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발행판 - 유주현 장편소설 - 소설 대원군 전5권 (각P335)
신원문화사 / 1993년 2월
평점 :


소설 대원군

                                                                                                            유주현

   

  [ 5 ]

 

  왕비 민씨는 어렵게 얻었던 왕자를 잃고부터 생각이 많아지고 성정도 표독스러워졌다. 정나인을 시켜 상감이 침전에 들 때 병풍 뒤에 몸을 숨겼다가 뒷문으로 빠져나가게 하여 상감의 투기를 일으켜 놓았다. 며칠이 지난 밤 민씨 일당과 조성하, 영하 형제와 이유원이 모여 면암 최익현으로 하여금 상소를 하게 할 모의를 꾸민다.

 

  최익현의 대원군을 헐뜯는 상소가 가납되어 그는 동부승지에서 호조참판으로 승진하였다. 대원군 편에서도 최익현의 상소를 물리치라는 상소를 좌의정 강노와 우의정 한계원의 연서로 올리는 한편, 사간원과 사헌부를 비롯하여 성균관 유생들을 모두 동원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정국은 소연하기 시작했다. 민비의 교활한 사주를 받은 상감은 일단 최익현을 이용하여 임금의 친재로 정권을 잡을 계략을 진행시킨다. 이 순간의 주도권은 여자 민비가 쥐고 있었으며 그 동안 여러 수단을 동원하여 요직에 심복들을 심어 놓고 있었다. 그녀는 최익현의 또 한번의 상소를 계획한다.

 

  왕은 아직 행사해 보지도 못한 자신의 친재권이 또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가고 있는 광경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이제 두 진영의 대치는 첨예화했다. 민비는 민승호를 통하여 그녀의 간계를 실행해 나가고 대원군은 천하장안을 시켜 그들 일당의 동정을 파악한 다음 상감을 만나러 대궐로 향한다. 그러나 이미 지시를 받은 수문장이 문을 열지 않아 대원군의 입궐을 저지한다. 그날 왕은 만기를 천재한다는 윤지를 내렸다. 대원군의 십년 세도가 하루아침에 허물어졌다.

 

  상심한 대원군은 선영에 가서 성묘하고 양주 직곡 산장에서 아들인 상감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열흘째가 되어도 임금은 나타나지 않았고 아들 재선이 와서 전국에 암행어사가 밀파되었다는 소식을 알려준다. 민비 일파는 대원군 주변 인물들의 죄과를 찾아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상지가 인솔하는 천하장안이 서울로 파견되었다.

 

  그 이틀 후 경복궁에 화재가 발생하여 중전의 침전이 소실되었다 한다. 민비는 이를 운현궁의 소행으로 엮으려하지만 증거가 없다. 그러던 중 왕자를 출산했다. 왕자는 약질이란다. 중전은 지밀에까지 무당을 불러들이고 내탕금을 물 쓰듯 뿌리고 있단다.

 

  동래 온천장의 요정에 일본인들이 모였다. 일본은 대원군이 갑자기 실각을 하자 조선 내정의 급변을 예견하여 일종의 첩보대를 밀파한 것이다. 그들의 예상대로 대원군의 수하였던 경상도 관찰사 김세호, 동래부사 정현덕, 부산훈도 안동준이 파직 유배되고 대일정책에도 변화가 생겼다.

 

  민승호에게 전달된 폭탄이 터져 그는 암살되었다. 운현궁을 지목하고 범인 색출에 나섰지만 단서조차 잡을 길이 없었다. 중전은 민태호의 아들 영익을 민승호의 양자로 보내 그의 뒤를 잇게 했다. 민규호가 이조판서 겸 도통사로 세도재상으로 등장했다. 민규호가 할 일은 대원군의 남은 세력들을 철저하게 뿌리 뽑고 왕자를 왕세자로 책립하여 민비의 지위를 확고하게 굳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왕자는 돌이 다 되어가도 걸음마는 고사하고 일어서지도 못했을 뿐 더러 온 몸에 수두가 생겨 부스럼투성이로 병치레가 심했다.

