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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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씻기고 온 방에 튄 물을 닦을 때마다, 조금만 더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많이는 아니고, 조금만. 그건 욕심이 아니라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그 희망이 이뤄지려면 남편이 시험에 붙어야 했다. 시험에 붙을 때까지는 공부를 해야 했고, 공부를 하는 동안은 내가 돈을 벌어야 했다. 일이라면 이골이 난 몸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 나는 남편이 허드렛일을 하는 게 아니라 그래도 상 앞에 앉아 책을 펼쳐 드는 사람이어서 좋았다.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 희망이 있다는 사실이 희망이었다.(29)

등신. 그것도 희망이라고.

자기는 써보지도 못한 돈을 빚으로 떠안고 고시원으로 쫓겨나 낮에는 공장에서 눈알이 빠질 듯 선별작업에 몰두하고 그나마 밤에도 호객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먹고 살아지는 처지에 감히 사랑을 하고, 아이를 갖고,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남편이 공무원 시험에만 합격하면 고단한 삶이 당장 달라질 것처럼 희망을 갖고, 동생들이, 엄마가, 남편이, 아이가 죽도록 희생에 희생만을 요구하는데도 말도 안되게 수동적인 삶을 살며,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사실에 희망을 거는 머저리, 맹추, 등신...

 

환영. 눈 앞에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보는 것, 그러니까 한마디로 착각. 눈 앞에 일어나지 않는, 일어날지 알 수도 없는 환영을 믿으며, 자신과 오늘과 내일까지 거는 이런 이야기는 너무 식상하다. 그렇지만 환영일지라도 희망을 갖는 것이 잘못이 아니듯, 드문 일도 아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모두 불확실한 내일을 위해 자신과 오늘을 희생한다. 단지 내일은 다를 것이라는 기대로.

 

그러나 희망을 갖고 오늘을 희생했더니 과연 바램이 이루어졌다 라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희망을 이룬다라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으니까. 몸뚱이를 굴리지 않아도 먹고 살아지는 것을 말하는 건지, 남보다 나은 입성을 자랑삼을 수 있을 만큼 살게 되는 걸 말하는 건지, 삼십 몇 개월 할부로 뽑은 새 차를 굴려 축제다 맛집이다 찾아다니며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는 것을 말하는 건지를 적어도 나는 알지 못하니까.

아이를 씻겨도 물이 튀지 않는 욕실과 방의 구분이 명확한 집을 얻고 나면, 주방과 거실의 경계가 뚜렷한 집을 바라게 될 것이고, 그다음엔 아이와 부부가 개인적 공간을 확보할 만큼의 여유가 있는 집이 필요해 질 것이며, 그리고 그것들은 계속 욕심이 아닌 희망으로 남을 것인데, 과연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희망으로 여겨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말도 안되게 불행한 이야기를 읽으며, 소소하고도 일상적인 불행을 잊고 싶었지만, 주인공처럼 이렇게 저렇게 몸을 써서 먹고 살지 않는다고 해서 다행이라 여기며 안도 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희망이란 환영에 홀려 사실은 를 전부 팔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각성을 하게 되었으므로.

 

이보다 더 끔찍할 수 없을만큼 신산스럽고, 그러느니 차라리 죽지 왜사느냐 묻고 싶은 주인공의 삶이지만, 김이설은 그걸 질척대지 않고 쓸 줄 아는 작가다. 늘어지는 감상을 거둬버린 건조한 문체, 꾸밈이나 더함없는 그 문체 때문에 이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읽고 읽고 또 읽으려 또다른 김이설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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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5-04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시원에서 공부를 하며 비의 딸님의 저 글들이 남 일처럼 읽혀 지지가 않네요.
나 역시 등신은 아닐까? 하고 말이죠. 희망...무서운 희망, 시험만 붙으면 바뀔 것이라는 그런 무서운 희망.
저 역시 환영의 주인공처럼 그러고 있네요. 독서는 못 한지 꽤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 처지가 더 우울해 질 것이라는 직감은 들지만 말입니다. ㅎ
잘 지내시죠? ㅎ

