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예술가들 - 창작은 삶의 격랑에 맞서는 가장 우아한 방법이다
마이클 페피엇 지음, 정미나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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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덕업일치 라는 말이 있다.
덕후라도 불리어도 좋을만큼 좋아하는 특별한 일을 업으로 삼는 행운을 누리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덕업일치를 이루었다라는 것도 부럽지만,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과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정확히 파악했다라는 것이 더 부럽다.

#내가사랑한예술가들 (#디자인하우스 출판)을 쓴 #마이클페피엇 이 덕업일치의 정수가 아닐까 싶다.
제목에서 부터 ‘내가 좋아하는’이라는 말을 숨김없이 그대로 적은 의도 처럼, 자신의 60여년의 미술평론가 인생에서 가장 사모하고, 직접만나 우정을 나눴던 작가들을 자기만의 신전에 모셔놓았다.

하나의 전시회를 구상한 듯한 구조이다.
전시회의 제목은 ‘지극히 개인적인 예술가들을 위한 신전’이며 전시실은 총 다섯개이며 전시실의 이름은 없다.
많은 작가들의 표현을 차용하자면 ‘무제(Untitled)'가 아닐까.

하지만 각각의 전시실에는 누가봐도 예술사를 말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화가들이 빽빽하게 전시되어있다.
작가의 그림에 집중했다기 보다 화가 그 자체에 집중되어 있어 그림에 대한 기억은 희미할 수 있지만, 화가에 대한 이해도는 내가 옆에서 지켜봐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올라간다.

작가는 서문에서 화가의 신전이 있듯 문학가들을 모셔놓은 신전도 마음속에 구비해 두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화가들의 편지나, 메모 다른 사람과 나눈 대화에 유난히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인생이 온통 ‘고통’뿐이었던 고흐의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동생 테오와의 편지, 고갱이 남긴 일기 등을 통해 고흐의 심정이 생생하게 전달되어 읽는 내내 입꼬리가 아래로 쳐지는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위대한 그린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궁금했던 내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책이었다.

아직 미숙하여 잡히지 않은 내 스스로의 취향이 제대로 감상하지도 못한 화가들로 잡아먹힐 정도로 말이다.
페피엇의 신전을 고대로 모셔와 평신도로 숭배할 뻔 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안비밀이다😇)

피카소의 인정욕이 그의 패션에도 담겨있다며, 베래모로 대표되는 그의 갖춰입은 패션은 그림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점차 옷이 검소해져가는 과정도 인상깊었고, 화려하면서도 절제되어 있다는 지극히 모순되는, 불가능해 보이는 화풍을 90이 넘도록 열정적으로 그려온 멀티링구얼 천재소녀 출신 소냐 들로네, 이름만으로도 20세기 실존주의 그 자체의 상징이 되어버린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처절한 실패로 가득한 그의 인생에 절로 박수를 보내며 팬이 될 수 밖게 없는 서사성들을 보여준다.

형상화 그것에만 집중해도 평생이 걸릴텐데 존재자체의 본연성에 몰두하여 실패의 고통에서도 포기않고 끝까지 마주친 그의 예술은 가히 하나의 사상을 대신하는 대명사가 되기에 충분했다.

인류가 망할때 까지, 아니 어쩌면 인류가 사라지고 다음 생명체가 과거에 있었던 인류의 문명을 찾아내더라도 고도로 심화된 사상과 문화를 가졌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할 예술가들을 막연히 상상할 때는 천재, 특출난 재능, 오롯이 자기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쾌적한 환경을 생각했는데 오히려 정반대인 것에 또한번 충격을 받았다.
고통과 결핍으로 예술이 이루어진다던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사실이었다. 문학에서도 우리가 재미있어하고 열광하는 이야기의 특징은 주인공이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아픔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는 김영하 작가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위대한, 감명깊은 이야기들은 결핍과 고통에 대한 공감으로 살아남아 우리의 마음에 박혀서 영원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예술 뒤에서 결핍과 고통을 피하지 않고 평생을 고통스럽게 마주해 포기하지 않고 살아낸 화가들이 진정한 예술이며 그들이 만들어낸 창조물의 진정한 뜻임을 깨달았다.

