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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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모든 걸 끝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하고 싶지 않는 일을 내키지 않는 방식으로 처리 해야만 할 때, 얽히고 싶지 않은 인간관계에서 끊임없이 복닥 여야만 할 때, 어떻게 살아도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가족과 동료, 친구들과 함께 있어도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턱까지 차올라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그때... 그럴 때면 그만 이쯤에서 모든 것을 끝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도 그런 생각은 아무일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누구라도 한 번쯤은 해 보는 생각일 텐데(아니,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일이 없는 사람도 분명 있을 터이지만!), 어쨌든 그것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삶을 끝내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말하는 사람이 내 아이라면 어떤 기분이 될까, 삶을 그만 끝내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에게 엄마는 뭐라고 위로해야 할까. 크리스토퍼 키터리지는 엄마인 올리브에게 바로 그렇게 말한 때가 있었다.

가끔 모든 걸 끝내버리는 생각을 해요...”(128)

 

엄마는 행동이 거의 편집증적이에요

크리스토퍼는 중년에 들어서 늦결혼을 했다. 수잔은 남편 크리스토퍼에 대해 다 안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는데, 올리브는 수잔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잔이 제아무리 의학박사에 철학박사라 하더라도 엄마인 자신보다 크리스토퍼에 대해 더 잘 알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천사 같던 아기 크리스토퍼가 자라서 모든 걸 끝내버리는 생각을 한다고 고백하던 시절도 있었음을 수잔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수잔에 대한 못마땅함이 그녀가 아들과 잘 지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면서 그것은 엄마로서의 느낌이 아니라 바람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크리스토퍼가 고향을 등지고 아내를 따라 대륙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간 것도, 그렇게 멀리가고도 일년 만에 이혼을 당한 것도,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으려하는 것도 모두 매사에 명령하기를 좋아하고 뭐든 다 안다는 태도를 보인 수잔 탓이라고 여긴다.

세월이 흘러 크리스토퍼는 재혼을 하고, 오랫만에 아들을 만나러 뉴욕으로 날아간 올리브는 말이 많아진 아들의 모습에 놀란다. 올리브가 알고 있는 크리스토퍼는 엄마인 자신을 닮아 뭐든 말로 다 표현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 자신도 과묵한 타입이였다. 그러나 다시 만난 크리스토퍼는 말을 아끼지 않았으며, 때때로 거친 말을 쓰기도 했다. 급기야 크리스토퍼는 다정한 아들부부의 모습에 소외감을 느껴 불현듯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하는 올리브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행동이 거의 편집증적이에요. 엄만 언제나 그랬어요. 적어도 많이 그랬어요. 그리고 전 엄마가 그에 대해서 책임지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일 분은 이랬다가, 일 분 후에는 또 마구 화를 내고. 아주 피곤해요. 주변 사람들을 너무 지치게 해요.”(411)

 

그이는 힘든 시간을 겪었어

키와 체구가 큰 올리브는 언제나 당당하게 보인다. 그녀는 굳이 말로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표현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런 만큼 자신이 하는 말은 꼭 해야만 하는 말 이라고 여기는 괴팍한 성격이다. 올리브는 초등학교 수학선생이었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거침없는 그녀를 무서워했다. 그녀는 처음 만난 사람의 얼굴에는 많은 것이 드러난다고 믿었는데, 숱한 아이들을 보아온 교사인(였던) 만큼, 자신의 판단은 틀리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언제나 자신감에 차 있는 그녀도 불현듯 외로움을 느끼는 때가 있다. 외로움은 불안과 공포의 다른 표현이곤 했는데, 그것은 프로이트가 말했듯 사랑받고 사랑할 것을 갈망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이었다. 올리브는 크리스토퍼에게 자신의 불안을 투사했다. 아들은 자신을 꼭 닮았으며, 무엇이 아들에게 좋은 것인지, 또는 아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따위를 판단했다. 그런 그녀에게 뒤늦게 나타난 수잔은 적이 될 수 없었다. 수잔은 크리스토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전부 아는 것처럼 뻐기는 얄미운 연적일 뿐이다. 그러니 아들의 변심은 수잔이거나, 혹은 아들이 뒤늦게 알게 된 어떤 사람 때문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아들이 자신을 꼭 닮았다라고 생각한 것부터가 올리브의 잘못이었다. 크리스토퍼는 변심한 것이 아니라, 그제서야 제 모습을 찾은 것일지도 모른다.  첫 번째 결혼식에서 새 신부인 수잔은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인 힘든 시간을 겪었어. 외동아들인 게 그이한테는 정말 죽음이었지.“(127)

 