비의딸 2016-05-04 16:48   좋아요 0 | URL
희망을 걸고 있는 한, 우리는 모두 등신일 수 밖에 없다는 `자조`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 생각해보면 희망이 없다면 살아지지 않을 것 같아요.
책 읽을 시간도 없이 고시원에서 공부하고 계시는 루쉰 님께 함부로 드릴 말씀은 아니라는 생각에 가슴이 싸해지네요. 이깟 리뷰에도 마음이 왔다갔다 하는데,
이야기를 지어내는 작가들은 글에 얼마나 많은 마음을 담아야할까요.. 읽는 사람이 아프지 않게, 마음 다치지 않게, 희망을 잃지않게...
그런데 저는 기질이 어두워서 그런지 소설들을 읽으면 희망보다는 절망을 겪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이어 김이설의 소설을 읽는 이유는 지금 제가 겪고 있는 소소한 불행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에요. 그러니 저는 김이설의 주인공들이 겪는 절망 속에서 나름의 희망을 보고 있는 것이죠..
글쎄요.. 루쉰 님께 이 책을 자신있게 권할 수 있을지는 조금 망설여집니다.
왜 그런말 있잖아요. 임신했을 때는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으라는... ^^;;
더위가 몰려오는 데, 두루두루 잘 이겨내시길 바라요.

루쉰P 2016-05-07 01:07   좋아요 0 | URL
이걸 어쩌면 좋죠 ㅎ 여기 하루 밥 값은 3,800원 입니다. 이 책이 가까운 신림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4천원에 판매 되기에 비 오는 날 한끼 굶고 굳이 걸어가서 사고 말았네요 ㅎㅎㅎ
그리고 지금 다 읽었습니다. 비의딸님이 추천하지 않을 만한 소설이라 깊이 납득을 하고 있습니다.
윤영의 남편 모습에서 제가 보이고, 윤영의 모습에서 제가 보이네요. 하지만 전 기질이 워낙 희망 쪽으로 강한 편이라 그런지, 고맙게도 이 소설이 개인적으로는 글을 잘 쓰는 소설은 맞지만 제 기준으로 안 좋은 소설이네요 ㅎ
전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무얼 말하고 싶은 지 모르겠습니다. 깊은 절망? 아니면 삶의 구차함? 전 한국 소설을 무척 싫어합니다. 어쩌다 읽으면 죄다 이렇게 인물들은 하나의 방향으로만 정해져서 가고, 그리고 끝이 없는 나락으로 밀고 갑니다.
그게 마치 현실의 피할 수 없는 진실인 것처럼 말이죠.
전 이 작가가 옥탑방 계단에 앉아 미친 여자처럼 웃으며 최악만을 생각하는 윤영처럼 지금보다 더 지옥만을 생각하며 현실을 버티는 그런 모습을 사람들에게서 발견한 것인가 하고 생각합니다.
주제 넘지만 전 이 작가가 사람에 대해 그리고 그 진실에 대해 한 단면만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이 이 작가가 의도한 것이면 모르겠지만요 ㅎ
탈출구 없는 현실을 보여주며 도대체 무얼 바라는 것일까?란 생각도 들고 마치 선이 있으면 악, 어둠이 있으면 빛이 있듯이 그런 반사적 효과를 노리는 것인지 하는 생각도 들고 합니다. ㅋ
결론적으로 전 이 소설을 읽으며 이 작가에 대한 반발심이 일어납니다.
당신이 생각하고 묘사하는 것만큼 인간의 삶은 단순하지 않고 그리고 한 방향으로만 정해져 가지 않는다고 말이죠 ^^
제일 좋았던 부분은 윤영의 가족들이 잠깐 모여 공사판 여자도 함께 밥을 먹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작가의 마음이 지금의 뉴스들을 보면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무조건 희망적인 것만 읽고 써야 한다는 것도 아니긴 합니다. 그러나 전 이 작가를 보면서 평생 정신병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망치고 말 것이라 여기다가 진짜 그렇게 망가져서 자살해 버린 아쿠타카와 류노스케가 생각이 나네요.
덕분에 어둠을 보니 빛이 보입니다. ㅎ 좋은 소설 이었습니다. 리뷰 감사합니다 ㅎ

