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쭐떠기의 한 구절 (쭐떠기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Tue, 01 Sep 2026 23:57:04 +0900</lastBuildDate><image><title>쭐떠기</title><url>https://image.ala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쭐떠기</description></image><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바깥의 소리를 자기 안으로 번역해낸 소리 - [환호성]</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86885</link><pubDate>Tue, 01 Sep 2026 15:4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8688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5690&TPaperId=1748688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62/22/coveroff/893204569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5690&TPaperId=1748688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환호성</a><br/>구소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08월<br/></td></tr></table><br/>무언가를 믿는 일은 생각보다 위태롭다.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믿을 수 있고, 아무도 믿지 않는 곳에서 혼자 믿음을 키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일까, 진심일까, 혹은 그것을 믿고 살아낸 시간일까. 구소현의 『환호성』은 이 불안정한 믿음의 지형 위에 세워진 소설집이다. <br/><br/>『환호성』에는 쉽게 믿을 수 없는 세계가 펼쳐진다. 유령과 최면, 사이비 종교와 폐쇄된 방,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지구 같은 비현실적인 장치들이 등장하지만, 기묘한 것은 그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 소설집에서 비현실은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현실의 작동 원리를 과장해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를 넘나드는 유령, 삶의 시간을 건너뛰게 하는 최면, 이미 무너진 세계를 향해 달려가는 종말은 모두 지금의 현실이 품고 있는 어떤 감각을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너무 빠르게 흘러가고, 너무 많은 것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만큼 쉽게 잊히고 버려지는 세계. 현실이 충분히 기묘하기에 소설은 현실보다 더 기묘한 장치를 빌려 현실을 보여준다.<br/><br/>그 세계에서 믿음은 삶을 지탱하는 사적인 질서가 된다. 믿을 만한 근거가 사라진 자리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남기 위한 작은 세계를 만든다. 한 사람과의 관계일 수도 있고, 방 한 칸일 수도 있으며, 종교나 신념처럼 거대한 형식을 취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크기가 아니라 바깥의 불확실성을 견디기 위해 내부에 확실성을 구축한다는 사실이다. 구소현의 인물들에게 이러한 확실성은 자주 고립의 형태를 취한다. 외부의 판단과 규범에서 자신을 떼어내고 자기만의 감각과 논리를 보존하려는 행위. 그래서 고립은 자기보존의 기술인 동시에 자기폐쇄의 기술이 된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자리는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장소가 되지만, 바깥을 차단한 세계는 타인을 자신의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거나 지워버릴 가능성까지 품는다. 고립이 깊어질수록 세계는 작아지고, 세계가 작아질수록 그 안에서 통용되는 믿음은 강해진다.<br/><br/>여기서 『환호성』의 ‘진짜’와 ‘가짜’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거짓임을 알면서도 믿을 수 있고, 가짜인 것을 진심으로 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심은 사실 여부를 보증하지 않으며, 행위의 정당성도 보증하지 않는다. 사랑이 진심이라는 사실과 그 사랑이 타인에게 가한 결과는 별개의 문제다.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 만든 세계가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한다면, 그 세계의 진실성만으로 행위까지 정당해질 수는 없다. 이때 믿음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윤리의 문제로 이동한다. 사적인 확신은 어디까지 개인의 자유로 남을 수 있는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세계가 타인을 배제하기 시작할 때, 그 세계를 여전히 존엄의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작품은 이 순간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정상과 비정상, 선과 악이라는 익숙한 분류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상처 입은 사람의 선택이라고 해서 모두 정당한 것도 아니며, 비정상으로 분류된 감각이라고 해서 모두 거짓인 것도 아니다. 인간의 선택은 언제나 타인의 삶과 맞닿아 있고, 바로 그 접점에서 진심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책임이 발생한다.<br/><br/>그래서 이 소설집에서 ‘닿음’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화면을 통해 연결되는 세계에서 타인의 존재는 정보와 이미지의 형태로 가벼워진다. 손가락으로 넘길 수 있는 관계와 저장할 수 있는 기억, 빠르게 소비되고 폐기되는 이미지 속에서 인간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서로의 무게를 경험하지 못한다. 반대로 몸과 몸이 부딪히고, 목소리를 듣고, 한 사람의 속도에 맞춰 무언가를 읽는 순간에는 추상화된 타인이 다시 하나의 몸으로 돌아온다. 이 소설집에서 감각은 단순한 분위기의 장치가 아니다. 정보와 이미지로 납작해진 세계에 맞서 타인의 실재를 복원하는 방식이다. 믿음이 내면에 세계를 만드는 힘이라면, 닿음은 그 세계 바깥에 타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되돌려놓는 감각이다.<br/><br/>표제작에서 파도 소리는 박수 소리처럼 들린다. 실제로 누군가가 보내는 환호는 없는데도, 바깥의 소리를 마음속에서 박수로 번역할 수 있다. 파도는 계속 밀려오고, 우리는 그 소리를 제멋대로 해석한다. 박수라고 믿을 수도 있고, 경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며, 아무 의미 없는 소음으로 흘려들을 수도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파도가 정말 박수였는지를 판별하는 일이 아니다. 세계가 보내는 신호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의 능력, 그리고 그 의미가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이면서 동시에 현실을 왜곡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이중성이다. 누군가의 환호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도 그것을 환호로 받아들이는 순간, 세계는 잠시 다른 얼굴을 갖는다. 그 믿음은 구원이 될 수도 있고 착각이 될 수도 있다.<br/><br/>그렇다면 『환호성』에서 믿음은 진실의 반대편에 놓인 개념이 아니다. 믿음은 진실이 완전히 주어지지 않은 세계에서 인간이 삶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때문에 믿음의 가치는 그것이 얼마나 강한가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그 믿음이 어떤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 안에 누가 들어오며, 그 바깥에서 누가 밀려나는지까지 함께 보아야 한다. 강한 믿음이 반드시 더 나은 삶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확신이 단단해질수록 그것을 의심하고 수정할 능력은 약해질 수 있다. 『환호성』의 인물들은 독자가 쉽게 편을 고를 수 없는 자리에 놓인다. 각자의 세계 안에서 지나치게 일관된 인물들의 태도는 때로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이면서 동시에 타인을 밀어내는 폭력이 된다.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건네지는 간편한 해답 역시 이 경계 위에서는 힘을 잃는다. 누군가의 삶을 살게 하는 믿음과 누군가의 삶을 파괴하는 믿음 사이에는 선명한 경계가 그어져 있지 않다.<br/><br/>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보다 어려운 것은, 믿고 있는 자신을 어디까지 의심할 수 있는가를 견디는 일이다. 『환호성』은 그 불편한 자리에서 멈춘다. 진실을 보장하지 않는 믿음과, 믿음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인간 사이. 그 사이에서 울리는 환호성은 세계가 인간에게 보내는 축하가 아니다. 아무도 박수를 보내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박수, 무너지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바깥의 소리를 자기 안으로 번역해낸 소리다. 그것은 아름답지도 온전하지도 않다. 때로는 자신을 살게 하고, 때로는 타인을 다치게 하며, 때로는 허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붙잡게 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의미 없는 파도 앞에서 계속 의미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환호성』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불온하고 필사적인 믿음의 형식이다. 살아남기 위해 무언가를 믿어야 하지만, 그 믿음이 만든 세계까지도 의심해야 하는 인간.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박수라고 번역하면서도, 그 박수가 정말 자신을 향한 것인지 끝까지 확인할 수 없는 존재. 어쩌면 이 책의 환호성은 그런 인간이 세계를 향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해 보내는 가장 위태로운 생의 신호일 것이다.<br/>   <br/>✏️도서출판 문학과지성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62/22/cover150/893204569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0622237</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한 여성의 목소리 - [제인 에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83399</link><pubDate>Mon, 31 Aug 2026 16:4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8339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32130842&TPaperId=1748339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55/49/coveroff/k53213084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32130842&TPaperId=1748339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제인 에어</a><br/>샬럿 브론테 지음, 공경희 옮김 / 현대지성 / 2026년 08월<br/></td></tr></table><br/>어떤 시대에는 여자로 태어나는 순간 삶의 반경부터 정해졌다.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지까지.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는 그 좁은 반경 안에 한 여자의 목소리를 세워놓는다. 고아라는 출신도, 가난도, 평범한 외모도, 가정교사라는 신분도 제인의 존재를 대신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어려운 선택은 무엇을 얻을 것인가보다 무엇을 포기하지 않을 것인가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 제인이 끈질기게 지켜내는 것은 대단한 성공이 아닌 자기 삶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권이다. <br/><br/>19세기 영국의 여성에게 사회가 요구한 미덕은 순종과 정숙, 가정에 대한 헌신이었다. 교육받은 여성이라고 해도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많지 않았고, 결혼은 사랑의 결실인 동시에 생존의 안전망이었다. 그런 시대에 제인이 가정교사라는 직업을 택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녀는 교육받았지만 상류층의 일원이 아니며, 노동하지만 하인으로 분류되지도 않는다. 주인의 집에서 일하면서도 그 집의 가족은 될 수 없는 사람. 손필드의 제인은 정확히 그 어중간한 문턱에 서 있다. 이 위치는 제인의 불안정한 삶을 설명하는 동시에 그녀의 시선을 만든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해야 한다. 제인은 자신을 둘러싼 계급의 언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로체스터와의 관계에서도 자신이 그의 재산이나 지위에 비해 얼마나 초라한 위치에 있는지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제인은 자신의 영혼까지 그 차이에 맞춰 작게 만들지는 않는다. 제인의 자존심은 허영과 다르다. 그것은 인간의 가치가 사회적 서열로 환산될 수 없다는 감각이다.<br/><br/>그래서 제인은 유난히 자주 ‘아니오’라고 말한다. 게이츠헤드의 부당함에도, 로우드의 위선에도, 사랑하는 사람의 요구에도, 종교적 의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결혼에도. 제인의 거절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타인이 정해준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방향이다. 이 거절들은 서로 다른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문장으로 이어진다. 내가 누구인지 결정할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겠다는 것. 제인의 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새로운 것을 얻는 순간보다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거부하는 순간들에 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선을 넘지 않기 위해 가장 원하는 것마저 내려놓을 수 있을 때, 자유는 비로소 추상적인 단어에서 삶의 태도로 바뀐다.<br/><br/>로체스터와의 사랑은 이 자아의 문제를 가장 뜨겁게 드러낸다. 그는 제인의 내면을 알아보는 사람이고, 제인은 그에게 깊이 끌린다. 그러나 사랑이 깊어질수록 두 사람 사이의 불평등 역시 선명해진다. 저택의 주인과 가정교사, 남성과 여성,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사랑은 이 차이를 잠시 잊게 할 수는 있지만 없애주지는 않는다. 제인은 그 사실을 감정의 열기에 묻어버리지 않는다. 로체스터의 제안을 거절하고 손필드를 떠나는 제인의 선택은 그래서 ‘사랑보다 자존심을 택한 장면’으로만 읽기 어렵다. 제인은 그를 사랑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떠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소유하거나 자신을 내어주는 순간 관계는 쉽게 지배와 종속으로 변한다. 제인이 지키려는 것은 사랑의 순수함보다 더 근본적인 것, 사랑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을 자기 자신의 자리다. 제인은 누군가의 사랑을 얻음으로써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온전한 인간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br/><br/>이 소설에서 사랑이 유독 아름답게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제인은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로체스터가 원하는 이상적인 여성이 되지도 않고, 세인트 존이 요구하는 신앙적 사명에 자신을 바치지도 않는다. 두 남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제인을 자기 삶의 일부로 편입시키려 하지만, 제인은 그 어느 쪽에도 자신을 맡기지 않는다. 사랑과 의무의 방향은 달라도 그 끝에서 자기 자신을 잃는다면 결과는 같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제인 에어』의 결혼은 당시의 여성 서사와 묘한 긴장을 만든다. 제인은 결국 결혼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자유는 결국 결혼이라는 익숙한 제도로 돌아가기 위한 우회로였을까. 그렇게 읽기에는 결말에 이르는 제인의 조건이 지나치게 치밀하게 달라져 있다.<br/><br/>제인의 삶에서 돈은 생각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아무리 단단해도 생계를 타인에게 의존해야 하는 사람의 선택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따른다. 제인은 가정교사로 노동하고, 유산을 통해 경제적 독립을 얻는다. 이것은 단순한 서사의 보상이 아니다. 당시 여성에게 결혼은 경제적 안전을 확보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였고, 경제적 의존은 곧 선택의 범위를 좁히는 일이었다.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삶, 동시에 누구도 자신의 삶에 의존하도록 만들지 않는 삶. 제인에게 돈은 사치가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물질적 형태다. 제인은 결혼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여성이 되는 대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결혼을 선택할 수 있는 여성이 된다. 의존해야 해서 사랑하는 것과, 의존하지 않아도 사랑하기로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관계다.<br/><br/>그래서 펀딘에서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비로소 관계의 무게중심이 달라진다. 한때 손필드의 모든 것을 소유했던 로체스터는 화재 이후 이전과 같은 남자가 아니다. 제인 역시 더 이상 그의 저택에 고용된 가정교사가 아니다. 재산과 노동, 판단을 자신의 것으로 가진 제인은 이제 그의 곁으로 돌아갈지 말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여성의 독립이 결혼으로 회수되는 장면이라기보다, 독립을 획득한 여성이 사랑을 선택할 수 있게 된 장면으로 읽을 때 훨씬 선명해진다. 사랑이 제인을 구원한 것이 아니다. 자기 삶을 스스로 지탱할 수 있게 된 제인이 사랑을 선택한 것이다.<br/><br/>물론 『제인 에어』를 오늘날의 페미니즘과 완전히 포개어 읽을 수는 없다. 이 작품에는 분명한 시대의 그림자가 있다. 가장 어두운 곳에 버사 메이슨이 있다. 손필드의 다락방에 갇힌 버사는 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존재로 기능하지만, 동시에 제인의 서사가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 타인의 자리이기도 하다. 특히 버사의 자메이카 출신 배경과 식민주의적 맥락을 함께 놓으면 이야기는 단순한 여성 해방의 서사에서 벗어난다. 제인이 가부장적 질서에 저항하는 주체인 동시에, 자신이 속한 시대의 제국주의적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당대의 질서를 거부하면서도 그 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여성의 자립을 꿈꾸면서도 결국 결혼과 가정이라는 틀 안에서 이야기를 완성하고, 한 여성의 내면적 자유를 그려내면서도 또 다른 여성에게는 침묵과 격리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은 작품의 가치를 지우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자신이 태어난 시대의 한계를 품은 채 그 경계를 조금씩 밀어내는 작품이기에 『제인 에어』는 오래된 고전의 자리에서 아직도 살아 움직인다. <br/><br/>결국 제인의 독립을 가능케 한 것은 성격의 강인함 하나만이 아니다. 자존심, 노동, 경제적 자립, 도덕적 판단, 사랑에 대한 욕망이 서로 얽혀 하나의 삶을 만든다. 정신만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낭만적인 믿음도,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냉정한 계산도 이 소설에는 없다. 인간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려면 내면의 의지와 그것을 지탱할 현실의 조건이 함께 필요하다. 제인은 특별한 영웅이 아니다. 가진 것도 많지 않고, 사회적 권력도 없으며, 아름다운 외모조차 자신의 무기로 삼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신의 영혼만큼은 흥정하지 않는다. 19세기 영국의 좁은 세계에서 한 여성이 가질 수 있었던 가장 급진적인 재산은 어쩌면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는 일.<br/><br/>제인의 내면에서 울리던 작은 북소리는 결국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목소리가 된다. 세상이 정해준 자리에 머물지 않겠다는 목소리, 사랑을 위해 자신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목소리, 혼자가 되는 순간에도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겠다는 목소리. 그 소리를 따라간 끝에서 제인은 사랑을 얻는다. 그러나 사랑이 그녀의 삶을 완성한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법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에, 마침내 사랑조차 자신의 선택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제인 에어』가 오래된 고전 가운데서도 유난히 생생한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제인의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선택받는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끝까지 자기 삶의 문장을 직접 쓰는 여자의 이야기니까. 사랑은 그 문장의 마지막 단어가 아니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온 사람이 스스로 골라 적은 한 문장일 뿐이다.<br/><br/>✏️도서출판 현대지성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55/49/cover150/k53213084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0554965</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오래도록 사랑이라고 부르며 찾아 헤맨 것 - [사랑과 안정 - '결혼'이 만드는 꿈과 불안, 그 너머 관계의 기하학]</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80603</link><pubDate>Sun, 30 Aug 2026 15: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8060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52130638&TPaperId=1748060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31/48/coveroff/k75213063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52130638&TPaperId=1748060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사랑과 안정 - '결혼'이 만드는 꿈과 불안, 그 너머 관계의 기하학</a><br/>안희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8월<br/></td></tr></table><br/>사랑하는 사람과 오래 함께 살고 싶다는 마음은 언제부터 결혼이라는 이름을 필요로 하게 되었을까. 누군가를 사랑하고, 함께 밥을 먹고, 같은 공간에서 잠들고, 힘든 날 서로의 등을 내어주는 일에는 본래 결혼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랑은 결혼으로 향해야 온전해지고, 결혼에 이르러야 비로소 안정된 삶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안희제의 『사랑과 안정』은 결혼을 둘러싼 청년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사랑과 안정이라는 두 단어를 얼마나 오랫동안 결혼이라는 하나의 제도 안에 포개어왔는지 보여준다. 사랑과 결혼, 가정과 안정 사이에 당연한 듯 놓여 있던 연결고리를 하나씩 풀어내면서 우리가 원하는 삶의 모양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br/><br/>오늘날 결혼을 꿈꾸는 마음에는 낭만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섞여 있다. 불안정한 일자리와 주거, 혼자 감당해야 하는 생활비와 돌봄, 언제든 끊어질 수 있는 인간관계 속에서 결혼은 삶의 바닥이 무너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울타리처럼 느껴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지만, 그 사람이 나의 가족이고 나의 집이며 어려운 순간에도 책임을 나누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또 다른 종류의 안도감을 준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쉽게 대체되는 시대일수록 오래 머무르겠다는 약속을 품은 관계에 마음이 기우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과 버려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어느 순간 하나가 되어, 결혼이라는 형태를 향하게 된다. 그래서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면서 동시에 불안을 잠재우는 가장 익숙한 방법이 된다.<br/><br/>하지만 안정이 결혼이라는 하나의 문을 통과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문밖에 서 있는 삶은 언제나 불완전한 것으로 남게 된다. 좋은 직업을 얻고, 돈을 모으고, 집을 마련하고, 적절한 나이에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는 삶. 우리는 이것을 평범한 삶이라고 부르지만 그 평범함을 얻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결혼할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관리하며, 남성에게는 경제적 능력과 책임감이, 여성에게는 외모와 나이, 출산과 돌봄의 가능성이 따라붙는다. 누구도 결혼을 강요하지 않았는데 결혼하지 않는 삶을 불안해하고, 누구도 특정한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지 않았는데 이미 정해진 생애의 순서를 따라가게 된다. 가장 단단한 규칙은 명령의 목소리조차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느새 자신의 생각과 욕망인 것처럼 마음속에 자리를 잡기 때문이다.<br/><br/>그 문을 통과한 뒤에는 또 다른 이름들이 기다리고 있다.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두 사람의 관계 위에 사회가 오래도록 정해온 역할이 포개진다. 사랑은 때때로 그 역할들을 부드럽게 감싸는 언어가 된다. 사랑하니까 이해하고, 사랑하니까 양보하고, 사랑하니까 돌본다는 말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운 말 뒤에서 누군가의 희생이 당연한 몫으로 굳어진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오래된 사회의 관습은 사라지는 대신 사랑의 얼굴을 하고 돌아오기도 한다. 누군가는 가족을 책임질 경제력을 증명해야 하고, 누군가는 가족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경력을 조정해야 한다. 특히 여성에게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기쁨과 동시에, 자신의 삶을 어디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계산하게 만드는 사건이 된다. 사랑이 두 사람의 세계를 넓히는 힘이 되려면,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한 사람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을 위한 자원으로 소모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br/><br/>그렇다면 안정이라는 말의 자리를 조금 넓혀볼 수 있지 않을까. 안정은 정말 배우자 한 사람에게서만 얻어야 하는 것일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을 때 곁을 내어주는 친구, 경제적으로 어려운 순간 서로의 손을 잡아주는 관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지 않도록 응원해주는 사람, 아픈 날 말없이 찾아와주는 사람. 삶을 지탱하는 관계는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 다만 결혼이라는 제도가 오랫동안 사랑과 돌봄과 책임과 주거와 경제적 연대를 한데 묶어온 탓에, 그 밖의 관계들은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못했을 뿐이다.<br/><br/>관계의 가치는 이름보다 그 안에서 서로의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에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내 곁에 붙잡아두는 것이 사랑의 증명이 될 필요는 없다. 상대가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때로는 등을 내어주고, 필요할 때 다시 일어설 힘을 건네는 것 역시 사랑의 한 형태다. 돌봄도 마찬가지다. 상대를 대신 살아주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기 삶을 살아갈 힘을 잃지 않도록 곁을 내어주는 일이라면, 돌봄은 희생의 다른 이름이 아닌 서로를 살아 있게 하는 관계의 방식이 된다. 좋은 관계 속에서는 한 사람의 세계가 다른 사람 때문에 작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에게 기대면서 각자의 세계가 조금 더 넓어진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독립을 이루는 일이 아니라, 서로에게 기대면서도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관계일 것이다.<br/><br/>그런 의미에서 『사랑과 안정』의 마지막에는 관계를 바라보는 시야가 한층 넓어진다. 하나의 선으로 이어져 있던 사랑과 결혼과 가정과 안정 사이에 다른 길들이 생겨난다. 친구와 가족 사이에도 돌봄이 있고, 연인 사이에도 각자의 삶을 존중하는 거리가 있으며, 이름 붙이기 어려운 관계 속에서도 서로의 삶을 견디게 하는 책임과 애정이 존재한다. 안정은 한 사람의 어깨에 모든 무게를 올려두는 대신 여러 관계 사이에서 서로의 무게를 나누어 갖는 일일 수 있다.<br/><br/>‘관계의 기하학’이라는 말은 그래서 이 책의 사유를 잘 보여준다. 삶은 하나의 직선으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누군가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고, 다른 누군가에게 기대고, 또 다른 사람의 곁을 지켜주면서 수많은 선과 면을 만들어간다. 그 모든 관계가 반드시 같은 모양일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사람이 작아지지 않는 일,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기 삶을 잃지 않는 일, 서로의 불안을 혼자 견디게 하지 않는 일이다.<br/><br/>사랑은 누군가를 소유하는 방식으로 안정될 필요가 없다. 안정 역시 한 사람의 어깨 위에만 세워질 이유가 없다. 서로의 삶을 지탱하면서도 각자의 삶이 더 넓어질 수 있도록 곁을 내어주는 것. 어쩌면 우리가 오래도록 사랑이라고 부르며 찾아 헤맨 것은 그런 관계였을 것이다. 결혼이라는 이름보다 먼저 존재했던 것, 그리고 결혼이라는 이름 너머에서도 계속 살아가는 것. 『사랑과 안정』은 사랑과 안정 사이에 너무 오래 놓여 있던 하나의 등식을 천천히 풀어내며, 그 자리에 우리가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수많은 관계의 형태를 그려낸다.<br/><br/>✏️한겨레출판으로부터 하니포터 13기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31/48/cover150/k75213063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0314814</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괴물의 이름표를 떼어내 보자 - [괴물의 탄생 - 우리가 찍은 낙인의 역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79047</link><pubDate>Sat, 29 Aug 2026 17:1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7904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325073&TPaperId=1747904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24/68/coveroff/893232507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325073&TPaperId=1747904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괴물의 탄생 - 우리가 찍은 낙인의 역사</a><br/>수레카 데이비스 지음, 이영아 옮김 / 현암사 / 2026년 08월<br/></td></tr></table><br/>인간은 오래전부터 괴물을 상상해왔다. 켄타우로스와 좀비,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 인간을 닮은 기계와 외계인까지. 시대가 달라질 때마다 괴물의 모습도 달라졌다. 그러나 이 존재들을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외형의 기괴함이나 공포의 정도가 아니다. 인간이 설정한 기존의 범주를 벗어난다는 점이다. 정상과 비정상,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곳에서 괴물이 출현한다. 수레카 데이비스의 『괴물의 탄생』은 괴물의 역사를 통해 인간이 경계를 어떻게 설정해왔는지를 살핀다.<br/><br/>이 책에서 괴물은 기존의 분류 체계를 벗어나는 존재, 곧 ‘범주를 깨뜨리는 존재’다. 무엇이 괴물인가를 결정하려면 먼저 무엇이 정상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고대의 괴물 지도와 자연사에서 인종과 국가, 성별과 신체, 프릭쇼, 신과 마녀, 기계와 외계인으로 이동하는 구성은 경계 설정의 변화를 보여준다. 기존의 질서로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를 발견하면 인간은 먼저 그것을 분류하고 이름 붙인다. 따라서 괴물의 역사는 정상성의 역사이기도 하다. 정상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기준처럼 보이지만 역사적으로는 변화하는 사회적 규범이다. 정상적인 몸이 정해지면 비정상적인 몸이 생기고, 인간의 범주가 정해지면 인간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존재가 생겨난다.<br/><br/>분류는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배제를 가능하게 한다. 문명과 야만, 정상과 비정상, 우리와 그들 같은 구분은 어느 순간 단순한 차이를 설명하는 언어를 넘어선다. 한쪽에 정상과 문명의 자리를 부여하면 다른 쪽에는 결핍과 위험, 열등함의 의미가 따라붙는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한 단계 더 세밀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는 것은 ‘징그러움’과 ‘혐오’다. 책에 수록된 과거의 괴물 삽화 가운데는 본능적으로 불쾌감이나 이질감을 일으키는 이미지가 있다. 낯선 신체의 비율, 과장된 얼굴, 인간과 동물의 특징이 뒤섞인 형상은 설명보다 먼저 감각적인 거부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혐오 감정에 관한 진화심리학 연구에서는 불쾌감과 회피를 유발하는 감정이 병원체나 감염 위험을 피하기 위한 행동 면역체계와 관련된다고 설명한다.<br/><br/>다른 존재를 보고 이질감이나 징그러움을 느끼는 것과 그 존재를 혐오하는 것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감정은 자동적으로 발생할 수 있지만, 그 감정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낯설다’는 판단이 ‘이상하다’로, 다시 ‘비정상이다’와 ‘위험하다’로 확장되는 과정에는 사회적으로 학습된 기준이 개입한다. 감정이 사회적 판단으로 전환되는 순간 개인의 감각은 타인을 분류하는 기준이 된다. 특정한 몸이나 집단을 불결하고 위험한 존재로 규정하는 언어가 반복될 때 혐오는 하나의 사회적 규범으로 자리 잡는다.<br/><br/>그렇기 때문에 괴물은 인간이라는 범주가 만들어내는 ‘부산물’이다. 인간은 자신을 동물과 구별하면서 인간을 정의하고, 문명인을 야만인과 구별하면서 문명의 의미를 정하며, 정상인을 비정상인과 구별하면서 정상의 위치를 확보한다. ‘인간’이라는 개념은 그것의 외부를 함께 만들어낼 때 더욱 선명해진다. 괴물은 이 외부를 가시화하는 장치다.<br/><br/>이러한 구조는 과거의 신화와 자연사에만 머물지 않는다. 과거에는 미지의 땅과 낯선 신체, 종교적 상상력이 괴물의 주요한 배경이었다면 현대에는 유전공학과 인공지능, 로봇과 외계 생명체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흐려질수록 인간을 정의하는 기준은 다시 조정되어야 한다. 괴물의 역사가 계속되는 까닭은 인간이 여전히 경계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br/><br/>저자가 제안하는 ‘괴물 미래주의’는 하나의 정상만을 기준으로 삼아 타자를 만들어내는 구조를 재검토하는 대안이다. 서로 다른 몸과 정체성, 문화와 능력이 하나의 기준에 맞추어져야 한다는 전제를 내려놓는다면 괴물이라는 범주의 필요성도 약해진다. 결국 『괴물의 탄생』은 괴물에 관한 책이면서 인간의 분류 체계에 관한 책이다. 괴물의 얼굴은 시대에 따라 바뀌지만 괴물을 만들어내는 분류의 방식은 반복된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새로운 괴물의 목록이 아니라 인간이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해온 기준을 검토하는 일이다. 인간의 범주를 더 넓게 설정할수록 괴물의 영역은 줄어든다. 당신의 마음속에 존재했던 괴물의 이름표를 떼어내 보자. 그 자리에 남는 것은 낯선 타자가 아닌 우리가 아직 부르는 법을 배우지 못한 또 하나의 존재다.<br/><br/>✏️현암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24/68/cover150/893232507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0246807</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프랑 - [셸리 숍앤센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77182</link><pubDate>Fri, 28 Aug 2026 14:5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7718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130846&TPaperId=1747718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56/77/coveroff/k71213084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130846&TPaperId=1747718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셸리 숍앤센터</a><br/>설재인 지음 / 나무옆의자 / 2026년 08월<br/></td></tr></table><br/>인간의 몸에서 버려진 기관들을 모아 새로운 생명을 만든다면, 그 존재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인간의 신체에서 떨어져 나온 기관들을 조합해 만들어진 생명체 ‘프랑’. 여덟 개의 팔과 네 개의 코, 겹눈처럼 인간의 신체 질서에서는 벗어난 형상을 지녔고 머릿속에는 뇌 대신 칩이 들어 있다. 인간의 몸에서 비롯되었으나 인간으로 분류되지 않는 존재다. 설재인의 『셸리 숍앤센터』는 이 낯선 생명체를 바라보는 과정에서 인간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위태로운 기준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보여준다.<br/><br/>프랑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간의 욕망에 맞춰 형태가 결정되며, 반려동물이라는 이름으로 유통된다. 누군가에게는 사랑스러운 존재이고 누군가에게는 소유할 수 있는 상품이며, 필요가 사라지는 순간 버려질 수도 있는 생명이다. 유기된 프랑들이 입양 혹은 죽음을 기다리는 ‘셸리 센터’라는 공간은 이 세계의 질서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생명을 만들어내는 기술과 생명을 소비하는 욕망이 아무런 충돌 없이 한자리에 놓여 있는 곳이다. 살아 있는 존재가 탄생하는 순간부터 누군가의 소유가 되고, 사랑받을 가치와 버려질 가치까지 인간의 판단에 따라 나뉜다. 프랑의 기괴한 몸은 단순한 장르적 장치로만 머물지 않고, 그 몸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까지 함께 들여다보게 만든다.<br/><br/>바디 호러의 공포를 이루는 것도 결국 몸이다. 인간에게 가장 익숙한 신체가 낯선 방식으로 해체되고 재조합되면서, 하나의 온전한 몸이라는 믿음은 무너진다. 팔과 다리, 장기와 감각기관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이루는 고유한 일부라는 생각도 흔들린다. 서로 다른 몸에서 떨어져 나온 기관들이 한 존재 안에 결합한다면 그 존재는 누구의 몸을 가진 것일까. 