 

  중전은 왕자의 수복을 빈다고 허구한 날 궁중에서 치성과 굿과 무꾸리에 여념이 없었다. 전국 명산대찰에 산천 기도를 드리고 공양을 하게 했다. 중전이 어린 왕자를 위해 물 쓰듯 쓴 돈이 실로 막대했다. 왕실의 금고격인 내수사는 석 달이 못가서 바닥이 났다. 선혜청의 국고도 끌어다 써서 바닥이 나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돈을 받고 벼슬을 팔기 시작했다. 벼슬을 산 사람들은 부임하자마자 돈을 긁어모았다. 이래저래 죽어나는 것은 백성뿐이었다.

 

  봄이 되자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연일 수 많은 상소문이 날아들었다. 심상치가 않았다. 민비는 눈썹 하나 까딱 안 했고 왕은 모르는 채 딴전을 피웠다. 민심을 교란하는 무리들은 모조리 잡아 극형에 처하라는 분부다. 민씨 일족의 태도는 강경일변도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조정의 원로대신들이 반발하고 나섰. 드디어 대원군이 1년 반 만에 운현궁으로 돌아왔다.

 

  일본 군함 운양호가 강화도에 포격을 하고 영종도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하고 물러갔다. 그러나 조정은 쉬쉬하고 유야무야로 넘어갔다. 바다 건너에서 그런 태풍이 일고 있거나 말거나 이 나라 조정에서는 도통 알 바가 아니었다. 오로지 정적제거의 악랄한 싸움에 몰두할 뿐이다.

 

  영의정 이최응의 집에 화약이 터졌다. 며칠 후 화적의 장물을 취급했다는 장가를 잡아들이고 그가 대원군의 측근인 신철균의 문객이라는 것을 알고는 신철균을 잡아서 문초하였다. 그러나 그는 운현궁과의 관련을 부인하다가 결국 죽임을 당했. 대원군은 신철균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내 주었다.

 

  어느 날 이상지는 맹인 점쟁이가 대원군의 죽음을 기원하고 그의 화상에 화살을 날리는 장면을 목격하고 대원군의 허락을 받고 그를 운현궁으로 납치해 온다. 와서 보니 그는 이하전이 죽게 된 화근을 제공한 바로 그 인물이었다. 대원군은 그를 국문하지 않고 풀어주었지만 그는 운현궁에서 풀려나 대궐로 가서 민비의 손에 참살 당했다.

 

  1876년 고종이 등극한 지 10년이 되는 병자년, 일본의 전권대신 구로다는 6척의 군함과 800여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강화도 앞 바다로 침범해 왔다. 그들은 걸핏하면 대포를 쏘고 총질을 하면서 행패를 부리고 다녔다. 대원군에게 의견을 듣고자 하는 임금을 말리는 사람은 항상 민비였다. 이번에도 최익현은 상소문을 올려 왕과 조정대신들을 호되게 후려쳤다. 결국 그는 체포되어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민심도 조정을 욕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22일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원군의 오랜 쇄국정책이 굴욕적인 조건으로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나라 형편도 세상 물정도 많이 변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닫는 민씨 척족 세력은 계속 거세어 가기만 했다. 이제 세도재상은 민태호고 알짜 권력은 민영익이 쥐고 있다는 것이다. 대원군의 아들 이재선을 옹립하려는 역모가 발각된 일이 있었다.

 

  1882년 임오년. 정월에 관례, 2월에 책빈례로 왕궁에서는 연일연야 잔치가 벌어졌다. 민비는 더욱 더 기승이다. 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전국의 명산과 대찰이 불공과 치성으로 떠들썩하다. 금강산에는 작년에 이어 금년에도 일만 이천 봉우리마다 돈 일천 냥, 쌀 한 섬, 소머리 하나, 베 한필씩이 공양되었다. 나라의 재정이야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닌 중전 민씨의 소행이었다. 큰 감투는 중간 감투를, 간 감투는 작은 감투를 시켜 갈퀴질을 했으며, 말직들은 백성들을 쥐어짰다.

