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안 수업 - 어떻게 가치 있는 것을 알아보는가
윤광준 지음 / 지와인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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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서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지금 당장 내 주위의 현실을 한가지 색으로 나타낸다면 어떤 색인가라고 물었을 때 아름다운 색으로 대답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회색이나 검은색을 대답하는 사람도 제법 있을 것이고,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사람마다 느끼는 환경에 대한 인식은 제각각이고 그와중에서도 주로 비관적으로 느끼는 사람들이 제법있으며, 주위를 둘러볼 생각도 필요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다행히 나는 내 주위를 적어도 계절감이 나타나는 색이나 그때의 나의 심정에 따라 고를 수 있는 정도는 되더라.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쾌적한 환경에서 사는가? 배가 불렀나?속 시원하게 이야기 할 수 있다. 전혀 아니다.
나보다 많이 벌고 좋은 환경에 사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
그럼 무슨 차이일까?
그 차이를 #심미안수업 (#윤광준 씀 #지와인 출판)에서 찾았다. 바로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나도 주변이 보이지 않는, 시선이 가려진 경주마 같은 시기가 있었다. 지금만 참으면 나중이 괜찮을거라는 믿음으로 현재를 희생했다. 하지만 참은 것으로 보답받은 내일은 또다른 참음을 요구했다. 그렇게 해서는 끝이 없었다.
눈가리개를 떼어낼 필요가 있었다. 속도를 조금 늦추더라도 주변을 돌아보고 내 눈에 귀에 입에 이쁘고 좋고 맛좋은 좋은 것들을 삶에 들여놓아야 했다.

“일상이 아름다우면 결핍을 느끼지 않는다.”
“예술이야말로 불행을 견디게 해주는 가장 좋은 보호막이다.”
작가의 말 중 이 두마디 만으로도 이 책의 존재이유와 볼 가치는 충분했다. 아니, 차고넘쳤다.

하지만 예술에 대한 낯섦과 진입장벽은 엄연히 존재한다.
아무래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일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심미안’을 가지는 것도, 발전시키는 것도 모두 실제로 가서 경험하는 것이 필수조건이다.

기꺼이 전시회로, 미술관으로, 공연장으로 가야한다.
아무리 유명하다는 작품도 사진으로만 본다면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 비슷한 화풍의 그림이 화가가 헷갈릴 수도 있다.
그렇게 되다보면 재미가 없어지고 나와의 맞지 않는 것으로 결론지어진다.

하지만 정말 스스로의 삶에 아름다운 것을, 내가 보기에 아름답고 좋은 것을 넣고 결핍없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계속 시도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몇 번의 실패에도 도전해봐야하는 것이다. 물론 그 몇 번의 실패에도 계속 시도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심미안 수업>에서는 실패를 줄일 수 있는 몇가지 방법들을 충고해주기도 한다. 가장 쉬운 도전인 전시회 관람에서는 왠만하면 무료보다는 유료전시를(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적어도 이름은 들어봤을 유명한 예술가의 작품이 전시되어있어 흥미를 높이기고 좋고, 긍정적 반응에도 유리하다), 함께 갈 사람을 잘 고르고(혼자보다 예술을 사랑하고 전시회 경험이 많으며 취향을 강요하기 보다는 꼭 봐야할 작품을 추천해주거나 감상에 도움이 될 일화를 알고있는 사람이면 무척이나 좋다), 가능한 여유롭게 시간을 할애하여 찬찬히 구경해보고, 전시회에 대해 미리 제공된 정보를 챙겨보고, 마음에 드는 작품은 사진을 찍어보는 등과 같은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그럼에도 감상에는 정해진 방법이 없다며 어떤 것이든 맘껏 시도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실제로 작품들은 감상하다보면 예술품이 걸려있고 진열되어 있는 장소(위치)가 굉장히 중요하고 음악감상도 공간이 무척 중요하기에 자연스래 건축으로 취향이 자연스래 확장되는 경험을 누리기도 한다.

