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를 꿈꾸다


 그날 새벽은 참 이상했다. 꿈속에서 물에 빠진 듯, 축축하기도 하고 찝찝하기도 한 것이 영 잠자리가 불편했는데, 깨어보니 옆에는 아무도 없고 이런! 내 등과, 맞닿았던 이부자리가 축축하게 젖어 있다. ‘이크! 큰일났다. 자다가 오줌을 쌌는가?’ 아랫도리를 만져보니 속옷은 젖지 않은 것 같다. 축축한 곳에 냄새를 맡아보아도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 이 뭐지? 뭔가 이상했다.


 우리는 국민학교 때부터 경쟁이 일상이어서 그때부터, 공부를 좀 한다 하는 아이들은 그룹으로 과외공부를 했다.


 그 넘은 6학년 3, 나는 6학년 2. 반에서 톱을 달리는 아이들이라서 같이 그룹 과외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넘은, 엄마가 시장통에서 가장 큰 과일점을 했고, 우리집보다 큰 집에서 살았으며 가족들이 모두 훤칠하니 키도 크고 피부도 하얀 것이 부르주아 냄새가 나는 집안의 아들이었다그리고 그 넘의 형제들은 모두 거의 성인이었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 넘은 늦둥이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집안에서 엄청 사랑을 받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넘이 자기 집에서 같이 자면서 공부도 하고 다음 날 새벽에 과외도 같이 하러 가잔다. 자기가 혼자 공부하면서 너무 외로워하니까 부모님이 허락을 하셨단다.(당시에는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아서 한 집에 전등 하나씩 켜고 살던 시절이었으며 그것도 특선, 일반선으로 구분하여 사용시간이 제한되어 있어서 밤 늦게까지 공부를 하려면 촛불을 켜고 해야 해서 불편하기도 하고 또 화재의 위험도 있고 해서 주로 새벽에 과외 공부를 했다.)


 우리집에서야 집도 좁은데, 좋은 집에서 친구와 공부한다니 허락을 하셔서 함께 공부를 하고 자는데, 잠자리는 그 넘의 할머니가 펴주고 자다가 목 마르면 마시라고 물을 한 대접 상 위에 놓아주었다.


 그런지 2-3일 만에 이런 이상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아니, 이 나이에 오줌을 싼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당연하다. 나는 오줌을 가린 이후 그때까지 십년이 넘는 동안 한 번도 옷에 오줌을 싼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자기 전에 반드시 용변을 보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용변을 보는 것이 아주 습관이 되어 있었고, 그날도 잠이 깨자마자 화장실부터 찾았는데, 하지만 현실은, 이부자리와 내 옷이 젖어 있으니 아니라고 변명할 여지도 없었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것도 남의 집에서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화장실에는 가야하고 과외공부는 가야했기에 책을 주섬주섬 챙겨서 방문을 열고 나오는데 그 넘은 벌써 일어나서 마당에 서 있었고 그 넘의 할머니는 빨랫줄에 젖은 듯한 이불을 널고 계신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방에 있는 내 요도 젖었는데 그럼 쌍으로 오줌을 쌌다는 말인지? 그런데 그 넘이고 할머니고 내 옷의 등이 젖은 것을 보면서도 아무 말이 없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한 것은, 곰곰 생각해보니 상

위의 대접도 비어있었던 것 같다.


 그때야 당연히 잠옷이 따로 없었다. 외출복이 잠옷이고 잠옷이 외출복이었다. 래서 등이 젖은 옷을 입고 과외공부를 하러 갔다.


 그런데 과외 선생님이 젖은 내 등을 보더니 ? 오줌 쌌나?”이런다. ‘아니,

생님, , 치과 집 순이하고 양조장 집 분이도 있는데 창피하게 와 이러십니까?’


 나는 그것이 오줌이 아니라고, 또 오줌이라 해도 내가 싼 것은 아닌 것 같다고 강변하고 싶었다. 하지만 조금은 창피했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그 넘은 빙긋이 웃기만 한다. 그 넘 심성에 나를 오줌싸개라고 놀릴법한데(그 넘은 내

가 보기로 악간 심술이 있었다.), 그러지도 않았다. 그것이 나는 더 이상했다.


 그 넘이 나를 배려해서 한 행동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사실 그 넘

은 딱 두 번 나에게 오줌싸개했는데, 그것도 남이 없을 때 조용히 얘기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날의 일은, 내가 공부도 잘하고, 그리고 옷에 오줌을 쌀 나이도 지났기 때문에, 같이 공부하는 그룹의 칠, 팔 명의 아이들에게 관심을 끌지도 못

하고 무사히 넘어 갔다.


