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소문과 영원의 말
나인경 지음 / 허블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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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해리포터에서 기억을 뽑아내 다른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마법도구 ‘펜시브’가 있었다. 관자놀이에서 하얀빛으로 형상화된 기억을 뽑아내는 것이 낭만적으로 보였는지 어릴적부터 20년정도 해리포터를 보고있지만 한번도 부정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인경 작가가 쓴 #도시의소문과영원한말 (#허블 출판사)에서 기억이 데이터화 되어서 클라우드에 올려두고 실제 머릿속에서는 지워버린 첨단 사회의 모습은 왜이렇게 디스토피아 그자체로 느껴지는지. 이토록 과학기술이라는 분야는 어쩔 수 없이 철덩어리의 차가움과 삭막함이 담겨지는가보다.

왜 많은 SF소설들이 디스토피아를 그리고있는지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AI가 주도하는 첨단과학세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의 방향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다.

김영하 작가가 알쓸인잡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있다.
우리 인간의 삶 속 모든 순간에는 모두 다른 내가 있는 것이라고. 그 여러 군상들을 잘 정리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이 낭만적인 단어도 소설 속에서는 한 인간에게 여러명의 기억을 담는 실험을 해버리는 것으로 낭만은 또한번 난자당한다.

기억을 잊으려는 자와 기억을 되찾으려는 자. 서로를 모르는 둘은 기억은 없지만, 왠지모를 그리움이 서로에게 이끈다.
기억이라는 것이 굳이 필요없는 것들은 거세해도 된다는 그런 사소한 것들이라면 그로인한 감정또한 사소한 것일까?

똑같은 경험을 한다고 모두가 알고리즘처럼 똑같은 감정으로 유도될까? 또다른 디스토피아 영화 ‘이퀼리브리엄‘이 강렬하게 떠올랐다. 크리스찬 베일이 열연한 이 작품에서도 무의미한 특이점으로 인해 질서가 어지럽혀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약물로 감정을 통제당하는 미래를 그리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사회를 반대하며, 감정을 지우지않고 강아지를 키우고 레오나르도의 그림을 소유하고 감상하는 반동세력들이 존재하고, 그들을 찾아 검거하는 역할을 크리스찬 베일이 맡았다.
베일이 너무 바쁜 나머지 감정조절제를 투약하지 못하고, 무채색의 콘크리트 벽과 그 벽을 적시는 음침한 빗줄기가 더할나위없이 아름답게 느껴지고, 반동세력에서 압수(?)한 강아지와 눈이마주쳐 죽이지못하고 몰래 데려오기도 한다.
(관심있으시면 한번 찾아보시는 것도 추천👍🏻)

우리에게 기억과 그에 따른 감정을 필요없는 것일까?
효율적이지 못하고, 돌발적인 상황을 유도한다는 이유로 거세당해야할 정도로 의미없는 것일까?
그럼 우리는 AI와 무엇이 다른가? AI는 먹고 재우지도 않아도 되는데 그럼 오히려 AI보다 못하지않은가?
아마 이런 생각들 때문에 첨단과학의 시대가 다가올수록 희망적이지않은 미래를 그리는 것일테다.

효율성 관리성증진 이것들만이 사회에서 제일의 가치인가?
그렇다면 예술이나 창의력따위는 의미가 없는 것인가?
그럼 왜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은 수십 수백, 수천억까지의 값어치로 팔려나가는가.

그저 화학반응일 뿐이라 한다면 기억이 지워지고도 화상자국처럼 남아있는 감정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무엇을 위해 고효율을 꿈꾸는가.

인간이 AI의 시대에도 여전히 인간으로 남아있으려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이 AI를 만들어내고 지금까지 살아남고, 여러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준 음악 미술 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사랑같은 감정들이 원동력이었다.

