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쭐떠기의 한 구절 (쭐떠기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Thu, 22 Oct 2026 19:18:28 +0900</lastBuildDate><image><title>쭐떠기</title><url>https://image.ala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쭐떠기</description></image><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파테이 마토스 - [단단히, 휩쓸리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 - 흔들리는 시간을 지혜롭게 건너는 마음의 철학]</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86795</link><pubDate>Thu, 22 Oct 2026 17:3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8679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12131498&TPaperId=1758679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348/83/coveroff/k11213149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12131498&TPaperId=1758679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단단히, 휩쓸리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 - 흔들리는 시간을 지혜롭게 건너는 마음의 철학</a><br/>나디 미리안 지음, 김지유 옮김 / 북파머스 / 2026년 10월<br/></td></tr></table><br/>인간은 자신의 삶을 얼마나 통제할 수 있을까. 예측할 수 없는 사건 앞에서 우리가 세워둔 질서는 무력해지고, 익숙했던 세계는 어느 날 낯선 모습으로 다가온다. 상실은 준비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으며, 관계의 변화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찾아온다. 그럼에도 인간은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이상적인 삶의 형태로 여긴다. 감정을 능숙하게 다스리고, 불행을 신속하게 극복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을 유지하는 사람이 성숙한 인간의 표본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삶의 불확실성을 제거할 수 없는 존재에게 완전한 평온을 요구하는 일은 얼마나 가혹한가. 인간의 취약함은 의지의 부족에서 발생하는 결함일까, 아니면 살아 있다는 사실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조건일까.<br/><br/>독일의 심리치료사 나디 미리안은 『단단히, 휩쓸리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에서 고통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와 그것을 규정하는 사회적 관습을 살핀다. 철학과 심리학, 예술과 실제 삶의 경험을 넘나드는 그의 논의는 고통을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문제로 끌어올린다. 쇼펜하우어에게 인간은 끊임없는 욕망과 결핍의 운동 속에 놓인 존재였으며, 카뮈가 그려낸 시시포스는 완결되지 않는 노동을 반복하면서도 자신의 운명을 의식하는 인간의 형상이었다. 서로 다른 사유의 출발점에는 인간이 세계의 모든 조건을 결정할 수 없다는 인식이 놓여 있다. 고통의 가능성이 사라진 삶을 상상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유한성마저 지워버리게 된다. 삶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일은 자신의 한계를 이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철학적 행위이기도 하다.<br/><br/>그러나 현대사회는 이러한 한계를 인정하는 데 유난히 인색하다. 슬픔에는 적당한 기간이 정해지고, 좌절에는 극복의 서사가 요구되며, 불안은 관리해야 할 심리적 문제로 분류된다. 누군가의 상실 앞에서 우리는 충분히 슬퍼할 시간을 허락하기보다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저자가 비판하는 자기최적화의 문화 속에서 이러한 태도는 개인의 내면에까지 침투한다.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분석한 성과주체는 끊임없는 자기개선의 요구를 내면화한 인간이다. 이러한 성과의 논리가 감정의 영역에까지 확장되면서, 슬픔과 불안조차 관리하고 개선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된다. 행복은 추구해야 할 성과로, 회복은 증명해야 할 능력으로 변모한다. 자신의 슬픔을 충분히 이해하기도 전에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는 일이 발생하는 까닭이다. 고통을 겪는 시간마저 생산성과 효율의 척도로 평가받는 사회에서 인간은 자신의 불행을 온전히 경험할 자유를 잃어간다.<br/><br/>타인의 삶을 끊임없이 목격하는 환경은 이러한 압박을 더욱 정교하게 만든다. SNS에 펼쳐진 타인의 성취와 행복은 개인의 삶을 측정하는 비공식적인 기준이 되고, 서로 다른 삶의 조건과 시간은 어느새 앞서거나 뒤처졌다는 평가의 기준으로 바뀐다. 누군가는 이미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데 자신은 여전히 지난 상실을 애도하고 있다는 사실, 누군가는 실패를 발판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데 자신은 아직 두려움 속에 있다는 사실이 불안을 증폭시킨다. 사회적 비교의 문제는 단순한 열등감에서 그치지 않는다. 타인의 속도를 자신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개인은 고유한 경험을 해석할 권한까지 외부에 맡기게 된다. 고통의 크기와 회복의 속도를 비교하는 행위에는 서로 다른 삶을 동일한 척도로 환산할 수 있다는 전제가 숨어 있다. 그러나 상실의 무게는 객관적인 순위로 측정할 수 없으며, 감정이 통과하는 시간에도 보편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br/><br/>이러한 맥락에서 저자가 다시 살펴보는 회복탄력성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회복탄력성은 흔히 역경을 겪은 뒤 빠르게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는 능력으로 이해되지만, 인간의 회복은 언제나 이전의 모습으로 복귀하는 과정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상실은 삶의 조건을 영구적으로 변화시키며,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일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회복은 그렇게 달라진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감정과 관계를 다시 조율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저자가 강조하는 고통의 개별성은 여기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사람마다 감당할 수 있는 무게와 필요한 시간이 다르며, 회복의 방식 또한 각자의 경험과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슬픔을 충분히 경험하는 시간은 정체의 증거로 환산될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인식하고 필요한 도움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회복의 가능성이 시작된다.<br/><br/>“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 책의 띠지에 적힌 이 문장은 강인함의 의미를 다시 검토하게 한다. 우리는 흔히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 감정에 동요하지 않는 사람,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어려움을 해결하는 사람을 강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러한 기준 아래에서 인간은 자신의 취약함을 감추기 위해 또 다른 에너지를 소모한다. 강인함을 고통에 대한 무감각으로 이해한다면, 가장 인간적인 감정들이 오히려 극복해야 할 약점으로 취급될 것이다. 인간은 타인과 관계를 맺기에 상처받고, 무언가를 소중하게 여기기에 상실을 두려워한다. 취약함은 우리가 세계와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자신의 슬픔을 인정하고, 타인의 도움을 받아들이며,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삶을 이어가는 능력 또한 강인함의 중요한 형태다. 그 힘은 자신이 경험하는 현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형성된다.<br/><br/>그렇다면 휩쓸리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스토아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하는 데 주목했다. 타인의 판단과 이미 발생한 사건은 개인의 의지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조건 속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떤 행동을 선택할 것인지는 여전히 사유할 수 있다. 여기서 수용은 현실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뜻하지 않는다. 바꿀 수 없는 사건을 인정하는 일과 부당한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 자신의 중심을 지킨다는 것 역시 타인의 시선을 무시하거나 관계에서 철수하는 태도와는 거리가 있다. 타인의 평가를 듣되 그것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결정하는 최종적인 권위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 외부의 속도에 자극받으면서도 자신의 삶에 필요한 시간을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삶의 주체성은 세계를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려는 욕망을 내려놓을 때, 주어진 현실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으로 구체화된다.<br/><br/>책의 후반부에서 다루는 ‘파테이 마토스(Pathei Mathos)’, 곧 고통을 통해 배운다는 사유는 상처가 반드시 성장을 가져오는가 하는 오래된 물음을 다시 불러온다. 인간은 상실을 경험하며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감각을 획득하기도 한다. 예술이 개인의 고통을 표현과 소통의 형식으로 전환하는 과정 역시 그러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모든 고통이 배움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며, 상처를 경험한 사람에게 반드시 성장의 결과를 요구할 수도 없다. 고통을 통해 성숙해져야 한다는 명령은 행복을 증명해야 한다는 사회의 요구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험은 오랫동안 이해되지 않을 수 있고, 어떤 상실은 뚜렷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채 삶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자신의 경험을 해석할 권리가 있다. 고통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지, 혹은 당장은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자유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br/><br/>인간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의 크기를 미리 알지 못한다. 평온한 시절에는 사소하게 여겼던 사건이 삶 전체를 뒤흔들기도 하고, 도저히 견딜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시간을 지나 다시 일상의 감각을 회복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강인함은 미래의 불행을 대비해 미리 갖추어둘 수 있는 완성된 성질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은 삶이 예측을 벗어날 때마다 자신의 한계를 새롭게 알아가는 과정과 관계된다. 나디 미리안이 이야기하는 회복의 가능성 또한 인간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견딜 수 있는지 시험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지 알 수 없는 시간을 살아갈 능력이 있으며, 그 능력은 언제나 확신이나 용기의 형태로 나타나지도 않는다.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면서도 타인과 관계를 지속하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인간의 또 다른 강인함을 발견한다. 삶은 그 누구에게도 흔들리지 않을 것을 약속하지 않았으며, 인간은 그 약속 없이도 살아가는 법을 배워왔다.<br/><br/>✏️소정의 원고료와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348/83/cover150/k11213149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3488397</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우리는 왜 지금도 박지리의 문학을 읽어야 하는가 - [다윈 영의 악의 기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85241</link><pubDate>Wed, 21 Oct 2026 21: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8524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284471&TPaperId=1758524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9274/91/coveroff/895828447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284471&TPaperId=1758524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다윈 영의 악의 기원</a><br/>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6년 09월<br/></td></tr></table><br/>박지리가 세상을 떠난 지 열 해가 흘렀다. 그동안 그의 문장은 조금도 늙지 않았고, 아직 읽지 않은 작품들은 지금도 여전히 세월의 바깥에서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더는 새로운 작품이 쓰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존재하는 문장들의 무게를 달리한다. 세 세대에 걸친 악의 역사를 좇는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작가의 부재와 인간의 계승이라는 두 개의 시간을 겹쳐 보이게 한다. 한 사람의 생애는 멈추었으나 그가 쓴 이야기는 계속해서 새로운 삶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서 인간은 자신에게 도착한 과거를 어떤 방식으로 다음 세대에 전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br/><br/>소설의 세계는 아홉 개의 지구로 분할되어 있다. 권력과 부가 집중된 1지구에서 버림받은 9지구까지, 숫자는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을 결정한다. 60년 전 발생한 12월의 폭동은 국가의 공식적인 역사 속에서 위험한 반란으로 기록되었고, 그 기억은 하위 지구 사람들을 향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이러한 질서 안에서 성장한 다윈 영은 명문학교의 모범생이자 고위 관료의 아들이다. 그가 속한 세계의 안정은 누군가의 배제와 침묵을 토대로 유지되지만, 그에게 주어진 일상에서는 그러한 조건을 의심할 이유가 거의 없다. 그러나 오래전 발생한 살인 사건이 친구 루미의 추적을 통해 그의 일상에 들어오면서, 당연하게 여겼던 질서에도 의문의 여지가 생긴다. 오래전 살해당한 소년 제이 헌터의 죽음을 추적하는 과정은 다윈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br/><br/>계급은 제도의 형태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감각과 판단을 길들인다. 일찍이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아비투스처럼, 사회적 환경에서 습득한 가치와 행동 양식은 개인에게 자연스러운 성향으로 체화된다. 아비투스는 자신이 속한 계층의 질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내면의 습관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 축적된 경험은 무엇을 바라고 누구를 신뢰하며 어떤 삶을 가능하다고 여길 것인지까지 규정한다. 상위 지구의 사람들에게 하위 지구의 삶은 이해해야 할 현실보다 경계해야 할 위험으로 인식된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도덕적 기준조차 출신과 지위에 따라 다른 무게를 갖는다. 이 사회에서 악은 특정 개인의 내면에 고립된 성질로 설명되기 어렵다. 누군가의 생존을 위협하고 다른 누군가의 특권을 보호하는 구조가 인간의 선택을 지속적으로 압박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압박이 모든 행위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박지리는 사회적 조건과 개인의 책임이 서로를 침범하는 영역을 세밀하게 탐색한다.<br/><br/>이러한 세계에서 가족의 역사는 국가의 역사와 기묘하게 닮아 있다. 12월의 폭동을 기록한 사진과 삭제된 자료, 오랜 세월 반복되는 추도식은 모두 과거를 보존하거나 특정한 방식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와 연결된다. 기억은 사실을 저장하는 행위인 동시에 무엇을 드러내고 감출 것인지 결정하는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국가가 불편한 역사를 공식적인 기록에서 밀어내듯, 가족 역시 현재의 안녕을 위해 과거의 일부를 봉인한다. 그러나 삭제된 기록은 사라진 사건과 동일하지 않다. 침묵 속에서 유지된 비밀은 후손의 삶에 새로운 의무를 부과하고,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사람까지 과거의 이해관계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때 혈연은 사랑과 보호의 관계를 넘어, 미처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전달되는 통로가 된다.<br/><br/>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사랑은 가장 강력한 보호의 명분을 얻는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애착은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강렬한 유대 가운데 하나지만, 그 감정의 깊이가 언제나 윤리적 정당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려는 의지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할 이유가 되는 순간, 선의 언어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변질된다. 아일랜드 출신의 소설가이자 도덕철학자인 아이리스 머독은 도덕적 삶에서 자신의 욕망과 환상을 넘어 타인의 현실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머독에게 도덕적 성찰은 행동을 결정하는 순간에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자기중심적인 환상을 걷어내고, 그 사람의 독립적인 삶을 인정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윤리적 실천에 속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소설 속 가족애의 비극은 사랑의 결핍보다 그 시야의 편협함에서 발생한다. 가족을 지킨다는 확신이 강해질수록 타인의 고통은 감수해야 할 대가로 계산된다. 그렇게 인간은 사랑을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는 근거로 삼으며, 타인의 삶을 침범할 권리까지 스스로에게 부여한다.<br/><br/>다윈이라는 인물은 이러한 모순이 한 인간의 내면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보여준다. 그는 처음부터 악의를 품고 살아온 소년이 아니다. 성실함과 공정함을 자신의 가치로 받아들이고, 존경하는 아버지의 삶에서 도덕적 모범을 발견한다. 그러나 자신이 신뢰했던 질서의 이면을 알게 되면서 그동안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가치들이 서로 충돌하기 시작한다. 진실을 아는 일과 그 진실에 따라 행동하는 일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존재한다. 인간은 무엇이 옳은지 이해하면서도 자신이 감당해야 할 상실 앞에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다윈의 선량함은 그가 지키고 싶은 세계와 충돌하는 순간 시험대에 오른다. 자신이 옳다고 믿어온 원칙을 스스로 유예하는 동안, 악은 낯선 충동보다 익숙한 애착의 언어를 통해 그의 내면에 자리를 얻는다. <br/> 이러한 전개는 성장소설의 익숙한 서사적 관습을 뒤집는다. 통상 성장의 과정에서 세계의 모순을 발견하는 경험은 자아의 확장과 윤리적 성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박지리의 세계에서 앎은 성숙을 보증하지 않는다. 김현정(2022)은 「박지리 청소년 소설에 나타난 ‘악’의 양상 연구」에서 세 세대에 걸친 악의 진화와 속죄의식의 부재를 분석한다. 이러한 해석은 성장이라는 말에 내재한 낙관을 걷어내고, 인간이 자신의 도덕적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어떻게 악의 계보에 편입되는지 살펴보게 한다. 사르트르의 실존철학을 빌리자면 인간은 주어진 조건 속에서도 자신의 행위를 선택하며,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짊어진다. 인간은 선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형성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따를 가치와 삶의 방향을 구체화한다. 다윈 역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가족의 역사와 계급적 환경 속에서 태어났지만, 그 사실만으로 자신의 행위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가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도덕적 한계와 마주하며, 그 한계를 넘어서거나 그 안에 자신을 가두는 선택을 거듭한다. 박지리는 성숙의 가능성과 타락의 가능성이 동일한 인간 안에 공존한다는 사실을 가혹할 만큼 정교하게 드러낸다.<br/><br/>세 세대의 역사를 연결하는 후드는 작품의 이러한 사유를 응축한 사물이다. 처음에는 저항과 연대의 의미를 지녔던 물건이 시간이 흐르며 전혀 다른 목적에 동원된다. 하나의 사물이 역사적 맥락에 따라 의미를 바꾸듯, 악 역시 새로운 시대의 언어를 얻으며 자신의 존재를 지속한다. 여기서 제목의 ‘다윈’은 특별한 울림을 갖는다. 진화론을 정립한 찰스 다윈의 이름은 세대를 거쳐 이어지는 변화와 적응의 원리를 자연스럽게 환기하는 것처럼 읽힌다. 생물학적 진화에서 중요한 것은 환경에 따른 형질의 변화와 선택이며, 그 과정에는 인간이 기대하는 도덕적 진보의 방향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 소설은 이러한 진화의 개념을 악의 역사에 빗대어, 시대마다 다른 명분을 획득하는 폭력의 생존 방식을 드러낸다. 선대의 선택이 만들어낸 조건을 후대가 물려받고, 그 조건 속에서 다시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는 역사적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반복되는 폭력의 형식은 닮아 있지만, 각자의 선택에 부여되는 책임은 개별적으로 존재한다.<br/><br/>박지리는 이러한 사유를 거대한 관념의 설명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사진과 녹음기, 오래된 의복과 기록물처럼 구체적인 사물에 과거의 흔적을 새겨 넣고, 미스터리의 추적 과정에 사회의 역사와 가족의 비밀을 겹쳐 놓는다. 독자는 한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믿어온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재검토하게 된다. 피해자의 삶에도 폭력의 흔적이 있고, 가해자의 내면에도 사랑과 두려움이 존재한다. 이러한 복합성은 범죄의 책임을 흐리는 장치로 사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행위가 얼마나 다양한 감정과 이해관계 속에서 발생하는지 드러냄으로써 책임의 문제를 더욱 첨예하게 만든다. 856쪽에 이르는 분량은 수많은 인물의 삶을 하나의 윤리적 문제로 수렴시키는 데 필요한 시간으로 기능한다.<br/><br/>우리는 왜 지금도 박지리의 문학을 읽어야 하는가. 그의 소설에서 인간은 자신의 도덕을 배반하면서도 스스로를 선한 사람이라 믿을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사랑은 잔혹함과 공존하고, 정의에 대한 확신은 이해관계에 따라 손쉽게 방향을 바꾼다. 박지리는 이러한 모순을 인물의 성격적 결함으로 축소하지 않고, 그들이 속한 사회와 관계의 역사 속에서 치밀하게 길어 올린다. 그가 작품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것은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가에 관한 단순한 판정 이상의 것이 아닐까. 그의 인물들은 자신의 잘못을 설명할 언어를 너무도 능숙하게 찾아낸다. 생존과 보호, 사랑과 책임이라는 익숙한 가치들이 폭력의 명분으로 동원되고, 그럴듯한 이유를 획득한 잔혹함은 평범한 일상의 일부가 된다. 인물들은 저마다 구축한 논리로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고, 독자는 그 논리들이 충돌하는 자리에서 인간의 복잡성을 경험한다. 박지리는 독자가 누군가를 쉽게 단죄할 수 있도록 인물들을 단순화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의 사정을 이해하는 일이 죄의 무게를 덜어주도록 허락하지도 않는다. 바로 이 냉정한 거리에서 그의 문학은 인간을 향한 예리한 통찰을 획득한다. 선량한 사람에게도 잔혹함의 가능성이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는 의지가 타인의 삶을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 박지리의 문학은 독자를 인간의 가장 익숙한 표정 아래 감춰진 잔혹함의 기원으로 데려간다.<br/><br/>✏️도서출판 사계절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9274/91/cover150/895828447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92749186</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독서의 쾌감 - [그 살인, 본격 미스터리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82760</link><pubDate>Tue, 20 Oct 2026 16:3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8276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52131178&TPaperId=1758276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90/74/coveroff/k35213117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52131178&TPaperId=1758276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그 살인, 본격 미스터리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a><br/>가타오카 쇼 지음, 김예진 옮김 / 리드비 / 2026년 09월<br/></td></tr></table><br/>추리소설의 첫머리에 놓인 저택의 평면도에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사건의 기척이 서려 있다. 복도와 계단의 위치, 서로 맞닿은 방의 구조, 출입구와 창문의 개수까지. 건축가에게는 생활을 위한 설계일 공간이 독자에게는 의심의 좌표로 읽힌다. 등장인물의 이름과 관계를 정리한 목록 역시 마찬가지다. 몇 줄의 소개만으로 사람들은 잠재적인 용의자가 되고, 사소한 특징 하나에도 훗날의 범행을 설명할 가능성이 부여된다. 본격 미스터리를 오래 읽어 온 독자라면 이런 형식만으로도 충분한 설렘을 느낀다. 가타오카 쇼의 『그 살인, 본격 미스터리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는 그 오래된 독서의 쾌감을 능숙하게 호출한다. 도면을 펼치는 순간부터 독자는 사건의 바깥에서 관찰하는 사람인 동시에 아직 공개되지 않은 수수께끼의 참가자가 된다.<br/><br/>작품의 발상은 제목만큼이나 능청스럽다. 명탐정을 꿈꾸는 소녀 부우는 살인을 둘러싼 심상치 않은 계획을 알게 되고, 이를 막기 위해 머더 미스터리 플래너 야마이누와 손을 잡는다. 실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살인 사건을 연출한다는 기발한 구상은 시작부터 통상적인 추리소설의 순서를 뒤흔든다. 부우가 탐정이라는 역할에 품은 동경과 야마이누가 사건을 하나의 게임으로 구성하는 능력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면서도 기묘하게 맞물린다. 한쪽에서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사건을 꾸며야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사건이 얼마나 그럴듯한 미스터리로 완성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이 진지하면서도 엉뚱한 조합이 두 사람의 유쾌한 호흡을 만들어 낸다. 머더 미스터리와 클로즈드 서클이라는 익숙한 장치들까지 한데 모이면서 작품은 정교한 수수께끼와 희극적인 활기를 동시에 획득한다. 살인을 방지하기 위해 살인을 연출한다는 모순적인 발상에는 본격 미스터리의 관습을 마음껏 가지고 노는 작가의 장난기가 배어 있다.<br/><br/>본격 미스터리의 역사는 독자와 작가 사이에 축적된 약속의 역사이기도 하다. 밀실은 불가능해 보이는 범행의 논리적 해명을 예고하고, 고립된 저택은 제한된 용의자들 사이에서 진실을 찾아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한다. 독자는 이러한 약속을 학습하면서 장르에 능숙해진다. 건물의 구조를 살피고, 인물들의 동선을 계산하며,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 사물의 위치를 기억하는 행위에는 오랜 독서로 단련된 특유의 감각이 작동한다.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가 계승하고 발전시켜 온 건축적 트릭과 논리적 추론의 미학 역시 이러한 독서의 즐거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가타오카 쇼는 그 전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독자가 이미 알고 있는 규칙들을 자유롭게 재배열한다. 저택은 사건을 수용하는 무대인 동시에 추리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물이 되고, 게임은 등장인물의 행동을 조직하는 또 하나의 서사적 질서가 된다. 장르의 관습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에 가능한 유희다.<br/><br/>이러한 구성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언어게임의 개념과도 연결된다. 언어의 의미가 그것을 사용하는 삶의 맥락과 규칙 속에서 형성되듯, 추리소설의 장치들 역시 독자가 공유하는 장르적 문법 안에서 특정한 의미를 획득한다. 밀실이라는 공간이 수수께끼로 성립하려면 출입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관한 공통의 이해가 필요하고, 단서가 단서로 인식되려면 어떤 사물이 사건의 해명에 기여할 수 있다는 기대가 선행되어야 한다. 머더 미스터리는 이러한 규칙의 성격을 한층 선명하게 드러낸다. 참가자들은 각자 부여받은 역할에 따라 행동하고, 정해진 정보와 조건을 바탕으로 사건을 해석한다. 그러나 같은 행동과 사물이라도 그것이 놓인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작품은 이러한 의미의 가변성을 활용해 장르의 규칙이 얼마나 정교한 동시에 유연한 체계인지를 보여준다. 독자는 그 규칙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서 즐거움을 얻지만, 그 지식이 언제나 올바른 해석을 보장하지는 않는다.<br/><br/>추리에는 습관이 있다. 어떤 인물이 지나치게 수상하면 오히려 의심을 거두고, 사소한 물건이 반복해서 등장하면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찾는다. 장르에 익숙한 독자는 사건이 제시되기도 전에 가능한 해답의 목록을 작성한다. 이처럼 축적된 독서 경험은 새로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되지만, 동시에 해석의 방향을 미리 제한하기도 한다. 가다머의 해석학에서 선이해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이미 지니고 있는 역사적·경험적 조건을 가리킨다. 인간은 아무런 전제 없이 대상을 바라볼 수 없으며, 이해는 언제나 기존의 지평과 새로운 경험이 만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추리소설을 읽는 행위에도 이러한 구조가 작동한다. 독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범행의 유형과 서술의 관습을 바탕으로 단서를 배열하고, 그 배열이 그럴듯할수록 자신의 판단을 더욱 신뢰한다. 가타오카 쇼는 이 익숙한 인식의 과정을 작품의 유희와 결합한다. 본격 미스터리를 잘 아는 독자에게는 반가운 장치들이, 동시에 자신의 독서 습관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는 것이다.<br/><br/>여기서 추리소설 특유의 지적 쾌락이 발생한다. 독자는 작가가 제공한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문장 사이의 공백을 살피고, 인물의 진술을 비교하며,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인과관계를 스스로 구성하려 한다. 하나의 단서가 여러 가설을 낳고, 서로 모순되는 정보들이 잠정적인 질서를 이루는 과정은 인간의 인식 활동을 압축해 놓은 듯하다. 현실에서도 우리는 제한된 사실을 바탕으로 타인의 의도를 추측하고, 우연히 발생한 일들 사이에서 원인을 찾으며, 불완전한 정보에 일관된 설명을 부여한다. 추리소설은 그러한 인식의 욕망을 극도로 정교한 형식 안에 배치한다. 특히 본격 미스터리에서는 해답에 도달하는 논리적 과정 자체가 미적 경험이 된다. 복잡하게 흩어진 요소들이 하나의 질서 안에서 이해되는 순간의 쾌감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br/><br/>부우와 야마이누의 관계는 이러한 인식의 문제를 또 다른 방향으로 확장한다. 명탐정을 동경하는 부우에게 사건은 언젠가 자신의 추리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대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생명이 걸린 현실적인 문제다. 반면 미스터리 플래너인 야마이누는 사람들이 어떤 상황을 경험하고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게 될지 설계하는 일에 능숙하다. 한 사람은 사건의 진실을 발견하려 하고, 다른 사람은 사건이 특정한 방식으로 인식되도록 조건을 마련하는 셈이다. 이처럼 발견과 설계라는 상이한 활동이 한 이야기 안에서 만난다는 점이 작품의 독창성을 형성한다. 더욱이 두 사람은 추리소설의 관습을 공유하면서도 그것을 대하는 태도와 역할이 다르기에, 같은 상황을 두고도 서로 다른 방향에서 접근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인물 사이의 경쾌한 호흡을 가능하게 하면서,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다양하게 구성될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사실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만, 사실들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는 언제나 해석이 개입한다. 사건을 설명하는 이야기의 순서가 달라지면 중요하게 보이는 단서도 달라지고, 동일한 행동조차 전혀 다른 의도를 지닌 것처럼 읽힐 수 있다. 진실을 향한 추리가 이야기의 구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들의 기묘한 동행을 통해 부각된다.<br/><br/>한편 살인을 하나의 게임으로 구성한다는 발상에는 추리소설이 오래도록 품어 온 윤리적 긴장도 배어 있다. 본격 미스터리에서 죽음은 수수께끼를 발생시키는 결정적인 사건이며, 독자는 그 비극을 출발점으로 지적 즐거움을 경험한다. 피해자의 죽음이 논리적 퍼즐의 일부로 편입되는 순간, 인간의 고통과 추리의 쾌락은 동일한 서사 안에 공존하게 된다. 가타오카 쇼는 이러한 장르의 특성을 무거운 교훈으로 환원하기보다, 가짜 살인이라는 희극적인 발상을 통해 새롭게 환기한다. 특히 누군가의 죽음을 막으려는 부우의 목적은 추리의 즐거움과 생명의 무게가 공존하는 작품의 기묘한 분위기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사건을 정교하게 연출할수록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는 기준은 중요해지고, 추리의 대상으로서의 죽음과 인간에게 실제로 발생하는 죽음 사이의 거리 역시 의식하게 된다. 이러한 긴장은 작품의 경쾌한 분위기 아래에서 본격 미스터리라는 장르가 지닌 독특한 성격을 드러낸다. 독자가 즐기는 것은 죽음 그 자체보다 죽음을 둘러싼 불확실성을 논리적으로 해소하는 과정이며, 그 과정에는 인간이 혼돈 속에서도 질서를 찾으려는 오래된 욕망이 깃들어 있다.<br/><br/>『그 살인, 본격 미스터리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의 매력은 본격 미스터리의 전통에 대한 애정과 그 전통을 자유롭게 다루는 상상력이 한데 어우러진다는 데 있다. 가타오카 쇼는 도면과 저택, 탐정과 용의자, 단서와 트릭이라는 익숙한 요소들을 통해 장르 독자의 기대를 충족시키면서도, 그 기대가 형성되는 방식까지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인다. 부우와 야마이누의 요란한 동행에는 추리소설을 향한 동경과 사건을 설계하는 즐거움이 뒤섞여 있고, 두 인물의 경쾌한 호흡은 정교한 추리의 구조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첫 장에서 펼쳐 보았던 저택의 도면은 어느새 독자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가능성의 경로로 다시 그려진다. 종이 위의 선들은 공간의 구조를 정확하게 보여주지만, 그 공간에서 무엇을 의심하고 어떤 가능성을 선택할지는 읽는 사람의 몫이다. 정교하게 설계된 건축물 안에서 독자의 상상력은 끊임없이 새로운 통로를 찾아 나선다. 본격 미스터리의 즐거움은 그렇게, 이미 주어진 규칙을 이해하는 지성과 그 규칙 너머를 상상하는 자유가 만나는 곳에서 완성된다.<br/><br/>✏️도서출판 리드비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90/74/cover150/k35213117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1907453</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문헌의 보존과 숲의 생장 - [나무로 읽는 최치원 풍류길 - 고운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생태 인문 기행]</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80997</link><pubDate>Mon, 19 Oct 2026 18:5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8099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22131867&TPaperId=1758099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30/30/coveroff/k82213186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22131867&TPaperId=1758099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무로 읽는 최치원 풍류길 - 고운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생태 인문 기행</a><br/>김재웅 지음 / 책과나무 / 2026년 09월<br/></td></tr></table><br/>나무에게는 인간의 연대기가 없다. 왕조의 몰락도, 한 문장가의 영광도 나이테에 이름을 새기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오래된 숲 앞에서 우리는 지나간 사람들의 시간을 떠올린다. 누군가 나무를 심었고, 누군가는 그늘을 빌렸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가지를 잘라내거나 쓰러진 나무의 자리에 새로운 묘목을 심었다. 숲의 역사는 서로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손을 거쳐 자라난다. 김재웅의 『나무로 읽는 최치원 풍류길』은 신라 말의 문인 최치원이 남긴 문장과 행적을 나무의 생태적 시간 속에 펼쳐 놓는다. 당나라에서 명성을 얻은 문장가, 신라의 개혁을 꿈꾼 지식인, 가야산으로 향한 은둔자. 역사에 기록된 몇 개의 이름 사이로 향나무와 박달나무, 느티나무와 전나무가 자라난다.<br/><br/>봉암사의 박달나무 앞에서 저자는 최치원과 일연, 단군신화의 시간을 한데 불러 모은다. 서로 다른 시대에 속한 인물과 이야기가 한 그루의 나무를 중심으로 겹쳐지는 순간이다. 이 장면을 역사적 사실의 복원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박달나무는 그 모든 시간을 실제로 목격한 증인이 아니며, 나무의 수명만으로 과거의 진위를 판별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한 장소에 쌓인 기억은 반드시 물질적 연속성을 통해서만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이름은 비석에 새겨지고, 어떤 이야기는 사람의 입을 거쳐 전해지며, 때로는 나무 한 그루가 그 기억들을 다시 호출하는 계기가 된다. 저자의 답사에는 이처럼 기록의 빈틈을 현장의 감각으로 더듬으려는 시도가 있다. 나무의 종류와 생태를 살피는 시선 곁에 오래된 문헌과 지역의 전승이 나란히 놓인다. 역사적 장소는 그곳에서 발생한 사건만큼이나, 후대의 사람들이 무엇을 기억하기로 선택했는가에 의해서도 형성된다.<br/><br/>함양 상림에는 인간의 의지가 숲의 형태로 이어진 시간이 있다. 최치원이 천령군 태수로 재직하며 홍수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자 조성했다고 전해지는 숲이다. 물길을 다스리고 나무를 심는 일은 당장의 재난에 대응하는 행정적 실천이었겠지만, 그 결과는 한 관리의 임기를 훌쩍 넘어섰다. 상림의 나무들은 자라고 죽고 다시 뿌리를 내리며 오랜 세월 숲의 형태를 이어 왔다. 여기에는 인간의 의도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생명의 역사가 함께 축적되어 있다. 일찍이 한스 요나스가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을 논할 때 강조했던 것은 현재의 행위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삶의 조건까지 바꾸어 놓는다는 사실이었다. 상림의 조성을 오늘날의 생태윤리와 동일시할 수는 없겠지만, 나무를 심는 행위가 품은 시간의 방향은 주목할 만하다. 자신이 떠난 뒤에도 계속될 세계를 위해 지금 무엇을 마련할 것인가. 숲은 한 시대의 필요에서 태어나 다른 시대의 생명을 받아들이며 자란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돌봄은 자신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미래에까지 도달한다.<br/><br/>최치원의 정치적 생애를 떠올리면 이 숲의 존재는 더욱 복잡하게 읽힌다. 당나라에서 학문적 성취를 이루고 귀국한 그는 신라의 쇠락을 목격했고, 시무 십조를 올려 개혁을 모색했다. 그러나 골품제의 질서와 정치적 혼란 속에서 그가 꿈꾼 변화는 충분히 실현되지 못했다. 문장으로 세상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었던 지식인이 마주한 것은 문장의 능력만으로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유교적 출처관에서 벼슬에 나아감과 물러남은 개인의 처세를 넘어 도를 실천할 수 있는 조건에 관한 판단이었다. 최치원의 행적에도 그러한 고민이 배어 있는 듯하다. 정치의 중심에서 멀어진 뒤에도 그는 산천을 유람하고 학문과 문학을 이어 갔다. 세상을 향했던 정신이 자연 속에서 다른 리듬을 얻는 과정이었다. 다만 그의 은둔을 정치적 좌절의 필연적 귀결로 단정할 수는 없다. 한 인간의 선택에는 역사적 상황과 개인의 기질, 당대의 사상적 풍토가 함께 작용하기 때문이다.<br/><br/>청량산에서 독서와 바둑을 즐겼다는 전승, 임경대에서 마주하는 낙동강의 물길, 동백섬의 해안 풍경은 정치와 학문의 언어로만 설명할 수 없는 최치원의 삶을 펼쳐 보인다. 산천을 유람하며 시를 짓는 문인의 풍류에는 자연을 감각하는 일과 자신을 수양하는 일이 함께 놓여 있었다. 유교의 학문과 불교의 수행, 도가적 자연관이 서로 접촉했던 신라 말의 사상적 환경도 이러한 풍류를 이해하는 배경이 된다. 산을 오르고 물을 바라보는 동안 인간의 사유는 책상 위에서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 바람의 방향과 물의 흐름은 인간의 계획을 따르지 않으며, 나무는 자신의 생장에 필요한 시간만큼 계절을 통과한다. 그 질서를 바라보는 일에는 인간의 의지가 미치지 못하는 세계를 인정하는 태도가 수반된다. 