 하지만, 그 일로, 그 넘이 나를 오줌싸개라 불렀기 때문에 나는 그 넘의 집에는 다시는 가지 않았는데, 며칠 후 그 넘이 조용히 나를 부르더니 느그 반 국어 시험 쳤나?”이런다 아니.” “우리 반은 국어 시험 벌써 쳤는데, 문제가 어렵더라. 내가 시험 문제 가르쳐 줄게.” 이러면서 아주 자세하게 문제와 답들을 가르쳐준다.


 나는 옳다구나, 이번 시험은 백점이다.’ 생각하고 열심히 그 넘의 설명을 외웠다그리고 드디어 우리 반의 국어 시험 날, 시험지가 배부되었는데 그 넘이 가르쳐 준 문제와 보기 그대로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문제 뭐 더 읽어 볼 필요도 없다. 그 넘이 가르쳐 준 답을 하나도 틀림없이 콕콕 집어 써넣었다.


 그런데 다음 날 시험 점수를 확인하시던 선생님께서 고개를 갸우뚱하시더니 나를 부른다. 그리고 시험지를 보여주시는데, 허걱! 그 넘이 가르쳐 준 답이 모조리 틀렸다. !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그 넘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고 땅을 쳤다.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그 넘을 너무 믿은 나의 어리석음을 뼈저리게 통감했다.


 아! 사악한 넘. 그러고 보니 오줌 싼 것도 나에게 덮어씌워 망신을 주려고 한 것이 틀림없었다. 오줌은 지가 싸놓고 나에게 덮어씌웠거나, 아니면 지가 오줌 싼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내 등에 물을 부었거나. 아니 어떻게 오줌을 쌌는데 등만 젖느냐 말이다. 아무튼 지난 일을 밝혀낼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것이 그 넘의 흉계요 음모라고 확신했다.


 나쁜 넘. 그러고 나서 그 넘은 내가 시험 잘 쳤는지도 묻지도 않았다. 나도 물론 시험 잘 친 듯이 시치미 뚝 떼고 있었는데, 마음속으로는 이 넘에게 언젠가는 두

, 세 배로 갚아 줄 것이라며 복수의 칼을 갈았다.


 하지만 국민학교 시절 내내 복수의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고 사실, 나는 꽁하는 성격이 아니라 털털 털어버리는 성격이라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도 그때뿐이었을 것이다 - 중학교부터는 서로 다른 학교로 진학했기 때문에, 복수는커녕 지금까지 그 넘의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이 세월만 흘려보냈는데,


 인간의 본성이란 것이 참으로 바뀌기 어려운 것인지, 그래서 항상 손해를 보지만, 아직도 나는, 남을 잘 믿는다. 그리고 그날의 오줌 사건은 아직도 내 마음 속에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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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7-05 16: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 친구분이 완전 장난아니셨네요. 그때는 분하셨겠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 이렇게 좋게(?) 추억하실수 있는거 같아요. 항상 믿는 사람이 더 손해를 보기도 하지만 그런 사람이 결국 행복한거 같아요. ˝톱을 달리는 아이들˝에서 감탄을 합니다~!!

하길태 2021-07-05 21:32   좋아요 1 | URL
ㅎㅎㅎ 댓글 감사합니다.
그렇네요, 이제는 다 지난 일들이 되었네요.^^

붕붕툐툐 2021-07-05 21: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ㅎ등으로 싼 오줌이라닛! 확실히 음모가 느껴집니다!ㅎㅎ

하길태 2021-07-05 21:35   좋아요 2 | URL
ㅎㅎㅎ 그런 것 같지요?
이제야 나의 결백이 밝혀지는 것 같군요.^^
 

족보 이야기 외전


 족보 이야기에서 밝혔듯이 우리 할아버지는 세도가 보통이 아니었으며 성질까지 대단해서 상민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붙잡아서 곤장을 치고 재산을 뺏기도 했단. 그리고 양반입네 하고 신분상의 차별도 극심하게 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고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일본 놈들을 피해 다니는 입장이 되었으니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일은 못하게 되었겠지만 그렇다고 그때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지은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쁜 일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아야 되고 죄를 지었으면 죗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 신의 섭리다. 남의 눈에 눈물 흘리게 하면 자신은 피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그것이 일본 놈들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자신이 선택한 것이든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니 사촌 누나로부터 들어서 알게 된 바에 의하면 - 우리 할아버지는 그때부터 벌을 받기 시작했다.


 가족과는 생이별을 하였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가산은 탕진되었고 당신께서는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 신세로 전국을 떠돌다가 객사를 하셨는데 언제,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고 어디에 묻혔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수십 년이 지난 후 풍문에 어디에 묻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인과응보다. 뿌린 대로 거두고 지은만큼 돌려받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남의 가족에게 그렇게 못 살게 굴고 재산까지 빼앗았다더니 당신께서도 똑같이 벌을 받은 셈이었다. 심지어 양반이라고 으스대더니 상민들도 하지 않는 족보까지 팔아먹게 한 것이 모두 남들에게 못되게 군 할아버지가 지은 죄 때문인 것이었다.


