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어른이 되는 시간 - 소란한 세상에서 평온함을 찾는 가장 고귀한 방법
나태주 지음, 보담 삽화 / 북로그컴퍼니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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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의 도서제공으로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시는 항상 낯간지럽다.
경상도 남자라서 그럴까? 항상 그 이유가 궁금했다.
비교 대조할만한 친구놈들도 없다
기껏해야 만화책이나 판타지소설이나 공유하면서 볼 정도이니
(이 글을 보지못하겠지만 녀석들아 책 좀 보렴😇)

내 개인적으로도 학창시절에 누구나 그랬듯
글쓰기로 교내에서 상장 몇개 받었었지만(a.k.a 백일장)
그때도 꾸역꾸역 산문을 써냈다. 도저히 운문은 분량도 주제도 글투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나이가 먹고 앞자리가 몇 번 바뀔 세월이 지나고나서야 시를 읽는 것에 대한 도전 정신이 생겨났다.

그렇게 한 권의 시를 읽는데에 성공했고, 그 시인님의 산문집까지 읽으면서 사와 시가 태어나는 순간들을 훔쳐보았다.
훔쳐보았기 때문일까. 썩 좋아보였다.

그렇게 나는 다른 시를 찾아나섰다.

#필사어른이되는순간 (#나태주 지음 #보담 그림 #북로그컴퍼니 출판)은 그런 나를 한단계 더 나아가게 해주었다.
시 필사를 하게 된 것이다.

유퀴즈에 출연은 물론 꽃, 풀꽃 등 시 자체가 이미 너무나 유명한 시인이시지만 나는 당당하게도 한번도 펼쳐보지 않았었다. 유퀴즈에 나와 화사하고 다정해 보이는 인상이 참 보기좋았던 기억만 있을뿐.

시인님을 책으로 만들면 이런 느낌일까 싶은 따사로운 디자인의 <필사,어른이 되는 시간>은 나태주 시인의 시와 함께 짧은 코맨트가 달려있다. 시 자체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는데 편지같은 다정한 글이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제목에 필사가 들어가있듯이, 시 옆장은 필사를 할 수 있게 비워져있는데 그냥 백지가 아니라 #보람 작가의 일러스트가 소담하게 그려져있어, 초등학교 때 방학숙제로 만들었던 시 포스터가 생각났다(시 한편 베껴쓰고 남은 종이 여백을 시와 어울리는 그림으로 채우는 과제였다)

글씨가 훌륭하지 않음이 안타까울 뿐.

하지만 시를 읽고, 옮겨쓰면서 또 읽고, 쓰기까지.
하나의 시를 한번에 세번 씹고, 뜯고, 맛보고, 느끼면서
내가 왜 나이먹고 나서 요즘 시에 관심이 생기고 좋아진 것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알게되었다.

시는 배려가 넘쳤다.
내용이 격려가 아니더라고 갈갈이 찢고 생채기가 날 것 같은 내용이라도 너무 아프지않기를, 좋은 내용이면 햇살아래 널려있는 빨래들 처럼 포근하게 어린아이 머리 쓰다듬듯 살살, 다정하게 들려준다. 그래서 받아들이는데에 부담이 없다.

읽고 쓰고를 하면서 시의 언어에 익숙해져간다.
그럴 수록 진의(일지도 모를)시의 의미를 깨닫고, 나의 경험과 소견으로 체화되어간다.

성경을 읽으면 성경특유의 성경투에 익숙해지듯,
‘시투’에 익숙해져갔다.

심지어 시인님이 직접 시를 필사한 ‘시인의 필사’섹션을 보고 있노라면 시인님이 어떤 마음으로 이 시를 쓰셨는지가 어렴춧하게 느껴진다. 필체는 그 사람의 마음을 유형화 한 것이니까.

시와 시인에게 익숙해지는 경험을 하면서 시와 친근해졌다.

시와 친근해지는데에 어찌 보면 동시와도 같이 쉬운 말들로 쉽게 써놓은 나태주 시인의 시가 큰 역할을 한다.
물론 그 속에 담긴 의미는 하루종일 자꾸만 곱씹어질 만큼 깊어서 시의 반전매력까지 느낄 수 있다.

