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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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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순수 본문만 700쪽을 넘는 이 대장정의 소설을 읽어내는 것(읽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읽어내야만 했다)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 이유가 단순히 길고도 긴 장, 장편의 소설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보다 더한 장의 장, 장편의 소설에도 쉽게 매혹되는 나는 가히 소설 체질이라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다. 그런즉 내 말은 이 책이 힘들었던 것은 단지 내가 긴 소설을 참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다른 소설들과는 다른 낯선 점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를테면 이야기를 끌고가는데 왜 필요한지 모르겠는 장면들의 연속 같은 것들 말이다. 가정사를 토대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방식은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를 기록하는 수많은 소설들이 택하는 흔한 방식이겠으나, 오츠는 달랐다. 오츠 역시 많은 에피소드들을 통해 1967년의 디트로이트 폭동이 일어나기까지 불안했던 사회상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였을테지만, 그 방식이 너무 지루했다. 한마디로 이야기에 재미가 없었던 것(지극히 내 개인적으로). 그냥 단순히 작가가 하고싶은 이야기가 많았던 걸까? 아니면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길게 늘여 이야기를 끌고가는 것이 조이스 캐럴 오츠의 스타일인가? 새삼 김영하가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통해 썼던 한 문장이 떠오른다. '압축할 줄 모르는 자는 뻔뻔하다.'

 

비평가들에 의해 플래너리 오코너나 존 업다이크 외에도 나보코프와 보르헤스 등과도 비견되고, 매년 노벨문학상에 이름이 거론되기도 한다는 조이스 캐럴 오츠를 소설 체질이라고 자부하는 나는 <그들>로 처음 만났다. 그녀는 1964년 등단 이후로 50편이 넘는 장편과 1000편이 넘는 단편을 썼으며 시, 산문, 비평, 희곡 등 문학의 모든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니, 정말 대단하다.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쏟아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그는 세상사를 예민하고도 날카롭게 빨아들일 수 있는 촉수와 더불어 그를 표현해는데 지치지않는 열정을 가진 자일 것이다. 그런면에서 나는 그녀를 존경한다. 그녀의 예민한 감성과 열정을 존중하는데 있어 작품을 좋아하건 그렇지않건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건 내가 갖지 못한 종류의 삶에 대한 사랑, 혹은 정열일 테니까.

 

나도 처음부터 이 모양 이 꼴은 아니었다. 저 두 사람이 날 이 지경으로 만든 거지. 저 두 사람 때문에 길가에 누워 죽어버릴지도 모르는 꼴이 되다니. 나도 옛날부터 항상 이랬던 건 아니야. (중략) 나도 처음부터 이런 꼴은 아니었어. 저 할망구가 사라지면 나도 다시 일을 시작할 거야. 에설이랑 같이. 너희들한테서 벗어날 거야. 잘난 척하면서 식량만 축내는 것들 같으니. 젠장! 지긋지긋해 죽겠어. 나도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살고 싶다고.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좀 알고 싶어. 이리저리 휘둘리기 싫단 말이야. (중략)

나도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되고 싶어. 근사하게 차려입고 거리를 걸으며 뭔가 중요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중략) 나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 여기에 발목을 잡히고 싶지 않았다고. 진짜야. 지금 내 꼴도 싫어. 이런 머리 모양이라니. 게다가 몸도 너무 뚱뚱하잖아. 이건 진짜 내 모습이 아니야. 난 다른 모습이야. 화장실이 또 말썽이지. 바닥에 물이 고였어. 내가 왜 그런 일에 신경을 써야 돼? 난 시내의 모든 화장실을 청소하거나 20년 전에 콱 죽어버렸어야 마땅한 할망구를 보살피려고 태어나지 않았어. 저 뚱보 자식이 내 몸에 올라타게 하려고 태어난 것도 아니야! 그래, 난 전에도 지금도 취하지 않았어. 너도 알지? 난 지금 사실대로 말하는 거야. 얼굴을 마주하고. 내 기분을 말하는 거라고. 너희는 너희가 특별한 줄 알지? 세상 사람들은 전부 자기가 특별한 줄 알아. 하지만 너희도 나보다 특별할 것 없어. 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할 일도 아주 많고, 구경할 곳도 많아. 세상은 이게 전부가 아냐! 이런 게 아냐! 내 인생은 이런 게 아냐!(158쪽~159쪽)

50, 60년대 전형적인 미국 도시 디트로이트에서 빈민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로레타와 그녀의 아들과 딸인 줄스와 모린이 겪은 그 수많은 에피소드들 중, 이제 겨우 십대에 들어선 아들 줄스에게 하소연하는 로레타의 독백에 가장 많은 공감을 했다. 나 역시도 때때로 그러한 원망, 한탄, 핑계, 저주 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해 어떤 은근한 희망을 거는 말들을 남발하곤 한다. 그것이 오늘을 사는 한 방법임을 은연 중에 알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오늘을 관조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젊음의 몫은 아니다.