비의딸 2016-05-09 11:39   좋아요 0 | URL
루쉰 님 말처럼 저도 한국소설이 좋진 않아요. 읽다보면 모두가 다 같이 절망을 향해 나란히 가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주인공에게서 나를 본다거나 상황에 나를 넣어보기가 때론 겁이 날 만큼 절망스럽죠. 그런데 이번엔 못말리게 불행한 주인공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에 김이설의 소설을 택했어요. <오늘처럼 고요히>를 시작으로 <환영>을 읽고, <나쁜피>를 지나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은 끝까지 읽지 못하고 책을 덮었어요. 절망도 이쯤이면 피해망상이다 라는 생각이, 더이상은 지긋지긋해서 못읽겠다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도 인간을 제법 좋아하지 않는 부류이긴 하나, 작가 김이설을 따라갈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렇지만 어쨌든 저는 말도 안되게 불행한 김이설의 주인공들을 보며 기운을 차렸다고 하면 이해하실런지요. 행복은 부족한 것을 채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사태평한 나른함 속에 부족한 듯 차오르는 적당한 긴장감, 그래도 이만하면 살만 한 것 아니냐고 느낄만한 비교 우위의 위치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다소 천박한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결론을 얻었거든요. 소설을 읽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아마도 나를 대입시키는 것이아니라 무심한 가운데 스치듯 지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더불어서요.
 
오늘처럼 고요히
김이설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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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담한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고 놀랄만큼 기가차고 어이없는, 답답한 일상쯤은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 그런 처참한 이야기가 읽고 싶었다. 소설은 미처 현실의 비루함을 따라갈 수 없다 했다. 그러나 현실의 비참함이 소설처럼 극적이진 않더라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아는 바, 외면하고 싶은 일상 속의 암담함을 지극히 소설다운 이야기로 내리 누르고 싶었다. 그런데 왜 하필 김이설의 소설이었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이리 불행할 수 있느냐는 리뷰를 읽었기 때문이다.

 

첫 단편 <미끼>를 읽으며 느낀 공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엄마(친모)의 죽음을 엄마(계모)의 입으로 듣는 <부고>는 가슴 가득 허망함이, 대형트럭을 몰던 남편이 사고로 죽자 그 업을 이어받아 트럭을 몰며 외동딸을 키워낸 여자의 이야기인 <폭염>을 읽으면서는 기도 안차는 어이없음이, 돈이 사람을 죽이는 <흉몽>에서는 다시 공포가, 남자 또는 아버지로 대표되는 폭력을 다룬 <한파 특보>를 읽는 동안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를 뽀드득 갈게 되는 분노가, 회사로부터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당한 해고노동자 아내의 독백인 <아름다운 것들>을 읽을 즈음에는 헐떡이는 울음이 등골을 타고 내렸다. 어떻게 이리 불행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각각의 다른 이야기, 다른 감정이 내 안을 들락날락 거리는 동안 좋았던 것은 차마 비교할 수도 없는 일상적인 내 현실은 잊을 수 있더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실제로 소설 속의 이들보다 더한 일을 겪으며 사는 사람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덕분에 내 삶에 안도하기도 한다. 이토록 비참한 일을 나는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다는 것, 겪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어 다행이라는 소극적이고도 회피적인 감사를 드리는 순간이었다고 해야 할까. 막장 드라마는 보는 사람의 대리 만족을 위해 여전히 만들어지고, 이토록 불행한 이야기는 진정한 불행을 겪어보지 못한, 그러면서도 늘 삶이 버겁다고 여기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쓰여져야만 한다는 생각이 든다

 

행복은 부족한 것을 채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무사태평한 나른함 속에 부족한 듯 차오르는 적당한 긴장감, 그래도 이만하면 살만 한 것 아니냐고 느낄만한 비교 우위의 위치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다소 천박한 생각으로 김이설의 다른 소설들을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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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내성적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지극히 내성적인
최정화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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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거나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과도한 인간관계도 맺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인데, 그보다는 에너지를 안으로 집중하는 유형이다. ,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민감해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주목받고 싶지 않은 것인데, 어디서건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행동을 자제한다. 그런가하면, 주변에서 예민하다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지나친 자극으로 인한 고통을 두려워하고, 매사에 결과를 예측해 행동하므로 적극적이지 않고 뒤로 물러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나 스스로를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판단한다.