나도 이 위대한 예술가들 만큼은 아니지만 버티고 열심히 살아낸다면 누군가가 기억해줄 무언가 하나쯤은 남길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삶을 살아가는데에 용기가 생긴다.

이래서 예술은 불멸인가보다.
우리의 삶도 예술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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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지구라는 놀라운 행성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아이작 유엔 지음, 성소희 옮김 / 알레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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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우리는 지구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알고있을까?

눈 뜨자마자 눈 감을 때 까지 심지어 눈을 감고 잠을 청하고 있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지구에 속해있다. 심지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어 지구의 일부로 돌아갈때까지 지구를 단 한번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구에 대해 아는 걸 이야기 해봐라라고 하면 딱히 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없다라는 것에 당황한다.

#지구를여행하는히치하이커를위한안내서 (#아이작유엔 지음 #알레 출판)제목을 보고는 여행객처럼 맛집 관광지말고는 제대로 아는게 하나없는 우리에게 딱 맞는 제목이 또 있겠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떠한 과학적 지식을 담고, 어떠한 데이터를 보여주면서 하나의 행동으로 귀결되는 대부분의 지구를 다루고 있는 책들과는 다르게 어떤 장르로 규범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글들이 500여종에 이르는 다양한 생물들(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앞서 언급했고 대부분 생명체인 대상)을 열거하면서 진행된다.

과학적 지식이 담긴 글이었다가 문학적 에세이로 글이 끝나기도 하고, 아예 소설인 것 처럼 보이는 글도 있고, 사소한 것에서 고찰을 고백하는 철학 에세이 같은 글들도 있다.

읽으면서 계속 그래서 이 작가는 하고싶은 말이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다. 생물들의 이름짓기에 문제점, 시각적 정보들을 받아들이는데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위해 각기 다르게 진화한 모습들, 동물들의 보금자리에서 인간의 가정과 가족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글 등 좋게 말하면 다채로운 주제와 그 주제보다 더 다양한 작가의 생각들이 담겨있다. (끊임없이 작가가 유머를 녹여 글을 적어 놓았는데 책을 덮는 순간에는 작가의 농담이 가장 강하게 기억될 만큼 온갖 이야기들이 온갖 방향으로 흘러가 다정한 느낌이나 분명히 얽혀있다)

작가는 이러한 글들의 주제와 형식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설명한 것이 아닐까 싶다.
다들 독립된 개별적인 것처럼 하나로도 이미 완성된 이야기들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헷갈리긴 하지만 그래도 하나의 소주제로 나아가 한권의 책으로 묶이듯이, 다양한 생명체들이 독립적으로 살면서 하나의 역,계,문,강,목,과,속,종으로 묶이고 그것들이 다시 모여 하나의 지구라는 거대한 생태계를 이루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거기에 제목에 적혀있는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라는 표현을 보면, 읽기 전에는 아 우리 인간을 말하는 것이구나 했지만 다 읽고나니 이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다 지구라는 관광지를 여행하고 있는 히치하이커구나라는 생각까지 더해지니, 만물의 영장이라는 자만심으로 지구를 마음대로 다룰 권리를 가진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지구를 지배하는 지배종이라 여기면서도 지구의 생명체라면 본능처럼, 당연하다는 듯이 모두 가지고있는 보금자리조차도 마음대로 가지지못해 낑낑거리고 있으면서 뭘 그렇게 떵떵거리고 있는지. 아 정말 방구 낀 놈이 성낸다라는 말을 고대로 실천하고 있더라🤣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 인간끼리 사회화과정을 통해 이루어놓은 모습들도 하나의 지구 생태계처럼 이루어져있다.
짝을 이루어 번식을 하고 사냥을 하고 힘을 기루고, 보금자리를 마련하고(하기위해 애쓰고) 등 모든 일들이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이 똑같이 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결국 다 똑같은 평등한 임차인이다.
똑같은 돈을 지불하고 빌려쓰면서 다른 생명체에게 소음, 쓰레기, 폭력 등 다양한 갑질을 하고있었다 우리 인간은.
당연하다는 듯이 생명체에 이름을 붙가면서.

