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말아요, 티베트>를 리뷰해주세요.
울지 말아요, 티베트 - 히말라야 넘어 달라이라마를 만나다 맛있는 책읽기 6
정미자 지음, 박선미 그림 / 책먹는아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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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 자신이 겪지 않은 일은  수백권의 책을 읽는다 해도 겪지 않은 일이다. 
겪지않고 책으로 만난 고통이 아무리 크다해도 겪은 이들의 고통에 비교되지 못한다. 
고통의 크기가 똑같지 않다해서 간접 고통의 이유가 없는걸까.
아니, 우리는 충분히 고통스러워야 한다. 울만큼 울어야 한다. 더 많은 사람이... 
겪지 않은 더 많은 사람이 고통스러워야 하고 울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바뀔 가능성이 손톱만큼이라도 더 많아지는 것일테니.
세상은 불공평하다. 그것이 진리일지 모른다.
어디에도 평등은 없다. 누군가는 누군가를 지배하고 올라서려한다. 발밑에 누군가가 고통스럽게 무너지는 것 따위는 관심도 없다.
다수가 소수를 이기지못하는 불합리가 세상에는 분명 존재한다.
언제고 정의가 이긴다는 마징가제트 식 논리로는 부족하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같이 고통스러워하고 같이 눈물 흘리고 같이 저항해야 한다.
내 나라, 내 가족, 내 일이 아니라고 회피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를 넘어 ’우리’를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끔씩 신문을 장식하는 티베트에 관심이 없었다. 중국이 그들을 탄압하던 말아먹던  ’나’와 관련없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한권에 동화로 어른인 나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알아야 한다. 
작가는 이 한권의 책속에 티베트와 과거 일제시대의 우리 모습과 약한자에 대해 담았다.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힘없는 자의 편에 서서 세상을 산다는 것은 멋지기만 한 일은 아닐 것이다. 멋지기만 한 일은 아니지만 가치가 있는 일이다. 우리 아이가 이 책을 읽고 알았으면 하는 것이 바로 그 가치에 대해서이다.

목숨을 걸고 히말라야를 넘었던 보건이의 소망처럼 나도 티베트가 독립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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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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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밤의 공포소설도 아닌데 소름이 끼친다. 
책을 덮어놀 때 앞표지가 보이지 않게 엎어논다.  빅브라더의 눈을 마주보기 싫기 때문이다.
3부를 읽을즈음에는 소름을 넘어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윈스턴의 공포와 절망과 혐오감이 내게도 전해졌기 때문이다. 끝내는 애인 줄리아를 배신하고 그녀를 자기 대신 죽이라고 외치는 윈스턴의 모습이 너무도 처절했기 때문이다. 육체도 정신도 완전히 피폐되어 더이상 자신을 온전히 생각할 수 없는 윈스턴의 백지상태가 소름끼치게 절망스러웠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나약하다고만 볼 수 없는 인간, 즉 나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오웰이 1984를 1948년에 썼다고 하는데 그 시대에는  가히 SF소설였겠다 싶다.
텔레스크린의 일방성은 개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언제어디서고 개인을 구속하고 침범하며, 개인의 정신을 구타하는 폭력을 남발한다.
1984속의 인간들은 더이상 사생활을 갖지못한, 빅 브라더라는 이름의 권력집단, 즉 당에 의해 사육되는 피조물일 뿐이다. 당은 인간의 육체를 넘어 정신까지도 구속하고 짖밟으므로서 권력을 행사한다.
소수의 권력을 위해 사육되는 인간이 필요하다. 사육을 위해 필요한것은 궁핍과 무지이다. 
궁핍과 무지 속에서 날조와 감시, 사육.... 이 가능하다.
역사까지도 수시로 날조되는 아니 역사라고 할 것 까지도 없다. 바로 몇일 전 일까지도 없던 것은 있던 것이 되기도 하고, 있었던 것이 어디에도 존재한 적이 없는 ’무’가 되기도 하는데 더 무서운 것은 일반대중은 ’그런가보다’ 한다는 것이다. 둘더하기 둘은 다섯이 될 수도 있는 세상. ’그럴수도 있겠지’가 아니라 당이 다섯이라면 다섯인 세상이 1984의 오세아니아이다.