사랑, 계급, 인종, 도시 문제를 그린 탁월한 작품이라는 평을 들으며, 알 수 없는 삶을 살아내는 이들의 모습 속에서 책을 읽고있는 독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는 <그들>을 읽으며, 그 안에서 내가 그들과 같은 하나 라는 것을 느낀 것은 바로 저 장면에서 였다.

관람하듯 하는 독서는 재미가 없다. 이야기에 젖어들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내 잘못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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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낙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불안한 낙원
헤닝 만켈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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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스웨덴에서 호주로 가는 배에 요리사로 승선했던 한나는 배에서 만나 결혼한 항해사 남편이 두 달만에 열병으로 죽자, 때마침 정박한 동아프리카의 항구도시로 도망친다. 배에서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배를 떠난 한나는 항구의 싸구려 호텔에 들었는데, 그곳은 호텔로 가장한 매음굴이었다. 거기서 아이를 유산하고 몸을 추스르는 과정에서 흑인 창녀들의 도움으로 건강을 회복한 한나는 매음굴의 사장인 포루투칼 남자의 청혼을 받고, 아무런 애정이 없는 상태에서 결혼에 응한다. 남편과 아이를 잃고, 자신이 가야할 목적지도 막막한 열 여덟의 한나에게 부유한 남자의 청혼은 새로운 삶을 위한 돌파구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남편 아티밀리오는 결혼식 후 몇 주가 지나도록 한나와 관계를 갖지 못해 전전긍긍 한다. 아티말리오는 발기부전이었던 것인데, 실패하는 날들이 몇 주에 걸쳐 계속되자 남편이 눈에 띄게 절망한다고 한나는 느꼈다. 이에 한나는 매음굴에서 자신을 간호했던 창부 펠리시아에게 이 일을 의논한다. 펠리시아는 주술사의 도움을 받아 발기부전에 효과가 있는 약초를 이용해보라고 제안한다. 한나는 보름달이 뜬 저녁, 펠리시아가 건네준 가루를 남편이 먹을 망고에 몰래 바른다. 결혼 후 관계를 시도했던 그 모든 날보다 더 강하고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날도 역시 관계에 실패하자 한나는 남편의 발기부전을 극복하려면 더 강한 약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한다.

 

이튿날 잠에서 깨어보니 그는 죽어 있었다. 그녀 옆에 누워 있었지만 얼굴에 핏기가 없고 몸도 이미 식어 있었다. …… 그는 잠들 때와 똑같은 자세로 누워 있었다. 한나는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두 번째로 미망인이 된 것이다. …… 아티밀리오는 완전한 침묵 속에 죽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룬드마르크처럼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아내와의 관계에 또 다시, 마지막으로, 실패했다는 수치심에 죽은 것 같았다. (199쪽)

 

남편이 죽었다. 딴에는 남편을 도와 부부로서의 정을 쌓고 싶은 시도였지만, 남편이 운영하는 매음굴의 창부가 준 약물을 먹고 남편이 죽었다. 그런데 한나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다. 남편은 수시로 흑인들의 말을 믿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흑인들이 할 줄 아는 것은 거짓말 뿐이라며 언제나 그들을 비방했다. 잠시나마 그녀를 간호했던 백인 간호사 아나 돌로레스도 흑인들은 열등한 존재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백인은 신이 부여한 권리로 흑인들에게 명령하고 벌을 줄 수 있다고 했다. 남편이나 아나 돌로레스의 주의가 아니었더라도 백인과 흑인 간에 진실이나 믿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한나는 보았다. 백인들은 편견과 탐욕으로 흑인들을 지배했고, 자신들의 땅에서 노예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흑인들은 침묵 뒤로 증오를 감추고 있다는 것을 한나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백인이나 흑인 모두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안과 불신 속에 살고 있음을 그녀는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는 남편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하지 않는다. 그저 그는 수치심에 죽은 것 같다고 생각할 뿐이다.

 