 그런데 지은 죄가 얼마나 컸으면 자신이 치른 죗값으로 부족했던지 나머지 죗값은 아래로 대물림이 되었다.


 큰아버지들 집안은 일찍이 끝이 좋지 않게 멸절되었고(그 과정에서 며느리들이 모두, 할아버지가 그토록 미워하던, 술장사를 하기도 했단다.) 우리 아버지 홀로 남겨지게 되었는데 그 어른의 다 갚지 못한 업보를 아버지가 몽땅 짊어지게 되었다.


 아버지 없이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자란 우리 아버지는 결혼을 하고 어머니와 돈을 벌러 일본으로 가셨다. 할아버지께서 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는 쪽바리들의 밥은 얻어먹지 않는다던 말이 정반대로 부메랑이 되어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 왔으니 이것 역시 인과응보의 일단(一端)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해방이 되어 귀국하여서는, 우리나라에 먹을 것이 없어서, 영양실조로 생때같은 두 아들을 잃었단다. 이 무슨 엄청난 저주였는지......? 그 아들들이 나의 형님들이신데 그래서 나는 우리집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쨌든 아버지는 귀국 후 안정된 직장을 얻어 가족을 부양하셨고 덕분에 자식들은 큰 어려움 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업보로 부터는 자유롭지 못하였다.


 내 기억으로, 어느 어둑어둑해지는 해거름에, 아버지 고향 사람이라는 웬 분이 찾아와서, 할아버지가 자기네 산에 쓴 묘를 이장하라는 요청을 해 왔다. 아마도 할아버지가 세도를 믿고 우격다짐으로 남의 땅을 뺏은 결과인 것 같았다. 아버지

는 그분들께 백배 사죄하고 묘지가 들어선 땅을 사서 문중에 이전해 주었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업을 거의 다 해결한 줄 알았는데 진짜는 아버지께서 은퇴를 하고 나타났다.


 호구지책이라도 마련하겠다고 시작하는 사업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여 적지 않았던 퇴직금과 살던 집까지 몽땅 날리고 말았고, 결국은 할아버지와 자식 대까지 알거지가 된 꼴이었는데 그 대부분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로, 남을 쉽게 믿었거나 사기를 당해서 입은 손해였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할아버지의 업으로 인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결국 그 어려움은 나에게까지 영향을 미쳤고 내가 스스로의 힘으로 기반을 잡을 때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 세월들이 그때는 어떻게 그렇게나 모질고 힘들던지, ,......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은 아버지나, 어릴 때, 성격이 예민하고 까탈스러웠던 나를 본 사촌 누나가 생긴 모습에 성질까지 할아버지를 꼭 닮았다고 하던 말이 항상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항상 감사하는 마음과 속죄하는 마음으로,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겸손하고 배려하면서 사는 것을 생활신조로 삼아 왔기에,


 아버지나 내가 남에게 지은 죄는 없을 것이라고 감히 단언하는데, 그렇게 겪은 어려움이 인과응보였다면 그 업은 할아버지의 것이 틀림없었다.


 ‘죄는 지으면 3대를 간다는 말을 나는 절감했다. 아버지와 내가 할아버지의 업보를 지고 살았고, 할아버지로부터 3대에 걸쳐 죗값을 치렀으니......


 그래서 내 머리 속에는 항상 업의 대물림에 관한 걱정들이 떠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내가 짓지 않은 죄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 일이 발생하지도 않으며, 우리 아이에게도 아직까지 선대가 지은 죄를 대물림 받은 징조가 보이지 않는 것이, 그렇게 길고 지루했던 악업의 고리를 끊은 것 같아 여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해방이 되고 일제의 압제가 풀리자 할아버지께서 아버지를 찾아서 부자 상봉을 하셨다는데, 아버지는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한 할아버지를 끝내 용납하지 않으셨단다. 그러나 그 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풍문을 들은 어머니가 할아버지 제사를 모시는 것까지는 말리지 않으셨는데,


 이제는, 돌아가신 날을 몰라 음력 99일에 모시던 할아버지 제사를 할머니 제삿날로 옮겨 함께 지내고 있고 종종 아이들에게 할아버지 얘기를 하면서 항상 남

에 대한 겸손과 배려를 주문하면서 살고 있다.