’그런가보다’가 안되는 윈스턴 같은 종류의 사람들은 결국 끌려가 고문당하고 개조되어 완전히 백지상태에서 빅브라더만을 사랑하다가 총살당하게 된다.
사랑하는 척이 아닌 완전 사랑하는 상태여야만 그나마 총살이 가능해진다. 완전사랑의 상태가 되기까지, 인간성이란 인간성은 바닥을 드러내고 더 이상은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상태, 더 이상은 정신이랄 것이 없는 상태, 더 이상은 내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된 후라야 겨우 죽을 수 있는 자유가 주여지는 것이다.

우리가 정의하는 고귀한 인간성 같은 건 없다.
폭력앞에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다. 소수를 위해 말살되어지는 인간이 오웰의 1984 속에서만 존재할까.
1984는 현재진행이다.
소름이 끼치고 가슴이 오그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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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척 매뉴얼 - 명작을 읽지 않은 이들을 위한
김용석 지음 / 홍익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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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을 읽지 않은 이들을 위한-이란 서브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읽었더라도 무슨뜻인지 모르고 그냥 글자의 배열만을 읽었던 이들이나, 혹은 학창시절부터 귀가 달토록 들어왔던 명작들이라 읽었었는지 도저히 기억나지 않은 이들에게도 유용한 책이다.
내 경우는 두가지가 다 해당된다. 분명 읽었던 책인데 도대체 내용이 오리무중 가물가물하거나, 아니 내가 이걸 안읽었단 말야 하는 당황스러운 책들이 있었고, 그 중 몇권은 다시 한번 읽고자 하는 욕망을 일게 해준 책 매뉴얼이다. 
모토는 책을 읽은 척 함으로써 원만한 대인관계를 형성하는데 있다고 하지만 사실 책을 읽자는 역설 메세지가 저자의 주장 아니겠는가.
세태가 책을 읽자 주의로 돌아가면서 이런류의 책을 소개하는 책들이 많이 출판되고 있다.
나도 몇권의 책 소개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명사들의 추천서... 따위의. 책 소개와 더불어 명사가 읽고 감명받았다는 책을 나도 읽어보겠다는 욕심에서 골라보지만 어쩐지 읽다보면 지루하고 중요한 것은 읽은 당자의 느낌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지지 않아서 당황스러울 때가 많았다. 또 한편으론 내 으뭉스런 속내(실제 읽지도 않았으면서 어디선가 읽은척을 하고자 하는)를 내가 알아채고 집어치우는 순간도 있었기에 그런류의 책소개서를 완독해 본 기억이 없다.
그런데 이번엔 완독했다. 왜냐, 읽었거나 혹은 읽지않았거나, 내용이 파악이 제대로 안되었던 책들이 쏙쏙 느낌으로 전해왔기 때문이다. 그 느낌을 그대로 살려 읽고 싶은 책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딴지일보를 들락거리면서 알게된 저자 일명 ’너부리’.
내 속에는 양아치의 피가 흐르는지 너부리 식의 이런 말투가 무척 재미있다. 아마도 ’고상한척’, 혹은 ’우아한척’으로 똘똘뭉쳐있는 내 속에 터져나오지 못한 점잖지 못한 욕구가 있나보다.
그건 그렇고.....
마지막장에 저자의 말에 깊은 감동내지는 동감을 표한다.
책이란 일종의 거울이다. 현재 나의 정신세계를 비춰주는 거울. 외로운 사람들은 자주 거울을 보게 되듯 책은 외로운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물건이다. 
나는 외롭다. 나는 책이 좋다.
나는 외롭지 않다. 내 안의 또다른 내 모습을 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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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투를 빈다 - 딴지총수 김어준의 정면돌파 인생매뉴얼
김어준 지음, 현태준 그림 / 푸른숲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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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이란 남자, 섹시하다.