아티말리오의 죽음이 흑인 창부와 주술사의 음모에 의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창부가 준 약을 먹고 남편이 죽었는데, 그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 한나가 나는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가난과 추위를 빼면 기억할 것이라곤 음산한 초록의 깊은 강기슭 뿐인 고향을 열 일곱에 떠난 한나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아프리카 땅에 뚝 떨어졌다. 아프리카며 식민지, 흑인, 노예 등에 대한 사전지식은 전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땅, 낯선 사람들로 둘러싸인 곳에서 자신과 같은 피부색의 사람들이 하는 말을 주의깊게 듣지 않을 수 있는 한나의 주체성이, 혹은 어떤 편견도 갖지 않는 자유로운 생각이 나는 너무나 놀라웠다. 나였다면, 펠리시아를 의심하지 않고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의문은 백인 남편을 살해한 이사벨에게도 이어진다. 약삭빠른 처신으로 식민지에서 거부가 된 피멘타는 흑인 여자 이사벨과의 사이에 혼혈의 아이 둘을 두었다. 피멘타는 이사벨과 마치 결혼이라도 한 것처럼 한 집에 살며 혼혈의 아이들을 자신의 보석이라 칭하고 가정교사까지 두어 보살폈는데, 이는 아프리카의 백인 사회에서 우려나 노골적인 경멸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백인 아내와 백인 아이들의 존재를 안 이사벨은 광분하는 백인 아내 테레사를 제치고 남편 피멘타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다. 나는 이 장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과 아이들 외의 가정을 꾸민 남편에 대한 증오라면 백인 아내 쪽이 더 열렬하지 않았겠는가. 이사벨은 피멘타에게 흑인 애인으로서는 드문 특혜를 받으며 생활했다. 그로인해 피멘타는 백인 사회에서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벨이 품을 수 있는 증오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아프리카에 오기 전 자신의 나라에서 꾸린 가정이 증오의 원인일 수는 없지 않은가.

 

이밖에도 한나가 흑인 남자인 모세스와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라던가, 아나 돌로레스가 침팬지 카를루스를 살해하는 장면 등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등장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을 배재한 간결한 문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나는 무리의 습관과 사회의 질서에 쉽게 동조하는 류의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나는 자신에게 보여지는 대로 보고, 자신이 믿는대로 믿었다. 남편이 또는 아나 돌로레스가 흑인들에 대해 아무리 악담을 해도 그녀는 눈으로 보지 않은 이상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한나의 눈에는 흑인도 백인과 꼭 같은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우월감은 남의 것을 착취하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가장 가난한 지역 출신인 한나는 스웨덴에서는 하녀였던 자신이 다만 피부색이 하얗다는 이유로 흑인들을 노예로 부릴 권리가 없다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포르투칼의 식민지였던 모잠비크의 불행한 역사를 소설로 담은 <불안한 낙원>을 보며 엉뚱하게도 나는 인간은 무리를 지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일까를 생각했다. 백인으로, 또는 흑인으로. 남성으로 또는 여성으로 구분하지 않고 독립적인 개체 하나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일까.

매음굴에서 돈을 내지 못한 손님으로 부터 아티말리오가 화대 대신 빼앗은 침팬지 카를루스는 인간처럼 옷을 입고 웨이터 노릇을 하다가도 불현듯 사라져 숲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러나 카를루스는 무리에 섞이지 못하고 항상 인간세계로 돌아왔다. 그런 카를루스를 보며 한나는 생각한다.

침팬지가 더이상 침팬지이기를 원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 인간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더 이상 지금의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 일이?(180쪽)

 

백인 남자를 죽인 이사벨은 정식 재판도 받지 못하고 지하 감방에 갇혀 짐승처럼 죽어간다. 한나는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이사벨을 구명하고자 하는데, 이는 백인 사회에 대한 절대적인 저항이였다. 그렇다고 그녀가 흑인들에 대해 착취를 일삼는 백인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고자 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이사벨을 통해 자신이 납득지 못하는 공동체에 순종할 수 없는 스스로를 보았으며, 인간이 짓는 억지스러운 무리 대신 그녀 자신으로서의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이다. 낯선 땅에서 백인으로도 흑인으로도 구속되지 않고 이질적인 존재로 침팬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외로움을 달래는 한나는 자신이 속할 공동체를 갈망하지만, 결국 홀로 남기로 결정한다. 주워진 틀 안에서 정해진대로 생각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인 한나는 나비가 되어 날아간다.

 

다시 카를루스 생각이 났다. 그는 침팬지이기를 원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인간이 될 수는 없었다. 외로운 침팬지는 흰 웨이터 외투 속의 공허로 변해버렸다. 그녀는 무엇으로 변하고 있었을까?(185쪽)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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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01-13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플 친구로 등록된 회원이 별점을 매긴 책에 대한 리뷰를 반기면서 단숨에 읽었습니다. 책 내용을 요약해놓은 것 같아서 굳이 책을 따로 읽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