 평생 할아버지의 업을 짊어지고 고생만 하다가 가신 우리 아버지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지고 가슴이 먹먹한데, 아직 현직에 있었을 때, 주중에 회사가 쉬는 날을 이용해 혼자서 아버지 고향, 아버지가 태어나셨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


 시골이었지만 듬성듬성 산재한 종씨들의 문패를 보면서 우리 성씨의 집성촌임을 확인할 수 있었고 아버지가 태어나신 집은 옛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지만 위치만은 마을 한 복판, 양지바르고 배수 잘 되는 명당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이면 가끔씩 아버지 생각에 가슴이 메어 오기도 하고...... 언젠가 조상 땅 찾긴가 뭔가가 있어서 조회를 해 보니 지리산 골짜긴가 봉우린가 어디쯤에 할아버지 명의의 땅이 있는 것을 확인하였는데, 그것은 그냥 그대로 두기로 했다. 더 이상 할아버지의 업에 얽혀들기 싫어서. 세월이 가면 비연고 토지로 국가에 귀속될 것이다.


 일제에 항거하여 가족을 버리고 전국을 유랑하신 할아버지의 행적을 조사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렇게 오래 지난 일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도 막막하고 또 지금에 와서 조사해 본들 무엇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포기했었다.(‘항거라고 썼는데, 글쎄 항거라고 쓴 표현이 가당찮을까? 남을 괴롭혔기 때문에? 피해 다녀?


 독립운동가들도 피해 다녔잖아? 그리고 남을 괴롭힌 것과 일제에 협조하지 않고 피해 다닌 것은 별개의 문제 아닌가? 그래서 광의로 해석하여 항거’ ‘저항이래도 괜찮지 않을까? ‘에라, 모르겠다 그냥 그래도 두자. 내 맘인데


 아니, 일본 순사였던 아버지를 독립군으로 둔갑시켜 국회의원도 하고, 매국의 거두의 자손도 떵떵거리며 국회위원도 하는데, 일제에 협조하기 싫어서 멸문지화를 당하다시피한 우리 할아버지의 행위를 항거라고 표현한 것이 뭐, 크게 잘못된 것도 아니잖아. 그렇다고 내가 국회의원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ㅋㅋㅋ )


 (내가 우리 가계에 얽힌 이야기를 구구절절이 하는 이유는, 내가 죽기 전에, 우리 할아버지가 지은 죄를 자식과 손자가 이제 모두 갚았다는 사실을 하늘과 만천하에 천명(闡明)하고 더 이상 우리 집안에, 우리 아이들에게 나쁜 일들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임을 밝혀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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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8 1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6-28 15: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족보 이야기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사촌 누나가, 내가 어렸을 적에 우리 할아버지는 지리산 기슭의 어느 고을에 사시는 양반이셨단다. 신언서판이 반듯하고 훤칠한 분이셨지만 고지식하기로, 홍수가 나서 마당에 볏섬이 물에 둥둥 떠내려가도 방안에 앉하늘 천 따 지만 하시던 그런 양반 말이다.”하고 할아버지 얘기를 꺼내셨다.


 게다가 세도가 보통이 아니었으며 성질까지 대단해서 상민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붙잡아서 곤장을 치고 재산을 뺏기도 했단다.


 아버지께서는 막내여서 나는 당연히 할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일절 할아버지에 대한 말씀을 하지 않으셔서 나는 처음부터 할아버지가 그냥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를 알고 있던, 사촌 누나로부터 할아버지의 갖가지 만행(?)을 들은 적은 있었다.


 그런 할아버지셨는데, 일본 놈들이 우리나라를 강점하고는 그 고을의 군수 직을 제안하였단다. 그러자 우리 할아버지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는 쪽바리들의 밥은 얻어먹지 않는다며 제의를 거절하셨고, 서서히 저들의 탄압이 시작되자 달랑 괴나리봇짐 하나만 짊어지고 과객이 되어 전국을 떠돌며 놈들을 피해 다니셨단다.


 모르는 분들은, 그래서 오늘날의 내가 친일파의 후손이 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길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그때 어린 아이였던 우리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너무도 큰 시련의 시작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전국을 돌아다니시며 간간이 인편으로 소식을 전해오셨고 그러면 할머니께서는 또 깨끗한 의복을 준비했다가 보내곤 하셨다는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할아버지의 도피 기간이 길어지면서 생활은 점점 쪼그라들었단다.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 가족을 돌 볼 여지가 없어 가족들의 생활이 어려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 놈들에게 협조하지 않으려고 저항하면서 피해 다닌 우리 할아버지의 가족도 형편이 말이 아니었단다.


 그래서 할머니께서는 집안에 돈 될 만한 물건들은 하나씩 하나씩 다 내다 팔았고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가 보시던 책을 팔았다는데, 양반에 선비 집안이다 보니 그 분량이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궤짝 3개 분량이었단다.(그 분량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는 없지만, 내가 어릴 때 우리집에 있었던 궤짝으로 추정컨대, 궤짝 하나가 요즘의 사람 키만 한 서류 캐비닛 1개 정도는 더 되었을 것 같다.)


