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들을 통과하는 여름이 있다
조성희 지음 / 꿈공장 플러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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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도 작가 소개도 내 이름이 적힌 다정한 글에서도 감성이 쏟아졌다. 다정함으로, 잘 있어라고 대답까지 하고 싶어질 정도로. 목차를 따라가다, 여름에서 겨울로 지나는 사이에 있는 그의 계절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 중에 '숨기 좋은 곳'이 궁금했다.




요즘은 씹는다기 보다 마시는 쪽에 가까운 죽처럼, 시도 술술 읽히는 에세이나 소설처럼 읽고 있는 나를 종종 발견한다. 예전에는 시를 잘 씹지 않으면 넘기기 어려워 의무감으로 꼭꼭 씹게 되는 현미밥처럼 그렇게 꼭꼭 씹으며 중얼거리고 되뇌고 고개도 젖히고 느릿하게 읽었었는데. 다 옛말처럼 그렇게 오래전 일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시인은 현미밥처럼 만들어, 그가 예상한 게 빗나가서 다행인 그의 시가 이상하게 좋으면 어쩌지, 라는 예상을 하게 되는 마음이 들었다.


​초록 눈물은 왜 초록일까, 생각한다. 그리고 누구의 눈물이 건데 밥에 매달려야 가라 앉을 만큼 무거웠을까, 염려하는 마음도 된다.


20쪽, 초록 눈물을 삼키는 방법


갈비뼈는 존재하는 것에 거의 가까워질 수 있는 슬픔을 담,아서 연인에게 가까이 갈 수록 아프고 상처로 얼룩질까, 하는 발칙한 상상이 들어 웃었다. 그러고 있으니 아내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갈빗대가 가렵다.


위로


네가 한번 해볼래

얼마나 어려운지


달콤한 사탕을 꺼내 보여도 소용없어

혀끝으로 느껴지는 맛은 깊이가 없으니


차라리 그 혀를 먹어버리는 게 낫다니까


하루에도 백만스물한번씩 사람들 사이를 오가는 위로를 어쩜 이리 잘 표현했을까. 매번 매사 영혼 없이 떠도는 고작의 위로만 주고받는 누군가는 부끄러워 질만 하다. 사실 누구랄 것도 없지 않을까? 다 그러고 사는 거지.


시집은 뭔가 사라지는 것들이 있는데 막 슬프진 않고, 그렇게 사라지는 것들 뒤에 뭔가 딸려 오는 게 있어선 가? 여하튼 심장 모니터에 그어진 직선처럼 감정은 리듬은 잃었지만, 다정한 시어들은 요동치지 않고 담담하게 그렇게 스민다.




"버스는 바다를 지나고 언덕을 넘어 겨울과 봄을 통과해 옵니다." 105쪽, 경유하다


도대체 그 버스는 어디를 경유해서 언제쯤 내게 올까요. 기다리는 게 참 많이 고된 일이군요. 버스에 희망은 탔을까요? 어디를 경유하고 있을까요. 그냥 꿈만 꾸긴 싫어서 기다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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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사랑 아니면 사람 - 사랑을 말할 때 하고 싶은 이야기
추세경 지음 / 미다스북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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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렇게 짜릿한 제목이라니. 어차피 인생은 도 아니면 모, 그렇게 사람과 사랑의 차이는 어쩌면 한 끗 일지도. 제목부터 아주 흥미진진 하다.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위대한가, 갸우뚱한데 작가가 그렇다니 그런 거겠지 했다, 가 그래도 나는 아닌 거 같다고 결론을 내린다. 출근하면서 퇴근을 염원하는 직장인이 위대하면 그것도 곤란하겠다, 싶어서.


신소리는 그만 두고. 출퇴근 하면서 글을 쓴다는, 이기적인 글쓰기로 창의성을 발휘하는 작가라는 소개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저 홀로 피어난 꽃처럼 나답게, 그렇게>라는 무척 긴 제목의 책을 썼다. 그리고 지금은 소설을 쓰는 중일 지도 모른다. 아, 남자다.