자기가 뭐든 다 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니까

올리브는 뻔한 것에 대해 말이 많은 사람들과 감정의 낭비를 즐기는 사람들의 한심함을 자신이 언제나 참아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언제나 옳은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못 알고 있거나, 그들이 표현하는 것은 시시하다고 여기면서도 그에 대해 가타부타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말하는 것을 즐기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변덕스럽고 괴팍하며 자기중심적인 올리브를 참아주고 있는 것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중년의 나이에 늦장가 든 아들이 뭐든 다 안다고 생각하는 박사 출신의 수잔과 결혼을 하자, “자기가 뭐든 다 안다고 생각하는 여자와 살 필요는 없다. 뭐든 다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사람은 자기가 뭐든 다 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니까.”(133) 라고 혼자서 되뇌지만, 사실은 올리브 역시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이 였으며, 아들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엄마와 살아오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왔다고 수잔에게 고백했던 것이다

보라, 그녀가 얼마나 살고 싶어하는지

<올리브 키터리지>는 연작 소설 형식을 취한 단편 소설집이다. 각각의 단편은 다른 인물의 다른 이야기이지만, 반드시 올리브 키터리지와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 올리브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이던가, 올리브가 주인공의 수학 선생님 이었다던가, 주인공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바에 단골손님이라던가, 단순히 그저 이웃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일반적인 단편소설집과 다르게 연작 소설은 앞에 등장했던 인물이 계속해서 등장하거나, 앞의 이야기에 이어서 스토리가 진행되기 때문에, 새로운 이야기와 새로운 등장인물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신경을 쓰며 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매번 새롭게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특별한 설명이 없어 어떤 단편은 이야기가 다 끝나가도록 인물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두 번째 단편 <밀물>같은 경우이겠는데, 첫 번째 이야기인 <약국>의 아련함에 취해,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밀물>을 다시 한 번 되풀이해 읽자, <약국>에서 느낀 아련함은 <밀물>의 애잔함을 따라올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게 열세 편의 단편을 천천히 읽었다. 그런 후에야 연작의 형식을 취한 이 이야기들이 결국은 한결로 모인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것은 점점 더 무서워지는 삶의 바다에서 나는 안전하다(279)”고 느끼길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한는 것이다.

보이는 곳에 두고 가끔 모든 걸 끝내버리고 싶어질 때, 혹은 내가 아직은 사랑 쪽에 속한 사람이라는 걸 믿고 싶을 때, 또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확인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꺼내보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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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6-04-12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척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리뷰의 마지막 문장이 참 와닿아요. 잘 읽었습니다~

비의딸 2016-04-12 18:16   좋아요 0 | URL
이 책을 다 읽는데 일 년 정도 걸린 것 같아요. <약속>이 너무 좋아 시작했다가 <밀물>에서 턱 막혔었거든요, 지금은 물론 저한테도 무척 소중한 책이 되었어요~
 
미국의 비극 - 상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35
디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김병철 옮김 / 범우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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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속적인 너무나도 통속적인

빈곤하고 불우한 성장기를 보낸 남자가 부유한 여자를 이용해 신분상승을 꾀하고, 그에 걸림돌이 되는 가난한 애인을 걷어차는 이야기는 문학에서도 그렇지만 실제로도 흔하디 흔한 이야기이다. <미국의 비극>은 더도 덜도 아닌 딱 그 내용인데,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이 이야기의 소재를 신문기사에서 얻었다. 1906년 뉴욕에서 있었던 살인 사건에 대한 기사로, 광신적인 부모 밑에서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빈곤하게 자란 한 남자가 역시 마찬가지로 가난한 여공을 유혹하고 임신시켰다. 그러나 그후 미모와 재물과 지위를 겸비한, 그리하여 자신을 상류사회로 이끌어줄 새로운 애인과의 교제에 그녀가 방해되자 호수로 여자를 유인, 테니스 라켓으로 머리를 쳐 익사시켰다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씌여진 <미국의 비극>은 이토록 간단한 이야기지만, 상·하로 나뉘여 도합 1,000쪽에 이른다.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크라이드의 성장기를 비롯한 각각의 장면 뿐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심리상태와 변화에 대해 매우 세밀하고도 반복적으로 묘사했다. 그로인해 소설은 다소 장황하고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 또한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다는 반전없는 뻔한 결과 때문에 그의 첫 장편 <시스터 캐리>보다 긴장감이 떨어진다. 그러나 <시스터 캐리>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비극> 역시 욕망에 휘둘리는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또한 보다 낫다고 여겨지는 것을 향한 주인공의 욕망과 갈등이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보편적 인간의 고뇌로 이어지면서 마치 나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인 것처럼 여겨진다. 때문에 다소 지루한 반복에도 불구하고 한번 잡은 책을  내려 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지위도 돈도 뭐든 갖춰져 있거든요, 팔자가 좋은 거죠. 그와 반대로 난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목적을 달성하기란 여간 힘이 들지 않아요. 더욱이 그 여자들을 상대로 돈과 신분에 대항해 나가야만 하니까……(상권 424쪽)

죄책감은 학습의 결과?