첨단 AI시대에서 기계같은 서늘한 감촉의 인간들의 모습을 <더시의 소문과 영원한 말>에서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이러한 따뜻함으로 대표되는 사랑과 인류애적 감정들이 제1의 가치라는 것을 더 잘 보여주기위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게 나를 당당하게 보이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바로 자기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것이다.
누구보다 자기자신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생길 것이고, 세상 누구와 맞붙어도 비교하며 스스로를 까내리고 앞날을 걱정하며 불행속에 스스로를 두려하지 않을 것이다.
첨단사회 속 인간의 바람직한 모습도 이러한 것이라 생각한다.
얼마나 인간이 윤택한 삶을 살 수 있는 요즘인가.

굳이 기술과 나를 비교하여 스스로의 존엄성을 까내릴 필요가 있을까. 기억과 감정은 인간의 정체성임을 계속해서 SF소설들이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처럼 소중한 것을 잊지말고 잘 유지하라는 뜻일테다.
우리가 우리로 오롯이 서있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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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묻고 다산이 답하다
신창호 지음 / 판미동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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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로게 작성한 글입니다)

나는 경상도, 그것도 대구출신이다.
박정희 박근혜 모녀의 정치요충지라 그런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지금까지 세상에 어떤 일이 있어도 투표결과는 항상 시뻘겠다(빨갛다의 사투리:그냥 빨강보다 더 빨감을 강조하고싶었다)대통령 선거가 되면 할아버지가 항상 다른 생각말고 누구후보 찍으라고 전화가 걸려왔었다. 그게 매년 딱 한번 할아버지와의 통화다. 그래서 정치라는거에 질렸던 걸까. 정치는 나의 관심사였던 적이 한번도 없다. 궁금하지도 않았고 당연히 정치인이 되고싶지도 않았다. 아무리 다른 색을 골라도 결국은 정치적 결단이라는 이름으로 색이 비슷해져 가는 것을 보고 선거도 고민하지 않았다.

그런데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나서 다시한번 정상의 자리가 비어있는 지금, 여전히 선거는 관심이 도통 생기질 않지만 올바른 정치란 무엇일까라는 정치에 대한 환상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는 관심이 생겨났다.

아마 책을 읽는 중간중간에 작년 말부터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어떤 이유에서든 다시는 없어야 할 일들에 대한 책들을 읽어서 그런 것 같다.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누군가와 겹쳐보이게 만들었고, 제목자체가 ‘계엄령’인 카뮈의 책도 읽었고, 프랑스혁명이 반쪽짜리 성공이었다라는 책도 읽었다.

수백년 전에 벌어졌던, 이제는 소설 속에나 볼 수 있을 줄 알았던, 지금 이 세상에는 엄청난 것 보단 사소한 선들이 모여야 할때임을(레베카 라인하르트의 선의 평범성)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일이 21세기, 그것도 나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라는게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2002년 4강 신화는 이거에 비하면 신화도 아닌 것 같은 느낌.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일들이니 타산지석으로 삼는다면 우리나라의 이야기이길 바랬던 마음이 은연중에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매화도 피기 전 올바른 정치, 올바른 관리인의 모습을 수십년의 세월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수십번 고쳐나간, 하지만 귀양살이로 마음속에만 담아 둘 수 없었던 애절함을 ‘심서’라는 단어로 남긴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찾아보게 되었었다. 그 책에서 참 많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내가 아니라 저 위의 분들이 봐야하지않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다하려면(중립) 적어도 어느정도는 알고 뜻을 가지고 있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선거에는 많은 관심을 두고있는데, 뜻을 두고 보아도 오래보기가 힘든 건 사실이다.

또 한번 옳은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표본이 필요했다.

그래서 #정조가묻고다산이답하다 (#판미동 출판사 출판 #신창호 지음)을 읽었다.

노론 소론으로 (지금이랑 비슷하네 그러고보니)나뉘어져 정치는 뒷전이고 파벌싸움에 급급한 조정대신들을 규합하여 정치를 해야했던 정조는 붕당정치 신분제를 넘어선, 출신에 국한되지않는 능력위주의 사람을 뽑아내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하였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실학자 정약용을 만날 수 있었고, 그 당시 정조는 40대, 정약용은 30대 혈기왕성한 나이였다.
그래서 올바른 일처리에 대해 끊임없이 토론하였다.
정조 자체가 끊임없는 독서로 지식을 쌓고 그것들을 이용하여 올바른 정치를 하려했고 그것에 대한 모색방안을 정약용에게 끊임없이 묻고 답한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빼곡하게 담겨있다.

