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머지 학교 나의 학급문고 6
이가을 지음, 임소연 그림 / 재미마주 / 200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엄마 우리도 영월가요"
도서관에서 대여해 온 <나머지 학교>를 읽은 아들이 보챈다.
"영월엔 왜?"
"거기 시골 폐교를 책박물관으로 만들어놨데. 나 거기 가보고 싶어."
아이고 내아들... 기특도 하지 궁디 한번 두들겨 주고 나도 <나머지 학교>를 들여다 본다.

제목만 보고 나는 공부가 떨어지는 아이들이 정규수업 시간 외에 남아서 하는 나머지 공부 이야기거니 했다.... ㅋㅋㅋㅋ
글쓴이 이가을..... 이름도 참곱다.

나머지 학교는 전교생이 아홉뿐이던 산골마을 학교가 읍내에 조금더 큰 학교와 합쳐지면서 버려진 폐교를 잊지 못한 채옥이의 이야기 이다.
채옥이는 아픈 할머니와 산골 깊숙이 산다. 한시간에 한번 온다는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니지만 할머니 간호에 피곤한 채옥이는 가끔 버스를 놓치고 만다. 버스를 놓쳤을지라도 기특한 꿈만은 놓치지 않은 채옥이.... 혼자서 폐교로 가 선생님 노릇 학생 노릇하며 열심히 학교 생활을 한다. 급기야 채옥은 가끔 놓치던 버스를 자주 놓치게 되고....
채옥이도 안다. 나머지 학교에서의 학교생활을 정리해얀 다는 걸.
자주 학교에 결석하는 걸 안 선생님이 나머지학교로 채옥을 찾아와 국기게양대 앞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이야기는 끝이난다.
"여기 우리 학교가 참 좋은데...." 채옥의 혼잣말과 함께.

마지막장을 덮으면 강원도 영월에 있다는 나머지 학교 사진이 보인다. 이제는 책박물관이 되어 책을 좋아하는 누구나가 와서 책도 보고 운동장과 마을 강가에서 놀고가도 되는 곳이 되었다고. 
인터넷을 뒤져 영월책박물관을 찾아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2008년 7월을 마지막으로 게시물이 없다. 리모델링이 끝나면 다시 공지 올리겠다는 게시를 마지막으로.
슬쩍 불안하다. 혹시 채옥과 병두, 김달서 선생님의 사랑으로 남은 나머지학교가 용두사미 된건 아니겠지. 아이와 꼭 가자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할까 은근 걱정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별이 모자르다. 
내 가슴에 차오르는 이 감정의 소용돌이를 표현하기에 별 다섯개는 너무나 작고 작다.
이 놀랍고 위대한 소설. 윌리엄 폴 영이라는 사람이 혼자서 쓴 책이라고 믿어지지 않는다.(그는 마지막에 목사님 두분과 이야기를 나누며 원고를 손질하긴 했다) 분명 보이지 않지만 함께 계시는 그분이 폴 영과 함께 하셨다는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가슴이 떨린다. 손이 떨린다. 어지럽다. 그리고 눈물이 흐른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소설을 권하고 싶다. 폴 영의 말처럼 그 후의 느낌은 각자의 몫이리라.

하느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는 없다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이 나 개인의 고통이거나 혹은 나를 뺀 타인의 고통을 제3자의 입장에서 느끼는 순간에도 나는 수시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한다. 만약 그분이 계시다면 그분은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얼마간의 희생쯤은 아무렇지도 않으신 무서운 분이라고 생각했다. 폴 영도 말했듯이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나만 갖고 있는 그런 의심은 아닐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한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분을 두려워하고 있는게 아닐까. 내가 그분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않으면 그분이 나를 심판하리라는 두려움으로 그분을 거짓되게 사랑하고 있는건 아닐까......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도 그분이 내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행하시면 나는 서슴지않고 그분을 심판해왔다. 어떻게 하느님이 그럴수 있어?! 라고.....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늘 그렇게 들어왔으니 그러리라고 막연히 생각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틀림없는 사랑이시다.
하느님에게 불가능이 있는가.
지금껏 배워온대로(종교를 배워왔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이 얼마나 경솔한 거만인가...) 하느님에게 불가능은 없다. 불가능이 없음에도 그분은 이 세상의 악을 그대로 수용하신다. 멈출 수 있으심에도 그대로 두고 보신다.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이다.
하느님이 악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만드신 우리 인간들이 악을 행한다. 그것을 하느님은 두고 보신다.
언제고 갚아주시려고 두고 보심이 아니라 그 속에서 우리가 깨어나길 기다려 주신다. 그것이 그분의 사랑이다.
어려운가 내말이... 그러나 나는 이글을 쓰고 있는 나는 이말이 이토록 쉬울 수가 없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것을 수용하신다. 그것이 사랑이므로......