시를 쉽고 따뜻하고 다정하게
아마도 현존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일 나태주 시인의 글로 필사까지 곁들여 입문하기에 최고의 책인듯 싶다.

덕분에 필사에 재미를 붙였다.
필사 챌린지도 크게 개최한다는 것 같은데
많이들 참여하시고 시와 친해진 다정하고 포근한 하루하루를 살아가시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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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라는 그림 - 찬란한 계절을 사랑하게 만드는 명화 속 여름 이야기
이원율 지음 / 빅피시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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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의 도서제공으로 자유롭게 읽은 책입니다)

몸이 절로 떨리던 겨울을 지나 무채색이었던 세상에 연두빛과 파스텔색들이 흩뿌려지기 시작하면 또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었음을, 곧 생명들이 완연해 지겠구나 기대하게 되면서도 점점 기온이 올라가면 마음 한쪽에 걱정이 스멀스멀 자라난다.
아 올여름은 얼마나 더울까.
쨍한 햇볕에 피부가 따끔거리고 집앞 편의점만 다녀와도 땀이 터지고 샤워해봤자 몸의 물기는 마르지않고 머리도 절대 마르지않는 그 여름이 나는 두렵다.
사람이 촌스러워 보일까봐 피부가 타는 것도 두렵다.
어디에서든 에어컨부터 찾는다.
그렇게 여름은 어느순간 나를 아무것도 하지않고 가둬두는 그런 괴롭고 싫은 계절이 되었다.

하지만 #여름이라는그림 (#이원율 씀 #빅피시 출판)을 보고(정확하게는 표지를 봤을 때 부터) 초등학교 시절의 여름이 떠올랐다. 정확하게는 여름방학. 40일 정도의 그 자유시간(물론 방학숙제도, 일기도 썼어야했지만)을 떠올려보면 나는 항상 계곡에 있었다. 경북 청송에 너른 마당이 있는 일층 주택에 살았던 큰이모 댁에 방학의 절반은 머물렀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눈꼽만 떼고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계곡으로 향했다. 나보다 어린 동생과 동생보다 더 어린 사촌동생 전용의 수영장을 만드느라 이리저리 돌을 주워 날라 물을 막고 바닥을 평평하게 고르고, 파라솔을 펴고 계곡에 가장 깊은 곳에 떡밥을 넣은 어망을 심어놓고 열심히 입으로 불어 빵빵하게만든 고무보트를 띄우고 몇번이고 다이빙을 했다.

수경을 끼고 잠수도 하고 수영도 맘껏 하고, 후라이팬에 꼬들꼬들하게 끓여먹는 물놀이 후 라면과 잡은 물고기로 만든 튀김과 매운탕까지. 그러다보면 하루가 다 저물었다.
그리고는 이모집 마당에서 드럼통에 불을 붙여 옥수수 같은 것을 태워?먹으며 지금은 보기힘든 쏟아지는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런 생활을 반복하고 학교에 가면 어깨와 코에서 허물이 벗겨질 정도로 새카맣게(시커멓게) 타서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그럼에도 참 행복했다. 타는 것은 아무문제가 되지않았고, 더위도 물속에 있으면 아무문제가 없었다.
그토록 여름은 찬란했고 생기 넘치는 계절이었던 것이다.

언제부터 나는 여름이되면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을까.
참 안타까우면서도 그래도 그때처럼 계곡으로 뛰어들 용기가 나지않는다. 바다도 마찬가지였다. 바다를 좋아하지만 여름바다는 수많은 인파로 뒤덮여 오롯이 바다를 감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바다는 겨울에 코랑 귀가 떨어지는 칼바람을 맞으며 봤었는데 그마저도 몇년동안 경험하질 못했다.
몇년간 참 많은 일이 있었구나, 지쳐있었구나 싶더라.

마침 이번에 부산을 다녀왔었다.
여름부산은 생애 거의 처음인 것 같았는데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과 시원한 바닷바람 쏟아지는 태양이 참 좋았다. 해변을 살포시 달려보고, 시원한 맥주로 바닷가 야경을 누렸다.