 

  군인들의 급료가 자그마치 13개월이나 밀렸다. 더구나 두 종류의 군대가 생겨, 젊고 건장한 초록 군복의 별기군들은 일본의 신식 총에다 신식 훈련을 받으며 급료도 꼬박꼬박 거르지 않고 주었다. 그러나 나이 많은 구식 군인들은 언제 쫓겨날지도 모르는 판국이었다. 그러다가 6월 초닷샛날, 한 달 치 급료로 받은 쌀은 모래가 반인데다 썩은 쌀에 정량의 반도 되지 않았다. 군인들은 분노했고 항의 하고 다툼이 일어났다.

 

  선혜청 당상 민겸호는 사건의 전말을 듣고 주모자를 체포하여 엄형에 처하라 불호령이다. 주모자들이 체포되어 갔고, 그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모인 군중의 수는 겉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운현궁의 이상지가 이들을 선동하고 나섰다. 무기를 탈취한 군인들의 눈에는 살기가 번뜩였다. 무위대장 이경하가 달아나고 일본공사관이 포위되었지만 공사 하나부사를 포함한 일행들은 무사히 빠져나가 본국 나가사끼로 탈출했다.

 

  정국은 걷잡을 수 없이 뒤챘다. 누구도 이 난국을 타개할 자신이 없었다. 임금은 운현궁에 특사를 보냈다. 그러나 궁궐은 이미 군인들이 쳐들어가 있었다. 군인들은 민비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민겸호를 살해하고 하나부사와 협상을 벌였던 김보현도 살해했다. 왕은 전권을 대원군에게 넘겼다. 모두 민비를 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민비는 그 난리 속에 무감 홍재희에 업혀 화개동 윤태준의 집으로 가서 숨어 있다가 여주로 도망가고 있었다. 도중에 촌 아낙네들이 자기를 험담하는 얘기를 듣고는 몇 달 후 대궐로 다시 들어갔을 때 그 마을을 집 한 채 남기지 않고 불태워 버리게 했다는 뒷 이야기도 있었다.

 

  대원군이 나선다고 조건없이 쉽게 수습될 성질의 난리가 아니었다. 대원군은 하는 수 없이 왕비가 죽었다고 공표한다. 흥인군이 난군들에 의해 참살을 당했다. 거드럭거리던 민씨 일족의 집은 거개가 평지풍파가 됐다. 국상이 발표되고 투옥되었던 선비들과 유배된 유생들이 방면되고 대원군을 옹호하다 귀양살이를 간 사람들이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때 청군이 입성한다. 주진영선사 김윤식과 천진에 머물고 있던 어윤중이 청국에 원병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중전 민씨의 소행임이 틀림없다. 내요(內擾)에 외병(外兵)을 끌어들이다니, 큰일날 짓이다. 대원군은 청군의 힘을 빌려 일군을 막아 보겠다고 생각하지만 청군의 장수들은 대원군을 유인, 납치하여 텐진으로 가서 그를 감금하다시피 한다. 그 틈을 타서 일본은 제물포조약을 맺었다. 민비가 환궁했다. 그러나 하는 짓은 변함이 없이 똑 같다. 대궐 안에서 공공연히 굿판이 벌어진다.

 

  개화당이 혁명을 일으켜 수구당의 거두 조영하, 민태호, 민영목, 윤태준, 이조연, 한규직 등을 살해하여 정권을 잡고 대원군의 환국을 요청했지만 청군의 반격으로 일본군이 패퇴하면서 개화당 정부는 3일만에 그 막을 내렸다. 홍영식, 박영교 등이 청군에게 목숨을 잃었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두 번의 변란을 겪은 왕과 왕비는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왕비는 더 불안한 마음이었고 아라사 군대를 불러들여 일본과 청을 견제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아라사 공사 웨베르의 부인과 독일인 묄렌도르프와 친하게 지내면서 인아배청(引俄背淸) 정책을 채택했다. 이에 청나라는 대원군을 환국시켜 민비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한다.