온전히 자기 욕망의 주인인 그가 섹시하다.
부화뇌동하는 주변정세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의 세계관대로 문제에 대처하는 의지, 삶의 장악력이 섹시하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언제 행복한지 따위의 덜 성숙된 질문들에 몇년씩이나 구구절절 답을 해주었다니 그 배려가 참으로 섹시하다.
구구절절한 사연들에 답하는 불친절한 말투 또한 섹시하다. 그것이 양아치처럼 건들거리는 말투여서가 아니라 김어준이란 사람이 무척이나 객관적인 자세로 그러나 진심을 담아서 답하고 있기에 섹시하다. 진심, 바로 그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 아니겠는가.
한마디로 지성있는 인간이라 섹시하다.

몇번을 읽어볼까 망설이다 만 책 <건투를 빈다>를 어젯밤새 뚝딱 해치웠다.
망설인 이유는 단지 표지때문이었다. 표지의 빨강과 야광녹색이 너무 삼류스러워서...
얼핏보면 삼류스러워뵈는 그 말투 때문에. 망설였다. 단지 그뿐이였다. 
몇시간만에 뚝딱 해치울 수 있었던 것이 대충 날림으로 페이지를 채웠기 때문이였을 꺼라 섯부른 오해는 말자. 충실했다. 삼류스러운 보통인간들의 일상적인 질문들에 비해 답이 몹시 충실했다. 그래서 인간 김어준이 섹시하다.

노 전 대통령 서거 후 딴지일보를 하루 한번 이상 들락거리고 있다. 이유인즉, 그의 논평 ’사과 따위 필요없다’를 읽고 완전 반해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30대에 꾸었다던 꿈, 똥배 호스트바. 30대 후반 이상 아저씨들로만 이뤄진, 나이 상관없이 반말 찍찍 해대고 매우 불친절한, 그러나 지적으로는 통쾌한 호스트바에 가보고 싶은 충동이 마구 일었다. 그가 그 꿈을 이루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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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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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은 1917년 볼셰비키 역명 이후 스탈린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소련의 정치 상황을 풍자한 풍자소설이며 우화소설이다.
인간에게 착취당하던 농장의 동물들이 혁명을 일으켜 인간을 내쫓고 동물농장을 세운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동물들을 위한, 동물들의 농장은 새로운 권력자이며 같은 동물인 돼지, ’나폴레옹’에 의해 이용당하고 착취당하고 끝내는 숙청당하게 되고, 권력돼지들의 모습은 끝내 인간인지 돼지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된다. 
현시점에서  <동물농장>은 소비에트 체제라는 그시대의 권력형식만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재 일반에 대한 우의적 정치풍자로 읽힌다.
부패한 독재자는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 있고 권력형 돼지들도 어느 시대에나 있다. 권력이 부패할 때 사회주의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탈을 쓴 파시즘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오웰의 통찰력에 감탄할 수 밖에.
문제는 사회체제가 아니라, 이념이 아니라, 권력의 부패다. 대중의 무지와 무기력은 권력의 타락을 방조한다. 권력이 부패했을 때 우리들의 책임 또한 회피 될 수 없는 것이다. 권력에 맹종하고 아부하는 순간 사회에는 파시즘이 날뛸 수 밖에 없게 된다.
오웰의 <민주적 사회주의>는 이상일 뿐이었을까. 착취계급의 제거를 통한 평등의 실현, 생산 수단과 분배의 공유화.... 그것은 진정 인간이 오를 수 없는 이상일 뿐일 것인가. 그것이 오웰의 고뇌였다.
한때 오웰이 반사회주의자로 읽혔던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웰은 뼈속까지 좌익, 골수 사회주의자였다. 소비에트의 실패한 사회주의에 대해 비판함으로서 오웰이 생각하는 진정한 사회주의를 추구하기 위해 <동물농장>이 씌였다. 오웰은 생각하는, 비판하는 사회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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