 

책을 읽기 전,

온전해 보이는 세계 안에 스며 있는 불안의 기미를 내성적인 사람들의 민감한 시선으로 날렵하게 포착...’

출판사 소개글을 읽으며, <지극히 내성적인> 혹은 <내성적인 지극히>는 바로 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예민한 탓에 행동반경이 작고, 그나마도 결과를 두려워하며, 사소한 일에도 수십 번 목숨이 오락가락하도록 고민하는 나의 이야기일 터이니, 안 읽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적극적이고 외향적일 것을 강요하는 우리 사회에서 힘겹게 스스로를 지속해 가는 내성적인 주인공들의 고군부투를 보며, 감각을 시멘트 바닥에 비벼서라도 좀 무디게 만들고 싶은 그간의 바람을 위로받고 싶었다. 책을 읽고 난 후에는 리뷰에 이렇게 적으리라는 다짐도 했다. ‘너무 아프게, 너무 세밀하게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라고.

 

책을 읽고 난 후,

<지극히 내성적인>이라는 제목 아래 모은 열편의 단편에 주인공들을 모두 내성적이다라고 해도 좋을까 하는 의문이 먼저 떠올랐다. 그들은 상대방의 의중을 몰라 당황해 하다가, 나름으로 상대를 평가하고, 그의 생각은 이러이러할 것이라고 짐작하며,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판단을 멈추지 않는다. 누가 그랬을까, 내성적인 성격의 사람들은 피해의식에 젖어있다고. 내성적인 성격의 사람들의 피해의식은 망상에 가깝고, 그들은 두려움이라는 함정에 빠져 매사에 장애를 겪고 있으며, 그들이 느끼는 열등감은 가히 강박적이라고. 내성적인 것은 불안하고, 소심한 것에 다름 아니며, 그건 정상적이지 않다고, 과연 누가 그랬을까.

 

여자는 거실을 둘러보곤 매우 흡족한 미소를 지었어요. 저를 두렵게 만든 것은 여자의 그 만족스러운 표정이었습니다. 타인의 집으로 일자리를 구하러 온 사람의 머뭇거림이나 위축된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9, 구두).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을까 불안해하는(구두, 팜비치), 과도한 건강 염려증과 치료되지 않는 불안으로 허덕이는(오가닉 코튼 베이브), 상대방을 제멋대로 판단하고 재단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까지 상대에게 미루는(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 매사 어떠어떠할 것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진실과 대면하기를 회피하는(타투), 열등감으로 언제나 위축되어 있다가 상대의 허점을 이용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틀니, 대머리), 거짓말을 통해 자신감을 갖는(홍로), 자신의 형편과는 상관없이 지나치게 오지랖이 넓은(집이 넓어지고 있어) 이들을 과연 내성적이라는 제목 아래 한데 모아도 좋은 것일까.

물론 작가가 내성적인 성격을 신경증의 프레임에 가두려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내성적인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예민한 감각을 가진 바, 그들의 시선으로 일상의 틈에 자리 잡고 있는 불안을 끌어내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판단하는 나는 아무리보아도 과도한 불안과 망상, 지나친 집착과 열정으로 이상심리를 보이는 이들을 내성적이라는 제목 아래 묶었다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타투의 주인공은 서른 살에 클럽에서 만난 여자가 임신하자 결혼 했다. 딸 지나를 낳았을 때 여자의 나이는 스물이었다. 여자와는 아이를 낳고 바로 이혼했다. 직업이 기자인 주인공은 딸을 혼자서 키우다가, 기숙형 대안중학교에 보냈다. 그리고 열다섯의 딸은 임신을 했다. 병문안 온 지나의 학교 친구는 머리를 지저분하게 염색했고, 귀에는 피어싱을 세 개나 했다. 주인공은 딸이 꼴사나워 보이는 남자애와 어떤 식으로 스킨십을 하고, 그 순간 어떤 표정이었을지를 상상한다.