이름을 붙여준다는 것은 하나의 생명체를 창조해 내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 거룩한 행위를 우리의 편의를 위해서 한 것이다. 지구에서 가장 많은 개체수, 가장 넓은 서식영역, 가장많은 각종 배설물들을 만들어내는 주제이니 반성하고 다른 동등한 권한을 가진 이웃들을 위하고 보살펴야한다.

가볍게 유쾌하게 우리도 지구의 일부임을 특권따위 없음을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대부분의 것들에서 부정적이고 강압적인 압박에 의한 행동보다 유머와 가벼운 유쾌한 상황에서 스스로의 깨달음에 기반한 행동이 더 효과적인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유쾌한 동기부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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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영감에 관하여 - 천천히 사유할 때 얻는 진정한 통찰의 기쁨
머리나 밴줄렌 지음, 박효은 옮김 / 다산초당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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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요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사회’는 정체되거나 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매순간이 돈으로 환산되면서 멍때리거나 게으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 일이 되었다.

자본 주의 이전에 무한 경쟁 사회에 들어서면서 부터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억제당한다. 너가 지금 이러고 있는 시간에 경쟁자는 한글자라도 더 보고 있다고, 그렇게 뒤쳐진다고, 뒤쳐지만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가스라이팅 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우리는 언제 쉬고 내안의 나와 조우할 수 있는가?

#창조적영감에관하여 (#마리나반주일렌 지음 #다산북스 출판)는 진화라는 것은 환경에 맞는 모습으로 나아갔다는 것이고, 그럼 우리 뇌는 오롯이 집중하는 것에 맞게 진화되었을 것인데 왜 집중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은가라는 진화학적 의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집중력을 오랜시간동안 유지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유리하다면 분명 그렇게 진화했을텐데 왜 그러지 못했냐는 물음이 꼴에 생물학도라 그런지 나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오히려 동물이 우리보다 무언가에 집중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 밥이든 간식이든, 좋아하는 장난감이든 자기가 좋아하는 무언가에 한번 꽂히면 옆에 무슨일이 있어도 아랑곳하지않고 오직 그 하나에만 몰두한다.

족발에 있는 커다란 뼈를 좋아해서 쥐어주면 손발이 갈색으로 물들고, 밤에 잠도 자지않고 매끈한 뼈에 뽕뽕 구멍이 보일정도로 핥아대던 우리집 강아지도 기억이 난다.

각설하고 이처럼 우리는 상대적으로 진화가 덜 되었다는 표유류나 유인원보다 집중력을 유지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집중력을 잃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작가는 던진다.

실제로 집중력이라는 이름의 이성을 유지하는데에는 우리 뇌의 앞부분이 강하게 활성화하는 것이 관여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뇌의 특정부분의 활성화가 약해지면 직감, 창의력이라 불리는 자유롭고 틀에 얽매이지 않은 사유가 가능해진단다.
우리는 이것을 ‘몽상’이라 부른다.

몽상은 많은 인구가 사용하고 있는 영어에서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을만큼, 인간의 삶에서 제법 배제되어있다. 물론 왜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몽상’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파리지앵의 나라 프랑스어에는 존재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럴까 파리지앵을 떠올리면 눈앞에 선하게 보이는 노천카페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와 샌드위치를 즐기는 모습이 바로 몽상하는 모습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실제로 커피를 마시기위해 커피잔을 드는 것과 샌드위치를 입에 넣어 씹는 저작운동에는 아무런 의식이 담겨있지 않은 반사적인 행동일 것이다. 시크한 선글라스 안에는 멍때리고 있는 멍한 동공이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현대 우리사회의 모든 분야에서는 기존에 없는,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것을 떠올리는 창의력이 굉장히 중요하고 실제로 귀한 능력으로 인정받고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창의력은 단순히 짧은 시간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머리에 담아 좋은 성적을 이뤄내는 직선적인 사고가 담당하지 않는다. 멍을 때리고 사색에 잠기고 몽상하는, 겉으로 봤을때는 아무것도 하지않는 것 같은 그 시간에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에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심지어 돌이켜봤을때 너무도 간단해보이는 답을 찾아낼 확률이 훨씬 높다.

