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어딘(김현아)의 <활활발발>을 읽다가 알게 된 고정희 시인.

여성해방을 노래한 페미니스트로 <여성신문> 주간 등 여성문제를 최초로 폭넓게 탐구한 여성주의 시인이자 민중시인이며 서정시인이라고 한다.


구매를 벼르다 드디어 위트앤시니컬에서 구매했다.


시집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아벨'로 표상되는 떠나간 자들(민중, 동지, 아우 등)에 대한 속죄의 마음, 부끄러움, 그리움, 슬픔의 시들이다.


첫 마주침이 중요한 건가. 사람의 마음이 비슷한 건가. 시집을 구매하기 전에 블로그 등에서 본 시 중에서 가장 마음에 닿던 시가 한 권의 시집을 다 읽고 나서도 가장 좋았다.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서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을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판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서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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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딘 버크 해리스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

임레 케르테스 『운명」

자기계발서는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땅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서 성취할 것을 주문한 - P74

다. 이곳은 변하지 않는 너의 세계라고 확신시킨다. 바로이곳에서 살아남아 적응할 것.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해서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를 것. 땅을 바꿀생각을 하기 전에 나무를 크게 키워낼 것. 그러나 그러한요구는 때로 다음과 같은 말들로 들리기도 한다. 노래하지말것. 부정하지말것.속삭이지 말것. 땅에 붙은 것들을 무시하고, 뛸 수 있을 때 걷지 말 것. - P75

네이딘 버크 해리스의 책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는 아동기에 겪은 불행과 성인기 건강 사이의관계에 대한 책이다. 여기서 말하는 불행은 단순히 ‘나쁜 일‘이 아니라 아동에게 벌어질 수 있는 치명적인 사건들을 말한다. ‘ACE‘, 그러니까 ‘Adverse Childhood Experiences‘는 직역하면 ‘아동의 역경 경험‘ 정도 된다. 아동기에 겪은 ‘유독성 스트레스‘, 즉 회복 가능한 수준의스트레스가 아닌 신체적 반응을 반복적으로 마비시키는강력한 스트레스 경험을 말한다. - P89

서른 살에 쓴 「고백」이라는 글에 나는 이렇게 썼다. "이제는 삶을 끌어안고 분투하느라 보낸 이십 대를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나보내려 합니다. 이십 대가 자신의 소임을 다 한 덕에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어린 시절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사라지지 않을 테지요. 침대맡에도 주머니 속에도 달라붙어 있겠지요. 끈질기게 저를 괴롭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삶이란 없고 언제나 예전의 삶을 계속 이어갈 뿐

* 임레 케르테스, 박종대, 모명숙 옮김, 『운명」, 다른우리, 2002. - P92

이므로, ‘무엇이든 무마할 시간이 있다는 건 큰 위로가 됩니다. 계속 무마해보겠습니다." 무마의 약속은 곧 도전의약속이다.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는 사람, 실패하는 사람에게만 무마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패와 무마의순환 속에서 항해는 이어진다. - P93

북디자이너이자 타이포그래피 전문가인 유지원 작가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김상욱 교수와 함께 쓴 책인 뉴턴의 아틀리에」를 직접 디자인하면서 어떤 점들을 고민했는지 이야기했다. 물리학자와 함께 내는 책이므로 물성이 고려된 디자인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원칙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책은 거짓말을 하는 물건이 되니까요." 정신과 몸이,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기를 바라는 마음. - P186

정말로 나도, 기적처럼 이 모든 것을 바꿔줄 기술이 마법처럼 나타났으면 좋겠다. 나도 스마트폰을, 커피를, 딸기를, 사람들과 함께하는 낭만적인 저녁 식사를, 국가 간의 안전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마음껏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다니고 싶고(밝히건대 나는 자연파와 도시파 중 철저한 도시파 여행자다), 이런 험악한 글 대신 우아한 글을 쓰고 싶다. 소비로 인한 자기비난도 그만하고 싶다. 하지만늘 기적은 멀고 현실은 가깝다. 오늘 쓴 텀블러를 세척하 - P242

고 재활용품을 분류하면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한숨을 쉴지언정 그런 의식이 큰 문제에 있어 내가 더 나은 선택을 하게끔 도와주는 작은 계기임을 상기한다. 계속해서생각하지 않으면 생각하지 않기는 너무나 쉽기 때문이다. 질문이 자라나는 곳에서 시간이 멈추듯, 질문이 멈춘 곳에서 관성이 자라난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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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누델만 <철학자의 거짓말>

3년 전, 프랑수아 누델만의 책 『철학자의 거짓말』추천사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모두 거짓말을 한다. 글을 쓰면서는 더 많은 거짓말을 한다. 글로 구현된 ‘나‘는 이미 내가 아니라 나로부터 기원한, 나보다 조금 더 낫기를 바라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거짓말들을 우리의 상으로 삼는다. 어쩌면 우리는, 이 철학자들처럼, 모두 거짓말을 향해 나아가는 진실한 인간들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내가 상으로 삼은 나의 어떤 측면이다. 전부가 나는 아니지만, 그 어느 곳을 떼어놓더라도 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디 내가 부족한 만큼은 책이 부족하지 않기를 공들여 비는 수밖에 없다. - P9

