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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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가 프랑스의 후기 인상파 화가 폴 고갱의 삶을 모델로 씌여진 소설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주인공인 스트릭랜드가 증권 중개인이었다가 화가가 되었다는 것과, 물질 문명에 염증을 느낀 그가 가족을 버리고 남태평양의 타이티로 가서 광적으로 그림을 그려대다가 가난과 병에 허덕이며 죽어갔다는 큰 줄기 외의 구체적인 모습은 고갱의 삶과는 많이 다르다. 서머셋 몸은 스트릭랜드의 비상식적인 모습을 '그리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천재의 그것으로 부각시키고자, 피도 눈물도 감정도 양심도 없는 인물로 재창조해 내었다.

 

프랑스인인 고갱과 다르게 찰스 스트릭랜드는 영국인이었다(찰스 스트릭랜드라는 이름이 전혀 예술적으로 들리지 않아 조금 당황스러웠다). 스트릭랜드는 마흔 즈음의 어느날 갑자기 증권거래소를 그만두고 가족으로 부터 증발했다. 아내와 주변인들은 스트릭랜드가 여자와 줄행랑을 쳤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스트릭랜드는 예상과 달리 화가가 되기 위해 안락한 삶과 가족을 헌식짝 버리듯 던져 버린 것인데,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조차 그간 그가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에 반해 고갱은 이십대 후반부터 줄곧 화실을 다녔고, 주식 중개인으로 일하면서도 살롱에 작품을 출품하는 등 아마추어 화가로서 활동했다.  1882년 프랑스 주식시장이 붕괴되면서 삼십 오세 무렵에 증권거래소를 그만둔 고갱은 전문적인 화가가될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살아 생전에는 고갱도 스트릭랜드도 상업적인 면에서 성공하지 못한다.

 

한편 스트릭랜드와 고갱이 말년을 보낸 타이티는 스트릭랜드에게는 낙원과 같은 곳으로, 그는 죽기 직전까지 원시적인 낭만 속에서 그림에 전념한다. 그 시기는 스트릭랜드의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몇년 간으로 소설 속 화자에 의해 추측되며, 병고에 시달리며 죽음에 이르던 때조차도 천재 화가 스트릭랜드에게는 축복였던 것으로 그려진다. 스트릭랜드는 죽음을 앞두고 장님이 된 후에도 자신만이 볼 수 있었던 열망을 전부 쏟아낸 대작을 완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트릭랜드와는 달리 타이티에서도 역시 가난과 빈곤, 고독을 못견뎌 하던 고갱은 1893년 가족이 있는 프랑스로 돌아가 타이티에서 완성한 작품들로 개인전을 연다. 그러나 전시회는 실패하고, 타이티에서 영주할 생각으로 머물던 고갱은 문둥병으로 살이 썪어가는 중에도 그림을 그리며 열정을 쏟아내던 스트릭랜드와 달리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한다. 그후 고갱은 매독과 영양실조로 고생하다가 55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스트릭랜드가 자신의 그림에 대해 그 누구의 평이나 인정을 원하지 않은 것과 달리(그는 자신이 죽기전 집의 천장과 벽에 완성한 대작을 태워버릴 것을 유언한다) 고갱은 생애동안 화가로서 인정받기를 바랬다. 제목인 달과 6펜스는 정신의 열망과 현실의 삶을 의미한다. 또 정신적인 열망은 예술가로서의 고뇌를, 현실의 삶은 돈과 물질의 세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스트릭랜드가 모든 세속적인 욕망과 물질에 대해 비인간적일 만큼 초연했다면, 고갱은 좀더 인간적인 고뇌에 시달렸다.