그렇게 카메라에, 두눈에 담았던 여름 날의 바다가 <여름이라는 바다>에 가득 담겨있었다.
그 시절 그때의 여름으로 날 데려가 주기도 하고, 복잡한 마음을 잔잔한 수평선을 보며 달래보기도 하고, 뜨거운 태양을 피해 초록빛 그늘아래에서 쉬어보기도 하고, 다른 계절보다 밝아서 온갖 색이 잘 보이는 일몰과 낮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버리는 여름 밤까지. 직접 눈으로 보고 혀과 피부로 맛보고 느꼈던 여름바람과 여름냄새가 가득했다.

바다와 하늘, 우거진 나무처럼 대표적인 색이 한덩어리로 뭉쳐져있고 그 대표색에서 살짝살짝씩 다른 색들을 촘촘히 세밀하게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화풍은 인상주의라고 생각한다.

일반화와 점묘화의 사이 어디즈음 같기도, 나에겐 고흐로 대표되는 층층이 두껍게 올려 거친질감이 드러나는 기법으로 그린 파도, 정확한 형태가 아닌 빛의 형상을 형용하기 어려운 무언가로 붙잡아 둔 모네 고유의 색감까지.

참 여름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며 감탄하며 넘겼다.
어린 날 보름여정의 첫날 그해여름 처음으로 계속을 보며 했던 감탄처럼. 그 감탄에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비겁하게 맘껏 즐기는 것을 외면하던 짜증으로 가득찬 내가 몸 밖으로 떨어져나갔다. 그렇게 완연한 여름이 내게 다가왔다.

슬픔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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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언어 - 사람을 품고 이끄는 리더의 언어
이광재 지음 / 시공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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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작년말부터 올해 봄까지 나라의 리더가 교체되는 상황이 국내와 지구 상 존재하는 나라 중 가장 상징적인 국가에서 동시에 벌어졌다. 한 곳에서는 변화하는 시대에서 반복되지 말아야할 아픔의 반복으로 벌어진 일이고, 다른 한쪽은 슬프지만 수명이라는 자연의 섭리때문이었다.

평소같으면 자극적인 이야기만 뉴스에서 보도되었을텐데, 평화롭지 않은 상황덕에 평화로움이 오히려 극적으로 받아들여졌기때문일까. 매일매일 뉴스에서는 국내와 국외의 정권교체 이야기가 교대로 흘러나왔다.

바티칸의 수장 교황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직위이며, 예전에는 황제보다 더 높은 권력으로 성전이라는 이름의 전쟁을 지휘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자랑했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여전히 교황의 모든 일정과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는 과정은 콘클라베는 전세계인구의 관심을 받으며, 뉴스와 유튜브에서는 성당 굴뚝을 클로즈업해서 실시간으로 송출한다.

교황은 무엇이 특별하길래 전세계가 주목하는 것일까?
14억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있어서?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신도 모두가 자신의 분야에서 자기만의 성과를 이루고 여러 곳에서 정보들을 듣고 취합하여 각자의 신념을 가질텐데 그냥 가톨릭을 믿는다고 다들 맹목적으로 교황을 섬길까? 우리가 살아온 또는 살고있는 사회는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있다.

그럼 무엇이, 14억의 신도들을, 나아가 종교가 다르지만 60억 이상의 지구인들이 교황에게 집중하게 만드는 것일까?
아마 전세계 지도자들 중 유일하게 자기 국가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 이라서 그런게 아닐까?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국가의 리더들은 국민들의 염원을 이루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모여 그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다.
그러니 국민들을 위해 행동해야할 의무가 있고(물론 각종 비리와 이해관계가 뒤얽혀 그 의미가 변색되는 경우가 많지만) 자기 국가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다른 국가와 전쟁을 하기도 하고 하는 것이겠지(물론 내부 결속의 수단으로 외부를 공격하는 그런 몹쓸 경우도 있다)

하지만 바티칸만은 자국의 이익을 위하지 않는다.
모두가 전쟁에서 이쪽이 잘못했냐 저쪽이 잘못했냐 전쟁의 타당성을 따질때, 바티칸만은 즉시 전쟁의 중단을 전세계에 요청하고 지구의 평화를 외쳤다.
자상하면서도 단호하게. 생의 거의 마지막 순간에서야 후보가 되어 선출되면 정말 마지막 순간까지 오직 신도들을 위해, 세상의 평화를 위해 착취를 당하는 파파papa의 모습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마음에 울림을 주기에 차고넘친다.