맥의 사랑하는 막내딸 미시는 살인범에게 살해되었다. 맥은 살인범도 용서할 수 없었고 미시를 지키지 못한 자신도 용서할 수 없었으며 그 모든 상황을 일으키신 하느님도 용서 할 수 없었다. 두고 보심도 방관이니 하느님께도 책임이 있는거라고 맥은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하느님을 심판했다. 살인범이 미시를 살해하지 못하도록 멈출 수 있었음에도 그대로 두신 하느님..... 나도 이해 할 수 없었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우리 주변에 많고 많다.
하느님은........ 우리의 이해 따위는 필요없으신 분이다. 그분은 그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미시를 살해되게 함으로써 맥을 그분 품에 안고자 하셨을까? 그것이 우리가 하는 하느님에 대한 오해의 핵심이다. 그분은 그런식으로 일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당신의  뜻을 이루고자 몇몇을 희생시키는 그런 식으로 일하시지 않으신다. 이해가 되는가?
하느님은 미시를 살해한 살인범도 사랑하신다. 이말은 이해가 되는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18:18)
도저히 용서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내게도 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하느님도 용서하시지 않았으면 싶은.....
용서하지 못해서 고통받고 어두운 영혼은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그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 영혼이다.
나는 용서하지 못해서 힘들고 눈물겹고 하느님을 원망한다.
용서하지 못해 눈물짓는 고해소의 나를 향해 신부님은 말씀하셨다.
"용서하지 못할껍니다. 죽는날까지 용서하지 못하겠지요. 그러나 용서하십시오.. 그것이 자매님의 십자가 입니다..."
나는 그말씀에서 깨닫았다. 그것이 나의 십자가....
하느님이 그대로 두신 나의 십자가... 
나의 용서를 받지 못하는 그사람도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라는 걸 <오두막>을 통해 알게되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또 하느님은 나를 특히 더 좋아하신다.
하느님은 누구나 특히 더 좋아하실것이다.
그것이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이므로.....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그분의 심판이 두려워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 있지 않으면 내가 살아갈 수 없으므로 그분을 사랑한다. 나는 너무나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이나... 그분이 나를 특히 사랑하심을 의심치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 동생 두나 - 정일근 시인의 우리 곁의 이야기 1 좋은 그림동화 17
정일근 글, 정혜정 그림 / 가교(가교출판)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아이들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선물 중에 하나가 애완동물 키우기다.

쓰고 보니 무서운 생각이 든다. 생명을 선물로 갖고 싶어한다니...

하나가 처음 두나를 보았을때 똥강아지라고 밀어냈던 이유도 강아지를 한 생명으로 보기 보다 그저 선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아이도 강아지 키우기가 소원인데 아파트에서는 개를 키우지 않겠다는 아빠의 반대에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지금껏 금붕어나 거북이 장수풍뎅이 그리고 달팽이 크게는 햄스터까지 키워보았으나 아이는 처음 얼마동안만 관심을 보이고 좋아할 뿐 그 관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매번 애완동물을 들일때는 자기가 책임지고 먹이며 청소를 도맡아하겠다고 약속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일은 어느덧 아빠 차지가 되고 만다. 아이 아빠는 아파트여서 강아지는 안된다 하지만 아이의 관심이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을 미리 예견하고 있기에 반대하는 것이다.

남편의 말도 틀리지 않으나 혼자 크는 우리 아이를 생각할 때 나는 은근히 강아지 한마리 우리 아이 품에 안겨주고 싶다.말로는 혼자 크니까 동생처럼 강아지 한마리 있으면 배려하는 법도 배우고 책임감도 생길꺼라고 하지만 나의 속마음은 그저 내가 없을때 아이가 외롭지 않았으면 하는 이기심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따뜻하고 동그란 눈을 가진 강아지를 내 아이 품에 안겨줄 생각만 해보았지 강아지를 데려다 어떻게 돌보고 아이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어떻게 가르키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지금껏 그래왔던 거다. 달팽이도 장수풍뎅이도 거북이도 금붕어도 햄스터도..... 엄마가 그랬기에 아이도 키우던 애완동물들이 어느날 죽어나가도 잠깐 찔끔거리고 덤덤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진정 내 아이를 위하는 일인가.

생명을 선물로 갖고 싶어하는 이야기 만큼이나 무서운 이야기이다.

나는 한번도 이런 무서운 일을 하는 내 아이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강아지를 안고 좋아할 내 새끼만을 상상했을 뿐...

 

강아지 두나가 하나의 동생으로 받아들여지는 대목에서 아이는 미래의 자기 강아지에게 자기 이름을 딴 이름을 지어주고 동생처럼 돌보며 소중히 여기겠다는 다짐을 했다. 아이의 동화같은 그 소망이 언제쯤 이뤄질지는 미지수이나 아이 마음에 이쁜 그림 하나 그린듯 하다.

