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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스트레인저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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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히스테리보다 더 괴상망측하네. 마치, 뭐랄까, 뭔가 달라붙어서 집안사람 전부의 생기를 천천히 빨아먹는 것 같아."

"뭔가 있긴 하지." 그는 또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 이름은 바로 노동당 정부고. 에어즈가 사람들의 문제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적응할 생각이 아예 없다는 거야. 오해는 말게. 나도 그 사람들 심정에 상당히 공감하니까.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그들처럼 오래된 잉글랜드 가문에 남은 게 뭐겠는가 계급적인 면에서는 운이 다했지. 정신적인 면에서는 아마 전혀 바뀌지 않고 그저 살던 대로 살 걸.

그는 어느새 피터 베이커하이드처럼 말했고, 나는 그의 활달함이 좀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나와 달리 그 집안사람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지 못했으니까.(539쪽)

그저 단순한 친구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를 진정한 친구라 일컫는 사람을 조심해얄 것이다. 뒤통수를 치는 이는 나름대로의 걱정과 과도한 친절을 세트로 묶어 무한 발사하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무장해재하게 만드는 이들이고 보면.

2차세계대전 후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영국의 귀족 가문인 에어즈 가의 주치의 그레이엄은 하녀가 배탈이 났다는 연락을 받는다. 때마침 응급환자를 보던 중이던 그레이엄은 파트너 의사인 패러데이에게 에어즈 가의 저택인 헌드레즈 홀을 방문해 줄 것을 부탁한다. 그후로부터 줄곧 에어즈 가의 주치의가 된 닥터 패러데이는 어느덧 에어즈가 사람들과 진정한 친구 운운하는 관계로까지 발전한다. 그러나 그것은 패러데이의 생각이고, 에어즈 부인만해도 그녀에게 있어 패러데이는 에어즈가의 아이들을 돌본 유모의 아들이며, 가족의 건강을 돌보는 주치의 이상은 아니라고 여긴다. 

그렇다면 많은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패러데이가 결혼까지 생각했던 에어즈가의 장녀 캐럴라인은 어땠을까. 패러데이의 관심이 자신보다는 자신의 배경 즉, 몰락의 길로 들어선지 이미 오래지만, 어쨌든 유서깊은 영국의 귀족이며 대지주인 가문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이전부터 그녀는 패러데이를 신뢰하지 않았다. 패러데이는 동생 로더릭의 일을 비롯하여 저택에 위험스런 일이 생길 때마다 캐럴라인과 그녀의 어머니를 위해 헌신을 아끼지 않지만, 정작 캐럴라인은 패러데이에게 진심을 열어보이지 않는다. 사려깊은 배려라기엔 지나친 패러데이의 오지랖을 보며 질린 면이 없지 않았겠지만, 그것보다는 태생적으로 캐럴라인의 피부에 스며있는 계급의식이 무의식 중에 작동했던 것은 아니였을지.  

 

시대착오적 인물들

이 소설의 매력은 무엇보다 시대착오적인 등장인물들에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세계의 패권은 미국과 소련에게로 넘어가고, 영국을 비롯한 유럽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였으며, 따라서 귀족들에게도 더이상의 귀족놀음은 허락되지 않았다. 경제적 위기에 몰린 그들은 저택과 농지를 처분했으며, 노동당은 귀족들에게도 배급표를 지급했다.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이러한 급격한 변화에 일부의 귀족들은 적응하지 못했다. 에어즈 부인 또한 가문이 몰락해 가는 와중에도 귀족적인 삶과 정신을 버리지 못한다. 장남인 로더릭 역시 쓰러져가는 에어즈가의 주인 역할을 맡으며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저택과 농지를 유지하며 가문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면서부터 그는 서서히 미치광이가 되어간다.