뭐랄까, 조금 독특한 사람이랄까? 스스로를 궁서체(진지한 생각만 하는)라고 말하는 사람은 살면서 별로 못 봤는데, 작가가 그렇다니 그런 거겠지. "살아가는 글이 살아 있는 글이 되기 바란다"라는 그의 글쓰기가 얼마간 편안해진다. ​


58쪽, 여름의 이름으로


읽다가 고통은 개별적이라는 그의 글에서 순간적으로 끌려와 재생되는 장면이 있다. 추억이라 하기엔 아프다 깨달음이 있던 순간이었다. 친구가 운영하던 가게를 고민 끝에 폐업을 결정했을 때 위로차 친구 몇이 모였다.


학교와 맞닿아 있긴 했으나 정문이 아닌 후문, 그것도 굳게 잠겼던. 그곳에서 아이스크림을 팔았다. 굳이 담장을 넘어서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맛을 팔지 못하던 가게를 1년을 버티다 문을 닫았다.


위로차 모였으니 술잔을 기울이다 서로 "나도 힘들다"라는 하소연이 눈치도 없이 여기저기 터져 나왔다. 듣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너희들이 나만큼 힘드냐"라고 스스로 불편한 몸을 무기 삼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친구 하나가 "너 힘든 건 잘 안다. 하지만 네가 제일 힘들 거라고 말하진 마라. 콩알만 해도 각자 자기가 짊어진 문제가 제일 힘든 법이다."라고 쓴소리를 했다.


그 소리에 처음에는 섭섭했다. '펄펄 날던 친구가 휠체어 의지해 사는데도 어떻게 저런 소리를 하지?' 해서다. 그렇게 마상을 심하게 입은 채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친구 말이 옳았다. 손톱 밑에 가시도 내 손톱 밑이라면 겁나 아프다는 걸 새삼 깨닫던 시간이었다. 그 친구는 여전한 몇 안 되는 절친이다.


또, 이미 성공의 서사로 유명한 사람들을 거론하는 한편, 그만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는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이 아닌 아직 성공하기 전의 사람들의 성공 이야기 같아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의 성공도 바라고 내 성공도 바라게 된다.


153쪽, 이어져서 산다는 것은

163쪽, 스쳐가는 월급 속에 한 번뿐인 인연이라도


그가 만났다는, 가난이 부끄럽지 않다는 그를 만난 여행에서 그가 느꼈던 감정들을 나도 모르게 따라 간다. 나는 가난을 이해? 공감? 하고 있을까.


어릴 때는 엄마에게 자주 듣던 말이 '집에 돈이 말랐다'거나 '돈 한 푼 없다'라는 거였다. 월사금이 밀려 담임에게 얻어터지고 맨 뒷자리로 쫓겨 날 때, 나는 가난 했을까?


그러지 않았던 거 같다. 그때 반 아이들 반 이상은 월사금이나 육성회비 때문에 얻어 터지고 맨 뒷자리로 쫒겨 났으니까. 그렇게 쫓겨난 아이들 때문에 되레 나는 또 앞자리로 밀려 들었으니까. 그런 친구들과 가난으로 주눅 들고 아파하지 않았다. 키득거리고 놀기 바빴으니까. 그저 생각이 없었을지도.


사실 그때의 가난은 도시락 반찬으로 프랑크 소시지를 싸와 뚜껑을 반쯤 덮은 채로, 전쟁터에서 적군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프랑크 소시지를 엄호하면서 날쌔게 하나씩 집어 먹던 부잣집 도련님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가난은 마음에서부터 오는 건지도 모른다.


책은 묵직해서 머리를 누를 만큼 생각거리가 많기보단 소프트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고 편안하게 읽힌다. 복잡다단한 인간 관계에 자신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덧입혔다. 한참 생각하고 심각하게 고민스럽게 만들지 않고 독자도 일상에서 경험하는 일처럼 아주 친근한 이야기다.