뇌과학적으로도 충분히 밝혀진 내용이다. 멍을 때리는 동안 우리뇌의 뇌하수체의 이동속도가 빨라져 뇌활동의 부산물로 생기는 노폐물들을 수월하게 걸러준다고. 이렇게 노폐물을 걸러내는 움직임은 오직 멍때리고 몽상하는 순간에만 발생하는 귀한 일이라고 한다.(원래 우리 몸에서 림프절이 하는 역할인데 우리 몸 중 유일하게 뇌에만 림프절이없다)

집중력이 부족한 나같은 사람에게 집중력이 떨어져도 괜찮아, 오히려 좋아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 위안이 되었지만 무조건몽상을 응원하고 있지만은 않다. ‘중도’를 말하고 있다.

집중력(이성)과 창의력(몽상)의 적절한 비율 유지.
이 둘을 합쳐여 비로소 다른 종들과 비교되는 인간성이 완성된다. 완벽한 자유로운 발상을 위해서는 그 기반이 되는 어느정도의 지식과 이성적 판단은 필수이다.

아무런 지식없이 펼쳐지는 몽상은 아무짝에 필요없는 허황된 망상일 뿐이다.

적절한 밸런스를 유지하여 즐기는 서핑이 떠오른다.

적절한 몽상과 멍때리는 사색으로 이성과 창의력의 밸런스로 인생이라는 파도에 즐겁게 올라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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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생활의 즐거움
필립 길버트 해머튼 지음, 김욱 편역 / 책읽는고양이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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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매슬로우의 욕구위계이론은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단계적으로 나누어 설정하여 바람직한 인간의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 하는 이론이다. 그 중 가장 높은 단계인 5단계의 욕구는 자아실현의 욕구이다.

나는 이 욕구위계이론은 인간이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어디에 집중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인가를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고 생각한다. 먹고 자고와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충족시키면 쉽게 바로바로 행복을 느낄 수 있지만 행복도가 높지 않으며, 다른 것들에 의해 그 행복감이 쉽게 사라진다.

하지만 자아 실현이라는 최고위계의 욕구가 만족되어 느끼는 행복감은 ‘먹지않아도 배가 부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다른 욕구의 해소가 주는 행복감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해머튼 이 쓴 #지적생활의즐거움 (#책읽는고양이 출판)을 읽으면서 계속 이 욕구위계이론이 떠올랐다.
해머튼이 말하고 있는 지적생활의 의의가 자아실현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해머튼은 책에서 지적생활을 올바르게 영위하기 위해서 해야하는 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놓았다.
해야하는 일들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훈련’이다.

지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육체적 준비가 되어있어야한다.
뇌를 혹사시키는 행위는 몸에 부담을 준다. 그래서 선척적으로 가지고 있던 질환을 악화시킬 수도있고, 전혀 문제가 없었으나 갑작스럽게 질환을 야기시킬수도 있다.
그러면 결국 지적생활을 하고싶어도 할 수 없게되니, 양질의 결과물을 오래동안 꾸준히 남기는 최선의 지적 생활을 하길 원한다면 밖으로 나가 꾸준히 운동을 하고 좋은 공기를 마시고 긴장감을 완화시켜 건강을 유지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현재 다이어트식단으로 변질된, 자기몸에게 맞는 식단과 식사시간을 찾고, 적당한 술, 담배, 수면의 양도 찾으려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지적생활에 너무나 몰두해서 단기간에 하려고 하지말고, 꾸준히 하루에 몇시부터 몇시까지 몇시간만, 루틴화해서 몸이 일상으로 지적생활을 받아들이도록 루틴화하는 연습을 하라고 한다. 며칠 몰두하고 또 며칠은 아예 지적활동을 하지 않는 것보다 몇시간씩 효율에 상관없이 꾸준히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더 훌륭한 결과를 내는 방법이라 말한다.

