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가 사랑한 철학자들 - 예술은 어떻게 과학과 철학의 힘이 되는가
김종성 지음 / 비제이퍼블릭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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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화가 라파엘로가 바라본 철학의 이미지.
60여명을 그려넣어야할만큼 다양하고 모두가 중요하며 유의미했다. 하나의 그림만을 위한 방대한 도슨트. 진정한 덕후란 하나를 위해 여러개를 깊게 파야하는 것임을, 세상은 덕후가 바꾸는 것임을 다시한번 깨닫게 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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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크시의 사라진 작품들 - 팔리거나 도난당하거나 파괴된 그래피티 51
윌 엘즈워스-존스 지음, 서경주 옮김 / 미술문화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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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예술의 형태는 참으로 다양해지고 있다.
장소에 국한되지도 않으며, 상상하지도 못했던 재료들을 사용하여 이것이 진정 예술작품인지도 헷갈리게한다.
작품인지도 모르고 지나칠 정도이다.

이런 캔버스를 벗어난 예술을 하는 사람 중 가장 유명하고 여러 이슈를 몰고다니며 뉴스에 자주 거론되는 예술가는 아마도 #뱅크시 일 것이다. 벵크시는 투명 필름지에 도안을 그린 후 오려내어 원하는 곳에 붙인 후 물감을 두드려 채색하는 스텐실 기법을 사용하는 작가로 폐허가 된 건물 벽, 교통 표지판, 가게 입구의 셔터, 신문 가판대 뒷 벽 등 다양한 장소에서 많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을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가장 적절해 보이는 장소에다 만들어냈다.

결국 그의 작품에는 그 작품이 위치하고있는 ‘장소’까지 포함해야 완전한 의미를 갖춘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유명해지고 작품들이 주목을 받으면서, 그의 작품을 ‘소유’하려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뱅크시의사라진작품들 (#윌에즈워스존스 씀 #미술문화 출판)은 그 장소의 의미가 결여된 ‘사라진’작품 51점을 소개하고 있는데, 작품을 다음세대까지 보존하기 위해서(그림을 가져간 사람의 주장에 따르면 뱅크시 작품의 80%가 소실되었단다. 과연 그 중 본인이 소실시킨 것은 몇개나 될까)라는 이름으로 그런 행위가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데, 신문 가판대 뒤의 그의 그림을 1000파운드에 팔리고 다시 25만 파운드에 되파는 것이 과연 예술을 보존하기 위함인지 스스로를 제외하고는(스스로도 알고있다는 것을 안다)다 알고 있다.

애초에 그래피티 장르는 공동체적 관점에서 봤을 때는 거리의 분위기를 해칠 수 도 있고, 다른 사람의 소유물(담장 건물 벽)들을 훼손하는 행위일 수 도 있어서 보통 익명으로 작업한다.
그래서 구획 공무원들에 의해 지워질 수도 있고, 뱅크시의 경우에는 그래피티의 대가 킹 로보와의 불화로 팀로보에게 작품이 덮어지기도한다(이건 약간 자업자득같은, 어쩌겠다 예술가란 그런 존재인데)

하지만 보존하겠다는 이유로 캔버스에 똑같이 복제되어 옮겨지기도 하고, 전기톱으로 깔끔하게(?)도난 당하기도하며 의외로 정말로 보존하겠다는 이유로 가져가서 익명으로 보존하다가 걸린 ㅋㅋ 건축하고 있다.
그 건축가에게 처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묻자, 도저히 모르겠다며 그래서 자식들에게 물려주려한다며(폭탄돌리기😂)같은 유쾌하고도 진심가득한 사라짐?도 존재한다.