질퍽한 사랑이나 난삽하지 않은 익숙한 글감으로 써낸 그의 이야기는 그냥 술술 읽어도 좋은,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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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데서 시간이 더 천천히 몰개시선 4
황화섭 지음 / 몰개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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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고 집에 들어 서는데 예천에 아는 치과 있어? 라는 아내의 물음이 먼저 반겼다. 아니. 무심결에 대답하고 들어섰다. 탈의하고 식탁에 앉으니 서울대 마크가 선명한 모 치과에서 보낸 황색 우편물이 눈에 띈다. 뭐지? 궁금증에 우편물을 뜯는 순간, 아! 시집이네? 했다. 생각과 다른 책이라니.


제목을 보고 서평단에 신청했었다. 왠지 소외계층의 삶이 두툼하게 담겼겠다, 싶어 요즘의 내 관심사와 맞아떨어진다 했다. 그런데 시집이 왔다. 시집이라 그런가? 시집인 걸 모르고 받은 후 시집인 걸 알았을 때의 제목은 아주 많이 시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붓으로 그리고, 펜으로 쓰고 가끔 마시는 걸 좋아한다는 치과의사이자 시인은 요즘 판각을 배우고 있고, 하모니카 불기가 취미라고 한다. 근데 이렇게 바쁘신 와중에 치료 하실 시간이 있긴 하나, 싶다.


추천의 글을 쓴 시인 안도현은 <꽃 심기>가 가장 좋다 하였으나 나는 어매가 등장하는 이 모든 시가, 살아 있는 내 어미를 가깝게 끌어 당기는 통에 눈물 범벅이 돼서 좋아라 할 수 밖에 없었다.


제목의 의미를 알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사회의 그늘 어딘가로 내몰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줄 알았던 이야기가 밤하늘을 비추다 황홀하게 떨어지는 별똥별의 이야기라니. 그것도 떨어지는 이유가 낮은 데서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때문이라니 별똥별도 이유도 시적이다.


"(상략) 방학 아르바이트가 끝난 후에도 나는 가끔씩 네가 근무하는 은행을 찾아갔어. 그때 네가 사 주었던 만나던 음식들 지금도 기억해. 너의 눈빛은 별빛처럼 맑았고, 너의 목소리는 개울물 소리처럼 내 귀에 스며들었지. 한번은 증권사 직원하고 상담을 하는데, 세상에나 너하고 목소리와 말투가 똑같은 거야. 그래서 이름하고 나이를 물어봤는데, 그 사람은 네가 아니었어. 그래도 너를 만난 것처럼 좋았어. 지금 여기는 봄비가 내려. 봄비가 나뭇잎을 톡톡 건드리네, 발그스레하게." 67쪽, 정희에게




읽는 동안 얼마나 이 시가 로맨틱하게 다가왔는지 모른다. 누군가를 연모하는, 어쩌면 사랑일지 모르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느낌. 타인과의 통화에서 누군가 그려지고, 이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실망이 아니라 그리움에 잠겨 좋을 수가 있을까. 종일 달뜨게 만드는 시다.


별똥별이 되고 싶다던, 되겠다던 시인은 왜 몇 발자국, 몇 발자국을 옆으로 가야 했을까, 별빛만큼이나 많이 궁금했지만, 이 시집은 시인 이동순의 해설처럼 난삽하고 시적 상징 혹은 복선을 찾아 헤매야 하지 않아 좋다. 산문처럼 평이하게 술술 읽혀서 좋다. 오랜만에 가슴이 몽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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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발견 - 기획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 그곳에 아직 발견하지 못한 기회가 숨어 있다
임영균 지음 / 휴먼큐브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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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기획자였던가? 그의 책 <너는 참, 같은 말을 해도>라는 책은 분명 화술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책을 읽으며 매번 다언삭궁 하자, 후회를 반복하는 나로서는 많이 반성 했던 기억이 있다. 한데 이번 책은 기획자의 시선이라니 내용이 궁금했다.