 그런데 아뿔사! 그 책들 속에 우리집 족보가 들어 있었다. 할머니는 본의 아니게 우리집 족보를 팔아먹었다고 할 수 있는데, 당신께서는 족보를 팔아먹었는지도 모르고 돌아가셨을 것이니 그것도 어쩌면 다행스런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래서 우리집에는 족보가 없었다. 그리고 자라면서도 족보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없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도덕 시간에 선생님이 조상이 어떻고, 집안이 어떻고, 족보가 어떻고 하시면서 강의를 하신다. 친구들은 자기 집에 족보가 있는데, 자기의 선조는 벼슬이 어디까지 올랐다고 자랑하고, 또 어떤 놈은 조상들이 장에 가서 물건 산 것까지 다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면서 뻥을 치고 자랑을 해 댄다.(이놈아족보가 무슨 일기장이냐, 장에 가서 물건 산 것까지 기록하게?)


 집에 돌아온 나는 아버지께 우리집 족보는 어디 있냐고 물었다. 아버지께서는 일절 말씀이 없으시고 묵묵부답이시다. 나는, 그 한참 후에 사촌 누나로부터 우리집 족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당시에 아버지께 물어 본 족보 이야기가 그렇게 아버지 가슴에 깊이 새겨졌을 줄은 몰랐다.(당시에 큰아버지들의 가계는 모두 멸절되었고 직계는 아버지 혼자였으니 당연히 족보를 물려받았어야 했다.)


 아버지께서는 어려서 고향을 떠났기 때문에 자식들을 족보에 등재하지 못하신 것을 자신의 불찰로 생각하시고 그때부터 자식들을 족보에 등재하기 위해 가족들 몰래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시고 노력을 하시는 것 같았다.


 그때 족보 일을 봐 주겠다고 나선 친척 한 분이 계셨는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되지도 않을 일을 꼭 될 것 같이 거짓말을 하고 아버지께 상당한 돈을 가져 간 일도 있었단다.


 그렇게 남에게 부탁하여 일이 성사되지 않자 은퇴를 하시고는 아버지께서 직접 문중을 찾아가서 방법을 찾았지만 족보를 수정, 보완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아버지께서는 기회가 닿지 않으면 사람의 노력으로도 안 되는 일

이 있다며 그 일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시고 포기를 하셨다.


 나는, 철없을 때 무심코 한 말들이 그렇게 아버지 가슴에 한(?)을 맺히게 하였는가 하고 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지만, 십수 년이 지난 후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가 안방(드라마)과 서점가()를 강타하고 미국인들조차 자신의 뿌리를 찾는다는 얘기를 접했을 때는 다시 또 족보를 생각하며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는데,


 많은 세월이 흘러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족보 일을 봐 주신다며 아버지로부터 돈을 가져갔던 그 아저씨도 돌아가셨다. 그렇게 이제 족보는 내 마음 속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그런데 어느 날, 친척 형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버지께 족보 등재를 해 준다고 돈을 받아갔던 바로 그 아저씨의 아들이다. 그 형은 자신들이 어려웠던 시절에 우리 아버지로부터 학비도 몇 차례 받아갔었고 또 자기 아버지가 한 일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 속으로 부담이 많이 되었던지 문중에서 발행하는 종보에 족보를 다시 만든다는 소식이 실리자 즉시 나에게 연락을 한 것이었다. 이번을 놓치면 언제 다시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면서.


 나는 그 기사를 확인하고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여 우리 가족들과 형제자매의 배우자 및 자식들까지 모조리 족보에 등재하였다. 어려운 것 하나도 없었다. 호적등본에 할아버지 함자 밑으로 우리 온 가족이 다 줄줄이 있으니 따로 뭐 증명할 것도 없이 그냥 족보에 등재되었고 출간된 수십 권의 족보 중에서 우리 가계가 수록된 네 권의 족보를 구입하였다.


 이렇게 쉬운 것을, 다 때가 있는 것인데, 철없는 자식의 말 한 마디가 아버지 마음에 평생의 부담을 주다니, 후회스럽기도 했는데, 그 해 아버지 제삿날에는 제사상 옆에 족보도 함께 놓고 아버지께 보고를 드렸었다. 이제는 족보 때문에 더 이상 부담을 갖지 마시라고.


 족보 그게 뭐라고, 사실 나는, 족보가 그렇게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아들이 원했던(?) 일을 하시고자 그렇게 수십 년을 노력하셨지만 못 이루셨던 일이었고 또 나로 인해 발생했던 일이었기에 내 손으로 매듭지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는 했었다.


 그래도 마음 한편으로는 흐뭇하기도 했는데, 왜 그러냐면, 그 족보 문제의 해결이 아버지와 나의 문제뿐만 아니라 친척 아저씨의 문제까지 모두 해결한 셈이 되

었기 때문이었다.