한편 에어즈 가에서 부리던 유모의 아들인 닥터 페러데이 역시도 시대착오적인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는 어려서부터 선망해 온 에어즈 가의 가족이 되기 위해 노심초사 한다. 노동자 계급이었던 부모를 넘어서 자수성가한 그에게 있어 에어즈 가는 새로 시작되는 패러데이 가의 든든한 뒷배경이 되어줄 것이었다. 그는 시대착오적인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에 반해 오직 한 사람, 시대의 변화에 발 맞춰 변화를 꿈꾸었던 캐럴라인은 최선을 다해 저택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저택과 영지를 모두 처분하려 한다. 실질적으로 가문을 유지시키는 수단인 저택과 영지를 버리는 것은 귀족이라는 이름의 명예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삶은 과거가 아닌 현재이다. 몰락한 귀족이며 명색만 대지주의 딸인 캐럴라인은 그 외모에서 부터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동네에서 사람들이 그녀를 두고 "활달한 편"이라거나 "천생 노처녀"라거나 "똑똑한 아가씨"라고 하는 소리를 이따금 들었다. 그 말인즉슨, 참 인물없고 여자치곤 키가 크며 다리와 발목이 굵다는 뜻이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연한 갈색 머리칼은 잘만 관리하면 꽤 예쁠 것도 같은데 한번도 단정히 꾸민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날도 흡사 세탁비누로 감은 다음 빗질을 잊은 것처럼 부스스했다. 게다가 그렇게 패션 감각이 없는 여자는 난생처음 봤다. 남성용 같은 플랫샌들에 옷맵시가 영 나지 않는 옅은 색 원피스는 튼실한 엉덩이와 커다란 가슴을 전혀 살려주지 못했다.(22쪽)

문학에서건 영화에서건 이처럼 투박하게 그려진 귀족 처녀를 처음 보았기에 캐럴라인의 모습이 처음에는 오히려 현실적이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껏 봐온 스러져가는 운명 속의 그녀들은 왕자 비슷한 남자를 만나 때를 벗고 머리칼을 정리하면 기가막힌 미녀가 되곤 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하는 캐럴라인은 아무리 머리칼을 곱게 정리하고 나긋나긋한 옷을 입는다해도 변하지 않을 큰 키와 굵은 발목을 지녔다. 물론 그녀는 얼굴도 예쁘지 않았고, 어딘가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작가가 주인공이며 무려 귀족인 캐럴라인의 외모를 이렇게 그린 것이 나는 무척 재미있게 여겨졌는데, 세라 워터스는 튼튼한 두 다리로 현실의 땅에 굳건히 설 인물은 캐럴라인 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진정한 공포, 감정이입

시대착오적 인물들과 시대착오를 벗어나려는 캐럴라인, 그리고 운명을 다한 저택이 맞물리면서 빚어내는 공포가 제법 쏠쏠하다. 그러나 등장 인물들 중 그 누구에게서도 내 모습을 보지 못한 나는 철저히 관객의 입장에서 책을 읽었다. 그랬기때문에 708쪽에 이르는 긴 이야기를 읽는 중, 휘몰아치는 광기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줄곧 지루해지곤 했다. 스릴러 소설을 재미있게 읽으려면 무엇보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공포를 제대로 느낄수 있어야 한다. 등장 인물 중 누군가에게 내 감정을 투영했다면 좋았겠지만, 공포 소설을 즐기지않는 나는 무의식 중에 관객의 입장을 고수하며 적절한 선을 유지했기에 조금은 심드렁할 수 있었다. 덕분에 "헌드레즈와 관련된 누군가의 불안정한 무의식이 낳은 사악한 씨앗, 탐욕스러운 그림자, 어떤 낯선 존재에게 이 집 자체가 잡아먹혔다는 가설(707쪽)"의 주인공을 찾는 일이 너무나도 쉬웠다. 물론 작가는 끝까지 정답을 보여주지 않았고, 나는 다만 상상할 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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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미국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나익주 감수 / 와이즈베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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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인식되어지는가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간단하다. 누군가 지금부터는 '코끼리에 대해 생각하지 말자'라고 하면, 당연히 코끼리를 떠올리게 된다. 먼저 대상을 인식해야 그 대상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떠오른 코끼리에 대해 더이상 생각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부터 결코 코끼리로부터 놓여날 수 없게 된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프레임을 활성화하면서 대상을 인식하거나 그와 관련된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대상을 부정할 때도 이 프레임은 작동하는데, 자주 활성화될수록 프레임은 더욱더 확고해 진다. 인지언어학의 창시자이며, 언어학자인 저자 조지 레이코프는 이 공식이 보수 세력에 의해 정치에 어떻게 이용되는지를 보여준다.  