물론 모든 분야를 좋아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좋고 나쁜 것을 구별하고 차이점을 알아보는 눈을 갖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예전에는 무용해 보이던 것들이 유용한 것으로 보이는(이렇게 디자인까지 확장된다)실로 행복으로 가득찬 삶으로의 선순환으로 심미안은 우리를 이끈다.

그 순환은 우리 삶이 무채색의 아무것도 없는 단조로운 것으로 남아있게 두지를 않는다. 끊임없이 나에게 아름다운 것으로 채워지는 마법을 부린다.

그렇게 아름다움과 행복이라는 마법이 가득찬 판타지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모두가 마법같은 인생을 살기를 바라며.

인생에 마법같은 사건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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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음악 - 양차 대전과 냉전, 그리고 할리우드
존 마우체리 지음, 이석호 옮김 / 에포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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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20세기. 지난한 인류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어쩌면 가장 다양하고 찬란하고 새로운 무언가들로 넘쳐난 인류사를 통틀어 황금기가 되었을지도모를 20세기는 전쟁으로 인해, 독재자들에 의해 유럽을 힙쓸었던 흑사병과도 같은 처참한 양의 피를 흘렸고, 이데올로기라는 칼로 다양한 방향으로 자라나던 가지들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 처럼 잘려나갔다.

1,2차 세계대전과 쉽게 아물지 않은 전쟁의 상처가 냉전이란 이름의 고름을 터트리던 시대가 어느정도 지나 인류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기라고 말해도 거짓이 아닌 시대로 오면서 또다시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지구촌 전세계의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구닥다리로, 주로 듣는 사람들이 노령층이라는 이유로 주류가 되지 못했던 ‘클래식’도 입맛에 맞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었고, 젊은층의 청자들과 함께 나이들어갈 스타 아티스트들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주류로, 새로운 문화현상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고있다.

그런 클래식의 부흥에도 불구하고, 클래식 애호가들의 플레이리스트는 여전히 아픔 이전의 시대인 20세기 초에 머물러있다.
매일 샐 수 조차없을만큼 쏟아지는 현대 대중음악만큼은 아니더라도 클래식 작곡과라는 학문이 여전히 남아있고, 분명히 매년 작곡상을 수상하는 작곡가가 존재함에도 애호가 대부분의 플레이리스트에는 추가되지 않는다.
심지어 두번의 세계대전, 냉전 중에도 수많은 음악가들이 음악가수보다 훨씬 많은 곡들을 만들어놓았을 것이 너무나 당연한대도 이 곡들도 우리의 플레이리스트에 물론,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예전부터 여전히)당대의 최고 오케스트라의 셋업리스트에도 오르지 않는다.

대체 왜 클래식이라는 장르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까?

#전쟁과음악 (#존마우체리 씀 #에포크 출판)이 그 이유를 담고있다.
히틀러, 스탈린, 무솔리니 인류 최악의 독재자들이 펼친 정책들의 설명으로 부터 시작하는 이 책에서는 그 당시에도 음악이 가진 힘이 상당했음을 인정한다. 히틀러의 치세에 있는 독일인들은 대부분 글읽기가 가능했지만 소비에트 연방에는 까막눈이 많았다. 차이가 분명한 두 부류의 일반인들에게 공통으로 가슴을 울리는 공통어로 음악이 선택되었고, 그 당시의 음악은 ‘클래식’장르가 대세였다.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구한 장르였으니 정통성을 내세우기에도 좋았고, 자기 민족의 우수성을 선전하기에도 좋았다. 하지만 클래식에는 이름만큼이나 애매한 기준이 있었다. ‘구시대적’ ‘신세대적’을 구분하는 것이 너무나 애매했다라는 것이다. 클래식과 아방가르드, 상대적이었다. 아방가르드도 누군가에는 전형적일 수 있는 것이고 미술의 그것처럼 기조가 확실히 나눠지지 않았다. 그래서 유대인의 이름이 섞여있는 것은 죄다 퇴폐로 낙인찍었고, 그럴 수 없을 만큼 유명하고 좋은 것은 유대인의 흔적을 철저히 지우고 외면했다.