비의딸 2016-01-14 10:05   좋아요 1 | URL
윽... 스포가 왕창인 리뷰군요. 책을 따로 읽지 않아도 될 정도라니,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제가 쓴 리뷰만으론 이 책을 이해하기 많이 부족하답니다.
무엇보다 저는 서구열강이 아프리카를 착취하는데에 집중하지 않고, 개인의 정체성에 포인트를 두고 읽었거든요. 오차서 님이 만약 <불안한 낙원>을 읽으신다면 다른 관점으로 이해하시지 않을까요.. 모든 소설은 이야기를 파악하는데서 아니라, 나한테 어떻게 해석되어지는가에서 재미를 느끼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ㅠ.ㅠ 리뷰만으로는 어느 책을 전부 이해하긴 힘들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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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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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아이디어로 진보적인 사이트에 잠입해 여론을 조작하고 사이트 자체의 기능까지 마비시키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댓글부대>의 내용을 과연 어디까지 사실이라고 여겨야 할까. 작가는 소설의 말미에 현실의 인물이나 단체, 인터넷 사이트의 이름을 차용하고 있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은 적전으로 작가 자신의 상상의 산물이라고 출처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2012년 대선 당시 국정원에서 운영한 댓글부대가 있었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나고, 그후로 강남구청 댓글 사건을 비롯하여 크거나 작게 인터넷상에서 댓글부대가 활약하고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지금 이 소설을 전적으로 허구다 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소설의 내용이 어디까지 사실이냐를 따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소설은 때로 현실의 비정함을 미처 따라가지 못할 때가 많으므로.

 

대중에게는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7장, 170쪽)

각 장의 제목들은 나치 독일에서 국민계몽 선전부 장관을 지냈던 선동의 천재 요제프 괴벨스가 했다고 전해지는 어록들을 인터넷에서 모은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씌여진 목차를 주욱 읽다보니 영화 <내부자들>에서 부패한 언론인 역의 백윤식 배우가 했던 대사가 떠오른다. "대중은 개 돼지들입니다. 적당히 짖다가 알아서 조용해 질 껍니다."

 

출처가 불명확할 뿐만 아니라 알 필요 조차 없는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를 살고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과다 사용으로 인한 부작용일텐데, 대중은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정보 아닌 정보조차 사실로 받아들이며 혹은 아무 생각없이 자신이 보게 된 것을 타 사이트로 퍼나르거나, 댓글을 다는 행위를 통해 누군가에 의해 기획된 여론 조작 행위에 뜻하지 않게 동참하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댓글부대>에서 실제로 댓글을 달고 사이트를 어지럽히며 여론 조작을 하는 이른바 댓글부대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선동당하는 일반인들조차 어떤 정치관이나 가치에 따라 행동하는 아니라, 경제적 목적이나 그저 단순히 재미를 위해 행동한다는 것이다. 또 진보적인 정치관과 세계관으로 묶여 한 사이트를 구축한 사람들일지라도 하나의 적을 두고 사나워지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이는 어떤 소신을 가졌든 이 시대의 인간들은 자신의 이익에 반해서는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킨다.

반면, 한국 사회를 조정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등장하는 일흔은 족히 넘은 것으로 보이는 회장이라 불리는 노인은 신중현의 노래 <아름다운 강산>을 열창하며 애국을 말하지만, 작위적인 그의 모습에서 어버이연합의 어르신들이 떠올랐다. 그분들은 '애국'이라는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자식세대들에게 저렇게 늙지는 말아야겠다는 교훈 정도 외의 다른 울림을 주지 못한다(이건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며, 애국은 '나라를 위한 개인의 희생'임을 강조하던 시대를 산 분들에게는 그것이 최선일 것이라고 이해한다).

 

 

작가 장강명은 묻는다. 자, 이것은 실상이고 현실이다. 너는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무엇을 하겠느냐. 혹은 애국이, 또는 국가가 무엇인지 너는 알고있나.

그러나 나는 작가의 물음에 동문서답하고 싶다. 자주 찾는 게시판을 두고 댓글을 달거나 하는 행위는 이전에도 하지 않았지만, 인터넷이나 SNS를 사용하는데 있어 새삼 더더욱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겠다고.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데도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오해와 억측이 오가는데, 글자로서만 소통하는 장이라면 더 말해 무엇하겠느냐고. 홈피에 리뷰를 올리는 일조차 '나'를 드러내는 인정 욕구에서 출발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겠지만, 그로 인해 일희일비하지는 않겠다고.

 

안다는 것은 매우 피곤하고 괴로운 일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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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1-07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정보를 확인하거나 내가 믿는 정보를 의심할 때가 인간의 뇌는 게을러져요. 그래서 무엇을 알아야 하는 과정을 피곤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문제를 피하게 됩니다.

비의딸 2016-01-08 10:23   좋아요 0 | URL
그 게으름을 깨는게 지성이고 이성일텐데 말이죠...
 