그는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쭉 기획 일을 하고 있고 현재는 갓기획의 대표다. 국내 유수의 기업과 관공서에서 기획에 관한 컨설팅 강의를 활발하게 하고 있으며, 한편으로 관련한 책도 다수 썼다.


이 책은 기획자로 그가 현장에서 일하며 삼켜야 했던 눈물의 양만큼 눈이 번쩍 뜨일만한 신박한 사례를 담고 있다. 이 책으로 사례와 같은 기획을 얻을 순 없지만 기획력은 좀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바람도 같이 담았다고 한다. 세상에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기회를 발견할 수 있는 게 무궁무진하다는 데 나도 그런 눈을 키워 보고 싶다.


새로운 거, 신박한 거를 찾으라는 말에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놔도 자기가 해봤는데 안 된다느니, 예산을 사용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느니 안 될 이유만 찾는 상사 때문에 빡쳐서 이제 아예 입을 닫아 버렸는데, 도로에 칠해진 방향 표시 선의 히스토리는 그때의 일이 생각났다. 그리고 우주 최강의 길치 중에 한 명으로 여태 감사하게 이용하고 있는 데 초록은 왼쪽, 핑크는 오른쪽 방향 표시였다는 걸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몰랐다.


150쪽, 도로 위에 색이 칠해지면 길치도 눈을 뜬다


기획자의 눈에는 어떨지 몰라도 내 입장에서는 놀랍디 놀라운 세상에 없던 신박한 발견들에 입이 떡 벌어진다. 특히 엘리베이터에 팻버튼을 만든 사례가 그랬다. 예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똬리를 튼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거대한 진돗개를 맞닥 뜨렸다. 입마개도 하지 않았다. 개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지만 선뜻 타기 어려웠다. 당황스러워하자 노부부는 그랬다. "괜찮아요. 우리 애는 안 물어요." 아주 인지한 미소를 짓고 말이다.


근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진돗개는 단지 산책로에서 주민을 물었다. '물지 않는 애'가 예기치 않게 물어 버려서 노부부는 이사를 가야 했다. 이런 사고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이때, 팻버튼은 기막힌 아이디어 아닌가 싶다. 공동주택에는 다 도입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기획은 단순히 선한 의도만 가지고 완성되지 않는다. 철저하게 비즈니스 성과에 기여해야 한다."140쪽, 어린이의,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에 의한 기획


세상을 보던 방식의 시선으로는 새로운 발견이 나올 수 없다는 생각에 완전히 공감하면서 읽었다. 새로움을 발견하는 방법에 역발상 뿐만아니라 경쟁의 의미와 범주를 재해석해 보라고 조언한다. 그러면 그 안에서 새로운 문제가 보이고, 가능성이 있고, 기회가 있다고 한다. 앞서 제시한 5WHy와 더불어 복지 현장에서 접목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홀로데이!는 우리 기관에 도입이 절실한 기획이다.


279쪽, 기획력은 책상머리가 아니라 밥상머리에서 키워진다


이 책은 단순히 뛰어난 기획자의 성공 사례를 풀어 놓은 정도로 치부하기엔 아쉽다. 사례를 참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기획자의 생각을 훔쳐 볼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모든 설명과 조언이 간단 명료해서 이해도 쉽다.


일상의 문제에 시선이 닿을 때, 기획은 시작된다! 오늘부터 눈알 좀 굴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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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제법 쓸 만한 사람 - 무엇을 하든 그 이상을 하는 작가 생활의 모든 것
김민섭 지음 / 북바이북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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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는 모르겠고 쓰는 건 좋아하는지라 쓸만한 것을 찾을만한 선구안이라도 배울까 싶어 덜컥 집어 들었다. 그러다 작가 소갤 읽다는데 눈에 읽은 제목이 있다. 아, <고백, 손짓, 연결>을 읽고 그의 세심한 감성에 한껏 취했던 시간을 기억해 냈다.