이것은 예술의 훼손일까?
예술에 대해서 너무나 당연하게도 잘 모르지만, 예술작품은 작가의 의도가 매우 중요하긴 하다. 그래서 수많은 전문가들이 열심히 시대적, 시기적 배경들을 연구하고 평가하고 밝혀내고 책으로 써서 알려주려 하겠지.
하지만 내가 봤을 때 여러 예술분야 중 그림은 의미 전달에 불친절하다는 느낌이 강하다. 좋게 말하면 관람객들의 감상평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변기에 서명을 하고 작품이라 하고, 벽에 바나나를 테이프로 붙여놓고(이 바나나는 심지어 전시중에 먹혔다), 뱅크시의 그림 중 하나는 낙찰된 후 파쇄되었을만큼 기상천외하니, 그만큼 받아들이는 사람의 감상도 더욱 중요해지지않았나 싶다.
호평이든 혹평이든, 그 작품에 대한 인지도, 인기가 되어버리니 미술상들에게는 뭔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뱅크시의 작품도 관람객들이 봐주어야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관람객들이 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어야하는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고😂 이미 뱅크시는 작품자체로도, 작품이 썰려나가는 이야기로도 이미 다음세대로 전해질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어느 누구의 작품보다 더 후세들이 오리지널을 감상할 확률이 극히 희박하다.

이 책처럼 도록으로만 감상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치 예전에는 있었다며, 사진으로만 남아있는 멸종된 생물들 처럼 말이다.

난 우리 사람들의 마음에 상대방을 생각하는 인류애라는 거창한 이름으로도 불리는 다른 사람을 위하는 의젓함이 있다고 믿는다.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사라질 확률이 높았던 작품들이 안전하게 보관되고 있는 것은 반길만한 일이다.
그래도 의젓함으로 충분히 장소까지 오리지널을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게, 그 뒤에도 개인 창고가 아니라 공공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고 맘껏 평할 수 있게 약간의 시간들을 배려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우크라이나에도 작품을 남기는데에는 돈을 넘어서는 뚜렷한 의도가 있기때문이지 않겠나. 조금이라도 더 뱅크시의 의도가 존중받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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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티네 - 일본 문학의 뿌리를 찾아서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석희 옮김 / 이소노미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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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티네. 소나타의 작은형식. 피아노의 근간이자 기본.
아마 소나티네라는 제목은 나쓰메 소세키 문학의 기본이자 근간이 되는 책이라는 뜻이 담겨있겠죠? 나쓰메 소세키의 글들이 100년이 넘도록 살아남아 여전히 읽힌다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죠. 이소노미아의 올바른 번역도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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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는 다정하게 씁니다 - 나의 안녕에 무심했던 날들에 보내는 첫 다정
김영숙 지음 / 브로북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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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자신의 현재모습과 상태를 자각하며 끝없는 의문을 가지며 살아가는사람이 얼마나 될까?
심지어 아이둘을 키우며 방송작가라는 칼퇴근이라는 것을 실현하기 어려운 능력이 너무나 중시되는 직장에서 25년이라는 시간을 버텨내면서 말이다.

너무 지치고 힘들고, 말도 안되는 스트레스로 뇌의 전원을 내리고 그냥 좀비마냥 으어으어 하며 오늘이 날짜가 어떻게 되는지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살아갔을 것 같은데 말이다. 아마 대부분 그렇게 살고있지 않을까? 그렇게 스스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체 살다 갑자기 마를리없다는 듯이 흐르는 눈물과 우울감이 찾아오면 내가 왜이러지라며 당황스러워 할 것이다.

하지만 #에필로그는다정하게씁니다 ( #브로북스 출판)의 저자 #김영숙 작가는 그 지난한 세월을 처절하게 살아냄과 동시에 너무 늦기전에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삶을 살았고, 살아왔고, 살아오고 있다. <에필로그는 다정하게 씁니다>는 그런 작가의 하나의 일기장같은 책이었다.
이십년 동안의 일기장을 넘겨보는 것처럼, 악으로 깡으로 버티던 시절부터 무엇이 잘 못되었다를 인지하는 시기, 그리고 고쳐나가고 깨달은 지금까지, 작가는 이래라 저래라 ‘충조평판(충고,조언,평가,판단)’을 내리지 않고 그냥 귀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내는 소리처럼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귓바퀴에 부딪혀 들었으면 다행이고~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청자가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작가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이 계속 들었다. 아마 작가는 이 책을 쓰면서도 끊임없이 자기가 대화하며 격려하고 치하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김영숙 작가의 삶에 감정이입을 했을 워킹맘들이 아주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자연인이다’의 메인작가이라는 일반적일수고 특별할 수 도 있는 커리어가 다를뿐, 일하고 애키우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다 같았을 것이다. 늦게 퇴근해 가슴이 아플만큼 젖이 부풀어오른 부분을 읽을때는 우리 어머니도 떠오르고(나는 분유먹고 컸댄다 tmi)사회에서 만난 워킹맘들이 생각났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자식들을 최우선순위에 놓고 하나라도 더 해주고 하려고 하는, 그럼에도 겨우 몇시간 나는 그 짬을 자기자신을 위해 독서와 같은 취미로 보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분들을 독서모임에서 알게되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드는 요즘인데, 참 대단하고 멋지고 존경스러운 것 같다.