어린 크라이드는 전도관을 열고 가족을 전부 동원해 가두 설교를 일삼는 부모의 광신적인 행위에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성장했다. 뿐만아니라 그처럼 열성적으로 믿고있는 하나님은 실제로 자신들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 증거로 돈벌이를 등한시한 부모의 전도 생활 때문에 그의 가족은 늘 궁핍했던 것이다. 이에 크라이드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부모로 부터 벗어나 직접적인 돈벌이에 뛰어들었다. 부모가 강요하는 보답없는 신앙생활보다는 일반적인 시류, 즉 물질을 쫓는 것이 젊은이다운 생리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적으로도 상대적 박탈감에 몸서리치는 보통의 젊은이들이 그렇듯 특별한 철학이나 목표없이 동료들과 어울려 그때그때의 즐거움을 맛보고, 흐르는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상류사회로 진입할 수 있는 기회가 닥치고, 크라이드는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양심을 버리기로 한다. 그것이 한때나마 사랑했던 여자를 죽이는 일 일지라도.

 

크라이드는 처음엔 공포에 부들부들 떨면서 무서움에 가라앉은 속삭임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마치 철인과도 같은 초연한 태도로 바뀌고 말았다. 마치 자기가 살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광포하고도 악마적인 방법이라도 허용되어야만 한다는 그러한 배짱을 이미 세워버린 것 같이도 보였다. 사실 그는 단념하려 해도 단념할 수 없는 꿈과 환락을 앞에다 놓고서 그만 그 유혹에 지고 말아, 그 방법이 자못 그럴듯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저 한 번만 그 흉행을 결행하면 모든 욕구와 꿈이 실현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하권 74쪽)

가난과 궁핍에 더해 신을 향해 늘 죄인의 모습일 것임을 강요하는 부모 밑에서 성장한 크라이드는 임신까지 한 가난한 애인을 죽이고서는 이상하게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살인의 순간 순간적인 정신분열을 일으켜 자신은 살인에 관여하지 않았고, 그녀의 죽음은 우연의 결과라고 자신을 속이기까지 한다. 광신적인 부모의 전도 생활을 부끄럽게 여겼다고는 하지만, 낳아서부터 들어오고 배웠던 하나님에 대한 경외나 구원에 대한 설교를 듣고 자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쩌면 과잉된 강요가 그로부터 종교적 믿음뿐만 아니라, 인간다운 양심의 싹조차도 잘라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경우 크라이드의 부모는 자식 하나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아니 오히려 자아가 제대로 설 수 없는 강요된 환경으로 인해 아들이 죄악의 구분 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으로 밀어넣고는 제대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할 수 있을까.

 

'미국'이 의미하는 것

어떻게 된 것인지 나는 양심도 없고, 몰지각하며, 자기 욕망을 위해서라면 임기응변적이고, 자기보다 우위에 있는 권위 앞에서는 겁쟁이인 크라이드에게 많은 공감을 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신에 대한 부모의 경외를 의심하는 크라이드, 남의 목숨은 앗았을망정 정녕 자신은 죽고싶지 않다고 울부짖는 크라이드,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당장 도망부터 치고보는 크라이드, 들키지만 않는다면 거짓말도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크라이드,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 벌인 옳지 않은 일에 대해 죄책감을 갖거나 후회하는 대신 그 모든 것이 자기만의 잘못이냐고 되묻는 크라이드, 그리고 끝내는 강요당하는 죄책감 보다는 차라리 그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는 크라이드. 부족하고 못날 뿐만 아니라, 부정하기까지 한 그의 모습은 누가 보고 있지 않을 때 본능적인 욕망에 갈등하며 고뇌하는 나의 모습과 매우 닮았다.

 

드라이저는 크라이드의 이야기는 미국의 자본주의 사회가 빚어 내는 전형적인 이야기라고 했다. 왜냐하면 사회가 권장하는 가치관이 그 가치관을 따를 수 없는 무능력자들에게 오히려 가장 욕구를 충동시켜 주고 있으며, 이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무능력자들은 온갖 제약을 받고 끝내는 범죄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권 517쪽, 작품론 중)

소설의 제목이 '크라이드의 비극'이나, '개인적인 비극'이 아닌 '미국의 비극'인 것은 출세와 부, 권력, 야망으로 상징되는 시류를 쫓느라 자신을 잃어버리는 현대사회의 인간을 '미국'이라는 이름에 담았기 때문이다. 만약 크라이드가 로버타를 죽이고도 들키지 않았다면, 그래서 상류사회의 여자인 손드라와 가정을 꾸미고 무난히 상류사회의 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크라이드는 상류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에서 제 몫을 다하는 성실한 인간군상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럴수 있었다 해도 그는 그외의 더 많은 것을 욕망했을 것이고,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어 했을 것이며, 수중의 것 중 무엇 하나라도 잃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때로는 갖지 못한 것 때문에 몸 달아 했을 것이며, 갖았거나 갖고싶은 것을 위해 양심을 버리고 자신조차 속이는 일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1차세계대전 후 황금기를 누리던 1920년대 미국의 보편적인 모습이었다고 드라이저는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인 욕망만이 자아의 존재를 확인하는 기준이 되어 안달복달하며 삶을 꾸리는 것이 1920년대의 미국의 일만은 아니므로, 크라이드의 욕망에 공감하는 독자는 오늘날에도 끊이지 않는 것이다.