풍류의 정신을 오늘날 다시 읽는다면, 자연을 자신의 감정에 맞추어 해석하기에 앞서 그 고유한 리듬을 감각하는 능력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br/><br/>해인사 학사대의 전나무 앞에서는 한 인간의 마지막 행적을 둘러싼 침묵이 짙어진다. 최치원의 말년은 정확한 기록으로 온전히 복원되지 않는다. 가야산에 은둔했다는 이야기와 신선이 되었다는 전승은 역사적 공백 위에 여러 세대의 상상력이 쌓인 결과다. 저자는 학사대의 전나무를 찾을 때마다 그 웅장한 모습에서 최치원의 기상을 떠올린다. 여기에는 살아 있는 나무를 통해 사라진 인간의 정신을 가늠하려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은 나무의 수명처럼 일정한 생물학적 연속성을 갖지 않는다. 기억은 전해지는 동안 변형되고, 시대마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최치원이라는 이름 역시 당대의 문장가에서 후대의 은둔자와 신선으로 거듭 해석되었다. 전나무가 환기하는 것은 한 인물의 변하지 않는 본모습보다, 그를 기억해 온 사람들의 오랜 시간이 아닐까. 나무 앞에 선 현재의 시선에는 수많은 과거의 시선이 겹쳐 있다.<br/><br/>이 책에서 나무는 자주 인간의 삶을 설명하는 언어가 된다. 양주의 녹나무가 지닌 왕성한 생명력은 당나라에서 활약한 최치원의 모습과 연결되고, 해인사의 전나무는 그의 기상을 떠올리게 한다. 식물의 생태적 특성을 인간의 성품과 대응시키는 방식은 오래된 문학적 전통이기도 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나무의 존재가 인간을 위한 상징으로만 좁혀지는 순간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녹나무의 씨앗은 문장가의 명성을 위해 퍼져 나가지 않으며, 전나무는 누군가의 정신을 보존하려고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나무에게는 인간의 해석이 미처 포괄하지 못하는 고유한 생의 질서가 있다. 저자가 청량산에서 줄기 일부가 고사한 느티나무를 살피고, 오랜 나무를 보호해 온 사람들의 수고를 떠올리는 장면은 그런 점에서 각별하다. 나무를 인간의 역사와 연결하는 상상력 곁에 실제 생명을 향한 관찰과 돌봄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br/><br/>인간은 자신의 생애가 얼마나 오래 기억될지 알 수 없다. 한때 세상의 질서를 바꾸려 했던 최치원의 문장은 비석과 문집에 전해지고, 그가 백성을 위해 조성했다고 전해지는 숲은 오늘날에도 새로운 생명을 길러 낸다. 그러나 문헌의 보존과 숲의 생장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이어 간다. 문헌은 과거의 언어를 후대에 전달하고, 숲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생명의 관계를 계속 만들어 낸다. 김재웅은 그 두 시간 사이를 걸으며 역사적 인물의 생애를 다시 읽는다. 상림에서는 인간이 자연에 맡긴 미래를, 학사대에서는 자연을 통해 되살리는 과거를 마주한다. 우리가 지나온 자리에 무엇을 심고 어떤 것을 돌보았는가에 따라 후대가 물려받을 세계의 모습도 달라진다. 한 인간의 시대가 저문 뒤에도 숲은 자란다. 그 숲의 내일에는 우리가 오늘 선택한 삶의 방식까지 뿌리내리고 있다. <br/> ✏️도서출판 책과나무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30/30/cover150/k82213186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1303027</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저마다의 안과 밖 - [서울 밖 감정]</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79099</link><pubDate>Sun, 18 Oct 2026 20:0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7909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42131796&TPaperId=1757909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330/82/coveroff/k04213179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42131796&TPaperId=1757909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서울 밖 감정</a><br/>성해나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10월<br/></td></tr></table><br/>지도 위의 경계선은 언제부터 삶의 가능성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을까. ‘말은 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옛말에는 기회와 성공이 특정한 장소에 집중되어 있다는 오랜 인식이 배어 있다. 어느 도시에서는 저녁 식사 후 가볍게 들를 수 있는 문화 행사가 다른 도시에서는 하루의 일정과 비용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 된다. 같은 책을 좋아하고 같은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도, 그 마음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노력은 거주지에 따라 달라진다. 문화적 풍요가 특정한 장소에 집중될수록 취향은 개인의 선택을 넘어 지리적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 서울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도시를 지칭하는 동시에 기회와 가능성의 척도로도 작동한다.<br/><br/>여섯 작가가 참여한 『서울 밖 감정』은 서울을 향한 서로 다른 감정의 궤적을 따라간다. 서울을 떠난 사람과 서울에 들어온 사람, 그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했던 사람들이 각자의 경험을 통해 도시의 이면을 드러낸다. 이들의 기억에는 동경과 모멸, 자유와 외로움, 안도와 불안이 뒤섞여 있다. 한 도시를 향한 감정이 이토록 복잡한 까닭은 공간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 또한 단일한 방향으로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시의 물리적 환경과 사회적 질서는 개인의 욕망을 형성하고, 그곳에서 축적된 경험은 다시 장소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어놓는다.<br/><br/>성해나의 &lt;탑승 시 손을 흔드시오&gt;에서 버스는 지역 간 불균형을 드러내는 가장 일상적인 사물이다. 정류장에서 손을 흔들어야 멈추는 버스와 승객의 의사와 무관하게 정차하는 버스 사이에는 서로 다른 생활의 규칙이 존재한다. 어떤 지역에서는 버스를 놓쳐도 곧 다른 교통수단을 선택할 수 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한 번의 놓침이 하루의 일정을 뒤흔든다. 불편을 오래 경험한 사람은 그것을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익숙함은 환경에 적응하도록 돕는 동시에 더 나은 조건을 상상할 기회마저 좁힌다.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는 정도에 따라 개인이 사용하는 시간과 선택의 범위도 달라진다는 사실은 지역의 격차를 단순한 편의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게 만든다.<br/><br/>공간이 인간의 삶을 제약하는 방식은 주거에서도 발견된다. 이기호의 &lt;두 번째 만남&gt;에는 구기동의 열악한 자취방과 결로 문제를 둘러싼 분쟁, 법정에서 들었던 ‘가난한 작가’라는 말이 등장한다. 경제적 형편이 타인의 언어를 통해 한 사람의 정체성으로 규정되는 순간, 가난은 생활의 조건을 넘어 존엄을 침범하는 경험이 된다. 김현의 &lt;장면들&gt;에서 집은 또 다른 의미를 얻는다. 지하와 반지하를 거쳐 서울 밖에 마련한 집에 손님방이 생기면서,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사용하던 공간은 타인을 맞이하는 장소로 확장된다. 주거의 여유는 면적이나 소유의 문제를 넘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과 연결된다. 대학 시절 병원 실습을 위해 잠시 머물렀던 고시원은 몸 하나를 눕히는 일조차 버겁게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하루의 긴장을 풀어야 할 방에서 오히려 숨이 막히던 경험은 집이 인간에게 제공해야 할 최소한의 안온함을 돌아보게 한다. 공간의 크기는 신체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그 안에서 반복되는 감각은 마음의 상태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 사람에게는 휴식조차 어려운 방이 주어지고, 다른 사람에게는 누군가를 초대할 여유가 허락된다. 집의 형태가 곧 삶의 형태를 결정하지는 않더라도, 그 안에서 허용되는 일상의 폭은 분명 다르다.<br/><br/>도시가 인간에게 행사하는 영향력은 물질적인 환경에서 그치지 않는다. 임선우의 &lt;너도 어서!&gt;에서 서울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앞서 나가라고 재촉하는 도시다. 더 높은 학력과 소득, 더 좋은 직장과 집을 향한 욕망은 개인의 열망처럼 느껴지지만, 그 기준은 이미 사회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무엇을 성취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목소리가 반복될수록 인간은 자신의 속도를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경쟁의 감각이 창작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는 작가의 고백은 도시의 욕망을 쉽게 선악으로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 사회가 형성한 열망이라 해도 그것을 통과하며 이루어낸 성취에는 개인의 시간과 노력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br/><br/>현호정의 &lt;새소리&gt;는 그와 다른 방향에서 도시의 자유를 살핀다. 여러 세대가 함께 살던 집을 떠나 혼자만의 공간을 얻은 뒤 찾아온 고요는 타인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을 가능하게 한다. 도시의 익명성은 사람들을 고립시키지만, 누군가의 삶을 함부로 들여다보지 않는 거리 또한 제공한다. 관심이 언제나 배려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걱정과 애정에서 비롯된 말조차 상대에게는 자신의 선택을 설명하고 정당화해야 한다는 부담이 될 수 있다. 타인을 존중하는 일에는 그가 아직 말하지 않은 사정을 섣불리 해석하지 않는 태도도 포함된다. 외로움과 자유가 서로의 곁에 놓일 수 있다는 현호정의 인식은 공동체의 친밀함을 무조건적인 미덕으로 받아들이던 시선을 다시 살피게 한다.<br/><br/>장소와 인간의 관계는 기억 속에서 더욱 복잡해진다. 김화진의 &lt;둘로 나뉘어 있다는 감각&gt;에서 남태령역과 선바위역은 서울의 자신과 안양의 자신을 구분하는 상징적인 경계가 된다. 같은 사람이 지하철을 타고 이동할 뿐인데, 특정한 역을 통과하는 순간 자신이 속한 세계가 달라진다고 느낀다. 그가 동경하던 문화적 공간에 가까워지기 위해 서울로 이주한 뒤에도 소속의 감각은 단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거주지는 바뀔 수 있어도 그곳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는 여전히 일상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가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환경심리학자 스캐넬과 기퍼드(Scannell & Gifford, 2010)는 논문 〈장소애착의 정의: 삼차원적 구성 체계(Defining Place Attachment: A Tripartite Organizing Framework)〉에서 장소애착을 인간과 심리적 과정, 장소라는 세 차원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한다. 장소에 대한 애착은 개인과 공동체가 부여하는 의미, 감정과 기억을 비롯한 인지적 경험, 물리적 환경과 사회적 관계가 복합적으로 얽히며 형성된다. 따라서 같은 장소를 경험하더라도 그곳에 부여하는 의미는 서로 다를 수 있으며, 한 사람이 장소와 맺는 관계 또한 축적된 경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br/><br/>자연이 지천이었던 나의 고향에서는 나무와 하늘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았다. 등하굣길이나 밤 산책에서 무심히 올려다보던 하늘은 다른 도시에서 생활하게 된 뒤에야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고향의 밤을 밝히던 주황색 가로등은 낯선 도시의 흰 불빛 아래에서 오래전의 색채로 되살아난다. 저녁이면 고요한 거리로 밥 짓는 소리와 냄새가 흘러나왔고, 밤이 깊어지면 눈이 내려앉는 소리마저 들릴 만큼 사위가 잠잠한 나의 고향. 도시의 밤이 여전히 사람들의 발걸음과 소음으로 이어질 때, 고향의 밤은 하루의 생활을 천천히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건물 사이에서 문득 하늘을 바라볼 때면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어 올린 날이 언제였는지 기억을 더듬는다. 떠난 장소는 기억 속에서 새롭게 읽힌다. 그리움의 대상에는 고향의 풍경뿐 아니라 그 풍경을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이던 과거의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장소는 눈에 보이는 풍경뿐 아니라 빛의 색과 소리, 냄새와 침묵을 통해서도 한 사람의 내면에 새겨진다.<br/><br/>그러나 주황빛 가로등 아래에서 누렸던 고요가 그곳의 모든 시간을 다정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니다. 자연과 친숙했던 생활에는 촘촘한 인간관계가 있었고, 더 넓은 도시에서는 자연과의 거리가 멀어진 대신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여지가 생겼다. 친밀함이 안정감을 제공하는 만큼 개인을 평가하는 시선으로 작용할 수도 있으며, 익명성은 외로움을 동반하면서도 자신을 자유롭게 드러낼 기회를 허락한다. 어느 장소가 더 나은 삶을 보장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이유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자유의 형태가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같은 장소로 돌아간다고 해서 과거와 동일한 감정을 경험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장소를 기억하는 사람 역시 시간 속에서 변화해왔으므로.<br/><br/>결국 『서울 밖 감정』의 여섯 산문이 함께 보여주는 것은 장소와 인간이 서로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서울이라는 중심은 기회와 자원의 배분을 통해 삶의 조건을 바꾸고, 개인은 그 안에서 욕망과 좌절, 애정과 소외를 경험한다. 그러나 한 장소의 의미는 그곳에 주어진 조건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누구와 관계를 맺고 어떤 시간을 보내며 자신의 모습을 얼마나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는지에 따라 소속의 감각도 달라진다. 그곳에서 누리는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 기울이는 관심과 책임 역시 장소를 삶의 일부로 만드는 요소가 된다. 서울의 안과 밖을 가르는 선은 지도 위에 선명하게 그어져 있지만, 인간의 감정은 그 경계를 따라 나뉘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 서울은 도달하고 싶은 세계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떠나야만 비로소 숨을 고를 수 있었던 장소다. 같은 도시에서도 누군가는 기회를 발견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자리를 잃는다. 장소에 대한 판단은 삶의 어느 시기에, 어떤 조건으로 그곳을 통과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한때 자신을 가두었던 거리가 훗날에는 돌아가고 싶은 풍경이 되고, 그리워하던 도시의 불빛이 어느 날에는 피로의 색으로 번진다. 장소는 그대로여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시간은 계속 흐른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는 그 변화 속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안과 밖을 다시 그려나간다.<br/><br/>✏️한겨레출판으로부터 하니포터 13기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330/82/cover150/k04213179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3308264</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아무래도 좋다 - [관도 꽃도 필요 없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78341</link><pubDate>Sun, 18 Oct 2026 11:4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7834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22131682&TPaperId=1757834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318/74/coveroff/k722131682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22131682&TPaperId=1757834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관도 꽃도 필요 없다</a><br/>아사쿠라 가스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도서출판) / 2026년 10월<br/></td></tr></table><br/>우리는 아무래도 좋다고 말하기까지 제법 많은 것을 헤아린다. 잃어버린 것과 아직 포기하지 못한 것, 어떻게 해도 달라질 기미가 없는 사정들을 차례로 세어보다가 어느 순간 계산을 그만둔다. 그러나 마음의 셈법은 영 엉터리여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던 사람이 하찮은 일에 발끈하고 아무런 기대도 없다던 사람이 내일의 일을 궁금해한다. 체념에도 잔돈이 생기는 것이다. 삶에 대한 미련은 대개 이런 식으로 정확한 액수를 숨긴다. 무엇을 얼마나 원하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면서, 인간은 자기 몫의 하루를 꼬박꼬박 소비한다.<br/><br/>아사쿠라 가스미의 『관도 꽃도 필요 없다』에는 자신의 인생을 충분히 이해하거나 통제하지 못하면서도 어떻게든 하루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불안정한 노동과 노후의 불안, 오래된 관계의 변화, 계획에서 벗어난 미래와 가족의 책임. 다섯 편의 소설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법한 사정들을 품고 있지만, 그 사정들이 흘러가는 방향은 좀처럼 예측하기 어렵다. 인물들은 대단한 결심 없이 이상한 선택을 하고, 자신의 감정을 명료하게 설명하지 못하면서도 타인에게 뜻밖의 말을 건넨다. 삶이란 원래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듯, 작가는 그들의 어설픈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한다. 비극적인 사정 속에서 불쑥 우스운 장면이 튀어나오고, 우스꽝스러운 행동의 뒤편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쓸쓸함이 배어난다.<br/><br/>아사쿠라 가스미의 소설에서 인물의 성격은 대개 그가 처한 사정만큼이나 그 사정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걱정은 걱정대로 하면서 엉뚱한 데 정신을 팔고, 오래 묵은 감정은 적당한 이름을 얻기도 전에 말이나 행동으로 새어 나온다. 작가는 이 어긋난 순서를 그대로 따른다. 심리의 원인을 추적해 행동의 의미를 확정하기보다, 행동이 먼저 벌어지고 감정이 뒤늦게 따라오는 인간의 불규칙한 리듬을 살린다. 인물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는 충분히 주어지지만, 그 정보만으로 인물의 전부를 소유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의 사정을 안다는 것과 그 사람을 안다는 것 사이에는 언제나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 끼어 있다.<br/><br/>특히 이 소설집에서 비극과 희극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한다. 죽음을 생각하는 일에도 생활의 구체적인 계산이 따라붙고, 심각한 사연은 뜻밖의 우회로를 거쳐 엉뚱한 장면에 도착한다. 그 모습은 때로 우습고 때로 처연하다. 작가가 구사하는 유머에는 웃음의 대상을 쉽게 지정할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인물의 행동이 우스운지,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든 사정이 우스운지, 혹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웃음을 참는 독자의 처지가 우스운지 분간하기 어려워진다. 희극의 형식 안으로 들어온 불행은 잠시 낯선 표정을 짓는다. 웃음이 터진 자리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사정들이 널려 있다. 독자는 웃음의 뒷맛에 섞인 씁쓸함까지 삼키게 된다.  그런 까닭에 작품 곳곳에서 감지되는 ‘아무래도 좋다’라는 태도에는 일정한 온도가 없다. 어떤 순간에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겠다는 체념이고, 어떤 순간에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요구를 잠시 밀어내는 방어이며, 또 어떤 순간에는 무엇이든 반드시 의미 있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의 해방처럼 들린다. 이 말은 마음의 상태를 정확히 진술하기보다 그 상태를 잠정적으로 처리하는 데 쓰인다. 인간은 감정을 일일이 분류하며 살 수 없으므로, 때때로 여러 사정을 하나의 말 아래 대충 밀어 넣는다.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에는 그렇게 처리된 마음의 잡동사니가 쌓여 있다. 그 안에는 이미 식어버린 욕망도 있고, 아직 손대기 어려운 상처도 있다.<br/><br/>어떻게든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생존의 경험에서 빌려온 서툰 낙관이다. 지금까지의 생존이 앞으로의 안녕을 보증해 줄 리 없지만, 인간은 자신의 이력에서 다음 하루를 살아갈 이유를 빌려온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확보하지 못한 사람은 과거의 생존을 증거 삼아 현재를 통과한다. 이 허술한 추론에는 인간의 끈질김과 취약함이 함께 들어 있다. 어떻게든 되겠다는 말은 어떻게든 되어야 한다는 절박함을 감춘 채 낙관의 문법을 빌린다. 그 느긋한 어조에는 내일의 불안을 잠시 속여 넘기려는 궁여지책이 배어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의 긍정은 유난히 낮은 목소리로 발화된다. 희망이라는 단어를 꺼내기에도 피곤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허락하는 하루치의 신용이다.<br/><br/>물론 그 신용에는 사회가 떠넘긴 빚도 섞여 있다. 노후를 걱정하는 사람과 아직 미래를 선택해야 할 나이의 사람이 비슷한 체념을 배운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씁쓸하다. 누구에게나 내일은 오지만, 내일을 계획할 수 있는 여유는 불균등하게 배분된다. 어떤 사람은 가능성을 넓히기 위해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당장의 생활을 지키기 위해 가능성을 지운다. 그 차이가 개인의 결심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질 때, 생존은 지나치게 손쉬운 미덕이 된다. 때로 체념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세계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마지막 수단이 된다. 아사쿠라 가스미의 인물들은 바로 이 모호한 영역에서 살아간다. 그들의 무심함에는 상처가 있고, 그들의 집착에는 생의 의지가 있으며, 그들의 우스운 행동에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절박함이 뒤따른다.<br/><br/>다섯 편을 묶는 것은 공통된 교훈보다 인물을 대하는 작가의 일정한 거리감이다. 파견 사무소와 커피숍, 낡은 맨션과 풀밭은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건의 무대이면서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지나가는 장소다.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일이 타인의 시야에서는 사소한 풍경으로 지나간다. 소설은 그 시야의 차이를 세밀하게 조절한다.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인물의 사정은 구체화되지만, 그의 모든 행동이 합리적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작가는 독자에게 인물의 속사정을 들여다볼 자리를 내주면서도 그를 완전히 판정할 권한까지 넘기지는 않는다. 연민과 판단이 쉽게 결탁하는 자리에서, 이 문학은 인간의 불가해함을 하나의 개성으로 보존한다.<br/><br/>『관도 꽃도 필요 없다』라는 제목에는 장례식의 엄숙함을 슬쩍 비트는 말맛이 있다. 관과 꽃은 죽음을 수습하고 애도하는 데 쓰이지만,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비용과 절차, 남겨질 사람들의 수고이기도 하다. 죽음을 생각하는 순간에도 생활의 형편이 끼어드는 것이다. 그러니 관도 꽃도 필요 없다는 말에는 장례의 형식을 거부하는 고집과 그 형식에 들일 여력마저 헤아려야 하는 현실이 동시에 묻어난다. 필요 없다는 선언이 언제나 충분히 가진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일 수는 없다. 때로는 원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오래 줄여온 사람이 자신의 마지막에 붙이는 가격표처럼 들린다. 그런데 관도 꽃도 필요 없다는 말은 이상할 만큼 구체적이다. 정말 아무래도 좋다면 굳이 두 가지를 골라 거절할 이유가 있을까. 인간은 세상일을 대강 포기하면서도 자신이 싫어하는 것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죽음이라는 가장 확정적인 사건 앞에서도 취향과 성미, 사소한 고집이 고개를 든다. 장례의 장식을 덜어내려는 제목에서 도리어 살아 있는 사람의 생활감이 짙어지는 까닭이다. 관과 꽃이 빠진 자리에는 한평생 무언가를 염려하고 계산하고 거절해 온 사람의 습관이 놓인다. 죽음을 다루는 문장이 이렇게까지 생활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 우습고, 그 우스움에는 차마 웃어넘길 수 없는 사정이 있다.<br/><br/>삶의 대부분은 자신이 원하는 것과 감당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적당한 값을 치르는 시간으로 채워진다. 어떤 날에는 기꺼이 지불하고, 어떤 날에는 가진 것을 몽땅 털어도 모자란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좋다고 말한다. 그 말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는 기대 없이, 잠시 계산을 멈추기 위해서. 아사쿠라 가스미는 그 짧은 중단과 다시 시작되는 생활을 지켜본다.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체념하고, 그 체념을 조금씩 어기면서 살아간다. 관도 꽃도 필요 없다는 사람에게도 아직 하루치의 생활이 있다.<br/><br/>✏️도서출판 열림원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318/74/cover150/k722131682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3187420</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미생물의 세계에도 인간의 언어가 스며들 수 있을까 - [세균도 사랑을 아는데 - 세상을 연결하는 가장 작은 생명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75601</link><pubDate>Fri, 16 Oct 2026 17:5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7560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12131596&TPaperId=1757560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374/3/coveroff/k81213159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12131596&TPaperId=1757560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세균도 사랑을 아는데 - 세상을 연결하는 가장 작은 생명들</a><br/>김응빈 지음 / 사회평론 / 2026년 10월<br/></td></tr></table><br/>자연의 생명들은 인간이 부여한 감정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누군가의 선의를 기대하지도 않고, 도움을 받았다는 이유로 고마움을 표현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은 오래전부터 자연에서 자신의 감정을 발견해 왔다. 꽃의 개화를 기다림으로, 낙엽의 추락을 이별로, 서로 기대어 자라는 나무를 우정으로 읽는다. 미생물의 세계에도 인간의 언어가 스며들 수 있을까. 세균에게 사랑을 묻는 김응빈의 제목은 생물학과 감정 사이에 제법 엉뚱한 통로를 낸다.<br/><br/>『세균도 사랑을 아는데』에서 미생물들은 한없이 부지런하고 대체로 계산적이다. 나무의 뿌리 주변에 모여든 세균은 식물과 물질을 주고받고, 곰팡이와 미세조류는 각자가 가진 능력을 결합해 살아간다. 식물이 광합성으로 만들어낸 유기물은 다른 생명체의 먹이가 되고, 미생물의 활동은 식물이 영양분을 이용하는 데 관여한다. 서로의 필요가 맞아떨어질 때 관계는 지속되지만, 환경이 달라지면 그 양상도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이들에게 협력이란 아름다운 성품의 발현보다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인 활동이다. 인간이 그 모습을 보고 우정을 떠올리는 동안에도 미생물들은 그저 살아갈 방법을 수행하고 있다.<br/><br/>그러나 생존의 셈법이 언제나 서로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곰팡이가 다른 미생물의 성장을 억제하는 물질을 생산한다는 사실은 자연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조금 다른 감각을 요구한다. 페니실린은 인간에게 질병을 치료하는 약물이지만, 그것이 발견된 생물학적 맥락에는 미생물 사이의 경쟁이 있다. 한쪽의 생존에 유리한 작용이 다른 쪽의 활동을 방해하는 일도 자연에서는 얼마든지 벌어진다. 인간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물질에 구원의 의미를 부여하지만, 같은 물질을 마주한 미생물에게는 전혀 다른 결과가 기다린다. 생태계의 어느 장면을 아름답다고 부르고 어느 장면을 잔혹하다고 판단할 것인지는 결국 관찰자의 위치와 무관하지 않다.<br/><br/>그렇다면 공생을 이야기할 때 인간이 떠올리는 평화로운 이미지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함께 살아간다는 말은 대개 서로를 배려하고 양보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생물학적 공생은 인간의 도덕적 감정과 별개로 성립한다. 기생과 경쟁, 협력과 의존은 생명체들이 서로의 존재에 관여하는 여러 방식이다. 생존을 위한 관계에는 상대를 이롭게 하는 작용도, 해를 끼치는 작용도 존재한다. 자연의 복잡함을 이해하려면 그 안에서 인간이 보고 싶은 윤리적 장면만 골라내는 습관부터 살펴야 한다. 미생물의 세계가 보여주는 것은 화합의 이상향보다 서로 다른 생명들이 동일한 환경을 점유하면서 만들어내는 수많은 접촉과 마찰이다.<br/><br/>그 접촉이 가장 낯설게 느껴지는 장소는 의외로 인간 자신의 몸이다. 장과 피부, 구강에 서식하는 미생물은 인간의 생리적 활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장내미생물의 대사산물은 숙주의 생리 기능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면역계는 다양한 미생물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달하고 조절된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하나의 독립적인 개체로 인식하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다른 생명체들의 활동이 복잡하게 관여한다. 몸속의 미생물들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가면서도 인간의 건강 상태에 영향을 준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명 활동의 주도권까지 독점하지는 못한다. 생물학자 스콧 길버트와 동료 연구자들은 2012년 발표한 논문 「A Symbiotic View of Life: We Have Never Been Individuals」에서 생명체를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규정해 온 생물학의 오랜 관습을 재검토한다. 그들의 논의에서 개체란 자신의 세포만으로 완결되는 단위가 아니라, 다른 종의 생명체들과 생리적 기능을 나누며 유지되는 복합적인 존재다.<br/><br/>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세포와 미생물의 세포는 서로 구별되지만, 그 경계가 생명 활동의 단절까지 의미하지는 않는다. 면역계 역시 외부의 모든 존재를 일률적으로 제거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무엇을 배제하고 무엇을 허용할 것인지 조절하는 복잡한 과정 속에서 신체의 안정성이 유지된다. 인간은 흔히 자신과 타인을 분리하는 경계를 확고하게 그으려 하지만, 생물학적 개체의 경계는 물질과 신호가 끊임없이 오가는 장소이기도 하다. 몸 안에 사는 미생물을 모두 낯선 침입자로 여긴다면, 인간의 건강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된다.<br/><br/>살아 있는 몸이 수많은 생명의 활동으로 유지된다면, 죽은 몸 역시 다른 생명들의 활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죽은 생명체의 유기물을 분해하는 과정에서도 미생물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인간 퇴비화는 이 생물학적 작용을 장례 방식으로 받아들인 사례다. 죽은 몸을 구성하던 물질이 미생물의 활동을 거쳐 변화하고, 일부는 다른 생명체가 이용할 수 있는 형태로 순환한다. 인간에게 죽음은 한 사람의 경험과 기억, 관계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지속될 수 없다는 사건이다. 그러나 자연의 물질적 과정에서는 그 몸을 이루던 성분들이 다른 형태로 이동한다. 삶의 종결과 물질의 순환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동시에 성립한다.<br/><br/>우리는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동시에 한 사람을 구성했던 물질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향하는지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분해자는 인간이 버려졌거나 사라졌다고 여기는 물질을 다른 생물학적 과정에 편입시킨다. 낙엽이 썩고 죽은 나무가 분해되는 동안 물질은 형태를 바꾸며 이동한다. 한 생명체의 몸은 그 자신만의 역사로 완성되지 않는다. 탄생 이전부터 존재했던 물질들이 잠시 하나의 개체를 이루었다가 다시 흩어지는 과정에는 인간의 시간 감각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길이가 있다. 그렇다고 이러한 순환이 죽음의 상실을 위로하거나 사라진 존재를 되돌려 주지는 않는다. 생태계의 물질적 지속과 한 인간의 부재는 서로를 상쇄하지 않은 채 나란히 존재한다.<br/><br/>인간의 감정으로는 쉽게 헤아리기 어려운 이러한 생명의 활동을, 김응빈은 유머와 비유를 통해 익숙한 이야기로 풀어낸다. 세균에게 ‘혼밥’이라는 말을 붙이고 미생물들의 생존을 인간의 일상처럼 이야기하는 태도에는 연구 대상을 오래 바라본 사람 특유의 친밀함이 배어 있다. 전문적인 용어를 익숙한 장면에 연결하는 설명은 독자가 생물학적 현상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면서도 미생물의 생존이 인간의 감정과 동일하게 작동한다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감각적인 책의 디자인까지 더해져 낯선 학문의 문턱이 한층 낮아진다. 이토록 감성적인 미생물학자라니. 생물의 구조와 기능을 설명하는 문장에서 인간의 생활과 관계를 향한 관심까지 발견하게 되는 경험은 제법 특별하다.<br/><br/>무엇보다 이러한 언어가 반가운 까닭은 미생물이 인간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면서도 좀처럼 친숙한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이름을 알고, 몸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면서도 정작 그들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일은 드물다. 저자는 이러한 낯섦 사이에 인간의 언어를 들여놓는다. 세균의 협력을 사랑이라 부르고, 먹이를 얻는 방식을 식사에 빗대는 순간 현미경 너머의 생명들이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이웃처럼 가까워진다. 생물학적 현상에 일상의 어휘를 입히는 방식은 낯선 세계를 익숙한 감각으로 번역하는 일이며, 독자가 미생물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 있도록 마련한 다정한 초대이기도 하다. 이름조차 생소했던 존재들에게 생활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 그 작은 상상력이 생명에 대한 이해를 얼마나 풍성하게 만드는지, 저자는 유쾌한 문장들로 증명한다.<br/><br/>인간이 미생물의 생활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일은 낯선 생명에게 관심을 갖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우리는 자연에서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발견하려 하고, 때로는 자연의 모습으로 인간의 삶을 설명하려 한다. 익숙한 감정과 언어를 빌려 다른 생명의 활동을 상상하는 동안, 평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생존의 조건들이 비로소 구체적인 모습을 얻는다. 나무의 뿌리와 미생물의 활동, 인간의 장내 생태계, 죽은 생명체를 분해하는 작은 존재들의 노동은 한 개체의 삶이 얼마나 많은 외부의 작용과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그 관계를 사랑이라 부를 것인지는 인간의 언어가 결정할 문제다. 다만 그 관계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인간의 감정과 무관하게 성립한다.<br/><br/>『세균도 사랑을 아는데』의 다정함은 미생물을 인간처럼 묘사하는 표현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존재를 오래 관찰하고, 그 낯선 생존의 원리를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옮기려는 저자의 태도에도 다정함이 있다. 인간이 세균에게 사랑을 가르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세균의 삶을 이해하려는 인간에게는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관계의 형식들이 기다리고 있다. 자연의 생명들은 인간의 감정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사유를 끊임없이 자극한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잠시 빌려 미생물의 세계에 들어갔다가, 그 단어에 미처 담지 못했던 복잡한 생존의 모습까지 발견하는 것.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은 그 낯선 왕복에 있다.<br/><br/>✏️도서출판 사회평론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374/3/cover150/k81213159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3740353</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영원히 피어 있으려는 꽃 아래에서 - [지지 않는 벚꽃]</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74035</link><pubDate>Thu, 15 Oct 2026 21:0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7403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6048350&TPaperId=1757403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377/52/coveroff/897604835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6048350&TPaperId=1757403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지지 않는 벚꽃</a><br/>유즈키 유코 지음, 김지연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10월<br/></td></tr></table><br/>벚꽃은 지기 때문에 아름답다. 한철의 개화를 위해 긴 계절을 견디고, 가장 찬란한 순간에 스스로의 소멸을 예고한다. 피어 있는 시간보다 흩날리는 순간이 오래 기억되는 까닭도 그 유한성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결코 지지 않는 벚꽃이 있다. 계절의 질서를 거스르며 영원한 개화를 꿈꾸는 꽃은 과연 아름다울 수 있을까. 유즈키 유코의 『지지 않는 벚꽃』은 이 익숙한 자연의 이미지에 섬뜩한 의미를 부여한다. 시들지 않는다는 말에 깃든 생명력과 불멸의 약속이 어느 순간 두려움의 언어로 뒤바뀐다. 무너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누군가에게는 무너뜨릴 수 없다는 절망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br/><br/>한 여대생이 스토킹 피해를 호소하지만 경찰의 대응은 지연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죽음에 이른다. 경찰의 부실한 대응을 폭로하는 기사가 보도되면서 조직은 거센 비난에 휩싸인다. 현경 홍보과 직원 모리구치 이즈미는 기사의 출처를 두고 오랜 친구이자 현경 출입 기자인 쓰무라 지카를 의심한다. 그러나 지카는 결백을 주장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살아 있는 동안 건넨 의심은 죽음 이후 해명할 기회조차 잃어버린 기억이 된다. 이즈미가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에는 친구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과 함께 자신의 판단을 되돌아보려는 절박함이 스며 있다. 사적인 죄책감에서 비롯된 발걸음은 점차 개인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질서와 마주한다. 한 사람의 죽음이 또 다른 죽음을 불러오는 동안, 사건을 해결해야 할 제도와 그 제도에 속한 인간의 양심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br/><br/>공동체는 수많은 개인의 생존을 위해 질서를 세우고, 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때로 개인에게 양보와 희생을 요구한다. 사회가 존속하는 데 필요한 선택들이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이익을 가져다줄 수는 없다. 그러나 희생을 결정하는 사람과 희생을 감당하는 사람이 분리될 때, 대의라는 말은 위험한 편의를 획득한다. 다수의 안전을 위해 소수의 불행을 감수한다는 계산 속에서 한 사람의 생명은 얼마든지 교환 가능한 단위로 축소된다. 숫자가 커질수록 판단은 합리적으로 보이고, 숫자가 작아질수록 그 안에 포함된 인간의 삶은 희미해진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에게 언제나 세계 전체의 상실이다. 누구에게나 단 한 번 주어지는 생을 타인의 목적을 위한 비용으로 산정한다면, 정의는 자신이 보호해야 할 대상을 스스로 훼손한다. 일찍이 칸트는 인간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해야 하며, 단순히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인간의 존엄은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지에 따라 결정되지 않으며, 어떤 효용의 계산으로도 그 고유한 가치를 온전히 환산할 수 없다. 어떤 목적이 아무리 숭고하더라도 그 목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까지 처분할 권리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br/><br/>이러한 희생의 계산은 때때로 누구의 악의도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조직의 일상 속에서 완성된다. 조직은 개인보다 오래 살아남고, 구성원이 교체된 뒤에도 기존의 명령과 관행을 이어 간다. 누군가는 지시를 따르고, 누군가는 절차를 준수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권한 밖에서 벌어진 일이라며 판단을 유보한다. 각각의 행동은 정해진 역할을 수행한 결과로 설명되지만, 그 역할들이 결합해 만들어 낸 결과에는 누구도 온전히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한나 아렌트가 관료제의 위험을 논하며 주목했던 것도 이처럼 책임의 소재가 흐려지는 통치의 구조였다. 