서로의 끈끈한 군신간의 관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동료애가 모든 질문과 답속에 녹아들어있다. 심지어 질문은 정조만이 하는게 아니다. 역으로 다산이 정약용이 묻기도 한다.

군신과 벗의 관계에 스승과 제자의 모습까지.

물론 지금의 사회모습과 다르다 보니 구체적인 방법들은 다르나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을 어여삐 여기는 나라의 대표와 관료들의 이상적인 모습이 머리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정치는 혼자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잘 맞는 동료가 있어야 한다. 비록 직급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권력과 이해관계 속에서 줄건 주고 받을 건 받는 그런 ‘정치’적 행위말고, 아니 그래도 그건 아니지!라고 할말은 하고 그렇게나 매번 외치는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실천하기위해 1순위는 이해관계가 아닌 국민과 이 나라 대한민국이 되어야한다.

그런 대통령에게 충언을 하는 국민들에게 충성하는 정치인들이 많이 나와야 이 나라가 올바른 길로 나아간다는 것을 다시한번 깨닫게 되었다.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려 한다면, 진짜 올바른 정치의 모습의 대조군을 설정하고 싶다면, <정조가 묻고 다산이 답하다>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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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왜 안 좋아하세요? - 아는 만큼 들리는 나의 첫 클래식 수업
권태영(탱로그) 지음 / 빅피시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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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요즘 K-POP의 인기는 가히 뜨겁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열렬히 환호하고 기다리고 무한재생하는 노래들이었지만 음악들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유럽과 미국 각지에서 울려퍼지고 그 사람들이 한국어 가사를 따라부르며 떼창하는 모습을 상상이라도 해본 적이 있었나. 꿈도 꾸지못했던 일들이 현실이 되었고, 그 현실화의 하나로 빌보드핫100 차트에서 1위 가수가 등장했다.

팬덤의 화력을 막기위해 차트 순위집계방식을 바꿀정도로 케이팝의 위상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우리나라 가수들이 빌보드 메인차트에서 오랜시간 좋은 성적을 유지하며 이 현상이 단시간적 유행이 아니라 세계적 문화 주류에 케이팝이 당장히 한자리 차지하였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음악가가 빌보드차트에서 1위를 기록한 것이 대중가요가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대중가요보다 먼저 빌보드에서 1위를 기록한 분야는 바로 클래식이다. (최초의 1위는 뉴에이지 음악가 이루마이다)

서양이 본고장이라 동양인에게 유독 벽이 높은 클래식계에서 콩쿠르 우승자가 나오는 것은 물론, 빌보드 클래식 차트 1위에도 한국인이 오른 것이다.

대표적 인물들로 임현정, 선우예권, 조성진, 임윤찬같은 음악가들이 있고, 이들의 인기는 티켓팅이라는 말로도 부족해 ‘피켓팅’이라고도 불리며 5분만에 매진되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이렇게 국제적 위상과 많은 팬덤을 보유한 클래식임에도 어디가서 클래식을 듣는다라거나 클래식을 좋아한다라고 말하기가 쉽지않다. 대체 왜 이 어렵고 비싼걸(아이돌 콘서트보다 훨씬싸다
이것도 선입견. 물론 교육비는 장난없지만 교육비가 많이 들지않는 학문이 요즘 시대에 존재하나싶다🤣)왜 굳이 듣고 좋아하냐며 허세라고 더 나아가 재수없다, 있는 척(?)한다는 소리까지 듣는다. 그래서 홍길동전의 호형호제도 아니고 어디가서 속시원히 말하지 못하는 비밀 아닌 비밀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인식을 바꿔줄 수 있는게 무엇일까.
이미 해외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국내에서도 많은 인기를 구가하는 음악가들이 있으나 어렵다라는 이미지는 여전하다. 그럼 어렵다라는 이미지를 없애주면 되지 않을까?
유튜브 보듯이 쉽고 재밌게 말이다.