이미 흑인들의 음악이 비흑인들의 심금을 울려 인류통합의 경지에(음악에서만)이른 재즈가 미국에서 흥했던터라 민족의 단결성을 유지해야 했던 독재자는 당연히 모든 것을 배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선별된 클래식, 체제를 광고하기위해 쓰여진 곡들은 시대를 지나 아픈손가락이 되어 ‘비나치화’라는 이름으로 금지되고, 상처를 들어내 상처가 있음을 알리는 것보다 외면하고 감추는 것이 훨씬 쉬운일이라 1930년 이후의 20세기 음악들은 필요에 의해 잊혀져 버렸다.

이 책은 그런 클래식의 공백을 채우는 클래식으로 영화음악을 제안한다.
그 시조로 오페라의 위대한 작곡가 바그너로 삼으며, 오페라에서 주인공을 위한 모티프를 만들듯, 영화에서도 주인공을 위한 테마곡이 만들어진다는 유사성은 물론, 할리우드를 위한 음악을 쓴 1세대 작곡가들은 히틀러가 불법 음악의 생산자로 위험인물 명단에 올린 ‘퇴폐 음악가들’이라는 역사적 이음선까지 제시한다. 이 1세대 작곡가들에게 사사받은 영화음악가들도 마땅히 클래식작곡가이나 전문가(학계, 비평가)로 인해 비하되며 일반인들이 둘은 연관짓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한다.
큰 인기를 얻음에도 클래식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영화음악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클래식으로도, 영화음악으로도 인정받지 못한 잊힌 작곡가와 작품이 다시 연주되어 마침내 우리 품으로 돌아오게 하여 끊긴 음악의 역사를 이어붙일 수 있다.

내가 알고있던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면 적어도 인지하고 시도해보는 것은 클래식 애호가라면 기꺼이 한번은 도전해봐야 하는 일이지 않나싶다.

우리 안에 있는 탐험가정신을 깨울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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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원전대로 읽는 세계문학
프란츠 카프카 지음, 김영귀 옮김 / 새움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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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그레고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한 마리 거대한 해충으로 변해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마 내가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글 시작이 아닌가 싶다. 기출 지문으로 고등학교 때 많이 봤던 글이었는데 돌이켜보니 해충으로 변했다는 것만 알았지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도 못했고 생각해보려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저 작품이 의미하는 것, 문제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애만 썼을 뿐이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 처음으로 오롯이 마주한 #프란츠카프카 의 #변신 (#새움 출판)은 얇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읽기가 쉽지않았다. 함의적인 문장도 사용되지 않고 절대적 분량도 적었는데 문장 하나하나를 읽어나는 것이 과장을 조금 더해 괴로웠다. 그러면서도 끝을 향해 다가갈 때 글 속 인물들의 갈등은 커져감에도 오히려 글을 읽는 내 마음은 편안해뎌갔다. 책을 덮고 나서야 어느정도 내 마음이 그랬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레고어가 겪고있는 상황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레고어는 부모님과 어린 여동생을 넓은 집에서 부족함없이 보살피기 위해 기꺼이 새벽부터 일어나 하루종일 외부로 돌아다녀야 하는 출장 영업사원을 수년동안 계속 해왔다.
집에서 돈을 벌고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사업을 말아먹은 아버지가 아니라 그레고어였다.

그렇게 가족을 위해 헌신하던 그레고어가 어느날 잠에서 깨어나니 해충으로 변해있었다는 설정보다, 벌레가 되었음에도 출근해야한다며 몸을 일으키기 위해 아둥바둥 거리는 모습과 결국 달라진 그를 보았을 때 가족들의 반응이 참 가슴아팠다.

벌레가 된 자신을 보고 당황스러워하고 두려워해야하는 것이 정상인데 아무렇지않게 일어나 출근하려고 하는 그레고어에서 가족을 부양해야한다는 짐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달았고, 유일하게 날 어떻게 볼까 걱정하는 것도 가족 뿐이었다.