그는 관료제를 ‘누구도 지배하지 않는 통치’라고 표현하며, 명령과 결정의 주체가 불분명해질수록 시민이 책임을 물을 상대조차 찾기 어려워진다고 보았다. 권력이 여러 직위와 규정 사이에 흩어져 있을 때, 개인은 자신의 행위가 초래한 결과를 전체적으로 판단할 의무에서 쉽게 물러선다. 절차는 인간의 판단을 보조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어느 순간 판단을 대신하는 권위가 된다. 그 안에서 양심은 조직의 질서를 방해하는 사적인 감정으로 취급되고, 침묵은 충성의 형식을 얻는다.<br/><br/>조직이 자신을 보존하는 방식은 외부의 비판에 대응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잘못을 인정하는 행위가 곧 조직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일로 받아들여지면, 책임을 밝히는 절차보다 책임을 감추는 기술이 먼저 발달한다. 이때 조직은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와 자신이 존속해야 하는 이유를 혼동한다.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가 스스로의 존속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다면, 보호받아야 할 시민은 언제든 그 제도를 위협하는 대상으로 분류될 수 있다. 『지지 않는 벚꽃』의 서늘함은 이러한 가치의 전도에서 비롯된다. 공적인 권한이 인간의 존엄을 위해 행사되는 동안에는 질서의 근거가 되지만, 그 권한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작동하기 시작하면 누구도 쉽게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힘으로 변모한다. 견제받지 않는 지속성은 안정이라는 이름을 빌려 자신의 경직을 정당화한다.<br/><br/>그렇기에 이즈미가 진실을 추적하는 행위에는 여러 층위의 의미가 겹쳐 있다. 친구를 의심했던 기억, 죽음 앞에서 느끼는 죄책감, 자신이 속한 조직을 향한 신뢰와 의혹이 한 사람의 내면에서 충돌한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사과할 수 있고, 오해를 풀 기회도 마련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은 관계의 가능성을 일방적으로 중단시킨다. 지카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던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은 이즈미에게 단순한 후회를 넘어선 윤리적 부담을 부여한다. 타인의 말을 믿지 않았던 순간과 이제는 그 말을 다시 들을 수 없다는 현실 사이에서, 진실을 밝히려는 의지는 애도의 한 방식이 된다. 타인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그가 살아 있어야만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사라진 사람의 삶이 부당하게 해석되거나 망각되지 않도록 하는 일 역시 살아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 몫이다.<br/><br/>그러나 진실을 아는 일과 정의를 실현하는 일 사이에는 쉽게 건널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한다. 사실을 밝혀내는 데에는 증거와 추론이 필요하지만, 그 사실에 합당한 책임을 부과하려면 제도의 승인과 실행이 뒤따라야 한다. 진실이 아무리 명백해 보여도 그것을 공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면 책임을 묻는 일은 어려워진다. 더욱이 진실을 판단하고 책임을 부과하는 권한이 사건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조직 안에 집중되어 있다면, 정의를 실현하는 절차 자체가 새로운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미스터리 소설에서 범인의 발견은 흔히 혼란스러웠던 세계가 다시 질서를 회복하는 계기로 기능한다. 그러나 유즈키 유코는 진실의 발견만으로 회복되지 않는 현실의 무게를 응시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이해하는 능력과 그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능력 사이의 간격은 개인에게 깊은 무력감을 안긴다. 그럼에도 정의를 향한 윤리적 요구는 제도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만 성립하지 않는다.<br/><br/>그러한 한계 속에서도 이즈미의 행보가 지닌 의미는 사라지지 않는다. 거대한 조직 앞에서 개인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제한적이고, 양심에 따른 선택이 언제나 바람직한 결과를 보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결과를 확신할 수 없다는 이유로 판단의 책임까지 포기한다면, 조직의 질서는 구성원들의 침묵을 통해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이즈미는 자신이 속한 세계의 규칙을 이해하면서도 그 규칙이 자신의 윤리적 판단을 완전히 대신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소속된 곳을 지키려는 마음과 그곳의 잘못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충돌할 때, 인간은 자신이 어떤 가치에 따라 살아갈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양심은 언제나 명료한 해답을 제공하지는 않으며, 올바른 선택이 개인에게 안전한 길을 약속하지도 않는다. 그 불확실성을 감수하는 태도에서 윤리적 주체의 존엄이 드러난다.<br/><br/>다시 벚꽃을 떠올린다. 꽃은 시들고, 가지는 계절에 따라 모습을 바꾸며, 어떤 생명도 영원한 개화를 허락받지 못한다. 자연에서 소멸은 다음 생을 위한 조건이지만, 권력은 종종 자신의 지속을 위해 타인의 유한한 시간을 요구한다. 지지 않는 벚꽃의 영속성에는 그 아래에서 소진된 무수한 생의 시간이 겹겹이 축적되어 있다. 대의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반복하면서도 스스로를 강인하다고 부를 수 있을까. 무너지지 않는 질서가 반드시 정의로운 질서인 것은 아니며, 오래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 그 존속의 정당성이 증명되지는 않는다. 때로 정의를 지탱하는 힘은 거대한 제도의 영속성보다 자신의 판단에 책임지려는 한 사람의 유한한 삶에서 비롯된다. 어떤 꽃은 시들지 않기 위해 타인의 봄을 앗아간다. 그 영원한 개화 아래, 누군가의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br/><br/>✏️도서출판 문예춘추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br/><br/>어떤 질서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자신이 보호해야 할 생명을 먼저 허문다. 정의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권력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그 권력의 영속성이 누구의 유한한 삶을 대가로 삼는지 헤아리게 하는 소설이다. 국가와 조직의 권력이 개인의 존엄과 충돌하는 문제에 관심 있는 독자, 제도의 안쪽에 축적된 침묵과 책임의 실종을 추적하는 사회파 미스터리를 즐기는 독자라면 이 벚꽃의 기이한 생명력을 오래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조직의 명예가 인간의 생명보다 앞서는 곳에서는 침묵마저 하나의 의무로 둔갑한다. 유즈키 유코는 범죄의 진상을 좇는 서사에 조직의 자기보존이라는 서늘한 논리를 포개어, 공적인 질서가 윤리적 정당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예리하게 드러낸다.<br/>진실을 발견했다고 해서 죽은 사람의 시간이 되돌아오거나, 훼손된 정의가 제자리를 찾는 것은 아니다. 사실의 규명과 책임의 실현 사이에 놓인 거리를 사유하고 싶은 독자, 소속된 세계에 대한 충성과 자신의 양심이 충돌하는 순간을 경험해 본 독자에게 이즈미의 행보는 특별한 무게를 지닌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조직보다 짧게 살아가지만, 그 유한한 시간 안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에 따라 조직이 지키려는 가치의 정당성을 되물을 수 있다. 양심에는 때로 대가가 따른다. 영원히 피어 있으려는 꽃 아래에서 먼저 사라진 이들의 계절을 헤아리는 일, 『지지 않는 벚꽃』은 그 윤리적 책임을 한 편의 미스터리 속에 새겨 넣는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377/52/cover150/897604835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3775206</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모닥불 곁에서 -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 -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기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73253</link><pubDate>Thu, 15 Oct 2026 12:1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7325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32131792&TPaperId=1757325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325/98/coveroff/k73213179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32131792&TPaperId=1757325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이야기에 관한 이야기 -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기술</a><br/>케빈 애슈턴 지음, 김하현 옮김 / 생각의힘 / 2026년 10월<br/></td></tr></table><br/>오래전에 쓰인 소설 속 인물이 죽었을 때, 그를 애도하는 독자의 슬픔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그 인물의 이름과 생애, 그가 겪은 불행까지 모두 누군가의 상상에서 태어났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의 운명을 염려하고,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안타까워하며, 마지막 문장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종이 위에 배열된 문자들이 실제로 존재한 적 없는 삶에 체온을 부여하는 것이다. 허구라는 인식은 감정의 진실성을 훼손하지 못한다. 인간은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삶을 상상하고, 경험하지 않은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며, 타인의 이야기를 자신의 기억처럼 오래 간직한다. 허구의 인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부터 지나간 역사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려는 사고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정신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구성하며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br/><br/>케빈 애슈턴의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는 바로 그 능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인류의 역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추적한다. 저자는 최초의 모닥불에서 동굴 벽화와 문자, 인쇄술과 전기 통신을 거쳐 오늘날의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술이 거듭 변모해 온 과정을 살핀다. 여기서 이야기는 문학작품이나 신화의 영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행동에 이유를 부여하고, 지나간 사건을 시간의 순서로 배열하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예상하는 일까지 인간은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 수행한다. 애슈턴은 언어가 이야기를 탄생시켰다는 익숙한 순서를 뒤집어, 이야기를 나누려는 필요가 언어의 발달을 이끌었다는 진화적 가설을 제시한다. 이야기는 인류가 오랜 시간에 걸쳐 발전시킨 기술인 동시에 그 기술을 발전시킨 인간의 사고를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br/><br/>인간은 경험한 모든 순간을 동일한 무게로 기억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건 중 일부를 선택하고, 서로 떨어져 있던 장면들을 연결하며, 그 사이에 원인과 결과를 배치한다. 우연한 만남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고, 오래전의 실패는 현재의 선택을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이 과정에서 기억은 현재의 시선에 따라 재배열되며, 인간은 그렇게 구성된 기억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한다. 인지심리학자 제롬 브루너가 구분한 서사적 사고는 이러한 인간의 인식 방식을 살펴보는 데 유용하다. 논리적 사고가 일반적인 법칙과 검증 가능한 관계를 추구한다면, 서사적 사고는 사건에 개입한 사람의 의도와 행동, 그들이 처한 맥락을 통해 의미를 구성한다. 동일한 사건도 누구의 시선으로 서술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는 까닭이다. 인간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전에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조직한다. 이야기는 그 과정에서 시간에 질서를 부여하고, 서로 무관해 보이는 경험 사이에 의미의 통로를 만든다.<br/><br/>이러한 능력이 개인의 삶을 넘어 공동체의 역사로 확장될 때 이야기는 사회를 조직하는 힘을 얻는다. 모닥불 주위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며 집단의 기억을 형성했고, 그림과 문자는 한 사람의 생애를 넘어 이야기가 전승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했다. 인쇄술은 소수에게 집중되어 있던 기록과 전파의 권한을 흔들었으며, 전기 통신은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같은 사건을 접할 수 있게 했다. 중요한 것은 전달 속도와 규모의 변화가 인간관계와 권력의 배치까지 바꾸었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야기가 기록될 가치가 있는지, 누구의 목소리가 널리 전파되는지, 무엇이 공동체의 역사로 인정받는지는 매체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과 긴밀하게 얽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역시 무수한 사건 중 선택되고 보존된 이야기들의 집합이다. 기록되지 못한 삶은 쉽게 잊히고, 반복해서 전달된 이야기는 어느새 한 시대를 설명하는 보편적인 인식으로 굳어진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술의 역사는 결국 누가 세계를 설명할 수 있었는가에 관한 역사이기도 하다.<br/><br/>그러나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에는 근본적인 취약성이 공존한다. 인간은 복잡하고 불확실한 현실을 견디기 위해 사건 사이의 연관성을 찾고, 우연 속에서도 일관된 의미를 발견하려 한다. 이 성향은 이해와 협력을 가능하게 하지만, 충분한 근거가 없는 설명에도 설득력을 부여한다. 심리학자 멜라니 그린과 티머시 브록은 2000년 학술지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에 발표한 연구 「The Role of Transportation in the Persuasiveness of Public Narratives」에서, 이야기에 깊이 몰입한 사람일수록 서사의 내용에 부합하는 믿음을 강하게 형성하고 이야기 속의 부자연스러운 요소를 상대적으로 적게 발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서사적 몰입은 상상 속 세계에 생생한 현실감을 부여하는 동시에, 그 세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감각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야기의 일관성과 감정적 호소력은 때로 사실의 정확성보다 먼저 인간의 판단에 작용하며, 익숙한 믿음에 부합하는 서술일수록 의심 없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커진다. 문학적 허구와 허위정보는 모두 이야기의 설득력을 활용하지만, 독자에게 요구하는 믿음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소설은 허구라는 약속 아래 상상력을 작동시키지만, 거짓 정보는 사실의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허구의 인물을 향한 감정적 몰입과 현실에 관한 주장을 사실로 승인하는 판단에는 서로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 이야기의 감정적 설득력이 사실의 진실성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는 순간, 인간의 상상력은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이용될 수 있다.<br/><br/>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의 등장은 이러한 문제를 이전과 다른 규모로 확대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이야기의 생산자이자 청중이 되었으며, 알고리즘은 어떤 이야기가 더 자주 노출되고 널리 퍼질지를 결정하는 데 깊이 관여한다. 발언의 기회가 확대된 만큼 주목받을 기회까지 공평하게 분배되는 것은 아니다. 자극적인 감정과 확신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가 복잡한 사실보다 빠르게 확산되는 환경에서, 인간은 자신이 선택했다고 믿는 정보조차 보이지 않는 선별 과정을 거쳐 받아들인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여기에 또 다른 차원을 더한다. 존재하지 않았던 장면이 실제 기록처럼 제시되고, 인간이 작성하지 않은 문장이 누군가의 진술처럼 유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물인터넷이라는 개념을 제안하고 그 발전에 참여했던 저자는 기술의 기능적 성취를 넘어, 그것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그에 따르는 책임까지 성찰한다. 기술을 만들어내는 능력과 그 기술이 초래할 결과를 이해하는 능력 사이에는 언제나 숙고가 필요한 거리가 존재한다.<br/><br/>그럼에도 애슈턴은 이야기의 미래를 비관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타인의 삶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는 분명한 가능성이 존재한다. 오랫동안 기록에서 배제되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서로 다른 공동체의 경험이 연결되며, 기존의 권위가 독점하던 설명에 새로운 해석이 등장할 수 있다. 그 가능성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야기의 힘을 맹목적으로 신뢰하거나 거부하는 태도보다, 자신의 믿음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피는 지적 성실함일 것이다. 무엇을 사실로 받아들일지 판단하고, 익숙한 설명에도 다른 근거가 있는지 확인하며, 자신이 사랑하는 이야기조차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야기를 의심할 수 있는 능력은 이야기를 향한 애정과 충분히 공존한다. 오래된 소설 속 인물의 슬픔을 자신의 일처럼 느끼는 마음과, 눈앞에 제시된 현실의 설명을 신중하게 검토하는 태도는 인간이 오랜 시간 길러온 상상력과 이성의 서로 다른 쓰임이다. 모닥불 곁에서 타인의 경험에 귀 기울이던 인간은 이제 손바닥 위에서 수없이 많은 세계를 마주한다.<br/><br/>✏️도서출판 생각의힘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br/><br/>인류는 모닥불의 불빛이 닿는 거리에서 시작된 이야기를 수백만 개의 화면으로 옮겨놓았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이 달라질 때마다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과 자신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는 범위도 함께 변화했다. 허구의 인물에게 실제의 슬픔을 느끼고, 낯선 삶을 자신의 경험처럼 상상해온 독서가라면 그 오래된 능력의 기원을 따라가는 여정이 각별할 것이다. 기억과 경험이 어떻게 하나의 의미로 조직되는지, 인간의 사고가 어떤 방식으로 현실을 해석하는지 탐구하는 이들에게도 이 책은 풍부한 사유의 재료를 제공한다. 우리가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수없이 많은 이야기의 흔적이 스며 있다. 이야기의 역사를 살피는 일은 인간 정신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발명해온 형식들을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br/>한편 이야기는 언제나 그것을 전달하는 기술과 권력의 조건 속에서 움직여왔다. 문자와 인쇄술, 방송과 스마트폰이 사회의 질서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궁금한 이들에게 이 책의 역사적 시야는 특히 매력적이다. 알고리즘이 선택한 정보와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서술 사이에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이야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된 시대에는 말할 자유만큼이나 듣고 판단하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이야기의 전달 속도가 빨라질수록 그 의미를 헤아리는 시간은 오히려 귀해진다.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다시 인간의 사고와 사회를 빚어온 긴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손바닥 위의 작은 화면이 얼마나 거대한 인류의 시간을 품고 있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325/98/cover150/k73213179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3259804</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 [왜 나는 항상 옳고 너는 그른가 - 갈등, 변절, 내로남불의 시대를 이해하는 도덕심리학]</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69617</link><pubDate>Tue, 13 Oct 2026 14: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6961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92131587&TPaperId=1756961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316/0/coveroff/k59213158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92131587&TPaperId=1756961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왜 나는 항상 옳고 너는 그른가 - 갈등, 변절, 내로남불의 시대를 이해하는 도덕심리학</a><br/>오둔 달 지음, 배동근 옮김 / 북트리거 / 2026년 09월<br/></td></tr></table><br/>인간은 자신의 모순에 관대하다. 어제의 신념을 오늘 번복하더라도 그 사이에 있었던 경험과 사정을 충분한 이유로 받아들인다. 반면 타인의 변화 앞에서는 쉽게 일관성을 요구한다. 자신에게 허락한 예외를 타인에게 적용하는 일에는 유난히 인색한 것이다. 같은 행위도 누가 저질렀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도덕적 무게를 갖는다. 자신에게는 사정이 있고 타인에게는 결함이 있다는 믿음. 그 비대칭적인 판단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윤리적 심판의 바깥에 세워두곤 한다. 도덕적 확신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너그러운 형태로 작동하면서도, 타인을 향할 때는 엄격한 기준으로 모습을 바꾼다.<br/><br/>오둔 달의 『왜 나는 항상 옳고 너는 그른가』는 이러한 도덕적 확신의 작동 방식을 심리학의 언어로 탐색한다. 우리는 옳고 그름에 관한 자신의 판단이 충분한 이성과 정당한 근거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같은 문제에 상반된 결론을 내리면 그 원인을 무지나 이기심, 감정적 충동에서 찾기 쉽다. 저자는 도덕적 판단을 비이성적 충동과 맹목적인 감정의 산물로 설명해 온 기존 도덕심리학의 통념을 재검토한다. 인간의 도덕성이 불안정하다는 진단은 판단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작용하는 여러 이유를 지나치게 단순화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옳음의 기준이 형성되고 수정되는 과정이며, 인간이 자신의 판단을 바꿀 만한 이유를 어떻게 발견하고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다.<br/><br/>우리는 도덕을 이미 완성된 원칙의 집합으로 상상하지만, 실제 판단은 서로 다른 가치가 관계를 맺고 조정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누구의 고통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어떤 행위를 특정한 가치와 연결하는지, 서로 충돌하는 권리 가운데 무엇을 우선하는지에 따라 옳음의 내용은 달라진다. 저자는 이를 도덕적 관심사와 연결, 조정의 문제로 설명한다. 같은 자유를 중시하는 사람들도 자유가 침해되는 상황을 다르게 이해할 수 있으며, 동일한 평등을 지지하면서도 그 실현을 위한 선택에서는 갈라질 수 있다. 서로 다른 결론이 반드시 상반된 도덕적 원칙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같은 가치를 공유하더라도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고 조정하는 과정에서 판단은 얼마든지 갈라질 수 있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기존의 믿음과 충돌하는 상황을 만나며,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의 관계를 다시 구성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판단을 수정하는 일은 오히려 자신의 도덕적 관심을 더욱 충실하게 실현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br/><br/>도덕적 변화는 인간의 생애 전체에 걸쳐 이루어진다. 어린아이는 타인의 고통과 권리를 인식하는 법을 배우고, 성인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규범과 개인적 경험 사이에서 판단을 조정한다. 한 시대의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겼던 제도는 다음 시대에 이르러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노예 제도의 역사는 이러한 변화가 얼마나 오랜 시간과 희생을 요구하는지 보여준다. 오늘날 자명하게 받아들이는 도덕적 원칙조차 과거에는 수많은 사람의 이해관계와 신념 속에서 부정되거나 제한되었다. 이처럼 도덕의 역사를 돌아보면 인간이 자신의 시대를 얼마나 쉽게 진리의 최종적인 위치에 놓는지 알 수 있다. 과거의 잘못을 분별하는 능력과 현재의 잘못을 알아보는 능력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미래의 누군가가 오늘날 우리의 선택을 납득하기 어려워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만으로 도덕이 진보한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새로운 판단 역시 당대의 이해관계와 편견에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정체성 역시 이러한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 과거의 판단을 다시 바라보는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새롭게 이해하고, 앞으로 지키려는 가치의 의미 또한 수정해 나간다. 일관성이란 동일한 판단을 영원히 반복하는 능력만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변화하는 경험 속에서도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성찰하는 태도와 관련된다.<br/><br/>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동에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동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자신의 할아버지가 나치당에 가입했던 과거를 언급하는 대목은 이 구별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어떻게 잔혹한 체제에 동조할 수 있었는가. 그 선택을 가능하게 한 사회적 조건과 개인의 판단을 이해하려는 시도에는 불편함이 따른다. 이해가 용서로 오인될 수 있고, 원인을 설명하는 언어가 책임을 희석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위의 원인을 알지 못한 채 악행을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그 행위가 반복되는 조건을 충분히 파악하기 어렵다. 도덕적 판단에는 행위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과 그 행위가 발생한 이유를 이해하는 일이 함께 요구된다. 설명은 책임의 면제를 보장하지 않으며, 비난 역시 이해의 필요성을 소멸시키지 못한다. 인간의 악행을 연구하는 일이 윤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복잡성에 있다. 누군가를 단죄하는 언어가 선명할수록 그 사람의 선택을 형성한 현실은 오히려 시야에서 사라질 수 있다.<br/><br/>어떤 판단이 형성된 이유를 이해하는 일은 그 이유가 얼마나 정당한지 검토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인간은 자신의 신념을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종종 확신의 정당성을 발견한다. 그러나 어떤 판단에 도달한 경위를 설명하는 능력과 그 판단이 진실에 부합하는지는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다. 충분히 숙고했다고 믿었던 선택도 제한된 정보와 익숙한 가치관 안에서 이루어졌을 수 있다. 더욱 복잡한 것은 인간이 자신의 판단을 검토하는 과정에서도 이미 그 판단을 형성한 사고의 틀을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자신에게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타인에게는 편견의 산물로 읽힐 수 있으며, 스스로 공정하다고 여기는 기준이 특정한 경험과 이해관계에 의해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이유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지만, 동시에 그 이유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세계를 이해하기도 한다. 자신의 판단을 성찰한다는 것은 그 판단을 뒷받침하는 근거뿐 아니라, 무엇을 근거로 인정하고 무엇을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았는지까지 살펴보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성찰에도 한계는 존재한다.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으며, 모든 판단의 조건을 스스로 밝혀내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자신의 확신을 검토하려는 노력은 그 확신이 지닌 한계를 인식하는 데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br/><br/>도덕적 변화가 가능한 인간에게는 자신의 판단을 수정할 능력과 여전히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하는 책임이 함께 주어진다. 우리는 타인의 이유를 이해하면서도 그의 행동을 비판할 수 있고, 자신의 판단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특정한 가치를 지킬 수 있다. 이러한 긴장은 어느 하나의 원칙으로 간단히 해소되지 않는다. 판단을 미루는 일에도 책임이 따르고, 확신을 고수하는 일에도 그에 상응하는 위험이 존재한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언어와 가치관으로 세계를 이해하면서, 그 언어와 가치관이 충분한지 다시 검토해야 하는 존재다. 오둔 달이 탐색하는 도덕적 변화는 이러한 인간의 조건을 드러낸다. 우리가 오늘 옳다고 여기는 판단은 과거의 경험과 숙고를 거쳐 형성되었으며, 앞으로 마주할 사실과 타인의 경험에 의해 다시 수정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이유를 가지고 살아가면서도, 그 이유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를 가리고 있을 가능성까지 감당하는 것. 도덕적 삶의 어려움은 어쩌면 이 두 가지 요구를 동시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br/><br/>✏️도서출판 북트리거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br/><br/>인간은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세계를 판단하지만, 그 이유가 만들어진 과정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한다. 확신이 단단해질수록 타인의 사정은 간결해지고, 자신의 사정은 더욱 복잡해지는 기묘한 불균형. 우리는 서로의 결론을 알면서도 그 결론에 이른 시간을 알지 못한다. 『왜 나는 항상 옳고 너는 그른가』는 그 불균형 속에서 도덕적 판단이 형성되고 변화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자신의 옳음을 좀처럼 의심하지 못하는 사람, 가까운 이와의 가치관 차이 앞에서 이해보다 비난이 앞섰던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확신의 근거를 다시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가치를 공유하면서도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하는 인간의 복잡성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이유를 생략한 채 타인을 판단해왔는지 드러낸다.<br/>서로 다른 신념이 순식간에 적대의 근거가 되고, 누군가의 잘못을 이해하려는 시도마저 옹호로 오해받기 쉬운 시대다. 인간의 도덕적 판단을 심리학의 관점에서 탐구하고 싶은 독자, 사회적 갈등과 시대에 따른 윤리적 변화를 깊이 이해하고 싶은 독자에게 특히 의미 있는 책이다. 어떤 행동이 발생한 이유를 이해하는 일과 그 행동의 책임을 묻는 일은 함께 이루어질 수 있다. 이해의 깊이가 반드시 동의의 크기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오둔 달은 그 복잡한 관계를 통해 우리가 옳다고 믿는 기준이 어떤 경험과 가치의 조정 속에서 형성되었는지 살피게 한다. 타인을 향해 단호하게 기울었던 저울을 자신의 판단 앞에도 놓아보는 일. 서로의 확신이 너무 쉽게 판결문이 되는 오늘날,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316/0/cover150/k59213158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3160059</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we the animals - [우리, 짐승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68623</link><pubDate>Mon, 12 Oct 2026 22:5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6862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5968&TPaperId=1756862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273/89/coveroff/8932925968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5968&TPaperId=1756862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우리, 짐승들</a><br/>저스틴 토레스 지음, 김진준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09월<br/></td></tr></table><br/>세 개의 몸이 하나의 허기를 느끼고, 세 개의 입이 같은 소리를 내며, 서로 다른 심장이 하나의 박자로 뛰던 시절이 있다. 어린 형제들에게 세계는 아직 각자의 몫으로 나뉘지 않았다. 배고픔도 장난도 두려움도 함께 겪었으며, 누구의 감정이 어디에서 시작해 누구에게로 옮겨 갔는지 구분할 필요조차 없었다. 저스틴 토레스의 『우리, 짐승들』은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이던 세 형제의 유년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인간은 성장하면서 자신의 몸이 타인의 몸과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배우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도 서로 다른 욕망을 품을 수 있음을 알아간다. 가장 가까운 존재들과 공유했던 세계가 더 이상 자신의 전부를 설명해 주지 못하는 순간, 어린 시절의 ‘우리’는 이전과 같은 의미로 지속될 수 없다.<br/><br/>푸에르토리코계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세 형제는 뉴욕 북부의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다. 부모는 충분히 어른이 되기도 전에 부모가 되었고, 아이들은 돌봄을 받아야 할 나이에 스스로를 돌보는 법부터 익힌다. 이 집에서 사랑은 따뜻한 포옹과 거친 손길을 번갈아 입는다.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춤을 가르치고 웃음을 나누다가도 폭력을 행사하며, 어머니는 아이들을 품에 안으면서도 자신의 절망을 그들에게 의탁한다. 가족의 애정은 분명하게 존재하지만, 그 애정이 언제나 안전한 형태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상처받고, 상처받은 몸으로 다시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반복된 경험은 세 형제의 몸짓과 언어,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 조금씩 스며든다.<br/><br/>사랑과 폭력이 뒤섞인 환경에서 아이들은 타인에게 의존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일찍 깨닫는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다른 사람의 보살핌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며,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에게 자신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맡겨야 한다. 그러나 보호와 위협이 같은 손에서 비롯될 때, 아이들은 무엇을 믿고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이들에게 가족은 세상에서 가장 익숙한 장소이자 언제든 낯설어질 수 있는 세계다. 그리고 가난은 그 불안정함을 더욱 깊게 만든다. 불규칙한 노동과 결핍은 부모의 몸을 지치게 하고, 충분히 돌봄받지 못한 아이들은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하루를 견딘다. 세 형제가 그토록 강하게 결속하는 데에는 사랑뿐 아니라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도 깃들어 있다.<br/><br/>그러한 형제들을 작가는 ‘짐승들’이라고 부른다. 원제 We the Animals에는 집단의 이름을 선언하는 듯한 힘이 있다. 미국 헌법의 첫머리인 We the People을 연상시키는 이 어구에서 사람들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짐승들이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오래된 위계 속에서 짐승은 흔히 본능에 충실하고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존재로 여겨진다. 그러나 세 형제의 동물성은 그들을 비하하는 언어로 작동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찾아 달려들고, 기쁘면 소리를 지르며, 서로의 몸을 밀치고 끌어안는다. 그들의 움직임에는 사회가 요구하는 단정한 몸가짐보다 생존과 욕망의 리듬이 먼저 흐른다. 짐승이라는 이름은 거친 유년을 설명하면서도, 인간에게 허락된 삶의 형태가 얼마나 제한적인지 되묻게 한다.<br/><br/>그러나 같은 짐승으로 살아가던 형제들도 영원히 같은 방향으로 자라지는 않는다. 어린 시절에는 하나의 몸처럼 움직였던 세 사람이 성장하면서 서로 다른 감각과 욕망을 갖게 된다. 특히 막내에게는 형들이 공유하는 남성성의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내면이 자라난다. 그는 형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을 자신의 일부로 간직하면서도,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발견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타인과 맺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지만, 그 관계가 허락하는 모습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일에는 때때로 자신을 가장 잘 안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이해를 벗어나는 경험이 뒤따른다. 가족에게 속한다는 감각과 자신으로 살아가려는 욕망은 그렇게 한 사람의 내부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br/><br/>이때 소설의 동물성은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처음의 짐승들이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살아가는 생명들이었다면, 성장한 막내를 둘러싼 세계에서는 어떤 몸과 욕망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규범이 한층 엄격하게 작동한다. 인간은 사회적 질서 안에서 자신의 몸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그 질서가 승인한 모습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정상적인’ 존재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누가 그 정상성의 기준을 정하는가. 같은 가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서로의 모든 차이를 수용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막내의 퀴어 정체성은 가족이 익숙하게 받아들여 온 남성성과 충돌하고, 그가 속해 있던 공동체의 사랑이 어떤 조건 아래 작동하는지를 드러낸다.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감추어야 한다면, 그 사랑은 한 인간의 어디까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br/><br/>이러한 문제는 소설에 겹쳐진 인종과 계급의 조건을 통해 더욱 복잡해진다. 세 형제는 푸에르토리코계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경제적으로도 사회의 중심에서 떨어진 삶을 살아간다. 가난과 혼혈이라는 조건은 이들이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고, 막내의 성적 정체성은 그 위에 또 다른 차이를 더한다. 태어난 집의 형편과 물려받은 혈통, 몸에 밴 습관과 뒤늦게 알아차린 욕망은 서로 얽히며 한 사람의 삶에 저마다 다른 흔적을 새긴다. 그 흔적들은 같은 몸 안에 축적되지만, 세상은 그중 일부만을 골라 한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려 한다. 막내가 경험하는 소외를 이해하려면 그가 누구를 사랑하는지뿐 아니라, 어떤 가족 안에서 어떤 몸으로 성장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 그에게 주어진 세계는 처음부터 여러 경계가 포개진 장소였으며,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은 그 경계들의 의미를 새롭게 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br/><br/>저스틴 토레스가 이 이야기를 구성한 방식 역시 이러한 성장의 경험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소설은 유년의 사건들을 하나의 연속적인 이야기로 정돈하기보다 짧고 감각적인 장면들로 나누어 제시한다. 어떤 기억은 몸에 가해진 충격으로, 어떤 기억은 웃음소리와 춤의 리듬으로, 또 다른 기억은 설명하기 어려운 수치심과 두려움으로 되살아난다. 삶의 모든 순간이 같은 밀도로 기억되는 것은 아니며, 어린 시절의 경험은 사건의 순서보다 그때의 감각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되돌아오기도 한다. 파편적인 서술은 이러한 기억의 성질을 문학의 형식으로 옮겨 놓는다. 