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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와 망아지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비올라 니콜라이 그림, 이민 옮김 / 이유출판 / 2022년 11월
평점 :
이국의 풍광과 정서가 낯설지만은 않았다.
그곳에 숲과 마을이 있고, 아이들 뛰노는 숨결이 느껴졌기 때문일까?
1900년대 초 이탈리아 사르데냐의 시골 마을 숲에는 여우가 많았다. 여우는 갓 태어난 어린 망아지의 말랑말랑한 귀와 꼬리를 호시탐탐 노렸다.
가엾은 어미 말이 망아지를 적극 보호했지만
마을에는 귀와 꼬리가 없는 말들이 가끔 보였다.
그림책의 화자는 20세기 진보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정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다.
-그는 생애 마지막 10여 년을 감옥에서 보내며 이빨이 빠져나가고 위장이 망가지는 고통 속에서도 왕성한 지적 활동을 펼쳤다. 그가 감옥에서 쓴 《옥중수고》와 《감옥에서 보낸 편지》는 그 결정체로서 이탈리아를 '전쟁의 외상에서 깨어나게 만든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감옥에서 보낸 편지》에서는 세심하고 명료한 문체와 아울러 감수성이 넘치는 그의 내면을 엿볼 수 있으며 <여우와 망아지>는 바로 이 편지 모음에 들어 있는 이야기다.-
영어의 몸이 된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감옥이 아니었다면 서로의 시선을 주고받으며 두 손을 꼭 잡은 채, 달콤한 목소리로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을 직접 들려 주었을텐데...
부질없는 생각들이 중간에 끼어들면서 안토니오 그람시의 삶에 대하여 더욱 곡진한 마음이 생겨났다.
그는 두 아들을 볼 수 없었지만, 아이들을 위해 교육론을 쓰고 독서목록과 장난감을 만들었다고도 한다.
어린 망아지의 귀와 꼬리를 먹어치운 잔혹한 여우가 바로 내 눈앞에 있다면?
안토니오 그람시의 편지글은 다정하게 이어진다.
-이제부턴, 아빠가 처음으로
여우와 마주쳤던 이야기를 해 줄게.-
-이모네 밭은 마을에서 그리 멀진 않았지만 골짜기 아래로 한참이나 내려가야 했고, 주변엔 집 한 채 없이 황량했어.
그런데 우리가 밭에 막 들어서는 순간, 이게 웬 일!
커다란 여우 한 마리가 나무 아래 조용히...앉아 있지 뭐야!
아름다운 꼬리를 깃발처럼 쳐들고 말이지.-
무서운 여우를 만났지만 동생들과 함께였기에 주눅들지 않았다. 하지만 여우 또한 만만치 않았다. 아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웃는 표정을 지으며 태연한 자태를 빛내고 있었으니...
소년 그람시는 그때 만났던 그 여우에게서 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
화풍이 독특하다. 거친 선과 절제된 색감 사용, 현실과 환상이 교차되는 듯한 화면은 오래 바라볼수록 더욱 매혹적이다.
그림 작가 비올라 니콜라이는 '여우와 망아지'를 읽으면서 강렬하고 명료한 이미지에 즉시 빠져들었다.그리하여 자신의 볼로냐 아카데미 졸업논문 프로젝트로 '여우와 망아지'의 일러스트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논문을 마치고 책의 최종 버전을 만드는 과정에서 도입부의 드로잉은 그대로 두었고, 생각이 깊어져 관점이 달라진 부분은 다시 그렸습니다.
그람시가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며 가장 인상에 남았던 대목, 즉 꼬리를 깃발처럼 흔들며 사라진 여우와 자기가 낳은 망아지 주변을 애타게 맴돌던 어미 말, 이러한 경험을 어른이 되어서도 생생히 기억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마음 속에 변치 않고 남아 있는 디테일에 주목했습니다.-
참으로 경이로웠다.
글 작가와 그림 작가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이처럼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다니...
이 그림책이 얼마나 특별한지 비로소 깨닫게 되는 지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과 그림은 당연히 독립적이다. 글은 글대로, 그림은 그림대로 충분히 아름답다.
이미 정평이 나 있는 글은 물론이고, 비올라 니콜라이의 화첩 또한 소장 가치가 뛰어나다.
추억과 그리움, 동심을 잃지 않은 내면세계, 자연, 가족, 인간애, 열정 등 수많은 키워드를 애절하게 또는 역동적으로 품고 있는 귀한 그림책 한 권을 만났다.
책장을 덮은 뒤에도 크고 깊고 진한 감정들이 연기처럼 자꾸만 피어오르는 듯 하였다.
혼자 읽어도, 함께 읽어도 좋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보고 자유롭게 쓴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