황천의 개 - 삶과 죽음의 뫼비우스의 띠
후지와라 신야 지음, 김욱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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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민하는 청년

<황천의 개>는 1995년 도쿄의 지하철 역에서 사린 가스 테러를 일으킨 종교단체 '옴진리교'를 소재로 한 에세이다. 그러나 이 에세이는 테러에 대한 르포형식의 글은 아니다. 사건 직후, 옴진리교도 일망타진에 대한 보도를 보던 지은이는 컬트 종교에 빠져있는 청년들의 모습과, 살아있는 육체로서의 삶을 고민하며 인도로 떠났던 작가 자신의 청년시절을 오버랩하며 쓴 글이다. 청년의 후지와라 신야는 왜 인도로 갔던 것인지, 삶이 그대로 종교인 인도에서 신야가 본 것은 무엇이었는지를 서술하고, 역시 인도에서 종교적 깨달음을 얻었다고 주장하는 옴진리교의 교주와, 그를 추종하는 청년들은 무엇때문에 그 스스로를 바리케이드 안에 가두고 세계를 증오했던 것인지를 추측한다. 교주 아사하라 쇼코가 얼마나 비뚤어진 괴물이었는지에 대해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아사하라 쇼코가 그와 같은 종교관과 세계관을 갖게된 배경을 비춰보고자는 취지로 씌여진 책인 것이다.

전후 고도성장을 통해 물질과 자본을 추종하던 일본에서는 광고와 온갖 정보에 세뇌된 청년들이 탄생한다. 저자는 이들이 히키코모리가 되었거나 옴진리교를 추종하는 청년이 된 것은 깊이는 다를 지언정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그들은 아무것도 질문하지 않으며 시류에 순종하는 양이 되는 대신, 자신을 고독감과 비슷한 감정에 가두며 사회의 질서를 거부한 청년들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십대 시절 대학을 그만두고 인도여행을 택했던 자신의 고뇌와도 같은 결의 이야기지만, 그 결과는 20년의 시간차를 지나며 히키코모리거나 사이비 종교단체에 적을 두고 타인의 생명을 음해하는 세력이 되거나 하는 식으로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기질이나 역량에서 나타난 결과이기보다는 인간을 거스르며 자본을 추종해온 시대에 의한 변질이지 않겠나 하는 해석을 잔잔하게 펼친다.

 

황천의 개

책을 읽기 전 책장을 넘기며 대충 살피다가 충격적인 사진 한장을 발견했다. 장과 장을 가르는 목적으로 사용된 사진은 엎드린 사람의 발을 물어뜯는 들개의 모습이었다. 기이하게 뒤틀린 채로 개에게 물어뜯기고 있는 희멀건 물체는 사람의 다리가 맞는지 흑백의 사진은 선명하게 보여주지 않지만, 몇번을 다시 보아도 그것은 분명 개가 사람을 먹고있는 장면이었다. 지은이는 인도에서 찍은 이 사진을 다른 책에도 서너번 사용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후지와라 신야를 이 책으로 처음 안 나는 이 사진 역시 처음 보았다.

 

화장터에 처음 갔을 때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지. 인간이 짐승의 먹잇감으로 전락해버렸다. 내가 살던 곳에서는 '지구보다 무겁다'라고 말하던 인간의 목숨이 아귀 같은 들개들에겐 한낱 먹잇감에 지나지 않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꼴좋군,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 이유는 나도 모르겠어. 뭔가로부터 해방되고 가벼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도대체 무엇으로부터의 해방감이었을까. 자아였는지도 몰라. 혹은 사회였는지도 몰라. 서구화를 목표로 우리들을 감시하고 관리했던 근대화였는지도 몰라. 민주주의 사회가 가르친 것처럼 나라는 존재는 그렇게 대수로운 게 아냐. 출산율이 감소되면서 부모와 사회는 하나뿐인 자식을 과잉된 기대와 과보호 속에서 키우고 있는데 인간은 우리가 그토록 많은 기대와 희망을 걸 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냐. 동물이나 곤충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어깨에서 짐을 내려놓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화장터의 불길을 바라보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기분이 편해졌어. 그리고 눈앞의 광경이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했어. 개의 엄니가 피부를 뚫고 뼈에 부딪힐 때마다 목탁을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어. 마치 이 세상의 무상함을 노래하는 음악처럼 들렸지.(145쪽)

 

처음 사진을 보며 느꼈던 섬뜩함은 신야의 이 글을 보며 말끔하게 해소되었다. 어쩐지 나조차도 속이 후련해지며 가벼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사진에 대한 신야의 설명은 언제나 중요한 무엇이 되지 못해 기가 죽어있던 나에게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게 했다. 삶이 이토록 가벼운 것인데 무엇때문에 그렇게 힘들어 하느냐는 말을 온 몸으로 보고 들은 것만 같았다.