장면과 장면 사이의 공백에는 시간이 흐르고, 독자는 그 생략된 시간 속에서 세 형제가 조금씩 다른 존재가 되어 가는 과정을 감지한다. 이러한 형식적 관심은 이후 발표한 『암전들』에서 더욱 대담하게 확장된다. 『우리, 짐승들』이 유년의 기억을 짧은 장면들로 엮었다면, 『암전들』은 사진과 역사적 기록, 검게 지워진 문서와 이야기의 조각들을 교차시키며 지워진 퀴어의 역사를 더듬는다. 전자가 개인의 기억에 생긴 공백을 감각으로 채운다면, 후자는 기록에서 사라진 존재들을 그 공백 자체를 통해 드러낸다.<br/><br/>작가는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했으면서도 이 작품을 자서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했다. 이 태도는 『우리, 짐승들』의 문학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인간은 지나온 경험을 선택하고 배열하며, 그것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자신의 삶을 이해한다. 허구는 이러한 재구성에 더 넓은 가능성을 부여한다. 실제로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 증명해야 한다는 요구에서 벗어나, 경험이 한 인간의 내부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를 탐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아니 에르노는 『아버지의 자리』에서 아버지의 삶을 소설적 사건으로 꾸미는 방식을 거부하고, 실제로 들었던 말과 생활의 세부를 통해 한 개인과 계급의 역사를 기록하고자 했다. 한쪽이 허구를 통해 경험의 감각을 되살린다면, 다른 한쪽은 사실에 대한 충실함을 통해 삶의 사회적 실체에 접근한다. 서로 다른 방법이지만, 개인의 경험이 문학으로 옮겨지는 순간 그 경험을 바라보는 방식까지 달라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토레스가 선택한 파편적인 형식과 서정적인 문장은 유년의 사실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시간을 통과한 존재가 자신의 과거를 어떤 언어로 이해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br/><br/>특히 주목할 부분은 소설의 목소리가 변화하는 방식이다. 초반의 세 형제는 함께 먹고 뛰고 소리치는 ‘우리’의 언어로 묶여 있다. 그러나 막내의 감각과 욕망이 뚜렷해질수록 집단의 목소리 안에서 개인의 목소리가 두드러진다. 이는 서술 기법의 변화이면서 한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막내는 자신을 형성한 가족의 기억을 지울 수 없지만, 그 기억을 이해하고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점차 자신의 것이 된다. 어린 시절의 ‘우리’가 경험의 주체였다면, 성장한 ‘나’는 그 경험을 다시 서술하는 주체가 되는 셈이다.<br/><br/>그렇기에 『우리, 짐승들』에서 성장은 독립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하기 어려운 경험이다. 한때 세 형제는 서로의 허기를 알아보는 데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같은 식탁에 달려들고, 같은 두려움 앞에서 몸을 웅크리고, 서로의 웃음소리를 자기 것처럼 터뜨렸다. 그러나 같은 집에서 자란 사람들이 같은 세계를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가장 깊이 사랑했던 세계가 자신의 모든 모습을 허락하지 않을 때, 익숙한 체온조차 낯선 감각으로 바뀐다. 막내는 그 세계의 언어를 배웠고, 그 언어로는 발음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세 개의 심장이 같은 박자로 뛰던 시간은 지나갔지만, 그 리듬을 기억하는 몸은 여전히 살아 있다. 이제 그 몸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소리를 조금씩 익혀 간다. 누구의 박자에도 맞추지 않은 채, 처음으로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으면서.<br/><br/>✏️도서출판 열린책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273/89/cover150/8932925968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2738909</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사라진 것들의 물성 - [어두운 방에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66364</link><pubDate>Sun, 11 Oct 2026 20: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6636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76527&TPaperId=1756636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315/83/coveroff/893247652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76527&TPaperId=1756636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어두운 방에서</a><br/>브라이언 딜런 지음, 서민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09월<br/></td></tr></table><br/>오래전에 떠나온 집의 방 하나를 떠올려 보라. 기억은 언제나 불완전한 형태로 살아남는다. 오래된 집의 벽지와 가구의 마모된 표면, 빛이 바랜 사진과 서랍 깊숙이 방치된 물건들은 지나간 시간의 일부를 품고 있다. 그러나 그 사소한 흔적들이 증언하는 과거는 온전한 생애의 극히 작은 조각에 불과하다. 어떤 것은 소중해서 보관되었고, 어떤 것은 버릴 기회를 놓쳤으며, 또 어떤 것은 아무런 이유 없이 살아남았다. 우리가 과거라고 부르는 것에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현재의 의식이 선택한 장면들이 뒤얽혀 있다.<br/><br/>브라이언 딜런의 『어두운 방에서』는 부모의 죽음 이후 남겨진 세계를 탐색하는 기록이다. 열여섯 살에 어머니를, 성인이 된 무렵 아버지를 잃은 그는 가족이 살았던 집과 유품, 사진을 통해 유년기의 시간을 다시 더듬는다. 그러나 이 책은 상실의 경위를 시간순으로 정리하는 회고록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 집, 사물들, 사진, 몸들, 장소들이라는 다섯 가지 매개를 따라 흩어진 기억을 배열하고, 그 사이에 문학과 철학, 시각예술에 관한 비평을 교차시킨다. 이러한 구성은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과도 닮아 있다. 인간의 기억은 시간의 순서를 건너뛰며 예기치 않은 순간과 감각을 따라 움직인다. 오래전에 맡았던 냄새 하나가 잊었던 계절을 불러내고, 낯익은 물건의 질감이 그동안 의식하지 못했던 감정을 되살린다. 기억은 현재의 감각을 통과하면서 과거의 서로 다른 시간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다.<br/><br/>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시간과 의식의 문제를 탐구한 앙리 베르그손에게 과거는 완전히 소멸한 시간이 아니다. 지나간 경험은 현재의 지각과 행위 속에서 선택적으로 현실화되며, 기억은 그때마다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의 겨울은 지금도 공기의 온도와 냄새로 되살아난다. 유난히 추운 지역이었지만, 방 안을 후끈하게 데워 놓고 창문을 손가락 세 개가 들어갈 만큼 열어 두곤 했다. 틈으로 흘러든 겨울 공기를 마시며 잠들기 위해. 밤새 냉기의 향을 맡기 위해. 창문으로 들어오는 겨울 공기는 따뜻한 방 안에서도 특유의 냄새와 차가움을 잃지 않는다. 아침이면 창문을 활짝 열어 밤사이 쌓인 눈을 바라보고, 찬 공기가 방 안을 채우는 순간을 기다리기도 했다. 그 시절의 겨울은 달력 속에서 오래전에 지나갔지만, 몸은 아직 그 공기의 온도를 알고 있다.<br/><br/>딜런이 어린 시절의 집을 떠올리는 방식에서도 이러한 시간의 중첩이 드러난다. 가족이 함께 살았던 집은 어머니의 질병과 죽음, 아버지의 부재, 남겨진 형제들이 유품과 재산의 처분을 두고 겪었던 갈등을 함께 간직하고 있다. 그에게 집은 한때의 안식처이면서 고통의 지속을 목격한 장소였다. 집을 버리고 떠나던 아침에야 자신이 그곳을 얼마나 증오했는지 깨달았다는 고백(80쪽)은 공간에 대한 감정이 얼마나 복잡한 시간의 층위로 이루어지는지 보여준다. 어떤 장소를 떠난 뒤에야 그곳에서 자신이 견뎌 온 시간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가스통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집을 인간의 기억과 상상력이 응축되는 친밀한 공간으로 사유했다. 그러나 딜런의 집에는 친밀함과 적의가 함께 축적되어 있다. 유년기의 공간을 그리움으로만 회상하는 관습은 이곳에서 충분한 설명력을 갖지 못한다. 가족이 함께했다는 사실이 반드시 행복한 기억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며, 오래 거주했다는 이유로 한 장소를 무조건 사랑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집의 벽과 방들은 말해지지 못한 감정들을 오랫동안 수용한다. 과거의 공간을 다시 바라보는 일에는 그곳에서 경험한 애정만큼이나 그 안에서 겪었던 고통과 불화를 인정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딜런이 집을 떠나는 행위는 물리적인 이주인 동시에, 오랫동안 자신을 규정해 온 가족의 역사와 거리를 확보하는 사건으로 읽힌다.<br/><br/>집에 남겨진 사물들 역시 복잡한 문제를 품고 있다. 딜런은 과거를 의미 있는 물건들의 아카이브 안에 온전히 수용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경계한다. 남겨진 물건들의 의미는 그것들이 과거에 관해 얼마나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지보다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아버지의 책과 어머니의 기도서, 오래된 사진은 부모가 실재했다는 물질적 증거이지만 그들의 생애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다. 독서인이라면 책장을 정리하다 우연히 발견한 책 한 권에서 구입 당시의 장소와 날씨, 그날의 감정까지 떠올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책에는 구매한 날짜나 당시의 기분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도, 그 책을 발견했던 서점의 풍경과 책을 고르던 순간의 감각이 뒤따라오곤 한다. 사물이 간직한 시간의 상당 부분은 사물의 표면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몇 점의 유품으로 한 사람의 생애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에는 그 물건이 전하지 못하는 시간을 상상으로 메워야 하는 어려움이 따른다.<br/><br/>사진은 사물과 다른 방식으로 과거를 증언한다. 사진은 특정한 순간에 한 사람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증하지만, 그 사람이 어떤 감정으로 그 시간을 통과했는지까지 증명하지는 못한다. 딜런이 태어나기 전 부모의 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에는 이러한 간극이 응축되어 있다. 사진 속 두 사람은 아직 누군가의 부모로만 규정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그들에게는 아들이 알지 못하는 과거가 있었고, 아들의 기억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관계와 욕망이 존재했다. 가족사진은 친밀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그 친밀함이 얼마나 제한된 이해 위에 성립하는지를 드러낸다. 가까운 사람을 오래 바라보았다는 사실과 그 사람의 삶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확신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존재한다. 사진과 죽음의 관계를 탐구한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기호학자인 롤랑 바르트는 『밝은 방』에서 사진이 증명하는 과거의 실재성과 그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어떻게 공존하는지 사유했다. 딜런의 『어두운 방에서』는 이러한 사진의 시간성을 가족의 역사 안으로 끌어들인다. 사진 속 부모의 모습이 아무리 또렷하게 보존되어 있더라도 그들이 살아낸 시간의 깊이까지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어머니의 질병으로 변형된 몸에 관한 기억은 이 문제를 더욱 첨예하게 만든다. 눈에 보이는 고통의 흔적과 그 고통을 실제로 살아낸 사람의 경험 사이에는 타인이 쉽게 건널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한다.<br/><br/>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일에는 그 사람을 자신의 기억으로만 이해하려는 욕망을 경계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딜런에게 어머니는 병을 앓던 사람이자 자신을 돌보았던 사람이고, 아버지는 아내를 잃은 뒤 세 아들과 살아가야 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들이 알지 못하는 고통과 욕망, 부모라는 역할로 설명되지 않는 독립적인 생애가 있었다. 한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은 자신이 경험한 관계의 역사와 그 사람이 실제로 살아낸 삶 사이의 거리를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 거리를 성급하게 해소하려는 순간 타인의 삶은 기억하는 사람의 서사 속으로 흡수되기 쉽다. 딜런이 훗날 자신의 책을 돌아보며 부모가 실제로 무엇을 겪었는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라고 회고한 사실은 이러한 문제를 더욱 깊게 만든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실의 의미도 변화한다. 어린 시절의 상실을 성인이 된 후 다시 바라보는 과정에서, 자신의 슬픔으로 가득했던 기억 속에 부모의 고통을 위한 자리가 생겨날 수도 있다. 애도는 한 번의 이해로 완결되는 경험이 아니다. 떠난 사람에 대한 해석은 살아 있는 사람의 시간과 함께 변화하며, 그 변화는 때로 자신이 간직해 온 기억을 의심하도록 만든다.<br/><br/>딜런의 글쓰기가 특별한 이유는 이러한 개인적 경험을 문학과 예술에 관한 비평으로 확장하는 방식에 있다. 그는 기억의 파편들을 하나의 매끄러운 가족사로 정리하는 대신, 다른 작가와 예술가들이 시간과 상실을 다루어 온 방식을 자신의 경험과 교차시킨다. 비평은 개인적인 고통을 외부에서 관찰할 수 있는 거리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그 고통을 이해할 새로운 언어를 마련한다. 자신의 삶을 서술하는 행위는 이미 지나간 사건에 구조를 부여하고, 서로 무관해 보였던 경험들 사이에 관계를 형성한다. 리쾨르가 말한 서사적 정체성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이야기로 구성하면서 스스로를 이해한다. 딜런에게 글쓰기는 사라진 가족의 역사를 탐색하는 작업이자 그 역사 속에서 형성된 자신의 존재를 다시 읽는 과정이 된다.<br/><br/>암실에서는 빛에 노출된 흔적이 현상 과정을 거쳐 하나의 이미지로 모습을 드러낸다. 기억의 암실에서도 과거의 장면들은 현재의 시선과 만나 새로운 형태를 만든다. 『어두운 방에서』의 글쓰기는 지나간 삶의 흔적들을 현상하는 작업과 닮아 있다. 사물은 우연히 살아남고, 사진은 한순간의 존재를 보존하며, 장소는 그곳을 떠난 사람의 감각 속에서 다시 구성된다. 잃어버린 사람과 시간은 남겨진 흔적을 통해 계속해서 새롭게 해석되며, 기억하는 사람의 삶 속에서 또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 어두운 방은 그렇게 사라진 것들의 흔적과 아직 해석되지 않은 자신의 역사가 함께 현상되는 장소가 된다.<br/><br/>✏️도서출판 을유문화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315/83/cover150/893247652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3158319</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분류된 지식, 분류되지 않는 호기심 - [문과의 눈으로 보면 과학 고전이 더 재밌어진다 - 어려운 과학 개념부터 뜻밖의 뒷이야기까지, 술술 읽히는 과학 고전 가이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65610</link><pubDate>Sun, 11 Oct 2026 12:0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6561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22131381&TPaperId=1756561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272/45/coveroff/k02213138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22131381&TPaperId=1756561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문과의 눈으로 보면 과학 고전이 더 재밌어진다 - 어려운 과학 개념부터 뜻밖의 뒷이야기까지, 술술 읽히는 과학 고전 가이드</a><br/>박균호 지음 / 지상의책(갈매나무) / 2026년 09월<br/></td></tr></table><br/>문과라는 이름은 언제부터 과학을 읽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되었을까. 지식은 수많은 갈래로 나뉘어 각자의 언어와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분류는 어느 순간 지식의 질서를 넘어 사유의 가능성을 재단하는 기준이 된다. 문과와 이과라는 익숙한 구분도 그렇다. 학문을 선택하기 위한 편의가 개인의 지적 성향을 규정하고, 아직 경험하지 않은 세계에 대한 호기심마저 미리 제한한다. 과학은 누군가에게 허락된 언어처럼 느껴지고, 문학과 철학은 또 다른 누군가의 전유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느새 지식의 경계는 인간이 스스로 그어 놓은 사고의 경계와 겹쳐진다.<br/><br/>박균호의 『문과의 눈으로 보면 과학 고전이 더 재밌어진다』는 이러한 구분을 제목에 내세운다. 문학을 공부하고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쳐 온 저자는 과학 고전을 읽으며 겪었던 어려움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과학자에게 익숙한 개념이 처음 읽는 사람에게는 낯선 언어로 다가오고, 한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단계의 설명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경험. 저자는 그 과정에서 생겨난 의문을 하나씩 풀어내며 460년에 걸친 과학의 역사를 스물일곱 권의 고전으로 엮는다. 문과의 시선이라는 표면적인 구분을 따라 책 속으로 들어가면, 오히려 학문 사이에 놓인 경계의 성격을 다시 살피게 된다.<br/> <br/>학창 시절 수능 국어의 비문학 지문을 분석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문학이 언어의 이면에 놓인 의미와 서사의 흐름을 탐색하는 영역이었다면, 비문학은 문장 사이의 인과와 논리적 구조를 해독하는 또 다른 지적 즐거움이었다. 특히 과학 지문 앞에서 유독 난색을 표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문과였던 내게는 그 역시 하나의 텍스트였다. ‘이건 과학이 아니라 국어다.’ 낯선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문장의 관계를 살피고 논증의 순서를 따라가다 보면, 생소한 원리가 어느새 하나의 질서로 모습을 드러낸다. 때로는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뜻밖의 호기심이 발생하기도 한다.<br/><br/>이러한 경험은 지식의 영역을 구분하는 방식과 실제로 지식을 이해하는 방식 사이의 간격을 보여 준다. 과학적 개념을 다룬 문장도 언어의 구조와 논리적 관계를 통해 읽을 수 있으며, 익숙한 독해의 방법은 낯선 학문으로 향하는 통로가 된다. 하나의 분야에서 익힌 사고의 기술이 다른 분야를 이해하는 데 활용되는 순간, 학문적 분류는 더 이상 호기심의 범위를 결정하지 못한다. 관찰된 현상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질서를 추론하는 일과, 언어로 포착되지 않은 인간의 경험을 서술하는 일에는 공통된 지적 움직임이 존재한다. 그것은 익숙한 설명에 의문을 품고, 서로 떨어져 있던 사실들 사이에서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려는 움직임이다. 학문마다 사용하는 도구와 검증의 기준은 달라도 인간의 호기심은 그 구획을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br/><br/>과학 고전의 역사는 이러한 사유의 움직임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를 이해하던 오래된 질서를 재구성했고,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이어진 자연의 역사 속에 위치시켰다. 두 발견은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는 동시에 인간이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인간은 자신이 세계의 중심에 서 있다는 확신을 수정해야 했고, 자연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새롭게 이해해야 했다. 과학이 밝혀낸 사실은 인간의 자기 인식과 분리될 수 없었다. 세계를 설명하는 언어가 달라질 때, 그 세계에 속한 인간의 의미 역시 다시 사유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관계는 문학과 과학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이어진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을 창조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창조자의 책임을 길어 올리고,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과학기술이 인간의 삶을 정교하게 관리하는 사회를 상상한다. 과학적 가능성은 문학의 상상력 속에서 윤리적 문제로 확장된다. 새로운 기술을 실현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기술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까지 결정되지는 않는다. 생명과 자유, 책임과 존엄을 둘러싼 논의에는 자연현상에 대한 이해와 인간의 가치에 대한 성찰이 함께 요구된다. 과학과 인문학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같은 세계의 복잡성을 탐구하며, 어느 한쪽의 언어만으로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마주한다.<br/><br/>이 책에서 더욱 주목할 부분은 과학적 발견의 결과보다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저자는 완성된 이론을 앞세우기보다 과학자들이 처음 무엇을 궁금해했는지, 어떤 관찰과 추론을 통해 기존의 설명을 수정했는지 살펴본다. 다윈의 망설임과 뉴턴의 연구 환경, 과학자들 사이의 경쟁과 협력은 과학사를 인간의 구체적인 삶 속으로 끌어온다. 교과서에 정리된 법칙은 간결하지만, 그 법칙이 형성되기까지의 시간에는 실패와 우연, 반복되는 검토가 축적되어 있다. 과학적 지식의 권위는 이러한 과정을 지워 버릴 때보다 그 과정을 이해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br/><br/>어떤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과 그 사실이 왜 타당한지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서로 다른 능력이다. 이미 확립된 결론을 기억하는 일에는 정해진 답이 있지만, 그 결론에 이르는 근거를 검토하는 과정에는 끊임없는 판단이 필요하다. 저자가 과학 고전을 읽으며 반복해서 마주했다는 ‘왜?’라는 물음은 그래서 중요하다. 이해하지 못한 문장을 다시 읽고, 생략된 설명을 찾아내고, 낯선 개념을 익숙한 경험에 연결하는 과정은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독서에서 벗어나게 한다. 오렌지와 이쑤시개로 지구 둘레를 측정하는 원리를 설명하고, 만유인력을 우리 곁의 사람 사이에도 작용하는 힘으로 풀어내는 방식에는 추상적인 지식을 구체적인 감각으로 옮기려는 노력이 담겨 있다. 어려운 개념을 쉽게 전달하는 일은 이해의 문턱을 낮추는 동시에 독자가 스스로 사고를 이어 갈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하는 작업이다. 설명의 친절함과 지적 엄밀함이 함께할 때, 독자는 이해한 내용을 토대로 새로운 의문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자신의 설명이 수정될 가능성을 인정하는 태도 또한 이러한 탐구를 지속하게 하는 힘이다.<br/><br/>이러한 독서의 태도는 책 밖의 현실에서도 유효하다. 수능을 준비하는 학생에게 과학 지문이 정답을 찾기 위한 독해의 대상이라면, 시험을 마친 뒤의 삶에서는 과학적 지식이 스스로 판단해야 할 현실의 문제로 다가온다. 성인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낯선 정보를 분별하는 능력이 저절로 갖추어지는 것은 아니다. 과학적 권위를 내세운 정보가 일상에 끊임없이 유입되는 시대에, 전문적인 용어와 숫자는 주장에 신뢰감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건강과 환경, 기술에 관한 정보를 접할 때 중요한 것은 전문가의 결론을 무조건 의심하는 태도보다 그 결론이 어떤 근거와 조건 위에 성립하는지 살피는 능력이다. 과학 고전이 보여 주는 관찰과 검증의 역사는 우리가 정보를 읽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시험에서는 하나의 정답을 선택하면 다음 문제로 넘어갈 수 있지만, 삶에서는 자신의 판단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까지 헤아려야 한다. 지식을 이해하는 경험이 자신의 판단을 구성하는 능력으로 이어질 때, 독서는 현실을 해석하는 실질적인 힘을 갖는다.<br/><br/>책은 스물일곱 권의 과학 고전을 한데 모으면서도 독자가 반드시 정해진 순서를 따르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관심 있는 주제에서 출발해 다른 고전으로 이동할 수 있고, 각 장에 마련된 질문과 추천 도서를 통해 새로운 독서를 계획할 수도 있다. 이러한 구성은 지식의 세계에 진입하는 경로가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누군가는 우주의 역사에서, 누군가는 생명의 구조에서, 또 다른 누군가는 과학기술을 둘러싼 윤리적 논쟁에서 자신의 호기심을 발견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 시작했는가보다 그 호기심이 다음 탐구로 이어질 수 있는가에 있다.<br/><br/>학교 교육과정은 문과와 이과의 구분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지만, 오랫동안 익숙했던 학문의 경계가 사람들의 인식에서도 같은 속도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구분이 한 사람의 지적 가능성을 미리 결정할 이유는 없다. 과학 고전의 역사는 인간이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설명을 수정하며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혀 온 과정이고, 그 역사를 읽는 일 역시 자신에게 익숙한 사고의 범위를 돌아보게 한다. 『문과의 눈으로 보면 과학 고전이 더 재밌어진다』는 과학을 낯설어하는 독자에게 하나의 통로를 마련한다. 그 통로를 따라가며 발견하게 되는 것은 스물일곱 권의 과학 고전과 더불어, 학문의 경계 앞에서 멈추었던 자신의 호기심을 다시 움직이게 할 가능성이다.<br/><br/>✏️도서출판 갈매나무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272/45/cover150/k02213138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2724527</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살아남은 소녀 - [그 소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64629</link><pubDate>Sat, 10 Oct 2026 20:3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6462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32131476&TPaperId=1756462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218/18/coveroff/k83213147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32131476&TPaperId=1756462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그 소녀</a><br/>우샤오러 지음, 정세경 옮김 / 빈페이지 / 2026년 09월<br/></td></tr></table><br/>인간의 생애에는 보이지 않는 마감일이 있다. 몇 살에는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얼마 뒤에는 안정된 직업을 얻으며, 정해진 시기에는 어른으로서의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 성적과 순위, 합격과 탈락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삶은 언제나 다음 단계로 진입하기 위한 준비가 된다. 이 질서는 누구에게나 동일한 속도를 요구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시간에는 일정한 눈금이 없다. 어떤 아이에게 열일곱 살은 무사히 지나온 한 해이고, 어떤 아이에게는 수십 년이 지나도록 벗어나기 어려운 계절이다. 사회가 측정하는 성장의 속도와 한 인간이 실제로 견뎌온 시간 사이에는 얼마나 먼 거리가 놓여 있을까.<br/><br/>방과 후 38분, 명문 여학교의 학생 쑤밍쉬안이 학교 건물에서 뛰어내린다. 제자의 죽음을 마주한 교사 우이광에게 그날의 사건은 오래전 자신의 유년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교사로서 사건의 책임을 요구받는 현재와 누군가의 보호가 절실했던 과거가 교차하면서, 살아남은 소녀가 어떤 어른이 되었는지가 서서히 드러난다. 작가는 죽음의 원인을 추적하는 서사에 우이광의 성장 과정을 겹쳐 놓는다. 그 결과 한 사람의 비극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가족과 학교, 사회가 아이들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규정해 왔는지를 살피는 일로 확장된다.<br/><br/>실제로 우샤오러가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에는 2019년과 2020년 타이완대학교와 자신의 모교인 타이중여고에서 잇따라 발생한 학생들의 죽음이 있었다. 작가가 주목한 것은 개별 사건의 비극성만큼이나, 그 죽음에 자신을 겹쳐 보던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다만 소설은 특정 사건을 그대로 재현한 기록이 아니며, 쑤밍쉬안의 삶을 현실의 어느 한 학생과 동일시할 수도 없다. 실제의 비극에서 출발한 문제의식은 허구의 인물들을 통해, 한 사람이 살아갈 의지를 잃어가는 사회적 조건을 문학의 언어로 탐색한다.<br/><br/>우이광의 어린 시절에는 사랑을 얻기 위해 충족해야 할 조건들이 있었다. 어머니가 요구하는 성취는 딸의 미래를 위한 약속이었으나, 그 약속을 지키는 책임은 언제나 아이에게 주어졌다. 좋은 성적과 올바른 선택, 타인에게 인정받는 삶을 향한 요구 속에서 우이광은 자신의 감정보다 기대에 부응하는 능력을 먼저 길러야만 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과 결합하고, 부모의 기대는 점차 스스로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아이가 자신을 이해하기도 전에 자신을 증명하는 방법부터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형성된 자기인식은 성취가 멈추는 순간 자신의 가치까지 의심하게 만든다.<br/><br/>심리학자 졸린 E. 헤인스와 니컬라 S. 슈테는 2023년 발표한 논문 「Parental Conditional Regard: A Meta-analysis」에서 부모의 조건부 인정과 자존감의 불안정성, 우울 증상 사이에 유의미한 연관성이 있음을 확인했다. 부모가 기대에 부응하는 정도에 따라 애정과 승인을 달리할 때, 자녀는 외부의 기준을 자기 가치의 척도로 삼기 쉬워진다는 것이다. 이 연구가 보여주는 연관성은 우이광의 삶을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가 된다. 누군가의 칭찬을 얻기 위해 시작한 노력이 어느 순간 자신을 심판하는 내면의 목소리로 바뀌는 과정. 부모가 곁에 없어도 평가의 시선은 사라지지 않고, 아이는 자신을 감시하는 또 하나의 어른을 마음속에 만들어 낸다.<br/><br/>아이의 삶을 제한하는 가장 익숙한 명분은 사랑과 보호다. 부모는 자녀가 실패하지 않기를 바라며 선택에 개입하고, 학교는 학생의 미래를 보장한다는 명분으로 성적과 행동을 관리한다. 성공을 향한 열망이 클수록 아이가 실제로 원하는 삶은 중요성을 잃는다. 부모의 두려움은 아이의 의무가 되고, 학교의 평판은 학생이 감당해야 할 성과가 된다. 『그 소녀』에서 교육은 개인의 가능성을 넓히는 과정인 동시에, 어떤 삶이 가치 있는지를 미리 결정하는 제도로 작동한다. 아이를 위한다는 확신이 아이의 목소리를 지워버리는 순간, 보호와 통제는 같은 문법을 사용한다.<br/><br/>아이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이루어지는 선택들은 가해와 피해의 경계마저 복잡하게 만든다. 그러나 복잡한 사정이 언제나 가혹한 행동을 설명하거나 정당화해 주는 것은 아니다. 우샤오러는 우이광의 어머니에게 불행한 유년이나 특별한 희생의 서사를 부여하지 않는다. 타인에게 가한 상처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그 사람의 상처부터 찾아야 한다는 관습을 거부한 것이다. 자신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교사, 자녀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는 학생들이 서로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누구나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행동하지만, 그 이유들이 모인 세계가 모든 사람에게 안전한 것은 아니다. 성취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어른은 아이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사람인 동시에 그 가능성에 순위를 매기는 사람이 된다. 한때 평가받던 아이가 자라서 다른 아이를 평가하는 위치에 서는 일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반복된다. 제도가 지속되는 힘은 바로 이러한 일상성에서 비롯된다.<br/><br/>우이광 역시 그 반복의 한가운데 서 있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세계에서 살아남은 그녀는 이제 그 세계를 유지하는 역할을 맡은 교사다. 어린 시절의 고통을 기억한다는 사실만으로 다른 아이의 고통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견뎌온 경험을 기준으로 타인의 어려움을 가늠할 위험도 존재한다. 우이광이 제자의 죽음 앞에서 마주하는 것은 과거의 상처와 함께, 현재 자신이 어떤 어른으로 살아왔는가 하는 문제다. 피해의 기억이 타인을 이해할 자격을 자동으로 부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잔인하면서도 중요한 깨달음이다.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그 고통을 기억하는 방식부터 달라져야 한다.<br/><br/>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린 날의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일일까. 반대로, 그 상처를 여전히 안고 살아간다면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것일까. 우이광은 열일곱 살의 절망을 지나 일상을 이어왔고, 사회가 요구하는 여러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삶을 지속했다는 사실과 그 삶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은 일치하지 않는다. 지나온 시간은 고통의 소멸을 보증하지 않으며, 성숙이라는 이름 아래 미처 이해하지 못한 감정들이 오래 보존되기도 한다. 과거는 기억 속에 고정된 장면으로 존재하면서도 현재의 관계와 선택에 개입한다. 한때 견뎌냈다고 믿었던 시간이 타인의 고통 앞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낼 때,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해야 하는 순간과 마주한다.<br/><br/>이러한 문제는 실제 연구에서도 확인된다. 최창용과 조슈아 P. 머스키가 2025년 발표한 「Adverse childhood experiences and health-related outcomes in early adulthood: Evidence from the Korean Welfare Panel Study」는 한국복지패널의 종단자료를 분석해 아동기 역경 경험과 이후의 건강 사이에 연관성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특히 청소년기의 우울 증상이 아동기 역경과 초기 성인기의 우울 증상 사이의 관계를 부분적으로 매개한다는 결과는 과거의 경험이 이후의 삶과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모든 상처가 동일한 경로를 거치는 것은 아니며, 인간의 생애를 하나의 연구 결과로 설명할 수도 없다. 다만 성장의 시간이 반드시 치유의 시간과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우이광의 삶을 더욱 입체적으로 읽게 한다.<br/><br/>우이광에게 제자의 죽음은 자신의 유년을 다시 해석하게 만드는 사건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거를 떠올리는 행위 자체보다, 과거에 부여했던 의미가 현재의 경험을 통해 달라진다는 점이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사건들을 연결해 하나의 생애를 구성하지만, 그 이야기는 완성된 기록처럼 고정되지 않는다. 어제까지 극복의 증거였던 시간이 오늘에는 외면해 온 감정의 흔적으로 읽힐 수 있다. 살아남았다는 말 역시 그러하다. 그 말에는 견뎌온 시간에 대한 긍지가 담겨 있으면서도, 그동안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슬픔이 숨어 있을 수 있다. 우이광의 성장은 과거의 소녀를 지워가는 일보다, 그 소녀가 겪었던 고통을 현재의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배우는 과정으로 읽힌다.  그러나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는 일이 타인의 고통까지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한 소녀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이유를 찾는다. 가정환경과 성적, 친구 관계와 심리적 어려움을 살피며 무엇이 비극을 불러왔는지 밝혀내려 한다. 그 노력에는 책임을 규명하고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동시에 누군가의 삶을 이해 가능한 원인과 결과로 정리하고 싶은 욕망도 작용한다.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을 이해했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한 사람의 내면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 알지 못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고통의 원인을 찾는 일이 고통받았던 존재의 전부를 설명하는 권한으로 이어져서는 곤란하다.<br/><br/>우샤오러는 이러한 불확실성을 작품의 서술 속에 보존한다. 죽음의 이유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여러 인물의 삶이 드러나지만, 그들의 경험은 하나의 정답을 완성하기 위한 증거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특히 우이광과 쑤밍쉬안의 고통은 서로를 비추면서도 완전히 겹쳐지지 않는다. 자신의 유년을 통해 타인에게 접근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의 삶을 대신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타인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가 이해되지 않는 순간에도 그의 존재를 함부로 단정하지 않는 태도를 포함한다. 작품이 죽은 소녀에게 섣부른 설명을 부여하지 않는 방식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태도까지 돌아보게 한다.<br/><br/>그리하여 『그 소녀』의 저항은 우이광 개인의 상처를 넘어선다. 자신을 억압했던 기준을 의심하는 일, 그 기준이 다음 세대에게도 정당하게 적용되고 있는지 살피는 일, 타인의 삶을 자신의 경험으로 재단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서로 연결된다. 살아남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책임을 모든 고통을 해결해야 한다는 의무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자신이 알지 못했던 고통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누군가의 삶을 성적과 성취만으로 평가해 온 관습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에서 변화는 시작될 수 있다. 어른의 자격은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견뎌냈는지보다, 자신의 경험이 타인을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태도에서 드러나지 않을까.<br/><br/>원제 『那些少女沒有抵達』(그 소녀들은 도착하지 못했다)에는 도착하지 못한 소녀들이 있다. 그들이 도달해야 했던 곳은 누구의 기준으로 정해졌을까. 어떤 삶은 정해진 시간표를 충실히 따르면서도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어떤 삶은 그 시간표를 벗어나는 순간 비로소 자신의 선택을 발견한다. 우샤오러는 살아남은 한 사람의 현재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한 소녀들의 시간을 함께 기록하며, 성장과 성공을 동일한 말로 취급해 온 세계를 돌아보게 한다. 누군가의 삶이 중단되었다는 사실을 성장의 비유로 소비할 수는 없다. 그 삶이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억에서 지워서도 안 된다. 도착하지 못한 소녀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은, 지금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어떤 목적지를 강요하고 있는지 살피는 일과 연결된다. 그 소녀들이 미처 살아보지 못한 시간 앞에서,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성장의 순서와 성공의 기준은 더 이상 이전처럼 자명할 수 없다.<br/><br/>✏️도서출판 빈페이지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218/18/cover150/k83213147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2181843</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문학이라는 이름의 국경 - [표준어 바깥에서 - 노예와 여성, 노동자와 소수자가 바꾼 쓰기의 역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64037</link><pubDate>Sat, 10 Oct 2026 12:3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6403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22131169&TPaperId=1756403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34/69/coveroff/k72213116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22131169&TPaperId=1756403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표준어 바깥에서 - 노예와 여성, 노동자와 소수자가 바꾼 쓰기의 역사</a><br/>박홍규 지음 / 틈새의시간 / 2026년 09월<br/></td></tr></table><br/>이솝에게는 우화가, 안데르센에게는 동화가 따라붙는다. 이름 하나로 작가의 세계를 불러낼 수 있다는 것은 문학사가 오랜 시간 구축해온 기억의 방식이다. 그러나 익숙한 이름은 복잡한 생애를 몇 개의 특징으로 압축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경험들은 문학적 명성의 뒤편으로 밀려난다. 어린이에게 교훈을 전하는 이솝의 이야기에서 노예의 처지를 읽어내거나, 안데르센의 환상적인 동화에서 가난과 사회적 불평등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은 익숙한 작품을 낯선 역사 속에 다시 놓는 경험이다. 문학사는 작품을 보존하는 동시에 그 작품을 탄생시킨 세계의 일부를 망각하기도 한다.<br/><br/>박홍규의 『표준어 바깥에서』는 정리되고 분류된 문학사의 이면을 살핀다. 노예와 여성, 노동자와 사회적 소수자였던 열일곱 작가의 삶을 통해 문학적 성취를 가능하게 한 조건과 그 성취를 가로막았던 질서를 함께 검토한다. 이들이 겪은 가난과 차별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전기적 배경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문학이 누구의 경험을 기록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정했으며, 누가 자신의 언어를 공적인 기록으로 전환할 기회를 얻었는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저자는 작품에 부여된 명성 아래에서 그 작품이 태어난 사회적 위치를 다시 찾아낸다. 