 

시어도어 드라이저

<시스터 캐리>를 읽고, 인간의 욕망에 집중하는 드라이저의 소설에 매혹되어 <미국의 비극>을 읽었다. <시스터 캐리>를 읽을 때, 혹여 소설이 신문기사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말그대로 내 추측이었을 뿐이고, <시스터 캐리>는 드라이저의 누나 에마로부터 출발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미국의 비극>을 읽으며 이것이야말로 실제로 신문기사를 토대로 씌여진 소설이라는 것을 알고 다소 놀랐다. 역시 소설가는 한줄의 기사에서도 이야기를 창조해 내는 천재라는 내 견해는 옳다. 한편,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다른 책들도 읽고 싶다. 우리나라에서 출간 된 것은 단지 <시스터 캐리>와 <미국의 비극> 이 두 편 뿐이지만, 조만간 <제니 게르하트>니, <금융업자>, <천재>, <금욕주의자>도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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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 캐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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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의 어느날, 시카고 발 조간 신문의 한 귀퉁이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살롱 피츠제럴드 앤드 모이스의 지배인, 금고를 털어 달아나다'

○○일, 유명인사들이 자주 찾는 시카고의 화려한 살롱 중 하나인 피츠제럴드 앤드 모이스의 지배인이 금고를 털어 달아났다. 살롱의 회계를 담당하고 있는 메이휴 씨는 전날 영업이 끝난 후, 돈을 금고에 넣고 다이얼을 돌려 잠근 후 퇴근했다가 다음날 출근해 보니 금고는 잠겨있었지만 돈은 전부 사라졌다고 말했다. 메이휴 씨는 자신이 퇴근할 때 살롱의 지배인인 허스트우드 씨가 남아 있었으며, 영업 후 마지막까지 남아 문단속을 하는 것은 지배인의 일 중 하나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지배인 G.W. 허스트우드 씨는 돈과 함께 사라진 후,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적극적이면서도 정중한 태도로 믿음이 가는 분위기를 풍기는 허스트우드는 이제 막 사십 대에 들어서는 중년의 남자다. 그저그런 살롱에서 바텐더로 출발한 그는 영리한 두뇌와 빠른 상황판단으로 상류층이 드나드는 살롱의 지배인 자리에까지 올랐다. 최고급 양복과 금시계로 멋을 내고 배우, 사업가, 정치가들을 비롯한 유명인들과 격의 없는 태도로 지낼 수 있을 정도의 위치가 된 것이다. 그의 집은 당시 유행하던 삼층짜리 건물로, 멋진 가구들과 그랜드피아노, 수많은 장신구들로 완벽하게 꾸며져 있었고, 허영심 많고 화려한 아내와의 사이에는 아들과 딸을 두었다. 그의 가정은 인내와 배려가 있는 행복한 가정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으나, 겉모양은 아주 그럴듯한 상류층에 속했다. 허스트우드는 완벽하진 않았으나 그런대로 자신의 지위와 위치에 만족했으며, 이미 쥔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매사에 몸을 사리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자신의 위치에 있는 남자들이 즐길 법한 재미를 놓치고 사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내를 속이고 가끔은 자신만의 즐거움을 위해 행동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항상 눈감아질 만한 지점에서 멈춰져야 했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모험을 감행할 정도로 즐거움을 탐닉하는 법은 없었다.  그때까지 그가 원했던 것은 '안정'이였다.

그러나 어느날 모든 것이 달라졌다. 허스트우드가 '욕망하는 것'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자신에게 금지 된 것, 즉 이웃의 아내를 탐하게 되었다. 자신의 욕망이 이루어질 것이 예상되던 지점에서, 그 모든 것이 불가능할 것처럼 생각되자 그는 이성을 잃는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캐리'라는 여자일 뿐이라고 자신을 속인다. 그러나 그는 단지 불가능을 욕망했을 뿐이다. 스스로 촛불에 몸을 던지는 부나비처럼 보이는 것 없이 달려들던 허스트우드는 이제 도둑이 되어, 한때나마 자신의 것이었던 모든 것들로 부터 버림받게 된다.

대내외적으로 인정받는 지위가 있고, 특별히 행복하진 않되 안정적인 가정도 있으며, 상류층으로서의 생활이 가능한 경제적 능력까지 갖추었던 허스트우드는 어째서 그 모든것을 던져버리고 단 하나의 여자만을 쫓게 된 것일까.

 

찰스 다윈의 진화론으로 부터 영향을 받은 자연주의 작가들은 한 인간의 성격은 유전과 사회적 환경과 행동할 당시의 외부적 압력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었다. 즉, 인간 행동의 근저에는 본능이 뿌리깊게 작용한다고 본 것이다. 때문에 자연주의 소설에는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로서의 인간이 아닌 본능과 욕망에 휘둘리며 풍랑을 겪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은 욕망의 특성이 그렇듯 타락과 배신, 빈곤, 질병과 같은 인생의 어두운 면에 집중하게 된다. '자연'을 생각할 때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따뜻함이나 생명의 충만함이 아닌, 날 것 그대로의 정제되지 않은 욕망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 자연주의 문학이다.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시스터 캐리>로 미국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인정받았다.