서머셋 몸은 예술가로서의 열망은 세속적인 삶을 벗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몸은 소설 속 나래이터의 입을 빌려 이렇게 고백한다. 작가란 글쓰는 즐거움과 생각의 짐을 벗어버리는 데서 보람을 찾아야 할 뿐, 다른 것에는 무관심하여야 하며, 칭찬이나 비난, 성공이나 실패에는 아랑곳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17쪽)  그러나 예술가도 사람이고 보면 영혼과 관능과 열정만으로 현실의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몸은 고갱도 서머셋 몸 그자신도 살아내지 못한 불가능의 삶을 스트릭랜드를 통해 실현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범인인 내가 보기에 스트릭랜드는 비정상적인 예술충동에 사로잡힌 기인이지만, 예술가로서의 그는 서머셋 몸이 다다르고 싶었던 경지가 아니었을까. 사사로운 정이나, 또는 인간적 욕망과 인습과 규약 따위로 얽어맬 수 없는 진정한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스트릭랜드를 통해 이루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고갱이 죽기 약 6년 전에 완성한 <우리는 어디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스트릭랜드가 문둥병에 걸린후 죽기 전까지 집안 천장과 벽에 그린 그림이 바로 이렇지 않았을까. 색채는 좀더 진하고 화려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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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1
테네시 윌리암스 지음, 김소임 옮김 / 민음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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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한 가문의 딸 블랑쉬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동생 스텔라가 살고 있는 극락이라는 곳에 도착한다. 스텔라는 가난한 폴란드 이민자 스탠리와 결혼해 지내고 있었고, 아이를 임신한 상태이다.

첫눈에 스탠리와 블랑쉬는 서로에게 거부감을 느끼지만, 둘은 사실 같은 종류의 사람들로 자신의 욕망을 타인의 욕구보다 우선 순위에 두는 사람들이다. 동물적 육감이 뛰어난 스탠리는 화려한 치장 뒤에 숨긴 블랑쉬의 욕망을 한 눈에 알아보고 이를 제압하려 하고 블랑쉬는 블랑쉬대로 이민자 스탠리를 무시하거나 깔봄으로서 자신의 우위를 증명하려고 한다.

블랑쉬의 안하무인적인 태도에 격분한 스탠리는 블랑쉬의 뒷조사를 하고, 그녀에게 떳떳치 못한 과거가 있음을 알아낸다. 그는 블랑쉬와의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자신의 친구 미치와 스텔라에게 블랑쉬의 과거를 폭로한다. 이로인해 블랑쉬의 생일 파티는 엉망이 되고, 미치는 블랑쉬를 떠난다. 스탠리는 스텔라가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간 사이 엉망으로 취한 블랑쉬를 겁탈한다. 그후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블랑쉬는 병원으로 끌려가고 스탠리와 스텔라는 그들만의 평화를 찾는 것처럼 보이며 막이 내린다.

 

허영에 빠진 블랑시와 짐승남 스탠리, 그리고 방관자인 스텔라

말하자면, 블랑시의 욕망은 타인으로부터 끊임없이 인정받고 싶어한다는 거다. 부유한 성장과정을 거친 그녀는 누군가로부터 줄곧 예쁘다거나,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고, 모조품으로라도 화려하게 치장하고 싶어 한다. 또 그녀는 슬픔이나 고통을 이기는 방법으로 타인에게 애정을 요구한다. 그것이 비록 마음이 담기지 않은 육욕뿐일지라도 말이다. 한마디로 그녀는 빈곤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 당신이 누구든, 난 언제나 낯선 사람의 친절에 의지해 왔어요. (164쪽)

 

스탠리의 욕망은 권력욕이라고 하겠다. 그는 우두머리로 군림하길 좋아하며, 힘에 논리에 충실한사람이다. 또한 그는 자기 나름의 정의를 실현하려는 욕구도 강한데, 자기 눈에 틀려보이는 것을 바로잡는 것을 중요하게생각하며, 그것이 바로 정의라고 믿는 사람이다.