 그 족보,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 상태로 책장 맨 밑에 꽂혀서 먼지를 덮어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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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 꼭 있다


 때는, 사회 전반에 걸쳐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전 국민의 기대 욕구가 봇물처럼 터졌고, 그 물결이 이어, 이어, 수 년이 지나니, 정치권에서도 이에 부응하는 흉내라도 내는 듯 노동관계법을 개정하였다.


 그런데 실상을 차분히 들여다보면 개정되기 이전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도 명목상으로는 우리 회사의 근로자들도 쟁위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그렇게 되자 이제껏 억압 받았다고 생각한 우리회사의 노동조합 측이 서서히 문제를 일으킬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그런 징후들이 여러 곳에서 발현되자, 고 경영자를 비롯한 고위 경영진들이 아연 긴장하면서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전국의 노사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간부들에게 교육에 참석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장소는 수안보 생활 연수원이다.


 그때는 그랬다. 명색은 수안보 온천인데 실제로는 충청도 골짜기에 있고 온천을 하는 이외에 별로 볼 것도 없으면서 교통은 기차, 버스를 갈아타야 해서 무지 불편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3대의 승용차에 카풀을 하기로 결정하고 약속 장소에 모였다


 어라, 그런데 처가가 부자라고 소문난 선배가 당시에는 보기 어려웠던 아우디를 몰고 왔다. 내가 그런다. “와우, 아우디 멋있다.” 그런데 내 옆에 있던 세팔이 , 아우디 아이다.”이런다.


 당시만 해도 외제차가 귀했고, 아우디는 진짜 보기 힘들어서 세팔이, 아우디가

차 이름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아는 체를 한다.


 ‘허걱!’ 내가 얼마 전에 유럽 연수를 다녀왔고, 유럽에서 맨날 본 차가 아우디인데, 아우디가 아니라니? 황당하다. 서울 가 본 사람보다 안 가 본 사람이 이긴다

더니, 한 번 해 보자는 것인지?


 하지만 내가 인솔하는 대장 격인데 팀원들과 우기기 시합을 하면 안 된다. 그래서 슬쩍 물러서면서 빵빵빵빵 아우디, 아니면 뭘까?”이러니 세팔이도 꼬리를 쓱- 내린다. 갈수록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래도, 아우디는 아일낀데......”이런다.ㅋㅋㅋ


 알고 보니 세팔이는, ‘동네 운동 경기에서는 떼깔(우기기, 떼쓰기) 센 넘이 이긴다를 신봉하는, 우선 부정부터 해 놓고 보는 우기기 대마왕이었다.


 인구 백 명 중, 아니면 천 명 중에 한 사람은 꼭 있다는, 백중일(百中一), 천중일(千中一), 그 사람이 세팔이었을 줄이야어른들이 있었으면 그랬을 것이다. “x도 붙은 데도 모르는 기 아는 체 하기는저런 넘 꼭 있다니까.”ㅋㅋㅋ


 그 이후로도 그의 무조건 부정부터 하는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는데, 더 웃긴 것은, 한참 후에 외제차 수입이 활발하게 되고 아우디가 심심찮게 눈에 띄었을 때, 그가 내게, 내가 했던 똑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빵빵빵빵 아우디, 멋있.”(내가 했던 말도 누가 했는지 까먹고 나에게 다시 써 먹다니, 웃긴 넘.)ㅋㅋㅋ


 아무튼 그렇게 수안보를 향하여 출발했는데, 당시에는 길이 진짜로 멀었다. 길은 멀고, 시간은 없고, 배는 고프고, 문경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중국집으로 들어갔다.


 나, “시간이 없으니 메뉴를 짜장면이나 짬뽕으로 통일하자.” 그래서 모두 짜장면이나 짬뽕을 시키는데 우리의 백중일, 천중일 세팔이는 나는 잡채밥.”이런다.


 ‘아이구 세팔아! 모자라면 눈치라도 좀 있어야지, 눈치가 없으면 가만히나 좀 있든지, 꼭 나서서 표시를 낸다니까.’ ‘눈치도 없는 저기 인간이가.’ ‘말라(무엇하러) 사노 으이구 인생아!’하고 옆에서들 수군거린다.


 보신탕집에 가서 혼자 삼계탕 시키는 녀석은 봤어도 짜장면, 짬뽕 속에 잡채밥이라니......(으이구 속 터져!)


 세팔이는 잡채밥 때문이 아니라고 우겼지만 그날 우리는 잡채밥 때문에 교육 시간에 지각하여 적지 않은 눈총을 받았다. 그래도 교육은 무사히 마쳤고, 다음 날 다시 같은 길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세팔이 이번에는 내 휴대폰을 빌려 달랜다. 당시, 휴대폰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가격도 많이 비싸고, 통화 요금도 엄청 비싸서, 나도 꼭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 아니면 아껴 쓰고 있던 휴대폰을 빌려 달랜다. 망설이다 휴대폰을 건네며 덧붙인다. “용건만 간단히.”


