱아보는 추억여행 같다. 그리고 세계 여행이기도 하다. 음식으로 풀어가는 이야기는 어느새 살아가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가 꿈꾸고 열망하던 분홍 소세지는 ‘결핍’으로 이미지 되어 뭔가 모자란 음식을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 때로는 조금 모자라도 괜찮다는 그의 말에 지나간 시절에 대한 감정이 진하게 묻어있다.

맛있는 집은 역시 기운으로 나그네에게 말해 준다.

별게 아닌데도 손님만 많은 집에서는

결코 감지하기 어려운, 진짜 맛있는 집에서만

만날 수 있는 부엌 신의 기운이 느껴진다.

손님들의 행복한 표정,

무뚝뚝하지만 정확한 손놀림으로 일하는 이들의 얼굴,

그리고 바닥부터 천장까지 가득 찬 절제된 식욕의 뼈대들.

그런 집에 들어설 때는 모자를 벗어야 할 것 같은

경외감이 들곤 한다.



가족의 유의어인 식구는 한집에 살면서 끼니를 같이 먹는 사람을 뜻한다. 그만큼 같이 먹는다는 것은 관계의 친밀도를 높여주는 행위다. 예전에는 놀다가도 우리 집 친구 집 가리지 않고 찾아가 시원한 보리차, 시원한 미숫가루 한 사발을 벌컥벌컥 마시곤 했다. 특별한 반찬이 없어도 함께 준비하여 옆집, 아랫집, 윗집 한 집에 모여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하곤 했다. 이제는 미리 약속하고 정해진 시간에 찾아가는 것이 도리가 되었다. 예의 바르지만 왠지 거리감이 느껴진다. 각자의 공간을 지키면서도 정을 나눌 수 있는 오늘날의 방법은 무얼까? 고민이 든다. 박찬일 셰프가 알려준 맛의 세계를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나누는 즐거움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걸리고, 출출해진다. 한껏 허전해진 몸과 마음을 채워줄 맛난 음식을 생각해 보련다. 사진첩을 넘기듯 추억 속 음식을 하나하나 떠오른다. 역시 음식은 추억이다, 다양한 색채와 식감과 맛으로 이루어진 공감각이라 아로새겨진, 잊지 못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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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독은 축복이 될 수 있을까 - 1인분의 육아와 살림 노동 사이 여전히 나인 것들
김수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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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독은 축복이 될 수 있을까/ 김수민 지음/ 한겨레출판




이제 더 이상 결혼과 출산이 인생 카테고리의 디폴트 값이 아닌 시대가 도래했다. 저출산, 초고령화가 대한민국의 오늘이 된 지금, ’육아와 커리어‘를 저울에 양쪽에 각각 올려두고 고민하는 이를 만났다. 전작 <도망치는 게 뭐 어때서>로 성공을 향해 무한질주하는 사회에 씩씩한 실패라는 당당한 선언을 했던 ‘김수민’ 작가의 신작 [이 고독은 축복이 될 수 있을까]이다.



불완전한 것들을 안고 살기 위해서

사랑이 있는가 보다.



전작이 ‘자유’를 주제로 ‘퇴사’를 골자로 풀어나갔다면, 이번 이야기는 ’나‘를 주제로 ’육아‘와 ‘커리어’를 소재로 하고 있다. 결혼 그리고 두 번의 출산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뒤흔들었는지 가감 없이 털어놓는 ‘그’ 뒤로 나를 비롯한 지인들이 스쳐 지나갔다. 20여 년의 간극이 있는데도 여전히 여성은 육아와 커리어의 두 갈림길 앞에서 헤맬 수밖에 없는 현실은 화나고 슬펐다. 그렇지만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는 이들은 넘어져도, 쓰러져도, 냉소를 받아도 다시 일어서 앞을 바라본다. 그 꺾이지 않는 의지와 열정이 때로는 현실을 더욱더 힘들게 비출지라도, 우울하고 낙담할지라도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어주고 삶의 아름다움을, 본인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고야 만다.








고착화된 성역할에서 벗어나 ‘핵개인’으로서 임신, 출산, 육아와 관계를 맺어가며 새로운 기준을 찾아가고 있는 세대의 분투기는 고무적이다. 남녀의 구분이 아닌 동반자로서 ‘같이’ 결혼 생활과 육아를 바라보는 부부의 성숙한 책임감은 반짝거렸다. 괜스레 눈물이 났다. 마음을 이해받지 못해서 힘들어하던 긴 어둠 끝에 스며든 빛줄기, 기쁨이기에 찬란하게 다가왔다.




"지독한 불협화음, 기분 나쁘게 쫓기는 박자,

나른한 듯한 몽롱함, 지울 수 없는 쓸쓸함.

그런데 아름답구나."




갑자기 주어진 ‘엄마’라는 역할과 육아에 대한 소회, 사랑으로 선택한 타자인 배우자와 나였다가 타자가 된 자식이 모여 가족이 되어가는 진짜 의미, 최선의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중인 후회할 수 없는 삶 등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김수민 작가의 시간은 찬란하고 아름답다.





‘모두의 삶은 같은 무게로 소중하다.‘ 엄마는 안되고 자신은 된다고 여긴 수많은 것들이 떠올라 한참을 울었다는 김 작가의 말은 많은 생각과 감정들을 들끓게 했다. 나 또한 김 작가이기도 하고 김 작가의 엄마이기도 하다. 나는 나인데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한다. 다 한 번뿐인 오늘을 살고 있다. ‘혼자’라 이해받지 못하는 이 고독을 짊어지고 소중한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자신의 꽃을 피우고 있다. 고독이 자양분이 되어 충만한 삶이 여물어간다. ‘나’로 존재하기 위해 치열하게 배우고 묻고 도전하는 ‘너’가 있어 수많은 ‘나’가 눈을 뜰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출발로 마무리되는 이 글은 작가와 비슷한 고민으로 잠 못 이루고 눈물을 흘리는 이들에게 좋은 자극이 되어줄 것이다. ‘완전히 혼자인 시간을 건너온 혹은 건너는‘ 이들에게 다정하고 따뜻한 구원의 목소리가 되어주리라.



"사막을 벗어나자. 목적어를 떨쳐 내자.

나의 세계를 획득해 보자.

나의 의지대로 스스로 굴러 가보자.

나, 그저 아이라는 순수한 광기를 가져 보자.

삶이라는 놀이가 나를 얼마나 기쁘게 할 수 있는지,

이 생의 축복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싶었다."




한겨레 하니포터10기 자격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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