이것을 이룬 사람이 있다.
‘드뷔시 가스라이팅’이라는 유튜브 영상으로 10만의 구독자수로 80만회에 육박하는 조회수를 기록한 유튜버이자 음악교육자 #탱로그 가 #클래식왜안좋아하세요 (#빅피시 ​출판)을 선보이며 클래식 대중화에 앞장섰다.

<클래식 왜 안좋아하세요?>는 클래식의 역사와 클래식의 기본용어와 같은 기본지식뿐만 아니라 쇼팽이나 바흐의 오프더레코드 이야기를 들려주며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그러고나면 이제 한번 들어볼래? 라며 쉽고 듣기좋고, 심지어 이미 들어봤으나 이게 이곡이었어? 하게 되는 곡들을 추천해주며 어떤 곡을 들어야할지 감도 잡히지않는다는 일반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준다.

소설로 치면 배경설정과 대한 전반적인 설명과 더불어 갈증이 해소되는 카타르시스가 터져나오는 전개이다.

심지어 유튜버답게 플레이리스트에서 착안한 듯한,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고 싶을 때’ ‘새벽 감성이 차오를 때’ ‘교양에 취하고 싶을 때’‘차분한 사색의 시간이 필요할 때’처럼 이럴때 이 음악을 추천하며 단발적이지 않은 클래식 감상기회를 제공한다.

“나 클래식이랑 하나도 안 친한데 왜 이렇게 재미있지?”
“그가 음악 선생님이었다면, 내 삶이 조금은 더 풍요로웠을 텐데.”
“건너뛰기와 배속 없이 집중하게 만드는 압도적 스토리텔링!” 와 같은 극찬을 듣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무엇이든지 시작이 어려운 법이다. 오죽하면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겠는가. 그래서 그 시작의 어려움을 완화해줄 조력자가 필요하다. 그 조력자는 쉬워야하고, 편안해야하고, 유쾌해야 한다. 그래야 높디 높은 벽이 허물어 지고 나의 일부로 받아들여 앞으로의 인생을 함께하는 동반자로 삼는 것이다.

나는 <클래식 왜 안좋아하세요?>가 클래식을 좋아해보고 싶은데 막막해하는 수많은 예비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최고의 조력자로 추천하고 싶다.

인생에서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정말 놀랍고 귀한 경험이다.

그 경험을 꼭 해보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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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지 않은데 왜 백인인가? - 인종차별, 헛소리에 지지 않고 말대답하기
박중현 지음 / 드루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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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무언가를 바꾸거나 해결을 하려면 무엇부터 해야할까.
#박중현 작가가 쓴 #하얗지않은데왜백인인가 (#드루 출판사 출판)을 읽고나니 그 답이 보였다. 바로 인식이었다.
문제임을 인식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현상이 내 주위에서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고, 해결해야한다고 문제인식이 되고 그래야 해결책을 고민하는 순서로 사고가 진행된다.

어떠한 문제로 인해 피해를 입는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피해자다보니 금방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문제’임을 모르고, 무지로 인해 행동을 반복하는 가해자 입장에서는 민감하게 알아채기가 상대적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하얗지 않은데 왜 백인인가>는 ‘인종차별’이라는 묵직한 주제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두 입장에서의 무지 모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인종차별이란 단어는 많이 들어왔지만 실제로 우리가 느끼기에는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는 단군이라는 시조아래 한민족으로 이어져온 사회라 인종차별이 생길 수 없는 환경에서 평생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대부분 간혹 여행을 가서야 인종차별을 당하게 되는데, 언어도 모국어처럼 잘 통하지않아 당했으면서도 제대로 어필도 하지 못하고 2차 가해를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만 분노할뿐, 막상 돌아와서 다시 한민족국가에서 살아가다보면 한 순간의 해프닝정도로 (과거를 미화시키는 인간의 본성때문이겠지) 점점 그때의 불쾌함이 사라진다.