이 단편이 불편했던 것은 열다섯의 소녀가 임신했기 때문이 아니다. 아직 어린 아이일 뿐인 딸이 남자와 어떤 표정으로 어떤 감각을 즐겼을 지를 상상하는 주인공의 고뇌가 변태적으로 비춰졌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일상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임에도 거슬렸던 점은 지나와 그 친구들이 대안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설정이다. 임신에 대한 책임으로 홀로 키운 딸이 대안학교에 갔다, 열다섯에 임신했다, 병문안 온 친구들은 불량스러워 보였다. 이 이야기가 대안학교 아이들은 자유스럽다, 개방적이다, 규율이 없다, 통제가 되지 않는다, 충독적이며, 불량스럽다는 이미지를 함축하고 있지 않다고 말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건 너무 위험한 편견이 아닌가.

작가는 주인공이 잠든 딸의 허리에 그려진 문신을 사진으로 찍어 프레임에 가두며 진실과의 대면을 회피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이미 도식화된 무의식에 갇혀 있는 것은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자기표현을 하지 않아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내성적인 성격에 대한 범주화도 편견에 하나가 아닐까. 그것 또한 작가의 의도였다면, 역시 나는 지나치게 예민한 것일 뿐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무미건조한 일상만으로는 탄생할 수 없다. 아무런 변화도, 균열도, 불안도, 이상도 없다면 이야기될 여지가 없을뿐더러, 그러한 소설은 아무도 읽지 않는다. 그것이 일상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불안을 이상심리라고 여길 만큼 극대화한 이유일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만 본다면 <지극히 내성적인>은 충분히 재미있다.

그러나 열등감이나 죄책감, 피해 의식, 과도한 집착과 왜곡은 내성적이거나 외향적인 성향에 관계없이 누구라도 느끼는 감정이다. 다만,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도의 이다. 그것이 소설과 현실의 이며, 재미있음과 없음의 이고, 의미와 무의미의 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을 포착하고 표현해 내는 능력은 소설가와 소설가가 아닌 사람의 .

 

 

* 알라딘 공식 신간 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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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
모신 하미드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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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게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신흥 아시아 국가든 다른 어디서든 어느 정도의 융통성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부는 자본에서 나오고, 자본은 노동에서 나오며, 노동은 들어오는 열량과 나가는 열량 사이의 균형, 곧 생물학적 기계 장치 고유의 에너지 효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만약 허리띠를 느슨하게 풀어서 확장을 도모하고 싶다면 강제력을 약간 동원해 그 기계 장치를 당신의 의지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127).

 

더럽게 부자가 된다? 더러운 방법으로 부자가 된다는 것인가, 돈에 대해 얼마간의 경시의 마음을 담아 정도가 심한 부자를 빗댄 것인가, 그도 아니면 부자란 족속이 원래 아니꼽고 못마땅하다는 속내를 드러내기 위해 더럽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인가, 고개가 갸우뚱. 원제는 ‘How to Get Filthy Rich in Rising Asia’. 설마, 원제가 그렇겠어? 하는 기대는 보기 좋게 깨졌다. 모신 하미드는 더럽다 추잡하다는 의미의 Filthy를 사용해 물질로서의 단순한 돈이든, 돈을 벌고자 하는 저급한 마음이든, 또는 돈을 버는 온당치 못한 방법이든, 물질을 쫓는 데에 숨어있는 추잡함을 강조했다. ‘에 깊숙이 관련되는 것은 그다지 존경받을 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즉 이제 막 서양의 자본주의 국가들을 흉내내며 돈의 세계로 뛰어든 아시아 신흥국가에서 성공과 부정·부패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현실을 풍자한 것이다.

 

부자가 되는 방법을 알려주마

도시로 나간다, 교육을 받는다,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이상주의자를 멀리한다, 고수에게 배운다, 스스로를 위해 일한다, 폭력 사용을 마다하지 않는다, 관료와 친구가 된다, 전쟁 기술자들을 후원한다, 부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등은 지은이가 추천하는 개발도상국에서 이른바 더럽게부자가 되는 방법이다.