 

'세금'이라는 말이 '구제' 앞에 붙게 되면, 그 결과로 다음과 같은 은유가 탄생한다. 과세는 고통이다. 따라서 이 고통을 없애주는 사람은 영웅이고, 그를 방해하는 자는 나쁜 놈이다. 이것이 바로 프레임이다.(22쪽)

2001년 조지 부시가 대통령이 되면서부터 반복적으로 사용했던 '세금 구제'라는 단어는 언론을 통해 퍼져 나갔고 활성화되었으며, 이후 민주당에서까지 세금 구제란 말을 쓰면서 '중산층을 위한 세금 구제'를 제안하기에 이른다. 진보주의자들까지 보수가 놓은 '세금은 고통'이라는 덫, 즉 보수주의의 프레임에 걸려들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세금은 국가를 움직일 자원일 뿐 아니라, 미래를 위한 투자이다. 장기적으로 세금은 공적 차원에서의 인프라를 구축해 사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할 뿐만아니라, 기업을 비롯한 산업사회가 번성할 기반을 조성한다. 또한 사회복지 프로그램, 즉 유아 교육을 비롯해 빈곤층을 위한 사회안전망과 실업 보험, 의료 보험, 노인 연금 등을 운행할 재원이 세금인 것이다. 그러나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의 공화당은 바로 이러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낭비성 지출로 보고 이를 삭감해 세금을 낮추자는 식의 '세금 구제'를 주장한 것이다. '구제'라는 단어가 주는 영웅적인 이미지에 의해 '세금'은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 되었고, 세금을 자원으로 하는 사회적 차원의 보살핌을 기본 가치로 하는 진보주의자들에게 조차도 '세금 구제'라는 프레임이 무의식 중에 작동하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의 무상급식 논란

'무상'이라는 말이 '급식' 앞에 붙게 되면, 다음과 같은 무의식이 발휘된다. 국가에서 주는 '무상'은 나쁜 것이다. 왜냐하면 직접 일해서 벌지 않은 것은 사람들을 나태하게 하고, 거저 얻어지는 것에 대해 절제할 줄 모르게 되며, 결과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비도덕적인 인간상을 만들기 때문이다(보수우익쪽의 한 언론인은 자신의 컬럼에서 '무상급식으로 나라를 망하게 하려는 좌익 세력은 '악의축''이라는 표현까지 썼으니, 보수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는 무상급식은 참으로 대단히 못된 주장이었던가 보다). 따라서 훈육을 잘 받아 권위에 복종하고, 사익을 추구하며 부와 자립을 이루는 바람직한 인간상을 만들기 위한 교육적 차원에서의 학교 급식은 '유상'으로 지급되어야 하는 것이 옳다. 이것이 바로 2011년 서울의 교육감 선거와 지방선거를 앞두고 불거졌던 '무상급식' 파동 때 사용되었던 보수주의자들의 프레임이다. 이른바 진보주의를 자처하는 야당은 여당의 이러한 프레임을 받아들여, 변함없이 '무상급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모든 학생들에게 보편적으로 지급될 급식을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항상 궁금했다. 국민의 세금으로 지급되는 학교급식이 어째서 무상이란 말인가. 무상이라는 단어가 주는 '공짜' '게으름', '나태', '의존적'과 같은 부정적 의미를 야당은 어째서 그대로 차용하는가 말이다.  낱말 즉 언어를 통해 프레임을 인식한다는 조지 레이코프의 이론에 근거하면 보수가 사용한 부정적 단어인 '무상'의 덫에 진보주의를 자처하는 민주당마저 코가 끼인 상황이 된 것이다.

진보주의 세계관은 평등과 자유를 기본가치로 하며, 돌봄을 통한 유기적 관계를 놓치지 않는다. 우리의 야당이 진정한 진보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면, 보편적인 교육환경에서 기회의 균등을 경험하고 이를 통해 돌보고 나누는 가치를 배울 수있는 학교급식에 관한 새로운 프레임을 형성할 수는 없었을까. 교육이 지식과 기술의 습득만이 아니라, 유기적인 인간관계를 통해 타인의 감정에 이입하고,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 진정한 교육의 힘이라는 것을 상식으로 믿는 진보주의이라면 말이다.

 

보수주의자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저자는 완벽하게 사익의 극대화를 위해 헌신하는 보수주의를 '엄격한 아버지'모형으로 설명했다. 보수주의자들은 험한 세상에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 승자가 된 사람들을 선한 사람으로, 훈육을 제대로 받지못해 자기 자신조차도 돌보지 못하는 의존적인 사람을 비도덕적인 사람으로 본다. 이와같은 비도덕적인 사람들을 위해 선한 사람들의 재원으로 마련된 세금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고 보는 것이 그들의 가치이다. 흔히 생각하듯 보수주의자들이 탐욕과 비열함으로 철면피를 두른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도덕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움직이고 행동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따라서 보수주의자들과의 소통은 감정적으로 격하게 대응할 것이 아니라, 존중하는 태도로 이야기를 경청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말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는 추구하는 도덕적 가치와 이념이 다른만큼 수긍할 수 없는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은 때로 고통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중하고 경청하되 정당한 분노를 품고 이를 표출할 줄도 알아야 하며, 이때 표현되는 분노는 절제된 방식이어야 한다. 