 

책이 참 이쁘다.

표지도, 내용도, 일러스트도, 꾸밈도 참 예쁜 책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은방울이라고 표현한거며 두나의 엄마 영희의 털빛을 참나무 낙엽 색깔이라는 표현이며 동화가 마치 한편의 예쁜시 같다.

애완동물을 장식품이나 장난감쯤으로 여길 우리 시대 아이들에게 이 예쁜 동화책을 한권씩 선물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 딸과 함께 읽는 미셸 오바마 이야기
데이비드 콜버트 지음, 박수연 옮김 / 부키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미국이란 나라.
초등학교 시절, 미제 연필 한자루면 모든 친구들의 부러움을 살 수 있었다. 미제 소시지로 도시락 반찬을 채운 날이면 수줍음많고 내성적이던 나와 밥을 같이 먹으려던 아이들이 서로 틱틱거리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이민 가는 친구를 부러워 하며 여기 이 좁아터진 나라에 나를 붙들어놓는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렇게 내 어린 시절의 미국은 화려하고 말그대로 아름다운 나라 美國 였다.

아름다운 나라 미국이 아름다울 수만은 없는 이유 중의 하나인 인종 차별의 역사는 슬프게도 역사로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나라 미국에서 아름답지 못한 피부색을 가진 흑인으로서 살아남기!  기도 죽지않고 당당하게! 
미셸이 그렇게 성장할 수 있는 배경에 자식들이 그렇게 자라길 소망한 부모가 있다. 미셸의 부모는 아이들에게 최고의 것을 주었다. 바로 최고의 교육과 따뜻한 가정, 그것이 었다. 또 항상 자식들에게 열심히 노력하라고 했다. 그것이 미셸이 항상 자신감으로 가득차 모든일을 해 나갈 수 있는 힘이었다.

미셸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팔 할이 교육이라고 말한다. 그 믿음만큼 그녀는 적극적으로 공부했고 프린스턴과 하버드 로스쿨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고 일류 법률 회사에서 변호사로 일했다.(이곳에서 미셸은 버락을 만났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인정을 한손에 쥐었지만  미셸은 곧 변호사직을 버리고 사회 봉사직으로 이직을 한다. 이 또한 원하는 삶을 살라는 부모님의 가르침으로 커온 미셸의 망설임 없는 선택이었다.

미셸은 낯설고 새로운걸 두려워하지 않았고 기회를 잡으려고 노력했다. 또 모든일에 집중력을 갖고 최선을 다했다. 사소한 일이라도 대충하는 법이 없었다. 미셸은 숨김이 없고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줄 아는 자신감으로 꽉 차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그녀가 미국 최초의 흑인 퍼스트레이디가 되는 비결이었다. 
세계 최고의 국가를 자처하는 미국의 백악관 안주인이 된 미셸은 당당하게 말한다.
"꿈꾸고 열심히 노력하는 한 성취에 한계란 없다."고. 

왜 공부해야 하는지 모르고 공부하는 우리시대의 아이들.
진정 자신이 원하는 바 또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부모가 미는데로만 밀려가는 우리 아이들.
그리고 자신도 정말 왜 공부해야하는지 진정 내 자식이 돈버는 기계가 되길 바래 공부만을 재촉한 적은 없는지 반성이 필요한 우리시대의 부모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머니를 돌보며 - 딸의 기나긴 작별 인사
버지니아 스템 오언스 지음, 유자화 옮김 / 부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뜻밖의 행운이었다. 이 책을 읽게 된건....
생각지도 못했던 이 뜻밖의 선물인 <어머니를 돌보며>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부터 시작하려 한다.

책의 겉표지를 보면 파킨슨 병에 걸린 어머니를 7년간 돌보며 써내려간 기록이라고 분명 적혀있음에도 나는 아이러니 하게 ’웰빙’ ’잘먹고 잘살기’가 떠오른다. 이것은 나의 장난기 일까. 아니면 출판사의 깊은 의도일까.