그렇다. 교황의 진심어린 울림이 담긴 그 말.
교황의 진심과 자티칸의 수뇌부의 자신을 갈아넣는 노력이 더해져 만들어진 그 말이 바로 바티칸의 권위의 핵심이다.

#교황의언어 (#이광재 엮음 #시공사 출판)은 유구한 역사동안 남아있는 교황의 말들을 담아 놓았다.
1부는 경제, 노동, 봉사, 사람, 사랑, 용기, 용서, 정의, 정치, 평화, 환경, 희망 키워드에 맞는 말들이 인용되어 담겨있고, 2부에서는 지금 생존한 사람들이 함께 숨쉬어온 우리 시대의 교황, 요한23세, 바오로6세, 요한 바오로1세와 2세, 베네딕토16세, 최근에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신 프란치스코 교황까지, 261대부터 266대 까지의 말씀이 담겨있다.
각 교황님의 이름에 담긴 뜻도 알아보는 즐거움이 있으니 꼭 챙겨보시라.

교황은 항상 자기가 가장 우선시에 두는 가치관이 있다.
교황도 한명의 인간이니 교황의 수만큼 가치관도 존재한다.
그래사 그 가치관을 잘 나타내는 이름을 정한다.
대표적으로 기존의 교황들과 달리 권위와 전통을 중시하지 않는 소탈한 동네 할아버지 같은 친근함으로 모두가 좋아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장 가난한 낮은자를 위해 청빈한 삶을 살았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떠올려 선택한 이름이다.

교황궁에서 기거하는 것도 반대하여 일반 신부님들의 숙소에서 지내셨고, 대부분의 치장과 허래허식을 생략했던, 소탈한 그분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처럼 <교황의 언어>에는 주옥같지만 읽고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담겨있다.
그럼에도 특별하게 나가와 가슴에 박힌다.
아마 그 말을 정성스럽게 뱉어낸 사람이 너무나 진심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리더뿐만 아니라 우리모두, 진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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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아프리카누스
아민 말루프 지음, 이원희 옮김 / 교양인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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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그라나다, 모로코, 사하라, 카이로, 메카,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로마까지. 무슬림에서 기독교, 해적에게 납치, 교황의 양자, 그 메디치가의 일원.
대체 이것은 몇 명의 이야기일까?
적어도 대여섯명은 필요하지 않을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저 많은 것들이 오직 단 한사람 안에 모두 담겨있었다. #레오아프리카누스 (#아민말루프 지음 #교양인 @ 출판)의 주인공 ‘알라산 이븐 무함마드 알와잔‘ 이자 책의
제목인 ’레오 아프리카누스‘로 널리 알려진 그가 바로 주인공이다.

물론 그의 40년의 역사를 추적하는 과정이다 보니 내용이 방대한 것은 이해가 된다. 높은 학식으로 외교관이자 사업가, 그리고 여행가로 살아왔기에 많은 지역을 둘러본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그럼에도 교통이 원활하지 않던 15세기에 저렇게 여행을 다니다니 대단한 이력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도 문자 그대로 피튀기는 대학살이 벌어지는 전쟁이 벌어지는 종교에서 마저도 다양성을 가져버리니, 특히나 가톨릭 왕국들이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축출했던 700년 넘게 지속 된 레콩키스타의 시대에서 저런 상황이 가능하다니, 현기증이 일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와 천주교도 화합하기 쉽지않은데 저 두종교 사이에 한 인물이 서 있었다니.
심지어 라마단까지 지켜내던 신실한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이 말이다.