 

 

서구사회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받아들이고, 생산과 성장을 지상 최대의 목표로 삼는 성장지상주의는 젊은 세대들에게 인간의 가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물려주지 않았으면서도 인간의 목숨은 지구보다 무겁다며 필연적으로 누구나 겪게되는 죽음을 경원시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보다 인간이 우선한다는 이념을 강조하면서도 단 하나 돈 앞에서 '인간'은 무참해지곤 하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그 모든 국가, 그 모든 사회에 공통된 병패이고, 병든 사회에서 괴물과 같은 젊은이들이 탄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1950년대 말, 일본 규슈지방의 미나마타에서 어패류를 먹은 사람들이 사지마비를 일으키거나 언어가 마비되고, 맹인이 되는 등의 신경 손상 증상을 보였다. 이는 수은 중독에 의한 것으로 미나미타에는 1900년대 초에 들어선 화학비료 공장이 있었고, 이 공장에서 배출되는 폐수에서 다량의 수은이 검출 되었다. 바로 이것이 미나미타 병의 원인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며, 1956년 최초의 환자 발생이후 해를 거듭할 수록 그 수가 증가했다. 지은이는 옴진리교의 교주 아사하라 쇼코 역시 미나마타 병에 의한 시각장애를 겪고 있었으며, 이와같은 장애는 아사하라 쇼코의 성장 과정과 정신세계에도 역시 치명적이었다 라는 지은이의 추청이다.

 

리얼리티를 잃은 현대의 삶

작가가 일본을 떠나 인도로 향한 이유는 원시의 자연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오롯이 확인하고 싶었던 이유에서라고 말한다. 정형화되고 균질된 도시의 삶을 떠나 존재 자체로서의 자신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부딪히고 깨지는 삶의 리얼리티를 경험하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한창 인기다. 가상의 부부를 설정해두고 그들의 일상 같지않은 일상을 엿보이거나, 오지로 떠난 인기인들이 원시의 삶을 경험하는 가상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하고, 꽃보다는 여행이라며 노년 혹은 청년의 연기자들이 좌충우돌 베낭여행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유명인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육아 프로그램은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으로 인기를 끌기도 하지만, 중상류 이상의 생활환경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을 보며 그와 같은 환경에서 자식을 키우지 못하는 서민들에게 위화감을 일으키기도 한다. 뿐만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짝짓기 프로그램, 성형 프로젝트, 서바이벌 오디션 등 나열하기 힘들만큼 많은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이 난무하고 있다.

채널만 돌리면 온통 사방에서 리얼리티를 외치지만 연출된 장면들은 절대 '현실의 일' 일 수가 없다는 것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쪽도, 그를 들여다보는 쪽도 모두 알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얼리티를 외치는 이들 프로그램이 성황인 것은 그만큼 현대인들은 삶 속에서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한다는 얘길 거다. 삶이 온통 균질화된 가면의 일상이므로 TV 시청을 통해서라도 삶의 평범함을 찾고 싶은 현상이라고 보는 것은 차라리 순진한 생각이다. 그보다는 온국민이 모두 관음증에 빠져 다른 이의 삶을 관찰하며 일상의 감동을 얻고 싶어하거나, 내 삶을 관찰당함으로써 나를 특별하게 여기고 싶은 열망에 들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소름이 돋는다. 한둘의 특출난 괴물은 센세이셔널한 사건을 일으켜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리지만, 집단적 무의식에 무뎌진 사람들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게 된다. 지은이가 이 책을 쓴 것은 2006년이고, 그 후로 10년 남짓의 세월이 흘렀다. 일본과 같이 고도의 성장을 단기간에 이룩한 대한민국의 집단적 무의식 현상을 보노라면 1995년의 옴진리교 청년들은 과잉된 정보와 도시가 강요하는 억지를 거부하며, 삶에는 어떤 진리가 있다는 것을 믿었던 세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후지와라 신야

지인에게 <황천의 개>를 소개받고 절판된 책을 중고서점에서 정가의 세 배에 가까운 금액에 구입했다. 중고서점에서 책을 구입하기 전 청어람미디어에 책을 구할 수 없겠느냐는 문의 메일을 보냈다. 출판사 보관용 외에는 재고가 전혀 없다는 답과 함께, 좋은 책이라고 해서 잘 팔리는 것은 아닌 모양이라는 답이 왔다. 뿐만 아니라 청어람미디어에서 출간된 후지와라 신야의 다른 책들도 재고분이 소진되고 나면 모두 절판될 계획이라고 했다. 이 또한 자본의 논리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고작 신야의 다른 책들도 읽어야봐야 겠다는 것 뿐이라는 것에 다소 침울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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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12-29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 있었으면..하고 바랍니다 ㅡ

비의딸 2015-12-30 09:29   좋아요 1 | URL
책에 있다면 그건 정말 보물찾기와 갔겠구나 하는 생각이.... 무조건 많이 찾는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 진짜 보물은 아니겠구요-

cyrus 2015-12-29 2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라카미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와 같이 읽으면 좋겠어요. 새로운 책 한 권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비의딸 2015-12-30 09:38   좋아요 1 | URL
으헉.. 길게 단 댓글이 다시 댓글달기를 누르는 판에 다 날아가버렸어요 ㅠ.ㅠ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아<언더 그라운드>는 읽지 않았지만 사이러스님? 키루스님?(죄송합니다. 제가 좀 짧아요!)이 정리해주신다면 감사히 읽겠습니다.
저야말로 이 누추한 곳을 자주 찾아 주시는 님께 감사드려요!
라고 썼던 것 같아요 ㅠ.ㅠ