 

우리는 인간이 정글의 법칙에서 멀리 벗어나 있으며 타고난 본능은 무뎌져 자유의지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직 본능을 대신하여 인간을 완벽하게 이끌어줄 수 있을 만큼 발전하지 못했다. 인간은 본능과 욕망에만 귀기울이기에는 너무 현명해졌으나 본능과 욕망을 압도하기에는 여전히 너무 나약하다. 짐승으로서의 생명의 힘은 인간을 본능과 욕망의 편에 세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우리는 아직 그 힘과 보조를 맞추는 법을 온전히 배우지 못했다. 인간은 본능에 따라 자연에 녹아들어 조화를 이루지도 못하고, 아직은 자유의지에 따라 현명하게 스스로를 자연과 조화시키지도 못한 채 어중간한 단계에서 흔들리고 있다. 인간은 바람 속의 나뭇잎처럼 한때는 자기 의지에 따라, 한때는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식으로 열정의 숨결에 따라 그때그때 움직인다. 자유의지에 따라 실수를 저질렀다가 본능으로 회복하기도 하고 본능으로 인해 쓰러졌다가 자유의지로 일어나기도 하는,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변동이 심한 존재이다. 어쨌든 진화는 계속되며 이상은 결코 꺼지지 않는 불빛이라는 사실로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 (106쪽)

삶에 특별한 부족함이 없었던 허스트우드가 안정을 버리고 욕망을 쫓은 것은 의도되지 않은 본능적 행동이었다. 거기에는 어떠한 성찰이나 철학이 끼어들 틈이 없다. 허스트우드 외의 또다른 주인공 캐리와 드루에 역시 즉각적인 만족을 위해 행동하며, 그로인해 잘못된 결과에 대해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부도덕한 행실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배우로 성공하는 캐리는 인간들의 부질없는 과시와 욕망의 이면을 읽는 것처럼 보이는 명민하고 지적인 남자 에임스에게 마음이 끌리면서 삶의 또다른 측면에 대해 고민한다.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분신처럼 보이는 에임스는  본능을 넘어선 자유의지를 갖고있는 인물로 보여진다. 작가는 에임스라는 인물을 통해 캐리가 변화하는 모습을 예측하게 함으로써 인간 일반을 움직이는 것은 욕망이지만, 자유의지의 인간으로 발전할 가능성 또한 믿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하는 한편, 지적인 성찰이 가능한 에임스가 자신의 지적 경험을 전부 뒤흔들만한 강렬한 욕망 앞에서는 어떻게 행동할지가 궁금하다.

 

- <시스터 캐리>에는 '살롱 피츠제럴드 앤드 모이스의 지배인, 금고를 털어 달아나다'라는 식의 보도 기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신문 기사로부터 소설이 출발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을 뿐이다. 신문은 일어난 사건에만 촛점을 맞추고 단신으로 보도되지만, 작가는 기사 한 줄에서도 그 너머의 일을 상상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소설 <시스터 캐리>는 신문 기사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아니다. 주인공 캐리는 작가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누나인 에마 드라이저를 모델로 한 것으로, 술집 지배인인과 동거를 하던 에마는 그가 훔친 돈으로 함께 뉴욕으로 도망쳤다.

 

 

* 알라딘 공식 신간 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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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 사육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1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승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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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초국가주의가 가장 기승을 부리던 전쟁 말기의 극심한 군국주의 교육을 받은 마지막 세대이고 또한 완전히 뒤집어진 세상에서 민주주의 이념과 자유 평화 교육을 받은 첫 번째 세대가 되는 셈이다. 그런 혼돈의 와중에서도 남달리 감수성이 예민했던 소년 오에 겐자부로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민주주의 헌법과 교육 기본법이었다. 거기에는 '개인'이라는 단어가 있었고 개인인 너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있었다. 오에 겐자부로의 평생을 관통하는 평화,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바로 이 시기부터 형성된 것이다.(옮긴이의 말 중에서)

내가 오에 겐자부로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 '개인인 너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상이 그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밖에 그가 노벨수상작가라는 것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더라도, 조국이 전범국가임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책임의 일환으로 '일본은 국제 평화를 희구하고 영구히 국제적인 무력행사를 하지 않을 것이며, 이를 지키기 위해 어떠한 전력도 보유하지 않고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네이버 지식백과 사전)'는 내용의 헌법9조를 수호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 천황제와 일본의 교과서 왜곡 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고수하며, 반핵 운동에도 앞장서는 등, 그가 '일본의 양심'으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를 좋아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느낀다. 그렇기때문에 오에 겐자부로라는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작가로서의 그를 굉장히 잘 아는 것처럼 마음이 기울고, 또한 여러 작품을 읽은 것처럼 생각되곤 한다. 그러나 내가 읽은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은 이 단편집이 세 권 째일 뿐이다.