 

  대원군은 3년 만에 환국을 했다. 운현궁을 지키고 있던 이상지가 독살 당했다. 대원군은 운현궁의 대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민씨 일족 또한 대원군을 철저하게 고립시키는데 혈안이 되었다. 김옥균은 일본에서 조선으로 다시 돌아 올 기회를 엿보고 민비는 남자 구실을 못하는 왕세자로 인해 시름이 깊다. 운현궁에 자객이 들어 폭발물을 터뜨린다. 대원군의 수하들이 잡혀가서 호된 국문을 받는다. 대원군은 추선의 사망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93년 발행판 - 유주현 장편소설 - 소설 대원군 전5권 (각P335)
신원문화사 / 1993년 2월
평점 :


[제5권] 민씨 일족의 정권 탈취부터 청국으로 납치되었던 대원군의 환국까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권력을 지향하는 권모술수와 무능, 부패한 권력에 의한 국란과 국가 존망의 위기의 세월을 그리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93년 발행판 - 유주현 장편소설 - 소설 대원군 전5권 (각P335)
신원문화사 / 1993년 2월
평점 :


소설 대원군

                                                                                                            유주현

 [ 4 ]

 

  천주교인들은 서양인 선교사들을 이용하여 서양의 힘을 빌려 아라사인들을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종삼, 홍봉주, 김면호가 건의서를 가지고 대원군을 찾아간다. 건의문에서 모욕감을 느끼기도 하였지만 대원군은 베르뉘 주교를 만나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남종삼은 개인적인 일로 시일을 늦추게 되고 베르뉘는 대원군을 만날 의사가 없다고 한다. 대원군은 화가 났다.

 

  창덕궁 희정당에서 연 이틀째 중신회의가 열렸다. 중신들은 모두 공맹을 숭상하는 유교에 젖어 있었다. 김병학과 이경재는 주문모 신부의 사건과 황사영의 백서 사건을 거론하며 사학의 금압을 주장한다. 드디어 대원군은 서교의 금압에 관한 교령 반포를 지시한다. 또다시 여린 중신회의에서 조대비의 교명이 낭독되었다. 사교도는 엄중 치죄하라.

 

  베르뉘와 홍봉주의 가족들이 체포되었다. 불과 이삼일 사이에 세명의 서양인 신부와 한명의 주교가 투옥되고 300명이 넘는 내국인 신도들이 체포되었다. 도주 중이던 남종삼도 체포되었다. 베르뉘 주교의 종복인 이선이가 유다로 둔갑을 해서 포졸들을 이끌고 신도 체포에 혈안이 되었다. 수시 도처에서 부작용도 있었다. 사원(私怨)을 가지고 분풀이를 하거나 무고하는 비행도 적잖았고 금품을 뜯어내어 사복을 채우는 무리들도 많았다. 하여간 서교의 금압령은 전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망나니들은 새남터에서 신도들의 목을 자르고 세검정에서 칼을 씻었다. 서울의 수구문 밖은 천주교도들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그 썩는 냄새가 인근 사람들의 코를 막게 했다.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모조리 참살 당했다. 평양에서도 대구에서도 광주에서도 전주에서도 그랬다. 세계사에 일찍이 없었던 대량학살이었다. 3년 동안 죽은 자가 8천명이 넘었다. 그러나 이런 북새통에도 용케 살아남은 외국인 신부들이 있었고 그들은 이 나라 조정에 대한 무서운 보복책을 꾀한다.