몸이 인간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믿어왔다면, 프랑은 그 믿음에 쉽게 들어맞지 않는다. 인간의 몸에서 나온 것들로 이루어졌지만 인간이 아니며, 인간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간다. 여기에서 바디 호러의 낯섦은 신체의 변형 자체보다 우리가 몸을 통해 존재를 판단해온 방식으로 옮겨간다.<br/><br/>그 질문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노엘이다. 프랑이면서 인간 여자아이와 똑같이 생긴 노엘에게 외형은 정체성을 설명해주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인간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인간이라는 소속을 보장하지 않고, 프랑이라는 사실 역시 다른 프랑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지 않는다. 결국 노엘에게 남는 것은 자신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보다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문제다. 몸의 모양, 기억과 감정, 자기 자신을 하나의 존재로 바라보는 의식. 인간을 구성한다고 믿어온 조건들을 하나씩 들여다볼수록 그 어느 것도 절대적인 기준이 되기 어렵다. 인간이라는 분류가 생물학적 사실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면, 그 이름을 유지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br/><br/>프랑이 인간의 손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생명을 만들어내고, 그 생명의 형태와 쓰임을 정하며, 그것이 어떤 존재인지 이름까지 붙인다. 프랑의 삶에는 처음부터 인간의 필요와 욕망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지, 어떤 관계를 맺을지, 누구에게 사랑받을지조차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반려동물’이라는 말 역시 이 세계에서는 단순한 애정의 표현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사랑받기 위해 만들어진 생명이 상품으로 거래되고, 애정은 소유의 방식으로 나타나며, 버림받은 생명은 다시 죽음을 기다리는 장소로 보내진다.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힘과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는 언제나 함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생명을 창조하는 능력과 생명을 소유하는 권리를 거의 같은 것으로 취급한다.<br/><br/>프랑을 둘러싼 문제는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에만 머물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존재를 만날 때마다 이름을 붙이고 경계를 만든다. 정상과 비정상, 우리와 타인, 보호해야 할 생명과 이용할 수 있는 생명을 구분하면서 세계를 정리한다. 문제는 그 기준이 너무 익숙해지는 순간 그것이 인간이 만들어낸 판단이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는 데 있다. 무엇이 정상인지 결정하는 순간 정상의 바깥에 놓이는 존재가 생기고, 누군가를 보호할 가치가 있다고 결정하는 순간 보호받지 못해도 되는 존재 역시 만들어진다. 노엘이 프랑들 사이에서도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되는 모습은 이러한 질서가 인간과 프랑 사이의 경계에서만 작동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인간과 닮았다는 이유로 인간 행세를 한다는 비난을 받는 노엘에게도 ‘프랑다운 모습’이라는 또 다른 기준이 요구된다. 타자는 언제나 바깥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같은 집단 안에서도 기준에서 벗어난 존재에게는 새로운 경계가 그어진다. 프랑의 몸을 기괴하다고 바라보는 시선도 그 질서 안에 놓인다. 낯선 몸을 바라보며 불편함을 느끼는 감각보다, 그 불편함을 근거로 상대의 가치와 자격까지 판단해버리는 태도가 더 깊은 폭력을 품는다.<br/><br/>이 소설에서 ‘인간다움’은 생물학적인 분류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가 된다. 인간의 몸을 가졌다는 사실이 인간다움의 충분조건이라면, 인간이 다른 생명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타자의 고통을 인식하고, 다른 존재의 삶을 하나의 독립된 삶으로 인정하는 능력을 인간다움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지, 인간의 몸을 가지고 태어났는지는 그다음의 문제가 된다. 자신의 필요를 위해 다른 생명을 마음대로 규정하고 소유하는 존재와, 자신과 다른 존재의 고통을 알아보는 존재를 같은 기준으로 인간답다고 부를 수 있을까. 결국 인간다움은 몸 안에 고정된 어떤 본질이라기보다 타자를 대하는 태도 속에서 드러난다.<br/><br/>이 관점에서 프랑의 존재는 인간에게 하나의 거울이 된다. 인간은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기관들을 이용해 프랑을 만들었고,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과 용도를 부여했다. 인간이 프랑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바라보는 일은 곧 인간이 자신보다 약하고 낯선 존재를 어떤 방식으로 대하는지를 들여다보는 일이 된다.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그 생명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함부로 다루지 않는 태도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신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 다른 생명에게 이름을 붙여왔다. 그 이름에는 때로 사랑이 있었고, 동시에 소유와 지배도 함께 들어 있었다.<br/><br/>『셸리 숍앤센터』의 기괴함은 프랑의 외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생명을 만들고, 이름을 붙이고, 사랑하고, 소유하고, 버리는 일. 너무도 익숙하게 반복되어 온 인간의 행동들이 프랑이라는 존재를 사이에 두고 다시 바라보일 때 그 안에 숨어 있던 폭력성이 드러난다. 인간에게 버려진 몸의 조각들이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세계에서 정작 낯설어진 것은 프랑의 몸이 아닌 인간의 태도다.<br/><br/>버려진 것은 신체의 일부다. 그러나 그 조각들로 만들어진 생명체를 바라보다 보면 인간이 함께 버려온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생명을 필요와 가치의 기준으로 나누는 습관, 자신에게 쓸모없는 존재를 쉽게 외면하는 태도, 세계의 중심에 자신을 놓아두는 오만까지. 인간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기관들이 모여 프랑이라는 존재를 이루었다면, 인간이라는 이름을 이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설재인은 기괴한 신체를 빌려 이 오래된 물음을 낯선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인간처럼 생긴 존재가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세계에서, 오히려 인간이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들에게 그 이름의 자격을 묻게 된다. 『셸리 숍앤센터』는 인간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들로 하나의 생명을 만들어내고, 그 생명을 바라보던 시선을 다시 인간 자신에게 돌려놓는다. 프랑이 인간인가를 묻는 동안, 인간은 자신이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br/><br/>✏️도서출판 나무옆의자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56/77/cover150/k71213084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0567770</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완벽했던 순간은 언젠가 지나간다 - [제자벨]</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75407</link><pubDate>Thu, 27 Aug 2026 17:1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7540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32138760&TPaperId=1747540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38/93/coveroff/k93213876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32138760&TPaperId=1747540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제자벨</a><br/>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채단비 옮김 / 레모 / 2026년 04월<br/></td></tr></table><br/>한 사람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일까. 그리고 그 순간이 언젠가 반드시 끝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행복은 여전히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렌 네미롭스키의 『제자벨』은 살인 혐의로 법정에 선 한 여자의 현재에서 출발해, 그녀가 평생 지키려 했던 젊음과 아름다움, 사랑의 시간을 거꾸로 더듬어간다. 예순 살의 글라디스 아이제나흐에게 스무 살 청년의 죽음은 단순한 범죄 사건으로만 남지 않는다. 그 뒤에는 젊음이 사라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던 한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이 오랜 시간에 걸쳐 다른 사람의 삶까지 잠식해가는 과정이 놓여 있다.<br/><br/>글라디스에게 아름다움은 삶의 한 부분을 넘어 자신을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언어였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을 욕망하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사랑받는다는 감각을 통해 자신이 여전히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얻는다. 그러니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얼굴에 주름이 생기는 일보다 훨씬 가혹하다.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이 사라지고, 그 시선으로 유지해온 자아까지 흔들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글라디스는 자신의 나이를 감추는 데 그치지 않고 딸의 나이까지 실제보다 어리게 말한다. 딸의 나이는 곧 자신의 나이를 증명하는 숫자이고, 딸의 성장은 자신이 젊음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인 까닭이다. 어머니에게 딸은 사랑해야 할 존재인 동시에 자신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거울이 된다. 글라디스가 견디지 못한 것은 늙은 얼굴보다 자신이 더 이상 과거의 그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br/><br/>글라디스의 가장 큰 적은 다른 여자도, 젊은 남자도, 새로운 사랑도 아니다. 그녀가 평생 맞서온 것은 시간이다. 하지만 시간은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이길 수도, 설득할 수도, 돈으로 살 수도 없다. 지나간 계절을 다시 불러낼 수 없듯 한때의 아름다움도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글라디스는 자신의 삶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흘려보내지 못한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현재에 붙잡아두려 하고, 변해가는 관계를 이전의 모습으로 돌려놓으려 한다. 자신의 나이를 지우기 위해 딸의 시간까지 지워버리는 행동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자신의 시간을 거부하기 위해 타인의 시간을 훼손하는 것. 유한한 인간이 유한성을 인정하지 못할 때 욕망이 얼마나 기묘한 형태를 취하는지를 네미롭스키는 이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글라디스에게 시간은 흘러가는 강물이 아니라 반드시 막아야 할 벽이었다. 그 순간부터 삶은 살아가는 일이면서 동시에 사라지는 것을 붙잡는 일이 된다.<br/><br/>그녀의 사랑 역시 이 시간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않다. 글라디스는 사랑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한 사람의 마음만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욕망받는 자신, 누군가의 사랑을 독점하는 자신, 여전히 아름답다고 인정받는 자신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사랑은 상대방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관계이지만, 글라디스에게 사랑은 자아를 확인하는 거울로 기능한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상실에 대한 두려움도 커진다.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상대를 붙잡으려는 욕망으로 이어지고,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상대의 삶까지 자신의 욕망 안에 가두려는 방식으로 변한다. 글라디스에게 사랑은 그래서 아름다운 동시에 잔인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이 두려운 만큼, 사랑받고 있는 자신을 잃는 일도 두렵기 때문이다. 사랑의 중심에 상대방보다 자기 자신이 크게 자리할 때, 사랑은 가장 아름다운 감정에서 가장 잔인한 소유욕으로 미끄러져간다.<br/><br/>그런데 글라디스에게 붙여진 이름은 처음부터 그녀의 운명을 예고하고 있다. ‘제자벨(Jézabel)’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페니키아 출신 왕비 이세벨의 이름으로, 오랫동안 권력과 우상숭배, 파괴적인 여성성의 표상으로 읽혀온 인물이다. 네미롭스키가 불러온 제자벨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라신의 비극 『아탈리』에서 제제벨은 죽은 뒤 딸 아탈리의 꿈에 나타난다. 죽음을 앞두고도 화려하게 치장했던 모습 그대로 등장하는 어머니의 유령이다. 네미롭스키의 『제자벨』 역시 이 라신의 장면을 직접 호출한다. 연구자 비엔베니도 모로스 메스트레스는 『제자벨』과 『아탈리』의 관계를 분석하며, 네미롭스키의 소설이 성서의 제제벨과 라신이 다시 만들어낸 제제벨의 형상을 하나의 문학적 계보 안에서 연결한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제목 속 제자벨은 한 악녀를 가리키는 이름을 넘어선다. 딸 앞에 유령으로 돌아오는 어머니,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놓지 않는 여성, 그리고 자신의 젊음을 잃는 일을 견디지 못하는 글라디스가 하나의 형상 안에서 포개진다. 제목을 알고 나면 글라디스가 바라보는 거울 역시 오래된 문학적 기억을 비추는 장치처럼 읽힌다.<br/><br/>이 지점에서 『제자벨』은 네미롭스키 개인의 한 작품을 넘어 작가가 반복해서 천착했던 모녀 관계의 계보 안으로 들어간다. 『무도회』와 『적』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네미롭스키는 딸이 여성으로 성장하는 순간과 어머니의 노화가 충돌하는 관계를 집요하게 그려냈다. 테레사 마누엘라 루소네는 이 작품들을 분석하면서, 네미롭스키의 소설 속 이기적인 어머니들에게 딸의 성장은 곧 자신의 늙음을 알리는 징후이자 사회적 위치를 위협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지는 양상이 반복된다고 지적한다. 딸이 어머니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욕망과 어머니가 자신의 자아를 지키려는 욕망이 서로 얽히면서 모녀 관계는 애정과 적대 사이를 오간다.<br/><br/>이런 관점에서 보면 글라디스와 딸의 관계는 훨씬 복잡해진다. 딸은 어머니의 젊음을 이어받는 존재이지만, 글라디스에게 딸은 자신의 젊음이 끝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모녀는 서로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면서 서로의 시간을 확인시키는 존재가 된다. 딸이 한 사람의 여성으로 성장할수록 어머니는 자신의 시간이 얼마나 멀리 흘러왔는지를 확인한다. 그 순간 모성은 보호와 통제 사이에서 뒤틀리기 시작한다. 가장 사랑받고 싶었던 존재에게서 가장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어떤 어른이 되어갈까. 네미롭스키가 반복해서 파고든 모녀의 비극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된다. 사랑받지 못한 경험이 사람을 반드시 잔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에 대한 갈망을 더욱 깊게 만들기도 한다. 사랑을 잃는 일이 곧 자신의 존재를 잃는 일처럼 느껴지는 사람에게 사랑은 쉽게 집착과 소유의 형태를 취한다. 그렇게 한 사람이 견디지 못한 상처는 가장 가까운 사람의 삶으로 흘러간다.<br/><br/>그래서 『제자벨』의 글라디스를 단순히 허영심 많고 잔인한 여성으로 읽는 순간 작품의 비극은 오히려 작아진다. 그녀의 선택은 분명 타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지만, 그 선택의 밑바닥에는 너무나 인간적인 욕망이 있다.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 아름답고 싶다는 마음, 버림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 행복했던 시간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 네미롭스키의 인물들은 이러한 욕망을 극단적인 형태로 품는다. 그리고 욕망이 삶을 움직이는 힘을 넘어 삶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사랑했던 것까지 훼손한다. 『제자벨』의 냉정함은 악인을 심판하는 데 있지 않다. 너무나 인간적인 욕망이 어느 순간부터 얼마나 비인간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끝까지 바라보는 시선에서 비롯된다. 화려한 사교계와 가족이라는 친밀한 공간을 배경으로 인간의 허영과 자기기만을 해부하는 네미롭스키의 소설 세계에서, 사랑은 언제든 욕망의 얼굴을 하고 돌아온다.<br/><br/>영원한 행복이라는 말에는 처음부터 모순이 들어 있다. 행복이 영원하다면 그것은 어느 순간부터 일상이 될 것이고, 사라질 가능성이 있기에 우리는 한때의 행복을 특별하게 기억한다. 완벽했던 순간은 언젠가 지나간다. 젊음도, 아름다움도, 사랑도, 지금의 나 역시 영원하지 않다. 그렇다면 행복의 반대편에는 불행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놓여 있는 셈이다. 행복했던 순간을 붙잡으려 할수록 그 순간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리고, 사라지는 것을 막으려 할수록 지금 살아 있는 시간까지 잃게 된다. 『제자벨』은 바로 그 역설을 한 인간의 삶 전체에 새겨놓는다.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결국 끝을 앞당기기도 한다는 것. 사라질 것을 사랑하는 능력을 잃는 순간, 사랑은 소유가 되고 아름다움은 집착이 되며 행복은 자신을 파괴하는 힘으로 변한다.<br/><br/>완벽했던 순간은 언젠가 지나간다. 그것은 행복의 결함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이다. 젊음이 지나갔다는 이유로 그 시절의 자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사랑이 끝났다는 이유로 사랑했던 시간이 거짓이 되는 것도 아니다. 네미롭스키가 바라보는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욕망과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세계 사이에서 끊임없이 움직인다. 『제자벨』 역시 젊음을 잃지 않는 법을 가르치는 소설이라기보다, 젊음이 지나가고 사랑이 변하고 행복이 끝나는 순간에도 자기 삶을 계속 살아갈 수 있는가를 묻는 작품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같은 방향으로 흐르지만, 그 흐름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글라디스가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늙음 그 자체보다 행복했던 자신이 더 이상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비극은 한 여자가 젊음을 잃어버린 이야기를 넘어, 지나간 행복을 현재에 영원히 붙잡아두려 했던 인간이 스스로 그 행복의 자리에서 멀어져간 이야기로 읽힌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제자벨』은 한 시대의 상류사회를 그린 소설을 넘어, 시간이 인간에게서 무엇을 빼앗고 인간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욕망할 수 있는지를 묻는 네미롭스키의 초상으로 완성된다.<br/><br/>행복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조차 시간을 품고 있다. 한때의 젊음도, 사랑도, 자신을 바라보던 수많은 시선도 결국 지나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아름다움은 축복에서 족쇄로 모습을 바꾼다. 이렌 네미롭스키의 『제자벨』은 그 변화를 한 여성의 삶과 욕망을 통해 포착하는 소설이다. 젊음과 아름다움이 자아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람의 불안,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소유와 집착으로 기울어가는 순간,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자신의 상처를 되돌려주게 되는 인간의 모순을 읽고 싶은 독자에게 권하고 싶다. 특히 프랑스 문학 특유의 냉정하고 우아한 시선 속에서 인간의 허영과 욕망을 해부하는 소설을 좋아한다면 더욱 그렇다.<br/><br/>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 네미롭스키를 처음 만나는 독자라면, 레모가 오랜 시간 한 작가의 작품을 한 권씩 국내에 소개해온 여정도 함께 돌아보기를 권한다. 『무도회』에서 시작해 『제자벨』을 거쳐 『고독의 와인』에 이르기까지. 레모가 꾸준히 펼쳐온 네미롭스키의 세계가 이번 선집을 통해 하나의 윤곽을 갖추었다. 한 작가의 삶과 문학을 여러 권의 책으로 천천히 따라가는 일은 작품 하나를 읽는 것과 또 다른 독서의 시간을 만들어낸다. 특히 프랑스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오래된 작품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건네는 레모의 행보 역시 반가울 것이다. 한 사람의 상처가 어떻게 문학이 되고, ,그 문학이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 다시 독자의 손에 도착하는지를 지켜보는 일. 레모의 네미롭스키 선집은 그 시간을 한 권씩 이어 붙여왔다. 이번 완간이 더욱 반가운 이유다.<br/><br/>✏️도서출판 레모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38/93/cover150/k93213876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389376</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귀환은 가능하다 - [오뒷세이아 - 영원한 고전, 철저한 고증,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영화 &amp;lt;오디세이&amp;gt;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73086</link><pubDate>Wed, 26 Aug 2026 15:0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7308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76462&TPaperId=1747308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40/12/coveroff/8932476462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76462&TPaperId=1747308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오뒷세이아 - 영원한 고전, 철저한 고증,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영화 &lt;오디세이&gt;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a><br/>호메로스 지음, 김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08월<br/></td></tr></table><br/>이미 너무 많은 사람이 알고 있고, 너무 많은 작품이 변주했으며, 수없이 많은 이름과 장면이 오늘의 문화 속에 남아 있는 이야기. 『오뒷세이아』가 그겋다. 키클롭스, 키르케, 세이렌, 스퀼라와 카리브디스, 트로이의 목마와 페넬로페의 기다림. 서양 문학의 가장 오래된 서사적 원천 가운데 하나인 이 작품은 수천 년 동안 번역되고 각색되며 수많은 서사의 원형이 되었다. 익숙한 장면들을 거슬러 원전으로 돌아가면 그 기원에 자리한 서사는 예상보다 훨씬 복합적이다. 『오뒷세이아』의 모험은 각각의 기이한 사건으로 흩어져 있지 않다. 그 모든 사건은 한 인간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며, 다시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과정 안에서 하나의 거대한 구조를 이룬다. 이 이야기는 모험담보다 훨씬 깊고, 영웅의 승리보다 훨씬 쓸쓸하며, 한 사람의 귀환을 통해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일이 무엇인지 보여준다.<br/><br/>『일리아스』가 트로이 전쟁이라는 집단적 사건 속에서 영웅적 명예와 죽음의 문제를 전면에 세운다면, 『오뒷세이아』는 전쟁 이후의 시간을 서사의 중심으로 이동시킨다. 오뒷세우스는 트로이에서 10년을 싸운 뒤 다시 10년 동안 바다를 떠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의 서사는 계속된다. 이때 영웅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적을 쓰러뜨리는 힘에서 자신의 삶을 다시 구성하는 능력으로 이동한다. 작품을 조직하는 핵심 개념인 nostos, 곧 귀향은 이러한 전환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수많은 섬과 괴물, 유혹과 재난을 통과하는 모험은 결국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한다. 이타카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돌아간 뒤 그곳에서 다시 오뒷세우스로 인정받는 것. 그래서 『오뒷세이아』의 귀환은 지도 위의 이동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갖는다. 20년의 부재를 통과한 인간에게 고향은 기억 속의 장소와 현실의 장소가 겹쳐지는 지점이며, 그가 되찾아야 할 것은 왕좌 하나가 아니라 아내와 아들, 아버지와 신하들, 그리고 자신이 왕으로 존재했던 공동체 안의 자리다.<br/><br/>이러한 귀환의 구조는 작품 후반부에 반복되는 인식(anagnōrisis)의 장면에서 가장 정교하게 드러난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를 알아보고, 에우리클레이아가 흉터를 알아보고, 아르고스가 주인을 알아보고, 라에르테스가 아들을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페넬로페가 남편을 알아본다. 이 장면들은 오뒷세우스의 정체성이 개인의 선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랜 부재를 통과한 사람은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스스로 기억하는 동시에, 자신을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과 다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숨김이 있었기에 인식이 가능하고, 부재가 있었기에 재회가 의미를 갖는다. 귀환은 한 사람의 이동으로 시작하지만 타인의 기억 속에서 그 사람이 다시 자신의 자리를 얻는 순간 완성된다.<br/><br/>페넬로페와의 재회는 이 구조를 가장 아름답고 치밀하게 압축한다. 20년 동안 남편을 기다린 페넬로페는 눈앞의 남자를 즉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가 요구하는 것은 얼굴이나 이름보다 확실한 증거다. 오뒷세우스는 그 시험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침대의 비밀을 이야기한다. 살아 있는 올리브나무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침대는 두 사람의 공동생활을 기억하는 하나의 물질적 흔적이다. 이 장면에서 정체성을 증명하는 것은 외부에서 확인할 수 있는 명성이 아니라 함께 살아온 시간 속에 축적된 기억이다. 오뒷세우스가 자신의 이름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필요했고, 페넬로페가 남편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두 사람만의 과거가 필요했다. 결국 귀환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는 일인 동시에 타인의 기억 속에 보존되어 있던 자신을 되찾는 일이다.<br/><br/>그렇다면 오뒷세우스라는 영웅을 영웅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서 『오뒷세이아』는 『일리아스』와 다른 영웅의 형식을 제시한다. 아킬레우스의 영웅성이 압도적인 신체적 능력과 명예의 추구에 있다면, 오뒷세우스의 핵심적인 능력은 mêtis다. 상황을 읽고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며, 주어진 조건 속에서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내는 지혜. 폴뤼페모스 앞에서는 자신을 ‘아무도 아닌 자’라고 소개하고, 세이렌의 노래를 듣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돛대에 묶으며, 이타카에 돌아온 뒤에는 거지의 모습으로 궁전에 들어간다. 그의 영웅성을 세계를 힘으로 굴복시키는 방식보다 세계의 규칙을 읽고 그 안에서 자신을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언제나 가장 강한 힘이 아니라 가장 적절한 판단일 수 있다는 사실을, 오뒷세우스는 자신의 긴 항해를 통해 증명한다.<br/><br/>그런 의미에서 폴뤼페모스 앞에서 선택한 ‘아무도 아닌 자’라는 이름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역설적인 표지가 된다. 영웅에게 이름은 명예와 정체성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표식이지만, 오뒷세우스는 살아남기 위해 그 이름을 지운다.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숨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익명성을 통과한 뒤 그는 다시 자신의 이름으로 돌아온다. 오뒷세우스의 정체성은 하나의 얼굴을 끝까지 유지하는 데서 성립하지 않는다. 수많은 얼굴을 통과하면서도 귀환의 방향을 잃지 않는 데서 성립한다. ‘아무도 아닌 자’가 되어야 했던 인간이 마침내 ‘오뒷세우스’라는 이름으로 돌아오는 과정 자체가 그의 정체성을 완성하는 것이다.<br/><br/>이때 오뒷세우스의 귀환을 가능케 하는 또 하나의 축이 텔레마코스와 페넬로페의 시간이다. 『오뒷세이아』에는 떠난 사람의 여행과 남겨진 사람의 여행이 동시에 흐른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가 없는 집에서 성장한 뒤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떠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성장을 경험한다. 아버지를 찾는 여행은 곧 아버지의 빈자리를 견디며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여행이 된다. 페넬로페 역시 수의를 짜고 풀며 시간을 지연하고, 구혼자들의 압박 속에서 자신의 선택권을 지켜내며, 돌아온 오뒷세우스마저 시험한다. 오뒷세우스가 바다 위에서 mêtis를 사용했다면 페넬로페는 궁전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같은 종류의 지혜를 발휘한다. 두 사람의 재회가 특별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서로를 기다린 두 사람은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자신들의 지혜와 기억을 보존했고, 그 지혜를 통해 상대방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br/><br/>그러나 귀환의 완성에는 복수와 폭력이라는 어두운 통로가 놓여 있다. 오뒷세우스는 자신의 집을 점거한 구혼자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가족은 다시 복수를 준비한다. 개인의 명예와 가문의 질서가 걸린 고대의 세계에서 그의 복수는 정당한 응징의 형태를 띠지만, 동시에 또 하나의 피를 부르는 행위이기도 하다. 피는 또 다른 피를 부르고, 개인의 복수는 공동체 전체를 다시 전쟁으로 끌어갈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오뒷세이아』는 영웅의 승리를 개인적인 복수의 완성으로 닫지 않는다. 마지막에 아테나가 개입해 양쪽의 폭력을 멈추고 이타카의 평화를 회복하면서 서사의 종착점은 복수의 성공에서 복수의 중단과 공동체의 회복으로 이동한다. 오뒷세우스가 집을 되찾는 일은 개인의 승리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의 자리를 되찾은 인간이 다시 공동체의 질서 안으로 들어갈 때 귀환은 사회적인 의미까지 획득한다.<br/><br/>이러한 구조 속에서 『오뒷세이아』가 문학사에 남긴 의미도 분명해진다. 이 작품은 전쟁과 영웅의 승리를 노래하는 서사시의 세계에 부재와 귀환, 가족과 기억, 정체성과 인식, 지혜와 폭력이라는 문제를 함께 배치한다. 이후 서양 문학이 반복해서 변주한 귀향자의 서사, 낯선 세계를 통과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인물, 오랜 부재 끝에 관계를 회복하는 이야기의 원형이 이미 이곳에서 높은 완성도로 구축되어 있다. 『오뒷세이아』가 하나의 고전을 넘어 문학의 원형으로 남아 있는 까닭은 단지 그 서사가 오래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이동을 삶의 구조로 확장하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br/><br/>그 오래된 텍스트를 오늘 읽는 과정에서는 번역 역시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조건이 된다. 수천 년 전 다른 언어로 불리고 전해진 노래가 지금의 독자에게 도착하기까지는 수많은 손과 목소리를 거쳐야 한다. 희랍어의 문장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는 언어에 대한 지식과 함께 그 시대의 신화와 인간관, 반복되는 수사와 서사적 리듬, 인물의 감정과 고대 서사시 특유의 언어적 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김헌 교수의 완역은 『오뒷세이아』를 오늘의 독자에게 전달하는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다. 오랜 시간 희랍어 원전을 붙들고 작업한 번역자는 호메로스의 언어를 현대적인 표현으로 지나치게 평탄하게 다듬기보다, 때로는 낯선 표현과 고대인의 사고방식까지 우리말 안에 남겨두는 길을 택했다. 원전의 문장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다른 시대의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던 방식까지 함께 읽는 일이다. 이 책에서 번역은 원문과 독자 사이를 가리는 투명한 막이 아닌, 고대의 언어와 사유를 오늘의 독자에게 건네는 적극적인 해석의 행위가 된다.<br/><br/>그래서 『오뒷세이아』에서 말하는 귀환은 과거로 되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변화를 통과한 인간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하나의 삶으로 연결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떠나기 전의 오뒷세우스와 돌아온 오뒷세우스는 같은 사람이면서 서로 다른 인간이다. 그가 기억하는 이타카와 실제로 마주한 이타카 역시 20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달라져 있다. 그럼에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고, 함께 살아온 시간을 증명하는 흔적이 있으며, 다시 자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관계가 남아 있다. 귀환은 과거의 모습을 복원하는 일이라기보다 그 모든 변화를 끌어안은 채 현재의 자리에서 다시 살아갈 근거를 획득하는 과정이다.<br/><br/>폴뤼페모스 앞에서 자신을 지우기 위해 선택했던 ‘아무도 아닌 자’라는 이름은 수천 년의 시간을 지나 오히려 모든 인간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이름을 잃고, 모습을 바꾸고, 낯선 세계를 통과하고, 오랜 부재를 견딘 끝에 다시 자신의 이름으로 돌아오는 인간. 오뒷세우스의 긴 항해가 보여주는 것은 영웅의 특별한 운명만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돌아가고 싶은 장소가 있고, 잃어버린 시간과 다시 이어지고 싶은 관계가 있으며, 오랜 시간을 지나 달라진 자신을 다시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아마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오래된 여행 중 하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 집은 떠나던 날의 모습으로 기다리지 않는다. 떠난 사람 역시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기억이 남아 있다면, 귀환은 가능하다.<br/><br/>아무도 아닌 자가 다시 자신의 이름을 얻고,<br/>떠났던 사람이 돌아온 자가 되고,<br/>기다리던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는 순간.<br/><br/>그때 귀환은 하나의 이동을 넘어 하나의 삶이 된다. 수천 년 전 호메로스가 노래한 오래된 귀환의 서사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자리, 그곳에는 마침내 자신의 이름으로 돌아온 한 인간이 서 있다. <br/><br/>✏️도서출판 을유문화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40/12/cover150/8932476462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401298</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가장 낯선 얼굴 - [타인의 얼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71442</link><pubDate>Tue, 25 Aug 2026 19:4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7144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102715X&TPaperId=1747144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99/34/coveroff/893102715x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102715X&TPaperId=1747144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타인의 얼굴</a><br/>아베 코보 지음, 이정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26년 07월<br/></td></tr></table><br/>인간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 거울을 통해서만 볼 수 있고, 타인의 표정을 통해서만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짐작할 수 있다. 몸에 붙어 있지만 외부에 속한 기관. 나에게 속해 있으면서도 나만의 것이 아니고, 가장 익숙한 신체의 일부이면서 타인의 시선 안에서 비로소 의미를 얻는 것. 아베 코보는 이 기이한 신체의 성질을 하나의 사고실험으로 바꾸어놓는다. 얼굴을 잃은 남자. 그리고 그 얼굴을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면. 이제 그는 자신을 보기 위해 타인의 눈을 필요로 한다. 자신을 숨기기 위해 만든 가면을 통해 오히려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시험하기 시작한다.<br/><br/>얼굴이 사라진 뒤 가장 먼저 달라지는 것은 거울 속 모습이 아니다. 사람들의 태도다. 같은 목소리와 같은 몸, 같은 기억을 가진 사람이 어느 날 얼굴만 잃었을 때 주변의 세계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를 대하지 않는다. 그 변화는 외모에 대한 편견이라는 말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얼굴이 한 사람을 알아보게 하는 표식이라면, 그 표식이 사라진 순간 사회가 그 사람에게 부여하던 자리 역시 달라진다.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과 타인이 알아보는 자신 사이에 차이가 생기고, 그때부터 ‘나’라는 말은 혼자서는 완성하기 어려운 단어가 된다.<br/><br/>가면은 이 상황에서 만들어진다. 흉터를 가리기 위한 물건이지만, 가면을 쓰고 나서야 주인공은 이전과 다른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타인은 그를 다른 사람으로 대하고, 그는 달라진 시선 속에서 평소의 자신에게는 허락하지 않았던 선택을 한다. 가면이 감추는 것은 얼굴에 남은 흔적만이 아니다. 얼굴이라는 표면 아래 얌전히 접혀 있던 욕망까지 함께 풀려 나온다. 그래서 가면 아래에 있는 얼굴만을 진짜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사회 속에서 인간은 상황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을 내보인다. 직장에서의 표정과 집에서의 표정, 처음 만난 사람 앞의 태도와 오래 알고 지낸 사람 앞의 태도가 모두 다르지 않은가.