몸도 일상도, 지적생활을 위해 최적화하는 훈련은 기꺼이 하라는 뜻이다. 해머튼 스스로도 이러한 훈련에는 고통과 인내가 수반된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정진해야한다 말한다. 왜? 지적생활이라는 이름의 자아실현을 위해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행복을 오롯이 누리기 위해 상대적으로 낮은 차원의 욕구해소를 기꺼이 참으라고 그것이 맞다고 말하는 것이다.

문득, 글이 잘 써지던 잘 써지지않던 하루 몇시간씩은 꼭 글을 쓰는 루틴을 확립한 무라카미 하루키가 생각났다.
하루키도 심지어 일상의 루틴화도, 글쓰기라는 지적생활을 위해 러닝을 수십년 동안 꾸준히 하여 체력을 유지해왔다.
세계 7대 마라톤도 곧 완주하는 것 같던데, 어느덧 70중반의 나이인데도 여전히 하루키를 떠올리면 달리는 모습이 떠오를 정도이니 해머튼이 주장하는 지적생활을 최고로 잘 누린(누리고 있는)지적생활자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이처럼, <지적생활의 즐거움>에는 지적 생활자를 위한 훈련뿐만이 아니라, 절망에 빠트리는 시간분배와 가난, 기억력 같은 것들과, 지적 생활자들을 행복하게 하는 스스로의 관조에 대해서도 담겨있다.

가난이 지적 생활을 방해할 수는 있지만 아예 향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자신의 이야기를 기꺼이 꺼내며 위로하는 부문은 고물가 시대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어 행복을 포기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큰 위안이 될 것이다.

<지적생활의 즐거움>은 이처럼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있는 이 시대에서 지성을 잃지않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있다.
구체적 방법과 공감으로 멘탈관리까지. 원하는 것을 얻기위해 최선을 다하는 방법과 위로를 전하는 성공학과도 비슷하다.

이 부문에서, 진정한 성공이란 무엇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철저한 자기관리와 스스로에 대한 어느정도의 구속으로 이루고자 하는 행복을 달성한 삶을 향유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성공이 아닐까한다. 어느정도가 자기에게 적당한지, 스스로와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다.

끊임없이 스스로와 조우하는 삶을 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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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되는 순간들 - 이제야 산문집
이제야 지음 / 샘터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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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 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산문은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그대로 적어나가는, 사진과 비슷하고, 시는 한 걸음 뒤에서 대상을 바라보며, 한 번 투과된 후 다르게 해석되는 것이 거울과 닮았다고 #시가되는모든순간 (#샘터 ​출판)에서 #이제야 시인은 말했다.

그렇다면 <시가 되는 모든 순간>은 시일까 산문일까.
책 표지에 적혀있는 ‘이제야 산문집’이 아니었다면 나는 산문시라고 여겼을 것이 분명하다. ‘이제야 산문집’이라는 단어를 보면서도 시 같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 성인, 아니 인생의 첫 시집인 #진심의바깥 으로 이제야 시인을 처음 만났을 때 사람들이 이래서 시를 읽는건가? 라는 생각을 했었다. 나는 클래식이나 예술 오페라 같은, 다른 사람들에게 딱 오해받기좋은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임에도 시는 어려웠다. 오페라보다도 접근하기 어려운 분야라고 나 스스로에게는 느껴졌다. 몇번을 다시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로 쓰여진 시는 나에게 호기심이 동하자도 않을만큼 난해했었다.