사람들이 서로를 움켜쥐는 것이 좋았고, 따뜻한 실내에 들어온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이 좋았고, 연말의 흥성한 분위기가 좋았고, 크리스마스의 예쁜 장식이 좋았고, 눈을 밟는 소리가 좋았고, 모두들 할 일을 내년으로 미루며 반쯤은 너그러운 마음이 되는 것이, 그렇게 맞이한 새해도 그다지 부지런하지는 못한 것이 좋았다. 그 따뜻한 분위기가 내 것이 아니더라도 좋았다. 겨울에 가장 외로워하면서도 가장 사람들 속에서 산다고 느꼈다. 앙상한나무에조차 짚으로 된 옷을 둘러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린 발을 녹여가며 겨우 잠이 들 때엔 누군가가 나에게 위로를 둘러주는 것 같았다. 나는 종종 그가 겨울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 P16

그러고 나면 깨닫게 된다. 악몽에게 자기 자리를 찾아주어야만 삶은 망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 P29

이것은 배를 곯을지도 모른다는 정도의 완전한 불안이 아니기에 어느정도 기만적이지만,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아무런 걱정없이 편안하게 선택할 만한 정도의것도 아니다. 진은영의 시 「대학 시절」을 닳도록 읽으며지긋지긋한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가 그리 멀리 있지는 않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불안은 익숙한 나의 집, 불안을 이겨내지 못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 P37

이것은 나쁘기만 한 변화였을까. 수전 손택의 그 유명한 말대로 사진을 찍는shoot 일은 총을 쏘는shoot 일과 같고, "누군가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범한다는 것이다. 사진은 피사체가 된 그 사람이 자신에게서 전혀본 적이 없는 모습을 보며, 자신에 대해 절대 가질 수 없는 - P56

생각을 갖기 때문이다. 즉 사진은 피사체가 된 사람을 상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사물로 만들어버린다. 카메라가총의 승화이듯이, 누군가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살인의승화이다. 그것도 슬프고 두려운 이 세상에 어울리는 부드러운 살인. 어떤 의미에서 나는 타인의 삶을 내 마음대로 사각형의 모습으로 재단하는 일을 멈춘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내 삶에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세상을 나의 시선으로 담아두고 싶다는큰 욕망보다 내 삶만을 복기하겠다는 소박한 욕망이 차라리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뒷모습을 바라보며 상상한 타인의 삶은 어디까지나 나의 소망이 반영된 것은 아니었던가?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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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말해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의 칠층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로자 아줌마는 육중한 몸뚱이를오로지 두 다리로 지탱하여 매일 칠층까지 오르내려야 했다. 그녀는 유태인이라서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불평할 처지가 못 되지만, 그래도 칠층을 오르내리는 일만은 정말 힘에 부친다고 하소연하곤 했다. 그녀는 다른 일들로 심신이 괴로운데다가 건강도별로 좋지 않았다. 또하나 미리 말해두고 싶은 것은, 그녀가 엘리베이터 하나쯤은 갖추어진 아파트에서 살 만한 자격이 있는 여자라는 점이다. - P9

"하밀 할아버지, 왜 대답을 안 해주세요?"
"넌 아직 어려. 어릴 때는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게 더 나은 일들이 많이 있는 법이란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 P13

순간, 나는 울기 시작했다. 나역시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것을잘 알고 있었지만, 공공연하게 그런 말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울 것 없다, 모하메드. 하지만 그래서 마음이 편해질 것 같으면맘껏 울어도 좋아. 이 아이가 원래 잘 웁니까?"
"전혀요. 얘는 절대로 울지 않는 아이예요. 하지만 얼마나 날 애먹이는지 몰라요. 내 속 썩는 건 하느님이나 아시지요."
"그렇다면, 벌써 좋아지고 있군요. 아이가 울고 있잖아요. 정상적인 아이가 되어가고 있는 겁니다. 아이를 데려오길 잘하셨어요. 로자 부인. 부인을 위해서 신경안정제를 처방해드리죠. 별건 아니지만 부인의 불안증을 없애줄 겁니다." - P43

그러고 나서 아줌마는 마치 아주 먼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는 듯내 머리 위로 시선을 던진 채 중얼거렸다.
"모모야, 그곳은 내 유태인 둥지야.".
"알았어요."
"이해하겠니?"
"아뇨. 하지만 상관없어요. 그런 일엔 익숙해졌으니까."
"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 P80

말을 마친 후 로자 아줌마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느누구보다도 감동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카츠 선생님말이 맞는 것 같다. 그는 말했다. 창녀들은 자기가 바라보고 싶은대로 바라보는 눈이 있다고 했다. 하밀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도읽었고 그 나이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았는데, 내게웃으며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포함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는 박하차를 가져다주는 드리스 씨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오래 산 경험에서 나온 말이란다." 하밀 할아버지는 위대한 분이었다. 다만, 주변 상황이 그것을허락하지 않았을 뿐 - P112