그레고어만 바라보며 돈을 벌 수 없을거라 여겼던 나머지 세가족이 각자의 방식으로 돈을 벌어오기 시작하면서, 그레고어의 소외감은 점점 더 커져갔다. 유일하게 해충이 된 그레고어를 살뜰히 챙기던 여동생도 점점 오빠의 케어에 시큰둥해져간다.

그러다 결국 그레고어는 없는 무언가로 인식되고, 그의 방은 당장 버릴 수도 없고 쓸 수도 없는 무언가들을 쳐박아두는 곳으로 바뀌고 그레고어가 바닥과 벽 천장을 기어다니는 것을 알면서도 방치된 방의 먼지를 뒤집어 쓰고, 아버지가 그에게 던진 사과가 박혀있는 등은 썩어가는 모습에 화가났다.

그럼에도 그레고어는 끝까지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여동생의 바이올린 소리를 사랑했다. 결국 그레고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지못하는 ‘저것’이 되어버렸고, 잠과 같은 마지막 숨을 뱉어냈지만, 그레고어가 살아있을 때의 문장과 그레고어가 죽은 뒤 문장의 서술자가 여전히 그레고어인 것 같은 착각이 들만큼 큰 차이가 없다. 이미 그레고어는 인간의 형상, 해충의 형상 무엇이든 상관없는 해탈의 경지에 올라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죽어서야 비로소 세 가족이 편안한 시간을 보내며 희망찬 미래를 그려나가는 모습을 그레고어는 어떤 심정으로 보았을까.

왜인지 모르겠으나 젊은 그레고어를 보면서 퇴직 후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말하던 아버지 세대들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평생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제2의 인생을 기대해야 할텐데 그렇지 않다.
집에서 밥 세끼 다먹으면 삼식이 라는 우스갯 소리도 있던데, 그 희생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결국 그 희생의 무게는 점점 바래져간다. 그것이 희생의 덕을 본 사람들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 아니겠나 싶기도 하고. 그레고어만큼의 큰 짐을 떠안고 있지는 않지만 K장남의 입장에서 생각이 많아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비록 해충이 되어버렸지만 그렇게 되어서야 비로소 그레고어는 모든 짐에서 벗어나 본능에 따라 여기저기 기어다니며 하고싶은대로 했고 그때서야 스스로를 조망했다라는 사실도 씁슬했다.

이렇게 다들 오롯이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기는 힘든 세상이다.
책임지는 이도, 책임져지는 이도 살기퍽퍽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필요없는 해충같은 존재는 없다.
모두가 스스로의 존재 이유이며, 동시에 누군가의 이유이기도 하다.

독일어의 특징인 수많은 쉼표를 최대한 살리면서 원문의 뉘앙스를 최대한 이해할 수 있게 번역한 새움 출판사 버전으로 나의 첫 <변신>을 경험했다는 것이 마음에 든다.

카프카의 복잡한 심정이, 알다가도 모를 인간군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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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힐리스트로 사는 법 - 삶이 무겁고 힘든 사람에게 니체의 니힐리즘이 전하는 지혜
문성훈 지음 / 이소노미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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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신은 죽었다.”
니체의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아 모든 것을 신의 뜻이라고 믿었던 것에서 벗어나자는 말이구나. 라며 막연하게 종교가 곧 진리였던 시절의 종말을 고하는 말이라고 이해했었다.

하지만 철학책을 몇권 읽고 나서는 저 말이 대변하는 니힐리즘(허무주의)가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할 그 어떤 삶의 목적이나 가치도 존재하지 않고, 이 세계 역시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이 존재하며, 그저 무의미한 생성, 변화, 소멸만이 반복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힘든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방법이 바로 이 세상에 의미를 하나 둘씩 부여하며 나에게 소중한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인데 저렇게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리면 삶을 살아가기가 너무 재미없고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두발 붙이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입장에서 공감하기 힘들었다(아니 하기 싫었다)

하지만 #니힐리스트로사는법 (#문성훈 씀 #이소노미아 출판)에서는 니힐리즘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모든 것이 의미없다는 것이 아니라, ‘신’은 종교적 신이 아니고 이 세상의 다수들이 모여 옳다고 만들어놓은 ‘절대적으로 보이는’것들을 의미한다며, 그러니 세상의 기준에 맞추지 말고 스스로가 납득하고 소중히 여길만한 것을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허무주의, 니힐리즘이라 말한다.