어떤 작가가 문학사에 편입되는 순간, 그의 작품은 분류되고 해석되며 하나의 권위 있는 이름으로 정착한다. 이러한 과정은 작품의 전승을 가능케 하지만, 해석의 방향을 제한하는 작용도 한다. 문학의 정전, 곧 오랜 세월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읽기와 교육의 기준으로 자리 잡은 작품들의 목록은 무엇을 읽을 것인가에 관한 선택이면서 무엇을 중요하게 기억할 것인가에 관한 판단이기도 하다. 이미 확립된 작가의 이미지가 반복될수록 그 이미지에 들어맞지 않는 생애와 사상은 부차적인 정보로 취급되기 쉽다. 이솝과 디킨스, 마크 트웨인의 저항적 면모를 다시 읽는 일은 익숙한 문학적 명성 아래 가려졌던 사회적 현실을 복원하는 작업이기도 하다.<br/><br/>문학적 권위가 형성되는 과정에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조건도 깊이 관여한다. 문자를 익힐 시간과 교육받을 기회, 책을 소유할 경제력, 혼자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은 오랫동안 불평등하게 분배되었다. 언어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가 인정하는 방식으로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에는 각기 다른 삶의 조건이 축적되어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러한 불평등을 설명하며 ‘문화자본’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에게 문화자본은 경제적 재산처럼 소유하고 축적할 수 있는 지식과 교양, 언어적 능력과 학력 등을 포괄한다. 가정과 교육환경을 통해 습득한 문화적 자원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능력의 기준이 되면서, 계급의 차이는 개인의 취향과 재능의 차이로 받아들여진다. 학교는 그 차이를 평가하고 자격으로 공인함으로써 기존의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데 관여한다. 어떤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교양으로 여겨지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평생 도달하기 어려운 자격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사회적 격차는 개인의 능력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고, 이미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언어가 다시 보편적인 기준으로 승인된다.<br/><br/>노예 출신 극작가 테렌티우스의 사례는 이러한 권력의 작동 방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뛰어난 작품을 썼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가 진정한 저자인지 의심받는 이유가 되었다는 일화에는 당시의 사회적 편견이 응축되어 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은 성취를 통해 증명되지만, 어떤 사람의 성취는 그가 속한 신분 때문에 인정받지 못한다. 그의 사례에서 글을 쓸 수 있는 능력과 그 글의 주인으로 인정받을 자격 사이에는 신분이라는 장벽이 놓여 있었다. 한 사람의 언어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문장을 완성하는 능력 외에도 그 문장을 쓴 사람에 대한 기존의 판단을 통과해야 한다. 언어의 소유권은 문자 자체를 익히는 일보다 복잡한 사회적 승인 과정을 포함한다. 스웨덴의 청소노동자 마이아 에켈뢰브가 버려진 종이 위에 자신의 삶을 기록했다는 이야기는 또 다른 방향에서 글쓰기의 조건을 생각하게 한다. 종이와 책상이 갖추어진 방을 상상할 때 쉽게 떠오르는 창작자의 모습과, 노동의 틈에서 버려진 종이를 찾아 글을 쓰는 사람의 모습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방은 창작에 필요한 물질적 독립을 상징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방을 가질 가능성부터 제한되어 있었다. 에켈뢰브의 글쓰기는 문학적 재능을 둘러싼 낭만적인 상상에 현실의 무게를 더한다. 글을 쓰고 싶다는 의지만으로 확보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 노동 이후에도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려는 행위가 그 안에 함께 존재한다.<br/><br/>이러한 기록이 문학으로 읽히기 시작할 때,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던 삶도 새로운 가시성을 얻는다. 노동자의 피로와 빈곤, 여성의 욕망과 소수자의 경험은 오랫동안 기록할 가치가 있는 세계의 중심에서 배제되어 왔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정치와 예술을 통해 사회에서 무엇이 보이고 들리며, 누가 발언할 자격을 갖는지가 결정되는 방식을 탐구했다. 그는 이를 ‘감성의 분할’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사회의 질서는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자리와 역할을 배분하며, 어떤 이들의 말은 공적인 발언으로 인정하면서 다른 이들의 말은 소음처럼 취급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문학은 기존의 감각적 질서를 재편하여 이전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삶을 공동의 세계 안으로 불러들일 가능성을 지닌다. 한 사람의 사적인 경험이 문장으로 옮겨지는 순간, 그것은 타인에게 읽히고 해석될 수 있는 공적인 경험으로 확장된다. 다만 기록된 모든 목소리가 동등하게 들리는 것은 아니다. 출판과 유통, 비평과 교육의 제도는 여전히 어떤 언어를 더 널리 전달할 것인지 선택한다. 글쓰기의 가능성이 확대된 이후에도 그 글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조건은 별도로 검토되어야 한다.<br/><br/>이 책에서 더욱 중요하게 읽히는 부분은 저자가 글쓰기의 권리와 글쓰기의 지향을 구분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문자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사람이 작가로 성공했다는 이유만으로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났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획득한 언어를 다시 지배적인 가치에 봉사하도록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배제되었던 사람이 중심에 진입하는 일과 중심을 구성하는 권력관계를 바꾸는 일에는 서로 다른 윤리적 결단이 요구된다. 저자가 말하는 '옳은 글'은 바로 이러한 차이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목소리를 얻은 사람이 그 목소리를 통해 누구의 삶을 드러내고 어떤 질서를 의심하는가. 글쓰기의 자유는 자신의 경험을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과 더불어 그 표현이 세계와 맺는 관계에 관한 책임을 수반한다. 그러나 '옳은 글'이라는 기준에는 조금 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사회적 약자의 경험을 드러내고 지배 질서를 비판하는 문학의 가치는 분명하지만, 문학적 성취를 윤리적 올바름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작품의 언어와 형식, 해석의 다의성은 때때로 작가가 명시적으로 표방한 사회적 입장보다 복잡한 의미를 만들어낸다. 문자 권력의 위계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올바름의 기준을 절대화한다면, 문학이 지닌 다양한 표현의 가능성 역시 제한될 수 있다. 권위를 의심하는 태도는 저항적인 글쓰기의 가치와 한계를 살피는 과정에서도 유효해야 한다.<br/><br/>이러한 긴장은 저자의 문장에서도 느껴진다. 머리말과 맺음말에서는 유사한 주장이 반복되고, 강조를 위해 앞선 진술을 다시 풀어 쓰는 방식이 자주 사용된다. 그 반복이 저자의 문제의식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한편, 사유가 더 깊이 전개될 수 있는 자리에서 논의의 밀도를 느슨하게 만드는 순간도 있다. 그런데 이 책이 비판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문장력이라는 이름으로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계급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문장의 완성도를 판단하는 독자의 기준 역시 성찰의 대상이 된다. 사회적으로 승인된 언어의 규범을 의심하는 일과 문학적 표현의 정교함을 요구하는 일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 문장을 평가하는 행위 자체에도 문화적 권위가 개입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학적 판단을 권력의 산물로 환원할 수도 없다. 이 책의 문체에서 느낀 아쉬움은 오히려 언어의 자유와 미학적 판단이 공존할 수 있는 조건을 생각하게 한다.<br/><br/>오늘날 문자를 읽고 쓰는 능력은 과거보다 훨씬 널리 보급되었지만, 언어를 둘러싼 불평등은 다른 형태로 지속된다. 누군가는 풍부한 독서 환경과 교육의 기회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고, 누군가는 그 기회를 충분히 누리지 못한 채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받는다. 언어의 능력이 개인의 자질로만 설명될 때, 그 능력을 형성한 사회적 조건은 쉽게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러한 차이는 교육과 문화적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에 따라 새로운 언어적 위계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글쓰기의 자유를 논하려면 누구나 쓸 수 있다는 선언과 함께, 누구에게 실제로 쓸 수 있는 조건이 주어지는지도 살펴야 한다.<br/><br/>문학사의 이름들은 오랜 세월을 건너 살아남았지만, 그 이름을 둘러싼 현실까지 함께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우화와 동화라는 익숙한 분류 안에서 이솝과 안데르센을 기억하는 동안, 그들의 작품에 스며든 시대의 불평등은 쉽게 잊힌다. 『표준어 바깥에서』가 복원하려는 것은 작가들의 숨겨진 생애인 동시에 그들의 문장이 태어난 사회적 조건이다. 한 작가를 기념하는 일에는 그의 작품을 읽는 행위뿐 아니라 그 작품이 어떤 세계를 비판하고 어떤 삶을 가시화했는지 다시 살피는 일도 포함되어야 한다. 문학이 누구의 언어를 자신의 역사로 받아들였는가를 묻는 일은, 우리가 지금 누구의 언어를 문학으로 인정하고 있는가를 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br/><br/>✏️도서출판 틈새의시간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34/69/cover150/k72213116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1346905</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환상사회의 한가운데서 - [환상사회 - 이상적 이미지를 넘어 자기-세계를 만드는 15가지 방법]</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62720</link><pubDate>Fri, 09 Oct 2026 16: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6272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92131384&TPaperId=1756272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273/42/coveroff/k59213138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92131384&TPaperId=1756272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환상사회 - 이상적 이미지를 넘어 자기-세계를 만드는 15가지 방법</a><br/>정지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9월<br/></td></tr></table><br/>누군가의 삶이 손가락 한 번의 움직임으로 펼쳐진다. 낯선 사람의 아침 식탁과 여행지의 햇빛, 정돈된 서재와 성공의 기록들이 작은 화면 안에서 쉼 없이 교체된다. 그중 어떤 장면은 동경의 대상이 되고, 어떤 장면은 자신의 삶을 초라하게 만드는 척도가 된다. 타인의 일상이 이토록 가까워진 시대에 정작 자신의 일상은 점점 낯설어진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다른 사람의 삶을 방문하면서,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에는 얼마나 오래 시선을 두고 있을까.<br/><br/>정지우의 『환상사회』는 이미지가 인간의 욕망과 정체성을 구성하는 시대를 진단한다. 저자는 현실의 자신보다 이상적인 자기 이미지에 이끌리는 현대인을 ‘호모 판타즈마’라 명명한다. 이들은 자신을 전시하고 타인을 구경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이상을 찾아 움직인다. 기 드보르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이미지에 의해 매개되는 사회적 관계를 분석했다면, 오늘날의 환상사회에서는 각자의 욕망에 맞춰 선별된 이미지가 개인의 현실 인식까지 조작한다. 무엇을 동경하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조차 외부에서 공급되는 시대. 자신을 표현하는 자유는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의무와 뒤섞인다.<br/><br/>자기다움을 추구하는 욕망은 종종 타인의 인정을 향해 굽어진다. 남들과 구별되는 고유한 존재가 되고 싶으면서도, 그 고유함이 타인에게 인정받기를 바란다는 사실이다. 장폴 사르트르가 타자의 시선을 통해 설명했던 대상화의 경험은 오늘날 디지털 공간에서 더욱 일상적인 형태를 취한다. 앨리스 E. 마윅과 다나 보이드는 2011년 『뉴 미디어 앤드 소사이어티(New Media & Society)』에 발표한 논문 「나는 솔직하게 트윗하고, 열정적으로 트윗한다: 트위터 이용자, 맥락 붕괴, 상상된 청중」에서 서로 다른 사회적 관계의 청중들이 하나의 온라인 공간에 겹쳐지는 현상과 이용자들이 ‘상상된 청중’을 고려해 자신의 표현을 조절하는 방식을 분석했다. 자신을 보여주는 행위에는 이미 그 모습을 바라볼 타인에 대한 예상이 스며 있는 셈이다. 게시물을 올리기 전 타인의 반응을 예상하고, 자신이 보여줄 만한 모습을 골라내는 동안 자아는 전시 가능한 부분들을 중심으로 편집된다. 타인의 시선은 자신을 이해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고, 그 기준은 점차 내면의 판단까지 대신한다. 남다르게 보이기 위해 선택한 취향과 생활 방식이 어느새 비슷한 형태로 반복되는 광경도 낯설지 않다. 자신을 발견하려는 노력과 자신을 연출하려는 욕망이 구별되지 않을 때, 인간은 스스로 만든 이미지의 관객이 된다.<br/><br/>이러한 삶을 지배하는 감정으로 저자는 ‘항시적-초조함’을 제시한다. 이상이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면 인간은 체념할 여지라도 갖는다. 그러나 환상사회가 보여주는 이상은 언제나 조금만 더 노력하면 도달할 수 있을 듯한 거리에 놓인다. 타인의 성취는 가능성의 증거처럼 제시되고, 아직 그곳에 이르지 못한 자신의 현재는 미완성의 시간으로 평가된다. 비슷한 나이의 누군가가 이룬 성취를 확인한 뒤, 아무 문제 없이 흘러가던 자신의 하루를 뒤늦게 부족한 시간으로 느끼는 순간처럼. 비교의 대상이 무한히 늘어나는 사회에서 만족의 기준은 끊임없이 이동한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보다 무엇을 아직 갖지 못했는지에 더욱 민감해지고, 삶의 충만함을 측정하는 감각마저 결핍의 언어에 익숙해진다.<br/><br/>그 결과 현재는 살아내는 시간보다 미래의 자신을 위해 투자해야 하는 시간으로 취급된다. 휴식에도 생산성이 요구되고, 취미는 전문성이 되어야 하며, 평범한 경험마저 성장의 증거로 환산된다. 산책하며 찍은 사진 한 장에도 기록할 만한 의미를 찾고, 좋아서 시작한 일을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되는 일상이다. 더 나은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무한한 자기개선의 명령으로 바뀌는 것이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이루면서도 충분하다는 감각을 얻지 못하는 사람에게 결핍은 일시적인 상태를 넘어 삶을 조직하는 원리가 된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오늘의 시간을 선점하고, 인간은 자신의 현재를 언제나 잠정적인 것으로 경험한다. 자신을 위해 살아간다고 믿는 동안에도 정작 자신이 살아가는 시간은 끊임없이 유예된다.<br/><br/>『환상사회』가 제안하는 ‘세계-만들기’는 이러한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시도다. 저자는 이상적인 자아상을 완성하려는 ‘나-되기’의 강박에서 벗어나 자신이 가치 있다고 믿는 것들로 고유한 세계를 만들어가자고 제안한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에 시간을 기꺼이 사용하는지, 어떤 관계를 지속하고 싶은지에 따라 한 사람의 세계는 조금씩 형태를 갖춘다. 사회가 이미 마련해 둔 성공의 기준을 따르는 대신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가치 있는지를 스스로 정립하는 일. 이때 정체성은 완성된 형태로 획득해야 하는 목표보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구체화되는 삶의 내용으로 이해된다. 자신의 세계를 가진다는 것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들을 알아보고, 그것들이 삶에서 차지할 자리를 마련하는 과정이기도 하다.<br/><br/>그러한 세계는 반드시 특별하거나 독창적인 모습일 필요가 없다. 남에게 설명할 수 없어도 충분히 소중한 시간이 있고, 사회적인 성취로 환산할 수 없어도 한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관계가 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책의 한 구절을 오래 읽거나,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같은 길을 걷고, 별다른 목적 없이 누군가와 시간을 나누는 일도 한 사람의 세계를 구성한다. 그 시간들이 쌓여 취향이 되고, 기억이 되고,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고유한 감각이 된다. 외부의 기준이 삶의 가치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러한 사소한 경험들을 통해 더욱 구체적인 의미를 얻는다.<br/><br/>그러나 자기 세계를 구축한다는 말에도 경계해야 할 가능성이 있다. 자신만의 취향과 경험, 관계마저 경쟁력으로 계산하기 시작한다면 세계-만들기는 또 다른 자기계발의 과제가 될 수 있다.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다시 전시할 만한 삶을 제작하는 일로 되돌아가는 셈이다. 자신이 읽은 책과 방문한 장소, 쌓아온 경험을 하나의 완성된 인물상으로 배열하는 동안 세계는 또다시 평가받기 위한 이미지가 된다. 읽는 동안 즐거웠던 책은 어느새 한 해에 몇 권을 완독했는지 증명하는 숫자가 되고, 여행에서 보낸 시간보다 게시할 사진을 고르는 시간이 길어지는 순간, 경험은 자신의 삶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 세계가 얼마나 특별해 보이는지보다 그 안에서 실제로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지에 관한 감각이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이 타인의 인정과 무관하게 지속될 수 있을 때, 세계는 비로소 삶을 지탱하는 내적인 질서를 갖춘다.<br/><br/>한 사람의 세계에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 열어준 문이 있다. 인간이 자신에게 중요한 것들을 발견하는 과정에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말과 경험이 개입한다. 혼자서는 알지 못했을 세계를 누군가의 이야기를 통해 이해하고, 타인의 관심을 따라가다가 자신의 삶에 새로운 가치를 들여놓기도 한다. 관계는 각자의 세계를 확인하는 절차를 넘어, 그 세계를 변화시키는 경험이 된다.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이 만나는 순간에는 이해할 수 없는 차이도 발생하지만, 그 차이를 성급히 평가하지 않는 태도 속에서 관계의 깊이가 형성된다. 자신의 세계를 가진 사람은 타인의 세계 역시 자신이 전부 알 수 없는 고유한 질서를 갖고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br/><br/>이러한 관점에서 타인을 구경하는 문화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타인의 삶을 끊임없이 관찰하면서도 그 삶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사정에는 무관심해지는 현상은 환상사회의 또 다른 빈곤함을 드러낸다. 환하게 웃는 여행 사진 한 장으로 그 사람의 행복을 판단하거나, 짧게 편집된 실수 하나로 그의 인격 전체를 평가하는 일이 그렇다. 이미지에는 한 사람의 모습이 담길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 전체가 담기지는 않는다. 타인의 성공을 부러워하거나 실패를 평가하기 전에 그 이미지 바깥에 존재하는 삶을 상상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해란 상대를 자신의 기준에 맞춰 해석하는 과정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부분을 인정하고, 타인이 스스로의 언어로 자신의 세계를 드러낼 수 있도록 기다리는 태도 또한 이해의 일부다.<br/><br/>자신의 관심을 지키면서도 타인의 관심을 하찮게 여기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사랑하면서도 다른 삶의 방식이 존재할 자리를 허락하는 것. 서로 다른 세계들은 하나의 기준으로 통일되지 않은 채 관계를 맺고, 각자의 차이를 인정하는 경험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윤리의 토대가 된다. 우리는 앞으로도 타인의 삶을 바라보고, 자신을 보여주며, 그 시선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헤아릴 것이다. 그러나 삶의 모든 순간이 누군가에게 증명될 필요는 없다. 한 사람의 세계는 그가 오래 바라본 것들과 기꺼이 나누어준 시간, 서로에게 허락한 자리들로 이루어진다. 화면에서는 수많은 이미지가 빠르게 사라지지만, 함께 나눈 대화는 한 사람의 생각을 바꾸고, 오래 지속한 관심은 하루의 리듬을 만든다. 그렇게 축적된 일상의 세부들이 저마다 다른 생애의 무늬를 이룬다.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삶은 자신의 고유한 시간을 이어간다. 그 시간을 충분히 감각하며 다른 존재의 삶을 이해할 자리를 마련하는 일. 환상사회의 한가운데서도 우리가 지켜낼 수 있는 현실은 바로 그곳에서 자라난다.<br/><br/>✏️한겨레출판으로부터 하니포터 13기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273/42/cover150/k59213138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2734270</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21세기 최고의 스릴러 - [나를 찾아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61456</link><pubDate>Thu, 08 Oct 2026 20:4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6145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1848723&TPaperId=1756145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445/69/coveroff/s00213013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1848723&TPaperId=1756145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를 찾아줘</a><br/>길리언 플린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13년 03월<br/></td></tr></table><br/>불행에도 예절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지어야 할 표정과 슬픔을 표현하는 적절한 방식, 타인의 위로에 응답하는 목소리의 높낮이까지. 비극을 겪은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감당하는 동시에 그것이 진짜 고통임을 증명해야 한다. 카메라 앞에서 흘리지 못한 눈물은 의심을 사고, 무심코 지은 웃음은 인격을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슬픔의 진정성은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의 내부에서 발생하지만, 그 진정성을 승인하는 권한은 어느새 타인의 손으로 넘어간다.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는 이러한 감정의 사회적 규율을 예리하게 포착하며, 한 인간의 삶이 타인의 해석에 의해 얼마나 쉽게 재편되는지 보여준다.<br/><br/>결혼 5주년 아침, 아내 에이미가 사라진다. 남편 닉은 아내의 행방을 알지 못하고, 경찰은 집 안에 남겨진 흔적들을 조사한다. 실종 사건은 곧 전국적인 관심을 받으며, 닉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건을 해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가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결혼생활은 행복했는지,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질문들은 실종된 사람의 행방에서 살아 있는 사람의 내면으로 방향을 바꾼다. 사적인 관계의 역사는 공적인 검증의 대상이 되고, 한 사람의 성격과 습관은 범죄의 가능성을 가늠하는 자료가 된다. 닉에게 요구되는 것은 사건에 관한 설명뿐 아니라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에 대한 증명이다. 인간의 얼굴에는 감정의 흔적이 드러나지만, 그 흔적을 읽는 방식에는 관찰자의 기대가 개입한다. 같은 침묵도 누군가에게는 충격으로, 다른 누군가에게는 무관심으로 받아들여진다. 슬픔의 표준을 벗어난 반응이 의심받는 까닭은 우리가 감정을 특정한 표정과 연결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은 언제나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감정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플린은 이 간극을 이용해 인간이 타인을 판단할 때 얼마나 많은 부분을 추측으로 채우는지 드러낸다. 얼굴은 누구에게나 보이지만, 그 얼굴의 의미는 보는 사람의 경험과 욕망에 따라 달라진다. 가장 공개적인 신체의 일부가 가장 사적인 오해를 생산하는 셈이다.<br/><br/>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상대의 현재보다 그에 관해 축적해온 기억을 먼저 읽는다. 부부는 서로의 습관과 취향을 알고, 일상의 사소한 변화를 알아차리며, 오랜 시간을 공유한다. 그러나 함께 보낸 시간의 길이가 상대를 이해하는 깊이와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다. 익숙함은 관찰을 생략하게 만들고, 이미 알고 있다고 믿는 성격은 새로운 행동을 해석하는 기준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오래 바라볼수록 그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 역시 굳어진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상대가 실제로 어떤 말을 하는지보다 그가 평소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근거로 말을 이해한다. 친밀함이 깊어질수록 타인을 새롭게 발견하는 능력은 오히려 둔해질 수 있다.<br/><br/>연애의 시작에서 인간은 자신을 가장 매력적인 형태로 제시한다. 좋아하는 사람의 농담에 조금 더 크게 웃고, 관심 없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불편한 성격을 적당히 감춘다. 관계를 맺기 위해 이루어지는 이러한 조정에는 상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작용한다. 어빙 고프먼이 사회적 상호작용을 무대에 비유했듯, 우리는 타인 앞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표현하고 그 표현에 대한 반응을 살핀다. 고프먼의 관점에서 자아는 타인과 분리된 채 완성되는 실체라기보다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조율되는 사회적 구성물이다. 무대 위의 배우가 관객의 반응을 의식하듯, 인간 역시 자신에게 기대되는 역할을 수행하며 그 역할에 걸맞은 인상을 유지하려 한다. 문제는 사랑받기 위해 선택한 모습이 어느 순간 상대에게 약속된 성격처럼 취급된다는 데 있다. 처음에는 호의였던 행동이 의무가 되고, 자발적인 배려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조건으로 굳어진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만들어낸 가장 좋은 모습이 이후의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나를 찾아줘』의 결혼생활에도 서로가 기대하는 역할의 무게가 짙게 실려 있다. 닉과 에이미가 기억하는 과거에는 서로에게 매혹되었던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과거의 매력은 시간이 흐르며 현재의 불만을 측정하는 척도가 된다. 경제적 불안과 생활환경의 변화는 두 사람의 관계에 새로운 조건을 부여하고, 한때 사랑했던 성격은 다른 맥락에서 불편한 특성으로 읽힌다. 여기서 결혼의 시간은 두 사람이 함께 변화해온 역사이면서 서로의 변화를 평가해온 기록이기도 하다. 상대가 달라졌다는 불만에는 자신이 사랑했던 모습을 계속 유지해주기를 바라는 욕망이 숨어 있다. 인간이 변한다는 당연한 사실이 사랑 안에서는 종종 배신처럼 받아들여진다.<br/><br/>사랑에는 상대를 알고 싶어 하는 욕망과 상대에게 알려지고 싶은 욕망이 공존한다. 우리는 자신의 복잡한 내면을 누군가가 알아봐 주기를 바라면서도, 그가 자신을 단정하는 순간 답답함을 느낀다. 타인의 이해를 갈망하면서 동시에 그 이해의 한계에 저항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온전히 이해받고 싶다는 소망에는 자신조차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기대가 숨어 있다. 그러나 타인의 이해가 완전해지는 순간을 상상할수록, 그 이해 속에서 허용되지 않을 자신의 가능성 또한 의식하게 된다. 가장 친밀한 사람에게도 설명되지 않는 영역은 존재한다. 서로의 삶을 공유한다는 사실은 그 영역에 접근할 기회를 제공할 뿐, 그것을 소유할 권리까지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관계에서는 이러한 구분이 쉽게 흐려진다. 상대를 잘 안다는 확신은 그가 자신의 예상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기대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br/><br/>플린은 이러한 사적인 확신이 사회적 판단과 만나는 과정을 냉소적으로 그려낸다. 실종 사건을 보도하는 언론은 닉의 말과 행동을 선택하고 배열하며, 대중은 그 장면들을 통해 한 인간의 도덕성을 평가한다. 몇 초간의 웃음과 침묵, 카메라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의 내면을 설명하는 자료로 소비된다. 개인의 감정은 화면에 적합한 길이와 형태로 편집되고, 복잡한 관계의 역사는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로 정돈된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불행을 목격하면서 동시에 그 불행을 해석하는 즐거움에 참여한다. 사건의 진상을 기다리는 인내보다 누가 어떤 인간인지 먼저 규정하는 만족감이 앞서기도 한다. 오늘날 이러한 판단은 짧게 편집된 영상과 온라인 댓글을 통해 더욱 빠르게 확산된다. 하나의 표정이 맥락을 잃은 채 유통되고, 반복된 의혹은 어느새 검증된 사실과 비슷한 무게를 얻는다. 판단에 참여하는 사람은 늘어나지만 그 판단에 책임지는 사람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br/><br/>그 과정에서 언론이 제공하는 것은 정보와 함께 인물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어떤 장면을 먼저 보여주는지, 누구의 말을 인용하는지, 어느 표정을 반복해서 재생하는지에 따라 대중의 판단은 달라진다. 푸코가 진실의 생산과 권력의 관계를 논의했듯,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진실은 그것을 전달하고 승인하는 구조와 분리되기 어렵다. 『나를 찾아줘』에서 공적인 시선은 사건을 밝히기 위한 감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개인의 삶을 일정한 서사에 맞춰 해석하도록 압박한다. 진실을 알고 싶다는 욕망은 때로 한 사람을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축소하려는 욕망과 결합한다. 사람들은 복잡한 현실보다 인과관계가 분명한 이야기를 더 쉽게 믿는다.<br/><br/>소설의 형식은 이러한 인간의 인식 습관을 독서의 과정으로 옮겨놓는다. 닉의 현재와 에이미의 과거가 교차하면서 독자는 두 사람이 공유했던 시간을 서로 다른 언어로 접한다. 하나의 결혼생활은 각자의 기억 속에서 다른 순서와 무게를 얻는다. 같은 사건도 그것을 설명하는 목소리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고, 독자는 어느 진술에 더 설득되는지 끊임없이 선택하게 된다. 플린은 정보를 제한하고 시점을 교차시키는 방식으로 독자의 판단을 유도한다. 독자는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면서도 자신이 어떤 인물에게 호감을 느끼고 어떤 태도를 의심하는지 확인하게 된다. 독자는 소설의 심판석에 앉아 있다고 믿지만, 자신이 내린 판결의 근거 또한 작가가 배치한 언어와 장면에서 빌려온 것이다. 심리 스릴러의 긴장은 단서가 축적되는 속도와 판단이 뒤집힐 가능성 사이에서 형성된다. 독자는 사건의 전말을 알고 싶어 하지만, 그 욕망은 이미 알고 있는 정보로 이야기를 완성하려는 조급함을 동반한다. 길리언 플린은 이 조급함을 서사의 동력으로 삼는다. 독자의 확신이 서사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순간, 추리의 즐거움에는 자신의 판단을 의심해야 하는 불편함이 스며든다.<br/><br/>『나를 찾아줘』라는 제목에는 한 사람의 행방을 찾는 사건의 표면과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겹쳐 있다. 우리는 타인의 기억 속에서 하나의 인물로 존재하지만, 그 기억이 자신의 전부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해받고 싶다는 소망과 그가 이해한 모습에 갇히고 싶지 않다는 욕망은 한 사람의 내부에서 동시에 작용한다. 타인에게 발견되기를 바라면서도 그가 부여한 의미만으로 자신의 존재가 완성되는 것을 경계하는 인간의 모순이 그 안에 있다. 길리언 플린은 가장 가까운 관계를 통해 인간이 타인의 삶을 얼마나 성급하게 해석하고, 그 해석을 얼마나 쉽게 진실로 받아들이는지 드러낸다. 누군가를 오래 사랑했다는 사실은 그 사람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뜻일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다는 것과 한 인간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 사이에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은 삶의 영역이 존재한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445/69/cover150/s00213013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4456935</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헤아릴 수 없는 - [지옥에서의 짧은 체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59056</link><pubDate>Wed, 07 Oct 2026 15:0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5905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476805&TPaperId=1755905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69/58/coveroff/895447680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476805&TPaperId=1755905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지옥에서의 짧은 체류</a><br/>스티븐 L. 펙 지음, 김항나 옮김 / 자음과모음 / 2026년 09월<br/></td></tr></table><br/>지옥에도 출구가 있다면 희망을 품어도 좋을까. 자신이 살아온 모든 순간이 정확하게 기록된 단 한 권의 책을 찾으면 이곳을 떠날 수 있다. 그 책은 분명 존재한다.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도 확실하다. 다만 서가의 규모가 인간의 상상력을 아득하게 넘어선다는 것이 문제다. 스티븐 L. 펙의 『지옥에서의 짧은 체류』가 만든 지옥에는 불길도 형벌을 집행하는 고문관도 필요하지 않다. 원하는 음식과 잠자리를 누릴 수 있고 죽음조차 영속적인 끝이 되지 못한다. 그곳에서 인간을 괴롭히는 것은 오히려 희망이다.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면 체념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언젠가는 발견할 수 있다는 약속은 끊임없이 다음 책을 펼치게 한다. 출구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 사이에서 희망은 서서히 형벌의 모습을 얻는다.<br/><br/>이 기묘한 지옥에서 소런이 찾아야 하는 책은 그의 삶을 완벽하게 기록하고 있다. 살아온 모든 순간과 행동이 한 글자의 오류도 없이 적혀 있다면 그것을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우리는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같은 기억조차 시간이 흐르면 다른 의미를 얻고, 과거의 선택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지금의 자신에 따라 달라진다. 폴 리쾨르가 정체성을 하나의 완결된 실체보다 삶을 이야기하고 다시 해석하는 과정과 연결했던 것처럼, 한 사람의 생은 사건의 총합만으로는 완전히 설명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소런이 찾는 한 권은 그를 가장 정확하게 증명하는 기록인 동시에, 더는 고쳐 쓸 수 없는 과거의 총체이기도 하다. 자신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문장을 갖고 싶다는 욕망에는 기묘한 모순이 따른다. 완벽하게 기록되는 순간 삶은 더 이상 해석될 여지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원을 위해 자신의 삶을 찾아야 한다는 설정은 어느새 자신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문제로 옮겨간다.<br/><br/>도서관의 서가에는 인간이 평생 읽어도 소진할 수 없는 언어의 가능성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이곳에는 정해진 문자와 기호로 만들어질 수 있는 모든 조합의 책이 놓여 있다. 위대한 문학도, 누군가의 진실한 생애도, 그것과 거의 똑같지만 한 글자만 다른 거짓도 함께 존재한다. 대부분의 페이지를 채우는 것은 읽을 수조차 없는 문자의 나열이다. 모든 정보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진실은 오히려 희귀해지고, 의미는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을 떠올리게 하는 이 공간에서 저자는 앎의 풍요를 극단까지 밀어붙여 그 반대편을 보여준다. 책을 사랑하던 소런에게 형벌은 가장 좋아했던 것의 모습을 빌려 찾아온다. 그가 평생 가까이했던 책으로 서가를 가득 채우는 것으로 충분하다.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고를 수 있다는 기쁨은 사라지고, 무수한 책을 펼쳐야만 하는 의무가 독서의 자리를 차지한다. 인간은 그럼에도 문장을 읽고, 우연한 배열에서 자신과 닮은 무언가를 발견하며, 의미 없는 것들 사이에 질서를 만든다. 모든 것이 기록된 도서관조차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진실인지 대신 결정해주지는 못한다. 결국 의미는 세계에 얼마나 많은 정보가 존재하는가보다 그 가운데 무엇을 자신의 것으로 읽어내는가와 깊이 연결된다.<br/><br/>책을 찾는 이야기는 점차 사람을 찾고 관계를 지속하는 일의 의미까지 헤아리게 한다. 소런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긴 시간을 지나며 여러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다. 우리가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감각에는 언제나 시간이 포함되어 있다. 함께 늙어가는 일, 기억을 쌓는 일, 다음 계절을 약속하는 일처럼 사랑은 유한한 생의 방향 위에서 형태를 얻는다. 그러나 소런이 살아가는 세계에는 함께 늙어갈 육체도, 마지막을 예감하며 서로의 손을 잡을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다.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허락되었는데도 사랑하는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순간은 한없이 불확실하다. 오래도록 함께했다는 사실이 앞으로도 함께할 수 있다는 보증이 되어주지 않는 곳에서, 사랑은 지속된 시간만큼이나 닿을 수 없는 거리의 무게를 갖는다. 타인의 존재를 온전히 이해하고 자신의 세계 안에 담아두려는 욕망은 언제나 그 사람의 고유한 삶과 마주한다. 이 거대한 서가는 타인에게 도달한다는 일이 본래 품고 있던 불가능성을 공간과 시간의 크기로 펼쳐 보인다.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탐색과 타인에게 향하는 움직임은 그렇게 서로의 모습을 조금씩 닮아간다.<br/><br/>무한처럼 펼쳐지는 서가 앞에서는 인간이 사용해온 시간과 크기의 단위도 차츰 힘을 잃는다. 저자는 이 공간을 막연히 ‘아주 크다’고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자 수와 페이지, 가능한 조합을 계산하며 수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숫자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는 뜻과 다르다. 어떤 수는 분명 유한하면서도 인간의 생애와 감각 안에서는 무한과 구별되지 않는다. 칸트는 인간의 상상력이 감당하기 어려운 압도적인 크기를 마주할 때 발생하는 경험을 ‘수학적 숭고’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우리는 거대한 대상을 부분적으로 헤아릴 수 있지만, 그것을 하나의 완전한 모습으로 떠올리는 데에는 한계를 느낀다. 이때 감각과 상상력의 한계를 자각하는 동시에, 그 크기를 사유할 수 있는 이성의 능력까지 의식하게 된다. 『지옥에서의 짧은 체류』는 그 압도적인 크기 속에 인간을 실제로 집어넣는다. 그 순간 백 년과 천 년은 더 이상 장구한 세월을 뜻하지 못하고, 우리가 영원처럼 사용하던 표현들은 하나씩 인간적인 척도를 잃는다. 무한 자체보다 두려운 것은 어쩌면 끝을 상정할 수 있으면서도 그 끝까지의 거리를 살아 있는 존재의 감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다는 사실인지도 모른다.<br/><br/>소런은 자신이 평생 믿었던 세계의 질서가 죽음과 동시에 뒤집히는 경험을 한다. 새로운 진리가 제시된 뒤에도 그것이 정말 마지막 진실이라고 확신할 근거는 없다. 신앙이 무너진 자리에 또 다른 확신을 세우기보다, 알 수 없는 상태를 견디며 계속 한 권의 책을 향해 움직여야 한다. 세계가 자신의 의미를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을 때에도 인간은 관계를 맺고, 이야기를 만들고, 무의미한 문자에서 읽을 수 있는 한 줄을 찾아낸다. 지옥의 거대한 도서관은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작은 존재가 의미를 만드는 일을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도 함께 보여준다.<br/><br/>그 모든 시간을 지나고도 제목은 여전히 『지옥에서의 짧은 체류』다. ‘짧다’는 말이 이토록 섬뜩하게 들리는 경우도 드물다. 인간의 생애를 몇 번이고 포개고도 남을 시간을 짧다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 너머에 영원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영원을 살아본 적이 없고, 영원을 기준으로 현재의 고통을 측정할 수도 없다. 언젠가 도달할 구원이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지금 견디고 있는 시간을 얼마나 가볍게 만들 수 있는지도 확신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 제목은 거대한 시간의 농담처럼 읽히면서도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에 아주 가까이 닿아 있다. 한 권의 책을 찾기 위해 펼쳐야 하는 수많은 페이지에는 소런이 살아온 시간보다 훨씬 긴 세월이 쌓여간다. 자신의 삶을 증명할 기록을 찾아 헤매는 동안에도 그는 새로운 기억을 만들고,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알던 세계의 바깥을 경험한다. 삶을 온전히 담아낼 한 권의 책을 찾아야 하는 운명 속에서 그의 생은 이미 그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지나 계속 쓰이고 있다. 그리하여 가장 완벽한 기록을 향한 탐색은 역설적으로 기록될 수 없는 삶의 현재를 드러낸다. 