물론 나는 아이를 키우지않으니 감히 안다고 말을 못하지만,
김영숙 작가가 ‘자연인’들을 보며 자기를 성찰했듯이, 독서, 필사, 운동, 러닝, 사진, 미술전시관람과 같은 자기 자신과 조용하게 대화할 수 있는 어떤 외부의 자극을 수용하는 시간을 갖고있다라는 것이 참 멋졌다.
정말 어른을 보는 느낌이랄까?
회사에서 라떼는 말이야~ , 회사에 애정이 없어~ 라며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는 ‘윗분’이라는 이름의 어른들과는 차원이 다른 어른이었달까. 덕분에 스스로에게는 무뚝뚝한 나 스스로도 나와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K맞이로써 응당해야하는 부분이 있고, 사회에서도 나에게 요구되는 부분들이 있다. 그 부분들을 모두 해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에게는 다정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어르고 달래기 위해 쉬거나, 미루거나 하면 마음은 잠시 나아졌지만 꼭 무언가 문제가 벌어지곤 했다.
물론 나의 그 ‘셀프 어르고달램’때문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다른 원인은 떠오르지않았고 떠올릴틈도 없었다. 그러니 나를 다시 옥죌 수 밖에.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왔던 자연인들도 잘나가던 영광과 가정을 버리고 자연을 선택한 이유가 남들의 목소리를 듣기만 바빴던 지난날을 후회하기 때문이라 한다.
거기에 특별히 ‘자연’에 감화된 것은 위에 잠시 나왔던 ‘충조평판’을 하지않고 그냥 묵묵히 옆에 있어주는 것에 큰 위안을 받았다는 것이었고.

나 스스로도 위로가 필요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럴때 아무리 친한 누군가를 만나도 나를 위해서 할수 있는 말은 충조평판 뿐이다. 그 마음은 고맙지만 그런것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결국 혼자만의 대화가 중요하다.
혼자만의 대화는 자연의 그것처럼 조용하고 묵직하다.
그냥 가만히 관조하고 옆에 ‘내’가 있음을 느끼게 해주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꼭 산 속에서만 살아야 자연인인가, 그렇게 묵묵하게 자연스래 나 스스로의 곁에 자연스레 자리를 지켜주면 그것도 자연인 아닐까?

글로, 내 귀에 눈에 코에 피부에 묵묵하게 와닿은 자연같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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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려고 한 과학 아닙니다 - 아주 사소한 질문에서 출발한 세상을 바꿀 실험들
이창욱 지음 / 어크로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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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의 도서제공으로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이그노벨상. 언젠가 우리나라 과학자가 수상할 때 뉴스에 나왔던걸 봤던 것 같다는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상으로, 그때는 과연 이것을 상으로 받아들여도 되는가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저게 무슨 과학이야?라는 마음이었을테다.

하지만 #웃기려고한과학아닙니다 (#이창욱 지음 #어크로스 출판)을 보고 나서는 너무나 평가절하 되어있는 상이라는 생각과, 진짜 과학이란 무엇일까 라는 궁금증이 들었다.