 

머리에 혹을 달고 태어난 아기를 죽도록 방치하고, 소년 시절부터 간직해왔던 꿈인 아프리카로 떠날 계획을 실천하려는 주인공 버드의 이야기인 <개인적인 체험>은 무척 즐겁게 읽었다. 버드가 현실로 부터 달아나려는 꿈을 포기하고  누구나가 예상하는 결말을 택했을 때는 안타까움에 잠을 설쳤을 정도로 빠져들었었다. <개인적인 체험>은 두개골 이상을 가진 오에의 첫째 아들이 태어난 다음해인 1964년에 씌인 소설로, 오에가 작가로 등단한지 7년만인 1957년에 씌여진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50여년이 지난 후인 2009년에 씌여지고, 우리나라에서는 2015년에 출간된 <익사>는 정말 어려웠다. <개인적인 체험>과 마찬가지로 <익사> 역시 작가의 개인적인 기록에 기초했지만, <개인적인 체험>과는 다르게 <익사>는 스토리를 이해하는 것도 힘들만큼 매우 관념적인, 독자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소설이다. 열 살무렵 갑자기 불어난 강물에 아버지가 익사한 기억을 가진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익사>는 대중소설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한 자전적 혹은 자기만족적 소설이라고 느꼈다. 작가가 <익사>를 통해 말하고 자 한 것에는 접근조차 하지 못했고, 공감은 더더욱 어려웠다. 단지, 역시 '오에는 어렵구나' 라는 일반적인 의견에 동조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단편선집에서도 그런 경험을 했다.

 

초기, 중기, 후기로 나뉘어 편집된 <오에 겐자부로 단편선> 중, 작가로 데뷔했던 대학시절부터 씌인 초기의 단편 여덟 편은 어느 하나 뺄 것 없이 모두 좋다. 패전 이후 혼란 속에서 -그러나 이러한 혼란은 패전이라는 단어의 이미지처럼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었는데, 새롭게 시작되는 활기로 어수선한 분위기 또한 포함된 혼란이었다-애국을 강요당하던, 혹은 애국이 의무처럼 여겨지던 시대에 각 개인은 오히려 물에 젖은 모래알처럼 한데 뭉개져 무기력해져 있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이다. 각각의 작품들은 상황이나 주고받는 대화가 간결하고 매우 선명해서 한 호흡도 쉬지 않고 여덟 편에 줄곧 빨려 들었다. 옮긴이의 말처럼 이 초기 작품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 단편선에 대한 선택에 후회없는 충만함을 느꼈다.

그러나, 중기 이후로 넘어가면서 익히 알고있듯 오에의 작품을 읽는 것은 엄청난 끈기가 필요하다는 것에 다시 한번 수긍했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작가가 그리는 장면이 선명하게 이미지로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고, 따라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치 시인이 어떠한 상황에서 느낀 감성을 나는 느끼지 못 할 때처럼 당황스럽고, 작가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에 주눅이 들었다. 시인의 감성을 공감하지 못할 때의 시는 얼마나 지루한 것이던가. 1994년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한림원은 이렇게 논평했다던가. '시적인 힘으로 생명과 신화가 밀접하게 응축된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여 현대에서의 인간이 살아가는 고통스러운 양상을 극명하게 그려 냈다.' 역시 오에를 좋아하는 데 있어 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것은 번외로 여기고 싶다.

 

개들은 몹시 지저분했다. 온갖 종류의 잡종이 거의 다 모여 있는 듯 했다. 그런데 그 개들이 서로 굉장히 닮아 있다는 게 신기했다. 대형견에서 소형 애완견까지 또한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간 크기의 비슷한 잡종 개들이 말뚝에 묶여 있었다. 도대체 어떤 점이 닮은 것일까? 나는 개들을 살펴보았다. 모두 볼품없는 잡종인 데다가 바싹 말랐다는 점이 닮았나? 말뚝에 묶인 채 적의라는 감정을 완전히 잃어버린 점일까? 우리도 저렇게 될지 모른다. 적의라는 감정은 완전히 잃어버린 채 무기력하게 묶여 서로서로 닮아 가는, 개성을 잃어버린 애매한 우리, 우리 일본 학생, 그러나 나는 정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정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일들에 있어 열중하기에는너무 젊었든가 너무 늙었다. (12쪽)

초기 작품으로 실린 여덟 편이 모두 좋았지만, 특히 첫 번째 단편 <기묘한 아르바이트>는 더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다. 문과대학생인 '나'가 개 150마리를 죽이는 매우 기묘한 아르바이트를 하게되는 이야기인데, 죽음을 기다리며 말뚝에 얌전히 묶여있는 개들을 보며 당시의 학생들, 즉 자신들의 모습을 상기하는 장면이 특히 압권이었다. 이것이야 말로 오에를 대표하는 바로 그 감성, '개인'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의 표본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저 개들이 낮은 담에 갇혀서 저렇게 가만히 있는 걸 보면 정말 미치겠어. 우리에게는 담 너머가 보이지만 저 개들은 아무것도 못 보지. 그리고 저 녀석들은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잖아." "담 넘어가 보인다고 해도 어쩔 수 없잖아." 여학생이 말했다. "그래 바로 그 어쩔 수 없다는 게 참을 수 없다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처지에서 꼬리를 흔들며 먹이를 받아먹는다는 게."(19쪽)

