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케의 로댕 - 개정판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안상원 옮김 / 미술문화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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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서로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이 만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릴케의로댕 (#라이너마리아릴케 씀 #미술문화 출판)으로 얼추 짐작할 수 있다.
무명의 작가가 위대한 조각가의 전기를 집필하기 위해 파리로 향한다. #라이너마리아릴케 는 20대, #오귀스트로댕 이 60대였다. 전기를 집필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과 오랜시간 같은 공간이 존재하며 관찰해야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다.
위대한 조각가는 어린 작가의 시선이 불편하고 신경에 거슬릴 수도 있었을텐데 묵묵히 자신의 일에 몰두한다.

하긴 지금 남겨져있는 로댕의 작품들을 보면 멀리서 형태가 보이자마자 압도되며 가까이에서 접하면 오랜시간 그 앞에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걸 만들어내는데 얼마나 많은 심력을 소모했을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런 웅장한 작품들을 만들어내는데에 모든 신경이 집중되었을테니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수도있겠다. 오히려 릴케에게 좋은 기회가 되지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댕의 자서전이 그의 커리어에 도움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한단계 더 나아갈 기회말이다.

나는 예술가도 아니고 예술을 잘 알지도 못하지만, 무언가를 창조해낸다는 것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글로, 조각으로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오기는 하지만 주제를 생각해 내고 재료를 고르고 큰 틀을 잡고 세세한 표현을 만들고 다듬고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야한다는 공통점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적어도 로댕의 작품활동에서의 태도를 배우기만 해도 충분한 수업이지 않을까? 로댕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완성도와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느냐를 기준으로 온 정성을 다해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다. 그러다보니 작품을 완성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고 그러다보니 손놀림 하나하나에 더 완벽을 추구할 수 밖에 없다. 그만큼 완전히 ‘진심’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물리적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당연히 일찍 작업을 시작한다.
62세였던 로댕이 여전히 청년처럼 펄떡거리는 왕성한 행동력을 보여주는 것 만으로도 릴케는 스스로의 태도에 대해 돌이켜보고 깨달을 것이 많지않았겠나. 정말 놀라운 기회였다고, 마냥 부럽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로댕은 릴케의 시선에서 자신의 작업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하고있는 작업이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새로운 시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느 누구도 그에게 예술에 대해 논하기 쉽지않고, 스스로 수용하기도 쉽지 않았을텐데 여전히 열려있는 귀와 생각은 누구라도 본 받을만 하다.

그렇게 릴케는 로댕의 작품들을, 작품의 탄생을 목도하며 자신의 글도 탄생시켰다. 두가지의 예술이 함께 탄생한다. 하나의 탄생을 축하하듯 태어나는 또 다른 예술.
그 두 예술을 사진으로, 글로 따라가다 보면 마음이 벅찬다.

누군가의 추종자가 된다는 것은 판타지같은 일이다.
그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나, 그의 전기를 쓰고, 전기를 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사람에 대한 강의까지 진행하며 존경할만한, 배울만한 숨겨진 것들을 꾸준히 세상에 내보이는 것은 좋아한다라는 말로는 부족한 마음을 상대방에 대해 가지고 있어야 한다.

누군가를 이토록 열심히 공부하고 추종해 본 적이 있는가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어릴적 ‘모두까기인형’이었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않으면 바로 지적을 했다. 그것이 ‘쿨’한 것인줄 알았다. 나이가 들며 인생에서 실패가 차곡차곡 쌓이자 저절로 겸손해졌다. 지적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 반대로 어떤 일에도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무덤덤했다. ‘유하다’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것이 좋은지는 모르겠다. 누군가를,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해서 따라하거나, 닮고싶다거나, 열심히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이제는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해보는 시도를 해봐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좋아하는 마음으로 시작해야 최선을 다하는 열정을 보일 수 있지 않을까. 로댕이 누구보다 먼저, 누구보다 오래 작품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말이다.