 

보수주의자와의 토의에서 보여야 할 진보주의자의 태도에 관한 지은이의 주장을 읽으며 2012년 18대 대통령 선거 당시 TV로 생중계되었던 대통령 후보 토론회에서의 이정희 후보가 생각났다. 일부 측근 외에는 전혀 소통하지 않는 박근혜 후보의 이른바 불통의 정치를 비롯해, 그와 얽힌 과거사 문제 등을 조목조목 따지는 이 후보의 명철함은 빛이 났다. 그러나 목소리 톤을 높이고 낯빛을 붉히면서 까지 '박 후보의 낙선을 위해 나왔다'라고 한 다분히 공격적인 그의 언사는 이 후보의 반대자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던 중도적 입장의 사람들에게까지 부정적인 이미지로 비쳐졌다.

허를 찌르는 이 후보의 질문에 박 후보는 답변이 궁색할 지경으로 수세에 몰렸지만, 그건 박 후보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 후보의 전투적인 태도에 놀라 당황한 어른(장유유서의 관점에서)의 모습으로 비쳐졌으며, 이 후보의 명철함은 오히려 확인되지 않은 사실에 대해 개인적 감정을 앞세운 비난으로 보일 정도였다.

 

여론조사 기관인 리얼미터가 대통령 선거 직후인 2012년 12월 22일 발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보수 표심의 결집 원인에 대한 응답 중 '이 후보의 공격적 TV토론 태도'가 31.0%로 가장 높았다(2012년 12월 23일, 경향신문). 이러한 결과는 아버지로 대표되는 권위에 대해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기본가치로 오랫동안 받아들여온 대한민국에서 보일 수 있는 당연한 결과였다고 생각된다.

아버지는 가족을 보호하고 이끌어야 하며, 그러한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것은 유교를 근간으로 한 조선시대로 부터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의 상식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프레임에 갇혀있는 50대 이상의 중장년층 중 다수의 사람들이 보기에 이정희 후보의 태도는 정당한 권위(박근혜 후보는 50대 이상의 중장년층에게는 한때 영부인의 역할을 했던 최고 권력이었으므로)에 도전하는 부정적인 이미지였을 것이다. 이에 가정과 국가를 하나로 이해하는 대한민국의 어르신들은 자신과 국가의 존폐에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며, 버르장머리 없는 젊은 것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표심을 집결해야 한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나름으로 추측해 본다.

레이코프는 '진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것은 진보가 믿는 흔한 속설로, 사람들은 진실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219쪽)라고 역설한다. 이 후보가 대한민국 국민 앞에서 당찬 목소리로 진실을 열어 보였지만, TV토론을 본 많은 사람들이 본 것은 그의 손가락이었다. 이 후보가 선택해야 한 것은 장렬한 전사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프레임이며, 한번 자리잡은 프레임은 왠만해서는 뒤바꾸기 힘들다

때문에 진보는 이제라도 보수와의 프레임 전쟁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진보주의자를 자처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매순간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할뿐만 아니라, 정치적 입장이 갈릴 때마다 스스로도 자신의 주장에 대해 자신없이 물러나곤 한다면 꼭 한번 읽어볼만 한 책이다. 또한 서민들이 어째서 자기이익에 반하여 부자들을 위한 투표를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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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적 글쓰기 - 열등감에서 자신감으로, 삶을 바꾼 쓰기의 힘
서민 지음 / 생각정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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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서 민이 글을 쓰게 된 이유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삶의 에너지가 밖을 향해 끊임없이 자기를 표현하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으로 만족을 얻는 이와, 반대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환경에 스트레스를 받고, 때가되면 자기만의 굴로 들어가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해야 편안함을 느끼는 이가 바로 그것이다. 지은이 서 민은 전자의 사람으로, 그는 기질적으로 이목을 끄는 것에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다(그는 자신이 글을 쓰는 것은 소심함과 내성적인 성격 때문이라고 했지만, 책에서 본 그는 전혀 소심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세상 저 혼자 사는 것 같은 외모가 있겠는데, 지은이 서 민의 말에 의하자면 자신은 '너무 못생긴(18쪽)' 사람이었다. 많은 이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데는 '너무 못생긴' 외모도 한 몫할 수 있겠지만, 서 민은 뭍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큼 출중하게 못생긴 사람도 되지 못했다. 외모가 안된다면 특출나게 잘하는 무엇 역시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겠으나, 어린시절 그는 공부를 빼어나게 잘 하지도, 물찬제비처럼 몸놀림이 빨라 운동을 잘한 것도 아니었다. 뿐만아니라 노래는 어떤 걸 불러도 음의 높낮이가 없었고, 그림 실력 역시도 그다지 좋지 못했던 탓에 선생님은 그가 정성껏 그린 그림을 들고 '이건 성의가 하나도 없는 그림(10쪽)'이라고 말했다.