그래서 니힐리스트란, 세상만사가 다 허무하다고 보고 삶을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허무함을 강하게 긍정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이를 자기 창조의 기회로 삼는 사람이다.
자기 삶의 주인이며, 세상만사의 가치를 스스로 정하는 고귀한 사람인 것이다.

철학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왜?’라는 끝없는 물음이었다. 소크라테스도 하루종일 답보다는 ‘질문’을 하는데에 시간을 뷰냈다. 단 하나의 답을 구하기 위해서. 그렇게 철학도 이 세상에 ‘원래 그랬어’라는 이유로 막연하게 진리라 여겨졌던 것들에 왜?라는 의문을 가지면서 점점 발전해 나갔지 않은가.

그렇게 따지면 니체뿐만 아니라 철학의 다양한 학자와 이론들이 이렇게 스스로의 가치를 만들어내며 세상을 재창조해내는 니힐리즘에 준하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니힐리스트로 사는 법>은 그래서 니체뿐만 아니라 데카르트, 마르크스, 사르트르 같은 서양철학자 뿐만 아니라 공자, 장자, 노자 등 동양의 철학자들도 가져와서 실제 우리 삶을 스스로 규정하는 것들에 대해, 니힐리스트로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만한 방법들을 알려준다.

특히나 문학 작품들의 예를 보여주면서 ‘허무’가 삶의 종말이 아니라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여러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우리가 예술에 열광하는 이유도 아마 우리의 삶이 담겨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은 그것을 창조한 예술가의 삶에 대한 철학이 담겨져있다.
어떤 사건이 인생에서 벌어지면 그것을 자기만의 생각과 기준으로 받아들이며 번역한다. 그리고 그 번역한 것을 예술로 만들어낸다. 그 예술은 당연하게도 기존과 다르다.
그럼에도 수십년 수백년을 살아남아 현대인들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공감받는 것이 먼저가 아니다.
나만의 기준으로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세상에 두발을 딱 붙이고 걸어나갈 수 있는 힘이 되도록 세상을 나만의 방식으로 소화해내는 것.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인생을 예술가처럼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존재의 미학이자 니힐리스트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어느정도 세상을 인식하고 기억나는 순간부터 계속해서 무언가를 배우고 경쟁해온 우리다.
나도 덧셈, 뺄셈을 배우면서 엄마에게 꿀밤을 맞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상대적으로 빠른 암산 속도를 가지기 되었지만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다 널위해서 그런거다라고 하지만 과연 그런지 확실치 않은 것들이 제법 떠오른다.

이 책은 그런 것들을 명확하게 구분할 기준을 가질 수 있게 한다. 그로인해 내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배우고 깨닫는데에만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눈 뜬 모든 순간을 내 기준으로 나에게 유의미한 것으로 꽉 채우게 해주는 가이드라인 같은 책이다.

앞으로의 인생 예술처럼 멋지게(죽이게)살고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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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향한 구애
이나영 지음 / 자상한시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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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을 느낀다.
그 외로움은 보통 삶이 버겁거나 힘겨울때 우리를 더욱 잠식한다. 그래서 우린 그 외로움을 달래줄 누군가를 찾는다.
그렇게 한참 연락처 목록을 살펴보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터놓을 사람이 없다라는 것을 느끼고는 더욱 더 지독한 외로움을 느낀다. 대부분이 자신의 이야기라고 고개를 끄덕끄덕 할 수도 있는 이야기겠지만, 나는 감히 이것은 잘못되었노라고 말하고싶다. 외로움을 느꼈을 때 찾아야할 대상이 잘 못되었다.
내가 느끼는 그 외로움, 고독함을 위로해 줄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의외로 자기 스스로를 강인한 사람이라 여기는 사람들일수록 약한모습, 상대방에게 싫은소리를 보여주고 들려주는게 싫어(민폐라고 생각한다)오히려 스스로를 더 외면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강할수록 더 약하고 잘못된 경우가 많다.