로댕의 예술이 릴케의 예술을 키웠다.
예술에는 한사람의 인생이 담겨있다. 우리의 인생도 그러므로 예술이다. 예술이 예술을 키웠던 이야기가 빼곡히 적혀있는 이 책을 보고 우리도 우리의 예술인 인생을 키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로댕의 손이 작품이라는 생명을 창조했듯, 우리도 멋진 인생을 만들어 나갈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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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펠
이마무라 마사히로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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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공포 영화를 보면 말그대로 ‘모골이 송연해지는’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삼두쪽이 오소소소 아래에서 위로 역방향으로 무언가가 쓸어올리는 느낌? 그 불쾌한 느낌에 중독되어 공포스러운 작품들이 여름마다 극장가를 찾아오는 것이겠지?

이런 경험을 하게 하는 공포, 오컬트, 스릴러 장르는 영화 장르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책으로도 ‘장르소설’이라는 범주로 여름에 주로 출판된다. 어릴적 아무 생각없이 이모부 책장에 꽂혀있던 ‘링’시리즈를 보았다가 제법 꿈자리가 뒤숭숭한 경험을 한 이후로 애써 외면한 장르였지만 #디스펠 (#이마무라마사히로 씀 #내친구의서재 출판)은 기차터널이 박혀있는 새빨간 표지부터 마음을 사로잡았다. 디스펠, 주문의 효과를 무효화하는 것을 뜻하는 말인데 이것이 왜 오컬트 소설의 제목을 차지했을까도 무척이나 궁금했다.

<디스펠>은 오컬트 소설이라고 단정짓기에는 미스터리, 수사극의 성향이 강하게 담겨있다. 작가도 오컬트와 미스터리를 적절히 하나의 책에 담으려고 부던히 애썼다고 한다.
믿을 수 없는 일, 오직 개인의 경험만이 증거의 전부인 오컬트와 논리로 명쾌하게 설명되어야 하는 미스터리 추리.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싶었다. 서로 진짜 봤다, 증거를 보여달라 같은 말을 반복하며 평행선을, 어쩌면 점점 더 멀어져가는 선을 달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탐정’을 이용했다.
매력적인 탐정이 나와 자신의 논리를 펼치면 다소 논리력이 부독하더라도 탐정 캐릭터의 매력에 빠져 몰입하고, 그 결과 탐정의 말에 ‘설득’되어버리는, 그렇게 사건의 해결이 주는 카타르시스뿐만 아니라 매력적인 탐정 캐릭터에 열렬한 팬이 되어버리는 ‘덕후’의 길로 들게하는 탐정물.
심지어 <디스펠>에서 그 탐정은 무려 세명이다.
그것도 초등학교 6학년. 학급 내 남자 무리중 하나로 기억되는 스스로를 특별한 한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그 수단인 오컬트에 심취한 유스케, 자신의 영웅이었던 사촌 언니의 죽음의 비밀을 파헤치려하는 영원한 반장, 오컬트를 믿지않는 논리적인 브레인 사쓰키, 그 둘 사이에서 중재를 하며 둘의 의견에서 허점을 찾는 존재 자체가 미스터리인 미나.
이 셋을 따라가다 보면 나의 6학년 시절이 생각나 자기들끼리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늦은밤 외출금지, 스마트폰 없음, 학업외 헛짓?금지, 카페 및 식당 이용 곤란 등)초딩 탐정들임에도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다. 청소년들을 위해 만들었지만 오히려 어른들이 좋아했다던데 왜 그런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사쓰키의 사촌언니의 죽음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언니의 노트북에 남겨져있던 7대 불가사의를 하나하나 파헤쳐나가며 그 안에 남긴 단서를 찾아가면서 오컬트파인 유스케와 논리파 사쓰키의 대립이 글의 긴장감을 높인다. 어느쪽 하나에도 치우치지 않고 오컬트와 논리가 팽팽하게 맞부딪힌다.

그러면서도 유스케가 겪는 오컬트적인 요소들이 책을 읽으면서, 그것도 심지어 주인공이 초딩인 책인데 다섯번 정도 온몸에 소름 오소소소 돋게했다. 주로 밤에 책을 읽고 읽는 동안 비도 제법 왔어서 어우 내가 읽은 책 중 가장 소름돋았던(말 그대로)책이었다.