책을 쓰고, 만들고, 파는 1인 출판사이자 서점 <당신의 강릉>을 운영하는 작가 김민섭의 책이다. 보잘것없거나 무용해 보이는 대상에도 이야기가 함께 하면 가치 있는 일이 된다는 그의 쓸 만한 삶과 태도가 담겨있다. 그러면서 그의 전작들을 회자하며 작가로 살기까지의 우여곡절에 그간 해왔던 마음 부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덧붙여보자면 평가하는 자와 평가 받는 자, 작가와 쓰는 이의 경계를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그리고 읽다 보면 그의 경험이 나의 경험으로 연결되는 지점이 곳곳에서 등장하는데, 모뎀의 경쾌한 리듬에 들뜨던 고등학생이던 시절과, 그의 망원동이 나의 성내동으로 공간이 확장되는 통에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는 경험을 하게 한다. 그렇게 이 책은 그런 그가 자신의 경험을 글 쓰는 방법과 기획과 제작, 삶의 태도 변화와 글을 발견 하는 방법에 대해 소나기 퍼붓듯 격하게 쏟아 붓는다.


덧붙여 보자면, 그의 천리안 판타지 소설 게시판은 나의 나우누리 문학 게시판과 연결 됐다. 그가 판타지 소설을 꾸며 낼 때, 나는 <영혼 울림>이란 필명으로 시를 엮어 내고 있었다. 그런 내 글을 우연히 가입한 동호회의 한 누나가 사비를 털어 묶음집으로 만들어 주었었다, 팬이라면서. 그렇게 14.4bps 모뎀은 열일 하고 있었다.



여기 없으면 책이 아니라는 아버지에게 보란 듯 거기(교보문고)에 떡 하니 자리 잡은 책을 보여 드리는 기분은 어땠을까. 그것도 열여덟에. 그런 그의 첫 책이 아주 궁금하지만 열여덟의 서투르고 내밀한 이야기였겠거니 싶어 궁금함으로 남겨 두기로 했다. 뭐 어차피 구할 수도 없다니 이 나이에 진빼기도 그렇고.


계속 '쓰는' 일을 강조하는 그와는 달리 쓰는 것이 지속 가능하려면 계속 쓸 게 있어야 하는데 그 쓸게 어디서 불쑥 튀어 나와주는 게 아니라서 계속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는 1인으로 조금 답답하다. 얼마 전 문화센터 글쓰기 선생을 글쓰기 플랫폼에서 첫 구독자로 등록했다. 그가 쓰면 알림이 오는데 매일 두세 편의 알림을 받는다. 얼마나 대단한지 모른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른다면 스스로를 기반으로 한 글쓰기가 나오기 어렵다. 충분한 물음표를 던지고 답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독자를 편안하게 할 언어가 발명된다. 모든 글을 쉽게 쓸 필요는 없다. 그러나 쉽게 쓸 수 없는 글이라면 그 대상을 공부하고, 이해하고, 더욱 사랑할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 77쪽, 모든 글을 쉽게 쓸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덧붙여 자신에게 맞는 책은 어떻게 읽는 것인지, 어떤 걸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생각에 공감하게 됐다.


100쪽, 모든 글에는 이름표가 있다


"우리가 아는 훌륭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물음표를 만들어 내고 거기에 답하며 성장해 나가는 듯하다." 103쪽, 글쓰기의 시작은 가장 가까운 데서부터


저렇게 정곡을 찌르는 문장 뒤에, 그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때가 온다고 말한다. 한데 그게 정작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거나 부당한 일을 당하거나 했을 때라는 말이 내 종곡을 찔러서 울컥했다. 지금 내가 그래서. 나를 들여다보지 않음으로 타인에게 시선을 떠넘기는, 그래서 뭘 해도 흔들리는 일들의 반복이 있다. 그래서 진지하게 성찰하고 사유하고 물어야 하는데 내가 왜 이런 처지가 되었는지를 묻지 않고 한탄만 하고 있다. 그의 분투가 그냥 스쳐 넘기기 힘듦이 있는 이유다. 나도 모르게 그에 스몄다. 그의 삶을 존중하게 된다.