나를 가장 잘 이해하고 가장 사랑하며, 격려를 받을 때 내가 가장 위안이 되는 존재는 바로 ‘나’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할 때 겪어봤듯이, 위로해줄 사람의 마인드에 여유가 있어야 다른 사람의 힘듦이 보이고, 진심으로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래서 위로와 격려의 순간에 ‘나 자신’이 적절하게 나를 달래줄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인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잘 보듬어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를향한구애 (#이나영 씀 #자상한시간 출판)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나를 아껴주고 오롯이 나로 있게 해줄 가장 든든한 나의 파트너 ‘나’를 응원하는 일상 속 몇가지 방법들을 소개해준다.

혼자 자취하는 스스로에게 직접 만든 끼니를 제공하고, 취미를 가지고, 글을 쓰는 혼자 무언가를 해보는 것부터, 가족과의 여행같은 어색한 시간도 기꺼이 보내보고, 사는게 바빠서라는 이유로 스스로 잃어버렸던 소소한 감정들을 손에 쥐어 놓지 말라는, 세상에서 다양한 자극을 받아들이라 한다.

그리고 작가 스스로가 위의 경험들을 스스로에게 제공하며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자, 혼자서도 잘 살기위해 했던 것들이 다른 사람과의 사랑까지 불러들였음을 고백하기까지, 총 4장의 챕터가 언제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농후하게 흘러간다.

사이사이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 속 좋은 문장들이 함께 곁들여져있어서 나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 두번, 세번 곱씹게 하고, 페이지를 넘기려는 손가락을 잠시 누르고 곰곰히 생각에 잠기게 한다. 한권의 책을 읽을 뿐인데 수십권의 책을 읽는 것 같은 귀한 경험을 선사해 주는 책이다.

인생에 파도가 찾아왔다고 하면 보통 그 파도는 나를 넘어뜨리고 좌절케하는 고난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나를 향한 구애>에서의 파도는 그렇게 나를 흔들리게 하는 것으로 끝나는게 아닌, 스스로가 멋지게 올라타 나를 더 빠르게 가슴후련하게 이끌어주는, 내가 삶이라는 망망대해에서 올라타 스스로 단단히 서 있을 수 있게 발판이 되어주는 무언가로 그려지는 것 같아 참 인상적이었다.

나를 사랑하자.
정말 많이 들어온 말이다. 좋은 말인 것도 알고 맞는 말인 것도 안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기 가장 어려운 문장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인색하게 구는 것이 미덕인 것처럼 평생을 입력받고 그렇게 살아왔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백점을 주는 것은 나르시시스트, 자만심이 가득한 사람등으로 여겨지는 세상이다.
그렇다고 남들이 나에게 백점을 주는 세상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남을 까내리는 것도 우리가 평생토록 받아온 입력값 중 하나이다.

결국 내가 스스로 백점을 주지 못한다면 아무도 나에게 100점을 주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꼭 백점을 맞아야 성공인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스스로를 누구보다 아껴줘야할 필요가 있다는 뜻일테다.

이 책은 간단하게 보이지만 그렇게나 어려워보였던 나를 사랑하는 방법들을 다정한 글로 하나하나 보여주고 있다.
꼭 저자가 보여주는 방법이 아니어도 괜찮다.
저자가 책 본문과 함께 옮겨놓은 다양한 책 속의 문장들을 보며 스스로가 느껴지는대로 해도 물론 성공이다.

어떤 방법이든 나를 사랑하는 방법일 것이다.
기꺼이 ‘나’라는 시험지에 동그라미만 그려낼 멋진 색연필을 손에 쥐길, 그렇게 백점짜리 인생을 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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