나였으면 혼란스러운 마음과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경계인의 삶을 사는 현실에 몸과 마음도 지쳤을 법 한데, 레오 아프리카누스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인이었기에 어디로든 마음먹은대로 미련없이 나아갈 수 있었고, 주변인이었기에 어느쪽으로도 편향되지 않은 유연한 사고는 전쟁으로 인한 유혈이 낭자하던 그 시절을, 언어와 지식 등 수준높은 학술적 성향의 것들로 흥분하지 않고 자신의 손도 피로 물들이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어디에도 ‘우리’로 인식되지 않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최근에 우연히 몇권 더 읽었었다. 그들의 반응은 크게 두가지였다. 어느 한군데에서 인연이 만들어지면 그 인연을 지키기위해 낯선 곳에 터를 잡아 험난한 세월을 한 곳에서 버텨내거나, 자기집에 있는 화분을 부탁하고 여행을 떠났다가 한번 씩 돌아오고 또 더 멀리 여행을 가는 부메랑처럼 훌훌 떠나서 더 넓은 세상을 마주하던가.

레오 아프리카누스는 후자를 선택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나는 전자를 선택했을 것 같다.
어디에든 ‘적’을 두고 내 ‘집’이라고 할만한 곳을 만들어서 소속감으로 마음을 달래려 했을 것 같은데 주인공은 계속해서 여행을 다녔고 종교전쟁의 한가운데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왜? 내가 생각하기에는 주인공은 종교와 환경을 이미 초월하여 자기자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어떤 모습이건, 어디에 속해있던, 누구를 믿던간에 그 모든 것이 진실된 나를 이루는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니 너도, 또다른 너도 모두 맞다며 허허 거리던 황희정승처럼 어떤 모습의 나라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아프리카누스로 불리지만 아프리카 사람도, 유럽 사람도, 아랍 사람도 아닌 나는 길의 아들이며, 내 나라는 카라반이고, 내 인생은 종착지를 알 수 없는 항해였다라는 말로 자기 인생을 정의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의 저자 아민 말루프도 주인공 레오 아프리카누스처럼 여러것들의 사이에 끼여있던 존재였다.
저자는 레바논이 고향이나, 내전 때문에 조국을 떠나 프랑스인이 된 이력을 가지고있다.
마찬가지로 자기 정체성에 대하여 끊임없이 고민한 주변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내린 정체성에 대한 답이 바로 래오 아프리카누스의 답일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주변인의 고민거리는 어떻게 하면 주변인이 되지않을까 같은, 주변인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위한 방법을 찾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와 주인공은, 주변인이라는 자체를 하나의 특성으로 한, 여러 모습이 담긴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으로 모든 경계선 밖에 있는 스스로를 위한 영역을 구축했다. 자기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믿음, 사랑이 없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자기포용과 확신, 사랑과 상실, 무슬림과 기독교인의 삶을 책 한권으로 모두 체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한 인물을 따라 스스로를 정의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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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 없는 마음 - 양장
김지우 지음 / 푸른숲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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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 입니다)

어릴적부터 걸을 수 없어 휠체어 위에서만 생활해야 한다먄 어떨까? 이 비슷한 질문을 어디에선가 들어봤을 수 는 있지만 아마 진심으로 어떨지 생각해본 사람은 정말 드물 것이다.
나도 그렇고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답이라고 내놓은 것은 ‘많이 불편하겠지’일테다.

하지만 #의심없는마음 (#김지우 #구르님 씀 #푸른숲 출판)을 읽으니 완전히 생각해보지도 못한 것이었다. 단순히 불편함이 문제가 아니라 비장애인으로 태어나 너무나 당연하게 너무 어릴적이라 잘 기억나지고 않는 처음을 가질 권리를 박탈당한다. 엄마와 슈퍼나 마트에 가서 원하는 것을 직접 고르는 행위, 심부름이라는 이름으로 혼자 물건 구매하기, 옷이나 신발등을 직접 입어보며 취향에 맞는 옷 고르기 같은 것들 말이다.