설상가상으로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주눅까지 들었던 자칭 못생긴 서 민은 말이 없을 수 밖에 없는 아이였다. 그런 그가 자신을 드러낼 방법으로 택한 것은 글쓰기였다. 백일장마다 입상해 상으로 벽을 도배할 정도의 글쓰기 실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도저도 안된다는 것을 안 어린 서 민이 자신을 표현할 동력은 글쓰기 밖에 없었라고 느낀 것이다(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그가 에너지가 밖으로 뻗는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챘는데, 보통의 내성적인 소심둥이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 자체에 두움을 느끼기 때문에 도무지 누군가로부터 관심을 받고싶어하질 않는다). 어쨌든 글을 써저 자신을 표현하던 초등학생 서 민은 짝꿍에게 이런식의 쪽지를 보내곤 했다. "안녕? 벌써 날이 추워지는구나. 그래서 말인데 지우개 좀 빌려줄래?"(11쪽)

 

스스로를 생각할 때 내성적이고, 소심하며, 외모까지 못났지만, 사실은 펄펄 뛰는에너지를 밖으로 표출해 사람들의 눈에 두드러지고 싶었던 서 민은 의대에 진학한 후로도, 글쓰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뿐만아니라 평범한 글쓰기로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한다는 것을 파악한 후로는 유머까지 구사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의 첫 책 <소설 마태우스>가 탄생하고, 책이 팔리기를 기다려 즉석 사인을 해 줄 심사로 기다리던 서점에서 그는 책의 세계로 빠져든다. 드디어 읽어야 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그것은 글쓰기에 대한 진정한 목마름이었고, 그렇게 글쓰기를 위한 지옥훈련이 시작된다.

 

서민的(?) 글쓰기

지은이 '서 민 처럼 글쓰기'를 표방한 것으로 여겨지는 책 제목답게 <서민적 글쓰기>는 지은이 서 민이 그간 써온 글쓰기의 이력과, 글을 쓰는 이유, 자신이 글을 쓰는 방법 등을 일러준다.  기생충학과 교수, 컬럼니스트, 베스트셀러 작가의 직함을 가진 서 민이라는 사람보다, 좋은 혹은 잘쓰는 '글쓰기'에 대한 관심으로 이 책을 골랐던 나는 지은이 서 민의 솔직 발랄 유쾌 통쾌한 이야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푹 빠져 지난 주말을 보냈다. 신문에서 가끔 보았던, 그 자신이 특기라고 주장하는 반어법을 이용한 돌려까기 식 컬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이 책을 읽고 엿본 글쓰기에 대한 그의 열망만은 너무도 존경스럽다.

그는 자신이 글을 잘 쓰게 된 것은 서른에 시작해서 마흔에 완성한 지옥훈련 덕분이라며, 노력한다면 누구라도 자기만큼 글을 쓸 수 있다는 겸양의 말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볼 때 그는 지금까지 살아온 평생동안 글쓰기를 흠모해 왔다. 사람이 무엇인가에 자신을 걸고, 또 그만큼 잘 하고자 한다면, '서 민이 글쓰기를 열망하듯' 해야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서민적 글쓰기>의 핵심이다. 양심이 있다면, 서 민만큼 노력하지 않고 날로 잘 쓰려는 생각은 버려야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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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글쓰기 특강 - 생각 정리의 기술
김민영.황선애 지음 / 북바이북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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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쓰는가