 

한편 스텔라에게는 안정하고픈 욕망이 있다. 블랑쉬와 마찬가지로 부유하게 성장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주어진 환경에 빨리 적응하며, 분란을 싫어하고 자신을 양보해서라도 주변이 평화롭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어찌보면 그녀의 욕망은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장 건강해 보이지만, 자칫 방관자가 되기 쉽다. 그녀는 블랑쉬와 스탠리의 욕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한 그녀의 태도는 언니 블랑쉬를 겁탈한 스탠리조차도 수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중 가장 건강하지 못한 욕망을 지닌 사람은 스탠리이다.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그는 주변인물들을 심판하길 좋아하고, 그를 위해 힘을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극에서는 바로 그점이 남자다운 젊은 혈기로 표출되고, 미남배우가 연기를 한다면 더더욱 매력적인 캐릭터로 보여질테지만  현실의 남자라면 망설이지 않고 데이트폭력을 구사할 수 있는 그런 타입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연극도 영화도 탐날 만큼 재미있다

책을 펼친 순간부터 순식간에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블랑쉬와 스탠리가 만들어내는 긴장감 때문에 희곡임에도 흐름을 놓치지 않고 마지막까지 한호흡으로 읽었지만, 책을 덮고서는 '이건 뭐지?' 싶었다. 허영에 빠진 여자가 끝까지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도취되어 있다가 힘센 남자를 만나 겁탈당하고 그만 정신병원 행이라니..? 정신못차리면 이렇게될 수 있다는 경고인가? 욕망에 휘둘리며 살다간 극락이 아니라 그나마의 현실도 놓칠 수 있다는 엄포인가?

워낙 유명한 작품임에도 의미를 읽어내지 못해 당혹스럽고, 작가와 작품의 명성에 미치지 못하는 나의 이해력이 한심스러울 뿐이다. 재미와 이해는 분명 다른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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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8
아서 밀러 지음, 강유나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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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로 희번득거리는 눈동자, 웃고있는 건지 울고있는 건지 표정이 분명치 않은 세일즈맨 윌리는 자동차 핸들을 꽉 쥔채 죽음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중이다. 이 세상에서 중요한 건 팔아먹을 수 있는 것들이야.(116쪽) 36년 경력의 세일즈맨인 그는 이제 육십 세가 되었고, 그에게는 더 이상 팔아먹을 것은 남지 않았다. 어느덧 사는 것보다 죽는게 더 가치 있는 인생이 된(117쪽) 것이다.

 

매주 외근 다니는 내가 새삼스레 그 경치를 바라보았다니 상상이나 가? 그런데 린다, 거긴 아주 아름다웠어. 나무는 무성하고 태양은 따뜻하고. 나는 앞 창을 열고 따뜻한 바람에 내 온몸을 맡겼지. 그런데 갑자기 길가로 빠지고 있는 거야! (13쪽)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미덕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세일즈는 '꽃'이라고 불린다. 1920년대 대공항 전의 미국은 그야말로 세일즈의 천국이었고, 때를 놓치지 않고 잘나가던 세일즈맨 윌리 로먼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매사에 자신만만하던 그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다. 그들은 윌리에게 기쁨이었으며, 자랑이었다. 그런만큼 자식의 미래에 대한 기대도 컸다. 그러나 비프와 해피는 윌리의 기대에 못미치고, 어느덧 예순이 넘은 윌리는 세일즈맨으로서의 수명을 다한다. 회사는 그런 그를 여지없이 해고시키고, 경제적 자립에 실패한 자식에게 물려줄 것은 보험금뿐인 그가 갈 곳은 한 곳 뿐이었다. 그의 맨 모습을 이해하는 세상의 단 한 사람 아내 린다를 뒤로하고.