군군주의, 전체주의가 밑바탕에 깔려있는 애국주의는 전쟁이 끝난 평화의 시대, 희망의 시대에도 일본을 떠돌며, 각 개인들의 정신을 흩뜨린다. 저항의 의지조차 품지 못한 개들을 보며 굴욕감을 느끼는 대학원생은 개들에게서 무기력한 자신들을 보았고 이에 분노하지만, 주인공인 '나'는 굴욕감도 분노도 남의 일인 것만 같다. 그는 이미 완전히 지쳤기 때문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데, 무슨 '주의'를 논하는 것 만으로도 지레 지쳐버린 느낌을 받을 정도로 정치적인 것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무기력할지라도 '나'만의 감각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청년의 시기는 본시 냉소를 가장한 무기력을 자양분으로 삼고 숨어드는 '때'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주인공 '나'의 무기력을 몹시 개인적인 감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기력한 혹은 냉소적인 개인의 모습은 의과대 해부용 시체들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운반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또 다른 '나'(사자의 잘난척), 결핵환자 요양소의 냉소적인 순응주의자 중 하나인 '나'(남의 다리), 외국 국인들로 부터 봉변을 당하고 그에 대한 증언을 거부하는 '나'(인간양), 당시 유행과 같은 '좌익' 대신 실용적인 '우익'으로 돌아서는 열일곱의 '나'(세븐틴) 등으로 이어진다. 도드라지는 행동이 인정되지 않는 시대적, 정치적, 사회적 상황 속에서 주인공인 각 개인들은 휩쓸리지 않는 자기만의 '나'를 고집한다.

 

내 머릿속에는 돼지비계 같은 뇌가 가득찬 데다 자의식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늘 자신을 의식했다. 그러고 나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악의적인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 몸의 움직임이 어색해지고 몸의 여기저기가 봉기해서 제멋대로 무슨 짓인가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수치스러워 죽고싶을 지경이다. 나라는 육체 플러스 정신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러워 죽고 싶어진다. 그래서 나는 가능하면 발광한 크로마뇽인처럼 동굴에 들어가 혼자 혈거 생활을 하고 싶었다. 타인들의 시선을 꺼버리고 싶은 거다. 아니면 자신을 꺼버리고 싶은 거고. (211쪽)

비교적 재미있게 읽히는 초기의 작품들은 그러나 읽고 난 후의 여운까지 쉬운 것은 아니어서 오래도록 생각하게 된다. 때문에 깊은 독서와 시와 영감으로 관념적이 되었다는 중기 이후의 작품들도 작가의 독백이 아닌 독자를 향한 소통의 무엇이 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오에가 중기 이후로 갈 수록 관념적이 된 것은 자기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 더더욱 깊어졌다는 반증이므로 오에와 그를 추종하는 이들에게는 무척 기쁜 일이겠지만, 작가와 같은 템포로 성장할 수 없는 일반적인 독자로서는 무척 아쉽다. 역시 문학은 대중을 향해 열리는 것이 맞다. 아무리 좋은 소설이라도 한정된 독자에게만 이해되는 것이라면, 그 이야기가 갖는 힘 역시 축소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에 겐자부로'라는 이름은 인간 오에가 품은 개인과 평화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문학계 안과 밖에서 명성이 자자하지만, 외려 작가 오에의 작품을 읽은 사람은 드물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오에가 어렵다는 선입견으로 그의 작품을 많이 읽지 못한 나같은 독자에게는 무척 반가운 단편선이다.

- 사설 : 일본의 헌법9조는 세계2차대전 후 승전국인 미국의 주도로 만들어진 법이라는 것을 최근에 안 나는 그것에 몹시 반발하는 심정이 되었다. 세계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법이라면 이는 일본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에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과, 이러한 법이 승전국인 미국에 의해 강제되었다는 점이 최근에 본 영화 <London Has Fallen>의 내용과 겹치면서 불쾌해진다. 일본헌법 9조의 수호를 지지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목적으로 하는 수단이 누구에 의해 행해지느냐에 따라 선과 악으로 분리되는 것에 냉소하는 것 외에 어떠한 저항도 구체화할 수 없는 무기력한 개인이기 때문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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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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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고 가을은 겨울로 넘어가던, 파르바네와 패트릭이 오베의 집 우편함으로 트레일러를 후진시킨 지 거의 4년이 되던 11월의 어느 싸늘한 일요일 아침, 파르바네는 누가 얼어붙은 손으로 자기 이마를 만진 것 같은 기분에 눈을 떴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8시 15분이었다. 오베의 집 밖에 쌓여 있던 눈이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447쪽

 