 

  욕심이 과해진 초월은 자기가 대원군의 총애를 받는 기생인양 소문을 내어 재물을 챙기고는 운현궁의 청지기 이만복과 정을 통하면서 그를 이용하여 추선을 제거하고 대원군을 자기 집으로 모실 궁리를 한다. 천주교인이라 모함을 받은 추선의 집에서는 불상들만 발견되었고, 불륜을 저지른다는 추선의 집 담을 넘은 괴한을 잡아 문초하니 그는 이만복의 부탁으로 돈을 받고 그 짓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만복은 그 날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했었다.

 

  상감은 열다섯 살이 되어 있었다. 철종의 대상(大祥)도 무사히 마치고 조대비를 위시한 궁중에선 왕비책립에 대한 만반의 준비가 진행되었다. 전국에 금혼령이 내렸고 승정원에 들어온 처자단자는 46, 초간택에서 우선 열 명의 처녀를 뽑고재간택에서는 6명이 밀려났다. 삼간택에서 드디어 왕비가 탄생했다. 이미 고인이 된 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친정 아저씨 민치록의 딸이 왕비로 간택되었다. 대원군이 백낙시절 김병학과 사돈되기로 약조했었고 삼간택에까지 남아 형식적이나마 민씨 처녀와 겨루게 되었지만 외척세도를 생각하여 김가네 딸을 배제시켰다.

 

  상감의 가롓날 대원군은 요사스러운 꿈을 꾼다. 노랑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은 처녀색시가 도끼로 용마루를 찍고 있었다. 구경꾼이 모였고 아무도 말리지 않았으며 누구도 그의 명령도 듣지 않았다. 대원군을 그 자리에 쓰러져 도와 달라고 소리치다 잠에서 깨었다. 딸의 가례를 보기 위해 부부인 이씨는 몰래 궁궐로 숨어들었다가 그동안 상감의 총애를 받았다는 이귀인을 보게 된다.

 

  개를 잡아먹는 이상한 풍조가 떠돌고 있었다. 개고기를 먹는 풍습이 전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반 상민들은 삼복 때 복놀이 복고기로 개를 먹었다. 그런데 최근엔 반상을 가리지 않고 천주교 신자들이 집에서 기르던 개를 때려잡았다. 천주교가 박해를 받으면서 서로 비밀연락을 위해 밤중에 몰래 내왕하다가 개가 짖어대는 바람에 화를 입었다는 얘기며 반대로 포졸의 접근을 알고 미리 피신해서 무사했던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틈에 천주교 신자들은 개를 없애야 하고 귀한 손님에게는 개를 잡아 대접하는 것으로 풍습이 되어 버렸다.

 

  이래저래 세월은 어수선하고 대원군에 대한 세평은 잘한다, 잘못한다가 갈려지기 시작했다. 교동 나합의 집에서 김씨 일문이 회집했다는 보고를 받은 대원군은 나합을 불러 회의내용을 문초하지만 나합은 거리낌 없이 당당했다. 대원군은 부인 민씨의 휴양을 빌미로 김흥근의 별장을 뺏다시피 한다.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던 미국 상선 셔먼호가 습격을 받아 불타고 선원들이 타 죽었다. 상감은 가례 후에도 이귀인의 처소에만 들른다는 소문이다. 이귀인이 태기가 있는 것 같아 진맥을 하니 태기가 아니라 체기란다. 하지만 본인은 임신이라며 두 달이 넘었단다.

 

  1867918, 경기도 남양만에 정체를알 수 없는 이양선(異樣船) 3척이 나타났다. 이들은 불국의 선박으로 천주교 금압에 대한 보복으로 조선에 침공해 온 것이라고 한다. 한강수로가 막히자 식량과 생활필수품이 귀하여지고 민심이 흉흉해졌다. 악질 관헌들은 다시 강화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수사명령을 빙자해서 금품을 우려내고 개인끼리의 이해싸움에 끼어들어 악행을 마구 저질렀다. 경복궁 중건 공사도 중단 상태에 빠지고 인부들은 주변의 색주가로 몰려들어 난잡하게 놀아댔다. 관비지만 여순경의 직능을 가지고 있는 다모를 동원하여 매음녀들을 단속하게 한다.