오컬트가 너무 강하게 앞으로 나와있었으면 현실성이 떨어져 몰입이 힘들었을테고, 논리가 너무 강했다면 오컬트는 그냥 굳이 왜 넣었는지 알 수 없는, 글 전체가 아쉬워졌을 것이다.
오히려 미스터리에서 논리가 설명해 주지 못하는 약간의 빈틈을 오컬트가 채워줌으로써 사건의 수레바퀴가 일정한 속도로 굴러나가는 것이 결국 모든 것을 의심하게 하면서 추리에 결국 두손 두발 다 들게 만든다.

추리를 맞추는 것도 짜릿한 독서로 남지만, 하다하다 지쳐 끝까지 추리를 해내지 못한 책이 ‘띵작’이라는 이미지로 강하게 남는 법이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디스펠>은 가히 띵작이다.
그도 그럴 것이 7대 불가사의를 담고있어서 불가사의 하나하나 마다 추리할 것이 넘쳐났고, 6개의 불가사의로 마지막 불가사의를 추리해야했고, 소름 돋게 하는 오컬트적 현상이 적재적소에 배치되면서 마지막 남은 힘도 앗아버린다.
그럼에도 마지막은👍🏻 5장은 읽는 내내 모골이 송연했다.
어른이 되어 더이상 작위적인 공포물에 심장이 반응하지 않는가? 그럼 <디스펠>을 보라. 내 심장 아직 짱짱하구나를 느끼며 우리를 다시한번 괜히 무서워서 이불 밖으로 발을 못내밀던 그 시절의 나로 되돌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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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빛소굴 세계문학전집 8
제인 오스틴 지음, 김지선 옮김 / 빛소굴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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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300년의 시간동안 꾸준하게 사랑받는 이야기는 몹시 귀하다.
특히나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는 이야기일수록 그런 경우는 더 귀한 것 같다.

아무래도 사랑과 결혼의 모습이 세상이 변하는 속도못지않게 바뀌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나 300년 전이면 결혼은 사랑보다는 지참금으로 결정되는 하나의 거래였고, 그에 맞춰 여성들은 피아노, 뜨개질, 바느질, 댄스, 그림, 심지어 걸음걸이까지 배우며 좋은 집에 시집갈 준비하는 것을 당연스럽게 여기던 때이다.

#오만과편견 (#제인오스틴 씀 #빛소굴 출판)이 300년의 딱 그 시절의 사랑, 결혼이야기이다.
수많은 번역본이 오랜 세월만큼 공개되어 있지만, 빛소굴 출판사의 버전을 손에 쥔 이유는 나의 첫 <오만과 편견> 경험과 관련이 있다. 나는 <오만과 편견>을 책이 아닌 영화로(만) 겪었다. 미모가 절정에 달했던 키이라 나이틀리가 엘리자베스 베넷을 맡아 나의 스무살에 국내개봉을 했었더랬다.(세월 무엇)

혼자라면 당연히 스무살 남성의 패기로(?) 보지 않았을 영화이지만 교수님이 주말에 조원들과 영화를 보자며 예약해 주셨어서 토요일 아침부터 졸린 눈을 겨우 뜨고 영화관으로 갔었다.
키이라 나이틀리를 그때 처음봐서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한 값어치가 있는 시간이었지만 뭐랄까 좀 더 성숙하게 사랑을 바라보고 동경하게된(연애하고 싶다는 소리)계기가 되어주었다.
글을 쓰며 찾아보니 관람객이 88만명이네 좀 더 많은 사람이 봤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지금까지도 영화를 추천하는 사람이 많은데... 각설하고, 빛소굴의 <오만과 편견>은 내가 스물살 때 봤던 그 영화의 한장면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고전을 이제 겨우 몇권 읽어본 책린이가 나의 개인적 서사와 맞물리며 심지어 아름다운 표지를 뽐내고 있는 이 책을 외면 할 수 있었겠는가. 여성작가들의 작품들을 보면서 여성 특유의 세밀하고 신비스러운 묘사와 문체에 매료되어 있던터라 오히려 좋았다. 확실히 영화에서보다 세밀한 내용들이 담겨있어서 많은 생각들을 하면서 페이지를 넘겼다.