[그장소] 2015-12-30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세번째 다시 읽는 글 입니다.
읽을 수록 좋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삶이 죽음과 그리 멀지 않다는 걸
언제쯤이면 자연스럽게 끌어안게 될까요...
우리 민족은 원래 풍장을 했던 민족였답니다.
바람에 시신이 놓이고 들개든 뭐든 와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었던 거죠.
그게 장의풍습이 의례화되고 격식이
ㅡ슬픔에도 일종의 예,례가 생기며ㅡ
사라진 아득한 먼 일이 되었고 말이죠.
보기에 좋다 ㅡ본다 ㅡ보여진다 ㅡ하는 시선을
의식하며 발생한 다른 한 발명이랄수도 있겠습니다.만
리얼리티 ..까지 ..모두 ㅡ현시댈 직시하는 님의 글을
읽자니 ..괜히 글을 읽는 것은 아니구나 ㅡ저는 그리
생각이 튑니다..
그렇죠..아무래도 많이 찾고 적게 찾고의 문제도 아니고
반드시 그것이 진리냐 ..아니냐 도 놓고 쉽게 얘기할 수있는
성질의 것은 개개인으로 가면 멀어지는 게 되고 맙니다.
그렇기에 책이 있는게 아닌가 ㅡ그러는 거죠.
단 한권의 책이라도 처음 만난 책이 ㅡ그 다음을 이끈 책이
한 사람과 주변을 변화 시키는 것을 볼때에 ..
저는 다시 말하게 됩니다 ㅡ우둔하여 책이나 살피는 저이지만..그래도 역시 시류를 역류하든 바로 흐르든
그것은 먼 훗 날 또 다른 시선의 몫 이므로 현재엔 그저
찾아 볼 밖에 없지않나 ㅡ하고 말입니다 .
가능한 멀리 ㅡ바로 눈 앞도 밝혀 줄 수있는 현서를 말이지요.
좋은 글 덕에 모처럼 머리가 맑았습니다.
인도까지 걷지 않아도 되게 해준 글여서 더 느낌이 있었단 ..
농담아닌 농담을 하며..안부 남깁니다.
새해 더 좋은 책들과 인연하시게 되길 바라며..
건강하시길..빕니다.

비의딸 2015-12-31 11:01   좋아요 1 | URL
와... 감동입니다. 제 글을 읽고 이렇듯 긴 글을 남겨주시니요. 읽을 수록 좋다는 생각, 저 또한 같은 생각이에요. 한낱 개의 먹잇감이 되고 있는 시신을 보며 속이 후련해졌다는 것을 저토록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대번에 신야의 <인도 방랑>까지 구매해 버렸을 정도이죠.
우리 민족이 풍장을 했더란 것을 그장소님 덕에 처음 알아요. 박하선 작가의 <천장>을 보면, 티벳에서는 조장을 한다고 해요. 사진이 정말 리얼한데, 시체에 달려든 독수리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겠더라고요. 근데 그게 전혀 야만적이게 느껴지지 않는거에요. 저는 거기서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 떠오르더라고요..
저에게도 죽음은 두렵고 생경한 것이지만, 제가 믿는 종교에서 말하듯 죽음이 저주라는 생각은 안들어요.
책에 어떤 힘이 있든, 먼 훗날 보다는 당장의 눈 앞을 밝혀줄 뿐이더라도 역시 책뿐이더라는 생각을 해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장소님도 더 많은 좋은 책들과 함께하는 새해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두루두루 힘있는 새해 되십쇼!

[그장소] 2015-12-31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핫 ㅡ후지와라 신야의 책도 물론 좋지만..그 글을 읽고 정리를 하신 비의딸 님 글이 좋다고 한 것입니다.책이야 사서 보면 될 것이고요..^^-물론 이런 좋은 소개가 있어서 가능하였겠습니다만..절판이라니 ..일단 도서관에 품을 빌려보는 수밖에 없으려나요? 비의딸님도 좋은 송년의 날 보내시고 새해 멋지게 시작하세요!자주 뵈면 좋겠습니다.ㅡ제가 게을러서..ㅎㅎㅎ