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이 사회적 관계를 무대 위의 연기에 비유했던 것처럼, 인간은 관계 속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연출한다. 어느 얼굴이 진짜인지 묻는 순간 오히려 답하기 어려워진다. 가면을 벗으면 본래의 자신이 나온다는 믿음 역시 하나의 가정일 뿐이다. 어쩌면 인간에게는 처음부터 하나의 얼굴만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br/><br/>이 기이한 이야기를 더욱 낯설게 만드는 것은 사건보다 그것을 기록하는 문장이다. 소설은 편지 같기도 하고, 조서 같기도 하며, 혼자 작성한 실험 보고서처럼 보이기도 한다. 충분히 격렬하고 불온한 사건들이 이어지는데도 문장은 침착하다. 비명을 지르는 문장이 아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비정상적인 일을 보고하는 문장. 기괴한 사건을 감정적으로 호소하지 않고 마치 실험 결과를 보고하듯 기록하기 때문에 독자는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기보다 그의 사고방식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섬뜩함은 사건의 잔혹성보다 그것을 너무도 논리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신의 태도에서 발생한다.<br/><br/>이런 문학적 감각에서 한국의 모더니스트이자 아방가르드 작가인 이상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두 작가를 직접적인 영향 관계로 묶을 이유는 없지만,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묘한 친연성이 있다. 이상이 일상적인 세계를 의식의 기묘한 구조 속으로 변환했다면, 아베 코보는 지극히 합리적인 사고를 따라가면서 현실을 낯설게 만든다. 설명 가능한 일을 너무 오래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설명의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방식이다. ‘일본의 카프카’라는 별칭 역시 현실의 논리를 따라가면서 현실을 낯설게 만드는 이러한 감각을 떠올리게 한다. 비현실적인 사건을 만들어내기보다 현실의 논리를 끝까지 따라가 비현실에 도달하는 것.<br/><br/>가면을 둘러싼 실험이 사랑의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소설의 불편함은 한층 선명해진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 사람의 시선을 필요로 하는 순간, 사랑은 하나의 검증 대상이 된다. 사랑받고 있는가. 그렇다면 어떤 모습으로 사랑받고 있는가. 얼굴이 달라져도 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상대의 마음을 알고 싶다는 욕망은 어느 순간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시험하려는 욕망으로 변한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타인을 분석하려는 태도로 바뀌는 순간이다.<br/><br/>레비나스에 의하면 타자는 나의 인식으로 전부 환원할 수 없는 존재다.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도 끝내 나와 다른 자리에 남아 있다. 그러나 주인공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관찰하고 가설을 세우고 실험한다. 그 과정에서 타인은 독립적인 존재라기보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거울처럼 변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그 사람을 자신의 세계 안에 가두는 구조를 만들어낸다. 사랑의 문제가 개인적인 감정의 실패에 머물지 않고 타인을 대하는 방식의 문제로 확장되는 이유다.<br/><br/>얼굴과 가면은 결국 같은 곳을 바라본다. 얼굴은 타인이 나를 인식하게 하는 표면이고, 가면은 내가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를 구성하는 표면이다. 하나는 외부에서 나를 규정하고, 다른 하나는 내가 외부를 향해 나를 조절한다. 그 사이에 놓인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타인의 시선을 필요로 한다. 자아가 홀로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얼굴에서 가면으로 넘어갈수록 선명해지는 이 소설의 불안이다.<br/><br/>그리고 여기서 기록이 다시 등장한다. 세 권의 노트는 자신의 경험을 객관화하려는 시도처럼 보이지만, 기록하는 순간 경험은 하나의 서사로 재구성된다. 주인공은 자신의 얼굴을 제작했듯 자신의 삶을 문장으로 제작한다. 얼굴이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표면이라면 기록은 자기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한 표면이 된다. 따라서 글쓰기도 하나의 가면이 될 수 있다. 자신을 설명하는 행위가 자신을 투명하게 만드는 대신, 또 다른 형태의 자신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얼굴과 가면이 몸의 표면을 다루는 장치라면, 기록은 의식의 표면을 다루는 장치다.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 거울을 필요로 하듯,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필요하다. 그러나 언어로 옮겨진 삶은 이미 한 번 선택되고 배열된 삶이다.<br/><br/>이렇게 보면 『타인의 얼굴』에서 실제로 해체되는 것은 얼굴 하나뿐이 아니다. 얼굴을 잃은 한 남자의 사건을 따라가면서 인간이 자신을 동일한 존재라고 믿는 방식도 조금씩 흔들린다. 얼굴을 바꾸면 타인의 시선이 달라지고, 타인의 시선이 달라지면 행동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면 자신에 대한 인식 역시 달라진다. 자아는 관계 바깥에 고정되어 있는 하나의 초상이 아니라, 타인과 마주하는 순간마다 달라지는 모습들 속에서 형성된다.<br/><br/>그래서 이 소설의 공포는 괴기나 폭력에서만 생겨나지 않는다. 가장 평범한 얼굴 하나가 얼마나 많은 타인의 시선 위에 놓여 있는지를 알아차리게 하는 데 있다. 매일 거울을 보며 확인하는 얼굴조차 온전히 자신의 소유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 기억하는 사람, 사랑하거나 외면하는 사람이 있는 까닭이다. 얼굴을 잃은 남자가 새로운 얼굴과 함께 찾아 헤매는 것은 타인의 세계 안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가면을 쓰면 새로운 삶이 가능해지는 듯하지만, 그 순간 또 다른 시선과 욕망이 따라온다.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기록하면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지만, 기록하는 순간 또 하나의 자신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타인에게서 자신을 확인하려 할수록 자신은 더 많은 얼굴을 갖게 된다.<br/><br/>얼굴은 내 몸에 있지만 나만의 것은 아니다. 가면은 내가 만들었지만 그 의미는 타인의 눈에서 결정된다. 기록은 내가 썼지만 그 안의 나는 문장 속에서 다시 만들어진다. 『타인의 얼굴』은 인간이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세 가지 표면을 하나씩 들여다보고 벗겨내면서,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사용해온 ‘나’라는 단어를 낯선 것으로 만든다. 그 아래에 도달하면 진짜 얼굴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베 코보가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그 반대편이다. 그 아래에서 발견되는 것은 완전한 ‘나’가 아니다. 타인의 시선과 기억과 언어를 거치며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존재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얼굴이라는 가장 익숙한 신체는 가장 낯선 것이 된다. 거울 속에서 매일 확인하면서도 스스로 직접 볼 수 없고, 타인이 알아보아야 비로소 사회적인 의미를 얻는 것. 내가 가진 얼굴이면서 내가 결정할 수 없는 얼굴. 평생 가지고 살아가면서도 단 한 번도 자신의 눈으로 본 적 없는 얼굴. 어쩌면 인간에게 가장 낯선 얼굴은 바로 그것이다.<br/><br/>✏️문예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99/34/cover150/893102715x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8993417</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숲 - [숲과 문명 - 숲이 물러난 자리에 새겨진 5,000년의 기록]</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69325</link><pubDate>Mon, 24 Aug 2026 19:3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6932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12130906&TPaperId=1746932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59/26/coveroff/k61213090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12130906&TPaperId=1746932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숲과 문명 - 숲이 물러난 자리에 새겨진 5,000년의 기록</a><br/>존 펄린 지음, 안진이 옮김 / 더퀘스트 / 2026년 07월<br/></td></tr></table><br/>역사는 인간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왔다. 왕조가 세워지고 제국이 무너졌으며, 전쟁과 혁명과 발명이 시대의 경계를 만들었다. 자연은 그 사건들이 일어날 수 있었던 배경으로 밀려났다. 강은 도시 옆을 흘렀고 숲은 도시 바깥에 있었다. 그저 인간이 살아갈 장소를 제공하는 풍경처럼. 존 펄린의 『숲과 문명』은 이 오래된 역사 서술에서 시선을 조금 옆으로 돌린다. 메소포타미아에서 그리스와 로마를 지나 베네치아와 영국,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이르기까지 문명이 움직여온 경로를 따라가며, 그 아래에 깔려 있던 물질을 추적한다. 왕의 이름보다 오래 살아남았고 제국의 국경보다 먼저 존재했던 것. 숲이다.<br/><br/>나무는 문명의 가장 오래된 재료였다. 집과 성벽과 선박을 만들었고, 장작과 숯이 되어 인간의 생활과 산업을 움직였다. 금속을 제련하는 데에도 막대한 목재가 필요했다. 숲을 걷어낸 땅은 농경지가 되었고, 그곳에 남아 있던 나무의 뿌리는 토양을 붙들고 물의 흐름을 조절했다. 인간이 숲에서 얻은 것은 목재만이 아니었다. 문명이 살아갈 수 있는 물질적 조건 전체가 숲과 얽혀 있었다. 펄린이 보여주는 역사의 흥미로운 점은 서로 다른 문명들이 이 사실을 거의 같은 방식으로 경험했다는 데 있다. 숲이 풍부하면 도시가 성장했고, 인구와 산업이 커질수록 더 많은 나무가 필요했다. 아테네의 해군력도, 로마의 거대한 건축물도, 베네치아의 선박도 숲을 소비하며 유지되었다. 영국은 목재와 숯의 부족을 석탄으로 돌파하면서 산업혁명의 문을 열었다. 문명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전쟁과 정치의 기록보다 나무의 수명이 더 중요한 연대기가 된다.<br/><br/>산림 파괴를 문명의 부작용이라고 부르기에는 이 구조가 지나치게 정확하다. 인간은 숲을 파괴한 뒤에야 문명을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문명을 발전시키는 바로 그 과정에서 숲을 소비했다. 농지를 넓히기 위해 나무를 베고, 도시를 만들기 위해 목재를 가져오고, 금속을 생산하기 위해 숲을 태웠다. 각각의 선택은 당시의 삶 안에서는 합리적이었다. 문제는 그 합리성이 축적되는 방식에 있었다. 나무 한 그루가 사라지는 순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숲이 줄어들면 토양을 붙들던 뿌리가 사라지고, 흙이 물에 쓸려가며, 강과 항구가 변하고, 농업의 생산성이 떨어진다. 인간이 계산한 것은 나무의 가치였지만 자연이 치른 비용은 토양과 물과 생명의 형태로 나타났다. 문명은 자신의 성장에 필요한 것을 정확하게 계산하면서도, 그 성장을 가능하게 한 조건의 가격에는 무심했다.<br/><br/>여기에서 ‘발전’이라는 단어의 이상한 성격이 드러난다. 인간은 부족함을 만날 때마다 그것을 돌파했다. 목재가 모자라면 더 먼 숲으로 갔고, 연료가 부족하면 새로운 연료를 찾았으며, 생산량의 한계가 나타나면 더 효율적인 기술을 만들었다. 영국의 석탄 사용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목재라는 오래된 한계를 벗어난 순간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커질수록 인간이 소비할 수 있는 세계의 크기도 커졌다. 기술은 필요를 충족시키는 장치인 동시에 필요의 규모를 확장하는 장치가 되었다. 더 효율적인 생산은 더 많은 생산을 가능하게 했고, 더 많은 생산은 새로운 소비를 만들어냈다. 한계를 넘어선다는 말은 때로 한계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더 멀리 있는 한계까지 달려가는 일이었다.<br/><br/>그래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단순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로 설명하기도 어렵다. 인간은 숲을 이용했지만 동시에 숲이 유지하는 토양과 물에 의존했다. 자연에서 자원을 꺼내오는 능력이 커질수록 인간은 자신이 자연과 분리되어 있다는 착각을 강화했다. 산은 광산이 되고 강은 수력원이 되며 숲은 목재 저장고가 된다. 하나의 살아 있는 세계가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의 목록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 목록에서 빠진 것들이 인간의 삶을 떠받치고 있었다. 숲이 제공하는 그늘과 물, 토양과 생물다양성은 목재의 가격표에 들어가지 않는다. 인간에게 쓸모가 있는가를 기준으로 자연을 분류하는 순간, 인간에게 직접 쓰이지 않는 것들은 너무 쉽게 없는 것으로 취급된다.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라는 오래된 관념은 결국 인간이 자연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방식이기도 했다.<br/><br/>펄린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또 하나의 장면은 이동이다. 숲이 고갈되면 인간은 다음 숲을 찾았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지중해로, 유럽에서 대서양 너머로 자원의 중심이 옮겨가는 동안 새로운 산림은 새로운 문명의 연료가 되었다. 고갈은 이동으로 연기할 수 있었다. 한 지역의 풍요가 사라지면 다른 지역의 풍요를 가져오면 됐다. 하지만 현대의 문명은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움직일 수 없다. 산업과 교역은 지구 전체를 하나의 소비망으로 연결했고, 한 지역에서 벌어진 산림의 변화가 다른 지역의 생산과 소비와 기후에까지 이어진다. 무엇보다 지구 바깥에는 아직 사용하지 않은 또 하나의 숲이 없다. 오랫동안 인간은 부족함을 만나면 장소를 바꾸었다. 이제 장소를 바꾸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시대에 도착했다.<br/><br/>그렇다면 이제 문명의 능력을 무엇으로 측정해야 할까. 더 많은 땅을 경작하는 능력, 더 많은 철을 생산하는 능력, 더 많은 에너지를 끌어내는 능력, 더 빠르게 이동하고 더 많은 상품을 만들어내는 능력. 인류는 오랫동안 이것을 발전의 지표로 삼아왔다. 풍요는 늘 ‘얼마나 더 많이 가질 수 있는가’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숲과 문명』이 보여주는 역사는 그 풍요의 바닥에 무엇이 깔려 있었는지를 되묻는다. 성장에는 자원이 필요했고, 자원은 언젠가 고갈되었다. 인간은 고갈을 새로운 자원으로 해결했고, 새로운 자원은 다시 더 큰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이 순환을 멈추지 않는 한 문명의 외연은 계속 넓어질 수 있지만, 그 외연을 지탱하는 세계의 면적은 무한하지 않다.<br/><br/>어쩌면 문명의 역사는 자연을 정복해온 역사가 아니라 자연의 한계를 계속 바깥으로 밀어내온 역사였는지도 모른다. 숲이 사라지면 다른 숲으로, 목재가 부족하면 다른 연료로, 땅이 부족하면 다른 대륙으로. 인간은 언제나 다음을 찾아냈다. 그 능력이 인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동시에 그 능력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의존하는 세계의 한계를 잊어버렸다. 이제는 다음 숲이 없다. 다음 대륙도 없다. 바깥으로 밀어낼 자연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야말로 지금의 문명이 마주한 가장 낯선 조건이다.<br/><br/>그래서 『숲과 문명』은 숲을 보존해야 한다는 결론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 책이 오래된 산림의 역사를 통해 건드리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문명이라고 불러왔는가에 관한 문제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멀리 이동하고, 자연이 가진 한계를 기술로 돌파해온 능력. 우리는 그것을 발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한계를 돌파하는 능력만으로 문명을 평가한다면, 그 문명이 자신의 생존 조건까지 소비해버리는 순간에도 여전히 발전이라고 말해야 한다. 어쩌면 문명의 수준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져올 수 있는가보다, 무엇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가에서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른다.<br/><br/>숲은 인간보다 먼저 존재했고 인간보다 오래 살아남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오랫동안 숲을 자신의 역사에서 주변부로 밀어냈다. 펄린은 그 주변부를 다시 중심으로 가져온다. 그러자 우리가 발전이라고 불러온 수천 년의 시간이 나무의 성장과 벌목, 토양의 소실과 새로운 숲으로의 이동이라는 물질의 역사와 포개진다. 인간의 문명은 숲 위에서 시작되었고, 숲을 소비하며 몸집을 키웠다. 이제 그 문명이 정말 오래 지속될 수 있는지는 얼마나 더 많이 소비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소비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얼마나 배울 수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문명의 다음 장에는 아마 새로운 숲의 이름보다, 더 이상 숲을 소모하지 않기 위해 인간이 포기해야 할 것들의 이름이 먼저 적혀야 할 것이다.<br/><br/>✏️도서출판 북퀘스트로부터 오퀘스트라 4기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59/26/cover150/k61213090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7592604</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누가 누구의 알리바이가 되었는가 - [알리바이의 해부학]</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65531</link><pubDate>Sat, 22 Aug 2026 15: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6553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72130239&TPaperId=1746553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15/30/coveroff/k97213023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72130239&TPaperId=1746553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알리바이의 해부학</a><br/>애슐리 엘스턴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08월<br/></td></tr></table><br/>정오부터 자정까지 단 열두 시간. 남편이 숨기고 있는 비밀을 파헤치려는 캐밀과, 그의 남편이 10년 전 사고의 진실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오브리는 서로의 삶을 대신 살아주기로 한다. 오브리는 캐밀의 옷을 입고 휴대전화를 들고 자동차를 운전하며 캐밀의 이름으로 세상 속을 걸어간다. 그동안 캐밀은 남편의 감시에서 벗어나 자신이 알고 싶은 진실을 찾아간다. 서로의 삶을 잠시 바꾸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한 계획이지만, 다음 날 아침 캐밀의 남편이 살해된 채 발견되면서 두 사람의 공모는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시작한 일이 오히려 알리바이의 의미 자체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알리바이의 해부학』은 이 기묘한 설정에서 출발해 범인을 찾는 과정과 한 사람을 믿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를 빠른 속도로 풀어낸다.<br/><br/>알리바이는 시간과 장소를 증명하는 장치다. 그러나 그 증명이 성립하려면 먼저 하나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누가 어디에 있었는지, 무엇을 했는지,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기록은 무엇을 보여주는지. 여러 조각이 한 방향으로 맞물릴 때 비로소 사람들은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결국 알리바이의 힘은 진실 그 자체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진실처럼 보이도록 배열된 정보에서 발생한다. 사실은 혼자서 이야기를 만들지 않는다. 누군가가 사실을 선택하고, 순서를 정하고, 의미를 부여할 때 하나의 서사가 된다. 같은 사건도 어떤 장면을 먼저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읽히고, 무엇을 말하지 않느냐에 따라 새로운 의미가 생겨난다. 『알리바이의 해부학』은 바로 이 과정을 스릴러의 속도 안에 숨겨놓는다. 독자는 사건의 진실을 한 번에 전달받는 대신 여러 사람의 말과 행동을 통과하며 하나의 그림을 조립한다. 그림이 완성될수록 처음에 보았던 조각들의 의미가 달라진다. 독자는 진실에 가까워지는 동시에 자신이 믿었던 이야기에서 조금씩 멀어진다.<br/><br/>이 구조는 자연스럽게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인간관계에서 우리가 얻는 정보 역시 언제나 부분적이다. 상대가 말해준 기억, 함께 보낸 시간, 반복해서 관찰한 습관,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들이 모여 한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그 이미지가 오래 유지되면 우리는 그것을 실제 인물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사람의 내면에는 관찰할 수 없는 시간이 존재한다. 혼자 있을 때의 생각, 말하지 않기로 선택한 기억,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한 감정은 타인의 시야 밖에 놓여 있다. 한 인간의 정체성에는 자신이 살아온 시간과 타인이 기억하는 시간이 함께 포개져 있다. 내가 기억하는 나와 타인이 기억하는 나는 언제나 조금씩 다르고, 내가 보여주고 싶은 나와 실제로 살아가는 나 사이에도 간격이 생긴다. ‘나’라는 존재는 혼자 완성하는 자아인 동시에 타인의 기억 속에서 계속해서 다시 만들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br/><br/>오브리가 캐밀의 삶을 대신 살아가는 장면은 이 문제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름과 물건, 자동차와 휴대전화, 익숙한 행동 몇 가지가 한 사람의 존재를 증명하는 표지가 된다. 외부에서 바라본 인간은 놀라울 만큼 많은 흔적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그 흔적들이 아무리 정교하게 복제되어도 한 사람의 기억과 경험까지 그대로 옮겨갈 수는 없다. 누군가가 알고 있는 나, 내가 기억하는 나, 내가 보여주고 싶은 나 사이에는 각기 다른 얼굴이 놓인다. 오브리가 캐밀의 삶을 대신 살아가는 열두 시간은 바로 그 차이를 극단적인 상황으로 밀어붙인다. 한 사람의 정체성이 얼마나 단단한 것인지보다 그것을 판단하는 타인의 믿음이 얼마나 쉽게 움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정체성에는 두 개의 시간이 흐른다. 내가 살아온 시간과 타인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시간. 둘은 완전히 포개지지 않으며, 그 사이에서 한 사람의 모습이 끊임없이 변한다.<br/><br/>캐밀과 벤의 관계에서는 그 거리가 감시의 형태로 나타난다. 가까운 관계에서 상대를 알고 싶다는 욕망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 욕망이 상대의 위치와 행동을 지속적으로 확인하려는 행위로 변하면 관계의 공간은 달라진다. 미셸 푸코가 감시의 구조를 설명하며 주목했던 것도 그 시선이 개인의 내면으로 스며드는 과정이다. 감시의 힘은 감시자가 눈앞에 있을 때보다 그 시선이 개인의 내면으로 들어왔을 때 더욱 강해진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순간 사람은 스스로를 관리하기 시작한다. 무엇을 말할지 고르고, 어디에 갈지 계산하고,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먼저 생각한다. 결국 타인의 시선은 행동을 제한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까지 바꾼다. 그런 환경에서 오브리의 열두 시간은 일종의 역할 교체다. 감시받는 사람의 자리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면서 고정되어 있던 관계의 시선이 잠시 뒤집힌다. 동시에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야 한다는 역설도 생겨난다. 자유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빌리는 이 설정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얼마나 타인의 시선 속에서 구성하는지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br/><br/>소설의 긴장은 현재에서 과거로 뻗어간다. 현재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오래전 사건을 들여다봐야 하고, 과거의 사건을 이해하려면 그 시간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이야기를 따라가야 한다. 기억은 과거를 그대로 보관하는 기록물이 아니다. 현재의 감정과 이해관계에 따라 같은 장면의 의미가 달라지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 갈라진다. 한 가족 안에서 같은 사건을 공유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누군가는 과거를 삶의 중심에 놓고, 누군가는 그 과거를 봉인한 채 현재를 살아간다. 사건은 하나지만 그 사건이 각자의 삶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제각각이다. 그래서 오래된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지기보다 오히려 현재의 선택을 설명하는 힘으로 변한다. 과거는 뒤에 놓인 시간이 아니라 현재의 사람을 움직이는 또 하나의 현재가 된다.<br/><br/>진실을 향해 움직이는 과정에서는 각자가 지키고 싶은 것이 달라진다. 누군가에게 진실은 반드시 밝혀야 할 사실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삶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이다. 이 차이는 인물들의 행동을 선명한 선악의 구도로 정리하기 어렵게 만든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이야기를 선택하고, 그 이야기를 믿을 만한 형태로 만들어간다. 이때 거짓말은 삶을 감추는 도구인 동시에 삶을 계속하기 위한 방어가 된다. 하나의 거짓말이 또 다른 침묵을 만들고, 침묵이 새로운 선택을 요구하면서 사람들의 관계와 기억은 복잡하게 얽힌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에서 진실을 찾는 일은 사건의 정답을 확인하는 작업을 넘어, 서로 다른 삶의 서사를 읽어내는 일이 된다.<br/><br/>이 지점에서 제목의 ‘해부학’이라는 단어가 의미심장해진다. 해부는 겉으로 드러난 형태를 보는 데서 멈추지 않고 내부의 구조를 살피는 행위다. 『알리바이의 해부학』 역시 알리바이 하나를 붙잡고 그 안에 어떤 시간과 기억과 관계가 들어 있는지를 차례로 들여다본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는 그 사람이 지키려는 것이 있고, 특정한 장소에는 지나간 사건의 흔적이 있으며, 한 사람의 침묵에는 말하지 않기로 선택한 역사가 들어 있다. 알리바이를 해부한다는 것은 사건의 외피를 벗겨내는 동시에 그 사건을 둘러싼 인간의 구조를 살피는 일이다. 범죄의 진실을 찾는 과정이 인간의 기억과 관계, 욕망과 두려움을 들여다보는 과정으로 넓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br/><br/>그렇게 바라보면 ‘누가 누구의 알리바이가 되었는가’라는 문장은 살인사건을 향한 질문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향한 문장으로 확장된다. 우리는 타인의 삶을 완전히 알 수 없고, 그 사람이 보여준 장면들을 이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상대가 건네준 이야기와 내가 기억하는 모습이 겹쳐질 때 비로소 한 사람이 완성된다. 그 과정에는 선택이 개입한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을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침묵할지, 어떤 모습으로 타인에게 남을지를 결정하는 선택이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모든 시간을 타인에게 건넬 수 없기에 결국 몇 개의 장면을 골라 자신을 설명한다. 그것이 기억이 되고, 변명이 되고, 때로는 진실이 된다. 삶 전체를 증명할 수 없는 인간에게 이야기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한 가장 오래된 알리바이다.<br/><br/>『알리바이의 해부학』은 그 이야기가 얼마나 쉽게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빠른 호흡의 스릴러 안에 담아낸다. 범인을 찾는 동안 독자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사건의 단서만이 아니다. 누군가의 말에 부여했던 신뢰, 한 사람에 대해 완성해놓은 이미지, 너무 익숙해서 의심하지 않았던 관계까지 함께 다시 살펴보게 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비밀이 늦게 드러나는 까닭도 결국 여기에 있을 것이다. 가까움은 많은 것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익숙함이라는 필터를 만든다. 오래 알고 지낸 얼굴일수록 우리는 그 얼굴에 익숙한 의미를 먼저 덧씌운다. 신뢰는 관계를 이어가는 힘이면서 상대가 건네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작품을 따라가는 동안 의심의 방향은 사건에서 관계로, 관계에서 자기 자신으로 옮겨간다. 누군가를 믿는 방식에는 그 사람에 대한 정보만큼이나 내가 가진 기억과 욕망, 기대가 함께 들어 있기 때문이다.<br/><br/>결국 『알리바이의 해부학』이라는 제목은 사건의 핵심을 설명하는 동시에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까지 건드린다. 알리바이를 해부한다는 것은 누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밝히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어떤 이야기로 만들었는지, 다른 사람은 그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 믿음이 관계 속에서 어떤 형태로 굳어졌는지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누가 누구의 알리바이가 되었는가. 처음에는 범인을 찾기 위한 질문이었던 문장이 마지막에는 사람을 믿는 방식에 관한 문장으로 넓어진다. 우리가 타인의 삶을 알고 있다고 믿을 때, 그 믿음에는 언제나 그 사람이 보여준 이야기와 내가 완성한 해석이 함께 들어 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몇 개의 장면으로 남는다. 그 장면들이 모여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되고, 우리는 그 이야기의 일부를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수많은 알리바이가 만들어진다. 어떤 것은 진실을 지키고, 어떤 것은 진실을 감추며, 어떤 것은 한 사람을 오래도록 다른 모습으로 기억하게 만든다. 『알리바이의 해부학』은 그 복잡한 구조를 살인사건의 속도 안에서 세밀하게 해부한다.<br/><br/>✏️도서출판 문학동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15/30/cover150/k97213023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0153080</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편리함과 우연 사이의 간격 - [매일 떠나는 사람 - 태원준 여행 산문집]</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63796</link><pubDate>Fri, 21 Aug 2026 15: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6379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32130211&TPaperId=1746379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44/35/coveroff/k63213021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32130211&TPaperId=1746379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매일 떠나는 사람 - 태원준 여행 산문집</a><br/>태원준 지음 / 김영사 / 2026년 07월<br/></td></tr></table><br/>여행을 준비하는 일. 낯선 곳으로 떠나기 위해 우리는 그곳에 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수집한다. 목적지를 검색하고, 숙소를 예약하고, 이동 경로를 확인하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까지 미리 상상해본다. 낯섦을 통제할수록 여행은 편안해진다. 그러나 태원준의 『매일 떠나는 사람』에서 오래 기억되는 장면들은 대개 그 통제가 실패한 자리에서 시작된다. 공사 중인 관광지를 만나거나, 예상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거나, 계획에 없던 사람과 마주치는 순간들. 25년 동안 109개국 900여 도시를 여행한 저자는 여행을 완벽하게 설계하는 법보다 계획이 어긋난 뒤에도 다음 장면으로 나아가는 법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 책은 여행지를 소개하는 산문집이라기보다, 예측할 수 없는 세계를 통과하며 축적된 한 여행자의 경험론에 가깝다.<br/><br/>여행은 제법 잘 짜인 계획의 산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1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것이 여행이라고 덧붙인다. 계획을 훼방 놓는 변수는 여행의 성가신 오류가 아니라 평범한 일정을 하나의 사건으로 만드는 요소가 된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 진행된다면 여행은 오히려 금세 단조로워질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여행에서의 실패와 우연은 서로 반대편에 놓여 있지 않다. 같은 변수에서 하나는 허탕으로, 다른 하나는 뜻밖의 행운으로 나타날 뿐이다. 여행자는 그 차이를 미리 결정할 수 없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계획의 완성도가 아니라 계획 밖으로 밀려난 뒤 무엇을 보고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있다. 삶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미래를 구체적으로 설계할수록 통제할 수 없는 사건을 더 선명해지고, 지나고 나서야 그 사건들이 삶의 방향을 바꾸어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태원준이 여행에서 길러온 능력은 모든 변수를 제거하는 기술이 아니라, 변수가 생긴 뒤에도 여행을 계속할 수 있는 감각에 있다.<br/><br/>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의 편리한 여행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갖는다. 스마트폰 하나면 길을 찾고, 번역하고, 숙소를 구하고, 현지의 음식과 명소까지 미리 알아볼 수 있다. 낯선 곳에 가면서도 낯선 상태에 오래 머물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여행의 우연은 대개 그 반대편에서 발생한다. 길을 몰라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야 했던 순간, 잘못 들어선 골목, 예상과 달랐던 장소, 계획에 없던 대화가 여행을 개인적인 기억으로 만든다. 미리 알아볼 수 있는 정보가 많아질수록 여행은 효율적으로 변하지만, 효율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경험까지 함께 얻는 것은 아니다. 태원준이 오래된 여행의 방식을 회상하는 이유도 과거가 낭만적이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을 미리 알아낼 수 없었던 시절에는 세계가 지금보다 훨씬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었던 까닭이다. 여행은 낯선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떠나는 행위인데, 정작 그 낯섦을 지나치게 잘 관리하는 순간 여행의 중요한 일부가 사라질 수도 있다. 편리함과 우연 사이의 간격이 이 책에서 여행을 바라보는 하나의 중요한 기준으로 읽히는 이유다.<br/><br/>낯선 곳에 도착한 여행자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모르는 사람인지 깨닫게 된다. 저자가 말하듯 여행자는 그곳에 막 첫발을 들인 순간 현지의 열 살짜리 아이보다도 부족하다.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방법부터 검색해야 하고, 익숙한 언어와 교통체계도 사용할 수 없다. 평소에는 혼자서 해결하던 사소한 일들이 낯선 도시에서는 누군가의 설명과 도움을 필요로 한다. 여행은 독립적인 인간이라는 감각을 잠시 걷어내고, 인간이 얼마나 많은 타인의 도움 위에서 일상을 살아가는지를 드러낸다. 길을 알려준 사람, 서툰 언어를 기다려준 사람, 난감한 여행자에게 먼저 손을 내민 사람. 평범한 일상에서는 작게 지나쳤을 호의가 낯선 세계에서는 여행을 계속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 된다.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여행자의 특별한 능력은 혼자 살아남는 능력보다 오히려 도움을 받을 줄 아는 능력에 가까워 보인다.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타인은 경쟁하거나 경계해야 할 대상에서 함께 세계를 통과하는 사람으로 모습을 바꾼다.<br/><br/>여기에서 이 책의 여행관은 한 단계 더 넓어진다. 여행지에서 도움을 받은 사람은 언젠가 자신의 도시에서 다른 여행자를 만난다. 저자는 귀국하는 순간 “나는 그들이 되고, 그들은 내가 된다”(226쪽)고 말한다. 이 문장은 여행에서 사람의 위치가 얼마나 쉽게 뒤집히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지금은 길을 알려주는 현지인이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길을 잃은 여행자가 될 수 있고, 오늘 도움을 받는 사람도 내일 누군가에게 도움을 건넬 수 있다. 여행은 이처럼 ‘우리’와 ‘타인’을 고정된 구분으로 두지 않는다. 국적과 언어, 익숙함과 낯섦은 한 사람이 어느 위치에 서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여행을 오래 한 사람에게 세계는 수많은 나라의 목록으로 남기보다 수많은 관계의 망으로 남게 된다. 낯선 사람에게 받은 작은 친절이 다른 낯선 사람에게 건네는 행동으로 이어질 때, 여행에서의 경험은 개인의 추억을 넘어 삶의 태도가 된다.<br/><br/>여행이라는 행위에는 ‘집’이라는 감각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매일 다른 곳으로 떠나는 사람에게 집은 그리운 하나의 주소로 남아 있을까. 한곳에 머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의 눈에는 세계 곳곳을 이동하는 삶이 때때로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태원준의 여행을 따라가다 보면 오히려 반대의 가능성이 보인다. 집이 하나의 장소에만 고정되어 있다면 계속 떠나는 삶은 필연적으로 집을 잃는 일이겠지만, 여행 속에서 만난 사람과 풍경, 다시 꺼내보는 기록까지 삶의 일부가 된다면 집의 범위 역시 조금씩 넓어질 수 있다. 어디에서든 잠시 머물고, 그곳에서 관계를 만들고, 다시 떠나는 삶에는 장소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세계를 낯선 곳으로만 남겨두지 않는 감각이다.<br/><br/>여행이 지나간 자리에는 장소에 대한 기억과 함께 그것을 바라보던 관점의 변화가 남는다. 여행 전에는 하나의 기준으로 보이던 삶이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로 보이고, 낯선 사람으로만 여겼던 존재에게서 도움을 받으며 타인에 대한 거리도 달라진다. 여행자는 세계의 크기를 넓히는 동시에 자신이 가진 세계관의 크기를 다시 측정하게 된다. 사진으로 남는 풍경보다 오래가는 것은 그 풍경을 바라보던 시선의 변화일 것이다. 태원준이 25년 동안 축적한 여행의 기록이 의미를 갖는 것도 수많은 장소를 다녀왔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그곳에서 만난 우연과 불편함, 친절과 실패가 쌓이면서 한 사람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br/><br/>『매일 떠나는 사람』의 ‘매일’은 이동의 빈도를 뜻하는 말로만 읽히지 않는다. 매일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은 익숙한 세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계속 살피는 사람이다. 계획을 세우되 계획이 틀어질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편리함을 누리면서도 우연이 들어올 자리를 남겨두며, 낯선 사람에게 도움을 받은 기억을 다시 다른 누군가에게 건네는 사람. 