작가의 가르침에 따라 더럽게 부자가 되려는 소설의 주인공은 상대적으로 낙후한 아시아의 가난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를 따라 도시로 이주하기 전에는 초콜릿이나 리모콘, 스쿠터 따위는 구경도 해 본적이 없다. 더 나은 살림살이를 기대하며 그들 가족은 도시로 이주했다. 다섯 식구가 먹고 살기 위해서 누나나 형은 가정경제를 위해 자기를 희생해야 했다. 그러나 셋째인 주인공은 자신들과는 다른 삶을 살기 원했던 아버지에 의해 교육을 받는다. 영리했던 주인공은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더 나은 삶을 바라며 공부에 열정을 쏟는다. 뿐만 아니라 운명과도 같은 사랑을 멀리하려 기를 쓰고, 이상주의를 배척하는 등 작가의 가르침을 따르며 부자가 되기 위해 애쓴다. 드디어 부자가 되는 주인공은 책을 읽는 바로 당신이다. 작가는 특정국가 특정지역 특정인에 한정하지 않는 작법을 구사해, 책을 읽는 독자 누구라도 주인공인 당신일 수 있음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이 책은 소설의 형식을 취한 자기계발서거나 자기계발서의 모양을 갖춘 소설이니까.

 

부자 바이러스에 대해서 알려주마

여기서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주인공인 당신이 부자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마을 사람들이 용변을 보는 하류보다 조금 상류에서 빨래를 하고, 그보다 조금 더 상류의 물을 식수로 사용하고, 그보다 더 상류에서 사는 사람들이 용변보고, 빨래하고, 식수로 사용하는 도랑을 낀 마을을 벗어나 제대로 된 식수를 먹을 수 있는 정도의 (도대체 그것을 라고 부를 만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고)’로 만은 왜 충족되지 않는 것일까.

풍요로워 질수록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증상을 이르는 용어로 어플루엔자(affluenza)가 있다. 이는 풍부를 의미하는 어플루언트(affluent)와 인플루엔자(influenza,)의 합성어로, 풍요로워질수록 더 많이 갖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탐욕스런 욕망이 빚어낸 질병을 의미한다. 어플루엔자에 감염이 되면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추구하게 되고 이는 과중한 업무, , 근심, 낭비의 증상을 보이며 채워지지 않는 것들에 대해 갈망하게 된다. 그렇다면 각 개인들은 어플루엔자에 어떻게 감염되는가. 그것의 비밀은 세계화에 있다. 자본주의를 쫓는 신흥사회 역시 이 병을 피할 수 없고 당신역시 다르지 않다고 모신 하미드는 말한다.

작가는 이전 작품인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통해 9.11 사태 이후, 중동 출신이라면 무조건 근본주의에 빠진 잠재적 테러리스트 취급을 하는 미국사회의 역근본주의에 대해 썼다. 반면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법>은 아시아를 비롯한 개발도상국가들의 독자들을 겨냥한 듯한 어조로 무조건적인 자기계발 즉 모방이 사실은 세계화의 하나가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결론을 말해주마

자기계발서는 성공, 처세, 인생, 인간관계 등에 집중하며, 이에 대처하는 실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다 거기서 거기인 내용을 반복 강조하고, 사회구조적인 문제까지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곤 할 뿐만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할 수 있다는 강제된 낙관만을 전파하는 자기계발서의 천박함에는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다. 바로 그런 이유로 자기계발서를 등한시하게 되곤 하는데, 사실은 모든 책이 자기계발서라는 지은이의 지적은 참으로 인상 깊다.

 

자기계발서의 범주에 속하는 책들이 그야말로 수없이 많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왜 당신은 숨막히게 지루한 외국 소설을 읽느라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는가? 수많은 호평에도 불구하고 한 장을 넘기는 데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는 그런 책들을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신 삶에 점점 많은 영향을 미치는 세계화 때문에 까마득히 멀리 있는 나라들까지 이해하고 싶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이런 충동의 가장 핵심적인 본질이 자기계발에 대한 욕구가 아니면 달리 무엇이겠는가?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 나온 책은 모두 하나같이 독자들에게 이런저런 자기계발의 근거를 제공했다. 쓰레기 같은 교과서를 떠올린다면 이 주장을 부정할 수 없을 터다. 그리고 도시로 나온 지 몇 년이 지난 당신이 지금 길을 걸을 때 손에 든 책이 바로 교과서다(27~28).