한 사람의 생애를 설명하는 모든 문장이 마련되어 있다 해도, 그 문장을 읽는 순간의 인간은 이미 또 다른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br/><br/>✏️도서출판 자음과모음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69/58/cover150/895447680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1695875</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욕망을 읽을 수 있는 하나의 언어 - [질투 수련 - 내게 없는 것으로 삶과 맞서는 법]</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55663</link><pubDate>Mon, 05 Oct 2026 16:3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5566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52131667&TPaperId=1755566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68/93/coveroff/k65213166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52131667&TPaperId=1755566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질투 수련 - 내게 없는 것으로 삶과 맞서는 법</a><br/>이예지 지음 / 세미콜론 / 2026년 09월<br/></td></tr></table><br/>질투는 타인의 것을 바라보는 감정이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들키는 감정이다.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순간에는 그 사람이 가진 것을 탐내는 마음과 내가 갖지 못했다는 결핍의 감각이 동시에 일어난다. 그래서 질투는 대개 감추거나 다스려야 할 감정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감정에 선악의 이름을 붙이기 전에 그 안을 잠시 들여다보면 조금 다른 것이 보인다. 누구에게 마음이 흔들리는지, 그의 무엇이 유독 부러운지 따라가다 보면 욕망은 구체적인 방향을 갖는다. 질투는 타인을 바라보며 시작되지만 그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언제나 자신이 있다. 『질투 수련』은 타인을 향한 곁눈질을 자기 안으로 꺾어보며, 부끄러워 숨겨온 감정에서 욕망의 모양을 읽어낸다.<br/><br/>세상 온갖 만물에 질투를 느끼는 사람으로서 나는 무엇을 가장 질투하는가. 타인을 향하던 시선을 거두어 나에 대해 생각한다. 재능과 성취, 단단한 취향과 자기 확신까지 부러운 것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질투의 근원을 따라 마음속 깊은 곳까지 내려가면 질투하지 않는 사람을 가장 질투하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누군가의 좋은 일을 자신의 결핍으로 환산하지 않는 사람, 타인의 몫이 커졌다고 자신의 자리가 작아졌다고 느끼지 않는 사람. 그들에게서 가장 부러운 것은 타인의 기쁨을 온전히 기쁨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다. 그런 사람을 질투한다는 사실 자체가 결국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려준다.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타인이 가진 것 때문에 내가 가진 것의 크기를 다시 재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br/><br/>이예지가 질투하는 사람들을 따라가다 보면 비슷한 원리가 반복된다. 그레타 거윅에게서는 남은 생의 시간을 헤아리며 작업을 이어가는 야심을, 원소윤에게서는 삶의 불행을 농담으로 바꾸는 낙천성을, 김애란에게서는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는 문학적 상상력을 바라본다. 홍세화의 똘레랑스와 이불의 ‘취약할 의향’에 이르면 질투의 대상은 더욱 선명해진다. 그가 부러워하는 것은 타인이 소유한 무엇보다 삶을 대하는 태도와 세계 앞에 자신을 놓아두는 방식이다. 타인의 재능을 바라보던 시선은 ‘저것을 갖고 싶다’는 욕망을 지나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감정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처럼 감정에 휩쓸리는 일과 다른 차원의 움직임을 만든다. 무엇이 나를 흔드는지 알아보는 순간, 막연했던 질투는 자신의 욕망을 읽을 수 있는 하나의 언어가 된다.<br/><br/>하지만 질투가 가리키는 방향을 곧장 ‘나의 욕망’이라고 믿기에는 우리의 시선이 너무 많은 타인에게 노출되어 있다. 우리는 삼성그룹 회장이 사용하는 립밤의 브랜드까지 알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참고로 그 립밤은 소프트립스였다.— 손바닥만 한 화면에는 타인의 집과 여행, 몸과 옷, 성공과 행복이 쉬지 않고 흘러든다. 그 모습을 충분히 오래 바라보다 보면 이전에는 존재조차 몰랐던 것을 원하게 된다. 르네 지라르는 인간의 욕망이 다른 사람의 욕망을 모방하며 형성된다고 보았다. 대상의 가치가 욕망을 먼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것을 욕망한다는 사실이 그 대상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다. 그래서 욕망의 장면에는 늘 ‘나’와 ‘대상’ 외에 그것을 먼저 바라보고 있던 타인이 끼어든다. 오늘의 플랫폼과 광고는 이 삼각형을 무수히 복제한다. ‘너도 이것을 바라지?’라는 속삭임이 반복되는 동안 타인의 욕망은 어느새 나의 욕망처럼 자리 잡는다. 질투는 이처럼 지극히 사적인 감정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시대가 욕망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 무엇을 부러워하는지 살펴보는 일은 그러므로 한 번의 의심이 더 필요하다. 지금 원하는 것은 어디까지 나의 것이며, 어디부터 타인의 삶을 오래 바라본 끝에 배운 것인가.<br/><br/>타인을 바라보는 일이 꼭 비교와 경쟁으로만 흐르지는 않는다. 김애란의 문학에서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는 상상력을 발견하고, 카우타르 벤 하니야의 작업을 통해 멀리 떨어진 고통을 자신의 세계 안으로 들이며, 홍세화에게서는 혐오보다 분노를, 분노보다 연대를 택하는 태도를 바라본다. 질투의 시선은 어느 순간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선과 포개진다. 다른 사람의 자리에 완전히 서볼 수 없다는 사실은 오히려 상상력을 요청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거리를 함부로 지우지 않은 채 가까워지려는 태도. 비교의 순간 나를 작아 보이게 했던 바로 그 타인이, 어느 순간 혼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삶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를 바라보는 동안 나라는 세계의 경계 역시 이전보다 조금 넓어진다.<br/><br/>그래서 “나는 내가 질투해온 것들의 총합이자, 동시에 그것에 반발해온 저항들의 총체”(274쪽)라는 고백은 질투에 관한 이야기를 정체성의 문제까지 확장한다. 인간의 자아에는 생각보다 많은 타인의 흔적이 섞여 있다. 누군가의 태도를 동경해 조금씩 닮아가고, 닮고 싶지 않은 사람을 보며 삶의 방향을 틀기도 한다. 그렇게 동경은 모방으로, 거부감은 저항으로 옮겨가며 한 사람의 선택 속에 축적된다. ‘나답다’고 믿는 것조차 수많은 관계와 영향 사이에서 고르고 버린 것들의 오랜 배열일 수 있다. 그렇다면 타인의 흔적은 자아의 순도를 흐리는 불순물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에 저항해왔는지를 기록한 이력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질투 수련』은 서른 명의 타인을 기록하면서 완성된 한 사람의 자화상처럼 읽힌다. 수많은 타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그 사이에서 선명해지는 것은 이예지라는 사람의 윤곽이다.<br/><br/>서른 번의 ‘질투한다’를 지나온 책은 마지막에 다섯 번의 ‘질투하지 않는다’로 방향을 튼다. 원하는 것을 발견하는 일만큼 원하지 않는 것을 알아보는 일 역시 자신을 구성한다. 세상이 부러워하라고 가리키는 방향마다 마음을 내어줄 필요는 없다. 화려한 소비의 세계를 가까이에서 경험하고도 그것을 욕망하지 않을 수 있으며, 모두가 이상적인 삶이라고 말하는 모습 앞에서도 자신의 욕망을 거둘 수 있다. 무엇을 질투할 것인지 선택하는 능력에는 무엇을 더 이상 질투하지 않을 것인지 결정하는 자유까지 포함된다. 외부에서 주어진 욕망을 하나씩 걷어내며 자신이 가치를 두고 싶은 것을 분별하는 일, 그 선택이야말로 책 제목의 ‘수련’이라는 말에 가장 오래 시선이 가게 한다.<br/><br/>이 책을 읽는다고 바로 질투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다시 누군가의 재능을 곁눈질하고, 남의 성취 앞에서 슬며시 나의 몫을 헤아리고, 화면 너머의 삶과 내 삶을 저울 위에 올려놓을 것이다. 모든 시샘에서 아름다운 욕망을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전과 같은 질투가 찾아왔을 때 그 감정에 끌려가는 대신 한 번쯤 그 방향을 들여다볼 수는 있겠다. 무엇을 탐내고 있는지, 누구의 욕망을 빌려온 것인지, 그 사람에게서 정말 부러운 것은 무엇인지. 수련에는 단번에 달라지는 사람보다 같은 마음 앞에 여러 번 서보는 사람의 시간이 필요하다. 한 번 알아차린 감정도 다시 찾아오고, 오래된 비교의 습관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다음번 질투 앞에서는 그것을 숨기는 데 쓰던 마음을 조금 다른 곳에 써보려 한다. 부러워하고 시샘하고 비교하면서도, 그 마음이 보여주는 나를 이전보다 조금 더 오래 바라보는 쪽으로.<br/><br/>✏️도서출판 세미콜론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68/93/cover150/k65213166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1689316</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사랑의 범위가 넓어질 때 슬픔의 영토도 함께 넓어진다 - [신세계의 아이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54004</link><pubDate>Sun, 04 Oct 2026 16:5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5400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52130634&TPaperId=1755400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33/99/coveroff/k35213063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52130634&TPaperId=1755400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신세계의 아이들</a><br/>알렉산더 와인스타인 지음, 임현정 옮김 / 에이유앤씨 / 2026년 08월<br/></td></tr></table><br/>무엇이든 대신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면 인간에게는 무엇이 남을까. 기억을 저장하고 몸을 기계로 보완하며 현실보다 정교한 가상세계를 살아가는 일은 오래전부터 SF가 상상해온 미래다. 『신세계의 아이들』에는 그보다 더 낯선 일들이 수없이 벌어진다. 그러나 기술이 멀리 나아간 만큼 인간까지 새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휴머노이드와 가족을 이루고 가상세계에 자신의 일부를 옮겨놓은 뒤에도 인간은 사랑하는 것을 잃지 않으려 한다. 기억을 더 오래 간직하고 싶고, 사랑하는 존재를 잃고 싶지 않으며, 타인과 더 깊이 연결되고 싶은 마음. 기술은 수십 년을 앞서 있지만 욕망은 몇천 년 전의 인간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하다. 미래와 인간 사이에 벌어진 이 시간차는 『신세계의 아이들』을 더욱 서늘하게 만든다.<br/><br/>이 책에는 미래를 처음 구경하는 사람의 눈이 없다. 누구도 새로운 기술 앞에서 오래 감탄하지 않는다. 이미 그런 것들이 충분히 평범해진 세계에서 밥을 먹고, 연애하고, 아이를 키우고, 돈을 벌고, 누군가와 헤어진다. 와인스타인의 미래는 발명의 순간을 건너뛰고 곧장 습관의 시간으로 들어간다. 한때 세계를 뒤집었을 기술에는 생활의 때가 묻어 있고, 경이로웠을 발명품은 가족의 식탁과 침실, 직장과 연애 안에 아무렇지 않게 놓여 있다. 혁신이 일상이 된 뒤에는 기계의 새로움보다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습성이 도드라진다. 욕심과 외로움, 사랑과 권태도 기술과 함께 미래로 건너간다. 와인스타인은 미래의 발명품보다 그것에 익숙해진 인간에 대해 쓴다.<br/><br/>SF에서 미래는 반드시 예언의 시간이 될 필요가 없다. 아직 오지 않은 세계를 멀리 세워두면 오히려 현재와 인간을 낯설게 바라볼 거리가 생긴다. 『신세계의 아이들』은 그 거리를 꽤 넓게 사용한다. 국내에서 최근 접해온 SF 가운데 인물의 정서와 관계에 무게를 싣는 작품들이 많았다면, 이 책은 기술적 가정을 충분히 확장한 다음 그 변화의 폭만큼 인간의 감정과 윤리, 사회의 형태까지 함께 이동시킨다. 기억 하나를 옮길 수 있게 되었을 뿐이지만 ‘나’의 경계가 흔들리고, 연결의 범위가 넓어지자 친밀함의 의미가 달라진다.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늘어나는 순간 상실의 범위 역시 함께 넓어진다. 기술적 상상은 인간을 밀어내지 않고 오히려 인간에게 더 가까이 접근하기 위한 우회로가 된다. 하드 SF의 사고실험과 소프트 SF의 인간 탐구가 한쪽씩 자리를 나누는 대신, 서로의 깊이를 만들어가는 작품이다. 기술은 인간을 얼마나 바꾸게 될까. 그보다 더 오래 따라오는 물음은, 그렇게 많은 것이 바뀐 뒤에도 인간에게서 무엇이 자꾸 되풀이되는가 하는 것이다.<br/><br/>와인스타인의 기술은 인간이 견뎌온 수많은 ‘어쩔 수 없음’을 하나씩 지운다. 잊는 일, 멀어지는 일, 상대의 마음을 전부 알 수 없는 일 같은 것들. 인간은 그런 한계를 불편해하면서도 그 안에서 관계를 만들어왔다. 신세계에서는 그 경계들이 하나씩 허물어진다. 그러나 타인의 내부가 환히 보인다고 해서 두 사람 사이의 거리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가능성은 친밀함의 극점처럼 보이지만, 완전한 이해에는 상대가 더 이상 발견될 여지가 없다는 역설도 숨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자신이 들어가 본 적 없는 시간이 있고, 들은 적 없는 생각과 기억이 있다. 우리는 그 빈칸을 묻고 기다리며 때로는 잘못 짐작한다. 타인은 이해가 부족해서 타인인 것이 아니라, 아무리 이해해도 전부 나의 것이 될 수 없기에 타인이다. 기술이 없애려던 거리가 오히려 관계를 가능하게 했던 공간으로 되돌아온다.<br/><br/>기억으로 들어가면 경계는 한층 흐려진다. 몸은 하나인데 그 안에 다른 삶의 기억이 들어올 수 있고, 지나갔어야 할 순간은 보존되어 다시 현재로 불려온다. 여기서 기억은 과거의 보관함이라는 익숙한 자리에서 빠져나온다. 겪지 않은 일을 그리워하게 된다면 그 그리움은 누구의 것일까. 사실과 기억이 갈라지고도 감정이 남는다면 어느 쪽을 진짜라고 불러야 할까. 애초에 인간은 자신의 과거를 정확하게 보관하며 살아오지도 않았다. 잊고, 덧붙이고, 같은 일을 시간이 흐른 뒤 전혀 다른 표정으로 기억한다. 와인스타인이 기억에 기술을 섞는 순간 새로 만들어지는 것은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원래부터 불안정했던 ‘나’의 경계가 눈에 보이는 형태를 얻는 일이다. 기술이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전에 정체성은 이미 기억이라는 흔들리는 재료 위에 놓여 있었다.<br/><br/>그 흔들림은 사랑과 상실 앞에서 더욱 커진다.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보다 함께 보낸 시간이 먼저 관계를 만든다면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던 선은 생각보다 쉽게 흐려진다. 누군가의 하루에 자리를 차지하고, 기다림의 대상이 되고, 사라졌을 때 빈자리를 만든 존재라면 그 관계의 실재를 무엇으로 판별할 수 있을까. 이 작품집에서 기술은 사랑할 수 있는 존재를 늘리고, 그와 동시에 애도해야 할 존재도 늘린다. 대체 가능한 것들이 많아질수록 상실까지 가벼워질 것 같지만 오히려 반대의 일이 벌어진다. 복제할 수 있는 존재와 대체할 수 있는 관계는 같은 말이 아니다. 하나의 존재를 구성했던 시간까지 복제할 수 없다면 대체품은 빈자리를 없애기보다 그 모양을 더 정확하게 보여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 작품집의 따뜻함을 기술의 반대편에 따로 놓기는 어렵다. 인간이 아닌 존재를 사랑하게 하고 현실에 없던 관계를 가능하게 한 것도 기술이며, 이전에는 없었던 이별과 고독 역시 같은 가능성에서 태어난다. 사랑의 범위가 넓어질 때 슬픔의 영토도 함께 넓어진다. 차갑게 설계된 미래와 그 안에서 발생하는 온기가 한 장면 안에서 포개지는 순간, 따뜻함과 서늘함도 서로의 경계를 잃는다.<br/><br/>더 오래 살고 싶고, 고통을 줄이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타인의 마음을 알고 싶으며, 행복했던 순간을 잃고 싶지 않은 욕망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 달라지는 것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과 범위다. 기술은 불가능했던 소망을 가능한 것으로 옮겨놓고 인간에게 자신이 원했던 것을 실제로 가져보게 한다. 그런데 와인스타인은 소망의 성취에서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기억을 잃지 않게 된 뒤의 인간, 거리를 없앤 뒤의 관계, 더 많은 존재를 사랑하게 된 이후의 상실을 바라본다. 원하는 것을 얻은 자리에는 충만보다 다음 욕망이 먼저 도착한다. 결핍이 욕망을 만드는 것인지, 욕망하는 인간이 계속해서 새로운 결핍을 발명하는 것인지 경계가 흐려진다. 신세계는 인간의 부족함을 채워가면서 동시에 부족함의 종류를 늘린다.<br/><br/>이쯤에서 기술을 모든 불행의 원인으로 세우는 일은 지나치게 쉬운 독법이 된다. 와인스타인의 시선이 매서워지는 순간은 오히려 기술 뒤로 숨었던 인간이 다시 앞으로 나올 때다. 사랑받고 싶은 욕망 곁에는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있고, 연결되고 싶은 마음 곁에는 타인을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통제하려는 마음이 있다. 더 나은 기술이 더 나은 인간을 자동으로 만들지 않듯, 기술이 사라진 자리에서 인간이 본래의 선함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문명이 모습을 바꾸어도 사람은 다시 무리를 만들고, 경계를 긋고, 누군가를 돌보는 동시에 누군가를 밀어낸다. 기술이 미래의 것이라면 그 기술을 사용하는 욕망은 지독할 만큼 인간의 것이다.<br/><br/>이 때문에 『신세계의 아이들』을 디스토피아라는 말 하나로 묶기에도 조금 아까워진다. 이곳의 불안은 기술이 인간을 정복하는 장면보다 인간의 소원을 너무 충실하게 들어주는 순간에 더 짙어진다. 기억하고 싶다는 바람, 연결되고 싶다는 바람, 잃고 싶지 않다는 바람에는 아무런 악의가 없다. 문제는 그것들이 한계 없이 실현되었을 때 나타난다. 와인스타인의 신세계는 인간에게 금지된 세계라기보다 너무 많은 것이 허락된 세계다. 억압보다 충족이, 결핍보다 과잉이 인간을 낯설게 만드는 미래. 기술은 인간의 욕망을 새로 만들어내는 괴물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욕망이 이전보다 훨씬 멀리 갈 수 있도록 반경을 넓힌다.<br/><br/>모든 것을 대체할 수 있는 신세계에서도 대체되지 않는 하나의 고결한 본질이 남아 있다고 말하기에는 인간은 훨씬 복잡하다. 사랑하고 애도하는 마음과 소유하고 배제하는 마음이 한 존재 안에 함께 산다. 누군가에게 닿고 싶어 하면서 그 사람을 자신의 이해 안에 넣으려 하고, 사라지는 것을 견디지 못해 기억을 보존하면서 그 기억에 갇히기도 한다. 몇 겹의 미래를 통과한 뒤에도 사랑과 욕망, 다정함과 잔혹함은 새로운 형태를 얻어 인간에게서 다시 나타난다. 그것들을 아름다운 본질이라고 부르기에는 서로 너무 모순되어 있고, 결함이라고만 부르기에는 그 안에서 사랑과 돌봄 역시 태어난다. 기술은 이 모순을 발명하지도 해결하지도 않은 채, 인간이 품고 있던 것들이 움직일 수 있는 세계만 훨씬 넓혀놓는다. 기술은 인간을 얼마나 바꾸게 될까. 『신세계의 아이들』을 지나며 질문의 방향이 조금 뒤집힌다. 이토록 많은 것이 바뀌어도 인간은 왜 계속 인간인 채로 남는가. 그 익숙함이 따뜻하고, 동시에 서늘하다.<br/><br/>✏️영화사 찬란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33/99/cover150/k35213063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0339958</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흩어져 있는 것들의 사이 - [알갱이들 - 제6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52415</link><pubDate>Sat, 03 Oct 2026 16: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5241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52131279&TPaperId=1755241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97/70/coveroff/k85213127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52131279&TPaperId=1755241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알갱이들 - 제6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a><br/>황보나 지음 / 사계절 / 2026년 09월<br/></td></tr></table><br/>누군가가 사라지고 나면 과거가 뒤늦게 부산해진다. 별뜻 없이 건넨 말은 의미심장해지고, 평범했던 표정에는 보지 못한 기색이 생긴다. 마지막 만남은 몇 번이고 되감기며 사소한 몸짓까지 증거가 된다. 살아 있을 때에는 그냥 지나쳤던 순간들이 죽음 이후에는 모두 설명을 요구한다. 황보나의 『알갱이들』에서 정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정미의 시간은 그런 방식으로 계속 움직인다. 언니 유미는 동생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현비를 찾아오고,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현비는 번번이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모른다. 정말 모르겠다.<br/><br/>누군가를 오래 알았다는 사실은 그 사람의 내부까지 오래 들여다보았다는 뜻이 되지 못한다. 우정도 사랑도 타인의 마음에 대한 열람권을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죽음 앞에서는 이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유난히 어렵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내일 다시 물어볼 수 있지만 죽은 사람에게는 그럴 수 없어서, 남겨진 기억만으로 그의 마지막 마음을 복원하려 한다. 정미의 죽음에 어떤 원인을 붙이는 순간 이야기는 매끄러워질 것이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고, 그래서 그런 선택을 했다는 식으로. 매끄러운 이야기는 이해하기 편하지만 한 사람의 생은 그보다 훨씬 울퉁불퉁하다. 원인 몇 개를 찾아냈다는 이유로 그의 가장 내밀한 선택까지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br/><br/>현비의 모름에는 무책임보다 어떤 절제가 있다. 모르는 자리를 견디지 못해 그럴듯한 말로 메우는 대신, 현비는 계속 모르는 사람으로 남는다. 이런 태도는 타자를 이해의 대상으로 완전히 포획하지 않으려 했던 레비나스의 사유를 떠올리게 한다. 타자는 내가 충분히 이해하면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지식의 대상이 아니며, 나의 언어와 인식 바깥을 언제나 남겨두는 존재다. 그렇다면 타인을 존중하는 일에는 이해하려는 노력만큼이나 이해의 한계를 인정하는 태도도 포함되어야 한다. 죽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대답할 수 없는 사람의 삶을 살아 있는 사람의 언어만으로 완성해버리지 않는 것. 『알갱이들』은 그 빈칸을 성급히 채우지 않는다.<br/><br/>하지만 모름은 좀처럼 그대로 놓여 있지 못해서, 남은 사람의 기억은 자꾸 그 빈자리를 향한다. 자살 사별을 다룬 Chris Shields, Michele Kavanagh, Kate Russo의 체계적 문헌고찰은 11편의 질적 연구를 분석하며, 사별자들의 경험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감정과 행위를 추적했다. 그 과정에서 두드러진 것은 죄책감과 비난, 공허뿐 아니라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였다. 사별자는 고인이 살아 있을 때의 행동과 관계를 다시 검토하고 죽음으로 이어졌을 법한 단서를 찾는다. 기억은 더 이상 지나간 일을 보관하는 장소에 그치지 않고 원인을 수색하는 장소가 된다. 무엇이 그 사람을 죽음으로 데려갔는지 알 수 있다면 놓쳐버린 과거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과거를 이해하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조금은 예측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므로 ‘왜’는 죽은 사람에게만 향하는 물음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을 겪고도 계속 살아야 하는 사람이 무너진 세계의 질서를 복구하기 위해 되풀이하는 말이기도 하다.<br/><br/>이유 찾기는 쉽게 자기 심문으로 번진다. 가까이 있었는데 왜 몰랐을까. 그때 조금 더 물었다면 달라졌을까. 마지막에 했던 말을 바꾸었다면.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수많은 가정법이 죽음 뒤에서 생겨난다. 사랑했던 기억까지 증거물처럼 뒤집어보게 되는 시간. 죄책감에는 슬픔만큼이나 인간의 통제 욕구가 깊숙이 섞여 있다. ‘내가 막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은 고통스럽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에게 사건을 바꿀 힘이 있었다는 전제를 품는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타인은 모든 고통을 알 수 없고 한 사람의 생을 대신 지켜낼 수도 없었다는 사실은 그보다 훨씬 막막하다. 사랑의 크기와 책임의 크기가 반드시 같지는 않은데, 죽음은 그 둘의 경계를 자꾸만 흐린다.<br/><br/>그래서 이 소설은 정미에게서 답을 받아내는 대신 남은 사람들의 시간을 오래 바라본다. 슬픔을 얼마나 드러내야 충분히 슬퍼한 것인지, 다시 웃거나 다른 사람을 만나면 죽은 이를 덜 사랑한 것인지, 일상이 돌아오기 시작하면 애도가 끝났다고 말해도 되는지. 상실 뒤의 삶에는 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 사이의 문제만큼이나 살아남은 사람이 자기 삶을 다시 허락하는 문제가 있다. 황보나는 그 허락을 성대한 결심으로 만들지 않는다. 인간은 여전히 밥을 먹고, 걷고, 누군가를 만나며, 어제 했던 일을 또 한다. 죽음을 겪었다고 해서 하루의 단위까지 장엄해지는 것은 아니다. 사소함이 계속된다는 사실은 오히려 생을 이상할 만큼 질기게 만든다.<br/><br/>제6회 박지리문학상 심사평들이 이 작품의 ‘알 수 없음’을 거듭 짚은 이유도 이 태도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박지리문학상은 박지리의 작품이 보여준 인간 본질과 사회를 향한 시선과 통찰을 기억하며 새로운 소설을 발굴하기 위해 시작되었고, 『알갱이들』은 그 마지막 수상작이 되었다. 한 청소년의 자살을 다루면서도 원인을 극적으로 발굴하거나 사회적 교훈으로 정돈하지 않는 선택은 그래서 더욱 눈에 들어온다. 죽음을 소재로 삼는 일보다 어려운 것은 죽음 앞에서 작가가 가진 설명의 권한을 스스로 제한하는 일일 것이다. 인간을 쉽게 설명하지 않는 것과 인간을 오래 바라보는 일은 함께 갈 수 있다는 듯이.<br/><br/>남겨진 사람의 삶을 ‘회복’이라는 말로 부르는 것도 조금 망설여진다. 회복에는 은근히 원래의 자리라는 목적지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통과한 뒤에도 돌아갈 수 있는 원래의 내가 남아 있을까. Rebecca Goodall, Karolina Krysinska, Karl Andriessen은 자살 사별 이후의 ‘지속되는 유대(continuing bonds)’를 다룬 체계적 문헌고찰에서 15편의 연구(질적 연구 13편, 양적 연구 2편)를 검토했다. 그 결과 사별자들은 고인과의 관계를 끊어내기보다 기억하기, 이야기하기, 유품이나 장소를 통한 연결, 내면의 대화처럼 여러 형태로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연구자들이 특히 강조하는 것은 이런 유대의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어떤 연결은 위안이 되고 어떤 연결은 고통을 지속시키며, 같은 사람에게도 시간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애도는 고인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놓아주었는지를 측정하는 단선적인 과정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죽은 이를 기억하는 일과 자신의 삶을 계속하는 일 사이에 굳이 승패를 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정미를 생각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슬퍼하면서도 웃을 수 있으며, 어떤 날에는 오래 기억하고 어떤 날에는 잠시 잊을 수 있다. 그 어느 쪽도 앞선 마음을 취소하지 않는다. 상실 이후의 삶은 죽은 이를 마음에서 덜어내며 이전의 크기로 돌아가는 과정보다, 그의 부재까지 들어갈 자리를 새로 만드는 쪽으로 움직인다. 그 자리가 생기면서 사람 역시 전과 다른 모양이 된다.<br/><br/>다시 제목을 입 안에서 가만히 굴려본다. 알갱이들. 단수가 아닌 복수로 놓인 이 말에는 처음부터 하나로 모이지 않는 마음들이 들어 있었던 것 같다. 알갱이는 너무 작아서 하나만으로는 전체의 모양을 알 수 없고, 여럿을 손에 올려놓아도 서로의 틈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정미를 기억하는 마음도 그와 닮아 있다. 설명할 수 있는 것과 설명할 수 없는 것, 선명하게 남은 것과 어느새 희미해진 것이 한데 섞인 채 각기 다른 무게를 가진다. 기억은 그렇게 고르게 남지 않는다. 어떤 것은 오래도록 손끝에 걸리고, 어떤 것은 이름조차 붙이기 전에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남겨진 사람은 그 불균질한 조각들을 가진 채 떠난 사람을 기억할 수밖에 없다. 그중 무엇을 집어 들어 정미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한 사람을 기억한다는 건 어쩌면 그 모든 조각을 하나의 모양으로 맞추지 않는 일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무엇을 남겨두어야 한 사람을 너무 많이 설명하지 않은 것이 될까. 『알갱이들』을 읽는 동안 완성되지 않은 채 흩어져 있는 것들의 사이를 오래 들여다보게 된다.<br/><br/>✏️도서출판 사계절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97/70/cover150/k85213127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1977029</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어떤 장면은 볼 수 없다는 사실까지 함께 보아야 한다 - [우리가 보고 있지 않았던 장면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50763</link><pubDate>Fri, 02 Oct 2026 15:4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5076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474934&TPaperId=1755076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74/34/coveroff/895447493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474934&TPaperId=1755076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우리가 보고 있지 않았던 장면들</a><br/>임솔아 지음 / 자음과모음 / 2026년 09월<br/></td></tr></table><br/>한 사람의 생에는 목격자가 없는 시간이 얼마나 많던가. 문이 닫힌 뒤에도 하루는 계속되고, 전화를 끊은 뒤에도 마음은 한동안 그 자리에 남는다. 함께 있었다고 기억하는 날조차 서로에게 같은 하루였다는 보장은 없다. 우리는 그중 몇 장면을 얻는다. 한때 보았던 표정, 오래 기억한 말, 함께 지나온 장소. 그리고 그것들을 이어 한 사람을 기억한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빈칸은 쉽게 잊힌다. 오래 보았다는 이유로 많이 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br/><br/>임솔아의 소설에는 그 빈칸이 있다. 장면과 장면 사이, 기억과 기억 사이, 내가 본 것과 그 사람이 실제로 살아낸 시간 사이. 그 간격은 가까워진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 바라볼수록 넓어진다. 알고 있다고 여겼던 사람에게 낯선 시간이 생겨나고, 이미 지나간 날에서 전에 보이지 않던 표정이 떠오른다. 한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그의 삶에서 내가 차지하지 못한 시간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br/><br/>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에는 서로 다른 방향이 함께 놓인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은 그를 향해 다가가는 마음이면서, 동시에 그 사람을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로 바꾸려는 욕망을 품는다. 행동에는 이유를 붙이고, 표정에는 감정을 대응시키고, 반복되는 특징에는 이름을 붙이면서. 낯선 사람을 조금씩 익숙한 언어 안으로 옮겨오는 일. 언어가 촘촘해질수록 설명은 쉬워진다. 설명된 사람은 다루기도 쉬워진다. 그럼에도 한 사람의 생은 그 설명보다 자주 넓어진다.<br/><br/>「금빛 베드 러너」의 지윤이 오랫동안 익혀온 것도 사람들이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세계의 문법이다. 그녀는 웃는 얼굴을 연습하고, 타인의 반응을 살피며, 자신에게 곧바로 주어지지 않는 의미를 배우려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 지윤에게는 배워야 하는 언어가 된다. 반대편에는 지윤에게 너무도 선명해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세계가 있다. 돌아가는 물체를 오래 바라보는 마음, 일정한 움직임에서 느끼는 아름다움. 같은 세계 안에서 무엇은 상식이 되고 무엇은 해명해야 할 취향이 된다. 그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감각의 옳고 그름보다 다수의 익숙함이다.<br/><br/>도어 벨은 돌아가고, 지윤은 그것을 바라본다. 몇 시간이고 보고 싶다는 마음에는 복잡한 설명이 없다. 계속 보고 싶어서 본다. 타인을 이해하는 일에도 이런 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해할 수 있는 이유를 받아내기 전에 그 사람이 바라보고 있는 것을 함께 바라보는 시간. 모든 감각을 번역하려 들지 않는 시간. 설명되지 않은 부분을 서둘러 빈칸으로 취급하지 않는 시간. 사람에게는 자신의 언어로 옮길 수 없는 타인의 영역을 그대로 두는 능력도 필요하다. 그렇게 남겨둔 것은 시간이 흐른 뒤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당시에는 읽어내지 못했던 표정 하나가 오래된 기억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는 것처럼.<br/><br/>기억은 다른 방식으로 빈칸을 만든다. 과거는 지나갔다는 이유만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어린 도희가 보았던 얼굴과 지금의 도희가 떠올리는 얼굴 사이에는 같은 세월이 놓여 있지만, 두 얼굴의 의미는 같지 않다. 어린 눈에는 자신의 두려움이 먼저 보였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 표정 안에 자신이 알지 못했던 한 사람의 사정이 들어갈 자리가 생긴다. 시간이 바꾼 것은 그날의 사건보다 그날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의 크기다. 어떤 기억은 아주 늦게 완성된다. 사건은 오래전에 일어났는데 그 안에 있던 마음은 수년 뒤에 도착한다. 그때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이 지금의 자신에게는 보이고, 당시 확신했던 의미가 흐릿해진 자리에 다른 가능성이 들어선다. 뒤늦게 헤아린 마음으로 과거의 정답을 세울 수는 없다. 기억은 진실을 찾아내는 발굴보다 자신이 보았던 장면의 가장자리를 넓혀가는 일에 더 닮아 있다. 그 가장자리에서 사람은 처음으로 자신이 없던 곳에서도 타인의 하루가 계속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배운다.<br/><br/>그런데 기억에는 실제로 지나온 시간만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쉴 곳」의 민영은 자신에게 없었던 시간을 기억의 자리로 불러들인다. 살아본 적 없는 장면 속에 자신을 놓아보고, 그곳에 있었을 자신이 무엇을 바라보았을지 그려본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도 그것을 떠올리는 마음만큼은 실제로 존재한다. 가지 않았던 길과 하지 않았던 선택, 다른 삶이 가능했다면 존재했을 자신도 한 사람의 내면에서는 현실과 나란히 자란다. 실제의 과거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면, 가능했으나 살아보지 못한 과거 역시 지금의 나를 바라보는 하나의 눈이 된다. 사실의 증명 바깥에서도 삶을 움직이는 시간이 있다. 인간은 일어난 일만으로 자신을 만들지 않는다.<br/><br/>소설 또한 그런 시간을 만든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어린 시절을 따라가고, 가본 적 없는 방의 온도를 기억하게 하고, 경험하지 않은 상실을 한동안 자기 일처럼 품게 한다. 읽는 동안 빌려온 삶은 어느 순간 자신의 기억 곁에 놓이고, 이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을 바라볼 때 슬며시 끼어든다. 문학이 타인의 마음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창이라면 이 일은 너무 간단해진다. 창의 바깥은 무척이나 넓다. 소설은 하나의 장면을 보여주면서 그 앞뒤에 우리가 보지 못한 시간이 있음을 함께 감각하게 한다. 인물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는데도 그 사람이 전보다 쉽게 설명되지 않는 순간이 있다. 그때 독자가 얻는 것은 타인에 관한 정답보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삶의 넓이다. 소설은 보이는 것을 늘려주는 만큼 보이지 않는 삶의 크기도 키운다.<br/><br/>가까워진다는 말에는 언제나 일정한 거리가 포함되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내가 들어갈 수 없는 기억이 있고, 설명을 들어도 체험할 수 없는 감각이 있으며, 내가 없었던 시절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하는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순간에 몸을 기울이는 것. 알지 못하는 마음 앞에서도 손을 거두지 않는 것. 이 책에서 돌봄은 이해의 완성을 기다리지 않는다. 떨리는 손을 멈추게 할 방법을 몰라도 그 위에 손 하나를 포갤 수 있고, 한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읽지 못하면서도 그의 행복을 바랄 수 있다. 이해보다 몸이 먼저 도착하는 순간. 임솔아의 인물들이 서로에게 닿는 방식은 그런 작은 움직임 속에 있다.<br/><br/>책의 제목을 다시 바라보면 ‘보고 있지 않았던’이라는 말에는 묘하게 긴 시간이 들어 있다. 그때에는 볼 수 없었고 지금에 와서야 다르게 보이는 장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으나 오래 상상함으로써 마음속에 생겨난 장면, 같은 것을 바라보고도 서로 다른 감각으로 살아낸 장면. 우리가 보고 있지 않는 동안에도 타인의 생은 계속된다. 몇 개의 표정으로 그의 마음을 완성하거나 한때의 행동으로 그의 시간을 고정하지 않을 때, 보이지 않는 시간은 한 사람이 한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넓이가 된다. 어떤 장면은 오래 바라보아야 하고, 어떤 장면은 볼 수 없다는 사실까지 함께 보아야 한다.<br/><br/>한 사람을 오래 안다는 것은 그에 관한 장면을 많이 소유하는 일이 아니다.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직 모르는 시간이 더 있다는 것을 배우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생을 완성해서 건네받지 못한다. 몇 장면을 보고, 몇 장면을 놓치고, 뒤늦게 하나를 다시 바라본다. 그 사이에도 각자의 삶은 계속된다. 보지 못했던 장면이 남아 있기에 한 사람은 이미 알고 있는 모습보다 언제나 조금 더 넓다.<br/><br/>✏️도서출판 자음과모음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74/34/cover150/895447493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1743475</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앎과 삶 사이 - [터닝 페이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49112</link><pubDate>Thu, 01 Oct 2026 16: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4911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595X&TPaperId=1754911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72/96/coveroff/893292595x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595X&TPaperId=1754911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터닝 페이지</a><br/>홍승완 지음 / 열린책들 / 2026년 09월<br/></td></tr></table><br/>매달 마지막이면 한 달 동안 읽은 책을 한자리에 모은다. 몇 권을 읽었는지 세고, 오래 기억하고 싶은 책을 추리고, 짧게라도 기록을 남긴다. 그렇게 한 달의 독서를 숫자와 제목으로 정리하다 보면 목록과 기억이 꼭 같은 순서로 놓이지는 않는다. 분명 완독한 책인데도 금세 흐릿해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몇 달 전에 읽은 책의 한 문장이 아무 때나 불쑥 되돌아오기도 한다. 읽은 권수는 정확히 셀 수 있지만 한 권이 사람 안에서 지속되는 시간에는 마땅한 단위가 없다. 독서가 쌓이는 일과 깊어지는 일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br/><br/>우리는 왜 책을 읽는가. 그리고 독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수많은 문장을 지나온 뒤에도 이전과 똑같은 자리에 서 있다면, 그 시간은 어디에 쌓이는 것일까. 홍승완의 『터닝 페이지』는 30년에 걸친 독서와 500편의 서평에서 건져 올린 경험을 서른두 가지 독서 수업으로 풀어낸다. 정독, 문독, 심독, 재독, 교독을 거쳐 기록과 서평, 문장 수집과 필사, 체독에 이르는 과정은 한 권을 읽고 소비하는 시간보다 오래 품으며 관계 맺는 쪽에 무게를 둔다. 저자가 구분하는 ‘창고형 독서’와 ‘도끼형 독서’도 독서의 양과 깊이가 언제나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수많은 지식을 차곡차곡 저장한 뒤에도 익숙한 사고의 테두리는 그대로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단 한 줄이 오래된 믿음을 건드리고, 하나의 이야기가 세계를 바라보던 방향을 조금 틀어놓는다. 독서의 깊이는 얼마나 많은 것을 기억했는지보다 읽기 이전의 자신과 얼마나 다른 자리까지 이동했는지를 통해 드러난다. 책이 품은 세계 위로 독자가 살아온 삶이 겹쳐질 때 의미도 달라진다. 이해는 그 만남 속에서 계속 새로워진다.<br/><br/>책을 ‘거울과 창문’으로 바라보는 심독은 시선을 바깥과 안쪽으로 동시에 움직인다. 창문 너머에는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세계가 있고, 거울에는 그 앞에 선 독자가 비친다. 낯선 삶을 들여다보다가 어느 순간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에게 시선이 돌아오는 것이다. 같은 책을 읽고도 사람마다 다른 문장에 밑줄을 긋는 모습도 이와 닮았다. 누군가에게는 무심히 지나갈 한 줄이 다른 사람에게는 페이지를 오래 넘기지 못하게 한다. 책에서 무엇을 골라냈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고른 사람의 일부도 함께 나타난다. 텍스트를 해석하는 동안 독자 역시 자신의 일부를 해석한다. 그리고 그 자기 이해에는 타인의 언어가 끼어든다. 마음속에서 이름을 얻지 못했던 감정과 생각이 낯선 이야기를 경유한 뒤 처음으로 말해질 수 있는 것이 되기도 한다.<br/><br/>오래전에 읽었던 책을 펼치면 밑줄은 어느새 당시의 독자를 가리키고 있다. 지금은 별다른 감흥 없이 지나갈 문장 아래 여러 겹의 선이 그어져 있고, 현재라면 놓치지 않았을 대목은 아무 표시 없이 남아 있기도 한다. 글자는 그 자리에서 한 글자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책 앞에 다시 앉은 사람에게는 몇 년치 삶이 더해졌다. 경험이 늘고 가치의 순서가 달라지면 같은 말이 닿는 자리도 달라진다. 재독에서는 익숙한 내용과 과거의 자신을 함께 마주한다. 한 권을 사이에 두고 이전의 독자와 지금의 독자가 나란히 놓인다. 새롭게 발견한 의미에는 책이 처음부터 품고 있던 가능성과 그동안 살아낸 삶이 함께 스며 있다. 모든 독서는 자신이 서 있는 시간에서 이루어진다. 같은 페이지를 다시 펼칠 때마다 처음 그곳을 지난 뒤 살아온 몫까지 함께 얹힌다.