그렇게 여행은 출발과 귀환 사이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한 번 넓어진 시선은 일상으로 돌아온 뒤에도 세계 곳곳에서 만난 사람과 사건을 새롭게 해석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한 번 길 위에서 만난 우연과 사람들은 여행이 끝났다고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 돌아온 뒤에도 그 기억은 익숙한 하루의 틈에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하고, 타인의 호의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다음 만남을 준비하게 한다. 『매일 떠나는 사람』이 말하는 여행은 그래서 출발과 귀환 사이에 갇혀 있지 않다. 매일의 삶 속에서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일, 그때부터 여행은 또 다른 모습으로 계속된다. <br/><br/>길 위에서는 익숙한 것들의 질서가 잠시 느슨해진다. 계획해둔 경로에서 벗어나고, 모르는 사람에게 길을 묻고, 낯선 이의 친절에 기대어 하루를 건너면서 혼자 살아간다는 감각도 함께 흔들린다. 『매일 떠나는 사람』은 그 틈에서 여행의 진짜 의미를 건져 올린다. 여행을 단순한 관광이나 소비의 방식으로 바라보지 않고, 예상할 수 없는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자신이 가진 삶의 반경을 넓혀가는 경험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목적지보다 길 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오래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 계획에서 벗어난 순간을 견디기 어려운 사람에게 이 책은 꽤 좋은 동행이 되어줄 것이다. 특히 낯선 사람의 작은 호의가 한 사람의 하루를 얼마나 다르게 만들 수 있는지, 그리고 여행하지 않는 날에도 세계를 새롭게 바라볼 방법을 찾고 싶은 독자라면 태원준이 25년 동안 모아온 길 위의 장면들 속에서 자신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여행의 형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떠남은 국경을 넘는 일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때로는 익숙한 하루 한가운데서 잠시 발걸음을 늦추고, 늘 보던 세계에 낯선 빛 하나를 들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br/><br/>✏️도서출판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44/35/cover150/k63213021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8443599</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마-리-아- - [페루에서 온 신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61864</link><pubDate>Thu, 20 Aug 2026 15:3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6186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82130704&TPaperId=1746186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26/16/coveroff/k78213070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82130704&TPaperId=1746186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페루에서 온 신사</a><br/>안드레 애치먼 지음, 홍한별 옮김 / 비채 / 2026년 07월<br/></td></tr></table><br/>안드레 애치먼의 『마리아나』와 『페루에서 온 신사』는 원래 한 권의 책에 함께 실린 두 중편이다. 비채가 두 작품을 나란히 소개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마리아나』가 사랑의 종결 이후를 바라본다면, 『페루에서 온 신사』는 죽음과 시간까지 건너 사랑이 다시 돌아올 가능성을 상상한다. 하나는 이별 뒤의 기억을, 다른 하나는 상실 이후에도 지속되는 욕망을 다룬다. 그러나 두 작품의 관심은 사랑의 시작이나 연애의 사건 자체에 머물지 않는다. 애치먼이 오래 응시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경험을 통과한 인간의 변화다. 누군가를 사랑한 뒤에는 그 사람을 만나기 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관계가 사라진 뒤에도 그 변화만은 현재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두 작품을 관통한다.<br/><br/>『마리아나』에서 이 문제는 편지라는 형식을 통해 선명해진다. 이탈리아에서 이타마르를 만난 마리아나는 짧고 강렬한 사랑을 경험하고, 관계가 끝난 뒤 그에게 편지를 쓴다. 하지만 이 편지에서 중요한 것은 수신자의 응답이 아니다. 이미 떠난 사람에게 계속 말을 거는 행위 자체가 마리아나의 시간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함께했던 장면과 말들을 되짚으며 사랑이 시작된 순간부터 이별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반복해서 통과한다. 과거는 지나간 사건으로 정리되지 않고 현재의 의식 속에서 계속 수정된다. 이타마르가 떠난 뒤에도 마리아나의 삶에는 그와 함께 있을 때 발견했던 욕망과 감각,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자기 자신의 모습이 남는다. 그래서 그녀가 상실한 것은 한 사람만이 아니다. 한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된 자기 자신 역시 상실의 일부가 된다.<br/><br/>이때 애치먼의 사랑은 상대방을 소유하는 관계와 상당한 거리를 둔다. 타인은 나의 삶에 들어와 나를 변화시키는 존재이며, 그 변화는 상대가 떠난다고 해서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의 경험이 한 인간의 자기 인식을 바꾸어놓는다면 관계의 지속 여부만으로 그 사랑의 성패를 판단하기도 어려워진다. 마리아나가 이타마르를 계속 기억하는 이유 역시 그가 특별히 완전한 사람이어서라기보다, 그를 통해 자신 안에 존재하던 무엇인가를 처음 경험했기 때문이다. 사랑의 대상은 기억 속에서 점차 하나의 인물인 동시에 하나의 시기가 된다.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 속에서만 가능했던 자아의 형태까지 함께 기억되는 것이다.<br/><br/>『마리아나』의 편지는 연애편지이면서 기억의 형식이기도 하다. 애치먼에게 기억은 지나간 시간을 보관하는 기능보다 현재의 감정을 다시 구성하는 힘에 가깝다. 마리아나는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그때의 자신을 다시 만난다. 같은 사건도 현재의 감정에 따라 다르게 읽히고, 한때는 사랑의 증거였던 말이 나중에는 이별의 징후로 바뀐다. 사랑했던 순간은 과거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기억하는 사람의 현재가 달라질 때마다 과거 역시 조금씩 모습을 바꾼다. 그래서 사랑의 종결 이후에 남는 것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다. 현재의 자신을 계속 만들어가는 하나의 시간이다.<br/><br/>『페루에서 온 신사』는 이 사고를 현실의 시간 바깥까지 확장한다. 아말피 해안의 호텔에서 우연히 만난 라울은 타인의 통증을 치유하고 그들이 숨겨온 삶의 일부를 알아맞히는 기묘한 인물이다. 오래전 사랑했던 마리아를 사고로 잃은 그는 수십 년이 지난 뒤 만난 마고에게서 그녀의 흔적을 발견한다. 두 사람의 만남은 환생이라는 초현실적인 설정을 통해 진행되지만, 애치먼이 바라보는 것은 환생의 진위보다 한 인간에게 과연 현재의 삶만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다. 라울이 말하는 ‘그림자 자아’는 실제로 살아온 나의 뒤편에 존재하는 수많은 가능성의 나를 가리킨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존재했을 사람, 다른 시간에 누군가를 만났다면 경험했을 사랑, 살아보지 못한 삶까지도 현재의 자아를 구성한다는 발상이다. 사랑은 이처럼 한 사람의 현재를 과거와 미래, 그리고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까지 이어놓는다.<br/><br/>두 작품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시간을 바라본다. 마리아나는 이미 끝난 사랑을 기억 속에서 반복하며 ‘다르게 될 수 있었던 우리’를 상상한다. 라울은 시간 자체를 건너 ‘다시 만날 수 있는 우리’를 믿는다. 전자가 기억을 통해 과거의 가능성을 복원한다면 후자는 환생을 통해 가능성을 현재로 불러온다. 현실에서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충분히 가능했던 세계, 애치먼이 ‘그럴 수도 있었던 것’과 ‘그럴 수도 있는 것’으로 설명해온 가능성의 영역이 두 작품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셈이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삶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선택하지 않은 길과 만나지 못한 사람, 하지 못한 말과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미래까지 끌어안은 채 현재를 살아간다. 사랑은 특히 이 가능성의 영역을 넓힌다. 사랑에는 언제나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함께 들어 있기 때문이다.<br/><br/>그러나 사랑을 시간 너머로 연장하려는 욕망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페루에서 온 신사』에서 라울이 마고를 마리아와 겹쳐 바라보는 순간, 과거의 사랑을 보존하려는 마음은 현재의 한 사람을 과거의 이미지 안에 가둘 위험을 갖는다. 사랑했던 사람을 기억하는 일과 눈앞의 사람을 그 사람의 대체물로 바라보는 일은 다르다. 애치먼은 이 차이를 명확한 윤리적 선언으로 설명하기보다 라울과 마고 사이의 불안정한 관계 속에 배치한다. 과거를 잃지 않으려는 욕망이 현재를 어떻게 바라보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랑에는 소유하려는 충동이 따라붙지만, 상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의 기억과 욕망으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는 독립된 세계임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br/><br/>두 작품에서 상실은 사랑의 반대편에 놓이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이 가진 성격을 드러내는 조건으로 작동한다. 사랑했던 사람이 언제까지나 곁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 함께 상상했던 미래가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사랑은 현재의 감각을 강렬하게 만든다. 『마리아나』의 마리아나에게는 지나가버린 시간이, 『페루에서 온 신사』의 라울에게는 죽음으로 끊긴 시간이 현재를 향해 되돌아온다. 둘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부재한 사람과 관계를 지속한다. 그 과정에서 사랑은 더 이상 두 사람 사이에서만 발생하는 감정이 아니다. 한 사람이 자기 삶을 해석하는 방식 전체를 바꾸는 경험이 된다.<br/><br/>애치먼의 작품에서 사랑을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사랑은 행복한 상태로 오래 유지되는 감정이라기보다 인간의 감각과 기억, 시간의식 자체를 변화시키는 사건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사랑했던 사람보다 그 사랑을 경험하면서 달라진 자신을 더 오래 데리고 살아간다. 『마리아나』의 편지는 그 변화를 기록하는 형식이고, 『페루에서 온 신사』의 환생은 그 변화를 시간의 경계까지 밀어붙이는 장치다. 현실적인 실연과 초현실적인 재회라는 전혀 다른 외형을 갖추었지만 두 작품의 내부에서는 같은 일이 일어난다. 사랑이 지나간 뒤에도 인간은 그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가지 못한다.<br/><br/>그렇다면 사랑은 왜 반복되는가. 상실의 가능성을 알면서도 다시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애치먼의 두 작품은 이에 대한 낙관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사랑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집착과 후회와 그리움의 자리로 데려간다. 그럼에도 사랑을 경험한 사람에게 그 이전의 안전한 상태로 돌아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랑은 삶에 하나의 가능성을 열고, 그 가능성이 사라진 뒤에도 그것을 경험했던 사람의 감각을 바꾸어놓는다.<br/><br/>결국 『마리아나』와 『페루에서 온 신사』가 함께 보여주는 것은 사랑의 전과 중과 후가 서로 단절된 시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랑하기 전에는 가능성이 있고, 사랑하는 동안에는 자아가 변하며, 사랑이 지나간 뒤에는 기억과 상실, 살아보지 못한 삶이 남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과한 인간은 다시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이 삶을 안전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는 삶의 감각이 있기 때문이다.<br/><br/>사랑 없는 삶은 상처받을 일도 적을 것이다. 그러나 타인을 향해 자신을 열어본 경험이 없다면 인간은 자신의 세계가 어디까지 넓어질 수 있는지도 알기 어렵다. 애치먼이 두 작품에서 집요하게 바라보는 것은 바로 그 확장이다. 누군가를 사랑한 뒤에는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뿐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자신까지 삶에 남는다. 사랑은 떠난 사람을 붙잡아두는 힘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는 사건이다. 그래서 사랑이 끝난 뒤에도 사랑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기억 속의 한 장면으로 남는 대신,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일부가 된다.<br/><br/>✏️도서출판 비채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26/16/cover150/k78213070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7261622</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사랑 사랑 사랑 - [마리아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61859</link><pubDate>Thu, 20 Aug 2026 15:3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6185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22130705&TPaperId=1746185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26/80/coveroff/k72213070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22130705&TPaperId=1746185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마리아나</a><br/>안드레 애치먼 지음, 홍한별 옮김 / 비채 / 2026년 07월<br/></td></tr></table><br/>안드레 애치먼의 『마리아나』와 『페루에서 온 신사』는 원래 한 권의 책에 함께 실린 두 중편이다. 비채가 두 작품을 나란히 소개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마리아나』가 사랑의 종결 이후를 바라본다면, 『페루에서 온 신사』는 죽음과 시간까지 건너 사랑이 다시 돌아올 가능성을 상상한다. 하나는 이별 뒤의 기억을, 다른 하나는 상실 이후에도 지속되는 욕망을 다룬다. 그러나 두 작품의 관심은 사랑의 시작이나 연애의 사건 자체에 머물지 않는다. 애치먼이 오래 응시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경험을 통과한 인간의 변화다. 누군가를 사랑한 뒤에는 그 사람을 만나기 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관계가 사라진 뒤에도 그 변화만은 현재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두 작품을 관통한다.<br/><br/>『마리아나』에서 이 문제는 편지라는 형식을 통해 선명해진다. 이탈리아에서 이타마르를 만난 마리아나는 짧고 강렬한 사랑을 경험하고, 관계가 끝난 뒤 그에게 편지를 쓴다. 하지만 이 편지에서 중요한 것은 수신자의 응답이 아니다. 이미 떠난 사람에게 계속 말을 거는 행위 자체가 마리아나의 시간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함께했던 장면과 말들을 되짚으며 사랑이 시작된 순간부터 이별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반복해서 통과한다. 과거는 지나간 사건으로 정리되지 않고 현재의 의식 속에서 계속 수정된다. 이타마르가 떠난 뒤에도 마리아나의 삶에는 그와 함께 있을 때 발견했던 욕망과 감각,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자기 자신의 모습이 남는다. 그래서 그녀가 상실한 것은 한 사람만이 아니다. 한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된 자기 자신 역시 상실의 일부가 된다.<br/><br/>이때 애치먼의 사랑은 상대방을 소유하는 관계와 상당한 거리를 둔다. 타인은 나의 삶에 들어와 나를 변화시키는 존재이며, 그 변화는 상대가 떠난다고 해서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의 경험이 한 인간의 자기 인식을 바꾸어놓는다면 관계의 지속 여부만으로 그 사랑의 성패를 판단하기도 어려워진다. 마리아나가 이타마르를 계속 기억하는 이유 역시 그가 특별히 완전한 사람이어서라기보다, 그를 통해 자신 안에 존재하던 무엇인가를 처음 경험했기 때문이다. 사랑의 대상은 기억 속에서 점차 하나의 인물인 동시에 하나의 시기가 된다.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 속에서만 가능했던 자아의 형태까지 함께 기억되는 것이다.<br/><br/>『마리아나』의 편지는 연애편지이면서 기억의 형식이기도 하다. 애치먼에게 기억은 지나간 시간을 보관하는 기능보다 현재의 감정을 다시 구성하는 힘에 가깝다. 마리아나는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그때의 자신을 다시 만난다. 같은 사건도 현재의 감정에 따라 다르게 읽히고, 한때는 사랑의 증거였던 말이 나중에는 이별의 징후로 바뀐다. 사랑했던 순간은 과거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기억하는 사람의 현재가 달라질 때마다 과거 역시 조금씩 모습을 바꾼다. 그래서 사랑의 종결 이후에 남는 것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다. 현재의 자신을 계속 만들어가는 하나의 시간이다.<br/><br/>『페루에서 온 신사』는 이 사고를 현실의 시간 바깥까지 확장한다. 아말피 해안의 호텔에서 우연히 만난 라울은 타인의 통증을 치유하고 그들이 숨겨온 삶의 일부를 알아맞히는 기묘한 인물이다. 오래전 사랑했던 마리아를 사고로 잃은 그는 수십 년이 지난 뒤 만난 마고에게서 그녀의 흔적을 발견한다. 두 사람의 만남은 환생이라는 초현실적인 설정을 통해 진행되지만, 애치먼이 바라보는 것은 환생의 진위보다 한 인간에게 과연 현재의 삶만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다. 라울이 말하는 ‘그림자 자아’는 실제로 살아온 나의 뒤편에 존재하는 수많은 가능성의 나를 가리킨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존재했을 사람, 다른 시간에 누군가를 만났다면 경험했을 사랑, 살아보지 못한 삶까지도 현재의 자아를 구성한다는 발상이다. 사랑은 이처럼 한 사람의 현재를 과거와 미래, 그리고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까지 이어놓는다.<br/><br/>두 작품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시간을 바라본다. 마리아나는 이미 끝난 사랑을 기억 속에서 반복하며 ‘다르게 될 수 있었던 우리’를 상상한다. 라울은 시간 자체를 건너 ‘다시 만날 수 있는 우리’를 믿는다. 전자가 기억을 통해 과거의 가능성을 복원한다면 후자는 환생을 통해 가능성을 현재로 불러온다. 현실에서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충분히 가능했던 세계, 애치먼이 ‘그럴 수도 있었던 것’과 ‘그럴 수도 있는 것’으로 설명해온 가능성의 영역이 두 작품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셈이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삶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선택하지 않은 길과 만나지 못한 사람, 하지 못한 말과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미래까지 끌어안은 채 현재를 살아간다. 사랑은 특히 이 가능성의 영역을 넓힌다. 사랑에는 언제나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함께 들어 있기 때문이다.<br/><br/>그러나 사랑을 시간 너머로 연장하려는 욕망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페루에서 온 신사』에서 라울이 마고를 마리아와 겹쳐 바라보는 순간, 과거의 사랑을 보존하려는 마음은 현재의 한 사람을 과거의 이미지 안에 가둘 위험을 갖는다. 사랑했던 사람을 기억하는 일과 눈앞의 사람을 그 사람의 대체물로 바라보는 일은 다르다. 애치먼은 이 차이를 명확한 윤리적 선언으로 설명하기보다 라울과 마고 사이의 불안정한 관계 속에 배치한다. 과거를 잃지 않으려는 욕망이 현재를 어떻게 바라보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랑에는 소유하려는 충동이 따라붙지만, 상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의 기억과 욕망으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는 독립된 세계임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br/><br/>두 작품에서 상실은 사랑의 반대편에 놓이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이 가진 성격을 드러내는 조건으로 작동한다. 사랑했던 사람이 언제까지나 곁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 함께 상상했던 미래가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사랑은 현재의 감각을 강렬하게 만든다. 『마리아나』의 마리아나에게는 지나가버린 시간이, 『페루에서 온 신사』의 라울에게는 죽음으로 끊긴 시간이 현재를 향해 되돌아온다. 둘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부재한 사람과 관계를 지속한다. 그 과정에서 사랑은 더 이상 두 사람 사이에서만 발생하는 감정이 아니다. 한 사람이 자기 삶을 해석하는 방식 전체를 바꾸는 경험이 된다.<br/><br/>애치먼의 작품에서 사랑을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사랑은 행복한 상태로 오래 유지되는 감정이라기보다 인간의 감각과 기억, 시간의식 자체를 변화시키는 사건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사랑했던 사람보다 그 사랑을 경험하면서 달라진 자신을 더 오래 데리고 살아간다. 『마리아나』의 편지는 그 변화를 기록하는 형식이고, 『페루에서 온 신사』의 환생은 그 변화를 시간의 경계까지 밀어붙이는 장치다. 현실적인 실연과 초현실적인 재회라는 전혀 다른 외형을 갖추었지만 두 작품의 내부에서는 같은 일이 일어난다. 사랑이 지나간 뒤에도 인간은 그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가지 못한다.<br/><br/>그렇다면 사랑은 왜 반복되는가. 상실의 가능성을 알면서도 다시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애치먼의 두 작품은 이에 대한 낙관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사랑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집착과 후회와 그리움의 자리로 데려간다. 그럼에도 사랑을 경험한 사람에게 그 이전의 안전한 상태로 돌아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랑은 삶에 하나의 가능성을 열고, 그 가능성이 사라진 뒤에도 그것을 경험했던 사람의 감각을 바꾸어놓는다.<br/><br/>결국 『마리아나』와 『페루에서 온 신사』가 함께 보여주는 것은 사랑의 전과 중과 후가 서로 단절된 시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랑하기 전에는 가능성이 있고, 사랑하는 동안에는 자아가 변하며, 사랑이 지나간 뒤에는 기억과 상실, 살아보지 못한 삶이 남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과한 인간은 다시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이 삶을 안전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는 삶의 감각이 있기 때문이다.<br/><br/>사랑 없는 삶은 상처받을 일도 적을 것이다. 그러나 타인을 향해 자신을 열어본 경험이 없다면 인간은 자신의 세계가 어디까지 넓어질 수 있는지도 알기 어렵다. 애치먼이 두 작품에서 집요하게 바라보는 것은 바로 그 확장이다. 누군가를 사랑한 뒤에는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뿐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자신까지 삶에 남는다. 사랑은 떠난 사람을 붙잡아두는 힘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는 사건이다. 그래서 사랑이 끝난 뒤에도 사랑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기억 속의 한 장면으로 남는 대신,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일부가 된다.<br/><br/>✏️도서출판 비채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26/80/cover150/k72213070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7268012</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도록 설계된 세계에서 - [헝거 게임 : 50번째 추첨의 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59862</link><pubDate>Wed, 19 Aug 2026 15:5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5986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72130027&TPaperId=1745986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28/86/coveroff/k37213002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72130027&TPaperId=1745986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헝거 게임 : 50번째 추첨의 날</a><br/>수잔 콜린스 지음, 이원열 옮김 / 북폴리오 / 2026년 07월<br/></td></tr></table><br/>폭력적인 세계가 오래 지속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힘이 압도적으로 강해서일 수도 있지만, 더 오래 작동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 힘을 거스를 수 없다고 믿게 되는 일이다. 매년 반복되는 추첨과 헝거 게임을 바라보며 열여섯 살 헤이미치가 느끼는 체념도 그와 다르지 않다. 어제까지 일어났던 일이 내일도 일어날 것이라 믿는다면, 그 세계를 바꾸려는 생각은 처음부터 무의미해진다. 그런 질서에 작은 의문을 던지는 목소리가 있다. 반복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앞으로도 반복될 이유는 없다고.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믿는 순간부터 변화할 가능성도 사라진다고. 수잔 콜린스가 이번 작품에서 헤이미치의 과거를 꺼내든 이유는 어쩌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한 인간이 어떻게 체념을 배우고, 그 체념을 다시 거슬러 나가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br/><br/>소수의 권력이 다수를 지배할 수 있는 까닭은 그 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 지배를 하나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현실의 바깥을 상상하기 어려워질 때 권력은 더욱 단단해진다. 캐피톨이 만들어놓은 세계에서 헝거 게임은 더 이상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매년 반복되는 의식이고, 아이들이 추첨되는 날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일정이며,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죽음마저 하나의 익숙한 볼거리가 된다. 끔찍한 일이 반복되면 사람은 그것을 견디는 법부터 배운다. 그리고 견딜 수 있게 된 순간, 부당함에 저항해야 한다는 감각은 조금씩 희미해진다. 헤이미치의 이야기는 그 익숙함을 깨뜨리는 데서 시작된다. 세상이 원래 그런 것이라는 생각에 아주 작은 틈을 내는 것. 어쩌면 저항의 시작은 그 정도로 작을 수 있다.<br/><br/>『헝거 게임 : 50번째 추첨의 날』에서 가장 섬뜩한 것은 아이들이 죽는 장면만이 아니다. 그 죽음이 하나의 방송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캐피톨은 조공인들의 몸을 감시하고, 행동을 촬영하고, 그 장면을 편집한다. 그리고 편집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결정하는 순간, 무엇을 믿게 할 것인지도 함께 결정되기 때문이다. 헤이미치가 경기장에서 보여준 행동과 조공인들의 연대는 캐피톨이 원하는 서사와 맞지 않는 순간 삭제되고, 그 자리에 순종적이고 무지하며 서로를 죽이기 위해 모인 아이들의 이미지가 들어선다. 권력은 사람의 피로 자신의 이야기를 그린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죽음이 어떤 의미로 기억될 것인지까지 결정하려 한다.<br/><br/>끊임없이 바라보는 눈은 사람의 행동을 통제하고,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를 의식하게 만든다. 여기에 방송과 편집이 결합하면서 감시는 단순히 몸을 통제하는 장치에서 현실을 정의하는 장치로 변한다. 『헝거 게임』의 경기장은 아이들이 죽는 장소인 동시에, 무엇이 진실로 기억될 것인지 결정하는 거대한 스튜디오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저항은 거대한 무기를 드는 일보다 먼저 시작된다. 카메라가 원하는 표정을 짓지 않는 것, 죽은 아이의 몸을 감추지 않는 것, 서로를 적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 캐피톨이 가장 원하지 않는 것은 조공인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거부하는 일이다. 경쟁해야 할 사람들이 서로를 걱정하고, 살아남아야 할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생존을 생각하는 순간 게임의 규칙은 더 이상 완전하지 않게 된다.<br/><br/>억압은 사람을 혼자 남겨둘 때 가장 강력해진다. 반대로 서로가 서로의 고통을 알아보는 순간, 개인의 두려움은 공동의 감각으로 바뀐다. 경기장에 모인 아이들이 만들어가는 연대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은 모두 서로 다른 구역에서 왔고, 서로를 경쟁자로 만나도록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함께 살아남을 방법을 찾기 시작하면서 캐피톨이 정해놓은 관계의 질서를 벗어난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행위를 타인과 함께 세계를 만들어가는 일로 바라보았듯, 이들의 연대는 단순한 생존 전략에 머물지 않는다. 혼자 살아남으라는 명령에 함께 살아남겠다고 답하는 것. 누군가의 고통을 나의 생존과 무관한 일로 취급하지 않는 것. 그 순간 개인의 생존은 공동의 저항으로 변한다.<br/><br/>그러나 저항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인간에게 저항은 더욱 잔인한 일이 된다. 사랑은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이면서 동시에 권력이 겨눌 수 있는 가장 깊은 약점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도록 설계된 판이라면, 그래도 싸워야 할 이유가 남아 있을까. 이 질문 앞에서 헤이미치의 이야기는 단순한 성장담이나 영웅담에서 멀어진다. 그에게 살아남는 일은 무언가를 얻는 일이 아니라, 살아남은 만큼 더 많은 것을 기억해야 하는 일이 되어간다. 경기장에서 만난 사람들, 가족, 레노어 도브와의 관계가 사라질수록 헤이미치에게 남는 것은 기억뿐이다. 그래서 헤이미치의 이후 삶을 바라보는 일은 한 사람이 왜 무너졌는지를 묻는 일과 동시에, 기억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바라보는 일이 된다.<br/><br/>기억은 과거를 보존하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아직 현실을 다시 해석할 힘이 남아 있다. 권력이 사람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려 할 때, 살아남은 사람은 자신의 언어로 그 죽음을 기억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았던 사람이라는 사실, 누군가와 함께 웃었던 순간, 한때 다른 세계를 꿈꾸었던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캐피톨이 만든 이야기는 완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헤이미치에게 기억은 축복인 동시에 고통이다. 잊을 수 있다면 조금 편해질 수 있겠지만, 잊는 순간 캐피톨이 원하는 방식으로 역사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 헤이미치는 자주 실패하고, 많은 것을 잃고, 자신마저 잃어버린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사람에게는 한 가지 일이 남는다. 무엇이 있었는지를 기억하는 것. 누가 사라졌는지를 말하는 것. 자신에게 강요된 이야기 대신 자신의 언어로 과거를 다시 부르는 것.<br/><br/>그래서 마지막에 남는 것은 승리의 감각보다 시간에 대한 생각이다. 헤이미치의 저항은 그가 바라던 방식으로 즉시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헝거 게임은 계속되고, 캐피톨은 그의 행동을 자기들이 원하는 이야기로 다시 편집한다. 한 사람이 목숨을 걸고 만들어낸 장면조차 권력의 편집 앞에서 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저항은 실패한 것일까. 어쩌면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헤이미치의 이야기는 훗날까지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헤이미치가 만들었던 작은 저항의 흔적은 훗날 캣니스의 등장과 함께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작품 속 플루타르크가 말하듯 저항에는 연속성이 있다. 오늘의 행동이 당장 세상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다음 사람에게 도달한다면 역사는 그 행동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 없다. 한 사람의 실패가 다른 사람에게는 시작이 될 수 있고, 한 세대가 남긴 상처가 다음 세대에게는 다시 일어설 이유가 될 수 있다.<br/><br/>결국 『헝거 게임 : 50번째 추첨의 날』은 헤이미치가 어떻게 헝거 게임의 승자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면서, 한 인간이 어떻게 복종을 배우고 그 질서에 저항하는 사람이 되어가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캐피톨이 빼앗으려 한 것은 목숨만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하고, 기억을 빼앗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게 만들며,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마저 포기하게 만드는 것. 지배는 그렇게 사람의 바깥에서 안쪽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저항 역시 그 안에서 시작된다. 지금의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 눈앞의 사람이 적이 아니라는 감각, 사라진 사람의 이름을 잊지 않겠다는 마음. 거대한 혁명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그런 작은 선택들이다.<br/><br/>태양은 매일 떠오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일도 오늘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반복되는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지, 그 반복에 작은 몸 하나를 세워 다른 가능성을 만들 것인지는 다른 문제다. 헤이미치가 남긴 것은 승리의 영광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잃은 뒤에도 자신이 보았던 것을 기억하고, 언젠가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작은 자리를 남겨두는 일이었다.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도록 설계된 세계에서도 싸울 이유가 남는다면, 아마 그것은 승리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의 내일이 오늘과 같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어제까지 당연했던 운명을 내일의 사람에게까지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한 사람이 남긴 작은 저항이 시간 너머의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기 위해서.<br/><br/>✏️소정의 원고료와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28/86/cover150/k37213002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288601</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자화상은 자신을 얼마나 닮을 수 있는가 - [자화상]</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58049</link><pubDate>Tue, 18 Aug 2026 17: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5804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22130626&TPaperId=1745804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78/64/coveroff/k022130626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22130626&TPaperId=1745804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자화상</a><br/>에두아르 르베 지음, 정영문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08월<br/></td></tr></table><br/>사람의 삶을 이야기로 만드는 일에는 일정한 질서가 필요하다. 태어나고, 자라고, 어떤 일을 겪고, 그것을 통해 변하고, 현재에 이르렀다는 시간의 흐름. 무엇이 삶을 바꾼 사건이었는지, 무엇이 사소한 기억에 불과했는지를 가려내는 선택. 그렇게 정리된 삶은 하나의 서사가 되고, 우리는 그 서사를 통해 한 사람을 이해한다. 그러나 에두아르 르베의 『자화상』에는 이런 익숙한 질서가 없다. 르베는 이야기를 만들지 않는다. 사건 사이의 인과를 제거하고, 기억의 순서를 해체하며, 삶을 하나의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중심 사건도 설정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에 관한 수많은 문장을 흩어놓는다.<br/><br/>르베가 연대기와 인과관계를 버린 것은 삶을 무질서하게 재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선택과 배제를 드러내기 위해서다. 어떤 기억을 중요하게 다루고 어떤 기억을 지워버릴 것인지 결정하는 순간, 자서전은 이미 한 인간을 특정한 서사 안에 배치한다. 어린 시절의 어떤 사건은 현재의 나를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어떤 만남은 인생을 바꾼 전환점이 되며, 나머지 수많은 날들은 그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배경으로 밀려난다. 삶은 그렇게 의미 있는 것과 의미 없는 것으로 구분된다. 『자화상』은 바로 그 질서를 거부한다. 르베에게는 인생을 바꾼 사건과 별것 아닌 습관 사이에 반드시 존재해야 할 위계가 없다. 폴 리쾨르가 말한 ‘서사적 정체성’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하며 ‘나’라는 존재를 이해한다는 생각에 닿아 있다. 그렇다면 르베의 작업은 그 서사를 구성하는 방식 자체에 작은 반론을 건다.<br/><br/>그래서 이 책에서 죽음과 음식, 사랑과 여행, 어린 시절의 기억과 신체에 대한 감각은 서로 다른 무게를 가진 사건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한 문장이 다른 문장을 설명하지 않고, 어떤 기억이 다음 기억의 원인이 되지도 않는다. 문장들은 저마다 하나의 작은 사실로 존재한다.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판단을 최대한 유보한 채, 삶을 구성했던 것들을 같은 높이에 올려놓는 것이다. 이때 『자화상』은 한 인간의 삶을 특별한 사건들의 연속으로 바라보는 관습에 의문을 던진다. 실제로 한 사람을 이루는 것은 몇 번의 극적인 순간만이 아니다. 매일 반복되는 취향과 습관, 무심코 지나친 감각, 아무에게도 설명하지 않았던 생각과 기억 역시 그 사람의 일부다.<br/><br/>르베는 바로 그 사소함을 집요하게 수집한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사람에게 끌리고 어떤 사람과 거리를 두는지, 여행을 어떻게 느끼는지, 자신의 몸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어떤 기억을 간직하고 어떤 기억을 잊었는지를 기록한다. 