 

그에게 성마른 기질과 성질, 황당한 꿈과 자잘한 심술궃음이 있다해도 그것이 남편의 내면에 있는 격한 바람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그 바람은 린다의 마음에도 있는 것이지만 감히 입 밖에 꺼내거나 대놓고 추구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11쪽)

 

감히 입 밖에 꺼내거나 대놓고 추구하지 못한 린다와 윌리의 꿈은 꽃을 심을 마당을 갖는 것이였으리라. 매달 갚아야 할 대출금에 허덕이지 않는 삶이었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꿈이기도 하다. 1949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후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공연되고 있는 희곡 중 하나가 <세일즈맨의 죽음>인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174쪽의 짧은 대본이지만,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큰 틀에서 보면 자본주의 사회 속의 한 개인이 자본에 죽도록 봉사하다 정말 죽어버리는 이야기지만, 그의 죽음 뒤에는 가족간의 해묵은 갈등이 있다. 물론 그 갈등 역시도 자본주의 사회의  '성공 신화'에 코가 낀 윌리가 자초한 불행이다. 그러나 누가 윌리를 비난할 수 있을까. 부모는 자식이 좀더 성공한 삶을 살기를 바라기 마련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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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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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2년 괴테 나이 스물셋, 청년 괴테는 샤로테를 사랑했다. 그러나 샤로테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었다. 괴테는 샤로테와 더불어 그녀의 약혼자와도 친분을 나누었지만, 샤로테를 향한 열정을 버리기 힘들었다. 한번은 약혼자가 없는 틈을 타 샤로테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다. 그러나 16세의 샤로테는 괴테에게 우정 이상의 것을 바라지 말라는 자못 어른스러운 충고를 한다. 이후 괴테는 샤로테와 그녀의 약혼자에게 편지를 남기고 도망치듯 그들을 떠나버린다. 얼마간의 세월이 흐르고 괴테도 알고있는 한 남자가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는 것을 비관해 권총 자살하였다. 괴테는 이 이야기를 자신의 경험과 연결지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지만, 베르테르의 자살을 흉내내는 젊은이들이 많아 일부 지역에서는 발간이 금지되기도 했다.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유명인의 자살을 흉내내어 자살을 시도하는 현상을 일컫는 '베르테르 효과'는 이렇게 유래되었다.

 

학창시절 필독서로 읽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분명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는 한 남자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제 다시 읽어보니, 이는 삶의 공허에 일찍이 절망한 조로 청년의 자살기다.

이제 막 자신을 펼치며 세상을 살아보려는 젊은이치고 베르테르는 좀 많이 늙은 정신력의 소유자이다(그렇기때문에 괴테는 제목에 유독 '젊은 베르테르'라고 강조한 것이리라!). 그에게는 신나는 일도 재미있는 일도 없으며, 미치게 즐거울 때도 없다. 그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것을 자유를 빼앗기고 감옥에 갇히는 일과 같다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차라리 자연과 어린이가 있는 천국같은 작은 고장에서 고독을 벗삼아 사색하며, 자기 자신 속에 스스로의 세계를 창조하고자 한다.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삶을 꿈꾸던 그에게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여신 로테. (베르테르의 정신이 조로증을 앓긴했어도, 그의 육체는 아직 피끓는 청춘이였던 거다!)

로테는 일찍 병사한 어머니를 대신해 어린 여덟 동생을 돌보는 천사다. 그녀는 그토록 총명하면서도 그토록 순진하고, 그렇게 꿋꿋하면서도 그같이 마음씨 곱고, 착하고 친절할 뿐 아니라, 정말로 발랄하고 활동적이면서도 침착한 마음의 여유를 지니고 있다. (32쪽)

 

모든 사랑에 빠지는 연인들이 그렇듯 베르테르 역시 로테의 참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여인상에 로테를 투영한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다. 현실적인 삶을 두 다리로 버티기 보다 순수와 아름다움을 갈망하며, 그와다르지 않은 고상한 삶을 살고 싶은 베르테르에게 로테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며,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인 것이다.

<그곳>이 <이곳>으로 변해 버리고 나면 결국 모든 것은 전과 마찬가지가 되고 말아. 우리는 여전히 가난과 궁색에 얽매인 몸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혼은 잃어버린 청량제를 찾아서 허덕이는 것이다.(48쪽) 이루어지는 사랑은 완성이 아니라 끝이다. '그곳'은 절대 '이곳'이 될 수 없으며, 되어서도 안된다.