<br/><br/>‘반려 고전’과 ‘반려 작가’는 한 번의 독서를 여러 시절로 이어준다. 오랜 시간 같은 책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한 권 위에 자신의 여러 시절을 차례로 포개는 일이기도 하다. 스무 살의 밑줄과 서른 살의 밑줄이 다른 자리에 놓이고, 그 차이가 다시 다음 독서를 기다린다. 첫 번째 완독에서 남겨둔 몫은 다음 만남으로 넘어간다. 당시에는 살아보지 못해 이해하기 어려웠던 대목이 훗날 자신의 경험과 맞물리고, 오래 곁에 둔 한 권에서는 그때마다 새롭게 발견할 자리가 생겨난다. 그렇게 반려하는 책에는 한 사람의 생애가 조금씩 포개진다.<br/><br/>읽은 것을 기록하는 일은 완독 뒤의 독서를 조금 더 이어간다. 밑줄 친 부분을 따로 옮겨두고 그 옆에 떠오른 생각을 적는다. 다시 서평으로 풀어내다 보면 처음에는 형태조차 없었던 생각도 조금씩 윤곽을 갖춘다. 머릿속에서는 충분히 이해했다고 여겼던 내용도 글로 옮기려 하면 쉽게 막힌다. 무엇이 좋았는지, 무엇이 불편했는지, 왜 하필 그곳에서 오래 시선이 멎었는지 설명하려면 감상보다 한 단계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그래서 앞장을 다시 펼친다. 멀리 떨어져 있던 대목을 이어보고 처음 품었던 해석도 고쳐 쓴다. 완독 표시 뒤에서 시작되는 또 하나의 독서다. 저자가 서평을 통해 ‘그 책’을 ‘내 책’으로 만든다고 표현한 것도 이런 연장과 맞닿아 있다. 타인의 언어는 자신의 경험을 거치는 동안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이미 알고 있던 것과 맞대어보면 동의했던 생각이 의심스러워지고, 처음의 반박을 거두는 일도 생긴다. 기록은 그렇게 타인의 언어가 자신의 사유를 통과할 자리를 만든다. 쓰는 동안 흩어진 생각에는 순서가 생기고 멀리 있던 의미끼리 연결된다. 문장 수집 역시 아름다운 문구를 보관하는 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오랫동안 모은 것들을 한꺼번에 펼쳐보면 취향보다 많은 것이 보인다. 거듭 선택한 말들 사이에는 중요하게 여겨온 가치와 오래 생각해온 문제가 반복해서 나타난다. 타인의 책에서 골라낸 것들이 한 사람의 사유가 지나온 자리를 기록하는 셈이다.<br/><br/>『터닝 페이지』의 독서는 마지막에 ‘체독(體讀)’으로 향한다.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을 손으로 옮겨 쓰고 소리 내어 되짚으며 책의 언어를 몸과 생활 가까이 가져온다. 앎과 삶 사이에는 언제나 일정한 거리가 있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문장을 읽는 것과 실제 관계 속에서 타인의 사정을 헤아리는 일은 다르고, 익숙한 편견을 의심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는 것과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는 일도 다르다. 머리에서 이해한 것이 삶의 태도에 스며들기까지 그 거리를 건너는 과정이 필요하다. 선택 앞에서 망설이고, 자신이 안다고 여겼던 것을 실제 관계 안에서 다시 확인한다. 판단의 속도가 조금 늦어지고, 당연하게 여기던 것 앞에서 한 번 더 생각하며, 이전에는 지나쳤던 것을 알아차리는 변화도 그 과정에서 생겨난다. 지식이 반복되는 판단과 선택을 지나 습관에 스며들수록 책에서 배운 것은 생활의 일부가 되어간다.<br/><br/>다음 월말에도 읽은 책의 권수를 세고 한 달의 독서를 정리할 것이다. 숫자로 남은 기록은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좋은 기준이 된다. 다만 그 목록에는 적히지 않는 독서도 있다. 지난달 읽었지만 이번 달에도 계속 생각한 책, 다른 책을 읽다가 다시 펼쳐본 페이지, 몇 년 뒤에도 돌아가고 싶은 문장, 출처를 찾아야 할 만큼 생각 속에 오래 섞여버린 말들이다. 완독한 날짜는 적을 수 있어도 그 책을 마지막으로 생각한 날까지 기록할 수는 없다. 목록을 정리한 뒤에도 계속되는 독서가 있다.<br/><br/>『터닝 페이지』라는 제목은 그래서 책장을 넘기는 작은 동작보다 조금 긴 시간을 품는다. 페이지는 손끝에서 몇 초 만에 넘어가지만 그곳에서 만난 말이 생각을 거쳐 삶의 태도에 닿기까지는 훨씬 오래 걸린다. 어떤 페이지는 넘긴 뒤에 더 오래 읽힌다. 밑줄 속에서 되살아나고, 기록을 거치며 다시 쓰이고, 몇 년 뒤에는 전혀 다른 의미로 펼쳐진다. 한 권과 함께 보낸 시간이 어느 순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한다면, 그때 넘어간 것은 종이 한 장만이 아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지난 뒤에도 이어지는 시간이 있다. 어쩌면 한 권을 깊이 읽는다는 것은 그 시간을 오래 살아보는 일에 더 가까울 것이다.<br/><br/>✏️도서출판 열린책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72/96/cover150/893292595x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1729600</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거대한 문명 속에서 움직이는 한 사람을 바라본다 - [리더는 언제 차이를 만들어내는가 - 기업가, 예언자, 감독 그리고 왕]</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45969</link><pubDate>Wed, 30 Sep 2026 15:3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4596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32131862&TPaperId=1754596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29/46/coveroff/k432131862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32131862&TPaperId=1754596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리더는 언제 차이를 만들어내는가 - 기업가, 예언자, 감독 그리고 왕</a><br/>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26년 09월<br/></td></tr></table><br/>역사를 멀리서 바라보면 사람은 작아진다. 한 시대의 방향을 설명하는 자리에는 지리와 자원, 제도와 기술, 전쟁과 경제처럼 개인의 의지보다 오래 지속되는 조건들이 놓인다. 『총, 균, 쇠』에서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바라본 세계도 그러했다. 문명의 격차를 몇몇 영웅의 탁월함으로 설명하는 대신 인간보다 먼저 존재했고 인간보다 오래 남는 환경과 구조를 살폈다. 『리더는 언제 차이를 만들어내는가』에서 그의 시선은 거대한 문명으로부터 한 사람에게로 좁혀진다. 대통령과 CEO, 스포츠 감독과 종교 지도자를 차례로 불러내며 그는 묻는다. 수많은 조건이 이미 주어진 세계에서도 한 사람은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가. 시대의 흐름이 사람을 선택하는 순간과 한 사람이 시대의 흐름을 바꾸는 순간을 우리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br/><br/>다이아몬드는 이 문제를 ‘햄릿 테스트’라는 흥미로운 사고실험으로 풀어간다. 셰익스피어가 일찍 죽었다면 동시대의 다른 극작가가 『햄릿』을 쓸 수 있었을까. 이 가정을 정치와 기업으로 옮기면 익숙한 위대함의 기준이 흔들린다. 스티브 잡스가 없었더라도 스마트폰은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고, 제프 베이조스가 없었더라도 온라인 유통 시장은 성장했을 것이다. 반면 보츠와나의 초대 대통령 세레체 카마처럼 특정한 신분과 능력, 시대적 조건을 동시에 갖춘 사람은 다른 누군가로 쉽게 교체하기 어렵다. 다이아몬드에게 중요한 것은 성취의 크기보다 그 사람을 역사에서 지웠을 때 생겨나는 차이다. 유명한 사람과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가 ‘위대한 인물’을 기억하는 방식부터 되돌아보게 한다.<br/><br/>그러나 누군가가 대체 불가능했다는 판단 역시 현재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우리의 추론이다. 실제로 그 사람이 사라진 또 하나의 역사를 살아볼 수는 없다. 『햄릿』이 없는 세계에서 또 다른 걸작이 태어났을 가능성도, 잡스가 없는 세계에서 스마트폰이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발전했을 가능성도 확인할 길이 없다. 한 사람을 지워보는 사고실험은 그래서 역사의 정답을 알려주는 장치보다 인과관계를 의심하게 만드는 장치로 읽을 때 더 매력적이다. 이미 벌어진 사건은 너무 쉽게 필연처럼 보인다. 성공한 기업 뒤에서 탁월한 CEO를 찾고, 승리한 팀에서 명장을 발견하며, 번영한 국가의 중심에 위대한 지도자를 세우는 일도 그렇다. 결과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과거는 언제나 현재를 향해 걸어온 것처럼 보인다.<br/><br/>그래서 이 책이 자연실험과 통계까지 동원해 개인의 영향력을 분리하려는 시도는 꽤 의미심장하다. 성적이 나빠진 팀이 감독을 교체한 뒤 다시 승리하기 시작했다고 해서 새 감독이 반등의 원인이라고 곧바로 말할 수는 없다. 극단적으로 낮아진 성적이 평균으로 회귀했을 수도 있고, 선수의 부상이나 일정, 상대 팀의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조직학자 제임스 마인들(James R. Meindl), 샌퍼드 얼리치(Sanford B. Ehrlich), 재닛 듀커리치(Janet M. Dukerich)는 1985년 논문 「The Romance of Leadership」에서 사람들이 조직의 복잡한 성과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리더십을 하나의 강력한 인과적 설명으로 받아들이는 현상을 살폈다. 이들은 국가와 산업, 기업의 성과 변화와 리더십에 대한 관심을 비교하고 일련의 실험을 거쳐, 조직의 현실을 설명할 때 리더의 영향력을 두드러지게 인식하는 경향을 ‘리더십의 낭만화’라는 관점으로 해석했다. 한 사람의 힘을 실제보다 크게 평가한다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 수많은 변수가 얽힌 조직의 결과를 이해하기 위해 ‘리더’라는 인물을 인과의 중심에 세우는 방식에 주목한 것이다. 우리는 복잡한 원인보다 한 명의 주인공을 기억하기 쉽다. 수십 개의 조건이 겹쳐 일어난 성공에는 영웅의 이름을 붙이고 실패에는 책임질 사람의 얼굴을 찾는다. 구조는 이야기하기 어렵지만 인간에게는 성격과 선택, 욕망과 결단이 있다. 역사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개인을 필요 이상으로 크게 그리는 까닭에는 세계를 하나의 이야기로 이해하려는 인간의 서사적 습관도 섞여 있다.<br/><br/>그렇다고 개인이 구조 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이아몬드가 여러 분야의 리더를 비교할수록 중요해지는 것은 그 사람에게 허락된 선택의 범위다.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도 이미 제도가 단단히 굳어진 조직과 결정권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 조직에서 전혀 다른 영향력을 갖는다. 대통령, CEO, 감독이라는 직함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무엇을 선택할 수 있었는가에 있다. 여기에서 책이 말하는 ‘재량권’은 자유에 관한 문제와도 맞닿는다. 자유를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상태로 상상하기보다 주어진 조건 안에서 현실적으로 선택 가능한 것들의 범위로 바라본다면, 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차이 역시 그 범위와 함께 커지고 작아진다. 자유는 의지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의지가 현실의 결과로 이어지려면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과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권한이 함께 주어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재량권은 개인의 자유가 현실 속에서 얼마나 멀리 뻗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조건이 된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다는 사실은 책임의 크기와도 연결된다. 더 많은 가능성 앞에 서 있던 사람에게 우리는 그가 고른 하나의 가능성에 대해 더 많은 책임을 묻게 된다.<br/><br/>그러므로 역사에서 개인과 구조 중 어느 한쪽만 남기는 일은 점점 어려워진다. 뛰어난 능력만으로 시대를 움직일 수 없고, 강력한 시대적 흐름만으로 모든 결과가 미리 정해지는 것도 아니다. 한 사람이 가진 능력과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 그 능력을 필요로 하는 시대와 우연히 맞아떨어진 시간이 함께 작동한다. 카마가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레이철 카슨의 언어를 받아들일 사회적 토양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면, 뛰어난 CEO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조직에 놓였다면 같은 사람에게서 같은 역사가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개인의 성취 안에는 언제나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시대의 몫이 들어 있고, 시대의 흐름 안에도 특정한 순간 누군가가 선택한 몫이 스며 있다. 역사는 인간과 조건 가운데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이기는 과정이라기보다 둘이 잠시 같은 시간에 포개지면서 예상치 못했던 방향을 얻는 과정처럼 보인다.<br/><br/>이런 관점에서 보면 리더의 능력을 몇 가지 자질로 정리하는 일보다 ‘언제’라는 제목 속 한 단어가 훨씬 중요해진다. 제목에 ‘언제’가 붙는 순간, 관심은 리더가 지닌 고정된 자질에서 그 자질이 실제로 힘을 가질 수 있는 조건과 시기로 옮겨간다. 결국 리더의 영향력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만으로 설명되지 않고, 그의 선택이 현실에 개입할 수 있었던 순간까지 함께 살펴야 비로소 가늠할 수 있다. 다만 햄릿 테스트가 언제나 충분한 답에 닿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망설여진다. 대체 가능성을 판단하는 순간에는 필연적으로 가정이 개입하고, 정치와 종교처럼 수많은 변수가 얽힌 역사에서 자연실험이 모든 조건을 깨끗하게 분리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이 방법은 한 사람에게 너무나 많은 찬사와 비난을 몰아주던 시선에 제동을 건다. 누군가의 성공을 바라볼 때 그 사람의 능력만큼 그 능력이 작동할 수 있었던 환경을 함께 보고, 실패를 바라볼 때도 한 개인의 결함만큼 그가 움직일 수 있었던 범위를 살피게 한다.<br/><br/>『총, 균, 쇠』의 두께와 밀도 때문에 재레드 다이아몬드와의 만남을 망설였던 독자라면 이번 신작 역시 선뜻 펼치기 어려울 수 있다. 직접 읽어보니 이번 책은 조금 다른 다이아몬드를 만나는 경험이었다. 정치에서 기업으로, 스포츠에서 종교로 사례가 이동하고 하나의 물음을 여러 영역에서 반복해 시험하기 때문에 긴 논의를 따라가는 부담도 전작보다 덜했다. 무엇보다 거대한 문명의 흥망보다 사람 한 명의 선택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일상의 감각과 맞닿는 부분이 많다. 『총, 균, 쇠』가 인간을 둘러싼 거대한 조건을 바라보도록 시야를 넓혔다면, 이번 책은 그 넓어진 풍경 속에서 다시 한 사람의 자리를 찾아간다.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알고 난 뒤에도 인간의 선택을 완전히 지울 수 없는 이유. 그 사이에서 한 사람이 차지하는 몫을 가늠해보는 일이 이 책을 읽는 가장 긴 사유가 된다.<br/><br/>✏️도서출판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29/46/cover150/k432131862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1294662</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플로렌스 냅의 강렬한 첫인사 - [이름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45410</link><pubDate>Wed, 30 Sep 2026 11:2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4541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92131680&TPaperId=1754541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317/60/coveroff/k79213168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92131680&TPaperId=1754541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이름들</a><br/>플로렌스 냅 지음, 강아름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09월<br/></td></tr></table><br/>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세상에 도착했을 때 이미 누군가가 골라둔 몇 글자를 건네받고, 그것을 평생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다. 이름에는 그것을 고른 사람의 바람과 기억도 스며든다. 누구를 닮기를 바라는 마음,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기대, 한 집안이 오래 보존해온 역사까지. 이름을 물려준다는 행위에는 한 사람을 부르는 일을 넘어 그에게 하나의 이야기를 먼저 건네는 의미가 있다. 아직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생 앞에 놓이는 최초의 서사. 플로렌스 냅의 『이름들』은 바로 그 몇 글자에서 세 개의 삶을 펼친다.<br/><br/>1987년, 코라는 어린 딸 마이아와 갓 태어난 아들을 데리고 출생신고를 하러 간다. 남편은 집안의 남자들에게 대대로 이어진 자신의 이름 ‘고든’을 아들에게도 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코라는 베어와 줄리언이라는 두 이름을 함께 떠올린다. 다정하고 용감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이름, 아버지의 그림자를 벗어나 자기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이름. 출생신고서에 적힐 몇 글자를 앞에 두고 하나의 삶은 세 갈래로 나뉜다. 베어, 줄리언, 고든. 같은 날 태어난 같은 아이는 서로 다른 가족의 시간을 통과하며 다른 사랑을 만나고, 다른 상처를 입고, 다른 어른이 된다. 작명이라는 작은 선택을 세 개의 생으로 확장하는 순간, 소설 속 이름은 한 인간을 둘러싼 세계를 움직이는 첫 번째 사건이 된다.<br/><br/>세 갈래의 생을 따라가다 보면 ‘만약’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삶의 문법 안으로 들어온다. 그날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몇 분 먼저 혹은 늦게 도착했다면. 현재의 삶 뒤편에는 실현되지 않은 선택들이 셀 수 없이 겹쳐 있다. 『이름들』은 그 가능성 가운데 더 나은 생을 골라내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세 삶에는 저마다 사랑과 상실, 다정함과 두려움이 서로 다른 모양으로 찾아온다. 어느 이름이 더 행복한 삶을 만들었는지 비교하려는 마음은 차츰 힘을 잃는다. 대신 지금의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우연과 관계의 교차 속에서 만들어졌는지가 드러난다. 현재의 나는 예정된 하나의 결과물보다 수없이 많은 가능성 가운데 현실이 된 하나의 형태로 존재한다.<br/><br/>이러한 구조에서 이름은 운명을 결정하는 주문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같은 아이에게 붙은 세 이름은 각기 다른 관계와 기대를 불러들이고, 그 관계는 다시 아이가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에 스며든다. 로코 콸리아, 클라우디오 롱고바르디, 마누엘라 멘돌라, 라우라 엘비라 프리노는 「Names in Psychological Science: Investigating the Processes of Thought Development and the Construction of Personal Identities」(「심리학에서의 이름: 사고 발달 과정과 개인 정체성의 구성에 관한 탐구」)에서 이름을 개인 정체성의 형성과 연결해 살피며, 관계체계의 관점에서 개인의 이름을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를 표상하는 기표로 바라본다. 이름은 몇 글자의 소리만으로 의미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선택했으며, 그 이름이 관계 속에서 어떻게 불려왔는가와 함께 의미를 얻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베어’에는 누군가가 바란 용기와 다정함이, ‘줄리언’에는 또 다른 미래를 허락하고 싶은 마음이, ‘고든’에는 세대를 거쳐 보존되어온 가족의 역사가 포개진다. 같은 아이를 가리키는 세 이름에는 이미 서로 다른 관계의 가능성이 들어 있는 셈이다. 이름은 한 인간의 정체성을 완성하지는 않지만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최초의 언어가 될 수 있으며,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의 기대와 욕망까지 삶의 일부로 불러들인다.<br/><br/>그중에서도 코라의 작명은 이 소설에서 가장 절박한 선택으로 읽힌다. 아이의 이름을 정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단지 예쁜 몇 글자를 고르는 일이 아니다. 어떤 역사를 이어주고 어떤 역사로부터 아이를 떨어뜨려놓을 것인지 고민하는 일이다. 부모는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될지 결정할 수 없고, 아이 대신 미래를 살아줄 수도 없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 안에서 무엇을 건네고 무엇을 건네지 않을 것인지를 고민할 수 있다. 그래서 출생신고서 앞에 선 코라의 망설임에는 미래를 통제하려는 욕망보다 한 아이에게 자기 삶을 살아갈 여지를 주고 싶은 마음이 담긴다. 작명은 이 순간 축복이면서 저항이고, 사랑이면서 책임이 된다.<br/><br/>이름에서 시작된 상속의 문제는 이내 삶을 이루는 더 넓은 영역으로 번져간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 건네는 것은 성과 이름만이 아니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 두려움에 반응하는 태도, 가족 안에서 익힌 침묵과 기대, 남성과 여성에게 부여된 역할,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유산이 되어 전해진다. 가족은 인간이 처음 사랑을 배우는 장소이며 동시에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을 처음 습득하는 장소다. 그곳에서 배운 것은 이후의 삶에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름의 세습으로 모습을 드러낸 상속은 그렇게 삶의 태도와 기억, 관계를 맺는 방식의 세습으로 범위를 넓혀간다.<br/><br/>세정 양, 양진 박, 파 토르는 「Intergenerational Transmission of Family Violence: A Narrative Review of Pathways from Childhood Exposure to Family Violence to Adult Intimate Partner Violence Perpetration」(「가족폭력의 세대 간 전승: 아동기 가족폭력 노출에서 성인기 친밀한 파트너 폭력 가해로 이어지는 경로에 관한 내러티브 리뷰」)에서 어린 시절 가족폭력에 노출된 경험과 성인기의 친밀한 관계 폭력 가해 사이에 나타나는 연관성을 기존 연구들을 통해 검토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폭력의 전승이 하나의 직선적인 경로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회학습 과정뿐 아니라 감정 조절, 관계를 해석하는 인지 방식, 개인을 둘러싼 환경과 맥락 등이 복합적으로 관여한다. 가족 안에서 폭력을 경험했거나 목격했다는 사실은 이후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미래의 행동을 하나의 방향으로 확정하지는 않는다.<br/><br/>『이름들』의 세 갈래 구조는 이 복잡성을 문학의 형식으로 펼쳐 보인다. 같은 뿌리에서 시작한 삶도 어떤 관계를 만나고 어떤 환경에서 성장하는가에 따라 물려받은 것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변형한다. 가족에게서 전해진 역사와 기억은 한 사람 안에 흔적을 만들지만, 그 흔적을 어떤 방식으로 읽고 살아갈지는 계속 달라질 수 있다. 물려받은 것은 삶의 조건이 될 수 있어도 완성된 운명은 아니다. 주어진 환경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과 한 인간의 모든 선택을 결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다.<br/><br/>소설 속에 등장하는 고야의 &lt;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gt;는 이러한 상속의 문제를 강렬한 이미지로 옮겨놓는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워 자식을 삼키는 아버지의 모습에는 다음 세대를 독립된 존재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오래된 욕망이 새겨져 있다. 부모가 자신의 가치와 질서를 자녀에게 물려주려는 순간, 사랑과 소유의 경계는 쉽게 흐려진다. 자신의 삶을 아이에게 건네고 싶은 마음이 아이의 삶을 자신의 연장으로 만들려는 욕망으로 변할 때, 다음 세대가 자기 몫의 존재가 될 공간은 좁아진다. 이름의 세습 역시 이러한 긴장 속에 놓인다. 물려준다는 말에는 다정함이 있지만, 무엇을 반드시 이어야 한다는 명령이 숨어들 때 상속은 무게가 된다.<br/><br/>더욱 인상적인 것은 하나의 이미지가 언제나 같은 의미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한 사람이 무엇을 경험하고 어떤 시간을 지나왔는가에 따라 같은 그림도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읽힐 수 있다. 작품 속 사투르누스가 지닌 의미 역시 한 번의 해석으로 닫히지 않는다. 그림은 그대로 존재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이 변하고, 달라진 시선은 다시 그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이름들』이 세 개의 삶을 병치하는 방식도 이와 닮아 있다. 같은 이름과 같은 기억조차 어떤 생의 자리에서 바라보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얻는다.<br/><br/>그래서 상속의 반대말은 망각보다 선택에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전해진 모든 것을 지워내는 일보다 그 가운데 무엇을 이어가고 무엇을 자신의 대에서 멈출 것인지 결정하는 일. 인간은 태어날 가족도, 처음 자신에게 붙여질 이름도, 어린 시절 자신을 둘러싼 세계도 고를 수 없다. 그렇다고 그 모든 것을 평생 같은 형태로 보존해야 할 의무까지 부여받는 것은 아니다. 주어진 것을 해석하고 다시 배열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은 조금씩 자기 삶의 몫을 만들어간다. 이름은 타인에게서 받은 최초의 문장이지만, 그 뒤의 이야기는 살아가는 사람의 선택과 관계 속에서 계속 달라진다.<br/><br/>그렇다면 베어와 줄리언과 고든 가운데 누가 그 아이의 진짜 모습일까. 세 삶을 나란히 바라볼수록 어느 하나를 원본으로 세우기는 어려워진다. 인간 안에 하나의 완성된 자아가 먼저 존재하고 환경이 그것을 꺼내놓는다고 보기에는 세 삶이 너무 다채롭게 갈라진다. 관계가 달라지면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지고, 사랑과 상처의 경험이 달라지면 세계에 응답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나’라는 존재는 고정된 핵을 보존하는 일보다 세계와 관계 맺으며 계속 형태를 얻어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세 개의 이름은 세 개의 운명을 확정하기보다 한 사람 안에 존재할 수 있었던 서로 다른 가능성을 펼쳐 보인다.<br/><br/>우리가 실제로 살아낸 삶은 언제나 하나뿐이다. 그래서 선택하지 않은 삶의 결과를 확인할 수 없고, 다른 길의 자신과 만나 어느 쪽이 더 행복했는지 비교할 수도 없다. 『이름들』은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현실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그 비교를 잠시 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세 개의 삶을 모두 바라본 뒤에도 정답은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한 인간의 생을 하나의 선택이나 하나의 이름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또렷해진다. 우리가 살아보지 않은 생 역시 지금의 삶 주변에 가능성의 형태로 존재하며, 지금의 자신 또한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현실이 된 하나의 모습이다.<br/><br/>처음 주어진 이름에는 타인의 바람과 가족의 역사, 아직 만나지 않은 미래가 함께 놓여 있다. 그러나 이름이 한 사람의 첫 문장이 될 수는 있어도 그의 마지막 문장까지 정해둘 수는 없다. 삶은 주어진 것을 그대로 이어 쓰는 과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엇을 물려받았는지 이해하고, 그중 무엇을 자기 몫으로 받아들이며, 무엇을 다른 형태로 바꾸어 살아갈 것인지 선택하는 과정도 삶을 이룬다. 『이름들』이 세 개의 이름과 세 개의 생을 통해 펼쳐 보이는 가능성은 결국 그곳으로 향한다. 우리는 이미 쓰인 문장에서 시작하지만, 아직 쓰이지 않은 문장까지 물려받은 것은 아니다.<br/><br/>✏️도서출판 문학동네로부터 가제본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br/><br/>한 사람에게 주어진 이름에는 그를 부르는 이의 사랑뿐 아니라 가족의 역사와 기대, 아직 살아보지 않은 미래까지 함께 들어선다. 『이름들』은 세 개의 이름에서 세 갈래의 생을 펼쳐 보이며, 우리가 현재의 자신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연과 관계와 선택을 통과해왔는지를 섬세하게 더듬는다. 선택하지 않은 삶은 사라지는 대신 가능성의 형태로 현재의 나를 둘러싸며, 지금의 자신 역시 수많은 갈림길 가운데 현실이 된 하나의 모습임을 보여준다. ‘그날 다른 선택을 했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를 한 번쯤 상상해본 독자, 정체성과 자유의지,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세 삶이 갈라지는 순간마다 자신의 가능성까지 겹쳐 읽게 될 것이다.<br/>가족에게서 물려받은 기억과 관계, 사랑과 상처가 한 인간에게 어떤 흔적을 새기는지 탐구하는 소설을 좋아한다면 더욱 깊이 읽을 만하다. 무엇을 물려받았는가에서 시작해 그것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로 사유를 확장하는 작품이며,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건너온 것들 가운데 무엇을 이어가고 무엇을 자신의 삶에서 멈출 것인지 선택하는 순간까지 세밀하게 응시한다. 이토록 치밀한 구조와 넓은 감정의 진폭을 한 권 안에 완성했다는 사실이 플로렌스 냅의 소설 데뷔작이라는 점을 더욱 놀랍게 만든다. 한 작가의 첫 장편에서 이미 완성된 세계를 발견하는 경험을 기다려온 독자에게, 『이름들』은 플로렌스 냅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만드는 강렬한 첫인사가 되어줄 것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317/60/cover150/k79213168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3176010</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판단 앞에 멈춰 서서 - [처음 만나는 철학의 세계 - 삶에 철학이 들어오는 순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43620</link><pubDate>Tue, 29 Sep 2026 16: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4362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32131374&TPaperId=1754362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201/77/coveroff/k63213137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32131374&TPaperId=1754362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처음 만나는 철학의 세계 - 삶에 철학이 들어오는 순간</a><br/>성창원 지음 / 북플레저 / 2026년 09월<br/></td></tr></table><br/>우리는 매일 수많은 판단을 내린다. 무엇을 좋아할지, 누구의 말을 믿을지, 어느 쪽이 옳다고 여길지 결정하며 살아간다. 대부분의 선택은 너무 빠르게 이루어져 그 아래 놓인 이유까지 들여다볼 기회가 드물다. 그러나 자신의 판단에 ‘왜’라는 말을 붙이는 순간 익숙했던 확신은 조금 복잡해진다.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면 그 행동은 옳은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우선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은가.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는 어디까지 인정되어야 하는가. 철학은 삶과 동떨어진 곳에서 만들어진 추상적인 언어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렇게 당연하다고 여겼던 판단의 근거를 살피는 순간부터 시작된다.<br/><br/>성창원의 『처음 만나는 철학의 세계』는 바로 그 ‘왜’를 스물세 개의 물음으로 펼쳐놓는다. 행복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도덕과 책임, 약속과 미래 세대, 죽음과 전쟁, 정의와 국가를 지나 AI와 인간의 관계에 닿는다. 각각의 물음 앞에는 오래 축적된 철학적 논쟁이 자리하지만 책이 독자를 데려가는 곳은 철학자의 결론보다 논쟁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하나의 주장에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여긴 순간 반대편에서 또 다른 이유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사이를 오가다 보면 처음에는 분명했던 판단의 윤곽도 차츰 복잡해진다. 이미 가지고 있던 확신을 꺼내어 살피고, 그 확신이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시험하는 일이다.<br/><br/>좋은 결과를 만드는 쪽을 선택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도덕은 한결 명료해 보인다.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방향을 찾고 그 결과를 향해 움직이면 된다. 그러나 그 행복을 위해 한 사람의 권리를 희생해야 하는 순간 계산법은 달라진다. 그렇다면 누구도 수단으로 삼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우면 해결될까. 이번에는 원칙을 지킨 결과로 더 큰 고통이 발생하는 상황이 기다린다. 결과주의가 선택이 만들어낼 결과의 무게를 보여준다면, 의무론은 그 결과와 함께 고려해야 할 행위의 원칙과 인간에 대한 의무를 불러온다. 여기에 관계주의는 판단의 시선을 ‘나와 타인이 서로에게 어떤 이유를 제시할 수 있는가’라는 관계의 문제로 옮겨놓는다. 이들 사이의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을 빠르게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의 가치로 삶의 모든 선택을 환산하기 어려운 까닭을 이해하는 데 있다. 도덕적 갈등은 악한 선택을 피하는 순간보다 소중한 두 가치 가운데 하나를 더 무겁게 들어야 하는 순간에 훨씬 첨예해진다.  윤리의 저울은 모든 사람을 같은 무게로 올려놓으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늘 가까운 쪽으로 기운다. 가족의 고통은 낯선 사람의 고통보다 가까이 느껴지고, 오늘 발생하는 손실은 수십 년 뒤 누군가가 감당할 손실보다 절박하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책임에도 거리가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특별히 대하는 마음과 모두를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는 원칙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간격이 허용될까.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에게 남겨놓은 위험은 현재의 우리가 얼마나 짊어져야 할까. 책에서 서로 다른 장에 놓인 가족, 타인에 대한 도움, 미래 세대, 위험과 전쟁의 문제는 이 물음을 사이에 두면 하나의 긴 선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가까운 것에 더 크게 반응하지만, 윤리의 범위는 감정이 닿는 거리보다 멀리 뻗어 있다. 한스 요나스가 기술 문명의 힘이 커질수록 책임의 시간 또한 미래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보았듯, 지금의 선택은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의 삶에도 이미 흔적을 새긴다.<br/><br/>그 거리가 생명과 자유의 경계에 닿으면 선택의 무게도 달라진다. 자신의 생명을 결정할 자유와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가 만나는 안락사의 문제, 공동체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과 인간의 생명이 충돌하는 전쟁, 자유로운 표현과 타인에게 가해지는 해악이 맞서는 상황에서는 평소 나란히 간직했던 가치들이 서로 다른 선택을 요구한다. 이때 철학은 극단적인 사례를 통해 우리가 가진 원칙의 강도를 측정한다. ‘자유는 중요하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있지만, 그 자유가 누군가의 안전을 침범하는 순간에도 같은 원칙을 유지할 수 있는지 살펴야 한다. 생명의 존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도 자신의 고통과 죽음을 결정하려는 타인의 자율성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가 남는다. 하나의 가치에 동의하는 일보다 그 가치가 다른 가치와 맞닿았을 때 어디까지 적용될 수 있는지를 따지는 과정에서 철학적 판단의 어려움이 드러난다.<br/><br/>성창원의 설명은 쉽게 읽히지만 생각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일상의 사례가 먼저 등장하고 철학적 개념과 여러 입장이 뒤따르기 때문에 독자는 개념을 이해하기 전에 이미 상황 속에서 어느 쪽인가를 선택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철학자들의 논쟁을 따라가는 동안 처음의 선택으로 돌아가 그 근거를 다시 살펴보게 된다. 쉬운 언어는 사유의 깊이를 덜어내는 장치보다 깊은 곳까지 독자를 데려가기 위한 통로로 쓰인다. 각 파트의 인포그래픽은 이러한 사유의 흐름을 한눈에 펼쳐놓는다. 행복을 다루는 쾌락주의와 욕구 충족설에서 칸트의 정언명령, 스캔런의 관계주의, 롤스의 정의론과 계약론에 이르기까지 앞에서 만난 개념은 뒤의 문제 속에서 다시 호출되고 다른 의미를 얻는다. 철학 이론이 별개의 지식으로 머무는 대신 책임과 약속, 편향과 미래 세대 같은 구체적인 문제를 바라보는 여러 개의 좌표가 되는 셈이다. 입문이라는 말의 의미도 여기서 달라진다. 철학의 문턱을 낮추는 친절은 개념을 단순하게 만드는 데 머무르지 않고, 독자가 자신의 힘으로 그다음 사고를 이어갈 수 있게 하는 데까지 나아간다.<br/><br/>마지막에 이르면 책은 AI 시대의 프라이버시와 인간과 로봇의 관계를 향한다. 홀로 있을 권리는 개인의 정보를 얼마나 감출 수 있는가를 넘어, 자신의 삶에 대한 접근과 통제의 범위를 누가 결정하는가라는 권리의 문제로 이어진다. 더 흥미로운 것은 앞에서 인간관계를 설명했던 ‘편향성’이 로봇과의 관계에서 다시 호출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을 특별히 대하고 그에게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기울인다. 그런데 인간이 로봇에게 같은 애정을 느끼고, 로봇 역시 그것에 맞추어 애정을 표현한다면 둘 사이에는 진정한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책은 여기서 관계의 쌍방향성을 들여다본다. 인간의 편향된 애정에 반응하도록 설계된 로봇의 애정과 서로가 서로를 특별한 존재로 대하는 인간관계 사이에는 ‘관계’라는 말만으로 지우기 어려운 차이가 생긴다. 이 물음은 앞에서 반복해온 ‘이유’의 문제와도 이어진다. 이제 AI는 어떤 판단에 여러 근거를 제시하고, 반론을 구성하며, 서로 충돌하는 윤리 이론까지 비교할 수 있다. 관계의 언어 역시 점점 능숙하게 수행한다. 그렇다면 이유를 말하고 애정을 표현하는 행위가 정교해질수록 인간의 판단과 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이유 이후의 시간을 살아간다. 그 판단으로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선택의 결과를 함께 겪으며, 자신의 이유가 타인에게 미친 몫까지 다음 삶 속으로 가져간다. 관계 역시 상대의 반응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행동을 다시 조정하는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다. 책이 AI 시대에 프라이버시라는 권리와 관계의 쌍방향성을 함께 꺼내놓는 순간, 인간의 자율성과 관계는 결국 ‘나의 삶을 누가 결정하는가’와 ‘나는 누구와 서로의 삶에 참여하는가’라는 두 방향의 문제로 만난다.<br/><br/>『처음 만나는 철학의 세계』의 스물세 개 물음을 지나왔다고 해서 선택이 수월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행복을 말할 때 도덕을 함께 보게 되고, 자유를 선택할 때 책임의 범위를 헤아리게 되며, 옳다고 믿는 순간에도 그 믿음을 지탱하는 이유를 한 번 더 살피게 된다. 철학은 삶을 명료한 답안으로 정리하기보다 판단 하나에 포함된 사람과 가치와 결과를 더 많이 보게 만든다. 그렇게 더 많이 보게 된 사람에게 선택은 이전보다 무거워진다. 삶은 그 무게가 충분히 계산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 우리는 불완전한 이해 속에서도 누군가를 돕거나 외면하고, 약속을 지키거나 어기며, 어떤 가치를 다른 가치보다 앞에 놓는다. 그때 철학이 할 수 있는 일은 선택의 부담을 덜어주는 데 있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고른 답이 어떤 이유 위에 놓여 있는지, 그 이유가 타인의 삶 앞에서도 설명될 수 있는지 계속 살피게 하는 것. 어쩌면 ‘처음 만나는 철학’의 처음은 철학자의 이름을 처음 외우는 순간보다, 당연했던 자신의 판단 앞에 멈춰 서서 그 이유의 무게를 처음 헤아리는 순간에 더 잘 어울린다.<br/><br/>✏️소정의 원고료와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201/77/cover150/k63213137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2017704</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몸에서 삶으로 - [인생의 해부학 - 완전한 질서 너머 삶의 의미를 찾아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41397</link><pubDate>Mon, 28 Sep 2026 15:2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4139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62131574&TPaperId=1754139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221/81/coveroff/k36213157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62131574&TPaperId=1754139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인생의 해부학 - 완전한 질서 너머 삶의 의미를 찾아서</a><br/>가브리엘 웨스턴 지음, 김성훈 옮김 / 더퀘스트 / 2026년 09월<br/></td></tr></table><br/>간호사는 근무를 교대할 때마다 환자를 인계한다. 진단명과 수술명, 검사 결과, 투약과 처치, 앞으로의 치료 계획이 다음 근무자에게 전달된다. 정확한 정보가 끊김 없이 이어져야 안전한 간호도 이어질 수 있다. 인계를 모두 듣고 나면 머릿속에는 몇 개의 문장으로 정리된 사람들이 남는다. 골절로 수술한 환자, 안면마비로 입원한 환자, 어느 수치의 변화를 지켜봐야 하는 환자. 그런데 병실 문을 열고 처음 마주하는 순간부터 그 문장들은 조금씩 길어진다. 단발머리가 유난히 잘 어울리는 사람, 대화할 때 꼭 손을 잡는 사람, 무심하게 툴툴거리면서도 간호사가 돌아설 때마다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는 사람. 인계받은 정보는 모두 정확했지만, 그중 어느 것도 한 사람의 전부를 말해주지는 않았다.<br/><br/>가브리엘 웨스턴의 『인생의 해부학』은 바로 그 거리에서 시작하는 책처럼 읽힌다. 외과의사에게 몸은 끊임없이 관찰하고 판단해야 하는 대상이다. 피부를 열고, 뼈와 장기를 보고, 혈액과 조직의 상태를 살피며, 정상과 비정상을 구별한다. 의학은 몸을 세밀하게 나눌수록 더 많은 것을 알아냈고, 그 지식으로 수많은 생명을 살려왔다. 그러나 웨스턴은 『Alive』라는 제목을 붙인 책의 머리말을 ‘죽음’에서 시작한다. 의학 교육에서 만났던 해부학 역시 살아 있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죽은 몸을 펼쳐놓는 학문이었다. 이 역설은 책 전체를 움직인다. 죽은 몸을 통해 우리는 살아 있는 인간을 어디까지 알 수 있는가. 피부와 뼈, 자궁과 폐, 뇌와 심장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한 인간에 대해서도 그만큼 많이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br/><br/>웨스턴은 뼈에서 심장까지 열한 개의 신체 부위를 지나며 해부학을 다시 살아 있는 사람에게 돌려준다. 