패러디의 개념으로 우리는 이그노벨상을 바라보아서 노벨상의 아류, 괴짜 같은 느낌으로 인식하고, 누가 세금을 가장 잘 축냈는가를 의원이 멋대로 정하던 황금양털상의 여파 덕인지 도움이 되는 뚜렷한 성과가 없으면 과학이 아니라는 인식이 자리잡았다. 문득 알쓸시리즈에서 심채경 박사가 세금 아깝지않네 라는 댓글이 큰 힘이 되었다고 말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이그노벨상 까지는 아니지만 지구 내에서 다양한 연구에 쓰일 수 있는 천문학적 금액이 카운트다운과 함께 대학교에서 축제 붗꽃으로 등록금이 불타는 것 처럼 순식간에 한줌의 재로 바뀔 수 있는 발사에 쓰이고있다. 성공하더라도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이로운 것은 없는데말이다. 색감보정을 해서 공개하는 이쁜 우주사진들을 배경화면으로 저장하지않는 이상 별 이익이 없다.

그럼에도 우주에 대한 연구는 왜 이그노벨상의 자격이 주어지지 않고 노벨상영역이라고 우리는 인식할까?
아마 우주라는 것은 멋지기 때문이 아닐까?
누구나 동경하고 탐험해보고싶고 기꺼이 우주비행사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화성을 제2의 우주로 삼겠다는 이야기 까지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실패해도 내 삶이 지금이랑 크게 달라지지도 않는 것 같고, 응원하는 마음이 생긴다. 하지만 우리의 대소변 상태를 카메라로 찍어 우리의 건강상태를 체크하는 파란 LED조명이 들어오는 스마트비데는 글쎄, 응원하고 싶어지지 않는다. 별나구나 신기하구나 정도지 그거 굉장히 멋지구나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렇게 스마트 비데는 우리나라 5번째 이그노벨상수상작이 되었다.

하지만 우주와 스마트비데 중에서 나에게 더 빠르게, 더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스마트비데가 아닐까?
진정한 과학이란 주류로 여겨지지 않더라도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던가? 거기에 우리가 멋대로 ‘주류과학‘이라 단정짓던 삶의 윤택성까지 보장하는데 어째서 ’비주류‘의 상징이 되었을까? 곰곰히 생각해볼만한 문제이다.

많은 시사성을 주는 사례도 있었는데
바로 ’그래핀‘이다. 그래핀이랑 탄소가 다른 탄소들과 육각형구조로 결합되어있는 단층(2차원)적 구조를 말하는 것으로, 거의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일 뿐, 단 한층의 구조를 갖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거의 불가능했다.
아예 구성이 불가능하니 어떤 성질이 있는지, 어떻게 활용되는지 알 방법이없었다. 어느정도 얇은 수준으로 흑연을 깎아낼 수는 있었으나 공정도 까다로웠다. 하지만 이것을 너무나도 쉽게 해결 할 수 있었으니 바로 스카치테이프였다. 흑연을 보관하기 위히 스카치테이프를 붙여두는 것을 보고 그 스카치테이프를 보니 인위적으로 깎아낸 것보다 훨씬 얇은 흑연층이 존재했던 것. 더 놀라운 것은 이 발견이 이 실험실의 메인 연구과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안드레 가임교수가 매주 금요일 창의적인 어쩌면 무의미해보일 수도 있는 연구를 진행했는데 그래핀의 발견도 그것의 일환이었던 것.
이 그래핀의 발견은 이그노벨상 수상은 물론, 정체되어 있던 고체물리학의 급진적발전을 야기한 결과로 4,5년 만에 노벨상까지 수상하며 이그노벨과 노벨상을 동시에 수상한 사례가 되었다.
지금까지 이 금요일 연구가 대학단위로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과, 그래핀의 생산과정이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불굴의 학술지 네이처에서 두번이나 깠(?)다는 것이 또 많은 생각거리를 던저준다.
어떤가? 진정한 과학이라는 것이 한눈에 분류가 되는가?

한곳만 너무 바라보고 있으면 생각이 단순해진다.
기발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색다른 시선이 필요한 순간이 분명히 있다. 그 시선을 우리가 괴짜라고, 우스꽝스럽다 여기는 이그노벨상적 연구가 제공해 줄 수 있다고 저자는(물론 나도)믿는다. 그래서 과학예산의 1%만 이런 연구에 줘도 과학의 다양성과 현재 과학의 빈틈을 채우는데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게 나중에는 큰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있다.
우스꽝스럽고, 주류가 아니라는 것보다 우리가 놓치고 있던 무언가라고 여겨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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