오베와 임신한 이웃 여자인 파르바네는 어떤 종류의 사랑을 한 것일까. 그들이 주고받은 감정은 이웃간의 우애 또는 아버지를 잃은 이방인 여자와 자식도 없이 홀로된 아빠뻘인 남자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온당한 애정 같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나는 이들이 나눈 것은 명백한 남녀 간의 사랑이 있었노라고 주장하고 싶다. 인구 9백만의 스웨덴에서 70만 부 이상의 판매를 올리고 독일, 영국, 캐나다,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 이스라엘, 남아프리카공화국 뿐만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베스트셀러로 읽히고 있는 이 책을 사랑에 방점을 두고 읽은 사람이 단지 나 하나 뿐이라고 할지라도, <오베라는 남자>는 연애소설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겠다. 다만 오베와 파르바네 간의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녀 사이의 연애 감정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인 사랑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또 누군가는 묻겠지. 사랑 그 자체인 사랑은 도대체 어떤 사랑이냐고.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뭐랄까 육체적 끌림없이 인간 대 인간으로 따뜻한 포옹을 꿈꾸는 무성의 애정상태?

 

한편의 시트콤처럼 명랑 쾌활 유쾌 통쾌한 <오베라는 남자>를 힘들게 읽었다. 첫 장부터 오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무엇보다 원칙을 중요시하며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고, 처음보는 사람이라면 상대가 누가되었든 일단 반감부터 품고 보는 그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 변하지 않는 자신 그 자체가 자랑인, 세상은 흑과 백이 아니라 다종 다양할 뿐만 아니라 호화찬란하기까지 한 색채가 무궁무진하게 존재하는 곳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오십구 세의 남자가 전혀 달갑지 않았다. 전철에서 혹은 은행에서, 길을 가다가, 또는 식당에서 숱하게 부딪히는 권위적인 얼굴의 남자들을 오베에게서 보았던 것이다. 원칙만을 소중히 여기는, 융통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반면 자신이 무시당하는 상황은 절대 견디지 못하는 아버지라는 이름에 갇힌 권위로 똘똘뭉친 완고한 남자들의 얼굴을. 

 

뭐든 간에 발길질을 하면서 물건들의 상태를 점검하는 남자(15쪽) 오베는 아무도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아도 쓰레기장과 자전거 보관소를 관리하고 주차금지 구역을 시찰하며 자신과 같은 사람이 앞장서지 않는다면 무정부적 혼란이 벌어질 것(16쪽)이라고 믿는 원칙주의자다. 또한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까칠하다거나 사회성이 없다 라고 말하는 것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 한편으로 트레일러를 제대로 주차시키지 못하고 사다리도 잘타지 못하는 남편을 대신해 임신한 여자를 돌보고, 마녀같은 이웃집 여자와 그녀의 개에게 쫓기는 상처받은 고양이를 거둬들인다. 뿐만 아니라 자전거 고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에게는 자전거 고치는 법을,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난 청년에게는 잠잘 곳을 내주기도 하는 자상한 사람이며, 육개월 전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는 로맨티시스트이기도 하다. 오베는 울타리 안에서 원칙을 세우고 체계를 잡는 권위자이며, 가족을 돌보고 그들의 부족함을 사랑으로 감싸기도 하는 한마디로 이상적인 아버지 상 인 것이다.

 

삼십대 중반의 젊은 작가답게 첨단의 기기를 이용해 글을 쓰는 유명 블로거인 작가는 어째서 오베와 같은 원칙주의자를 불러낸 것일까. 북유럽의 대표적인 복지국가인 스웨덴은 수십 년 전부터 난민을 비롯한 다양한 이민자들을 받아들여왔다. 그런 이유로 이제는 대표적인 다문화국가가 되었는데, 당연히 이에 따른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스웨덴인들은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 이민자들이 복지혜택을 받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이민자들은 이민자들대로 스웨덴인으로 받아들여지길 원하며 크고 작은 소요를 일으키기게 된 것이다. 작가는 이 아수라장을 해결하는 데는 가족을 돌보고 상황을 통제할 아버지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이 아닐까. 원칙을 세우고 지키는 한편으로 약자를 보호하는데 앞장서는 히어로가 필요한 상황을 오베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이것을 간파한 스웨덴의 독자들은 오베에게 열광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오베와 같은 원칙주의자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받는다. 자신은 남자이며, 아버지라는 것에서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이민자들 때문에 내가 받을 몫을 손해본다고 느끼는 유럽인도 아니고, 아버지의 권위가 세상을 구한다고 믿는 근본주의자도 아닌 나는, 여전히 이 이야기를 연애소설로 읽는다. 자신이 통제하는 상황을 즐기는 오베는 전형적인 상남자이다. 남편을 따라 멀리 스웨덴까지 온 이방인 파르바네는 그런 오베에게서 아버지와 같은 강한 남자를 본 것이다. 여자이고, 임신한 상태이며, 이민자인,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라고 할 수 있는 그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원칙을 지키고, 힘이 없어 핍박받는 사람을 보호하며, 맨손으로 라디에이터를 고치는 오베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상, 안전, 보호 따위의 욕구를 사랑으로 착각한 파르바네의 모습에서 그 옛날, 아빠의 동료를 좋아했던 어린 내 모습을 본다.

<오베라는 남자>는 나에게 엄연한 연애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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