그중에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운 사실도 많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사소함이 결코 주변부로 밀려나지 않는다. 오히려 특별하지 않다는 이유로 기억에서 탈락했던 것들이 하나씩 불려 나온다. 그렇게 보면 『자화상』은 한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목록이면서, 동시에 ‘중요함’이라는 기준을 해체하는 작업이다. 삶을 회고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의미를 찾는다. 하지만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기억은 다시 편집된다. 수많은 날 가운데 몇 장면만 선택되고, 선택된 장면에는 현재의 내가 알고 있는 의미가 덧씌워진다.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를 설명하기 위한 인물이 되고, 현재의 나는 그 과거를 해석하는 사람이 된다. 르베는 그 해석의 과정을 최대한 걷어낸다. 그에게 과거는 현재를 설명하기 위한 원인이 아니라, 그저 한때 존재했던 수많은 사실 중 하나로 남는다.<br/><br/>그러나 사실을 많이 모은다고 해서 한 사람을 완전히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화상』에서는 자신에 관한 사실이 쌓일수록 그 사람의 모습이 선명해지기보다,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더 또렷해진다. 르베는 자신에 관해 놀라울 만큼 많은 것을 말하지만, 그 많은 문장은 하나의 완전한 인물상으로 수렴하지 않는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누구를 사랑했는지, 어떤 습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본질까지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삶의 사실과 삶의 진실 사이에는 쉽게 건널 수 없는 거리가 놓여 있다. 모든 문장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사실들의 총합이 곧 한 인간의 진실이 되지는 않는다. 기억은 언제나 선택적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판단에도 현재의 시선이 개입한다. 같은 사건을 다시 떠올릴 때마다 기억은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돌아온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도 있고, 자신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던 순간도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정작 자기 자신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br/><br/>자신을 말하는 순간에도 선택은 발생한다. 무엇을 기억할 것인지, 어떤 단어를 사용할 것인지, 어떤 사건을 기록할 것인지 결정하는 순간 이미 하나의 ‘나’가 만들어진다. 르베는 이 문제 앞에서 더 많은 사실을 끌어온다. 자신을 가능한 한 많은 문장 속에 분산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시도가 자기 자신의 불투명성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수많은 조각을 모았는데도 전체의 모습은 완전히 닫히지 않는다.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쓴 문장이 오히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남긴다. 그리고 그 불완전한 초상 안에는 타인이 끊임없이 들어온다. 친구와 연인, 가족과 낯선 사람, 우연히 스쳐 지나간 사람들의 모습이 르베의 자화상에 함께 놓인다. 자신을 그리는 책인데 정작 혼자서 존재하는 ‘나’는 거의 없다. 인간은 본래 관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의 나와 혼자 있을 때의 나, 상처를 받았을 때의 나와 타인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의 나는 서로 다른 얼굴을 가진다. 타인의 시선은 나를 바라보는 외부의 눈인 동시에 내가 나를 인식하는 방식에 스며든 하나의 기억이기도 하다.<br/><br/>자화상이라는 형식은 본질적으로 모순을 품는다. 자화상은 자신이 자신을 그리는 그림이지만, 자신을 완전히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거울 속 얼굴을 아무리 오래 바라보아도 그 얼굴이 살아온 시간까지 함께 볼 수는 없다. 내가 알고 있는 나와 타인이 기억하는 나는 다르고, 지금의 내가 기억하는 과거의 나와 당시의 내가 느꼈던 나 역시 다르다. 르베의 자화상에 타인의 얼굴이 끊임없이 들어오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한 사람의 초상은 혼자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자화상』의 파편적인 형식은 단순한 실험이나 문체적 기교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라는 존재가 본래 하나의 완결된 서사로 환원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형식 자체로 보여준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는 것은 삶에도 언제나 명확한 인과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처럼 읽힌다. 우리는 지나간 사건들에 뒤늦게 이유를 붙이지만, 실제로 살아가는 동안에는 수많은 일이 아무런 설명 없이 지나간다. 삶은 언제나 이야기보다 먼저 존재하고, 이야기는 그것이 지나간 뒤에 만들어진다.<br/><br/>르베는 그 사후적인 질서를 거부한다. 그래서 그의 자화상에는 성장도 없고, 극복도 없고, 완성도 없다. 어떤 사건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식의 결론도 없다. 한 사람은 그저 수많은 순간을 통과하며 존재한다. 서로 모순되는 욕망과 기억, 애정과 무관심, 확신과 망설임을 함께 품은 채로. 결국 『자화상』이 그려내는 것은 완성된 인간의 얼굴이 아니다. 오히려 한 인간을 이루는 수많은 조각과, 그 조각들을 아무리 모아도 완전히 채울 수 없는 빈자리다. 르베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사실을 늘어놓지만, 그 사실들이 하나의 정답으로 모이도록 만들지 않는다. 각각의 문장은 자신이었던 어느 한순간을 붙잡고 있을 뿐이다. 그 문장들이 모여 하나의 얼굴을 만들어내는 순간에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얼굴은 다시 무수한 점으로 흩어진다.<br/><br/>그 점에서 『자화상』은 자신을 완성하는 책이 아니라 자신을 완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책이다.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하면 지나간 시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소함이 사라진다. 르베는 그 사라진 것들을 다시 불러낸다. 별것 아닌 취향과 오래된 습관,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과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순간까지 한 사람의 삶으로 되돌려놓는다. 그리고 그 수많은 사실 앞에서 비로소 자화상의 의미가 달라진다. 자신을 닮은 얼굴을 만드는 것이 자화상이라면, 르베의 책은 끝내 하나의 얼굴이 남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을 이루었던 순간들을 빠짐없이 바라보려는 시도가 자화상이라면, 이 책은 누구보다 집요한 초상이다. 인간은 하나의 이야기로 설명되지 않으며, 하나의 얼굴로도 붙잡히지 않는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존재는 수많은 기억과 관계와 습관과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잠정적인 형상에 가깝다.<br/><br/>르베는 그 형상을 억지로 완성하지 않는다. 대신 수많은 문장을 통해 한 사람이었던 순간들을 하나씩 남겨놓는다. 완성된 얼굴 대신 흩어진 조각을, 삶의 의미 대신 삶의 흔적을. 그렇게 『자화상』은 한 인간을 가장 많이 말하면서도 그 인간을 하나의 문장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한 사람을 그린다는 것은 완성된 얼굴을 내놓는 일이 아니라, 그 얼굴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순간을 끝까지 지워버리지 않는 일이다.<br/><br/>한 사람의 얼굴은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오히려 선명한 윤곽을 잃는다. 기억과 습관, 사랑과 무관심, 아무 의미 없이 지나간 하루의 감각까지 서로 다른 크기의 점들이 겹쳐질 때 비로소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다. 10년 만에 다시 돌아온 에두아르 르베의 『자화상』은 그렇게 점묘화처럼 흩어진 1,400여 개의 문장으로 한 인간의 초상을 그려낸다. 한 문장만 떼어놓으면 사소하고 무심한 사실에 불과하지만, 그 점들이 한 페이지씩 쌓여갈수록 독자는 르베의 얼굴과 동시에 자신의 얼굴까지 그려보게 된다. <br/><br/>익숙한 소설의 문법에서 벗어난 작품을 찾는 독자,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에게 특히 권하고 싶다. 평범한 취향과 오래된 습관,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처럼 쉽게 서사가 되지 못했던 것들을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소설과 자서전의 경계를 흐리는 실험적인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에게도 르베의 방식은 낯설고 매혹적인 독서가 될 것이다. 한 문장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람을, 수많은 문장으로 그려낸 책.<br/><br/>2015년 처음 한국에 소개된 뒤 절판되었던 이 책은 재출간을 기다리는 독자들의 목소리와 함께 다시 돌아왔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국내에 르베의 작품을 처음 소개했던 소설가 정영문이 문장을 새롭게 다듬었다.  오래된 책이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보다 반가운 것은, 그때의 문장들이 지금도 여전히 한 사람의 얼굴을 그릴 수 있다는 점이다. 르베는 자신을 설명하려 수많은 점을 찍어놓았고, 독자는 그 점들을 이어 하나의 얼굴을 만들어보게 된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바라보고 나면 그 얼굴은 르베의 것만으로 남지 않는다. 흩어진 점들 사이에서 저마다의 삶이 하나의 초상으로 떠오르는 순간, 자화상은 비로소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br/><br/>✏️도서출판 은행나무로부터 은행잎 4기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78/64/cover150/k022130626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786493</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결국 얻는 것은 슬픔뿐인데도 - [평범한 날들은 사라졌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55962</link><pubDate>Mon, 17 Aug 2026 17:1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5596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5828&TPaperId=1745596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32/91/coveroff/893292582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5828&TPaperId=1745596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평범한 날들은 사라졌고</a><br/>수잰 레드펀 지음, 김마림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07월<br/></td></tr></table><br/>평범한 삶은 대체로 가난한 쪽에서 먼저 의심받는다. 가진 것이 적고 선택지가 좁은 삶을 우리는 쉽게 불행으로 번역하곤 한다. 더 넓은 집, 더 많은 돈, 더 좋은 교육, 더 높은 사회적 지위. 삶의 개선을 설명하는 언어는 늘 ‘더’를 향한다. 수잰 레드펀의 『평범한 날들은 사라졌고』는 그 익숙한 상승의 문법에 작은 함정을 판다. 가족이 더 많은 것을 갖게 되는 동안, 그들이 살던 하루는 하나씩 사라진다.<br/><br/>남편이 떠난 뒤 세 아이를 키우는 여성에게 돈은 추상적인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집세와 식탁, 자동차, 아이들의 안전처럼 구체적인 형태를 가진다. 그러니 네 살짜리 아이에게 찾아온 뜻밖의 재능과 그 재능을 돈으로 바꿀 기회 앞에서 물러나는 일은 도덕적으로 간단하지 않다. 가난을 견디는 부모에게 ‘아이의 순수한 어린 시절’을 지키라는 말은 때로 너무 사치스러운 조언이 된다. 이 소설이 출발하는 곳도 바로 그 불편한 현실이다. 아이를 상품화하는 세계와, 아이의 재능을 팔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부모 사이에는 생각보다 선명한 선이 그어져 있지 않다.<br/><br/>문제는 돈을 벌기 시작한 다음부터다. 몰리의 재능은 곧 산업의 언어로 번역된다. 귀여움은 상품성이 되고, 춤은 콘텐츠가 되고, 어린 시절은 촬영 가능한 시간이 된다.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는가보다 얼마나 오래 카메라 앞에 설 수 있는가가 중요해지는 순간, 재능은 가능성이라는 이름을 벗어나 하나의 경제적 자원으로 취급되기 시작한다. 네 살이라는 나이는 이 변화를 더욱 잔혹하게 만든다. 아직 자기 노동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자신의 노동으로 가족의 경제적 조건을 바꾸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부모의 역할도 미묘하게 변한다. 보호자는 관리자가 되고, 관리자는 협상자가 된다. 아이의 하루를 지켜보는 일과 아이의 하루를 판매하는 일 사이의 거리는 의외로 짧다. 계약서에 서명하는 손, 촬영 시간을 조율하는 손, 아이가 피곤해하지 않는지 살피는 손이 모두 같은 손인 까닭이다. 사랑과 노동, 보호와 거래가 한 사람 안에서 겹쳐진다.<br/><br/>그래서 이 작품에서 가장 불편한 인물은 특정한 악인이 아니다. 오히려 모두가 어느 정도 선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족은 돈이 필요하고, 아이에게는 재능이 있으며, 제작자는 성공적인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어 하고, 대중은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고 싶어 한다. 각각의 욕망만 떼어놓으면 특별히 잔혹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것들이 한곳에 모이는 순간 어린아이의 시간이 대가로 지불된다. 착한 사람들만으로도 착취는 완성될 수 있다.<br/><br/>가족이라는 단위 역시 이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 사람의 성공은 가족 전체의 성공으로 쉽게 포장되지만, 실제로 가족 구성원들이 치르는 비용까지 균등하게 분배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돈을 얻고, 누군가는 관심을 잃는다. 누군가는 새로운 기회를 얻고, 누군가는 익숙했던 생활을 잃는다. 같은 식탁에 앉아 있어도 각자가 경험하는 삶의 밀도는 달라진다. 가족이라는 이름은 이 차이를 지워버리는 데 놀라울 만큼 편리한 단어가 되어 버린다. 특히 어린아이에게 성공은 아직 자신의 욕망과 분리되지 않는다. 어른은 성공을 미래의 기회로 해석하지만, 아이에게 시간은 미래를 위한 자원이 아닌 지금 살아야 하는 현재다. 어른에게 몇 시간의 촬영은 경력의 일부지만, 아이에게 그 몇 시간은 친구와 놀 수 있는 오후일 수 있다. 어른에게 유명세는 사회적 자산이지만, 아이에게는 자신을 모르는 사람조차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상한 세계다. 같은 사건은 나이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br/><br/>이 지점에서 ‘아동의 권리’라는 말도 조금 다른 얼굴을 갖는다. 아이에게 자기결정권을 인정한다고 해서 모든 결정을 아이에게 맡길 수는 없다. 반대로 보호를 이유로 모든 결정을 어른이 가져갈 수도 없다. 아이는 아직 자신을 책임질 수 없기에 보호가 필요하지만, 언젠가 자신을 책임질 사람으로 자라야 하기 때문에 선택의 경험도 필요한 것이다. 부모의 사랑에는 이 두 요구를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모순이 들어 있다.<br/><br/>『평범한 날들은 사라졌고』가 흥미로운 것은 그 모순을 ‘좋은 부모와 나쁜 부모’의 구도로 해결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더 좋은 삶을 주려는 마음은 아이에게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만들 수 있고, 아이를 보호하려는 마음은 아이의 선택을 대신하는 권력으로 변할 수 있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그 선택을 정당화해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부모의 선택을 쉽게 비난할 수도 없다. 사랑과 책임이 만나는 자리에는 언제나 판단의 잔여가 남는다.<br/><br/>성공의 문제도 같은 방식으로 뒤집힌다. 성공은 흔히 축적의 언어로 설명된다. 돈이 얼마나 늘었는지, 얼마나 유명해졌는지, 얼마나 많은 기회를 얻었는지. 그러나 삶의 변화는 축적만으로 계산할 수 없다. 사라진 것도 함께 세어야 한다. 익명성, 한가로운 오후, 가족끼리 나눌 수 있는 시간, 실패해도 누구에게 기록되지 않는 자유.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대개 잃고 나서야 가격표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br/><br/>그래서 제목의 ‘평범한 날들’은 생활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시간에 대한 명칭이다. 아무도 상품으로 만들지 않은 시간, 성과로 환산되지 않은 시간, 누군가의 경력과 수익을 위해 사용되지 않은 시간, 아이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말이다. 인간에게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자본의 논리가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 침투할수록 더욱 그렇다. 이 소설에서 어린 시절은 그래서 가장 먼저 보호받아야 할 노동 이전의 시간으로 읽힌다. 아이는 아직 시장에 자신을 내놓을 이유가 없어야 한다. 잘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만으로 사랑받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스타가 된 아이에게는 그 경계가 너무 일찍 사라진다. 웃음도, 춤도, 표정도, 말 한마디도 타인의 시선 안에서 가치가 매겨진다. 성장하기도 전에 자신을 바라보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 셈이다.<br/><br/>더 아이러니한 것은 부모 역시 그 시장의 바깥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아이의 재능을 경제적 자원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부모는 자본주의의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그 구조에 종속된 존재가 된다. 그래서 이 작품의 갈등을 단순히 부모의 욕심이나 연예 산업의 탐욕으로 축소하면 오히려 중요한 부분이 사라진다.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선택지가 제한된 사람들. 그들의 선택이 또 다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구조. 이 모순이 가족극의 표면 아래에서 계속 움직인다.<br/><br/>그렇다면 좋은 삶의 기준은 무엇인가. 더 많은 것을 갖는 것? 아니면 덜 팔리는 것? 더 많은 기회를 갖는 것? 아니면 아직 선택하지 않은 채 머물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 『평범한 날들은 사라졌고』는 성공을 거부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성공이라는 단어가 지워버리는 것들을 다시 화면 안으로 불러들인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하루는 생산성이 낮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본래 생산성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아이가 놀고, 가족이 밥을 먹고, 아무 목적 없이 거리를 걷고, 내일의 이익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시장의 계산법으로는 낭비에 가까운 그 시간들이 인간의 삶을 인간답게, ‘살 만하게’ 만든다.<br/><br/>결국 사라진 것은 단순한 평온이 아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자신의 시간이 자신의 것으로 남아 있지 않은 삶이다. 유명세는 그 시간을 가져가고, 돈을 그것을 보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상실은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평범한 날들은 특별해질 것을 요구받지 않았기에 귀하다. 누구의 경력이나 상품도 되지 않고, 어떤 성공의 증거로도 제출할 필요가 없는 시간. 아이가 아이로 존재하고, 부모가 부모로 존재하며, 가족이 시장의 단위가 되기 전의 시간. 평범한 날들은 사라졌다. 평범했기에 누구도 붙잡아두지 않았던 날들처럼.<br/><br/>어떤 삶은 더 나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달리는 동안, 정작 발밑에 있던 하루부터 잃어버린다. 『평범한 날들은 사라졌고』는 가족을 위한 선택이 어디까지 사랑이고 어디서부터 거래가 되는지, 아이를 보호한다는 말이 언제 아이의 시간을 대신 결정하는 일이 되는지를 집요하게 들여다본다. 가족을 위해 내린 선택의 무게를 생각해본 독자, 아이의 권리와 부모의 책임 사이에서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었던 독자라면 이 소설의 불편한 현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연예 산업과 미디어가 인간의 재능과 시간을 상품으로 바꾸는 방식에 관심 있는 독자, 그리고 성공의 크기보다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평범한 하루의 가치를 돌아보고 싶은 독자에게도 권하고 싶다. 돈으로 환산되는 것들이 늘어날수록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시간은 오히려 희미해진다. 이 소설은 그 희미해지는 시간을 붙잡기 위해, 우리가 너무 오래 당연하게 여겨온 ‘평범함’의 가격표를 찢어버린다.<br/><br/>✏️도서출판 열린책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32/91/cover150/893292582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329175</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아는 만큼 세계의 모습이 달라진다 - [생명과학의 눈으로 보면 기후의 미래가 바뀐다 - 38억 년 생명의 법칙으로 다시 읽는 기후 위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52342</link><pubDate>Sat, 15 Aug 2026 17:0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5234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12130123&TPaperId=1745234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31/55/coveroff/k61213012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12130123&TPaperId=1745234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생명과학의 눈으로 보면 기후의 미래가 바뀐다 - 38억 년 생명의 법칙으로 다시 읽는 기후 위기</a><br/>김미정 지음 / 지상의책(갈매나무) / 2026년 07월<br/></td></tr></table><br/>기후위기를 이야기할 때 가장 익숙하게 등장하는 문장은 ‘지구를 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김미정의 『생명과학의 눈으로 보면 기후의 미래가 바뀐다』는 이 익숙한 표현을 생명과학의 시간 속에 다시 놓아본다. 기후가 변하는 일은 지구의 역사에서 처음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지구의 나이는 46억 년에 이르고, 생명의 역사는 그보다 짧지만 38억 년에 걸쳐 이어져 왔다. 그 긴 시간 동안 기후와 대기의 조건은 끊임없이 달라졌고, 생명은 번성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기후위기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달라질 필요가 있다. 46억 년의 시간을 견뎌온 지구에게 인간이 구원자가 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지구는 이미 수없이 뜨거워졌고 차가워졌으며, 대기의 구성이 달라지고 바다가 뒤집히는 시간도 지나왔다. 수많은 생명이 사라졌지만 지구는 계속해서 새로운 생명을 품었다.<br/><br/>이 질문은 ‘지구를 구한다’는 표현에 숨어 있는 인간 중심주의를 드러낸다. 지구를 인간의 보호가 필요한 거대한 생명체처럼 바라보는 태도에는 인간이 세계의 중심에 서 있다는 전제가 숨어 있다. 자연은 인간이 살아갈 수 있도록 주어진 배경이고, 인간은 그 배경을 관리하는 주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38억 년의 생명사를 따라가면 이 경계는 흐려진다. 생명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 수동적인 존재에 머물지 않았다. 광합성을 하는 생명체가 대기의 산소 농도를 변화시켰고, 식물은 탄소의 순환에 개입했으며, 생명체의 활동은 지구의 환경 자체를 바꾸어 왔다. 환경이 생명을 만들고 생명이 다시 환경을 만드는 과정이 오랜 시간 반복되면서 오늘의 지구가 형성되었다.<br/><br/>자연과 생명을 서로 분리된 두 항으로 놓는 순간, 오히려 생명의 역사를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인간 역시 그 관계의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을 변화시키는 동시에 자신이 만든 변화에 영향을 받는다. 화석연료의 사용으로 대기의 조성을 바꾸고 토지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생태계를 변화시킨 행위는 결국 인간의 생존 조건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다. 기후위기의 핵심은 자연이 인간에게 보복한다는 데 있지 않다. 인간이 변화시킨 환경의 결과를 인간 역시 감당해야 한다는 데 있다. 자연에 가한 변화가 인간에게 돌아오는 것은 자연이 인간을 심판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역시 그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br/><br/>그렇기에 책이 말하는 기후변화의 ‘속도’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생명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지만 적응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유전과 진화는 수많은 세대를 거쳐 이루어지고, 생태계 역시 다양한 관계 속에서 천천히 균형을 조정한다. 항상성에도 감당할 수 있는 범위가 존재한다. 변화가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면 생명체가 지닌 조절 능력과 생태계의 회복력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기후위기가 두려운 이유는 단순히 지구의 평균 기온이 상승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생명이 변화에 대응할 시간을 잃어버릴 만큼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데 있다.<br/><br/>이 지점에서 기후위기는 환경의 문제면서 동시에 인간의 힘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관한 윤리적 문제가 된다. 인간의 기술은 자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을 비약적으로 확대했지만, 능력의 확대가 곧 책임의 확대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충분히 따라오지 못했다. 한스 요나스가 기술문명에 새로운 책임윤리를 요청한 까닭도 인간의 힘이 미래에 미칠 영향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위가 먼 미래의 생명과 환경에까지 닿는다면, 윤리는 현재의 이익만을 계산하는 방식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살아갈 조건, 인간 이외의 생명이 지속될 조건까지 고려해야 한다. 기후위기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기보다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를 판단할 책임을 요구한다.<br/><br/>그렇다고 생명의 역사가 인간에게 절망만을 건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에서 의미 있게 읽히는 부분은 생명이 수많은 위기를 견뎌온 방식에 있다. 생명은 모든 변화에 저항함으로써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환경이 달라질 때마다 유전과 진화를 통해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냈고, 서로 다른 생명들이 연결되면서 생태계 전체의 회복력을 높여왔다. 특히 다양성과 공생은 생명이 변화 속에서 지속될 수 있었던 중요한 조건으로 제시된다. 하나의 존재가 모든 것을 감당하는 시스템보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연결된 시스템이 외부의 충격에 더 오래 견딜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효율성과 동일성을 발전의 기준으로 삼아온 인간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 더 빠르고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 생물의 다양성을 줄이고, 복잡한 관계를 단순한 시스템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인간은 편리함을 얻었지만 동시에 취약성도 키워왔다. 생명의 역사가 보여주는 회복력은 강한 하나가 전체를 지배하는 방식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하면서 관계를 맺고, 어느 하나의 실패가 전체의 붕괴로 이어지지 않는 구조를 이루는 데서 생겨났다. 다양성은 아름다움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며, 공존은 도덕적 구호이기 전에 생명의 작동 방식이다.<br/><br/>책의 후반부가 인간의 가능성을 다시 이야기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인간은 기후를 변화시킨 생명체이면서 자신이 만든 변화를 인식하고 사회적 선택을 통해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생명체이기도 하다. 인간에게는 자연의 원리를 관찰하고 그것을 기술과 산업의 형태로 다시 적용하는 능력이 있다. 광합성이나 탄소 순환, 토양과 갯벌의 탄소 저장과 같은 생명의 작동 방식을 기후위기의 해법으로 바라보는 ‘생명 기반 해법’은 자연을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생명이 이미 작동시켜온 원리에서 해법을 찾으려는 시도다.<br/><br/>지구는 인간 없이도 오래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인간과 지금의 문명이 계속 살아갈 수 있는 미래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생명의 역사가 가르쳐주는 것도 바로 그 사실이다. 38억 년의 생명사는 변화가 언제나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다는 낙관도, 모든 생명이 결국 적응할 것이라는 위안도 말하지 않는다. 생명에게는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고, 회복할 수 있는 범위가 있으며, 서로 연결되어 살아갈 관계가 필요하다. 인간이 만들어낸 기후변화가 그 조건을 얼마나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지금 필요한 생명과학의 시선일 것이다.<br/><br/>지구의 역사는 인간이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수없이 많은 생명의 흥망과 환경의 변화를 품어왔다. 이 책은 그 거대한 시간 앞에서 인간을 세계의 주인공이 아닌, 생명의 그물 안에 놓인 하나의 종으로 바라보게 한다. 기후위기를 숫자와 재난의 언어로만 이해해온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광합성과 진화, 탄소 순환과 생물다양성이 서로 얽혀 만들어온 생명의 시간을 천천히 따라가 보길 권한다. 특히 과학을 어렵고 딱딱한 지식의 집합으로 느껴온 청소년에게, 복잡한 생명현상의 근원을 탐구하는 즐거움을 학생들과 나누어온 김미정 선생님의 시선은 좋은 길잡이가 되어준다. 갈매나무의 청소년 교양 브랜드 ‘지상의책’이 건네는 이 책은 생명과학을 처음 만나는 독자에게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고 싶은 독자에게도 적절한 한 권이다. 생명의 복잡한 작동 원리를 하나씩 풀어가는 과정은 기후위기를 거대한 재난으로만 바라보던 시선을 조금씩 바꾸어놓는다. 아는 만큼 세계의 모습이 달라진다는 말이 이 책에서는 지식의 축적을 넘어, 살아 있는 세계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로 이어진다. 우리가 살아남는 일은 자연을 이기는 법을 배우는 데 있지 않다. 오래 살아온 생명들이 서로의 삶을 허락하며 만들어온 세계를 읽고, 그 안에서 인간이 감당해야 할 몫을 배워가는 데 있을 것이다.<br/><br/>✏️도서출판 갈매나무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31/55/cover150/k61213012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315575</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손끝에서 시작된 추적 - [기억의 무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50811</link><pubDate>Fri, 14 Aug 2026 16: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5081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32130922&TPaperId=1745081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99/39/coveroff/k53213092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32130922&TPaperId=1745081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기억의 무늬</a><br/>백희성 지음 / 북로망스 / 2026년 08월<br/></td></tr></table><br/>백희성의 『기억의 무늬』는 안면인식장애를 지닌 한 인물의 미제 사건 추적을 통해 ‘본다’는 행위의 의미를 전복한다. 프랑스의 패션학교에서 공부하는 카미는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대신 옷감의 질감과 걸음걸이, 신발의 형태, 향수의 종류, 손때가 묻은 자리처럼 타인이 쉽게 지나치는 감각적 정보로 사람을 구분한다. 작가는 카미의 관찰을 놀랄 만큼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인간이 타인을 인식하는 가장 익숙한 방식인 얼굴을 대신해 다른 감각들이 들어선다. 카미에게 사람은 얼굴이 아니라 하나의 촉감이고, 걸음의 리듬이며, 몸에 밴 냄새다.<br/><br/>이러한 감각의 전환은 곧 기억의 문제로 이어진다. 카미에게 사람의 표정은 ‘결코 열어 볼 수 없는 책’(179쪽)과 같다. 우리는 대화를 나눌 때 말만 듣지 않는다. 미세하게 변하는 표정과 눈빛, 입술의 움직임을 통해 말로 표현되지 않은 마음을 짐작한다. 하지만 카미에게 그 책은 처음부터 닫혀 있다. 그렇다고 그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옷을 입는 습관과 걸음걸이, 몸에 밴 냄새와 손의 움직임을 통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타인을 읽어낸다. 사람을 안다는 것은 결국 얼굴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얼굴 너머의 감각까지 읽어낼 때, 카미에게 사람의 윤곽은 비로소 선명해진다. 카미의 감각은 시각이 닿지 못하는 세계를 읽어내는 또 하나의 언어가 된다.<br/><br/>『기억의 무늬』 속 기억은 머릿속에 보관된 과거의 기록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오래된 옷과 가구, 천의 주름과 닳은 자리, 시간이 지나며 희미해지는 체취에도 과거가 남아 있다. 사람은 떠나면서 자신의 모습을 지워가지만, 자신이 사용했던 물건에는 생활의 흔적을 남긴다.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닌 낡은 물건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나간 시간을 붙잡아두는 유일한 매개가 될 수 있는 이유다. 이 작품에서 아기침대와 독특한 질감의 천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사물은 말하지 않지만, 말보다 오래 기억한다. 의식적으로 떠올리려 애쓰지 않아도 어떤 냄새나 촉감이 오래전의 한순간을 현재로 데려오는 것처럼, 손끝에 남은 감각은 시간이 지운 장면을 다시 불러낸다. 기억은 머릿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몸과 사물 사이에도 흔적을 남기며 이어진다.<br/><br/>그렇다면 기억은 얼마나 정확해야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카미가 오랫동안 붙잡고 있는 것은 어린 시절의 사건을 완벽하게 재현한 장면이 아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특정한 감촉과 몇 개의 이미지,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의 조각이다. 그는 그 조각을 하나씩 더듬으며 과거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기억은 사건을 그대로 보존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하는 사람의 현재가 과거에 스며들고, 하나의 감각에 붙어 있던 의미 역시 달라진다. 처음에는 공포를 불러왔던 흔적이 시간이 흐른 뒤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힐 수도 있다. 기억 속 해석은 달라질 수 있어도, 그때의 감각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카미의 손끝에 남은 것은 분명 실제였고, 새로운 사실이 더해질 때마다 같은 흔적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진다. 카미가 오랫동안 붙잡아온 기억은 진실을 가리는 동시에, 그 진실을 향해 나아갈 단서가 된다. 시간이 흐르고 새로운 사실이 더해질수록, 같은 흔적에도 다른 의미가 깃든다.<br/><br/>그리고 그 기억의 끝에는 사랑이 놓여 있다. 이 작품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사진 속 얼굴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옷에 밴 체취와 오래된 가구, 손길이 닿았던 물건처럼 아주 사소한 흔적들이 한 사람의 부재를 대신한다. 특히 시간이 흐를수록 사라져가는 흔적을 붙잡으려는 행동은 사랑이 무엇을 향하는 감정인지 생각하게 한다. 사람이 돌아올 수 없다면 그 사람이 남긴 것을 돌보는 일, 사라지는 냄새를 조금이라도 오래 간직하려는 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방식으로 한 사람의 흔적을 지켜내는 일. 사랑은 때때로 이런 모습으로 남는다. 동시에 사랑에는 죄책감도 따라붙는다. 너무 오래 자신을 탓한 사람은 사랑하는 이에게 다가가는 것조차 망설이게 된다. 사랑한다고 해서 언제나 상대의 삶에 들어갈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 속 사랑은 다정하기만 하지 않다. 그 안에는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미안함과 스스로에게 내리는 판단,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멀리서 바라보는 시간이 함께 놓여 있다. 때로 사랑은 다가가는 용기보다 물러서야 하는 이유를 더 오래 품기도 한다.<br/><br/>결국 카미가 발견하는 것은 자신에게 이미 존재했던 감각의 의미다.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을 원망했던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이 가진 다른 감각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보지 못해서, 더 느낄 수 있다는 것”(300쪽)이라는 깨달음은 단순한 위로로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감각을 결핍으로 여겨왔던 카미가 그 감각을 새로운 방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의미다. 볼 수 없었던 세계에는 그만이 알아볼 수 있는 흔적들이 있었고, 그 흔적들은 결국 기억으로 이어졌다.<br/><br/>‘기억의 무늬’라는 제목은 그렇게 만들어진 기억의 형태를 닮았다. 기억은 선명한 사진처럼 남지 않는다. 어떤 부분은 닳고, 어떤 부분은 흐려지고, 어떤 부분에는 새로운 의미가 덧입혀진다. 사람은 떠나도 그 사람이 만졌던 것, 입었던 것, 사랑했던 것에는 시간이 남는다. 기억은 지나간 시간보다 그 시간을 증명하는 흔적을 오래 간직한다. 백희성은 미스터리를 따라가는 이야기 속에 이 감각을 촘촘하게 새겨 넣는다. 얼굴을 볼 수 없는 사람의 손끝에서 시작된 추적은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기억과 사랑을 향한다. 어떤 기억은 눈보다 손끝에 오래 남고, 어떤 사랑은 사람의 얼굴이 사라진 뒤에도 그 사람이 남긴 흔적을 통해 계속 살아간다.<br/><br/>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많은 것들이 남는다. 한때 몸을 감싸던 옷의 질감, 매일 손이 닿던 가구의 표면, 시간이 지나며 희미해지는 냄새까지. 『기억의 무늬』는 그렇게 사라지는 것들 사이에서 한 사람의 존재를 더듬어가는 이야기다. 