 어우! 그런데 세팔이, 용건만은 개뿔. 지 마누라한테 전화하더니 미주알고주알, 콩놔라 팥놔라, 시시콜콜 오만 이야기를 다 한다. 아우! 열불 나. 나는 그때 화나고 스트레스 받아 심장이 터져 죽는 줄 알았다. ‘으이구 세팔아!’ 생각하니까 지금도 열받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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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매가 전화 받으라면서 폰을 건네준다. “!, 전화 왔어?” “여보세요?” “, 저 세팔인데요. 잘 지내십니까?” “! ! 그래 잘있다. 어떻게 지내노?” “, 저도

잘 지냅니다. 그런데, 느낌이 팍 오는데, 저 흉보는 글 올리고 있는 거 아닙니까?”


 ‘허걱!, 어떻게 알았지? 귀신이네하지만 시치미를 뚝 떼야지. “아이다, 아이다. 니 이야기가 아이다. 설마 내가 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랑하는 동료 흉을 보

겠나? 니 이야기 아니니까 안심해라.” ㅋㅋㅋ


 했지만, 하이고 그런데 진짜 걱정이다. 보통 남자들이 하는 짓은 다 하고 살았지만, 별 감출 것도 없고, 크게 죄 지은 것도 없다고 생각해서 실명 문패 걸어놓고 블로그에 글 쓰고 있는데. 아는 넘이 이 글들을 보고 자기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그래서 다시 한 번 천명한다. “걱정들 하지 마라. 니들 이야기가 아이다. 설마 내가 사랑했던 동료들 이야기를 만 사람들이 보는 앞에 우스갯거리로 삼겠냐? 니들 이야기 아니니까 안심해라.” ㅋㅋㅋ


 (---줄 친 밑은 동료들 흉을 보다 들켜서, 곤경에 처한 나를 방어하는 상황극이었습니다. ㅋㅋㅋ. 아니, 그러고 보니 나도 이런 사람에 해당 되네, 돌아서서 남 흉이나 보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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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6-14 17: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근데요,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삼계탕 먹고 싶어서 그러는데요, 삼계탕 파는 보신탕집 아직 있나요?

mini74 2021-06-14 18:56   좋아요 4 | URL
왜 반대로 읽히지요 ㅎㅎㅎ

하길태 2021-06-14 21:25   좋아요 3 | URL
ㅎㅎㅎ 하필 보신탕 집에서 삼계탕을 드실려고 하세요?
보신탕 집 가 본 지가 하도 오래되어서 글쎄요??????^^

하길태 2021-06-14 21:27   좋아요 4 | URL
ㅎㅎㅎ mini 님 말씀이 정답 같습니다.^^

mini74 2021-06-14 18: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세팔이같은 친구 꼭 있죠. 저는 어릴 적 아우디는 모르고 그 차 지나가면 올림픽차라고 그랬어요. 오륜기 닮아서 ㅎㅎㅎ

하길태 2021-06-14 21:28   좋아요 3 | URL
ㅎㅎㅎ 재미있는 친구지요^^

2021-06-15 0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6-15 07: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붕붕툐툐 2021-06-15 0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팔이 같은 친구가 옆에 있다면 속 터진다할지 몰라도 이야기만 들으니 넘 재밌어요!ㅎㅎ

하길태 2021-06-15 07:08   좋아요 0 | URL
ㅎㅎㅎ 맞습니다. 그래도 지나고 나니 재미있네요.^^
 

무서운 10대들


 밤이 이슥했다. 기분 좋게 한 잔 하고, 기분 좋게 취해서 흔들흔들 집으로 가고 있다. 번화한 길을 벗어나 우리집으로 가는 길로 접어드는데 바로 앞에 중학생쯤

으로 보이는 두 명이 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시간에 학생들이......’하면서 별 생각 없이 흔들흔들 그들의 뒤를 따라 걷는데, 가로등 불빛이 가려지는 조금 외진 곳에 이르자 앞에 가던 두 넘이 저희들 끼

리 소곤소곤하더니 갑자기 뒤돌아서서 나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내지른다.


 술에 취했지만 그렇게 많이 취하지는 않았었고 딱 기분 좋을(?) 만큼 취했었다. 그리고 또 그 넘들의 뒤를 따르면서 그들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면서 연거푸 내지르는 그 넘들의 주먹을 모두 피했다.