'그곳'을 '이곳'으로 받아들 수 있었던 괴테는 샤로테를 떠나 괴테로써의 삶을 살수 있었다. 베르테르 역시 로테를 떠나 현실적인 삶에서 기쁨을 얻고자 했지만, 세속적인 일에 능하지 못한 베르테르로서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다시 로테에게로 되돌아가 사랑을 구걸한다. 로테는 베르테르에게 현실 도피처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괴로워하던 베르테르는 이상주의자이지만, 거칠게 말해 현실도피자 또는 사회부적응자, 즉 루저의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로테가 베르테르의 사랑을 받아들였다면 그는 죽지 않았을까? 물론 죽지 않았을 것이다. 로테가 현실이 되는 순간 또다른 이상을 찾아야 했을테니까 말이다. 베르테르는 사랑이 아니라 이상의 완성을 위해 자살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자의 죽음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늘 궁금하기 마련이다. 도대체 왜, 무엇이 죽을만큼 힘들었을까. 죽을 힘을 다해 살아남을 수는 없었던 것일까. 그리고 이어지는 추측. '그만한 일로 죽을꺼라면 나도 진작에 죽었다! '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삶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듯, 죽음조차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영원한 질투의 말 일 수 있다. 죽음은 두려움이지만, 평범한 나같은 사람에게도 일정부분 '매혹'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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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6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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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방금 주인 양반 댁에 다녀왔다. 이제 그는 내가 신경 써야 하는 유일한 이웃이다. 경치 좋은 시골인 것이다! 영국 땅을 전부 뒤져본들, 이다지도 완벽하게 세속잡사에서 동떨어진 곳이 어디 있으랴. 더할 나위 없는 염세가의 천국이로구나. 적막강산을 반씩 나누어 가질 히스클리 씨와 나는 너무나도 어울리는 한 쌍이로구나. 대단한 친구다! 내가 말을 세우자 의심이 가득한 그의 검은 눈은 눈썹 뒤편으로 움푹 들어가고, 내가 이름을 댔는데도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는 그의 손은 조끼 안쪽으로 더욱 깊이 파고 들어가니, 그는 상상도 못했겠지만 나는 그에 대해 적잖이 호감을 느꼈던 것이다.

 

경치좋은 시골, 동떨어진, 염세가, 적막강산,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는 손... 히스클리프... <폭풍의 언덕>은 첫 장, 첫 문장부터 내 마음에 쏘옥 들었다. 도시 한복판에 살고있는 나이건만, 유독 동떨어진 시골의 은둔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나를 매혹하곤 한다.

 

사시사철 바람이 휘몰아치는 언덕 꼭대기에 지어진 튼튼한 저택인 wuthering heights에는 당당한 자세와 잘생긴 외모(13쪽)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감정을 꾸미고 내보이는 짓, 곧 상호 간 호의의 표명을 혐오하는 데서(13쪽) 오는 무뚝뚝함이 뚝뚝 묻어나는 한 남자가 살고있다. 그의 이름은 히스클리프로,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폭풍의 언덕'과 '티티새 지나는 농원' 일대의 주인이다.

소설은 이 한적한 시골 마을의 '티티새 지나는 농원'을 세내려는 런던의 부유한 신사 록우드가 히스클리프를 만나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

 

런던의 부유한 신사라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록우드가 본 히스클리프는  무뚝뚝하고 냉담하지만, 감정을 잘 절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나름의 신사였다. 록우드는 처음부터 히스클리프에게 호감을 가지고 접근한다.

히스클리프의 이웃이 된 록우드는 폭설이 쏟아지던 날 두번째로 폭풍의 언덕을 방문한다. 그러나 히스클리프를 비롯한 폭풍의 언덕 사람들은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며 그들의 새로운 이웃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묘령의 히스클리프 부인, 늙은 하인 조지프, 예사롭지 않은 촌뜨기 헤어턴과 그들이 기르는 개들로 부터  봉변 아닌 봉변을 당한 록우드는 하녀의 권유로 폭풍의 언덕에서 폭설이 몰아치는 밤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유령 아닌 유령 캐서린.