영국의 한적한 시골지역에 돈많고 잘생긴 미혼남성이 등장하면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온 동네 미혼 여성들은 돈많은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이 일생의 목표인지라 심지어 잘생기고 활발하며 다정다감하기까지한 빙리씨에 혈안이 된다.

딸만 다섯을 자랑하는 딸부자 베넷씨의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외모로 유명했던 어머니를 닮아 미모로 소문이 자자했던 딸 중 가장 외모가 아름다웠던 맞이 제인과 빙리는 서로를 마음에 들어하고, 둘째인 엘리자베스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빙리와 그의 친척들의 장단점을 평가하면서도 진심으로 언니의 사랑이, 결혼이 성사되길 응원한다.
빙리에게는 함께 온 친구, 다아시는 수려한 외모와 재력으로 큰 관심을 얻었으나 특유의 ‘오만’함으로 그 인기가 순식간에 식어버린다.

그러다 엘리자베스는 다아시가 춤상대로 그냥 그렇다고 자신을 평가하는 것을 듣고 부정적 인식이 ‘편견’으로 자리잡는다.

누가 알았을까. ‘오만’의 다아시와 ‘편견’의 엘리자베스가 해피엔딩을 맞이할 것이라고.

그 시절 깨어있든, 깨어있지않든 여성으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에 마주하는 방법으로 결국 사랑과 결혼을 선택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시점에서는 아쉽고 이해가 되지 않은 선택일 수도 있지만 그 시절에는 여성인 스스로를 안타까워 할 수 있는 시선을 가진 것 만으로도(그런 교육을 받을 수 있고 그런 그녀를 응원해주는 가정에서 태어났다는것)대단한 것이었고, 그런 자신을 이해해주는 완벽한 배우자를 만나는 것은 그야말로 판타지이다.
아마 그 시절 독자들에겐 더이상의 도파민은 없지 않았을까.

이 글을 쓴 제인 오스틴은 남매들과 부모에게 글쓰는 것을 응원받는 행운아였으나, 그럼에도 누가오면 글을 숨기기 용이하도록 작은 종이에 삐그덕 거리는 문소리덕에 기민하게 글을 숨기기 좋은 접대실에서 글을 썼다고 한다.
긴 시간동안 이 책이 널리 사랑받는 것은 작가의 유려한 글솜씨도 있겠지만 사랑, 결혼, 차별없이 원하는 것을 노력으로 손에 넣는다는 것의 의미를 독자들의 시대와 연계해 생각해보는 재미때문이지 않을까싶다.

이처럼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오는 것들에는 시대를 아우를 수 있는 보편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 보편적인 것을 보편적이지 않게 특별한 무언가로 세공해내는 능력과 그것을 알아보는 눈.
모두가 멋지다.
영화를 다시한번 보고싶어졌다.그러면 또 이 책이 보고싶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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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이지 않은 세상에서 - 소설가를 꿈꾸는 어느 작가의 고백
강주원 지음 / 디페랑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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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의 도서제공으로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쓰다.’ 생각을 글로 옮기는 행위 또는 어떤 용도로 사용한다, 이 두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
#내가쓰이지않은세상에서 (#강주원 씀 #디페랑스 출판)제목에 담긴 ‘쓰이다’는 후자의 뜻을 담고 있다. 소설가를 꿈꾸었으나 아직 소설을 발표하지 못한 작가 스스로를 담아낸 제목이 감정이입되어 슬펐지만 정작 책을 열고 덮기까지 슬픔은 없었다.

정식으로 소설쓰는 법을 배운 적은 없고, 독립서점을 운영하며 글쓰기를 가르치고, 커피를 내렸던, 그러면서도 꾸준히 글쓰기를 해왔던 저자의 인생이 담백하게(가끔 아제개그로 슴슴함을 조절한다.)산뜻하게 담겨있다.