 

  일단 물러났던 불국의 함대가 재침해 왔다. 군함은 7척이었다. 이런 사태를 미리 예견했던 대원군은 조신회의를 소집하고 임전태세를 갖추도록 명령한다. 불란서 군대가 강화도에 상륙했다. 음력 98일 새벽 불란서군의 선공으로 드디어 전투가 벌어졌다. 강화성 남문은 어처구니없게 함락되었다. 강화성 안의 장령전을 비롯하여 모든 관아가 적에게 점거 당하였고 80문의 대포와 6천여 정의 총기를 비롯한 군기(軍器)를 빼앗겼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금은보화와 대량의 전곡은 물론 사고와 관아 소장의 귀중도서도 적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불군의 총사령관 로즈는 선교사의 살해를 교사한 당사자를 즉시 엄중 처벌하고 전권대사를 임명하여 조약을 체결토록 하라는 협박장을 보내왔다. 대원군은 이를 묵살하고 오로지 전투력 강화에 여념이 없었다.

 

  강화산성을 점거하고 살인, 방화, 약탈, 겁탈을 자행하던 불란서군의 횡포에 백성들은 단결해 갔다. 문수산성과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한 그들은 강화섬의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패주해 갔다. 이른바 병인양요는 끝났다. 그러나 불란서군의 두 차례에 걸친 강화도 침범은 쇄국정책을 더욱 굳히게 만들었다.

 

  경복궁 공사가 다시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만 화재가 발생해서 전국에서 고르고 골라 쌓아둔 그 좋은 목재들이 숫검정이 되어 버렸다. 대원군은 원납전 제도를 강화하고 더 많은 노역 동원을 지시한다. 재정이 모자라면 원납전 일만 냥을 내는 상민에게 벼슬도 주고, 세율도 높이고, 서울의 사대문을 드나드는 백성에게 문세(門稅)를 징수하게 한다. 새로이 당백전을 주조하여 엽전 백배로 쓰게 했다. 대원군의 이러한 무리한 공역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받게 되자 그의 독재를 탄핵하는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했다. 유학의 거성 이항로와 그의 수제자 최익현이 소문()을 보내 온다.

 

  드디어 신궁의 중요한 전각들이 낙성이 되었다. 대원군은 이날 이후 심한 피로를 느껴 의욕이 없다. 부인 민씨의 권유로 강화로 추선을 만나러 가는 길에 들른 주막에서 민심을 듣는다. 추선과 몇일을 보내고 강화를 떠날 무렵 창덕궁 낙선재 별실에서는 대원군의 중형인 흥인군 이최응과 민승호, 조성하, 영하 형제가 자리를 함께하고 대원군을 성토하고 있었다. 대원군이 조정과 상의도 없이 독단으로 효종이 북벌에 대한 군자금으로 비원 주합루 마루 밑에 묻어 놓은 수천 근의 은괴를 파내어 경복궁 조영비로 전용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 사실을 상감과 중전, 조대비에게 각각 알리게 되고 그들은 단식투쟁을 시작하고 독배를 마실 준비를 한단다. 이 소식을 들은 대원군은 창덕궁으로 들어가 자신이 마실 독배도 준비시키게 하니 상감과 조대비는 어쩔 수 없이 사건을 무마시킨다. 1868년 무진년. 경복궁이 드디어 완성되고 국왕과 왕실이 새로 준공된 경복궁으로 옮겨 갔다.