107쪽, 글쓰기의 시작은 가장 가까운 데서부터​



작가가 쓰는대서 멈추는 게 아니고 잘 팔기도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저 돈이나 인지도만 '노리는' 게 아닌, 독자가 자신의 이야기에 좀 더 좋은 표정으로 그리고 의미 있는 시간을 함께 하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는 그의 이야기는 충분히 진심으로 와닿는다.


한편, 노동을 통한 성찰을 글로 써내는 과정은 너무도 묵직하게 다가 온다. 나는 요즘 글 쓰는 것에 얼마간 자신감이 붙어 우쭐대고 있었다. 유명 사회복지기관에서 주최한 에세이 공모에서 대상을 받았다. 심지어 보건복지부 장관상이어서 여차하면 글 쓰는 일'만' 하고 싶다는 생각을 더 자주 했는데, 글 쓴다는 것을 감히 쉽게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일이라 깨닫게 됐다.


164쪽, 기획으로서의 글쓰기


"한 권의 책을 쓴다는 건 그 시절에만 쓸 수 있는 자신의 세계와 만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찾아내고 나면 글쓰기는 노동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을 고백하고 기록하는 일이 된다." 175쪽, 한 공간과 한 시절의 글


울컥하게 만든 그의 망원동 '안경점'은 나의 성내동에는 없었지만 도시가 고향이라는 공간으로 연결 되었다. 내 유년의 거의 모든 시간이 머물러 있는 곳이 성내동이다. 성내 국민학교와 해바라기 아파트 26동 402호, 내가 다닌 초등학교와 집이었다. 스무 살, 대학 입학과 함께 떠났지만 그 속에서 5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하고 있는 깨복쟁이 불알친구들과 더 단단한 이유가 되는 그런 공간이 여전히 숨 쉬고 있다. 1호, 2호, 3호를 외쳐주며 삼 형제 일요일 간식을 책임 지던 거북당 빵집 아저씨의 부러운 미소가 기억난다. 아저씨는 자식이 없었다.


"개인은 이해의 대상이지 변화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과, 사회는 변화의 대상이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185쪽, 글쓰기의 대상은 나-사회, 시대, 그리고 당신


그가 관계의 연결과 확장을 경험하면서 새로이 규정하게 됐다는 이야기에서 스스로 정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일수록 타인을 변화시키려 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관계 단절과 혐오의 순으로 나아간다고 지적하는 대목에 내 모습이 선명해졌다.


관계를 정의와 어떻게 연결 지어야 할지는 솔직히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와 생각이 다르고, 잇속에 따라 관계를 맺는 사람을 보면(가만 생각해 보면 이것도 순전히 나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손절이란 쉬운 선택을 한다. 심지어 전면에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도 없고, 내가 타인의 감정까지 떠안을 필요는 없다는 심리학자들이 조언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한데 그의 나, 우리, 사회로 확장되는 관계의 힘에 흔들렸다.


주제, 소제, 단문, 글감 등 글쓰기 교안 같은 책을 기대했다면 오마이갓을 외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섣불리 덮지는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책들보다 훠월씬 더 많은 것들을, 예컨대 글을 쓰거나 지어내는 감각 같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랬다.


글을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써야 하는지에 대한, 책을 쓴다는 게 좋은 문장만을 쓰는 일이 아니라는 걸, 필요한 것은 결국 스스로 단단하게 잘 살아가는 일이라는 ​그의 철학을 나누는 책이다. 다정하고 다감한 그를 만나게 되어 얼마간은 뿌듯하다. 문득 강릉에 가고 싶다.


마지막으로, 책뿐만 아니라 블로그든 다른 SNS 플랫폼이든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아무나 쓰면 안 되는 일이 글쓰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마음이 얼마간 쪼그라 들었다. 그리고 작가가 이 글을 본다면 무척 서운할 수도 있겠지만 책장을 아쉬운 마음으로 덮은 지금,(오해는 마시라 더 읽고 싶어 서니) 떠오르는 한 가지는 '작가들의 작가라 할만 하다'는 김혼비 작가의 글이 읽고 싶어졌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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