나는 영화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여러분 각자 자기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 - P158

한다. 그건 그가 생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감상에 젖어서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어쨌든 더빙하는 남자가 적절한 어감을 살리지 못했기 때문에 녹음을 다시 하기 위해 화면을 앞으로 돌려야만 했다. 우선 그는 총알을 막으려고 손을 뻗쳤고, 그때 "안 돼, 안 돼!"와 "날 죽이지 마, 죽이지 마!"라는 소리가 녹음실의 마이크 앞에 안전하게 서 있는 남자의 목소리로 끼워맞춰진다. 그러고 나서 그는 몸을 뒤틀면서 쓰러졌는데, 영화에서는 그런 게 재미다. 그는 이제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갱들은 그가 더이상 자신들을 해칠 수 없는데도 확인사살을 했다. 이미 살아날 가망은 없어졌는데 모든 것은 다시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고그 남자는 다시 살아났다. 마치 하느님이 더 쓸 데가 있어서 손을잡아 일으켜세우는 것처럼. - P160

나는 아이스크림을 핥아먹었다. 기분이 별로였다. 그럴 때면 맛있는 것이 더욱 맛있어졌다. 여러 번 그런 적이 있었다. 죽고 싶어질 때는 초콜릿이 다른 때보다 더 맛있다. - P162

로자 아줌마는 환하게 웃었다. 이제 이도 거의 없었다. 미소를지을 때 아줌마는 평소보다 덜 늙어 보이고 덜 미워 보였다. 그녀의 어린애 같은 미소는 미용 효과가 있었다. 그녀는 유태인 대학살전인 열다섯 살 적 사진을 한 장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진의 주인공이 오늘날의 로자 아줌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로자 아줌마가 열다섯 살의 사진 속 주인공이었다는 사실 역시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서로 아무런상관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열다섯 살 때의 로자 아줌마는 아름다운 다갈색 머리를 하고 마치 앞날이 행복하기만 하리라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열다섯 살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를 비교하다보면 속이 상해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이다.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 서서 생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상상했다. 손가락을 입에 넣어 양쪽으로 입을 벌리고 잔뜩 찡그려가며 생각했다. 이런 모습일까? - P173

그날은 그녀가 정신이 맑아져서 장례 계획까지 세우기도 했다. 그녀는 종교의식에따라 묻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처음에는 그녀가 하느님이두려운 나머지 종교의식 없이 매장됨으로써 하느님을 벗어나보려는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는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미 때가 너무 늦었고, 지나간 일은 어쩔수 없으므로, 이제 신이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러 올 필요는 없다고아줌마는 말했다. 정신이 맑을 때 로자 아줌마는 말하곤 했다. 완벽하게 죽고 싶다고. 죽은 다음에 또 가야 할 길이 남은 그런 죽음이 아닌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자움 씨네 형제들은 그녀가 레알 시장과 생드니 거리, 푸르시 거리, 블롱델 거리, 라 트뤼앙드리 거리를 두루 돌아볼 수 있게 해주었다. 로자 아줌마는 감동에 젖었다. 그녀는 특히 젊은 시절에 하루에도 사십 번씩 오르내리던 작은 호텔이 있는 프로방스 거리를 지날 때 무척 감격했다. 자기가 몸을 팔아벌어먹던 거리며 골목길을 다시 돌아보게 되어 무척 기쁘다고, 밀린 빚을 다 갚은 듯한 느낌이라고 했다. 그녀는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산책을 해서 무척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 P198

나는 그와 함께 한동안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그것은 프랑스의 것이 아니었다. 하밀 할아버지가종종 말하기를, 시간은 낙타 대상들과 함께 사막에서부터 느리게오는 것이며, 영원을 운반하고 있기 때문에 바쁜 일이 없다고 했다. 매일 조금씩 시간을 도둑질당하고 있는 노파의 얼굴에서 시간을 발견하는 것보다는 이런 이야기 속에서 시간을 말하는 것이 훨씬 아름다웠다. 시간에 관해 내 생각을 굳이 말하자면 이렇다. 시간을 찾으려면 시간을 도둑맞은 쪽이 아니라 도둑질한 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 P203

나는 무슨 추억이 될 만한 것이라도 있을까 하고 그의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주머니 속엔 푸른색 골루아즈 담배 한갑뿐이었다. 담뱃갑 속에는 아직 한 개비가 남아 있었다. 나는 그의 곁에 앉아서그것을 피웠다. 그 담뱃갑 속에 있었을 다른 담배들은 모두 그가피웠을 테니, 나머지 한 개를 내가 피운다는 것이 뭔가 의미 있는일같이 여겨졌으므로,
나는 조금 울기까지 했다. 그러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내게도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이, 그리고 이제 그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나를 기쁘게 했다.
잠시 후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얼른 집으로 올라와버렸다. - P255

엄마는 중절수술을 받지 못했는데, 그땐 그것이 계획적인 살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로자 아줌마는 그 얘기를 늘입에 달고 살았다. 그녀는 교육도 받고 학교도 다녔다고 했다.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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