뼈는 죽음 뒤에 남는 단단한 구조물이면서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재생되고, 피부는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면서 세계를 만지는 접촉면이 된다. 자궁은 임신과 출산에 따라 놀라운 변형을 겪으며, 폐는 인간의 몸과 바깥의 공기를 매 순간 교환한다. 간의 일부는 한 사람의 몸을 떠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심장은 오랫동안 생명의 상징이었던 동시에 의학에서는 정교한 펌프로 이해되어왔다. 이 기관들에는 생물학적 기능만 존재하지 않는다. 성과 정체성, 임신과 출산, 질병과 노화, 환경과 계급, 돌봄과 죽음이 몸의 구조 위에 겹쳐진다. 해부학 도판에서 명료하게 구분되던 기관들은 실제 삶으로 돌아오는 순간 한 사람의 기억과 관계와 시간 속에 놓인다.<br/><br/>몸을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 사이에는 오래된 철학적 문제가 있다. 우리는 몸을 소유하는가, 몸으로 존재하는가. 메를로퐁티에게 몸은 세계 안에 놓인 하나의 사물이면서 동시에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었다. 손은 만질 수 있는 신체인 동시에 무언가를 만지는 신체이고, 눈은 타인에게 보이면서 세계를 바라본다. 자신의 몸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그것을 순수한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몸은 언제나 ‘나’의 편에 있으면서 세계의 편에도 놓여 있다. 그렇기에 질병은 고장 난 부품 하나의 문제로 머물지 않는다. 걷던 사람이 걷지 못하게 되고, 숨쉬던 사람이 숨을 의식하게 되고, 자신의 심장을 잊고 살던 사람이 심장의 박동을 두려움 속에서 듣기 시작하면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까지 달라진다. 웨스턴은 이 두 위치를 여러 번 오간다. 외과의사로서 다른 사람의 몸을 열어보았고, 어머니로서 임신과 출산을 자신의 몸으로 통과했으며, 가족의 질병 앞에서는 보호자가 되었고, 자신의 심장 질환 앞에서는 환자가 된다. 의사였을 때 알고 있던 심장과 자신의 가슴속에서 이상을 일으키는 심장은 해부학적으로 같은 기관이다. 그러나 두 심장을 아는 방식은 같을 수 없다. 지식은 질환의 원인과 경과를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질환과 함께 살아갈 사람이 느끼는 시간까지 대신 살아주지는 못한다. 의학적 지식이 부족해서 생기는 간극도 아니다. 인간에게 몸은 관찰하는 대상인 동시에 그 관찰을 수행하는 자신의 자리이기 때문이다.<br/><br/>병원에서 심한 욕창을 소독할 때면 그 사실이 낯선 방식으로 다가오곤 했다. 오래 누워 지내는 환자의 피부는 지속되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다. 손상이 깊어지면 피부 아래의 조직을 지나 근육과 힘줄, 뼈까지 드러난다. 처음 마주했을 때의 충격은 반복되는 업무 속에서 점차 전문적인 관찰로 바뀐다. 상처의 깊이와 색, 삼출물과 괴사 정도를 확인하고 소독한 뒤 변화 양상을 기록한다. 환자에게 자신의 몸이 그렇게 변했다는 사실은 커다란 충격이지만, 간호사는 그 충격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확보해야 정확하게 돌볼 수 있다. 그러다 간호기록을 작성하며 문득 떠오르던 생각이 있었다. 내 피부 아래에도 저런 근육과 저런 뼈가 있다.<br/><br/>그 순간 타인의 몸을 관찰하던 시선은 관찰하는 사람의 몸으로 돌아온다. 피부는 나와 타인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경계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에서 만나는 신체는 오히려 인간이 공유하는 취약성을 드러낸다. 다른 사람의 뼈를 보면서 자신의 뼈를 의식하고, 타인의 상처를 처치하는 손 역시 상처 입을 수 있는 피부로 덮여 있다. 웨스턴이 뼈와 피부를 바라보며 발견하는 생명도 이와 이어져 있다. 가장 단단해 보이는 뼈조차 살아 있는 동안 계속 허물어지고 다시 만들어지며, 몸의 경계를 이루는 피부도 완전히 닫힌 벽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몸은 단단하게 완성된 구조물보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교환하며 가까스로 자신을 유지하는 생명체다. 타인의 몸을 오래 들여다볼수록 인간의 몸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는 동시에 자신의 유한성도 선명해진다.<br/><br/>그렇게 매 순간 달라지는 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어제와 같은 사람으로 살아가는가. 사람은 시간이 지나도 자신을 같은 사람이라고 여기지만 그동안 몸은 쉼 없이 달라진다. 세포가 교체되고, 상처가 생기고, 흉터가 남으며, 임신과 출산을 겪고, 질병을 앓고, 늙는다. 어떤 변화는 너무 커서 이전까지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해를 수정하도록 요구한다. 리쾨르가 인간의 정체성을 고정된 실체보다 시간 속에서 계속 구성되는 이야기와 연결했던 것도 이런 변화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어제와 오늘의 몸이 달라져도 우리는 그 변화들을 한 사람의 생애 안에 배열하며 ‘나’라는 연속성을 만들어간다. 질병은 그 서사에 예고 없이 끼어드는 사건이고, 회복은 언제나 질병 이전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달라진 몸을 자신의 생애 안에 다시 배치하고, 그 몸으로 가능한 삶의 문법을 새로 익혀야 하는 경우도 있다.<br/><br/>타인의 몸을 읽던 해부학은 저자 자신의 심장에 이르러 읽는 사람과 읽히는 몸의 자리를 뒤바꾼다. 다른 사람의 몸에서 병을 찾아내고 고치는 데 익숙했던 사람이 자신의 몸에서 예측할 수 없는 변화를 경험하면서 해부학의 방향도 달라진다. 몸에 관한 지식은 이제 관찰의 언어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무엇이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가’와 함께 ‘이 몸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따라온다. 신체의 변화가 존재 전체를 흔드는 까닭도 몸과 삶을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데 있다. 우리는 몸을 통과해서만 세계에 닿을 수 있기에, 몸의 변화는 자신이 살아가던 세계의 크기와 속도, 가능성의 범위를 함께 바꾼다. 다시 살아간다는 것은 변화를 없었던 일로 만드는 일이 아니라 달라진 신체와 세계 사이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된다.<br/><br/>머리말의 ‘죽음’에서 시작해 맺음말의 ‘삶’으로 향하는 구성은 생과 사를 가르는 경계를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장기이식에서 한 사람의 죽음 이후 적출된 심장은 몸 밖에서도 뛰며 또 다른 사람의 생명을 향한다. 죽은 몸과 살아 있는 심장이 한 장면에 공존한다. 심장이 뛴다는 사실만으로 한 사람의 삶 전체를 설명할 수 없고, 심장이 멈췄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맺어온 관계의 흔적까지 사라졌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의학은 생과 사를 판단할 기준을 필요로 하지만, 한 인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경험은 그 기준보다 훨씬 넓은 곳에서 이루어진다.<br/><br/>신생아중환자실에서 근무하던 시절, 전날까지 돌보았던 아기가 다음 출근 전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적이 있다. 전날까지 작은 몸을 꼬물거리던 아기. 출근 후 맡게 된 일은 임종간호였다. 몸에 연결되어 있던 관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부모가 가져온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힌 뒤, 쓰던 젖병과 남은 기저귀를 챙겼다. 그 아기는 퇴근 후 틈틈이 떠서 만든 첫 모자를 씌워주었던 아기이기도 했다. 체온을 유지하기 어려운 아이들에게 씌워주기 위해 만들었던 작은 모자였다. 의료기기가 하나씩 사라지고 부모가 준비한 옷이 그 자리를 채우는 동안, 환자로 돌보던 작은 몸을 다시 누군가의 아이로 돌려보내는 듯한 시간이 흘렀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부모가 고맙다는 말을 하며 울었고, 잡은 손 사이에서 의료인과 보호자라는 구분도 잠시 희미해졌다.<br/><br/>그 기억에서 살아 있음은 하나의 장기가 수행하는 기능으로만 떠오르지 않는다. 누군가의 체온을 지키기 위해 모자를 뜨는 시간, 불편한 몸의 자세를 바꾸어주는 손, 대화를 나누기 위해 잡은 손, 떠나는 사람에게 마지막 옷을 입혀주는 손까지 몸과 몸 사이에서 오간 행위들이 함께 떠오른다. 인간의 신체는 한 사람에게 속하지만 평생 완전히 홀로 유지되지는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타인의 손에 받아들여지고, 아플 때 누군가에게 몸을 맡기며, 때로는 다른 사람의 장기를 받아 살아간다. 독립된 개체라고 믿었던 몸에는 이미 수많은 타인의 시간과 접촉이 스며 있다. 돌봄은 그 관계성을 가장 물질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행위다.<br/><br/>그래서 『인생의 해부학』에서 해부학은 인간을 조각내는 데서 완성되지 않는다. 뼈와 피부와 심장을 따로 떼어 이해했던 해부학의 언어는 살아 있는 몸 안에서 다시 하나의 생애로 모인다. 동시에 그렇게 분리된 기관들은 한 사람의 몸 안에서 함께 아프고 변화하고 늙으며, 그 사람의 기억과 관계 속에서 각기 다른 의미를 얻는다. 인계에서는 몇 줄의 의료정보였던 환자가 병실 문을 열면 목소리와 표정과 습관을 가진 사람으로 나타났던 것처럼, 웨스턴의 해부학에서도 기관의 이름 뒤에서 한 사람의 생애가 모습을 드러낸다.<br/><br/>의학은 몸을 나누어 이해함으로써 인간을 살려왔다. 삶은 그렇게 나누어진 것들을 한 사람 안에서 함께 살아내는 시간이다. 몸에 관해 안다는 것은 장기의 위치와 기능을 익히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몸이 변화할 때 한 사람의 세계도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까지 포함한다. 살아 있는 몸은 계속 바뀌고 손상되고 회복하며 이전과 다른 상태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때 필요한 삶의 태도는 변화 이전의 몸만을 자신이라고 고집하는 데서 생겨나기보다, 달라진 몸 역시 자신의 시간 안에 받아들이며 다시 세계와 관계를 맺는 데서 만들어진다.<br/><br/>『인생의 해부학』이 죽은 몸에서 시작해 살아 있음에 도착하는 동안 해부되는 것은 신체만이 아니다. 몸과 자아, 의학과 삶, 관찰하는 사람과 관찰되는 사람 사이에 그어두었던 구분도 함께 펼쳐진다. 그 안에서 몸은 소유물이면서 존재의 방식이고, 타인과 나를 가르는 경계이면서 서로의 취약성을 알아보게 하는 공통의 조건이 된다.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몸을 아는 일보다 훨씬 넓다. 그러나 몸을 지나지 않고서는 그 사람의 삶에도 닿을 수 없다. 살아간다는 말이 언제나 몸을 전제로 한다면, 해부학이 향해야 할 마지막 자리에는 장기의 이름보다 그 몸으로 살아온 한 사람이 놓여 있어야 한다.<br/><br/>✏️도서출판 더퀘스트로부터 오퀘스트라 4기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221/81/cover150/k36213157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2218178</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파도는 흔들린다 - [쉼 숨 섬 - 마음을 찾는 사람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37978</link><pubDate>Sat, 26 Sep 2026 18:4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3797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52130347&TPaperId=1753797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88/36/coveroff/k55213034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52130347&TPaperId=1753797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쉼 숨 섬 - 마음을 찾는 사람들</a><br/>김한수 지음 / 생각정원 / 2026년 07월<br/></td></tr></table><br/>파도는 흔들린다. 물결이 솟았다가 가라앉고 다시 밀려오는 운동을 멈추는 순간, 파도는 파도가 아니게 된다. 사람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다. 태어날 때부터 완성된 사람은 없으며,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흔들린다. 불안과 실패, 상실과 슬픔이 밀려왔다 빠져나가고,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거센 물결이 삶의 중심을 휩쓸기도 한다. 그러니 평온을 한 점의 동요도 없는 상태라고 여긴다면 인간은 평생 그곳에 도착할 수 없을 것이다. 필요한 것은 파도를 없애는 힘보다 물결이 높아졌을 때 다시 자신의 호흡을 찾아가는 힘이다. 거친 파도를 고요히 흐르는 물로 되돌리는 일. 『쉼 숨 섬』의 스물일곱 사람은 저마다 다른 자리에서 그 방법을 연습해왔다.<br/><br/>김한수는 지난 2년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섯 갈래로 엮는다. 종교인과 명상가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만화가 이현세와 래퍼 김하온, 야구선수 한유섬, 모델 박우성을 비롯해 정신과 의사와 심리학자, 과학자와 화가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 시간을 이야기한다. 살아온 경로도, 믿는 종교도, 마음을 다루는 방식도 서로 다르다. 누군가는 명상하고 누군가는 기도하며, 또 누군가는 자신의 호흡과 감각을 오래 바라본다.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로 이어주는 것은 완성된 평온보다 반복되는 연습이다. 이미 흔들림을 극복한 사람들이 자신의 비법을 알려주는 자리가 아니라, 흔들릴 때마다 자신에게 돌아가는 방법을 익혀온 사람들이 각자의 경험을 내어놓는 자리.<br/><br/>그래서 이 책에서 ‘쉼’은 삶의 바깥으로 물러나는 시간이 아니다. 걷기를 포기하는 정지도 아니다. 다음 걸음을 내딛기 위해 지금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간격이다. ‘숨’은 그 간격을 현재와 이어준다. 생각은 지나간 실패를 되짚고 아직 오지 않은 불안을 앞당겨 살아내지만, 호흡은 언제나 지금의 몸에서 일어난다. ‘섬’ 역시 세상과 단절된 고립으로 읽히지 않는다. 바다가 거칠어졌을 때 잠시 발을 딛고 자신의 좌표를 확인할 수 있는 내면의 자리다. 쉼과 숨과 섬은 서로 다른 세 개의 처방보다 하나의 운동을 이루는 세 순간처럼 이어진다. 멈추고, 바라보고, 다시 선다.<br/><br/>그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마음속에서 일어난 것에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불안이 찾아오면 불안해하고, 분노가 솟으면 분노하며, 실패를 경험하면 자신의 삶 전체가 실패했다고 판단하기 쉽다. 감정과 사건 사이에 거리가 사라질수록 하나의 순간은 빠르게 삶 전체의 크기로 팽창한다. 『쉼 숨 섬』에서 반복되는 명상과 자기 관찰은 그 사이에 아주 작은 틈을 만든다.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그것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얼마나 큰지 먼저 바라보는 시간. 감정을 제거하지 않은 채 감정과 자신 사이에 관찰할 수 있는 거리를 마련하는 것.<br/><br/>자동차의 사이드미러에는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마음에도 이와 비슷한 원근의 착시가 있다. 마음속에서 보이는 것의 크기와 실제로 그것이 차지하는 크기가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당장의 불안이 너무 커 보여 삶 전체를 뒤덮기도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오래 방치했던 상처가 예상보다 깊은 곳까지 뿌리내리고 있기도 하다. 어떤 것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고 어떤 것은 훨씬 멀리 있다. 고통의 크기와 거리에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인식이 개입한다. 그러므로 관찰한다는 것은 마음의 원근법을 다시 맞추는 작업이다.<br/><br/>현상학에서는 이미 알고 있다고 믿는 판단을 잠시 유보하고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살피는 태도를 중요하게 다룬다. 마음을 관찰하는 과정에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다. 후설이 말한 ‘판단중지’는 경험 자체를 부정하거나 감정을 억누르는 태도가 아니라, 대상에 관해 이미 내려진 해석과 판단을 잠시 괄호 안에 넣어두는 일이다. 그렇게 잠시 판단을 멈추면 대상에 대한 익숙한 해석을 앞세우기 전에 ‘그것이 지금 나에게 어떻게 경험되고 있는가’를 들여다볼 여지가 생긴다. 마음을 관찰하는 일 역시 감정의 존재를 지우기보다 감정이 의식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살피는 데서 시작한다. ‘나는 불안한 사람이다’라는 판단과 ‘지금 내 안에 불안이 일어나고 있다’는 관찰 사이에는 작은 차이가 존재하지만, 그 작은 거리가 사람을 전혀 다른 위치에 세운다. 전자에서는 감정이 곧 자신이 되고, 후자에서는 감정을 바라보는 자신이 남는다. 경험하는 감정과 그것을 경험하는 자신을 완전히 겹쳐놓지 않을 때, 하나의 감정은 정체성 전체를 점유하지 못한다. 불안이 없어지지 않아도 불안이 나의 전부일 필요는 없어진다. 고통 역시 삶에 존재하면서 삶 전체를 대표하지 않을 수 있다. 책 속 사람들이 반복해서 명상하고 기도하며 자신을 살피는 이유도 한 번의 깨달음으로 모든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라기보다, 매번 흐트러지는 마음의 초점을 다시 맞추기 위해서일 것이다.<br/><br/>자신을 제대로 바라보는 일은 타인을 바라보는 방식에도 이어진다. 인간은 자신의 취약함을 견디지 못할수록 다른 사람의 취약함에도 쉽게 인색해진다. 부족함을 실패로 받아들이고 흔들림을 결함으로 판단하는 시선은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반대로 자신의 두려움과 실패, 부끄러움까지 인간에게 가능한 경험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타인의 불완전함 앞에서도 조금 더 넓은 자리를 내어줄 수 있다. 자신을 돌보며 넓어진 내면은 그렇게 타인의 불완전함까지 받아들일 여백을 갖는다. 자기연민은 스스로를 특별히 아끼는 태도보다 인간이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신에게도 허락하는 데서 시작하고, 그 허락은 다른 사람에게도 건너간다.<br/><br/>안셀름 그륀 신부가 타인의 부족함을 견디기 어려워했던 시간을 지나 다른 사람을 있는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간 이야기나, 저마다 실패와 슬럼프, 상실을 경험한 이들의 고백은 수행을 완성의 언어에서 내려놓는다. 이들은 마음의 파도를 완전히 정복한 사람들이 아니다. 자신도 흔들린다는 사실을 알고 그 흔들림을 대하는 태도를 조금씩 바꾸어온 사람들이다. 자신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연습이 필요하고, 타인을 포용하는 데에도 반복이 필요하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어느 날 획득하여 소유할 수 있는 능력보다 매일 조금씩 길을 내는 행위에 해당한다.<br/><br/>그런 의미에서 여러 종교의 수행을 함께 다루는 4부는 특히 인상적이다. 불교의 선과 가톨릭의 관상, 개신교의 묵상과 원불교의 좌선은 서로 다른 역사와 교리를 지닌다. 각 전통이 향하는 초월의 의미까지 하나라고 말한다면 그 차이를 지나치게 평평하게 만들게 된다. 그러나 서로 다른 이름의 신과 진리를 향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순간에는 닮은 움직임이 보인다. 멈추고, 침묵하고, 호흡하고, 듣는다. 즉각적인 판단을 내려놓고 자신보다 큰 무엇을 향해 감각을 연다. 수행은 이때 각 종교의 교리를 확인하는 행위인 동시에, 자신의 목소리만으로 가득했던 내면에 다른 존재가 들어올 여백을 마련하는 일이 된다. 기독교의 기도가 신을 향하고 불교의 수행이 마음과 존재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전통 위에 놓여 있어도,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상태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점에서는 서로를 비추어볼 수 있다. 종교적 수행의 공통성을 찾는 일은 서로 다른 믿음을 하나의 결론으로 합치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그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방식을 얼마나 오래 탐구해왔는지를 살피게 한다.<br/><br/>신의 존재를 확신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이러한 장면은 충분히 의미를 갖는다. 무엇을 믿는가와 별개로 인간이 아주 오래전부터 침묵과 기도와 명상을 반복해왔다는 사실은 인간의 내면이 무엇을 필요로 해왔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 생각의 소음만으로 살아가기 어렵다. 때로는 말하기를 멈추고 듣는 시간이 필요하고,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감각을 조금 느슨하게 만들 필요도 있다. 종교 경험을 철학과 심리학의 관점에서 탐구한 미국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가 제도와 교리만큼 개인이 직접 경험하는 종교적 삶에 관심을 두었던 까닭도 이런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에게 종교는 제도의 바깥에서도 한 개인의 내면에서 실제로 경험되는 사건이었고, 중요한 것은 교리의 추상적 진술만큼 그것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였다. 『쉼 숨 섬』에서 서로 다른 수행자들의 목소리를 함께 읽는 경험도 이와 맞닿는다. 서로 다른 종교의 수행을 나란히 바라보다 보면 신에 대한 합의보다 먼저, 자신의 한계를 넘어 더 넓은 존재와 연결되고자 했던 인간의 오래된 욕망이 보인다.<br/><br/>그 연결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수행은 산속이나 명상실에 있는 동안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말에 화가 솟는 순간, 실패가 자신의 가치를 흔드는 순간, 불안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현재로 끌고 오는 순간에 수행의 시간이 시작된다. 바로 반응하는 대신 잠시 바라보는 것. 불안의 모양과 색과 크기를 살펴보고 그것이 자신과 얼마나 가까운 곳에 있는지 가늠해보는 것. 그 짧은 시간 동안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어도 고통과 자신 사이의 관계는 달라질 수 있다. 관찰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감정에 끌려가는 자리에서, 그것과 함께 살아갈 방법을 선택하는 자리로 조금 이동한다.<br/><br/>이 과정에 완성은 없다. 오늘 자신을 잘 이해했다고 내일도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한 번 평온을 경험했다고 다음 파도가 찾아오지 않는 것도 아니다. 불교가 오래전부터 모든 것이 변한다는 무상을 이야기해온 것처럼 마음 역시 계속 움직인다. 감정이 움직이고 관계가 변하며 삶의 조건도 달라진다. 그래서 수행에는 반복이 필요하다. 한 번의 거대한 깨달음보다 다시 한 호흡으로 돌아오는 일이 중요해진다. 흐트러지면 살피고, 넘어지면 일어나고, 다시 흔들리면 또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 스물일곱 사람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언어로 그 반복을 보여준다.<br/><br/>물은 움직인다. 파도가 되기도 하고 강이 되기도 하며, 어느 순간에는 거세게 소용돌이친다. 물을 영원히 고요하게 만들 수는 없다. 움직임을 완전히 잃고 한곳에 고인 물은 언젠가 탁해지고 썩는다. 삶도 그러하다. 고통을 없애야 앞으로 갈 수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고통이 사라지는 날만 기다리며 같은 자리에 서 있게 된다. 『쉼 숨 섬』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고통이 존재하는 동안에도 다시 흐를 수 있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평온은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는 상태로 주어지지 않고, 수없이 흔들리면서도 돌아올 곳을 알고 있다는 감각 속에서 조금씩 만들어진다. 잠시 쉬어 물결을 가라앉히고, 한 번의 숨으로 지금의 자신을 확인하고, 자신의 섬에 발을 딛는다. 그리고 다시 움직인다. 한평생을 잘 살아내야 한다는 생각은 너무 크고 먼 시간을 한꺼번에 짊어지게 하지만, 한 호흡은 지금 이 자리에서 감각할 수 있다. 사람은 그렇게 한 호흡을 지나 다음 호흡으로, 한 번의 흔들림을 지나 다음 흐름으로 살아간다. 쉼과 숨과 섬은 그렇게 흔들리는 삶 속에서 자신의 물길을 되찾게 하는 세 개의 좌표가 된다.<br/><br/>✏️도서출판 생각정원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88/36/cover150/k55213034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0883617</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꿀잡이새는 여전히 부르고 있다 - [공생의 언어 - 소리, 몸짓, 냄새로 소통하며 진화해 온 생물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36523</link><pubDate>Fri, 25 Sep 2026 19:1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3652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5968593&TPaperId=1753652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82/84/coveroff/896596859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5968593&TPaperId=1753652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공생의 언어 - 소리, 몸짓, 냄새로 소통하며 진화해 온 생물들</a><br/>롭 던 지음, 송근아 옮김 / 흐름출판 / 2026년 09월<br/></td></tr></table><br/>인간은 오래도록 독립을 힘의 언어로 사용해왔다. 홀로 설 수 있다는 것은 성숙과 능력의 증거가 되었고, 문명의 발전 역시 자연의 제약에서 얼마나 멀리 벗어났는가로 설명되곤 했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독립했다는 감각과 실제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도시의 가장 높은 건물 안에서도 우리는 식물이 만든 산소를 호흡하고, 다른 생명이 길러낸 것을 먹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과 하나의 몸을 공유한다. 문명이 정교해질수록 의존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인간의 눈에서 멀어진 것이다. 『공생의 언어』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단절보다, 여전히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자신을 독립된 존재로 상상하는 인간의 역설을 들여다본다.<br/><br/>이 역설은 생명의 단위를 바라보는 방식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의 개체는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에서 끝나는가. 자신의 힘만으로 생존하는 완결된 생명이라는 개념은 실제 생태계 앞에서 흐릿해진다. 인간의 몸에도 수많은 미생물이 살아가고, 서로 다른 종은 먹이와 서식처를 주고받으며 때로 상대가 없이는 지금과 같은 삶을 지속하기 어렵다. ‘나’라고 부르는 존재조차 이미 다른 생명의 활동을 품고 있다면 관계는 완성된 존재들이 뒤늦게 맺는 부수적인 연결로만 볼 수 없다. 생명은 관계 속에서 자신의 형태와 가능성을 얻어왔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미 누군가의 삶에 기대는 일이기도 하다.<br/><br/>이렇게 바라본 생명의 역사는 우리가 익숙하게 배워온 경쟁의 서사를 조금 다르게 읽게 한다. 살아남는다는 말에는 더 강한 것이 승리하고 약한 것은 도태된다는 문법이 깊이 스며들어 있다. 실제 자연에는 포식도 경쟁도 영역 다툼도 존재한다. 동시에 꽃과 수분매개자, 숙주와 미생물처럼 서로 다른 생명이 상대의 능력을 자신의 생존 조건으로 삼아온 역사도 존재한다. 한쪽은 승패가 분명하고 극적인 사건이 되지만 다른 한쪽은 일상의 지속 속에서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공생의 언어』가 상리공생을 자연사의 중심으로 불러오는 순간, 생존이라는 말의 의미도 넓어진다. 살아남은 존재의 강인함만큼 그 존재를 살아남게 한 관계를 함께 바라보는 일. 생명의 역사는 개체들의 계보인 동시에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 되어온 관계들의 계보이기도 하다.<br/><br/>현대의 인간은 그 어느 시대보다 복잡한 생태적 관계에 의존하면서도 그 관계를 감각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간다. 던이 타임스퀘어에서 바라본 풍경은 이 역설이 압축되어 있다. 도시의 불빛 아래 식물과 동물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미생물은 여전히 인간 곁에 존재한다. 식탁에 놓인 음식 뒤에는 토양과 작물, 수분매개자와 미생물이 있고, 마시는 물과 숨 쉬는 공기에도 다른 생명의 활동이 개입한다. 인간을 둘러싼 연결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것을 직접 경험할 기회는 줄어들었다. 달라진 것은 연결의 정도보다 연결을 알아차리는 감각이다. 의존은 이어져도 그 대상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관계는 유지되어도 그 관계를 감각하는 능력은 희미해진다. 그렇게 인간은 수많은 존재와 함께 살아가면서 자신을 고립된 존재로 상상하게 되었다.<br/><br/>《아바타》의 판도라는 이러한 현대인의 생태적 고립을 반대편에서 비추는 세계처럼 읽힌다. 눈부신 자연을 구현한 기술의 힘 너머에는 생명과 직접 연결되고 서로의 신호를 몸으로 이해하는 세계가 있다. 나비족은 자연을 배경이나 자원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그들의 몸은 다른 생명과 접촉하고 그 접촉은 세계가 하나의 관계망이라는 사실을 감각하게 한다. 이들에게 연결은 자연에 관한 지식이나 관념으로 머무르지 않고 삶의 방식 자체를 구성한다. 다른 생명과 관계 맺는 일은 세계를 소유하고 관리하는 주체의 자리에서 벗어나 자신 역시 그 관계망에 속해 있음을 받아들이는 일이 된다.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낸 미래의 행성을 바라보며 현대인이 갈망하는 것이 오히려 아주 오래된 감각이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수많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자신이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감각. 판도라에 대한 동경에는 현대 문명이 희미하게 만든 생태적 친밀성에 대한 갈망도 섞여 있을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먼 미래의 세계지만, 그 세계를 통해 되찾고 싶은 것은 인간이 다른 생명과 자신의 삶을 분리하기 이전부터 이어져 온 관계의 감각이다.  그 오래된 연결의 감각을 실제 생명의 세계에서 보여주는 존재가 원제의 꿀잡이새다. 꿀잡이새는 벌집을 발견하면 인간에게 신호를 보내고, 인간은 그 소리를 따라가 벌집을 연다. 인간은 꿀을 얻고 새는 인간이 열어놓은 벌집에서 밀랍을 얻는다. 서로 다른 두 종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상대의 신호를 의미로 받아들인다. 자연의 언어는 인간의 말과 문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리와 몸짓, 냄새와 화학물질, 이동과 계절의 리듬도 생명이 서로의 존재를 감지하고 반응하는 방식이다. 자연은 인간의 언어로 말하지 않을 뿐 수많은 신호를 끊임없이 주고받아왔다. 인간이 그 신호를 언어로 받아들이는 감각을 잃어갈수록 자연은 점차 침묵하는 세계처럼 인식된다. 그렇기에 공생의 출발에는 다른 생명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그들이 보내는 신호를 감지하는 ‘주의’가 놓인다. 인간의 삶이 어떤 존재들의 활동에 기대고 있는지를 인식하고, 타자를 인간에게 유용한 자원으로 번역하기 전에 그 존재가 살아가는 방식을 살피는 태도다. 듣는다는 행위는 여기에서 하나의 생태적 실천이 된다. 우리는 자연의 목소리를 대신해 말하기에 앞서 이미 도착하고 있는 수많은 신호를 들을 감각부터 회복해야 한다.<br/><br/>그리고 관계에는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 꿀잡이새가 살아 있어도 인간이 더 이상 그 부름을 듣지 않고 따라가지 않는다면 오랜 시간 두 종 사이에서 형성된 상호작용은 소멸한다. 종의 멸종만을 헤아려서는 포착하기 어려운 상실이다. 한 생명이 사라지지 않았어도 그 생명과 다른 존재 사이를 오가던 신호와 행동, 의존과 교환의 방식은 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생태계를 보존한다는 말에는 개체와 종을 지키는 일뿐 아니라 생명 사이의 관계가 지속될 조건을 지키는 일도 포함되어야 한다.<br/><br/>인간의 특별함을 다른 생명보다 우월한 능력에서 찾는 대신, 롭 던은 어떤 관계를 만들어갈지 선택할 수 있다는 데서 찾는다. 이 선택은 공생을 아름다운 도덕적 이상으로 받아들이라는 요구와도 다르다. 자연에는 경쟁도 포식도 존재하며 모든 관계가 평화롭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미래를 인간만의 이야기로 설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기후와 생태계의 위기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종을 구할 수 있는지만 묻지 않는다. 앞으로 어떤 생명들과 서로의 삶의 조건이 되어줄 것인지, 어떤 관계를 이어가고 어떤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갈 것인지까지 함께 생각하게 한다.<br/><br/>생명의 역사를 홀로 살아남은 자들의 기록으로만 읽으면 인간 역시 혼자 살아남아야 할 존재가 된다. 그러나 그 역사를 서로의 삶을 가능하게 해온 관계들의 기록으로 다시 읽는 순간 미래의 모습도 달라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낭만적인 회귀보다 이미 자연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감각하는 일일 것이다. 몸속의 미생물에서 숲의 균사망까지, 식탁의 작물에서 멀리서 인간을 부르는 한 마리 새까지 생명은 끊임없이 다른 생명에게 기대어 자신의 세계를 이어왔다. 꿀잡이새는 여전히 부르고 있다. 이제 우리가 다시 배워야 할 것은 그 오래된 언어를 듣는 법이다.<br/><br/>✏️흐름출판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82/84/cover150/896596859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1828458</link></image></item><item><author>쭐떠기</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앞선 사람의 목소리를 기억한 채 - [끝나지 않는 노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31587</link><pubDate>Tue, 22 Sep 2026 21: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25402264/1753158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22131663&TPaperId=1753158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66/92/coveroff/k32213166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22131663&TPaperId=1753158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끝나지 않는 노래</a><br/>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9월<br/></td></tr></table><br/>어떤 책은 자신의 시간이 다시 올 때까지 기다린다. 쓰인 문장은 그대로여도 그것을 읽는 사람과 세계가 달라지고, 한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의미가 새로운 시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2011년에 처음 출간된 최진영의 『끝나지 않는 노래』가 15년을 건너 다시 독자에게 돌아왔다. 그사이 최진영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몸으로 감당하고,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쓰고, 무너진 세계에서도 서로를 돌보는 사람들을 거쳐 생명의 기원까지 자신의 문학을 넓혀왔다. 오래전부터 그의 소설을 읽어온 독자에게 이 책과의 재회가 각별한 이유도 그 시간에 있다. 한 권의 책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와 다시 돌아왔을 때 사이에는 작가가 써온 시간과 독자가 읽어온 시간이 함께 쌓여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책의 귀환은 과거의 복원이면서 현재의 독서다. 같은 문장을 다시 읽는 일에는 그동안 흘러간 시간까지 함께 읽는 경험이 포함된다. 2026년의 『끝나지 않는 노래』는 그렇게 두 번째 시간을 얻었다.<br/><br/>1927년에 태어난 두자, 그의 쌍둥이 딸 수선과 봉선, 그리고 손녀 은하. 소설은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생을 따라 긴 시간을 건넌다. 이들을 묶어 ‘여성 3대’라고 부르면 간단하지만, 최진영은 그 간편한 호명에서 한 사람씩 꺼내온다. 두자에게는 두자의 시간이 있고 수선과 봉선에게는 각자의 욕망과 좌절이 있으며 은하에게도 자신의 오늘이 있다. 누군가를 엄마나 할머니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자신과 맺은 관계를 통해 그를 이해하기 쉽다. 엄마에게 엄마가 아니었던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 할머니에게도 누군가의 딸이었던 시절과 젊은 몸과 욕망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 익숙한 호칭 뒤로 밀려난다. 그래서 이 소설이 긴 시간을 거슬러 하는 일은 한 가족의 역사를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관계의 이름에 가려진 고유한 생을 다시 호명하는 일. 두자. 수선. 봉선. 은하. 이름을 되돌려주는 순간 역할로 기억되던 사람에게 한 사람의 생애가 돌아온다.<br/><br/>그 생애를 옥죄는 것은 언제나 거대한 사건의 모습으로 찾아오지도 않는다. 먹을 것의 개수를 헤아리는 눈, 집 안의 한 공간, 밥과 노동과 결혼과 출산처럼 너무 일상적이어서 역사라고 부르지 않았던 것들이 한 여성의 세계를 결정한다. 특히 아픈 것은 여성을 억압하는 오래된 질서가 여성과 여성 사이에서도 되풀이된다는 사실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는 사랑만큼이나 오래된 규범이 스며 있다. 자신도 그 질서 안에서 상처 입은 사람이 어느 순간 다음 사람에게 같은 규칙을 요구한다. 폭력은 누군가의 악의만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당연하다고 배운 것이 생활의 규칙이 되고, 그 규칙이 다시 누군가의 삶을 좁힐 때 폭력은 한 개인보다 오래 살아남는다.<br/><br/>그래서 이 소설의 여성들은 사랑하면서 상처 입히고, 상처 입으면서도 누군가의 행복을 바란다. 자신의 삶이 종지에 담긴 까만 간장처럼 좁고 짜고 독하게 느껴지면서도 딸에게는 더 넓은 삶을 바라게 되는 마음. 그 모순은 이들의 사랑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결함이라기보다 사랑조차 자신이 살아온 세계의 언어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던 삶의 흔적처럼 보인다. 고통과 함께, 그 고통을 다음 사람에게는 조금 덜 건네고 싶다는 마음도 세대를 건너 전해진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아니라면, 적어도 자신이 받은 상처의 양을 조금 줄이는 일은 가능할 것이다. 이 소설에서 희망은 그렇게 작은 단위로 존재한다.<br/><br/>여성들의 이야기는 왜 이다지도 뼛속까지 시린가. 두자의 시대를 살아본 적도, 수선과 봉선이 통과한 시간을 경험한 적도 없는데 그들의 삶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겪어보지 못한 기억을 몸소 겪은 사람처럼 아파진다. 문학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게 한다는 말만으로는 이 감각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해에는 여전히 나와 타인의 경계가 있지만, 어떤 소설은 그 경계를 잠시 흐린다. 알지 못했던 사람의 배고픔과 두려움, 분노와 체념이 문장을 통과해 읽는 사람의 감각 안으로 들어온다. 경험하지 않은 과거가 기억과 비슷한 무게를 얻는 순간이다.<br/><br/>최진영은 그 긴 역사를 거대한 사건보다 몸과 생활의 감각으로 전한다. 국가의 언어로 쓰인 역사는 식민지와 전쟁, 산업화라는 이름으로 시대를 구분하지만 한 사람의 몸을 통과한 역사는 그렇게 반듯하게 나뉘지 않는다. 거기에는 먹어야 했던 밥과 해야 했던 노동, 낳아야 했던 아이와 견뎌야 했던 관계가 있다. 공식적인 기록에서 한 줄이 되는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평생이 된다. 여성의 입으로 전하는 여성의 이야기가 갖는 힘도 여기에 있다. 역사 바깥에 새로운 사실을 보태는 데서 그치지 않고, 무엇을 역사라고 부를 것인지 그 기준을 바꾼다. 시대를 움직인 거대한 사건 옆에 한 사람이 견딘 하루를 놓는다. 그러면 사적인 삶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한 시대의 가장 정밀한 기록이 된다.<br/><br/>이런 감각은 최진영의 소설을 오래 읽게 만드는 힘과도 맞닿아 있다. 그의 인물들은 고통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상처 입은 사람에게 피해자의 역할만을 맡기지도 않는다. 살아남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다시 누군가를 돌보는 동안 한 인간은 어떤 명사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 존재가 된다. 최진영은 그 복잡함을 쉽게 정돈하지 않는다. 독자를 설득하려 애쓰기보다 한 사람의 삶을 충분히 살아 있게 만들고, 그 생의 감각이 독자에게 도달하도록 둔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고 난 뒤에는 이야기를 이해했다는 감각보다 누군가의 시간을 한동안 함께 통과했다는 감각이 먼저 찾아온다. 『끝나지 않는 노래』에는 이후 여러 작품을 거치며 더욱 깊어진 그 문학의 오래된 맥박이 이미 뛰고 있다. 실제로 최진영은 이번 개정판에서 지난 15년 동안 같은 물음을 서로 다른 이야기로 전해왔음을 깨달았다고 썼다.<br/><br/>제목의 ‘끝나지 않음’도 그래서 고통의 반복만을 뜻하지 않는다. 두자에게서 수선과 봉선으로, 다시 은하에게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삶을 둘러싼 조건은 모습을 바꾸고 이전 세대가 남긴 것은 다음 세대에서 조금 다른 형태를 얻는다. 같은 노래를 이어 부른다고 해서 같은 소절을 부르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견뎠던 자리에서 다른 누군가는 조금 더 움직이고, 한 사람이 바라기만 했던 삶을 다음 사람은 조금 더 가까이 살아본다. 반복 속에서 생겨나는 그 미세한 차이가 세대라는 긴 시간을 앞으로 움직인다.<br/><br/>그러므로 15년 만에 돌아온 이 책에서 다시 듣게 되는 것은 여성들의 고통만은 아니다.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 바라주었던 마음, 살아온 세계보다 조금 넓은 세계를 다음 사람에게 건네고 싶었던 마음도 함께 이어진다. 최진영은 이번 개정판에서 희망을 자신의 바깥이 아닌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누군가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한 사람 안에서 다음 사람에게 건너갈 수 있다면, 삶은 물려받은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고통이 반복되는 동안에도 사람은 조금씩 다른 소절을 만들어낸다.<br/><br/>그래서 이 노래에는 마침표가 없다. 오래전 한 여성의 몸에서 시작된 삶은 다른 몸과 다른 시대를 지나며 계속 변주된다.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와 누군가에게 건네고 싶었던 사랑, 살아낸 날들과 살아보지 못한 삶에 대한 바람까지 한 소절씩 보태어진다. 우리는 앞선 사람의 노래를 그대로 반복하지 않는다. 다만 그 목소리를 들은 사람으로 살아간다. 세대가 이어진다는 것은 같은 삶을 물려받는 일이 아니라, 앞선 사람의 목소리를 기억한 채 자신의 소절을 부르는 일일 것이다. 『끝나지 않는 노래』가 다시 돌아온 지금도 그 노래가 계속 들리는 이유다.<br/><br/>✏️한겨레출판으로부터 하니포터 13기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66/92/cover150/k32213166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1669228</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