책을 읽고, 그에 대한 감상쓰기를 취미로 삼고 있는 나에게 글을 왜 쓰는가, 하는 의문은 책을 왜 읽는가 하는 고민으로 이어진다. 나는 책을 왜 읽는가. 사고의 정체에서 벗어나 새로운 앎으로 나아가는 희열을 맛 보고(39쪽) 싶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글은 왜 쓰는가. 읽은 것을 되도록 많이 기억하고 생각하며, 그로 인하여 지금껏 알지 못했던, 혹은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몸으로 느껴, 완전히 내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딱히 서평을 쓰겠다기 보다는 내가 읽은 것들을 잘 정리해 두고 싶다는 생각인 것이다. 그러나 읽어주는 이가 없다해도 역시 개인적인 리뷰를 남기겠는가. 책을 읽고 느낀 것들을 블로그에 적으며, 아무도 찾지 않고 아무도 읽지 않는다해도 나만의 감상문 적기를 계속할까? 단지 내가 느낀 것들을 기억하기 위해?

그러나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욕망은 내가 쓴 글을 누군가가 읽어주길, 그것도 되도록 많은 사람이 읽어주길 바라는 소망의 표현이지 않은가 말이다.

 

서평을 쓸 것인가, 독후감을 남길 것인가

서평과 독후감의 다른 점은 서평은 비평에 가깝고, 책의 가치를 논해야 하며, 그로인하여 서평을 읽는 사람이 그 책을 읽을 것인가 말것인가를 결정하게 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서평은 읽는 사람과의 소통을 목적으로 한다. 그에비해 독후감은 자신만의 감상을 적는 몹시 개인적인 것으로, 읽는 사람과의 소통보다는 나를 위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서평보다는 리뷰 혹은 감상문 쓰기를 즐긴다. 무엇보다 책을 읽고 평을 한다는 것 자체가 주제넘은 일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인데, 이러니 저러니하며 남의 글을 평할 정도의 깜량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더불어 어떤 평이든 자신만의 생각일 수 있다라고 믿는데, 아무리 설득력있는 평일지라도 그 반대의 의견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라는 겸손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긍정적인 쪽으로든 아니면 그렇지 못한 쪽이든 책에서는 반드시 배울점이 있다 라고 본다(기대에 못미치는 책을 만났을 땐 최소한 이런 편협한 생각을 책으로 남기지는 않겠다라든지 하는). 그러니까 말인 즉, 내가 서평이 아닌 독후감을 쓰는 것은 배우는 자세로 책을 읽겠다는 갸륵한 태도의 표현인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이렇게저렇게 포장해도 결국 남을 비평할 만큼 아는 것이 없을뿐더러, 내 주장에 대해 나조차도 확신이 안 설만큼 자신감도 없다는 것이 솔직한 얘기이다. 

그러나 글을 쓰고 공개하는 것은 나를 좀 인정해달라는 욕구의 표현이다. 남을 평하는 것에 반감을 가지네 마네하지만, 사실은 좀 읽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를 감출 수 없기에 이 책을 읽게 된 것이다.

 

서평을 잘 쓰기 위한 책, <서평 글쓰기 특강>

서평이야 말로 책을 가장 잘 읽는 방법이며, 효과적인 글쓰기라 믿으며 서평쓰기 관련 강의를 8년째 진행하고 있는 김민영과, 함께 읽기, 함께 쓰기를 하는 서평모임을 꾸준히 진행해오고 있는 황선애의 공저로 쓰인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서평'을 쓰기 위한 길라잡이이다.

독후감이 아닌 서평을 써야하는 이유부터 친절히 설명하는 것으로 서두를 열며, 혼자만의 만족을 위한 주관적인 글에서 읽는 이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객관적인 길로 나아가는 방법을 자세히 알려준다. 그 방법의 첫째는 무엇보다 비평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인데, 정답을 위한 공부만을 했던 나같은 이들에게 가장 힘든 것이 입장을 명확히 밝혀야 하는 '비평하기'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 정답 아니면 오답뿐인 공교육의 힘은 자신만의 주관적인 생각을 드러내는데 용기를 필요로 한다(만일 내 생각이 틀렸다면 어떻게 하지?). 그러나 틀리는 것에대한 두려움부터 버려야 비평이 가능해진다. 비평은 절대평가아니라 내 관점이며 또 하나의 의견이고, 의견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보다 논리적이어야 한다. 비평적 관점을 가진 서평은 그를 가능하게 한다. 책을 읽는 이유가 좀더 '나다워지기'위해서라면 더더욱 나만의 관점에 자신감을 가져야 할 것이고, 이 자신감은 글이든 말이든 드러내는데서 생겨난다. 이것이 바로 책을 읽는 이유임과 동시에 글을 쓰는 이유다. 때문에 감상문이든 서평이든 자신의 관점을 명확히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고,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가운데서 설득력있는 글이 탄생한다. 그것이 독후감이든 서평이든 책을 읽고 글을 남겨야 하는 이유이며, 목적이다.