 

  왕실에서도 경사가 났다. 이귀인이 왕자를 낳았고 완화군이라고 봉군했다. 질투와 불안감을 느낀 민비는 자주 이귀인의 처소를 찾아가 본부인으로서 너그럽고 인자한 마음씨를 이귀인에게 보여 주었다. 상감은 애꾸눈 박유붕을 불러 왕자의 관상을 보게 하지만 박유붕은 조금만 두고 보면 알 것이라며 상감의 재촉에도 그 결과를 얘기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 날 이후 그는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완화군이 홍역에 걸렸다가 고비를 넘기고 사후 조리 중이었다. 그런데 민비가 산삼을 줘서 달여 먹이게 한다. 열병에 삼든 약을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 왕자가 죽었다. 산삼을 달여 먹고 펄떡펄떡 뛰다가 기어코 죽고 말았다. 관련 궁인들이 불려가서 국문을 받았지만 범증을 밝혀내지 못한다.

 

  민비는 오빠 민승호를 자주 지밀로 불러들여 밤이 깊도록 밀담을 나누기 일쑤였다. 민승호는 대원군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인물들과 잦은 접촉을 가졌다. 흥인군 이최응, 조성하, 영하 형제, 조두순, 최익현 등이 민씨네 문중의 만규호, 민겸호, 민태호의 패와 갑자기 친해졌다. 함경감사 시절 돈바리까지 실려 보내던 이유원도 그 민씨네 문중과 급속도로 접근되고 있었다. 운현궁의 정보망도 대강 알고, 대원군은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오펠트라는 서양 해적이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글하는 일이 있었다. 완화군을 잃고 실신 상태로 나날을 보내던 이귀인이 죽었다. 이제 젊은 왕은 민비에게 완전히 빠져버렸다. 대원군은 무서운 고독에 빠질 때가 잦기 시작했다. 아들은 자라 성년이 되었고 주위에서 조차 자기를 적으로 돌리는 듯한 눈초리를 자주 느껴야 했다.

 

  1871년 신미년, 대원군이 집정한 지 8년째다. 미국 함대가 남양만에 나타났다. 병인년에 미국 상선을 불태운데 대한 보복으로 또다시 전화(戰火)는 서해를 낮밤없이 밝혔다. 대원군은 척화론(斥和論) 발표하였고 그들은 마침내 물러났다. 른바 신미양요다.

 

  일본인들의 정한론은 오래 전부터 싹터 왔다. 조선의 민심은 흉흉해지기 시작했고 정적들은 이를 모두 대원군의 쇄국주의 탓으로 돌리고 그를 고립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민비가 왕자를 낳았으나 죽고 말았다. 그러자 민비는 그것을 운현궁의 보복으로 몰아가면서 상감에게 친정하기를 계속 부추긴다. 하지만 대원군은 민비 일파의 암세포처럼 커가는 조직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왜인들의 발호를 막을 궁리에 골몰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93년 발행판 - 유주현 장편소설 - 소설 대원군 전5권 (각P335)
신원문화사 / 1993년 2월
평점 :


[제4권] 천주교 박해로부터 신미양요까지의 이야기이다. 민씨의 세력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대원군은 점점 힘을 잃을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93년 발행판 - 유주현 장편소설 - 소설 대원군 전5권 (각P335)
신원문화사 / 1993년 2월
평점 :


소설 대원군

                                                                                                           유주현

 

 [ 3 ]

 

  교동 집에 김좌근을 중심으로 김홍근과 병기, 병팔이 자리를 함께하고 함경감사 이유원이 보내올 최소 30만 냥은 넘을 돈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돈이 운현궁으로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일은 대원군이 김병기를 찾아오겠다고 한단다.김병기의 집은 손님 맞을 준비로 부산하였다. 온갖 음식을 장만하고 김씨 일문에 통보하여 기다리던 꼬박 하루가 가고 나서야 내일 들러겠다고 한단다. 게다가 사약을 받고 죽은 줄 알았던 경평군 이세보가 살아서 운현궁에 들렀다는 것이다.

 

  대원군은 김병기의 집에 도착하여 대접을 받던 중 국수에 독이 들었다고 면을 한 입 뱉어놓는다. 김병기를 남은 국수와 뱉어놓은 국수를 즉시 삼키는 모욕을 자초하여 위기를 모면한다.