이들은 직접보고 선택하는 것을 포기한다.
길과 입구의 단차부터, 계단, 사람들의 시선, 붐비는 주말이나 저녁같은 시간에 휠체어의 당당한 부피감에 ‘불편’을 느끼며 몸이 그런데 ‘용케’ 나와서 돌아다닌다는 안일하고도 불공평한 차별과 같은 것들로 번거로움보다는 편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에 집중하게
되고, 스스로는 자신감이 떨어지고, 보호자는 과보호 의식을 갖게되는 악순환에 빠진다.

하지만 <의심 없는 마음>의 저자 김지우(a.k.a.구르님)은 일본 여행, 아빠와 단둘의 홍콩여행 등을 거치며 한국에서라면 시도조차 잘 하지 않았을 홀로 휠체어로 시장이나 마트, 버스타기와 같은 것들을 해보게 된다.
우리가 기억나지도 않을 때 했던, ‘첫’번째 무언가를 비로소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을 때, 포기했던 것을 ‘이게 되네?’라는 살짝 허망하기도 한 ‘처음’의 순간을 맞이하며 저자는 비로소 세상을 관망하는 것이 아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주체적인 존재가 된다.

이날을 계기로 보호자 없이 지구반대편까지 날아가보자는 용기가 생겼고, 학교에서 진행한 UN인턴십 교류프로그램에 지원해 덜컥(기꺼이) 선정되어버린다.
가는김에 여행을 하겠다며 비장애인 연인과 파리를 먼저 자유여행으로 경험하는데 역시나 우리나라와 차원이 다른(negative) 행정처리속도를 자랑하는 파리답게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 어시스트를 미리 신청해놓아도(신청마저 어렵다)직원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지하철을 이용해도 열차와 역사의 단차(저자가 있는 곳이 높이나 더 낮은 경우는 몸의 고통을 감당해도 방법이 없다)도 저자와 연인을 지치게 한다.

이 에피소드에서 연인사이의 동등하고 매력적인 관계와, 일방적인 보살핌을 줘야하는 caregiver로의 위치의 딜레마가 빠진다. 분명 비장애인 연인이 혼자왔더라면 더많은 곳을 편하게 볼 수 있을 테고 나와 이런 고생을 하지않았을거라는 미안함과 도움을 어디까지 쿨하게 받아들이고 줘야하는지 약속되지 않은데에서 오는 당황함 같은 감정들이 오는 것이다.

나라면 당연히 내가 한번이라도 더 움직이고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보호하고 대신 화를(당사자보다 더 크게)낼 것이 분명하다.
내가 사랑하는 이가 그런 일을 겪는 것은 내가 겪는 것 보다 더 클테니. 하지만 대화는 꼭 필요한 것 같다.
탁 터놓고 어디까지 받아들이고 주고 받을 것인지, 어느선까지가 서로에게 감정과 이상적이고 이성적인 포지션인지에 대해.

그런데 이와중에 충격인 것은 당연히 나를 ‘비장애인’쪽으로만 가정하는 것이었다. 이런 무의식적 인식들이 더 장애인들을 더 떳떳하게 살아가는 것을 힘들게 하지않나싶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나쁜 기억들 만을 안고가지않는다.
그 와중 이쁜 거리와 맛난 빵들을 즐겼고, 자전거를 내팽게치면서까지 200kg이 넘는 전동휠체어를 높은 역사까지 열성적으로 올려주는 ‘무슈’들을 기억하며 따스함과 긍정의 마인드를 가지고 스위스(스위스는 장애인의 천국이었다), 마음의 안식을 누린 여행지, 또 다른 집이 된 호주여행 까지 나아간다. 여동생과 다시 방문할 정도로. 그리고 저자는 이 글을 미국의 어딘가에서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얻은 자신감으로 오히려 ‘내가 못하는 것이 있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당당히 세상의 도움과 호의를 받아들인다.

막연함이 아닌 경험으로 찾은 하지 못하는 일엔 과감히 도움을 빌릴 용기로 그렇게, 기꺼이 자신을 세상으로 내던지는 그녀가 얼마나 멋진 사람이 될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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