 

많이 읽고, 많이 쓸 것

독후감과 서평은 다르지만, 독후감이든 서평이든 무엇인가를 쓰기 위해서는 일단 많이 읽고, 자주 써야한다. 그래야만 종래에는 읽히는 글을 쓸 수 있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다면 무엇보다 글을 써서 공개해 둘 이유가 없다. 개인적인 감상글이라도 읽는 이로하여금 책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그 감상문은 서평보다 더 유용한 글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오늘도 나만의 리뷰를 작성한다. 읽히는 글을 쓰고 싶지만 그렇다고 보이기위한 글을 쓸 수는 없는 터, 주관적인 감상의 글로 객관적인 공감을 이끌어 낼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훌륭한 리뷰가 없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는 바로 그점을 깨달았다. 누가 뭐래도 내 관점을 유지하되, 그러나 설득력이 없는 주장은 자기만족을 위한 독선일 뿐이다.

어떤 글쓰기를 하든 혼자만을 위한 비밀글이 아닌바에야 읽히는 글이 좋은 글임에 분명하다.  꼭 서평이 아니어도 좋은 글을 쓰고 싶다면 반드시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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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10-19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쓰는 글에 사람들이 보지 않더라도, 분명 누군가는 그 글을 보게 될 겁니다. 어떤 책이 궁금해서 그 책을 검색하다가 서평을 읽을 수 있어요. 가끔 2년 전에 쓴 글에 ‘좋아요’ 받을 때가 있어요. 그래서 최대한 잘 쓰려고 노력합니다.

비의딸 2015-10-20 10:16   좋아요 0 | URL
때로는 최대한 잘 쓰려는 노력이 너무 피곤해서요.. 그런데 또 보이려는 글이 아니면 굳이 불로그에 올릴 필요가 없는 거잖아요. 어느때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의 글을 남길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불현듯 `이따위 글을`하고 후회할 때도 있죠. 어쨌든 글은 아무나 쓸 수는 있어도 아무렇게나 써서는 안되는 것 같아요.

2015-11-09 1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리오 영감 을유세계문학전집 32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동렬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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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반의 프랑스는 대혁명 이후, 자본주의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 혼란스럽고도 횡재스러운 시기에 명민한 사업 수완을 발휘해 성공한 고리오는 일종의 신흥 벼락부자이다. 사랑하는 아내를 일찍 잃은 고리오는 남겨진 두 딸에게 몹시 집착했다. 그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어린 두 딸의 욕망을 언제나 선수쳐 만족시켜 주었는데, 과자를 탐하던 어린 두딸은 어느덧 자라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고리오는 이때에도 딸들에게 재산을 후하게 분배해 큰 딸은 백작 부인이 되었고, 작은 딸은 은행업자와 결혼해 더더욱 큰 부자가 되었다. 그녀들은 그후 파리의 사교계를 드나들며 당시의 풍속대로 애인을 만들고 사치를 즐기며 쾌락을 탐했는데, 그들은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돈이 필요할 때마다 아버지를 찾았다. 딸들에게 과도하게 집착했던 고리오는 자신의 전 재산과 연금까지 팔아 그녀들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그러나 그 많던 고리오의 재산도 바닥을 보이는 날이 왔고, 그와 함께 늙고 병든 고리오의 죽음도 찾아들었다. 이제 빈털털이가 된 고리오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었는데, 돈이 필요할 때면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하며 아버지의 비유를 맞추던 딸들은 정작 노인의 죽음 앞에서는 냉정한 모습을 보이고, 고리오는 딸들의 이름을 부르며 죽음을 맞는다. 그순간 고리오가 머물던 여인숙의 1층 식당에서는 그들만의 비루한 식사가 계속되고 있었다.