소설가가 아직 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푸념보다는 글쓰기에 관한, 글에 대한, 책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꾸준히 글을 쓴다면 누구든 작가라는 말을 하던 작가의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강주원 작가는 거기에 하나를 더 첨가한다.
글을 쓰되, 그 글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평가받는 것. 그것이 작가라고 돈을 받고 받지 않고는 문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스타그램이라는 공개된 공간에 글을 적어 올리기는 하지만 평가는 받지 않는다. 조용한 댓글창이 못내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동시에 안도감도 드는 것은 아쉬운 평가를 받고싶은 것을 피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글을 쓸까?라는 생각이 이 책을 읽는 동안 계속 들었다. 널리 보여줄 것도, 평가받을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내가 쓰이지 않은 세상에서>를 보면 저자는 하고픈 말이 많은 사람이다. 글쓰기에 대한 본인의 생각, 글쓰기 방법론, 자신의 북카페와 글쓰기 수업에 참여해준 사람들에게 보내는 무뚝뚝한 러브레터 등 다양한 이야기가 간결하면서도 리듬감 있게 담겨있다. 읽기 쉬운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고, 생각이 많으면 글을 써야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것에 비해 나는 생각이 그렇게 많지도 않다.
ISFP로, 좋은게 좋은거라며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은 하나 깊지 않고 스스로도 생각을 했던가?싶은 정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기록을 남기겠다는 생각으로, 노트에 적자니 손이 아플 것 같고, 고치기도 힘들고, 컴퓨터에 저장하자니 쳐박혀있는 것 같아 괜히 아쉽고 그렇게 시작한 글쓰기였고 별 생각없이 읽은 뒤 감상을 대충 적어두는 정도로 시작한 나의 글쓰기는 여전히 퀄리티는 ‘대충’이나 어느정도 읽은 책과 쓴 글의 양이 많아지고, 독서모임에서 찐 고수들의 읽고난 뒤 사유가 담긴 글들을 보니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듯 책을 읽고나서 떠오르는 질문이 나름 쓸모있어졌다?라는 생각이 들어 감사히(?)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쓰여지고 있다.

여전히 왜 나는 글을 쓰는지는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는 것인지 등단 작가가 되겠다 같은 거창한 목표가 없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쨌든 글을 계속 쓰고 있는 나 스스로는 썩 마음에 든다.

일반적인 예술과 글의 차이점을 저자가 말한 것이 있다.
예술은 피카소가 모든 아이들은 예술가이다 라고 말했을만큼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지만, 글쓰기는 어린이들의 글쓰기보다 당연히 어른의 글쓰기가 더 낫다. ‘인위적’이라는 요소가 가미되기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하던데 나도 공감했다. 자연스럽게 나의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서툰 나에게 인위적인(적절히 노출 수위를 조절 할 수 있는)글쓰기의 특성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반년정도 꾸준히 글을 써오면서 변하지 않고 꾸준히 해오고 있는 것을 칭찬받는 경우들이 가끔 있다. 그런 분들이 나보다 더 오래 글을 꾸준히 쓰고 거기에다가 책에 대해 더한 열정과 진심을 보여주는 분들이라 황송하고 낯뜨겁지만, 이 책은 소설가가 아직 되지못한 저자가 그럼에도 글쓰기를 꾸준히 포기하지않고 써내려 가, 문장이 페이지가 되고, 페이지가 한 권이 책이 된 진정한 변치않은 시간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고 느꼈다.
그만두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아이들에게 너무 일찍부터 적당함과 타협하지 마라는 조언을 하는 저자를 보며 작가가 가져야할 소양들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소설가가 되지 못했다고 했지만 이 책이 나에게는 포기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으며, 하나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한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이었다. 저자는 이미 자신의 소설을 완성한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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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워진 이름들 사이드미러
김준녕 지음 / 텍스티(TXTY)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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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지지말고, 명징하게 깨닫고 생각하며 살아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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