공포와 혼돈의 밤을 보내고 '티티새 지나는 농원'으로 돌아와 몸살을 앓는 록우드는 하녀장 딘 부인에게 '폭풍의 언덕'에 얽힌 그간의 내력을 듣는다.

 

딘 부인이 그리는 히스클리프와 캐서린, 힌들러, 에드거, 이사벨라, 그리고 꼬마 캐시와 린턴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이 다소 비뚤어진 인물들이다. 태어나면서부터 타인의 보살핌을 받아 온 이들은 처음부터 타인을 배려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 그랬고, 그 반대로 보살핌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사람들은 보상심리로 부터 자유롭지 못해 그랬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자기'만 있고, 상대에 대한 생각은 없는 그들은, 오히려 상대로부터 끝없는 배려와 희생을 강요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오만한 사람들은 없는 슬픔까지 만들어내거든.(91쪽)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만든 슬픔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오만한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전부 쏟는 헌신적인 사랑 속에서도 이기심을 포기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은 여타의 인간들 모습이기도 하다.

 

자신을 짝사랑하는 이사벨라에 대한 히스클리프의 폭언은 비단 그녀의 짝사랑에 대한 것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습성에 대한 놀랄만한 통찰이다.  나를 로맨스의 남자 주인공이라고 상상하고, 내가 기사도를 발휘해 무한히 헌신해주기를 기대했던 거야... 저 여자는 지금까지 계속 나라는 존재에 대해 소설 같은 상상을 펼치면서, 애초에 자기가 품었던 잘못된 인상에 따라서 행동하고 있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이 여자는 내가 자기한테 다정한 척 해주기를 바라고 있을걸. 진실이 밝혀지면 허영에 상처가 나겠지.(237쪽)

사랑이란 무엇일까. 1년을 넘기는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사랑의 불신자(100쪽)록우드는 시골 사람들은 좀 더 진지하며, 도시 사람들보다 좀더 자기 자신으로 살고 표면적인 변화나 피상적인 것에 좌우되는 면이 덜 할 것(100쪽)이므로 그들은 사랑에 더 진지하며, 사랑 앞에 더 진실되게 행동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어쩌면 바로 그 진지와 진실이 문제로, 모든 것을 건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집착이며, 변질된 자기애일 뿐이다. 뿐만아니라 때때로 그것은 '악'의 모습으로 나타나곤 한다.  

 

가난한 시골 목사의 딸로 태어나 결핵으로 30세에 삶을 마감할 때까지 황량한 자연환경과 목사 아버지의 엄격한 규율 속에서 고독한 사색을 하던 에밀리 브론테는 히스클리프라는 희대의 악인을 창조해 냈다. 그러나 나는 살짝 궁금하다. 딘 부인이 그린 히스클리프의 모습은 정말 히스클리프 그대로의 모습이였을까. 등장인물 모두를 짜증날만큼 이기적인 모습으로 그린 딘 부인이야 말로 사실은 극단적으로 비뚤어진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었을까.

캐서린의 오빠인 힌들러와 동갑이면서도 쉰을 바라볼 때까지 결혼은 물론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도 없이 오로지 주인집에 대한 봉사만을 해온 것으로 비춰지는 딘 부인이 모든 것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정했던 것은 아니였을까. 이쪽과 저쪽을 오가며 말을 옮기고, 그로 인한 현상을 조장하며, 등장인물들의 폭풍같은 삶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그녀 아니였을까. 소설 말미에 '티티새 지나는 농원'의 하녀장 딘 부인은 딘 마님으로 탈바꿈 한다.

 

과연 딘 부인이 들려준 이야기는 여흥거리로 들을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니, 그것은 슬프고도 괴기스러운 사랑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그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서로를 할퀴고, 상처내다가 죽음에 이르도록 몰아세우는 사랑이라니.

그러나 <폭풍의 언덕>은 이후 19세기 최고의 러브스토리라는 평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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