인종차별이라고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친구, 가족, 지인, 또는 여러매체에서 이러이러한 일을 겪었는데 기분이 나빴다라는 인종차별의 예시를 들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들었던 종류의 인종차별을 겼었기 때문에 인종차별이라
인식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종차별이라는 이름아래 수많은 종류의 인종차별적 행위들이 벌어진다. 알지 못한다면 그냥 문화가 달라서 그런가? 우리랑 다르네 정도로만 여기고 대놓고 차별당함에도 알아채지도 못하는, 그 모습을 보고 키득거리며 인종차별이 계속 진행될 확률이 높다.

때리는 사람은 아이러니 하게도 맞는 사람이 아픈줄 모른다.
아프다고, 밟힌 지렁이가 꿈틀거리듯 이야기해야 변한다.
그래서 황인종이라 불리는 우리가 반드시 인종차별에 대해서 알고있어야 하는 것이다. 인종차별이 없어지기 위해서는.

그리고 더 아이러니 했던 부분은 바로 가해자의 무지였다.
윗 세대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행해져온 인종차별을 일상처럼 생각하고 어릴때부터 보고자란 것이라 인종차별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윗세대처럼 강력하고 드센 차별들은 인종차별이라 인식하고 매체에서 문제가 되다보니 많이 사라졌지만, 무지에서부터 기인한 비교적 조용하고(심지어 차분하기까지하다)드세지 않은 차별은 계속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인종차별인지 모르는 차별이 계속해서 자행되어오고있는 것이다. 충격이었다.

요즘 한국의 위상이 많이 올라가면서 인종차별같은게 많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이제 신뢰가 가지않는다.
우리가 모르는 형식으로 심지어 그들도 차별인 줄 모른체로 차별이 자행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충격적이었다.

우리도 피해자이지만 가해자가 될 수도있다.
아픈 역사로 인해 같은 황인종이지만 중국와 일본을 혐오하는 사람들도 있고, 흑인을 흑형 흑누나라 부르며(흑인들은 이 단어를 싫어한다 무지에서 시작된 전형적인 인종차별이다)차별하고 외국인 노동자를 깔본다.
어디에선가 흑인보고 ‘살색’을 쓰는것은 인종차별이라 이야기해서 흑인이 많은 생각이 들었다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세상은 가해자와 피해자로 명징하게 구분되지않는다.
가해자임과 동시에 피해자일수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인식하고 바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것들을 실천해야한다. 하찮고 작게보여도 그렇게 작은 것이라도 시작해야 세상이 바뀌기 시작한다.

이렇게 무거운 주제임에도 표지디자인도 이쁘고, 내부도 핑크색으로 섹션들을 구분해놓아 발랄하다. 작가가 책의 마지막에서 이런말을 한다.
“이 책이 제시한 주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하지만 무겁게만 생 각할 필요는 없다. 변화는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람과의 대화, 일상 속에서의 작은 행동, 그리고 우리 모두가 더 나은 세 상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그 출발점이다. 그렇게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갈 것이다.” 이런 작가의 의도가 고스란히 글에, 책의 디자인에 담겨있다.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세상을 좀 더 올바르게 인식하기위해 이 책을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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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역은 서울역입니다
근하 지음 / 여섯번째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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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평생을 살던 곳을 가족과 떨어져 혼자 향하게 되는 순간들이 제법 있다. 특수목적의 고등학교 진학, 대학 진학(인서울!), 취업, 결혼 등등. 부푼 꿈을 안고 걱정반 기대반으로 낯선 곳으로 떠나왔지만 처음은 누구에게나 그렇듯 녹록지 않다.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곳도 없고, 출퇴근으로만 하루에 두세시간씩 써가며 ‘집’(home이 아닌 house)에서 잠만 자고 또 다시 먼 출근길을 나서야만 하는(심지어 집값이 비싸 내 몸하나 누이면 끝이다)온통 잿빛인 낯선 곳.
그런 곳에서 나는 살아갈 수 있을까?