그래서 감각으로 세계를 읽는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 평범한 사물에 깃든 시간과 기억을 발견하는 이야기에 마음을 두는 독자라면 이 작품의 손끝을 따라가 볼 만하다. 미스터리의 긴장 속에서 기억과 진실의 관계를 생각하고 싶은 독자, 상실과 죄책감 속에서도 사랑이 어떤 모습으로 남을 수 있는지 바라보고 싶은 독자에게도 잘 어울린다. 얼굴을 잃어버린 사람의 손끝에서 시작된 추적은 결국 보이지 않는 것들의 존재를 증명한다.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일은 그 사람의 모습을 되살리는 데만 있지 않다. 그가 만졌던 것과 사랑했던 것, 남겨놓은 작은 흔적들을 오래 바라보는 일에도 기억은 깃든다. 그리고 때로 그 흔적들은 시간이 지운 얼굴보다 더 오래 한 사람을 말해준다.<br/><br/>✏️소정의 원고료와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99/39/cover150/k53213092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8993923</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차이 아래 묵묵히 이어지는 수많은 삶 - [오션 블루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49106</link><pubDate>Thu, 13 Aug 2026 20:2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4910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02139941&TPaperId=1744910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46/85/coveroff/k20213994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02139941&TPaperId=1744910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오션 블루스</a><br/>슬리만 카데르 지음, 이수원 옮김 / 니케북스 / 2026년 06월<br/></td></tr></table><br/>파본은 책의 내용과 무관한 결함이다. 모서리가 찍히거나 페이지가 접혔다고 해서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션 블루스』를 읽으며 이 사소한 결함이 작품 속 ‘결핍’과 묘하게 겹쳐 보였던 것은 그래서다. 사회는 사람에게도 끊임없이 흠집을 매긴다. 출신과 국적, 가난과 직업을 이유로 누군가를 더 낮은 자리로 밀어내고, 그 흔적을 능력의 부족처럼 취급한다. 파리 변두리에서 성장한 북아프리카 이민자의 아들 왐 역시 그런 분류에서 자유롭지 않다. 카리브해의 초호화 유람선 오션킹에 올라 그가 처음 맡은 일은 가장 낮은 단계의 잡역부 ‘조커’. 그러나 작품은 왐의 결핍을 극복해야 할 흠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 사람의 출신과 환경이 어떻게 사회적 위치로 번역되는지를 보여주며, 그 위치에 붙은 이름이 인간의 가능성까지 결정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br/><br/>오션킹은 이 작품의 배경인 동시에 하나의 사회적 모형이다. 수천 명의 관광객이 햇빛과 바다를 소비하는 동안 그 아래에서는 훨씬 많은 노동자가 배를 유지한다. 객실을 청소하고, 하수관을 뚫고, 수영장과 기관실을 관리하고, 공연이 끝난 자리를 정리하는 일처럼 관광객의 시야에서 사라져 있는 노동이 유람선의 화려한 풍경을 지탱한다. 여기서 ‘바다 위’와 ‘바다 아래’는 단순한 공간의 차이를 넘어 계급적 위치를 가리킨다. 누구에게는 바다가 휴양의 풍경이지만 누구에게는 하루 종일 닿지 못하는 천장의 반대편에 존재한다. 더욱 냉정한 것은 그 노동의 분배마저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국적과 인종, 출신에 따라 맡게 되는 일이 달라지고, 유럽인은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의 업무를 맡는 반면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 출신 노동자들은 주방과 세탁, 청소 같은 업무에 집중된다. 오션킹은 바다 위에 떠 있는 도시인 동시에, 출생과 국적이 직업과 계급으로 번역되는 축소된 사회다.<br/><br/>우리가 일상에서 누리는 수많은 편리함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깨끗한 공간에는 청소하는 사람이 있고, 정돈된 식탁에는 그것을 준비한 사람이 있으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하루의 뒤편에는 누군가의 노동이 끊임없이 작동한다. 『오션 블루스』는 그 결과만 소비하던 시선을 과정으로 돌려놓는다.<br/><br/>이 지점에서 작품의 ‘소설적 르포르타주’라는 성격이 선명해진다. 르포르타주는 현실의 현장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방식이며, 이 작품의 현실성은 작가 슬리만 카데르의 이력과 맞물려 있다. 북아프리카 이민자의 아들로 파리 근교에서 성장한 작가는 실제로 카리브해의 호화 유람선에서 잡역부로 일했다. 그의 경험은 책 속 노동을 추상적인 사회 비판의 언어에서 현실의 감각으로 끌어내린다. 강력한 살충제, 막힌 하수관, 쌓여가는 음식 재료, 공연 뒤에 남은 오물 같은 구체적인 사물과 육체의 감각이 사회의 구조를 설명하는 언어가 된다. 작가는 노동자를 불쌍한 존재로 전시하는 대신, 화려한 관광 산업이 유지되는 과정을 그 내부에서부터 보여준다. 더구나 왐의 거칠고 경박한 언어와 빠르게 치고 나가는 문장은 이 세계를 지나치게 엄숙한 비극으로 만들지 않는다. 웃음은 현실을 희석하기보다 그 현실을 견디는 사람의 감각을 보존한다. 르포르타주가 현실을 기록하는 장르라면, 카데르는 그 현실에 살아 있는 인간의 목소리를 입힌다. 그래서 오션킹의 밑바닥은 통계나 보고서 속 숫자로 남지 않고, 냄새와 소음과 땀과 욕설이 뒤섞인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다가온다.<br/><br/>그런 의미에서 ‘조커’라는 직책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역설적인 이름이다. 조커는 유람선에서 가장 낮은 단계의 잡역부다. 정해진 전문 업무 없이 사람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투입되는 자리이기에, 사회적 위계만 놓고 보면 가장 불안정한 위치에 해당한다. 그런데 바로 그 불안정성이 왐에게는 이동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하나의 업무에 고정되지 않기 때문에 배의 여러 영역을 경험하고,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곳으로든 움직일 수 있다. 카드 게임의 조커가 특정한 패에 고정되지 않고 다른 카드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듯, 왐 역시 하나의 자리로 규정되지 않는다. 가장 낮은 위치에서 시작한 사람이 오히려 가장 많은 위치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바꾸어간다는 점에서 조커는 단순한 직책명이 아니라 이 작품이 바라보는 인간의 형상을 상징한다.<br/><br/>사회는 인간을 출신과 직업, 국적과 계급으로 분류하지만 삶은 그 분류표만큼 고정되어 있지 않다. 다만 이 작품은 그 가능성을 손쉬운 성공담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왐의 이동에는 노동과 능력만큼이나 우연과 운이 작용하고, 위로 올라간 뒤에도 그 자리가 영원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성공을 개인의 의지로만 설명하는 서사가 지워버리는 것은 바로 이 불확실성이다. 누구나 같은 출발선에 서지 않으며, 같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해서 같은 곳에 도착하지도 않는다. 갑판의 높이가 인간의 가치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차지하는 자리가 생각보다 우연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이 이 유람선의 풍경 아래에 놓여 있다.<br/><br/>파본된 책은 완벽한 상태의 책에서 밀려난 흔적을 지닌다. 그렇다고 그 책의 가치까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오션 블루스』가 바라보는 사람의 삶도 그와 닮았다. 사회가 결함으로 분류한 출신과 가난, 실패와 결핍은 한 사람을 설명하는 조건일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그 흔적을 가진 채 어디로 움직이는가에 따라 삶의 형태는 달라진다. 오션킹 역시 그렇다. 햇빛을 받는 사람과 그 햇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 사이에는 분명한 계급적 차이가 있지만, 배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갑판 위의 화려함만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배를 움직이는 수많은 손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한배에 타고 있다’는 말이 의미를 가지려면, 적어도 내가 서 있는 갑판 아래에 누가 있는지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조금 찍힌 책 한 권이 오히려 그 책만의 흔적을 갖게 되듯, 인간의 삶 역시 흠을 지운 뒤에야 온전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같은 바다를 건너면서도 서로 다른 갑판에 서 있는 사람들. 『오션 블루스』는 그 높이의 차이를 보여주는 동시에, 결국 하나의 배를 움직이는 것은 그 차이 아래 묵묵히 이어지는 수많은 삶이라는 사실을 기록한다.<br/><br/>바다 위에는 햇빛이 있고, 그 아래에는 그 햇빛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오션 블루스』는 화려한 유람선의 갑판에서 시선을 거두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노동은 국적과 피부색에 따라 나뉘고, 사람의 출신은 직업의 이름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이 책은 보이지 않는 노동의 구조를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 이민과 계급의 경계를 문학으로 읽고 싶은 사람에게 특히 잘 어울린다. 실제 유람선 노동 경험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가 거친 농담과 속도감 있는 문장 속에서 펼쳐지는 만큼, 르포르타주와 소설의 경계가 궁금한 독자나 정해진 성공의 궤도에서 벗어난 성장담을 찾는 사람에게도 권하고 싶다. 누구나 같은 배를 타고 있지만 같은 갑판에 서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조차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우연과 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 책은 유쾌하면서도 집요하게 기록한다. 바다를 건너는 동안 사람의 자리를 정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 자리는 정말 자신의 것인지 돌아보게 하는 한 권이다.<br/><br/>✏️도서출판 니케북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46/85/cover150/k20213994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5468591</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세계를 옮겨가는 긴 여행 - [언어화를 위한 소설 사고 - 모호한 아이디어를 독자에게 전달되는 말로 바꾸는 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48352</link><pubDate>Thu, 13 Aug 2026 13:0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4835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42130735&TPaperId=1744835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84/98/coveroff/k34213073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42130735&TPaperId=1744835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언어화를 위한 소설 사고 - 모호한 아이디어를 독자에게 전달되는 말로 바꾸는 힘</a><br/>오가와 사토시 지음, 박대겸 옮김 / 황금가지 / 2026년 07월<br/></td></tr></table><br/>말이 되지 못한 생각은 어디에 머무를까. 분명 무언가를 느끼고 있고, 전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는데 막상 입을 열거나 펜을 들면 손에 잡히는 것은 몇 개의 단어뿐인 순간이 있다. 마음속에서는 선명했던 장면이 언어로 옮겨지는 순간 흐려지기도 한다. 생각은 언어보다 먼저 태어난다고 믿어왔지만, 오가와 사토시의 『언어화를 위한 소설 사고』를 읽으며 그 믿음이 조금 달라진다. 어쩌면 생각은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고,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말이 되지 못한 생각은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감정과 경험의 덩어리이고, 그것에 하나씩 언어를 부여하는 동안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게 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문장을 만드는 일에 앞서 흐릿한 마음의 풍경에 윤곽을 부여하는 일이다.<br/><br/>그래서 이 책이 말하는 ‘언어화’는 단순히 머릿속의 생각을 글로 옮기는 기술이 아니다. 오가와 사토시는 소설을 쓰는 과정을 통해 생각을 정리하고, 구체화하고, 다시 바라보는 방법을 보여준다. 특히 추상화와 개별화를 오가는 사고법은 소설가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계까지 어떻게 이야기로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설명하면서, 생각이 구체적인 이야기로 변해가는 과정까지 보여준다. 하나의 경험에서 반복되는 구조를 발견하고 그것을 다른 상황에 적용한 뒤 다시 구체적인 장면으로 내려오는 과정. 익숙한 세계에서 낯선 세계로 건너가는 이 움직임 속에서 창작은 무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 사이에 숨어 있던 관계를 발견하는 작업이 된다. 세상을 오래 바라본 사람의 눈에는 현실 곳곳에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이야기들이 흩어져 있다. 창작의 시작에는 특별한 영감보다 세계를 유심히 바라보는 눈이 필요하다.<br/><br/>그렇다면 그렇게 발견한 생각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닿을 수 있을까. 결국 소설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세계와 독자가 마주할 세계 사이의 거리를 생각해야 한다. 작가에게는 너무나 분명한 장면도 독자에게는 처음 마주하는 세계다. 작가는 인물의 과거를 알고 있고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고 있지만 독자는 첫 문장 앞에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소설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모두 꺼내놓기보다, 독자가 지금 무엇을 알고 있는지 헤아리며 필요한 정보를 필요한 순간에 건네는 일이다. 같은 문장도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만들고, 같은 사건도 무엇을 먼저 알고 무엇을 나중에 아느냐에 따라 독자가 경험하는 이야기는 달라진다. 결국 소설에서 정보의 배치는 곧 독자의 경험을 설계하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인 동시에 독자가 이야기를 발견해갈 순서를 조율하는 사람이기도 하다.<br/><br/>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하나의 이야기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 순간, 소설은 삶과 닮아온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말을 주고받지만, 말한다고 해서 언제나 마음이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맥락과 상대가 알고 있는 맥락은 다르고, 같은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그 안에 담아둔 경험은 서로 다르다. 결국 소통이란 같은 생각을 갖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에 가깝다. 오가와 사토시가 소설을 소통의 문제로 바라보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글을 쓰는 순간 작가는 혼자 남지 않는다. 아직 만나지 않은 독자를 상상해야 하고, 자신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낯선 사람의 눈으로 다시 살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문장은 특별한 표현을 골라내는 능력에서 태어나기보다, 내 생각이 타인에게 어떤 모습으로 도착할지를 오래 고민한 끝에 만들어진다. 문체 역시 화려한 장식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고 잘라내어 건네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br/><br/>책을 읽을수록 오가와 사토시라는 소설가가 소설을 얼마나 깊고 집요하게 생각해왔는지 새삼 놀라게 된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야기하는 대상은 줄곧 소설인데, 그 안에서 세계의 규칙을 만드는 법부터 인물의 과거와 현재, 정보의 배치, 문체, 아이디어, 복선과 독자의 읽기까지 수많은 문제를 하나의 사고 체계 안에서 연결한다. 특히 ‘복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의 생각은 소설을 읽는 방식까지 바꾸어놓는다. 흔히 복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작가가 특별한 의미를 숨겨둔 몇몇 문장을 가리키지만, 오가와 사토시는 소설 속 모든 문장이 이후의 사건과 연결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복선을 따로 구분하는 일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한 문장의 의미는 그 문장이 놓인 순간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뒤이어 나타나는 사건과 함께 계속 달라진다. 그러니 소설 속 모든 문장은 하나의 가능성을 품고 독자의 머릿속으로 들어간다. 이야기는 작가가 모든 의미를 미리 정해두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문장과 사건의 관계를 새롭게 발견하며 읽어가는 과정 속에서 계속 모습을 바꾼다. 작가가 이야기를 설계하는 사람이라면, 독자는 그 설계 안에서 의미를 다시 구성하는 사람이다.<br/><br/>그래서 이 책은 창작론을 읽고 있다는 감각을 넘어,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일상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하고, 복잡한 상황에서 중요한 구조를 찾아내고,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해야 한다. 직장에서 누군가에게 업무를 전달할 때도, 친구에게 마음을 설명할 때도, 한 권의 책을 읽고 다른 사람에게 그 책을 소개할 때도 자신의 생각을 구조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머릿속에 있는 것을 정확하게 전달하려면 먼저 그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알아야 하고, 그다음 그것을 받아들일 사람의 자리에서 다시 바라봐야 한다. 소설을 쓰기 위해 훈련한 사고가 삶의 여러 장면에서 쓰일 수 있는 이유다. 창작의 기술 속에는 복잡한 현실에서 핵심을 찾아내고 그것을 타인에게 이해 가능한 형태로 바꾸는 사고의 기본적인 움직임이 들어 있다.<br/><br/>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는 결국 다시 쓰는 사람에게 돌아온다. 책을 사랑하고 오랫동안 읽어온 사람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다. 읽는 동안에는 수많은 생각이 떠오르는데 막상 빈 종이를 펼치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어진다. 좋은 이야기를 쓰려면 먼저 완벽한 이야기가 머릿속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펜을 드는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 그러나 이 책은 완성된 생각을 기다린 뒤 쓰기 시작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쓰는 과정 자체를 사고의 과정으로 바라보게 한다. 쓰고 고치고 다시 바라보는 동안 처음에는 알지 못했던 자신의 생각이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창작의 시작에 필요한 것은 완성된 이야기보다 아직 언어를 얻지 못한 어떤 감각을 끝까지 바라보려는 마음일 것이다.<br/><br/>글을 쓰는 동안 발견하는 것은 이야기만이 아니다.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 사람인지, 무엇에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인지, 어떤 이야기를 오래 바라보고 싶은 사람인지도 조금씩 드러난다. 책 속에서 오가와 사토시가 끊임없이 소설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처럼, 한 편의 글을 쓰는 사람에게도 자신의 생각을 언어로 오래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언어는 생각을 담아두는 그릇이면서 동시에 생각의 모양을 바꾸는 도구이기도 하다. 흐릿했던 감각에 이름이 생기고, 흩어져 있던 생각들이 하나의 문장 안에서 서로 연결되는 순간, 글쓰기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br/><br/>『언어화를 위한 소설 사고』는 소설을 잘 쓰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무엇을 쓰고 싶은지 찾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만들고, 나와 다른 세계를 가진 누군가에게 건네는 일. 결국 창작은 한 사람의 머릿속에 머물던 세계를 타인의 세계로 옮겨가는 긴 여행이다. 그 여행을 위해 필요한 것은 타고난 재능보다 오래 바라보고 정확하게 생각하며 끝까지 언어를 찾는 태도일 것이다. 책을 읽은 뒤 다시 펜을 들어볼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든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이 건넨 가장 좋은 창작론을 이미 경험한 셈이다.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생각 하나가 마음속에 있다면, 이제 그것을 조금씩 불러내어도 좋겠다. 쓰기 시작하는 순간, 오래 찾던 자신의 이야기가 그제야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br/><br/>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이야기의 행선지를 따라가는 일만은 아니다. 한 문장을 읽고 책장을 넘기는 사이, 내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뒤늦게 알아차리는 순간이 생긴다. 그때 비로소 감상은 생각의 모양을 갖추고, 생각은 말이 될 준비를 한다. 소설을 읽고도 무엇을 느꼈는지 설명하기 어려웠던 사람, 수많은 책을 읽었지만 자신의 독서 경험을 글로 옮기려 하면 막막해지는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이야기를 쓰고 싶지만 어디에서부터 생각을 시작해야 할지 몰랐던 사람에게도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이 책은 소설가를 위한 기술서에서 그치지 않는다. 읽기와 쓰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더 또렷하게 만들고 싶은 사람이라면, 소설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읽은 문장들은 책을 덮는 순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재료가 되어 다시 우리 안에서 조합된다. 『언어화를 위한 소설 사고』는 그 조합의 과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막연했던 감상을 하나의 문장으로 건져 올리는 법을 이야기한다. 읽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소설이 어떻게 다시 쓰이는지 보여주는 책이다.<br/><br/>✏️도서출판 황금가지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84/98/cover150/k34213073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849853</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돌도끼를 만든 손, 바다를 바라보던 눈 - [실험하는 고고학자 - 고대 인류 문명의 모습과 소리, 냄새, 맛을 재현하는 과학자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46566</link><pubDate>Wed, 12 Aug 2026 15:0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4656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02130125&TPaperId=1744656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32/39/coveroff/k90213012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02130125&TPaperId=1744656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실험하는 고고학자 - 고대 인류 문명의 모습과 소리, 냄새, 맛을 재현하는 과학자들</a><br/>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6년 08월<br/></td></tr></table><br/>깨진 토기 하나, 그을린 돌 하나, 오래된 뼈 한 조각에도 누군가의 하루와 문명이 숨어 있다. 고고학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린 시절 한 번쯤 품어보았을 낭만이 떠오른다. 땅속에 묻힌 유물을 찾아내고, 오래전 사라진 문명의 비밀을 밝혀내는 사람들. 샘 킨의 『실험하는 고고학자』는 그 낭만적인 상상을 조금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 유물을 찾아내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유물이 어떤 손에서 만들어졌고 어떤 몸을 거쳐 사용되었는지 직접 실험하며 과거에 다가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고고학자의 가장 중요한 도구가 삽이 아니라 호기심일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br/><br/>약 7만 5천 년 전 아프리카에서 1500년대 멕시코까지 이어지는 여정 속에서 책은 돌을 깨고, 음식을 만들고, 배를 띄우고, 무기를 던지고, 치료법과 생활 기술을 재현하는 실험들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시대와 문명이 등장하지만 그들을 묶어주는 것은 남겨진 흔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그 흔적이 말하는 바를 직접 확인해보려는 태도다. 역사에 대한 호기심이 과학적인 방법을 만날 때, 과거는 박물관의 유리장 안에 놓인 유물에서 인간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실험의 대상으로 옮겨간다.<br/><br/>오래된 돌 하나를 바라보며 누군가가 그것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직접 돌을 깨서 도구를 만들어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일 것이다. 나에게는 산책하다가 주워온, 단면이 날카롭게 깨진 돌이 하나 있다. 택배를 뜯는 데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는 돌이다.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손에 쥐지만, 이것을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노동이 필요했을까. 책 속 실험고고학자들은 바로 이런 의문을 실제 행동으로 옮긴다. 과거의 기술을 바라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직접 만들어보고, 사용해보고, 실패하면서 유물에 남은 형태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제작 과정과 사용의 감각을 살핀다. 그러면 박물관의 유물에 붙어 있던 설명만으로는 알기 어려웠던 것이 드러난다. 기술에는 시간이 필요했고, 편리해 보이는 도구 하나에도 몸의 감각과 수많은 시행착오가 쌓여 있었다. 유물의 형태를 인간의 노동으로 되돌려놓는 순간, 과거의 인간은 막연한 ‘원시인’이나 특정 문명의 이름만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손을 움직이고 실패를 견디며 방법을 찾아냈던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이 드러난다.<br/><br/>이때 실험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과거에 관한 지식을 검증하는 방법이 된다. 고대의 방식으로 빵을 굽고 맥주를 만들며, 폴리네시아의 항해 기술을 살피고, 로마의 생활 기술을 재현하고, 오래된 치료법을 시험하는 과정에서는 성공만큼 실패도 중요한 단서가 된다. 예상했던 방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과거에 대한 설명 역시 다시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직접 해보는 과정에서 책이나 유물만 바라볼 때는 보이지 않던 노동의 양과 기술의 정교함이 드러나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역사적 설명 속에 얼마나 많은 추론과 가정이 들어 있는지도 확인하게 된다. 과거의 지식은 이미 완성된 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흔적과 그 흔적을 해석하는 수많은 시도 위에 세워져 있다. 실험은 그 가설을 실제 세계에 가져와 움직여보는 일이며, 실패까지 포함해 과거에 대한 이해를 조금씩 조정하는 과정이다.<br/><br/>역사책에는 연도와 사건이 남고, 박물관에는 도구와 유물이 남는다. 그러나 그 물건을 사용했던 사람의 손에 전해졌던 진동이나, 불 앞에서 흘렸을 땀, 갓 구운 빵의 냄새, 낯선 바다 위에서 느꼈을 두려움까지 기록되지는 않는다. 사람은 눈으로만 한 시대를 살아가지 않는다. 먹고, 만지고, 듣고, 냄새 맡고, 아파하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실험고고학이 복원하는 것은 기술의 기능만이 아니라 그 기술을 사용했던 몸의 경험이기도 하다. 책이 고대 문명의 소리와 냄새, 맛까지 되살리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역사를 시각적인 기록에서 오감의 경험으로 넓히는 순간, 문명이라는 단어 뒤에 가려져 있던 개인의 생활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 시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무엇을 이루었는지와 더불어,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만들며 어떤 감각 속에서 하루를 보냈는지를 상상하는 일이기도 하다.<br/><br/>그러나 과거를 되살리는 일에는 언제나 닿을 수 없는 부분이 남는다. 이 책에서 실제 고고학 실험에 관한 이야기와 작가가 상상한 짧은 역사적 이야기 사이에 느껴지는 거리 역시 그런 한계를 보여준다. 실험은 “이것이 실제로 가능했는가”를 묻고, 상상은 “그렇다면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은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를 그려본다. 우리는 과거를 있는 그대로 불러낼 수 없다. 남겨진 흔적을 살피고, 가능한 방법을 실험하고, 그 사이의 빈 곳을 조심스럽게 상상하면서 사라진 세계의 모습에 다가갈 뿐이다. 고고학이 다루는 것은 결국 사라진 세계의 잔해이므로, 그 세계에 대한 설명에는 필연적으로 해석이 개입된다. 그래서 이 책의 실험은 과거를 확정하는 방법이라기보다 과거에 대한 우리의 상상을 더 단단한 근거 위에 올려놓는 방법으로 읽힌다. 과학과 상상은 서로 멀리 떨어진 영역처럼 보이지만, 사라진 시간을 이해하는 과정에서는 서로의 빈 곳을 메우며 함께 작동한다.<br/><br/>그래서 이 책에서 고고학자들이 하는 일은 오래된 물건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되살아나는 것은 물건보다 사람이다. 돌도끼를 만든 손, 빵을 굽던 손, 바다를 바라보던 눈, 상처를 치료하던 손길, 몸에 문신을 새기던 피부. 유물은 그들의 삶에서 아주 작은 일부만을 남겼지만, 그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문명의 역사는 다시 인간의 역사로 좁혀진다. 피라미드나 로마의 도로, 폴리네시아의 항해와 아즈텍의 의례를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닿기 어려운 곳에,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몸과 노동이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문명도 결국은 수많은 사람이 반복해서 움직인 하루들 위에 세워진다. 실험고고학은 바로 그 하루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과거를 거대한 사건들의 연속으로 바라보던 시선을 손과 발, 음식과 도구, 피로와 감각이 있는 생활의 자리로 돌려놓는 것이다.<br/><br/>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호기심을 생각하게 된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서 많은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모르는 것을 하나씩 알아가는 동안 세상은 편리해지지만, 동시에 이상한 일이 줄어든다. 어린 시절에는 돌 하나만 주워도 이것저것 궁금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이 그냥 돌이라는 사실만으로 충분해진다. 질문하기 전에 이미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험고고학자들은 아주 오래된 돌 하나 앞에서도 멈춰 선다. 누가 만들었을까. 어떻게 만들었을까. 정말 이런 방식으로 사용했을까. 직접 해보면 어떨까. 그리고 궁금한 것을 확인하기 위해 시간을 들이고, 몸을 움직이고, 실패를 반복한다. 고고학자의 낭만을 오래된 유물이나 잃어버린 문명에서 찾는다면 이 책이 보여주는 낭만은 조금 다르다. 그것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수 있는 흔적 앞에서 멈춰 서는 마음,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에 다시 의문을 품는 태도, 사라진 시간을 향해 호기심을 보내는 사람의 자세에 있다.<br/><br/>『실험하는 고고학자』는 그렇게 과거를 탐험하는 책인 동시에, 현재를 바라보는 우리의 감각을 되돌려놓는 책이다. 깨진 돌 하나에도 누군가의 손이 있었고, 오래된 음식 하나에도 한 사람의 하루가 있었으며, 지금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사용하는 도구에도 처음 그것을 만들었던 누군가의 시행착오가 있었다. 과거는 먼 곳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삶 곳곳에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것을 발견하는 일은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익숙해서 보이지 않던 것을 다시 낯설게 바라보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br/><br/>오래된 돌 하나를 손에 쥐고 그것이 누군가의 손에서 어떻게 태어났을지 상상하는 순간, 지나간 시간은 박물관의 유리 너머에서 조금씩 걸어 나온다. 고고학과 역사에 오래된 문명의 낭만을 품어온 사람이라면, 그리고 과학을 공식과 숫자보다 직접 해보고 실패하며 알아가는 이야기로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의 실험들이 꽤 근사한 모험이 되어줄 것이다. 특히 도구와 음식, 몸과 노동처럼 거대한 역사 뒤에 가려진 생활의 흔적을 들여다보기를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한 시대가 전혀 다른 질감으로 펼쳐진다. 어린 시절 돌멩이 하나에도 이유를 붙이고, 사소한 것 하나에도 “왜?”를 붙였던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어쩌면 이 책이 되살리는 것은 오래된 문명만이 아닐 것이다. 너무 많이 알고 너무 익숙해진 탓에 잠시 잊고 있던, 세상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능력까지 함께 꺼내 보여주는 책이다.<br/><br/>✏️도서출판 해나무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32/39/cover150/k90213012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323912</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조각보 같은 이야기는 난민의 수치다 - [슬픔은 다 거짓이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44844</link><pubDate>Tue, 11 Aug 2026 17: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4484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22130321&TPaperId=1744484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45/56/coveroff/k62213032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22130321&TPaperId=1744484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슬픔은 다 거짓이야</a><br/>대니얼 나예리 지음, 김래경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6년 08월<br/></td></tr></table><br/>이야기는 사람을 어디까지 살게 할 수 있을까. 대니얼 나예리의 『슬픔은 다 거짓이야』는 이 질문에서 시작하는 듯하다. 열두 살 소년 호스로는 이란을 떠나 두바이와 이탈리아의 난민 캠프를 거쳐 미국에 정착한다. 낯선 학교에서 아이들은 그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그가 살아온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고향도, 가족도, 자신을 둘러싼 언어도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호스로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이야기다.<br/><br/>처음에는 이 이야기가 어디로 향하는지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미국 학교에서 벌어지는 소년의 일상 사이로 페르시아의 오래된 설화가 끼어들고, 가족의 과거가 나타났다가 다시 역사와 신화로 건너간다. 한 소년의 난민 이야기를 읽고 있다고 생각한 순간 수백 년 전의 왕과 사랑에 빠진 여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듯했던 이야기들이 하나의 책 안에서 겹쳐지는 것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고향을 기억하는 일도, 가족의 역사를 되짚는 일도 반듯한 순서로 이어질 수는 없다. 호스로의 기억 역시 그렇다. 조각난 시간과 희미한 장면,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와 스스로 상상한 장면들이 뒤섞여 하나의 삶을 이룬다. 이 낯선 형식은 결국 한 소년이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br/><br/>그 구조를 이해하고 나면 작품 속에서 반복되는 『천일야화』가 선명하게 보인다.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는 죽음을 앞둔 왕에게 매일 밤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 동안 그녀의 목숨도 끝나지 않는다. 호스로 역시 셰에라자드처럼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론 한 사람은 왕에게, 다른 한 사람은 교실의 아이들에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둘 모두 이야기하는 동안 자신의 존재를 지켜낸다. 셰에라자드에게 이야기는 죽음을 하루씩 미루는 방법이었다면, 호스로에게 이야기는 자신이 살아온 세계가 정말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아무도 자신의 고향을 보지 못했고, 자신의 기억을 알지 못하며, 자신의 삶을 대신 증언해줄 사람도 없는 곳에서 그는 이야기로 자신을 세계 안에 세운다. 그래서 호스로에게 이야기를 멈춘다는 것은 단순히 말할 것을 잃는 일이 아니다.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설명할 마지막 언어까지 잃는 일이다.<br/><br/>그렇다면 이야기 속에 섞여 있는 기억의 오류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호스로의 기억은 완전하지 않다. 가족에게 들은 이야기와 자신의 기억이 어긋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부분은 상상으로 이어 붙인다. 어린 시절 확실하게 믿었던 한 장면의 진실조차 나중에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이 작품의 독특한 제목이 모습을 드러낸다. 원제는 『Everything Sad Is Untrue』. 그 뒤에는 ‘A True Story’라는 문구가 붙는다. 슬픈 것은 모두 사실이 아니라는 말처럼 보이지만, 호스로가 겪은 슬픔은 분명 현실이다. 고향을 잃은 일도, 가족이 흩어진 일도, 난민으로 살아가는 일도, 낯선 땅에서 차별받는 일도 거짓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거짓일까. 아마 슬픔이 영원히 삶의 모습을 결정할 것이라는 생각일 것이다.<br/><br/>이 책은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깔끔하게 가려내는 이야기보다,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기억하고 이야기하는지를 보여준다. 기억은 과거를 그대로 보관하는 창고가 아니라 지금의 내가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바라보는 방식일 수 있다. 조금 틀린 기억이라고 해서 그 안에 담긴 삶까지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확히 기억할 수 없기에 인간은 이야기를 만든다.