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부터 좋다~!

이 책을 쓰는 건 개를 목욕시키는 일과도 같았다. 다듬을 때마다 조금씩 깔끔해졌다. 하지만 개를 목욕시키다 보면 개가 너무 깨끗해져서 개다움을 완전히 잃을 위험에 처할 때가 있다. 나는 이와 같이 책도 너무 많이 씻어내게 될까 봐 수건을 내려놓고 책에게 다 끝났다고 말한다. 왕겨나 모래 같은 실제세계의 쪼가리들이 이 책의 페이지들에 조금은 달라붙어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책에는 편향과 열정이, 그리고 저자의 결함이 담긴다. 이 책은 편향되고 독단적이기도 하지만, 즐겁기도 하고, 아마 절망도 있을 것이다. 절망 없이 60년을 수월하게 나아가는 삶이 있을까? 하지만 독자들은 낙담의 실개천보다는 기쁨을 더 확실히, 더 빈번히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야생의 세계에 대한 사랑, 문학에 대한 사랑, 타인과의 사랑이라는 지속적인 열정들의 영향을 받은 지금까지의 내 삶이 그러했으니까. - P8

내게 일이라 함은 걷고, 사물들을 보고, 귀 기울여 듣고, 작은 공책에 말들을 적는 것이다. - P9

창조의 장치는 통제하거나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는 창조력을 갖고 일해야 한다. 창조력 없이 일한다는 건 창조에 대항하여 일하는 것이다. 예술에는 영적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중립지대가 없다. 특히 시작 단계에서는 고독과 집중뿐 아니라 규율도 필요하다. 예를 들면 젊은 작가들에겐 집필 스케줄이 좋은 제안이다. 말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누군가 어서 그들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우리의 모든 의식적 규율에도 불구하고 희미하게 빛나는 형상의 아이디어들이 때가 되면 힘찬 날갯짓으로 무질서하고 무모하게, 가끔은 열정처럼 다루기 힘들게 찾아올 것이니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 P17

행은 시가 스스로를 하나의 존재이게 하는 장치다. Verse, versus, vers는 쟁기질의 방향을 돌리고, 행을 바꿔준다. 어디서 행갈이를 할지 신중하게 결정해 놨는데 편집자가 잡지의 세로 행이나 인쇄 라인에 맞추어 긴 가지들을 잘라낼 때, 나는 헤아릴 수 없는 좌절감을 느낀다. - P28

잔혹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은 자신을 새로 창조해야 한다. 그다음엔 세상을 새로 상상한다. - P31

오늘 나에게는 야망이 전혀 없다. 어디서 이런 지혜를 얻은 걸까? - P35

노새의 기분을 아는 것처럼 굴지 말자.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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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2 1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행의 말들 - 일상을 다시 발명하는 법 문장 시리즈
이다혜 지음 / 유유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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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출판사의 문장시리즈 중 한권

엄지혜 작가님의 [태도의 말들], 김겨울 작가님의 [책의 말들]에 이어 세번째로 이다혜 작가님의 [여행의 말들]을 읽었다.

이다혜 작가님의 필력이야 말해 무엇하겠는냐마는, 역시 나는 감상 위주의 여행에세이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음(일단 스토리가 있어야 함^^ 빌 브라이슨 처럼^^ - 이 책의 구성상 어쩔 수 없다)을 다시 한번 깨닫고;;

하지만, 여행과 관련된 책의 인용구가 나오니깐, 읽은 책, 읽을 책, 읽고 싶은 책의 인용구를 보는 것은 언제나 반갑고 즐거우니깐!!

이 시리즈 모아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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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0-16 12:3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책 찜^^

새파랑 2021-10-16 12:5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말들 시리즈 재미있더라구요. 전 서점, 도서관, 책 의 말들 읽어봤는데(산건 아닌데~~) 다 좋더라구요 ^^

햇살과함께 2021-10-16 13:14   좋아요 2 | URL
시리즈 한권 사면 모아야 할 것 같은 강박이~ 알라딘이나 독립서점 갈 때 마다 한권씩 찾아보려구요~
 

이 책이랑 같이 산 토베 얀손의 [두 손 가벼운 여행] 나와서 더 반갑네~

무민 시리즈의 작가 토베 얀손의 소설집 『두 손 가벼운 여행』의 맨 처음에 실린 [편지 교환]은 아쓰미 다미코라는 열세 살짜리 일본 소녀가 토베 얀손에게 보낸 편지글을 모은 형식의 소설이다. 다미코는 꿈이 많다. 다미코가 쓴 첫 번째 편지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다미코가 토베 얀손의 책을 좋아해서 모든 책을 한 번씩 더 읽는다고 한 뒤 "흰 눈을 떠올리고, 혼자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돼요"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여행도 책도 나를 가장 혼자일 수 있게 한다. 혼자일 수 있게 한다‘는 말은 나를 외롭게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서 뱅뱅도는 대신 ‘해 보자‘라는 쪽으로 방향을 틀게 만든다. - P121

행복에 관한 고대의 지혜, 과학적 연구 성과, 대중적 교훈을 자신의 경험으로 풀어낸 책을 연이어 집필한 그레첸 루빈은 『루틴의 힘』에서 좋아하는 일일수록 자주 실천하라고 말한다. 매일 하면 감각을 유지할 수 있고, 습관이 붙으면 독창성은 물론 성취도도 높아진다고. 루빈은 자라면서 주워들은 교훈을 모아 ‘어른의 비밀‘이라는 긴 목록을 만들었는데, 그중 "내가 매일 하는 일이 가끔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 라는 말이 그에게 가장 유용했다. - P123