#이번 역은 서울역입니다(#여섯번째봄 #근하 지음)은 나와 동향인 대구 토박이 작가가 친구 영지의 생생한 증언에 여러가지들을 더한, 서울에서 퍽퍽한 삶을 살아가는 시영의 이야기이다.

시영이 고3때 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오빠에게만 모든 지원을 몰아주는 부모때문에 집에 정을 붙이지 못한다(실질적 부모였던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시영은 장학금을 받으며 여고 기숙사에 산다) 하지만 단 하나. 동성의 친구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그 친구 곁에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지만 그 친구에게 남자친구가 있음을 봐버리고는 넋이 나간다.

그래도 수능을 무사히 버텨내고 서울까지 뭐하러 가냐며, 학비싸니까 지방 국립대 가라는 엄마의 말을 무시하고 서울로 진학라며 첫 서울생활이 시작된다.

그 이후로는 군대 간 사이 오빠의 기숙사, 겨우 취업해서는 고시촌을 전전하며 잿빛 서울에서 잿빛으로 살아간다.

그래도 시영에게 딱하나 남은 것이있다면 대학 졸업반 때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된 주운. (이 친구도 동성연애를 한다.) 시영 뒷담화하는 동기들에게 나 시영이친구인데 왜 그런말을 하냐며 멋짐 뿜뿜하던 친구이다(이때는 친구는 아니었다 통성명 한번 정도?) 시영에게 먼저 만나자 해주고, 여자친구 소개시켜주고, 집들이 오라고 귀찮게 굴고, 마지막에 시영이 첫 자기만의 집을 갖게되었을 때 계약까지 도와주는, 시영이 서울에서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되어주었다.

살던 곳과 거리가 얼마가 떨어져있는지, 집값이 얼마인지 내 월급이 얼마인지는 솔직히 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경제적을 비롯한 현실적인 문제들이 발목을 잡긴 하지만 정말로 그곳이 좋고 살아가고자 할 마음이 있으면 조금 열악하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더라.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서울로 대변되는 낯선 장소에 얼마나 정을 붙일 수 있는가이다. 사람을 만나는 것일 수도 있고, 취미를 가지는 것일 수도 있고, 방법은 다양하다.

내까짓게 뭘, 현생이 바쁘니 내일 생각하자 와 같은 생각으로 차일피일 미룬다면 그것은 내가 평생을 살아온 고향에 살더라도 외롭고 힘들 것이다. 아무도 날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결국 정을 붙인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에게 정을 붙이는 것이다.

내가 나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나에 대해 알아가고 깨달아가야,그 깨달음을 이용해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고 보듬어주고 아껴주고 위해주어야 어디에서든 ‘이게 사람사는거지’라고 생각이 들만큼의 빛나는,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낯선 곳, 나혼자 똑 떨어져 있는 것 처럼 느껴지는 곳은 다른의미가 아니다. 내가 알던, 오롯이 나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물리적 장소는 아무런 의미가 아니다.
내가 낯선 상황인 것이다.

나를 잃어버린 곳은 물리적으로 내가 어디에 있는지와는 상관없이 낯선 곳이다.
그런 의미에서 헬조선이라고 불리우는 이 나라에서 아둥바둥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낯선 곳을 정처없이 헤매이는 방랑자이다.

<이번 역은 서울역입니다>의 근하작가는, 세상이라는 타지에서 바다위를 부유하는 빙하의 일각같은 모든 방랑자들을 위한 위로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어딘가에 숨겨져 있던 아름다운 세계가 우리를 맞이해 주길 바랬던 책 속 시영처럼, 우리 모두가 꼭꼭 숨겨져있던(숨겨놓았을 수도, 찾아볼 생각도 하지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오롯한 ‘나’를 찾아 방랑자의 삶을 끝내고 여기서 살면 좋은 일만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집을 찾아 마음 붙여 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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