 

  호남지방의 암행을 나갔던 장순규와 영남에서 돌아온 안필주가 동학이 농민 사이에 침투하여 혹세무민 하고 있다고 보고한다. 대원군은 포도대장 이경하에게 동학교조 최제우의 사문을 끝맺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이경하가 대구감영에 도착하여 입회하는 가운데 최종 심판이 내려지고 그 후 최제우는 효수되고 일당들은 유배되었다.

 

  상사의 정으로 시름겨워하는 추선에게 운현궁으로부터 이상지를 보내온다. 대원군은 함경도 영흥에서 아라사(러시아)인들의 문서를 접수하여 조정에 올린 함경감사 이유식과 북병사 이남식의 문책을 처리한다. 철종의 인산 날이 지난 이듬해인 198639일 운현궁은 세상이 깜짝 놀랄 정령을 발포했다. ---만동묘를 철폐하라! 서원철폐령을 내린 것이다. 전국의 유림들이 경악하고 조정대신들조차 깜짝 놀랐다. 돈화문 앞에는 수천의 유생들이 꿇어앉아 탄원을 했다. 그러나 대원군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포도대장 이경하를 시켜 그들을 한강 건너로 쓸어내어 버린다. 사액서원(賜額書院)이 아닌 모든 서원이 철폐됐다.

 

  며칠 후 전국 방방곡곡에 방이 붙었다. ‘모든 백성들은 서원이나 유생들의 불법한 요구를 거절하라. 백성은 누구도 자기 생명과 재물을 남에게 수탈당해서는 안된다. 횡포를 부리는 유생이 있으면 서슴없이 관에 고변하라. 무고한 백성은 보호받을 것이며, 횡포하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다.’

 

  대원군은 드디어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경복궁의 중건을 결정하게 된다. 초월의 집에 대원군이 온다는 소문으로 한 몫 보려는 수작이 있는 것 같다. 대원군은 천하장안을 모아놓고 장안의 이름 있는 집들의 살림 형편을 샅샅이 살피게 한다. 자진기부 명목의 원납전으로 경복궁을 중건할 계획인 것이다. 추선의 집에 온 대원군은 추선으로부터 경복궁 중건이 백성들의 민심을 잃지나 않을지 걱정을 듣고 노한다. 상감 또한 경복궁 터를 돌아보던 자리에서 이를 걱정한다.

 

  임금이 내탕금에서 금 10만 냥을 하사하셨고 왕족들과 대관들도 아끼지 않고 재산들을 바치고 있었다. 자발적인 부역꾼들이 몰려들고 그들을 지원하고 격려하기 위한 농악과 사당패들의 놀이가 펼쳐지는 등 여러 방안들이 강구되었다. 사헌부 장령 신재관은 이런 점들을 지적하여 선왕의 3년상이 끝나지 않아 나라가 복중에 있는데 가무음곡으로 왕실의 존엄을 훼손하고 있다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한다.

 

  날이 갈수록 경복궁 중건 공사는 백성들의 짐이었다. 원납전으로는 경비조달이 불가능하여 결두전이라는 제도를 실시하였고 공사의 노역도 경기도민만으로는 일손이 달려서 서울 시민에게도 의무적인 부역을 명령했다. 살을 에는 찬바람이 공사판을 휩쓸기 시작할 무렵에는 아라사 놈들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나면서 인부들의 수효가 줄어들고 작업 능률이 눈에 띄게 저하되었다.

 

  집정 2, 그 동안 문란했던 삼정(三政)은 어지간히 바로잡혀 위기에 처해졌던 나라꼴이 제법 틀에 집힌 셈이다. 대원군은 자신이 받는 생활비도 줄이고 왕실종친이 받는 면세전결도 모조리 국고에 환납시키기도 했으며 관리들의 불법주구(法誅求)를 엄중히 단속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