비의딸 2015-12-31 14:17   좋아요 1 | URL
@..@ 감사합니다... ^^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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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언젠가 제게 물어보셨지요. 어째서 제가 아버지한테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말을 하느냐구요. 그때 저는 여느 때처럼 아버지께 무슨 대답을 드려야 할지 몰랐습니다. 한편으론 제가 아버지한테 느끼는 그 두려움 때문이었구요, 또 한편으론 그 두려움의 근거를 설명해드리기엔 구구한 내용들이 너무 많아서 말로는 어느 정도나마 알아들으실 수 있게 잘 간추려 말씀드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글로 대답을 드리고자 하는데 그것도 온전하게 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왜냐하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두려움과 그 여파가 아버지께로 향하는 제 마음을 가로막을 것만 같고 이야기해드릴 내용의 크기가 너무 커서 제 기억력과 제 이성으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9쪽)

 

자식에게 부모는 양육자, 보호자, 지지자인 한편 육체를 존재케했다는 이유로 정신까지도 간섭을 하려드는 조정자이며, 그런면에서 자식의 행위에 대한 심판자이기도 하다. 반면 부모에게 자식은, 자신이 만든 것으로 여겨지는, 그러므로 모든 것을 희생해 책임지고 돌봐야 할 약한 존재인 동시에 부모 자신이 살지 못한 세상을 대신해서 살 수도 있는 분신이기도 하다. 그렇게 여기지 않고서야 자식의 세계에 대한 부모의 끊임없는 간섭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들 사이의 권력관계는 분명하다. 전통적으로 물리적인 위계질서에 의해 권력은 부모에게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권력이 부모에게 있다는 것은 옳은 이야기가 아니다. 돌봄에는 희생이 따르고 희생은 권력자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지만, 부모는 자식의 어여쁨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권력을 자녀에게 이양하기도 한다. 힘은 부모에게 있으되 그 힘에 휘둘리는 것은 자녀가 아닌 부모 자신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상적인 부모 자식 사이의 권력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것이 아닌 탁구공처럼 그때그때 주고받으며 넘기고 넘겨받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자식은 부모의 희생을 먹고 자란다는 피상적인 수준에만 머무르는 부모 자식간의 관계도 있으니, 그러한 관계에서의 부모는 자식을 위해 치르는 희생의 대가로 절대복종을 강요한다. 그렇지만 억압당하는 자녀의 입장에서 보면 부모의 희생은 부모의 이기로 부터 출발한 것이므로 부모가 강요하는 절대 복종에 수긍하기 힘든 자녀도 종종 있는 것이다.

 

어린시절의 나는 항상 어머니에게 기가 눌려 있었고, 그때문에 가끔 악몽을 꾸었던 기억이 난다. 무의식 속에서도 어머니란 존재는 나를 억압하고 때때로 모욕했던 것이다. 그건 사랑도 염려도 아닌 자신보다 미숙한 인간에 대한 정신적인 모욕이었을 뿐이라고, 그 시절의 나는 느꼈다.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상처받고있다는 사실에 무감각한 것처럼 보이는 어머니로 인해 나는 매사가 불안했고, 나 스스로에 대해 믿음이 없었으며, 무슨일을 하건 실패할까봐 두려웠다. 어머니가 보고있을 때는 그 두려움이 더 컸는데, 그럴때면 나는 저능아처럼 굴면서 어머니의 잔소리를 자초하곤 했다. 자신없는 내 행동이 먼저였는지, 비웃음을 닮은 어머니의 염려가 먼저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건 나에게 있어 끝나지 않는 굴레였다. 어쩌다가 부모 자식간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거친 생각을 하게 된 것인지 구구절절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어머니가 아니였다면 스스로 나를 못미더워하는 일은 훨씬 적었으리라는 것이다.

 

두려워서 아버지가 두렵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는 카프카의 글을 읽는동안 내내 울컥하는 순간이 잦았다.  또 다른 비난의 말을 들을까봐 어머니에게 항변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내가 떠올랐다. 편지라기엔 퍽 길지만, 어쨌든 170쪽 밖에 되지 않는 이 글을 읽는데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읽다보면 호흡이 가빠져 두페이지를 연속해 읽기가 힘들었다. 부모가 자식에게 이토록 고통을 주는 존재여도 괜찮은 건가하는 생각이 처음부터 끝까지 떠나질 않았다.

 

아버지가 아니였다면, 카프카의 작품은 조금 덜 난해 했을까. 그랬다면 카프카는 후대에 카프카로 기억되지 못했을까. 사랑받는 느낌으로 충만한 생을 살겠느냐, 문학사에 영원히 기억될 작가로 남겠느냐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카프카는 어느쪽을 택했을까.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읽고나니, <성>이나 <소송>에서 권위에 그토록 민감했던 카프카를 더욱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하다못해 자신을 벌레 취급했던 <변신>에서의 그를 너무도 아프게 공감할 수 있다.

 

아들에게 나는 어떤 엄마일까 생각해 본다. 훗날 그애도 나를 생각할 때면 못견디게 억울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될까.

카프카를 잘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 가장 추천하고 싶은 책이지만, 부모와의 관계에 또는 자식과의 사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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