남편의 출장으로 아이와 한침대를 쓰며 아침을 맞았다. 
알람소리를 듣고 눈의 뜬 후 아이와 뒹굴뒹굴 간지럼태우기를 하다가 문득 사흘에 걸쳐 읽고 있는 <어머니를 돌보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책 중간에 치매에 걸려 더이상의 일상적인 대화가 불가능 해진 어머니에게 딸이 점심엔 무엇을 드셨냐고 묻자 어머니가 "찐 가마니 몇개"라고 대답한 장면을 아이에게 보여주며 같이 키득거렸던 기억이 있기에 말을 꺼내기가 수월했다.
"그 책처럼 엄마도 치매에 걸려 널 못알아보게 되면 어떻게 하지?"(나는 진정으로 물었다. 그런상황이 되면 정말 어쩌지...)
"내가 엄마를 알아보니까 괜찮아"(녀석....... 정말 맘에 드는 아들이다 ㅋㅋㅋ)
"엄마가 계속 너를 괴롭히고 힘들게 해도 괜찮아?"(맘에 드는 답을 해주었기에 한단계 높여 어리광을 부려보았다)
"그럼 죽어라 뭐"(허거덕 나쁜놈)
"엄마 근데 몸만 죽는거지?"(살짝 긴장한다)
"당연하지. 몸만 죽고 영혼은 천국에 가서 널 기다리고 있지. 몸은 죽어도 항상 영혼은 네 안에 살아있을꺼야. 네가 엄마를 생각할때마다 네 옆에서 너를 지켜보고 있을꺼야. 왜냐면 사랑은 옆에 있어주는 거니까. 넌 내 애인이잖아."(괜히 꺼냈나 아침부터 이런얘기)
"그치만 엄마 90살까지는 살면 좋겠다.."(아이가 슬쩍 눈물을 훔친다. 건성으로 듣고 대답하는 줄 알았는데 녀석 제법 심각하다)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불안이 있다.
겉으로 표출된 불안이 어떤 모습이든 불안을 깨고 안으로 들어갈 수록 불안의 근원은 죽음과 가까워진다.
나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 내 모든 행동, 사고, 말에 영향을 끼친다.
어느날 갑자기 내가 죽으면 어쩌지. 아이가 죽으면 어쩌지. 남편이 죽으면 어쩌지.......

저자의 어머니는 젊어서 강직하고 자기일을 제대로 해내며 남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자녀들에게 바른길을 일러줄 줄 아는 그런 어머니였다. 또 나름대로 직장에서 자기몫을 훌륭히 해내는 사회인이며, 남편과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그런 아내였다.
그러나 파킨슨병이 찾아오고 걸음걸이가 둔해지고, 지각능력을 상실해 가며, 환각을 보고 자신의 몸과 마음이 망가져 가며 기능하는 인간이였음을 어머니 자신조차도 점차로 잊어가게 된다. 꽤 쓸모있던 한 인간이 노쇄해지고 급기야 어느날은 쓸모없는 물체처럼 바뀌어가는 시간....그래서 겪게 되는 딸의 심정... 그리고 딸이 추측하는 어머니의 심경... 기록이다. 작자는 엄마가 정신이 온전했다면 물리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데 동의하지 않았을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온전치 않아지고 하루종일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거나 어떠한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으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엄마는 가끔씩 맑은 눈빛으로 말한다. 죽고싶지 않다고.

내가 이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본 어떤 한 친구는 작년에 어머니를 떠나보냈기 때문에 자신은 이런책은 읽고 싶지 않다라고 했다. 엄마란 소리만 들려도 눈물이 나기에.....
그러나 나는 다 읽고 나면 꼭 빌려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의외로 책을 읽으며 담담했다. 그것은 아마 저자가 자신의 감정에 빠져 책을 감상적으로만 끌어가지 않기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엄마가 혹은 부모가 혹은 다른 내 가족이 죽음으로 나와 이별하는 시간을 갖을때 또 내게도 예외없이 죽음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이 책은 도움이 될것이다. 

흐릿한 정신, 뻥뚫린 눈으로 저자의 엄마는 말한다. "난 너와 멀어지고 싶지 않아." 
우리가 갖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더이상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 그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함께 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불안도 큰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읽을때도 생각했지만 나는 어느날 갑자기 죽고 싶지 않다. 내 아이에게 어느날 갑자기 엄마가 죽어버렸다고 생각하게 하고 싶지않다. 
그렇다고  이별의 시간을 길게 갖고 싶지도 않다. 적당히 그 적당히란 의미를 조금더 생각해 보아야겠지만 적당히 이별의 시간을 갖고 싶다. 병든 부모의 죽음은 어떤식으로든 자식에게 죄책감을 갖게 한다. 그러나 그 길고 힘든 시간이 다시온다면 더 잘할 자신도 없으면서 그저 막연히 좀 더 잘 할껄 하는 후회를 남긴다. 그것은 말 그대로 남은 자의 죄책감, 후회이다. 부모를 위해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내 서러움을 위한 서러움.... 내가 너무 냉소적인가???

우리는 정의 내리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원인밝히기도 좋아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무슨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우리가 갖는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이 줄어들게 될까? 죽음이란 이런것이다. 이런원인으로 우리가 죽게된다 이전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함을 안타까워 하기 이전에 지금 주어진 이시간에 감사하고 헛되이 보내는 시간을 줄여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닥치지않으면 인간은 마냥 늘어지는 존재이기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살아있고 죽음은 아직 멀었다고 믿기에 아니 그날이 바로 코앞이라고 해도 오늘 지금 이 시간을 감사히, 그리고 열심히..... 그것이 유한한 존재인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