하지만 이제야 시인의 시는 달랐다.
단단한 내면으로 중심을 잡고 덤덤하게 말해주는 이제야 시인의 시들은 원래는 어떤 의미로 시인이 썼을지는 모르겠지만 짧지않은 시간을 살아오면서 잊어버렸다고 생각하지도 못할만큼 새카맣게 잊어버린 기억들을 소환시키며 나를 이해시키고 감화시켰다. 특이한 경험이었다.
어떻게 이런 시를 쓸 수 있는지 너무나 신기했다.
그런 시에 대한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시가 되는 순간>은 등단 이전부터 시인 본인의 이야기가 간략하게 실려있음은 물론, 시인이 생각하는 ‘시’가 설명되어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상당히 다른 부분들이 많았다.
특히, 나는 이제야 시인이 덤덤하고 정갈하고 다정하게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좌절시키고 낙담시키고, 쉽게 잊혀지지 않았던 스스로를 언제꺼질지모를 불로 뒤감았던 것들을 꺼내어 쓴 것들이라는 것이 참 충격적이었다.

그러면서 몇번이나 내면에서 그것들과 대면해왔었기 때문에 표현이 그렇게 깎여나갔을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내 안의 수많은 나와 끊임없는 대화를 하며 달래기도, 때리기도 하며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이며 동시에 보편적인 것들을 꺼내어서 시가 되기를 ‘기다린다’라고 말한다.
내가 바깥으로 ‘시’라는 형식으로 꺼내놓은 문장들은 전해져 닿은 사람들이 자기만의 개인적인 것으로 번역되었을 때 비로소 ‘시’가 되는 미완의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아! 내가 겪었던 것이 바로 시가 되는 순간이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랜 시간이 걸려 처음으로, 시가 되는 순간을 직접 목도한 것이다. 위의 내용처럼 이 책에는 시인이 겪은 보통의, 보통이라고 하기엔 셀 수 없을 만큼 곱씹으며 눈물 흘리고 좌절했던 인생의 순간들이 시가 되는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 담겨있다.

이런 시를 써내는 시인은 어떤 생각으로, 어떤 단어들을 선택해 시를 만들어 내는지가 참 궁금했는데 어렴풋이 알 것만 같다.

친한 친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어 24시간 전화 상담사에게 평생에 다시없을 정도로 눈물을 펑펑 쏟아냈던 작가는, 좋은 일 보다는 무덤덤한 일상이 더 많은, 그로인해 부정적인 것들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 무채색의 세상을 굳이 끄집어 내어 스스로를 아프게 하나 왜 괴롭히나 했는데 그 성찰의 시간으로 무채색의 것들에게 다양한 색을 입혀 따뜻하고 포근하고 다정한 무언가로 바꾸어 나간다.

그렇게 스스로의 환부를 다시 들추는 용기를 몇번이고 시행하는데도 어떤 것들은 여전히 외롭고 쓸쓸하고 서글프다.
그럼에도 이러한 양극을 모두 가지고 있는게 시라며, 그래서 시를 쓰는게 아닐까라고 말하는 시인의 말을 들으며, 미완의 글을 써서 날려보내는 시인과, 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콕하고 날아와 박혀 나만의 색을 칠하는 내가 만나 비로소 완전한 시가 되는 거라면, 따뜻하고 포근하고 다정한 색감의 것들로만 칠해서 시인의 고통을 나눠지고 싶다는 오만한 생각을 해보았다.

꼭지마다 옷소매 단추처럼 달려있는 짧은 시와, 모두에게 제각각의 모두 다른 사진으로 보이는 또다른 언어로 된 시, 흑백사진이 걸려있다.

무채색의 시에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않고 맘껏 나만의 색을 칠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 시를 읽는다는 것임을 깨닫게 된, 즐겁게 기꺼이 색을 칠한 또다른 형식의 시집이었다.

나에게 <시가 되는 순간들>은.

계속 꺼내읽어 다양한 색들을 덫칠하고픈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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