 

프린스턴과 하버드에서 공부하고, 뉴욕에서 경영 컨설턴트로도 일했던 작가는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에서 '미국이 세계에서 행동하는 방식에 분개하고 있었다' 라고 고백한 후천적(?) 근본주의자에 대해 썼다. 그 고백에 대해 통쾌함을 느꼈던 나는 후속 작품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법>에 많은 기대를 했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는 진리는 어김없다. 다만, 인생이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일 뿐임에도,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낙관주의로 점철된 자기계발서를 배척했던 그간의 오만함에 대해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다소 엉뚱한 결론을 얻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 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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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 창비세계문학 16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이한정 옮김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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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긴 읽었고 쓰긴 써야겠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누군가는 <열쇠>를 읽고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왜 거장인지 알겠다고 까지 했는데, 솔직히 나는 정말 모르겠다. 이건 그냥 마치 음, 변태적인 치정극일 뿐으로 보이는데 말이다.

 

56세의 남편과 45세의 아내는 이미 이십 여 년 간을 함께 살아왔고, 스물이 넘은 딸도 하나 있다. 남편은 평생에 걸쳐 일기를 써왔지만, 그동안은 금기시해왔던 자신들의 성생활에 관해 56세를 맞는 새해 벽두부터는 과감하게 적기로 한다. 그간은 혹시라도 아내가 읽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를 삼가왔지만, 이제야말로 아내에게 읽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오히려 읽히기를 기대하며), 일기를 쓰기로 작심한 것이다. 아내 또한 이에 화답하듯이 자신들의 성생활에 관한 일기를 쓰기로 하는 데, 그 이유는 이렇다.

 

나처럼 다른 사람에게 속내를 말하지 않는 사람은 하다못해 자기 자신에게 그것을 말하거나 들려줄 필요가 있다. 단지 나는 자신이 일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남편에게 들키는 바보짓은 하지 않는다. 나는 남편이 외출해서 없는 틈을 타서 일기를 쓰고, 남편이 절대로 생각하지 못하는 어떤 장소에 숨겨둘 것이다. 내가 일기를 쓰려고 마음먹은 첫 번째 이유는, 나는 남편의 일기장이 있는 곳을 알고 있는 반면, 남편은 내가 일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른다는 그 우월감이 더할 나위 없이 즐겁기 때문이다. (15)

 

 

왜 일까, 이십 여 년을 함께 살고도 성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새삼스럽게 부부 사이의 화두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이십 년이 지난 부부사이에도 성생활이 중요한 것이기는 할까? 56세의 남자가 탐하는 것이 45세의 아내가 아니라 차라리 다른 여자였다면 더 현실적인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사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성이 없다.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질 때까지 6개월 동안 이들 부부에게는 일반적인 생활이 없다. 그저 성적 욕구와 배설만 있을 뿐이고, 그를 위해서는 딸도 제자도 모두 도구가 될 뿐이다(사실은 딸과 제자의 성적 만족을 위한 도구로 이용된 것이 이들 부부일지도 모른다). 진실도 없고, 사랑도 없고, 매혹도 없이 그저 뿐으로, 그것이 이 소설을 읽는데 가장 큰 난점이었다. ‘변태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을 알아내는 데 실패했다. 작가가 현실성이 없는 성생활에 대해 집중한 것은 그것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서일 텐데, 그것에 도대체 정신이 가지 않을 정도로 소설의 내용이 난잡하다. 다만 자신이 고지식하고 봉건적인 사상을 가진 전통적인 여인상인 것처럼 남편을 속여온 여자의 마지막 일기는 소름이 돋는다. 반드시 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이용할 뿐이라는 것이 유일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57세에 쓴 <세설>은 전쟁과 무관하게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네 자매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다루었다. 도저히 오십 대 후반의 남자가 썼다고는 보여지지 않는 여자의 심리에 대한 세심한 묘사가 좋았다. 때문에 <세설>을 읽는 것은 특별한 스토리가 없는 일일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아늑했다. 반면, 작가가 70세의 나이에 썼다는 <열쇠>는 해소되지 않는 노년의 성을 대리만족하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퇴폐적이다. 무엇보다 매혹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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