<br/><br/>호스로가 미국에서 자신의 이름 대신 ‘다니엘’로 불리게 되는 장면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 하나가 바뀌는 순간, 그가 살아온 세계의 일부도 함께 낯설어지는 듯하다. 이란에서의 삶과 가족, 언어와 음식,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기억이 하나씩 뒤로 물러난다. 고향을 잃는다는 것은 결국 장소 하나를 잃는 일을 넘어 그곳에서의 나를 잃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호스로는 이야기 속에서 고향을 다시 만든다. 이스파한의 풍경과 가족의 역사, 오래된 전설을 들려주는 동안 돌아갈 수 없는 세계가 잠시 현재로 돌아온다. 이야기 속에서는 잃어버린 이름도, 오래된 기억도 다시 불릴 수 있다.<br/><br/>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슬픔을 신화로 바꾼다는 말은 현실을 아름답게 꾸며내는 일이 아니다. 이란을 떠나야 했던 이유도, 난민으로 살아온 시간도, 낯선 땅에서 마주한 차별과 폭력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호스로는 그 슬픔을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로 바꾼다. 출판사가 말한 ‘가혹한 역사를 등지고 쏘아 올린 눈부신 자유의 신화’라는 표현도 이 지점에서 이해된다. 신화는 고통을 지우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삶의 나머지를 함께 담기 위해 만들어진다. 슬픔을 이야기로 바꾸는 순간, 과거는 더 이상 자신을 짓누르기만 하는 기억으로 남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언어가 된다.<br/><br/>인간을 지탱하는 것이 언제나 희망일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희망은 때때로 너무 먼 미래를 바라보게 한다. 언젠가는 나아질 것이라는 약속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존엄은 이미 지나온 시간을 함부로 지우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호스로에게 필요한 것은 언젠가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라는 확신보다 자신이 살아온 삶에도 이야기할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면 다시 이야기하고, 기억이 완전하지 않다면 그 빈자리까지 품은 채 이야기한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이름과 고향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 소년이 낯선 세계에서 자신을 지키는 방식. 그것만으로도 한 사람은 자신에게서 빼앗긴 삶을 조금씩 되찾을 수 있다.<br/><br/>『슬픔은 다 거짓이야』라는 제목은 그래서 슬픔을 부정하는 말로 읽히지 않는다. 슬픔은 분명 진실이다. 다만 슬픔이 삶의 마지막 문장이라는 믿음은 거짓일 수 있다. 호스로가 셰에라자드처럼 이야기를 이어가는 동안 과거는 다시 목소리를 얻고, 사라진 사람들은 이야기 속에서 이름을 되찾는다. 이야기는 지나간 시간을 되돌려놓지 못하고, 잃어버린 고향을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계속 말할 수 있다면, 상실 이후에도 삶은 다른 문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그 작은 가능성이다. 슬픔을 잊지 않으면서도 슬픔만으로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 것.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면서도 그 기억 속에 영원히 머물지 않는 것. 인간은 슬픔을 없애며 살아갈 수 없어서, 그것을 자신의 이야기로 바꾸며 다시 살아갈 자리를 만들어간다. 이야기가 가진 가장 오래된 힘은 바로 그것일 것이다. 끝나버린 삶을 되돌리는 힘이 아니라, 끝났다고 믿었던 삶에서 다시 한 문장을 시작하는 힘.<br/><br/>잃어버린 것을 모두 되찾을 수는 없어도, 그것을 이야기하는 동안 우리는 사라진 삶의 자리를 다시 마련할 수 있다. 『슬픔은 다 거짓이야』는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가 포개지는 『천일야화』의 구조를 사랑하는 독자에게, 낯선 땅에서 자신의 이름과 고향을 다시 써 내려가는 이주와 디아스포라의 서사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 특히 잘 어울린다. 기억의 빈틈 속에서도 무엇이 진실한 이야기인지 오래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 상실 이후에도 인간의 존엄이 어떻게 한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지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이 소설의 문장들을 따라가 보기를 권하고 싶다. 슬픔을 지워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마음에, 이 책은 조금 다른 생의 방식을 건넨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는 대신 그 시간에 새로운 이야기를 부여하는 것. 잃어버린 것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로 삶을 다시 써 내려가는 것.<br/><br/>✏️도서출판 해피북스투유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45/56/cover150/k62213032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455679</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느린 독서 - [읽고 읽고 말하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43402</link><pubDate>Mon, 10 Aug 2026 21:4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4340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325006&TPaperId=1744340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76/1/coveroff/893232500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325006&TPaperId=1744340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읽고 읽고 말하다</a><br/>아사쿠라 가스미 지음, 전화윤 옮김 / 현암사 / 2026년 07월<br/></td></tr></table><br/>책을 읽는 속도에도 사람마다 다른 시간이 흐른다. 누군가는 빠르게 다음 장으로 넘어가고, 누군가는 한 문장을 오래 바라본다. 젊음이 빠르고 노년이 느리다는 식으로 시간을 나누는 일은 익숙하지만, 아사쿠라 가스미의 『읽고 읽고 말하다』를 읽고 있으면 느림을 바라보는 시선부터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소설에는 평균 나이 85세의 독서모임이 등장한다. 여섯 명의 노인과 그들 사이에 들어온 카페 주인이자 소설가 야스다 마쓰오.<br/><br/>오타루의 카페 시트론에서 한 달에 한 번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딘가 느슨하고, 때로는 엉뚱하며, 젊은 사람의 눈에는 조금 답답해 보이기도 한다. 말이 자주 다른 곳으로 새고, 같은 이야기가 되풀이되며, 책을 읽다가 자신의 옛 기억을 꺼내놓느라 정작 정해진 이야기에서 멀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 느린 시간이 점점 다르게 보인다. 이들에게 느림은 뒤처짐이 아니라 한 문장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다. 책 속의 작은 장면 하나를 붙잡고 오래전의 얼굴을 떠올리고, 오래 묵혀둔 기억을 꺼내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다. 빠르게 읽는 것이 더 많이 읽는 일이라면, 느리게 읽는 것은 한 권의 책 안에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더 많이 포개는 일일 수 있다.<br/><br/>독서의 속도를 효율의 기준으로 바라보는 순간, 읽기는 얼마나 많이 읽었는가를 증명하는 행위가 되기 쉽다. 그러나 이 소설이 보여주는 독서는 정반대의 방향을 향한다. 한 문장을 읽고 멈추고, 그 문장에서 떠오른 기억을 말하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책으로 돌아온다. 읽기와 말하기가 반복되는 사이에 책은 더 이상 완결된 텍스트로 머물지 않는다. 한 사람이 읽은 문장은 다른 사람의 기억을 통과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얻고, 개인의 경험과 만나면서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특히 이들이 책을 소리 내어 읽는다는 점은 독서의 본질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문장은 눈으로 읽힐 때 개인의 내면에 머물지만, 목소리를 얻는 순간 타인에게 건너간다. 누군가의 목소리로 읽힌 문장을 듣고 자신의 기억을 꺼내놓는 순간, 독서는 혼자만의 행위에서 관계의 행위로 변한다. 결국 이 소설에서 읽기는 이해를 위한 과정이라기보다 기억을 불러내고 타인에게 건네는 과정에 가깝다.<br/><br/>그래서 같은 책을 읽고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내놓는 풍경이 중요해진다. 책 속에서는 특별할 것 없어 보였던 장면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오래전의 사랑을,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족의 얼굴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나온 삶의 한 시절을 불러낸다. 텍스트의 의미는 책 안에서 완성되어 독자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살아온 시간과 만나는 순간마다 새롭게 구성된다. 읽기는 텍스트의 의미를 찾아내는 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이라는 지평을 텍스트와 겹쳐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독서가 깊어질수록 책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간다. 무엇을 읽었는가보다 무엇을 떠올렸는가가 중요해지는 순간이다. 책은 타인의 이야기를 읽게 하는 동시에, 오래 잊고 있던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읽게 하는 매개가 된다.<br/><br/>그렇다면 사람을 만나는 일도 하나의 독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모두 저마다 한 권의 이야기를 살아가고 있으니, 누군가와 마주 앉아 그의 말을 듣는 일은 그 사람이 살아온 페이지를 읽는 일과 닮아 있다. 처음 만난 사람의 말 한마디에서 어린 시절을 짐작하고, 무심코 건넨 한 문장에서 오래 품어온 마음을 알아차리고, 같은 사건을 전혀 다른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나누는 대화 하나하나에도 작은 독서모임이 열린다. 책을 사이에 두고 앉은 사람들만 서로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 앉는 자리마다 각자의 삶이라는 책이 펼쳐지고, 대화는 그 책을 함께 읽어가는 시간이 된다. 한 사람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문장을 건네고, 그 문장이 다시 자신의 기억을 불러오는 순간, 대화는 단순한 정보의 교환을 넘어선다. 상대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을 단번에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쉽게 읽히지 않는 페이지 앞에서 서두르지 않는 일에 가까울 것이다.<br/><br/>이런 독서가 더욱 각별하게 다가오는 까닭에는 이들이 살아온 시간의 길이도 놓여 있다. 평균 나이 85세라는 숫자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긴 시간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한 달 뒤의 만남은 젊은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과 같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다음에 만나자’는 말은 언제나 다음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다시 책을 고르고, 모임을 준비하고, 빈자리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음 책을 펼치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상할 만큼 단단하다. 죽음을 멀리 밀어내야만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마지막 페이지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펼쳐진 페이지가 소중해진다. 이들에게 책을 읽는 일은 남은 시간을 세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아직 함께할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방식이다. 삶의 유한성은 일상을 특별한 사건으로 만들기보다, 평범한 만남의 가치를 조금 더 선명하게 만든다. 함께 읽을 책이 있다는 것, 다음 모임을 약속할 사람이 있다는 것,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 삶을 이루는 것은 어쩌면 그런 작고 반복되는 시간들일 것이다.<br/><br/>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죽음은 삶과 대립하는 사건으로만 놓이지 않는다. 누군가의 부재는 그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남겼는지를 오히려 드러낸다. 혼자 태어나 혼자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가 기억하는 얼굴에는 언제나 타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누군가에게 들려준 말이 그 사람의 기억 속에 남고, 내가 잊은 장면이 다른 사람에게는 선명한 기억으로 살아 있기도 하다. 이 독서모임이 오랜 시간 이어져온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책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읽었던 사람을 기억한다. 누군가 떠난 뒤에도 그 사람이 했던 말과 웃음과 낭독은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계속 살아간다. 한 사람의 삶이 끝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이야기도 같은 순간에 끝나는 것은 아니다. 기억은 혼자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건네며 이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함께 읽고 함께 말한 시간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형태를 얻는다. 공동체란 어쩌면 사라진 사람의 자리를 기억하는 방식이기도 하다.<br/><br/>이 지점에서 야스다 마쓰오가 겪는 창작의 문제 역시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야기는 누구의 것인가. 우리가 쓰고 말하는 것 가운데 완전히 혼자 만들어낸 것은 얼마나 될까. 어린 시절의 기억, 타인에게 들은 이야기, 책에서 만난 문장, 함께 보낸 시간과 그때의 감정은 오랫동안 기억 속에서 서로 얽혀 있다. 삶이 하나의 서사라면 그 서사를 구성하는 문장 역시 온전히 개인의 소유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렇게 책 한 권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삶이 천천히 오간다. 읽고, 읽고, 말하는 동안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다시 바라보고, 누군가의 시간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된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그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주는 일이 아니지만, 적어도 그 삶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다시 다른 사람에게 옮겨간다. 이야기란 그렇게 개인의 경계를 넘어 살아남는다.<br/><br/>그래서 『읽고 읽고 말하다』에서 독서모임은 책을 읽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인 동시에, 각자의 삶이 서로에게 읽히는 장소다.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 한 권의 책 앞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그래서 묘하게 아름답다. 느린 목소리로 문장을 읽고, 그 문장에서 오래된 기억을 꺼내고, 서로의 이야기를 기다린다. 한 사람의 자리가 비어도 책은 다시 펼쳐진다. 떠난 사람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책만이 읽어야 할 대상은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 저마다 한 권의 이야기를 살아가고 있으므로, 누군가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의 시간을 헤아리는 일 또한 한 사람을 읽는 일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함께 나누는 대화 하나하나가 작은 독서모임인지도 모른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며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며 또 다른 이야기를 읽는다.<br/><br/>독서는 혼자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마음에도 이제 조금 다른 풍경이 생긴다. 책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사람들은 같은 문장을 읽고도 서로 다른 삶을 이야기한다. 그 차이를 이해하려는 순간 책의 세계는 사람의 세계로 넓어진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면 독서의 풍경이 조금 넓어진다. 책을 펼쳐 문장을 읽는 시간뿐 아니라,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까지도 읽기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서로의 삶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오래 듣고 천천히 읽어갈 수는 있다. 한 사람을 알아가는 일에도 독서처럼 시간이 필요하다. 몇 개의 문장만으로 한 권의 책을 다 읽을 수 없듯이, 몇 번의 대화만으로 한 사람의 삶을 다 이해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읽고, 또 읽고, 말하는 시간이 필요하다.<br/><br/>아마 『읽고 읽고 말하다』가 말하는 독서의 기쁨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책은 우리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주기 위해 존재하지만, 때로는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다시 읽게 만든다. 느린 독서는 그 시간을 허락하고, 낭독은 그 이야기를 타인에게 건네며, 대화는 서로 다른 삶을 한자리에 불러온다. 결국 책 한 권을 읽는 일은 한 권의 세계를 읽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책을 읽으며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읽으며 다시 자신의 삶을 읽는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를 읽어주는 동안, 한 사람의 삶은 혼자 쓰는 책이 아니라 함께 기억되는 이야기가 된다.<br/><br/>책장을 넘기는 일에는 정해진 속도가 없고, 사람을 알아가는 일에도 정해진 순서는 없다. 오래 읽을수록 한 문장 안에서 더 많은 삶을 발견하게 되듯, 한 사람을 오래 바라볼수록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페이지들이 천천히 펼쳐진다. 그래서 이 책은 빠르게 많은 책을 읽어내는 일에 지친 사람에게, 그리고 책을 읽은 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 의미를 넓혀가는 사람에게 잘 어울린다. 사람을 쉽게 판단하기보다 천천히 알아가고 싶은 사람이라면 여섯 노인이 한 문장을 읽고 자신의 기억을 꺼내놓는 느린 시간을 오래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이 듦과 죽음, 기억과 공동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면, 마지막 페이지를 알고도 다음 책을 펼치는 이들의 모습에서 삶을 이어가는 또 다른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br/><br/>『읽고 읽고 말하다』는 결국 책을 읽는 법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사람을 읽는 법에 관한 이야기다. 한 권의 책을 함께 읽으며 서로의 시간을 건네고, 떠난 사람의 이야기를 기억하며, 다시 자신의 삶을 읽어가는 사람들. 책은 그렇게 혼자 펼치는 물건에서 함께 살아온 시간을 비추는 창으로 바뀐다. 책을 덮은 뒤에도 그 안에서 만난 사람의 목소리가 오래 남아 있다면, 독서는 이미 책의 마지막 장을 넘어선 셈이다. 한 문장을 읽고 건넨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기억을 깨우고, 그 기억이 다시 누군가의 삶을 바라보는 눈이 될 때, 책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시간이 된다. 좋은 독서는 많이 읽는 데서 완성되지 않는다. 한 권의 책이 건넨 사람과 시간, 그리고 그 책을 함께 읽었던 마음을 오래 기억하는 순간 비로소 독서는 삶의 일부가 된다.<br/><br/>✏️도서출판 현암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76/1/cover150/893232500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8760171</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변화한 세계에서 다시 생명이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일 - [소금호수, 우리가 사랑한 이상한 세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42643</link><pubDate>Mon, 10 Aug 2026 12:5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4264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82130123&TPaperId=1744264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31/44/coveroff/k58213012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82130123&TPaperId=1744264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소금호수, 우리가 사랑한 이상한 세계</a><br/>캐롤라인 트레이시 지음, 김민정 옮김 / 일레븐 / 2026년 07월<br/></td></tr></table><br/>생명은 가장 짠 곳에서도 살아간다. 소금호수의 물은 지나치게 짜고, 땅은 메마르며, 계절과 기후에 따라 호수의 모습마저 달라진다. 인간의 기준으로 바라보면 그곳은 생명이 살아가기 어려운 장소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곳에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생명들이 있다. 미생물과 브라인슈림프가 물속을 채우고, 그것을 먹기 위해 철새들이 먼 길을 날아온다. 어떤 생명은 혹독한 환경을 견디기 위해 자신의 몸과 삶의 방식을 바꾸고, 어떤 생명은 물이 차오르는 짧은 순간을 기다리며 존재한다. 캐롤라인 트레이시는 소금호수를 바라보며 생명이란 무엇인지, 살아남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천천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 시선은 자연을 향한 관찰에서 한 사람의 삶을 향한 성찰로 조용히 옮겨간다.<br/><br/>우리는 살아남는 일을 강해지는 일과 자주 겹쳐 생각한다. 더 많이 견디고, 더 단단해지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 그러나 이 책이 관찰하는 생명은 강인함을 다른 방식으로 정의한다. 소금호수의 생명들은 환경을 정복하지 않는다. 자신이 살아갈 조건을 스스로 선택할 수도 없다. 대신 달라지는 환경에 맞추어 삶의 방식을 바꾸고, 다른 생명과 맺는 관계 속에서 존재를 지속한다. 생존은 완고한 자기 보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변화에 반응하고, 새로운 조건을 받아들이고, 관계의 형태를 조정하는 능력 역시 생명을 지속시키는 힘이다. 트레이시가 포착하는 소금호수의 생태는 진화와 적응을 단순한 생물학적 개념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살아 있다는 것은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 방식을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가는 일이다.<br/><br/>그런 생명의 터전을 위협한 것은 자연의 가혹함만이 아니었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을 ‘쓸모’라는 기준으로 바라보았다. 농업에 사용할 수 있는 물, 도시를 움직이는 물, 산업을 성장시키는 물에는 가치가 부여되었지만, 짜서 마실 수도 없고 농사를 지을 수도 없는 물은 쉽게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강에서 호수로 흘러가야 할 물을 인간의 필요에 맞게 돌려놓는 동안 호수의 수위는 낮아졌고, 그곳에서 살아가던 생명들도 함께 삶의 터전을 잃었다. 그러나 호수는 처음부터 인간만을 위해 존재한 적이 없었다. 철새에게는 긴 여정에서 몸을 회복하는 쉼터였고, 작은 생명들에게는 하나의 세계였으며, 어떤 공동체에게는 역사와 기억이 깃든 장소였다. 인간에게 유용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존재의 가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자연을 바라보는 우리의 가장 오래된 오만은 세상의 가치를 인간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로 계산해왔다는 데 있을 것이다.<br/><br/>이 지점에서 『소금호수, 우리가 사랑한 이상한 세계』는 환경 위기를 기록하는 책에서 가치의 질서를 되묻는 책으로 확장된다. 소금호수의 몰락은 단순한 기후변화의 결과가 아니다. 물을 누구에게 배분할 것인지, 무엇을 생산할 것인지, 어떤 생명을 보호할 것인지 결정해온 인간의 역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자연을 관리한다는 명분 아래 인간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했고, 그 구분의 바깥으로 밀려난 존재들의 가치를 쉽게 지워왔다. 트레이시는 여러 소금호수의 역사를 따라가며 이 익숙한 질서에 제동을 건다. 자연은 인간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배경이 아니며, 생태계는 인간이 계산할 수 있는 효용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환경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은 결국 인간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다시 생각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br/><br/>그 전환은 작가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이어진다. 자연을 오래 관찰하면 ‘정상적인 생명’이라는 말 자체가 얼마나 협소한 기준 위에 놓여 있는지 드러난다. 암컷과 수컷의 역할이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해온 방식과 다르게 나타나는 생명도 있고, 극단적인 환경에서만 살아가는 생명도 있으며, 계절의 짧은 순간에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지는 생명도 있다. 자연은 애초부터 하나의 방식으로만 존재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하나의 정상적인 삶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고 다른 형태의 관계를 만들며 살아가는 삶 역시 자연스럽고 온전한 삶이라는 사실을 소금호수의 생태가 가르쳐준다. 다양성은 자연이 가진 예외적인 특성이 아니라 생명이 존재하기 위한 본래의 조건에 가깝다.<br/><br/>그래서 트레이시의 생태학은 자연을 보호하는 기술에만 머물지 않는다. 퀴어 생태학이라는 관점에서 자연과 인간을 함께 바라볼 때, ‘정상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재검토된다. 자연을 하나의 질서로 규정하고 그 바깥을 예외로 취급하는 방식은 인간 사회에서도 반복되어왔다. 작가는 소금호수의 낯선 생태를 통해 자신이 살아온 삶의 낯섦을 설명하고, 자신이 선택한 사랑과 관계 역시 세계가 가진 수많은 생존 방식 가운데 하나임을 발견한다. 자연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일과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일은 서로 다른 윤리적 과제가 아니다. 둘 모두 세계를 하나의 기준으로 재단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br/><br/>그렇게 소금호수에 관한 이야기는 어느 순간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영원하지 않은 것을 사랑하는 일, 변해가는 장소를 돌보는 일, 언젠가는 사라질 수도 있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일. 인간은 영원할 것 같은 것에 마음을 놓지만, 실제 삶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은 대부분 유한하다. 사람도 장소도 계절도 언젠가는 달라진다. 그렇다면 사랑은 영원성을 약속받은 대상을 소유하는 감정이 아니라, 사라질 가능성을 품은 존재에게 시간을 내어주는 행위다. 이 책에서 자연을 돌보는 일은 그래서 거대한 구호가 되지 않는다. 물이 줄어드는 호수를 바라보고, 그곳을 떠날 수 없는 생명을 살피고, 변화한 환경에서도 다시 살아갈 조건을 마련하는 일이다. 돌봄은 완전한 회복을 약속하지 않는다. 다만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다.<br/><br/>『소금호수, 우리가 사랑한 이상한 세계』가 보여주는 자연은 아름답고도 불안정하다. 물은 줄어들고, 풍경은 변하고, 인간의 욕망은 그 위에 흔적을 남긴다. 그럼에도 생명은 사라지는 자리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갈 방법을 찾아낸다. 이 책이 건네는 희망은 모든 것을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낙관에 있지 않다. 변화한 세계를 외면하지 않고, 그곳에서 다시 관계를 만들고 서로의 삶을 돌보는 데 있다. 자연을 이해하는 일이 결국 인간을 이해하는 일과 닮아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우리 역시 소금호수처럼 끊임없이 변하고, 때로는 메말라가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건너간다. 그럼에도 새로운 물이 흘러들 자리는 남아 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삶이 아니라, 변화한 세계에서 다시 생명이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일이다.<br/><br/>호수는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언제나 무언가가 사라지고 생겨난다. 물의 높이가 달라지고, 소금의 농도가 변하고, 그곳을 터전 삼아 살아가던 생명들의 자리가 조금씩 옮겨간다. 『소금호수, 우리가 사랑한 이상한 세계』는 그렇게 변화하는 소금호수를 따라가며 자연과 인간이 서로에게 얼마나 깊이 얽혀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책이다. 기후위기와 생태계의 변화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우리가 숫자와 그래프로만 바라보았던 환경의 변화를 한층 구체적인 풍경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자연을 인간 바깥에 존재하는 무언가로 여기기보다 우리의 삶과 맞물린 하나의 세계로 바라보고 싶은 사람에게도 좋은 길잡이가 되어준다. 여행자의 눈으로 낯선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그곳에 깃든 과학적 사실과 사람들의 삶을 함께 읽어내는 논픽션을 좋아한다면 이 책의 여정은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br/><br/>그러나 이 책을 환경에 관한 이야기로만 읽을 필요는 없다. 캐롤라인 트레이시는 소금호수의 변화를 따라가는 동안 자연의 회복과 인간의 회복이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천천히 보여준다. 무언가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만을 회복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미 달라져버린 세계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안에서 다시 살아갈 방법을 찾아가는 일 역시 회복이라면, 이 책은 상실 이후의 삶을 생각해본 사람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건넨다. 결국 소금호수를 바라본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을 세는 일만은 아니다. 물이 빠져나간 자리에 무엇이 다시 자랄 수 있는지, 달라진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오래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br/><br/>✏️도서출판 일레븐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31/44/cover150/k58213012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314483</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한솥밥을 먹는 사람들 - [찌니주의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42617</link><pubDate>Mon, 10 Aug 2026 12:4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4261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39995&TPaperId=1744261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13/75/coveroff/893643999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39995&TPaperId=1744261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찌니주의보</a><br/>정지아 지음 / 창비 / 2026년 08월<br/></td></tr></table><br/>평범한 일상만이 존재하던 『찌니주의보』의 배경 수평마을. 누군가는 밭을 매고, 누군가는 반찬을 만들고, 누군가는 마을회관에 모여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렇게 오래 반복된 풍경 속으로 서울에서 내려온 두 젊은 여자인 혜진과 성진, 즉 찌니들이 들어온다. 마을은 술렁인다. 그러나 이 소설의 관심은 갈등 그 자체보다, 갈등 이후에도 사람들이 어떻게 같은 마을에서 얼굴을 마주하며 살아가는가에 머문다.<br/><br/>인간은 낯선 것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경계하고, 경계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두려운 것을 멀리 밀어내려 한다. 수평마을 사람들이 찌니들을 대하는 방식 역시 다르지 않다. 두 사람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따뜻하게 음식을 나누고 이름을 불러주던 손길은 순식간에 차갑게 식는다. 그들의 태도는 분명 상처를 남긴다. 하지만 정지아는 그 장면에서 누구 하나를 악인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사람은 대개 악해서가 아니라, 익숙하지 않아서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가장 오래 바라보게 되는 것은 편견 자체보다도 편견이 서서히 바뀌어 가는 시간이다.<br/><br/>사람의 마음은 생각보다 느리게 움직인다. 익숙하게 믿어온 세계를 단숨에 바꾸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오랫동안 당연하다고 여겼던 질서와 가치관은 낯선 존재를 만나는 순간 흔들리지만, 그 흔들림이 곧 이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해에는 용기보다 시간이 먼저 필요하다. 그래서 이 소설이 들려주는 변화는 극적이지 않다. 계절이 바뀌듯 조금씩 스며들고, 어느새 마음 한구석의 굳은살을 부드럽게 만든다. “잘 모리던 것을 워치케 냉큼 받아들이냐. 시간이 약이다. 시간이 약이여.”(165쪽)이라는 한마디에는 인간을 바라보는 정지아의 시선이 담겨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만큼만 세상을 이해한다. 그래서 낯선 삶을 만났을 때 서툴고, 때로는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 서툶을 부끄러워하며 조금씩 마음의 폭을 넓혀가는 과정 또한 인간의 모습이다. 작품은 이해를 타고나는 자질보다 살아가는 동안 천천히 익혀가는 마음의 습관으로 바라본다.<br/><br/>『찌니주의보』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음식이다. 문고리에 걸린 호박전, 이름 없이 놓여 있는 나물 반찬, 함께 둘러앉아 먹는 조기매운탕, 슬그머니 놓여 있는 장조림과 전복장. 한국인의 밥상은 오래전부터 사랑과 사과를 같은 그릇에 담아왔다. 미안하다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국을 한 그릇 더 떠주고, 걱정된다는 말을 삼키는 대신 반찬을 챙겨준다. 수평마을 사람들도 다르지 않다. 미처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마음은 음식이 되어 대문 앞에 걸리고, 그 밥상 위에서 조금씩 관계가 회복된다. ‘식구(食口)’라는 말은 한솥밥을 먹는 사람을 뜻한다. 피를 나눈 사이가 아니라도 같은 밥을 나누는 순간 사람은 식구가 된다. 그래서 수평마을의 밥상은 허기를 채우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를 삶 안으로 들이는 의식처럼 읽힌다. 말보다 먼저 밥을 건네는 사람들, 용서보다 먼저 숟가락을 놓아주는 사람들. 정지아는 한 끼의 식사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우리’라는 이름을 천천히 만들어가는 과정을 따뜻하게 그려낸다.  이 작품에는 저마다 다른 생을 살아온 사람들이 등장한다. 누군가는 오랜 세월 한곳을 지키며 살아왔고, 누군가는 낯선 땅에 뿌리를 내렸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삶을 숨긴 채 여러 번 터전을 옮겨야 했다. 서로의 사연은 닮지 않았지만, 외로움과 두려움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서로를 알아본다. 작품은 성소수자라는 소재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읽는 동안 더욱 선명해지는 것은 결국 모든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낯선 존재라는 사실이다. 세대가 달라도, 살아온 환경이 달라도, 국적이 달라도, 사랑하는 방식이 달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을 만난다. 인간은 타인의 삶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어도, 상처의 결은 알아볼 수 있다. 결국 다름 앞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를 얼마나 빨리 이해했는지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곁에 남아 있었는가 하는 일이다.<br/><br/>그런 의미에서 ‘수평마을’이라는 이름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처럼 읽힌다. 수평은 모두가 같은 모습이 되는 상태가 아니다. 각자의 삶을 그대로 지닌 채 서로를 위아래 없이 바라볼 수 있는 관계의 높이다. 누구는 먼저 이해하고 누구는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다른 속도로 마음을 움직이며 같은 자리로 다가가는 풍경. 공동체란 서로 다른 삶들이 한 방향을 바라보려 애쓰는 시간 속에서 자라난다. 상대를 바꾸기보다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혀가는 동안, 낯선 사람은 조금씩 이웃이 되고 이웃은 어느새 서로의 삶을 기대어 사는 사람이 된다.  정지아는 이번에도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다. 인간 안의 편견과 고집, 무지를 숨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조용히 음식을 들고 찾아오고, 누군가는 먼저 등을 쓸어주며, 누군가는 가장 미워했던 이를 위해 기꺼이 손을 내민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거대한 선언보다 그런 사소한 마음들이라는 사실을, 『찌니주의보』는 전라도 사투리처럼 구수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오래 들려준다. 그리고 그 믿음은, 서로를 닮아서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내어주는 사람들 덕분에 공동체가 유지된다는 진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br/><br/>낯선 사람이 이웃이 되는 데에는 특별한 계기보다 오래 함께한 시간과 작은 마음들이 필요하다. 한 끼의 밥을 나누고, 서툰 사과를 건네고, 이해하지 못했던 존재를 천천히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사람 사이의 거리는 조금씩 달라진다. 『찌니주의보』는 그렇게 서로 다른 삶들이 한 마을 안에서 부딪히고 어울리며, 결국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는 이야기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인간의 다정함을 발견하는 독자, 세대와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공동체의 모습을 바라보고 싶은 독자, 타인을 이해한다는 일이 무엇인지 오래 생각해 보고 싶은 독자에게 이 소설은 깊은 울림을 건넬 것이다. 