유튜브 크리에이터 박막례 할머니 말을 빌려 본다. "실패가 뭔지 아냐? 시도했다는 증거야." 박막례 할머니 채널을 운영하는 김유라 PD도 인스타그램에 "’밑져야 경험‘이 되어야 시작이 두렵지 않습니다."라고 썼다. - P143

내가 ‘애매한 행운의 저주‘라고 부르는 게 있다. ‘행운‘ 대신 ‘좋음’으로 바꿔 불러도 된다. 문제없이 그럭저럭 흘러가기만 하면 굳이 도전할 필요가 없어진다. 입학, 취업을 비롯한 도약의 순간을 말하는 게 아니다. 좋지도 않지만 싫지도 않은 연인과의 관계, 그냥 버티고 있으면 당분간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 직장, 자주 피곤하지만 드러눕지 않을 만큼은 버티는 건강이 대표적이다. 보통 사람들이 ‘일상‘이라 부르는 그것. 그냥 대충 오늘과 비슷한 내일이 예상되고 그 내일이 아주 싫지는 않을 때. 그런 때 사람들은 그냥 주저앉기를 택한다. 왜냐하면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해야 할 동기부여가 되지 않으니까. - P163

이상적인 나에 더 가까워지는 방법이 여행이다. 시간을 넉넉하게 쓰고, 좋아하는 일로 하루를 채우고, 많이 걷는다. 숲 근처로, 강이나 바다 근처로 걷는다. 그게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일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여행, 그게 다예요.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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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여행이란 상자 밖에서 보는 법을 배우는 일이기에 제자리에서 뱅뱅 돈다는 느낌, 그것이 현실의 전부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더 적극적으로 여행을 가려고 노력한다. 문제는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간 늘 마법이 풀린다는 것.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터미널에서 내리는 순간, 집의 현관문을 여는 순간 끝난다.
어떻게 하면 마법을 이어 갈 수 있을까. 여행의 마법은 신용카드 명세서만 기억한다. 허리띠 풀고 카드를 긁은 기록이 거기있다. 꿈에서 깨지 않고 그 꿈을 일상에서도 꿀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 P33

어딜 간다고 나아질 일이 아니라는 걸 다른 곳에 가서야 알게 될 때가 있다. ‘다른 이를 빗대어 나를 보는 일‘을 하려고 떠났다 나라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보게 되어 버려서.
지금도 종종 사진 한 장 없는 여행을 한다. 여행 사진을 SNS에 올리지 않는 것과 사진을 아예 찍지 않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일이다. 전자는 경험을 지극히 사적인 즐거움의 영역에 저장하는 일이지만, 후자는 ‘배터리 없음‘을 알리는 빨간불이 내 안에서 번쩍거리는 상황이다. 사진 몇 장만 남은 여행보다 조금은 더 울적한, 사진을 찍을 여유조차 없었던, 길 위에서 보낸 어떤날들. - P53

돈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세상에 대해서도 아는 것 하나 없던 어린 시절, 그저 어디론가 가고 싶다는 일념만으로 매일같이 떠나고 도착하는 장소에 우두커니 앉아 있어 본 사람이라면 독일에서 23년째 살고 있던 시인 허수경이 고향 기차역인 진주역을 인터넷에서 찾아본 뒤 자신의 심정을 적은 글에 애틋함을 느낄 것이다. 가난한 생김새의 오래된 역은 이제 번듯한 한옥형 역사로 다시 태어났다. 그 사진 앞에서 허수경은 사라져 버린 기억을 떠올린다. "나는 이 지상에 아직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내가 살았던 어느 곳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 P79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저마다 주력하는 관람 포인트가 있는데, 나는 정원과 종교시설 그리고 오래된 건물을 좋아한다. 외국에 나갈 때마다 정원을 허겁지겁 구경하다 처음 소쇄원에 방문했을 때 느낀 경이감을 잊을 수 없다. 내가 원하던 정원의 모든 것이 소쇄원에 있었다. 소쇄원은 그저 자연의 일부처럼 보였다. 자연물처럼. 벽오동과 목백일홍, 매화와 복사나무 그리고 단풍나무가 모두 소쇄원이었다. - P81

박연준 시인의 글을 읽으며 이런 ‘뒹굴뒹굴‘을 사치라고 부르는 사람이 역시 나만은 아니라는 데 감격 또 감격했다.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 없이 자유롭게 그저 존재하는 일. 뭐든 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까지 멍 때리기.
베를린에서의 나는 하늘 사진만 잔뜩 찍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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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바꾸기 위해 떠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아니다. 나의 진짜 영혼은 인도 바라나시가 아니라 우리 집에 있고 내 몸에 깃들어 있다. 매일을 잘사는 것이 내 최고의 목표다. 먹고 자고 일하고 어울리는 것이 매일의 과제다. 나 자신을 잘 돌보고 가능하면 더 많은 사람에게 즐거움과 가치를 행할 수 있기를 바란다. 대단한 목표는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지키기가 어렵다. 하기싫은 일을 하고, 싫은 사람을 참아 내고, 좋아하는 사람을 내 잘못으로 실망시킨다. 나쁜 의도는 없었지만 매일이 쌓여 조금씩 나빠지다, 어느 아침에 일어나면 처음의 의지는 흔적도 없다. 잃어버린 (생의) 의지를 찾아서. 그런 날 여행을 마음먹는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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