파리라는 멋진 도시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의 하나는 아무의 관심도 받지 않은 채 태어나고, 살고, 죽을 수 있다는 것이오. 그러니 문명의 이런 혜택을 누립시다. 오늘만 해도 죽은 사람이 60명은 될 텐데, 이런 파리의 대 살육에 모두 애도를 표하겠다는 거요? 고리오 영감이 끝장났다면, 차라리 본인에겐 잘된 일이지! 영감을 사랑한다면 가서 지키시고, 나머지 사람들은 조용히 식사하게 좀 놔두시오. (399쪽)

 

고리오의 이런 비참한 이야기는 같은 여인숙에 머물던 청년 라스티냐크에 의해 관찰되고 증언되어지는데, 라스티냐크는 시골에 작은 영지를 가진 소귀족의 큰 아들로, 그는 가족의 희생을 딛고 출세를 위해 파리에서 법률 공부를 하던 중이었다. 그는 법률가로 소소한 출세를 하기보다는 사교계를 드나들며 유명한 부인과 연애사건을 일으킴으로써 단번에 상류사회로 진입할 것을 맹세하고, 고리오의 작은딸에게 접근한다. 과연 그는 고리오와 그의 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딸들을 향한 고리오의 무분별한 사랑과 그를 대하는 딸들의 냉랭한 모습에서 돈을 매개로 하는 가족을 비롯한 인간관계의 비루함을 몸소 체험하며, 자신이 속하고자 하는 파리사회의 비정함에 대해 많은 망설임과 갈등을 겪는다. 그러나 라스티냐크는 고리오의 죽음과 함께 세상 물정을 모르던 청년다운 열정도 함께 묻는다. 그리고 그는 파리를 향하여 '이제 우리 둘의 대결이다' 라고, 출세주의자 다운 다짐을 하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고리오 영감>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잘못 키운 자식에 대해 회의를 느끼듯, 나 역시 '부모와 나', '자식과 나'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부모로 부터 받은 것이 많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여타의 모든 자식들과 비슷하고, 자식에게 할수있는 한 많은 것을 주려한다는 것 역시 세상의 모든 부모들과 비슷하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것에서 비롯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란, '부모와 나'의 관계이든' 나와 자식'의 관계이든, 중심에는 항상 '내'가 있다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 필요한 것과 필요할 것을 규정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닌가. 자식의 입장에서 나는 부모가 내게 필요한 것을 주지 않았다고 여겼고, 부모의 입장이 되자, 자식에게 필요할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주려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항상 내가 있다.

방관이 아닌듯 방목하며 자식을 돌보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노년을 자식에게 마낄 심사가 아니여도 그렇다. 저택을 물려줄 수는 없겠으나, 울타리는 되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제법 건강해 보이는 생각까지도 자식에게는 지나치다. '그들은 내가 아니고, 하물며 내 것은 더더욱 아니다' 라는 것이 <고리오 영감>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한편 발자크는 '인간극'을 기획했다고 하는데, 이를테면 라스티냐크는 <고리오 영감>외에도 발자크의 다른 소설들에서도 등장하며, 이야기의 고리를 이어간다. 발자크는 이와같은 '인간극'을 통해 당시 사회의 풍속을 그리고자 했다. 그는 90여편의 인간극을 완성했으나, 그가 처음 구상하며 세웠던 130편의 기획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이조차도 전체를 다 읽은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한다. 

발자크의 인간극은 에밀 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를 떠올리게 하는데, 졸라의 <제르미날>을 읽고, <목로주점>, <니나>를 이어서 읽었지만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목로주점>의 주인공 제르베즈의 딸 니나가 소설 <니나>로 이어지는 식으로)가 이어진다는 것 외에 특별한 감흥은 느끼지 못했다. 혈연이나 별다른 관계가 아니어도, 어차피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가 인간극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발자크의 끊이지 않는 작품에 대한 열정은 가히 놀랄만한 것으로, 그는 하루에 수십 잔씩 커피만 마시며 전혀 잠을 자지 않은채로 글을 쓰곤 했다는 것이다. 에밀 졸라는 그의 이런 일화에 대해 '소설 노동자의 일생'이라고 평했다. 재미있는 것은 발자크의 방대한 작품들이 돈을 위해 쓰여졌다는 것이다. 한때 사업을 하며 졌던 막대한 금액의 부채와 파리의 사교계 생활을 드나들던 부르주아의 생활이 발자크로하여금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쓰고자 한다고 해서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닌만큼 발자크에게는 이야기를 창조하고, 그를 글로 엮어내는 천재적 능력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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