또한 피를 나눈 관계만이 가족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같은 밥을 나누는 순간 서로의 삶에 들어설 수 있다는 따뜻한 감각을 만나고 싶은 독자에게도 이 책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갈 것이다. 정지아는 누군가의 마음이 아주 조금 움직이는 순간들을 포착하며, 우리가 서로의 곁을 지키며 살아가는 이유를 조용히 보여준다.<br/><br/>✏️도서출판 창비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13/75/cover150/893643999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0137507</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무엇을 눈뜨게 할 것인가 - [잠들면 눈뜬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41426</link><pubDate>Sun, 09 Aug 2026 20:5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4142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32130222&TPaperId=1744142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39/9/coveroff/k23213022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32130222&TPaperId=1744142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잠들면 눈뜬다</a><br/>김종일 지음 / 황금가지 / 2026년 07월<br/></td></tr></table><br/>도로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공간이지만, 이상하게도 그곳에서 인간의 본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평소에는 신호를 지키고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이 운전대를 잡는 순간 욕설을 내뱉고, 경적을 울리고, 상대를 쫓아가 보복하려 한다. 출판사가 이 소설을 ‘로드 레이지 스릴러’라고 표현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로드 레이지는 운전 중의 단순한 짜증이 분노와 공격적인 행동으로 번지는 현상을 가리킨다. 『잠들면 눈뜬다』는 그 짧은 순간, 감정이 이성을 앞지르며 일상의 도로가 폭력의 공간으로 바뀌는 지점에서 공포를 시작한다.<br/><br/>분노는 혼자 머물지 않는다. 누군가의 난폭한 행동은 또 다른 사람의 분노를 부르고, 그 분노는 다시 다른 사람에게 옮겨간다. 처음에는 경적 한 번, 욕설 한마디였던 것이 보복 운전이 되고, 위협이 되고, 돌이킬 수 없는 폭력으로 자라난다. 그렇게 보면 도로 위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한 사람의 성격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타인의 분노가 나의 분노가 되고, 나의 분노가 다시 타인의 삶을 망가뜨리는 순간, 폭력은 개인의 감정을 넘어 하나의 흐름이 된다. 작품 속 미아즈마가 인간의 감정을 증폭시킨다는 설정이 섬뜩한 것도 그래서다. 인간에게 이미 자리한 감정은 작은 자극 하나만으로도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어느 순간 한 사람의 마음을 넘어 다른 사람의 삶까지 집어삼킨다.<br/><br/>괴물을 인간의 바깥에만 두고 바라보면 이 소설은 그저 초자연적인 존재를 다룬 스릴러로 남는다. 그러나 인간에게 이미 분노와 증오, 폭력성이 존재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누구에게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함께 있고, 평소에는 감춰져 있던 어둠이 어떤 순간 주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괴물’은 인간과 완전히 다른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외면하고 싶었던 자신의 한 모습일 수도 있다. 고야의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눈뜬다」를 떠올리게 하는 제목처럼, 이 소설에서 두려운 것은 괴물이 눈을 뜬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그 괴물이 인간의 모습으로 눈을 뜰 수 있다는 사실이다.<br/><br/>그 생각에 닿고 나면 ‘무영’이라는 이름도 문득 다르게 읽힌다. 작가가 실제로 그림자를 염두에 두고 지은 이름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름 그대로 풀이하면 ‘그림자가 없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그림자가 없는 인간은 과연 온전한 인간일까. 빛을 받는 모든 것에 그림자가 생기듯, 인간에게도 감추고 싶은 마음과 인정하기 어려운 어둠이 있다. 선한 인간이란 그림자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그림자를 알고도 그것이 자신의 전부가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분노할 이유가 있어도 폭력을 선택하지 않고, 상처받았어도 같은 상처를 타인에게 돌려주지 않는 것. 괴물이 눈을 뜨는 순간에도 인간으로 남는 일은 어쩌면 그런 선택에서 시작된다.<br/><br/>그래서 이 소설의 마지막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악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미아즈마는 세상 어딘가에 남아 있고, 인간의 분노 역시 언제든 다시 고개를 들 수 있다. 그럼에도 이야기는 절망으로 닫히지 않는다. 세상에는 선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남겨둔다. 악이 없는 세계에서 선을 선택하는 일보다, 악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선을 선택하는 일이 훨씬 어렵다.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 자신의 분노를 폭력으로 돌려주지 않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어쩌면 인간을 인간으로 남게 하는 것은 악이 없는 마음이 아니라, 악을 마주한 순간에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일 것이다.<br/><br/>도로 위에서 우리는 매일 이름 모를 사람들과 스쳐 지나간다. 잠깐의 짜증이 분노가 되고, 분노가 폭력이 될 수 있는 순간도 찾아온다. 그때 무엇을 눈뜨게 할 것인지는 결국 인간의 몫이다. 잠들면 눈을 뜨는 것이 있다. 그것은 괴물일 수도, 인간일 수도 있다.<br/><br/>괴물이 사라졌다고 해서 도로가 평온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늘도 누군가는 경적을 울리고, 누군가는 사소한 끼어들기에 이를 악물며, 아주 짧은 순간 자신의 분노를 타인에게 던질 준비를 한다. 『잠들면 눈뜬다』는 그렇게 평범한 일상에 숨어 있던 폭력의 얼굴을 끌어올린다. 익숙한 도로가 어느 순간 공포의 무대로 변하는 로드 레이지 스릴러를 찾는 독자라면 이 소설의 질주를 즐길 수 있을 것이고, 인간의 선량함보다 그 이면에 감춰진 분노와 폭력성에 오래 시선을 두는 독자라면 더욱 깊숙이 들어갈 수 있다. 특히 일상의 틈에서 서서히 광기가 번져가는 심리 스릴러를 좋아하거나, 모든 악이 깔끔하게 사라지는 결말보다 사건이 끝난 뒤에도 세계 어딘가에 불온한 기척이 남아 있는 이야기를 선호한다면 이 소설은 꽤 오래 달려갈 만한 길이 되어줄 것이다. 결국 이 책이 보여주는 것은 괴물이 사라지는 순간보다 괴물을 마주한 인간의 모습이다. 어둠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어둠을 품고도 다른 방향으로 핸들을 꺾는 사람. 그 선택이 가능한 인간을 믿어보고 싶은 독자에게 권하고 싶다.<br/><br/>✏️도서출판 황금가지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39/9/cover150/k23213022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390972</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천재와 광기 사이의 선 - [뇌가 만든 천재들 - 광기와 창조성은 어떻게 연결되는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39708</link><pubDate>Sat, 08 Aug 2026 21: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3970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5968402&TPaperId=1743970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73/41/coveroff/896596840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5968402&TPaperId=1743970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뇌가 만든 천재들 - 광기와 창조성은 어떻게 연결되는가</a><br/>마리오 데 라 피에드라 월터 지음, 성소희 옮김 / 흐름출판 / 2026년 07월<br/></td></tr></table><br/>천재라는 말을 들으면 대개 비슷한 모습을 떠올린다. 남들과 다른 감각을 가진 사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 평범한 사고의 범위를 벗어나는 사람. 그래서 천재의 뇌 역시 특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뇌가 만든 천재들』은 그 막연한 믿음을 실제 예술가들의 뇌와 삶으로 가져간다. 프리다 칼로의 고통, 도스토옙스키의 뇌전증, 버지니아 울프의 정신적 고통과 남다른 감각을 따라가다 보면 천재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보다 먼저 묻게 되는 것이 있다.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한 사람의 뇌를 ‘정상’이라고 부르는가.<br/><br/>인간의 뇌는 처음부터 모두 다르다. 감각의 민감도도, 기억하는 방식도, 집중하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어떤 사람에게 소리는 색으로 경험되고, 어떤 사람은 특정한 영역의 정보를 놀라울 만큼 오래 기억한다. 사회가 정해놓은 평균에서 멀어질수록 그 차이는 재능보다 먼저 이상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런데 평균은 능력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더 온전한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br/><br/>천재를 특별한 뇌의 소유자로 보는 관점에는 이 모순이 따라붙는다.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천재라고 부르면서, 다른 사람의 차이는 병리나 결핍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차이를 숭배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교정하려 한다. 신경다양성을 천재성의 증거처럼 소비하는 태도 역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어떤 뇌가 특별하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특별한 예술을 만들어낸다는 사실 사이에는 수많은 삶의 경험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br/><br/>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그녀의 고통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녀가 겪은 사고와 수술, 반복되는 통증은 분명 작품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지만, 고통이 곧 예술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고통받은 예술가’라는 이미지는 너무 매력적이어서 오히려 위험하다. 상처가 작품을 낳았다는 설명이 반복될수록 그 상처를 가진 사람의 삶은 작품을 위한 재료처럼 취급되기 쉽다. 도스토옙스키의 뇌전증 역시 마찬가지다. 질병은 그의 삶에 실제로 영향을 미쳤지만, 그것을 문학적 천재성의 비밀로 만들어버리는 순간 질병은 인간의 경험에서 떼어져 하나의 낭만적인 장치가 된다.<br/><br/>예술가의 정신적 고통을 바라보는 방식은 여성에게서 더욱 복잡해진다. 버지니아 울프나 실비아 플라스, 앤 섹스턴의 삶에는 오래도록 ‘광기’라는 단어가 따라다녔다. 그들의 고통을 병리적인 개인의 문제로 기록하는 동안, 그들이 어떤 시대를 살았고 여성에게 무엇이 요구되었는지는 상대적으로 덜 이야기되었다. 한 사람의 고통을 설명하면서 그 사람이 놓여 있던 세계를 지워버리는 것이다.<br/><br/>‘광기’라는 이름은 그래서 중립적인 단어가 아니다. 누군가의 경험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는 순간 그 기준을 가진 쪽에 해석의 권한이 생긴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를 살핀 것도 이러한 분류의 역사였다. 한 시대가 정상이라고 정한 범주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치료되거나 격리되거나 기록되었다. 시간이 흐른 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천재로 다시 불렸다. 과거의 광인이 오늘날의 천재가 되는 이 역설 앞에서, 천재와 광기를 처음부터 서로 다른 본질로 생각하기는 어려워진다.<br/><br/>더구나 천재라는 이름은 때때로 예술가의 고통을 아름답게 포장한다. 칼로의 상처, 도스토옙스키의 발작, 울프의 정신적 고통이 작품의 위대함과 한데 묶이면 고통은 예술가에게 주어진 운명처럼 보인다. 하지만 질병은 누구에게나 잔인한 현실일 뿐이다. 그것이 작품의 가치 때문에 아름다운 경험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예술가를 존중하는 일은 그의 고통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이 작품과 삶 가운데 어떤 자리를 차지했는지를 구별해서 바라보는 데 있을 것이다.<br/><br/>결국 ‘천재의 뇌는 무엇이 다른가’라는 물음은 그리 오래 남지 않는다. 더 오래 붙잡게 되는 것은 인간의 뇌를 하나의 기준으로 나누어도 되는가 하는 문제다. 평균에서 멀어진 감각을 가진 사람에게 이상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사람이 뛰어난 작품을 남기고 나서야 천재라는 이름으로 다시 불러주는 일. 그 과정에서 바뀐 것은 그 사람의 뇌가 아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다.<br/><br/>인공지능이 글을 쓰고 그림을 만드는 지금은 이 문제를 다른 방향에서도 바라보게 한다. 계산하고 기억하고 패턴을 찾아내는 능력만으로 천재성을 설명한다면 인간의 독점적인 영역은 빠르게 줄어든다. 그렇다고 인간의 창작이 단순한 능력의 결과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인간은 몸으로 세계를 겪고, 어떤 경험은 오래 기억하고 어떤 경험은 잊으며, 관계 속에서 자신을 만들어간다. 같은 사건을 겪은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작품을 만들어내는 이유도 그곳에 있다.<br/><br/>천재를 특별한 뇌를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을 능력의 차이로만 바라보게 된다. 반대로 인간마다 다른 뇌와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면 천재라는 말의 의미도 달라진다. 누군가의 특별함은 정상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숫자가 아니다. 그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감각으로 어떤 세계를 경험했고, 그 경험을 어떤 형태로 남겼는지가 중요하다.<br/><br/>천재의 비밀을 특별한 뇌에서 찾으려는 시선은 결국 인간을 분류하는 방식으로 되돌아온다. 평균에서 벗어난 감각에는 이상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뛰어난 성취가 확인된 뒤에는 같은 차이를 천재성이라 부른다. 달라진 것은 그 사람의 뇌가 아니다. 달라진 것은 그 차이를 바라보는 사회의 언어다.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많은 차이를 지워왔고, 천재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차이를 지나치게 미화해왔다. 천재와 광기 사이의 선은 생각보다 단단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선의 두께가 아니라, 누가 그어놓은 선인가 하는 데 있다.<br/><br/>한 사람의 머릿속에는 그가 살아온 세계가 얼마나 많이 들어 있을까. 감각의 차이, 기억의 방식, 몸에 남은 고통과 설명하기 어려운 정신의 움직임까지. 《뇌가 만든 천재들》은 천재를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로 세워두기보다 그 능력이 태어난 자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경과학과 예술의 접점을 따라 천재성과 창의성의 본질을 궁금해하는 독자, 프리다 칼로와 도스토옙스키, 버지니아 울프처럼 작품만큼이나 삶의 궤적이 강렬한 예술가들을 다른 각도에서 만나고 싶은 독자에게 특히 어울린다. 그리고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 광기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삶을 규정해온 방식에 의문을 품어본 사람이라면 책의 여러 사례가 한층 복잡한 표정을 보여줄 것이다. 인간의 뇌가 모두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받아들인다는 사실 앞에서 천재라는 이름도 조금 낯설어진다. 특별한 사람을 찾아내는 책을 기대했다면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인간을 특별함과 평범함으로 나누어온 우리의 시선까지 마주하게 될 것이다.<br/><br/>✏️흐름출판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73/41/cover150/896596840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8734192</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A story of experience - [일: 경험의 이야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38925</link><pubDate>Sat, 08 Aug 2026 11:5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3892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72130692&TPaperId=1743892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15/70/coveroff/k872130692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72130692&TPaperId=1743892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일: 경험의 이야기</a><br/>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저녁달 편집부 옮김 / 저녁달 / 2026년 07월<br/></td></tr></table><br/>하루를 보내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일한 시간만큼의 돈, 이력서에 적을 수 있는 경력, 혹은 오늘도 무사히 지나갔다는 피로 같은 것들. 루이자 메이 올컷의 『일: 경험의 이야기』는 그 뒤편에 남는 것을 바라본다. 스무 살의 크리스티 데번은 제 힘으로 살아가기 위해 일을 시작하고, 하녀와 배우, 가정교사와 재봉사, 간호사로 살아간다. 직업은 수없이 바뀌지만 그녀가 얻는 것은 경력의 폭이 아니다. 한 번 겪은 일은 다음 일을 대하는 태도가 되고, 한 사람과의 만남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 된다. 그렇게 지나간 날들이 크리스티 안에 조금씩 쌓인다.<br/><br/>크리스티의 직업에는 특별한 상승 곡선이 없다. 어떤 일은 그녀에게 기쁨을 주고, 어떤 일은 모욕과 피로를 안긴다. 재능을 발견하는 순간도 있지만 노동의 대가가 지나치게 적다는 현실 앞에서 무너지는 순간도 있다. 올컷은 그 과정을 성공담의 문법으로 정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다른 노동의 풍경을 차례로 펼쳐 놓으며, 사람이 일하면서 무엇을 겪는지를 보여준다. 노동은 매번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되고, 그 안에서 크리스티는 계급과 가난, 편견과 친절, 타인의 욕망과 자신의 한계를 마주한다.<br/><br/>이때 일의 의미도 조금씩 달라진다. 처음의 크리스티에게 노동은 독립을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여러 일을 경험할수록 노동은 세상을 알아가는 방법이 된다. 책으로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일터에서 그녀를 기다린다. 누군가에게 하인으로 불려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모욕이 있고, 가난 때문에 자신의 시간을 헐값에 내놓아야 하는 사람의 마음이 있으며, 아픈 사람의 곁에서 밤을 지새운 뒤에야 알게 되는 삶의 무게가 있다. 크리스티가 얻는 것은 직업적 능력만이 아니다. 타인의 삶을 자기 바깥의 일로 여기지 않게 되는 감각이다.<br/><br/>그래서 이 소설에서 자립은 경제적인 독립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크리스티는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고 살아가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혼자 살아가는 것만이 자유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도 배운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기대면서도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고, 사랑하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올컷이 그리는 자립은 고립과 거리가 멀다. 자기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정하면서 동시에 타인의 삶에도 마음을 내어주는 태도에 가깝다. 여성에게 허락된 삶의 폭이 지금보다 훨씬 좁았던 시대에 쓰인 작품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크리스티의 선택은 개인의 독립을 넘어 하나의 사회적 선언처럼 읽힌다.<br/><br/>원제의 A Story of Experience는 이 모든 과정을 묶어주는 말이 된다. 경험은 지나간 일들의 합계가 아니다. 한 번 겪은 일이 다음 선택에 영향을 주고, 한때의 상처가 타인의 아픔을 알아보는 감각이 되며, 실패했던 기억이 삶의 태도를 바꾸기도 한다. 크리스티에게 경험은 과거에 머무는 시간이 아니라 현재의 자신을 만들어내는 재료다. 하녀였던 시간과 배우였던 시간, 재봉사로 버티던 시간과 간호사로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던 시간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은 이유다. 각각의 시간은 사라지는 듯하면서도 그녀 안에 남아 다음 삶을 결정하는 힘이 된다. 올컷은 한 사람이 성장하는 모습을 거창한 사건 하나로 설명하지 않는다. 수없이 지나간 날들이 사람의 성격을 조금씩 바꾸고, 그렇게 달라진 사람이 다시 자신의 하루를 살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br/><br/>노동은 고되고, 불합리하며, 때로는 인간을 쉽게 지치게 만든다. 그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끝내 삶을 비관으로만 기울게 두지 않는 이유는, 경험에는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상처는 흔적을 남기지만, 그 흔적은 다음 걸음을 내딛는 발판이 되기도 한다. 살아낸 시간은 사라지지 않고 사람 안에 축적되어 앞으로의 삶을 지탱하는 근력이 된다.<br/><br/>『일: 경험의 이야기』가 오늘에도 읽히는 이유는 시대를 초월하는 노동의 가치에 있지 않다. 삶을 이루는 방식에 대한 통찰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일은 하루를 채우고 지나가지만, 경험은 사람의 다음 하루까지 따라간다. 오늘의 노동이 내일의 나를 만든다는 사실은 때로 버겁고, 때로는 위로가 된다. 모든 시간이 의미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아무 의미도 없다고 여겼던 시간조차 지나고 나면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 하나를 바꾸어 놓을 수 있다. 크리스티의 삶이 보여주는 것도 그런 변화다. 사람은 살아온 시간을 등에 지고 다음 날로 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돌아보면,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온 것은 대단한 성공보다 수없이 반복해온 하루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 경험의 이야기』가 오래된 고전으로 남아 있는 이유도, 노동의 의미를 설명해서가 아니라 경험이 인간을 빚어가는 과정을 끝까지 놓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br/><br/>일은 하루를 채우고 지나가지만, 그 하루에 무엇을 겪었는지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일: 경험의 이야기』는 노동의 가치를 말하면서도 시선을 임금이나 성공에 오래 묶어두지 않는다. 하녀와 배우, 가정교사와 재봉사, 간호사로 이어지는 크리스티의 시간은 직업의 이력이 되어가는 대신 한 사람의 감각과 태도를 바꾸는 경험이 된다. 그래서 이 책은 일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고 싶은 사람에게 특히 잘 어울린다. 자신의 힘으로 삶을 꾸려가면서도 타인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크리스티의 모습은 자립과 독립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에게도 깊은 읽을거리를 건넨다. 여러 번의 실패와 상실을 지나며 조금씩 달라지는 사람의 모습을 좋아한다면 이 오래된 성장소설의 호흡도 즐거울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노동과 삶을 잠시 다른 시대의 창문 너머로 바라보고 싶은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하루를 살아내고 그 경험을 다음 날의 자신에게 건네는 일만큼은 여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으므로.<br/><br/>✏️도서출판 저녁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15/70/cover150/k872130692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7157021</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포착하는 힘 - [좋아하게 되었습니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36258</link><pubDate>Thu, 06 Aug 2026 21:2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3625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92130123&TPaperId=1743625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31/45/coveroff/k59213012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92130123&TPaperId=1743625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좋아하게 되었습니다</a><br/>미우라 시온 지음, 김은경 옮김 / 시공사 / 2026년 07월<br/></td></tr></table><br/>좋아하는 것이 하나 생길 때마다 하루는 조금씩 달라진다. 처음에는 이름도 모르던 식물이 눈에 들어온다. 창밖 나뭇가지에 내려앉은 새를 오래 바라보게 된다. 무심히 지나치던 계절의 변화가 문득 반갑다. 앞으로 찾아올 24절기가 괜히 궁금해지고, 계절마다 달라지는 풍경을 기다리게 된다. 책 한 권을 펼쳤다가 또 다른 책을 만나고, 우연히 들어간 골목이 다음 계절에도 다시 찾고 싶은 장소가 된다. 하루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마음이 머무는 곳은 조금씩 늘어난다.<br/><br/>미우라 시온의 『좋아하게 되었습니다』는 그런 마음들을 모아놓은 에세이다. 식물과 새, 책과 만화, 여행과 영화, 고양이와 사람. 특별한 사건보다 평범한 일상이 더 자주 등장한다. 그래서 시선을 더 오래 두게 된다. 작가는 세상을 대단한 의미로 포장하지 않고, 사소한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 시간을 기꺼이 들려준다. 엉뚱할 만큼 솔직하고, 우스울 만큼 다정하다. 그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좋아한다’는 말은 취향을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라, 세상과 가까워지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곁에 있는 존재들의 작은 변화를 알아차리는 마음. 미우라 시온이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br/><br/>마음을 빼앗긴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새롭게 얻는 일이다. 식물을 아끼게 되면 계절을 기다리게 된다. 새를 바라보게 되면 하늘을 올려다보는 날이 많아진다. 책을 가까이하면 한 사람의 삶을 오래 들여다보게 된다. 제철 과일과 채소를 기다리고, 계절에 맞는 풍경을 반기는 일도 결국 같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이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이 어느새 하루를 붙잡아 둔다. 관심은 시선을 바꾸고, 시선은 삶의 반경을 넓힌다. 마음을 내어주는 대상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조금씩 넓어진다. 풍요는 더 많은 것을 손에 쥐는 데서 시작되지 않는다. 더 많은 것들과 연결되는 데서 시작된다.<br/><br/>그 연결은 특별한 능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작은 기쁨을 놓치지 않는 감각에서 시작된다. 같은 여름을 보내도 누군가는 더위만 기억하고, 누군가는 슬그머니 불어오는 바람을 기억한다. 어떤 날은 매미 소리가 계절을 알려주고, 어떤 날은 느즈막히 일어난 아침 이마에 내려앉는 햇살이 하루를 시작하게 한다. 듣고 싶은 음악이 마침 흘러나오고, 횡단보도에 도착한 순간 신호가 바뀌는 작은 우연들도 있다. 세상이 달라져서가 아니다. 바라보는 마음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행복은 멀리 있는 사건이 아니라, 가까이에 있는 것들을 기꺼이 발견하는 감각에 숨어 있다.<br/><br/>삶이 팍팍해질수록 사람은 거대한 행복부터 찾기 시작한다. 언젠가 모든 것이 괜찮아질 날, 더 나은 환경, 더 나은 미래. 하지만 그런 날들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을 버티게 하는 것은 훨씬 작고 평범한 것들이다. 제철 과일의 맛을 기다리는 일. 돌아올 사람을 위해 저녁밥을 준비하는 일. 삼각김밥 같은 몸매와 고소하고 뽀송한 냄새를 겸비한 고양이의 온기를 느끼는 일. 겨울의 시리게 푸른 하늘, 가을의 낙엽으로 만들어보는 책갈피, 짝꿍 몰래 슬그머니 주워 모아보는 도토리와 알밤들. 하루 끝에 마시는 시원한 탄산수 한 잔. 오래 아껴 읽는 책 한 권. 삶은 이런 작은 애착들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 조금 더 오래 다정하다.<br/><br/>『좋아하게 되었습니다』는 더 많이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을 권하는, 그리고 더 많이 마음을 열 수 있는 삶을 보여주는 책이다. 세상을 향해 시선을 내어주는 일이 결국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미우라 시온은 자신의 일상으로 증명한다. 좋아하는 것이 하나 생길 때마다 하루는 조금씩 달라진다. 그렇게 달라진 하루들이 모여 삶이 된다. 어쩌지. 이 책을 읽고 난 후부터 마음이 머무는 곳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좋아하는 것이 하나 생길 때마다 세상은 넓어지고, 삶은 조금 더 풍요로워진다.<br/><br/>좋아한다는 마음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기도 한다. 어제와 같은 풍경 속에서 새로운 계절을 발견하고, 스쳐 지나가던 존재 하나에 오래 시선을 두게 되는 순간 하루는 조금 다른 온도를 가진다. 『좋아하게 되었습니다』는 그런 변화의 순간들을 차곡차곡 모아둔 책이다. 『마호로 역』 시리즈를 비롯한 작품들에서 보여준 미우라 시온 특유의 따뜻하고 유쾌한 문장 감각은 이번 에세이에서 일상의 가장 작은 부분을 포착하는 힘으로 한층 깊어진다. 평범한 하루 속 숨은 기쁨을 발견하고 싶은 사람, 식물과 동물, 계절과 책처럼 오래 곁에 둘 존재들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 책은 새로운 감각을 열어준다. 또한 삶이 조금 버겁게 느껴지는 순간, 거창한 위로보다 오늘을 살아갈 작은 이유를 찾고 싶은 사람에게도 잘 어울린다. 좋아하는 것이 늘어날수록 세계는 넓어진다는 사실을, 미우라 시온은 자신만의 다정한 시선으로 보여준다.<br/><br/>✏️도서출판 시공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31/45/cover150/k59213012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314573</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먼저 믿어 주는 일 - [그림과 만난 소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35615</link><pubDate>Thu, 06 Aug 2026 14: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43561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82130401&TPaperId=1743561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93/75/coveroff/k18213040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82130401&TPaperId=1743561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그림과 만난 소년</a><br/>임홍순 지음 / 클래식북스(클북) / 2026년 07월<br/></td></tr></table><br/>교육은 교실 안에서 시작되지만, 그 의미는 교실 밖에서 증명된다. 한 사람에게 건네진 말과 태도가 얼마나 오래 남는지는 성적표나 졸업장이 아니라 이후의 삶이 말해 준다. 『그림과 만난 소년』은 스무 해라는 시간을 건너 다시 이어진 한 인연을 통해, 교육이라는 행위가 남기는 흔적을 바라본다. <br/><br/>이야기의 중심에는 마음을 닫은 소년 진영과 그의 곁을 지키는 교사가 있다. 진영은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는 대신 종이 위에 뿌리 없는 나무와 사막에 홀로 남겨진 거북이를 그린다. 아이가 그린 그림은 아직 말이 되지 못한 마음이 남긴 흔적이다. 선생님은 그림 속 상징을 해석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림 너머에 있는 아이를 바라본다. 무엇을 그렸는지보다 왜 그런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는지, 한 장의 그림 뒤에 숨은 시간과 감정을 살핀다. 그림은 진영의 내면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이면서도, 동시에 선생님이 아이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선택한 하나의 언어다. 중요한 것은 그림의 의미를 빠르게 규정하는 일이 아니다. 그 안에 담긴 마음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는 태도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그림을 읽는 기술보다 한 사람을 바라보는 방법이다.<br/><br/>이 지점에서 『그림과 만난 소년』은 교육을 ‘가르침’보다 ‘기다림’의 문제로 전환한다. 선생님은 아이를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다. 상처의 원인을 단정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아이가 가진 결핍을 찾아내고 그것을 수정하려 하기보다,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한다. 칼 로저스가 말한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은 이러한 태도와 맞닿아 있다. 인간은 완성된 모습을 인정받을 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불완전한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졌을 때 변화할 힘을 얻는다. 판단을 유보한 관계 속에서 발견하는 자신의 모습. 아이를 움직인 것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도 사라지지 않을 관계가 있다는 경험이었다.<br/><br/>이러한 관점 속에서 작품 속 교육은 기존의 의미와 조금 다른 방향을 향한다. 오늘날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거나 능력을 계발하는 제도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얼마나 빠르게 배우는지, 얼마나 높은 성과를 얻는지가 교육의 성공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교육은 한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감당할 수 있도록 곁을 마련하는 일이다. 선생님은 아이의 삶을 대신 해결하지 않는다. 다만 아이가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그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교육이 남기는 것은 정답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누군가에게 존중받았던 경험은 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가 된다. <br/><br/>물론 진영의 변화가 선생님의 기다림만으로 완성된 것은 아니다. 교육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일방적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선생님이 아이에게 마음을 내어 준 만큼, 진영 역시 자신의 마음을 꺼내 보이는 용기를 냈다. 수없이 그림을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는 과정은 아이 스스로 선택한 변화의 시간이었다. 좋은 교육은 누군가를 대신 성장시켜 주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힘을 발견하도록 돕는 일이다. 결국 한 사람의 변화는 가르치는 사람의 노력과 배우는 사람의 용기가 함께 만나는 자리에서 시작된다.<br/><br/>학창 시절, 모두 한 번쯤은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라는 노래를 불러본 적 있을 것이다. 이 아름다운 노래는 어른이 된 뒤에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한때는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익숙한 가사였지만, 『그림과 만난 소년』은 그 노랫말 속 ‘은혜’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특별한 희생이나 위대한 가르침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 아이의 마음이 닫혀 있을 때 그 곁을 떠나지 않는 일, 아직 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먼저 믿어 주는 일이다.<br/><br/>좋은 스승은 많은 것을 알려 준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잃지 않도록 삶의 한 시절을 함께 견뎌 준 사람이기도 하다. 『그림과 만난 소년』은 결국 교육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안전하게 내어놓을 수 있었던 단 한 번의 관계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존중받았던 경험은 시간이 지나 타인을 바라보는 방식이 되고, 결국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이 된다. 그리고 그 관계는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누군가의 삶 안에서 뿌리를 내린다.<br/> <br/>한 사람의 삶에는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몇 개의 시선이 있다. 누군가가 건네준 믿음과 기다림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사람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남는다. 『그림과 만난 소년』은 한 아이의 변화를 기록하는 이야기이면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에 어떻게 머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42년간 교단에 서 있었던 임홍순 작가는 그림과 미술치료를 중심에 두고, 시와 음악, 문학 작품을 함께 엮어 아이의 내면을 바라보는 깊은 시선을 펼쳐 보인다. 정답을 알려주는 교육보다 한 사람의 속도를 기다리는 교육을 믿는 교사와 교육 관계자에게, 그리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다시 바라보며 이해받지 못했던 마음의 자리를 돌아보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은 특별한 의미를 전한다. 또한 예술이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언어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조용한 변화를 담은 성장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에게도 오래 생각할 거리를 건넨다. 『그림과 만난 소년』은 누군가를 바꾸는 힘이 거창한 말이나 특별한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오래 바라보고 기다려 준 시간 속에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br/><br/>✏️도서출판 클북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93/75/cover150/k18213040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7937526</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