 나도 젊었을 때는 한 가락 했고(어렸을 때 우리 동네 태권도 도장, 복싱 도장 구경 많이 해서 이론은 빠삭했다.ㅋㅋㅋ), 당시는 30대인 한창 때라, 맨 정신 같으면, 건장한 성인이 아닌 학생 두 명 정도는 가볍게 제압할 자신이 있었는데 술을

먹고 보니 반사 신경이나 신체의 반응이 정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다리가 풀려 있으니 태권도는 안 되겠고 복싱 자세를 잡고 반격할 준비를 하는데, 이 넘들, 내가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눈치 챘

는지 냅다 달아나기 시작한다. ‘아니, 저 넘들이......’


 나는 그 밤, 파출소에 찾아가서 신고하고 그 넘들을 찾는다고 한참을 헤맸다. 넘들 웃기는 넘들이었잖아......(나도 웃겼지, 술 취해서 뭐하는 짓이었는지?ㅋㅋㅋ)


 그렇게 또 세월이 10년도 더 흘러, 내가 우리 아파트 입주자 대표 회장으로 있을 적 이야기다. 그날도 밤 늦은 시간에 한 잔 기분 좋게 취해서 후문을 통해 집에 오는데, 아니, 중학생으로 보이는 다섯 명이 아파트 관리실 1층에 있는 화장실로 우르르 몰려 들어간다. 당시 우리 아파트는, 규모가 작아서, 밤에는 관리실에 사람이 없었는데, 경비들이 화장실을 쓰면서 문을 잠그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니, 이 넘들이......’ 술 취한 회장님의 가슴 속에는 의무감이 불타오른다. 흔들흔들하면서 문 앞에 딱 버티고 서서 그 넘들을 부른다. “! 니 넘들 다 이리 나와!” 이 넘들, 쭈뼛쭈뼛 밖으로 나온다.


 “여기 옆으로 일렬로 서!”하면서 일장 잔소리를 늘어놓을 준비를 하는데, 이 넘들, 슬슬 눈치를 살피며, 일렬로 서면서 보니, ! 나무라는 아저씨 술 냄새를 풍기며 흔들흔들하는 몰골이 정상이 아니다한 넘이 나를 확 밀어 넘어뜨리고는 우르르 달아난다.


 나는 바닥에 큰 대자로 자빠져서 그날 큰 일 날 뻔 했다.(이 넘들 큰 일 낼 뻔한

넘들이었잖아......)


 그래서 그날 이후로 나는, 젊었을 때와는 달리, 불의(?)를 보면 절대로, 그냥 꾹

참고 못 본 척 피해 가는 사람이 되었는데.


 은퇴 후, 어느 날 친구 녀석이 전화가 와서 같이 등산을 가잔다. ‘웬일로?’ 모처럼 할매가 돼지고기 수육을 해서 싸 준다. 막걸리 두 통에, 김밥에, 수육에, 맛있게 먹고 산에서 내려오는데 알딸딸하니 기분이 최고다.


 그런데 저쪽 주택가 골목에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오륙 명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어라! 그런데 그 여학생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나는 못 본 척 방향을 바꾸려는데, 이 친구, 아직도 정의감에 불타는 내 친구는,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학생들에게로 가서 시비를 건다. “! 느그들 어느 학교 다니노? 학생이 길에서 담배 피우면 되나? 어른들이 지나다니는데.” “왜요? 왜요? 보기 싫으면 안 보면 되잖아요. 아저씨가 우리 담배 피우는데 뭐 보태준 거 있어요?”


 “아니, 이놈들이 어디서 못 된 것만 배워 가지고, 어른이 뭐라 하는데 눈 동그랗게 뜨고 달라드노?” “아니, 그러면 아저씨는 눈 네모로 뜰 수 있어요?” (아이구, ㅋㅋㅋ, 본전도 못 찾을 거 왜 건드려 가지고......) “느그들 어디 사노? 니들 부모님께 일러줘야 되겠다.”


 “아저씨, 그냥 가시는 게 나을 걸요. 아저씨가 우리 성추행했다고 신고하기 전에요.” 허걱!’ “성추행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덮어씌우면 무고죄로 잡혀가는 거 모르나?” 그래도 우리는 미성년자라, 아저씨가 훨씬 더 고생할 걸요.” 쐐기를 박는다.


 한 때는 그래도 정의감에 불탔던 내 친구, 아이들은 꽃으로도 때려서는 안 된다는 나와는 달리, 학교와 사회가 아이들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하면 가정에서, 아니면 주변에 있는, 어른들이 때려서라도 참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이론으로 무장한 내 친구, 할 말을 잃는다.


 “낄끼빠빠, 낄끼빠빠.(낄 때는 끼고 빠질 때는 빠져라.)” 나는 억지로 친구를 말려서 전장에서 후퇴했다. ! 무서운 아이들이었다.


 내가 나이를 먹어 가는 것과 같이 우리의 10대들도 웃기는 넘들에서큰일 낼 뻔한 넘들로무서운 아이들로 변해 갔다. 세상이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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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2021-06-07 16: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십분 공감되는 글입니다.

하길태 2021-06-07 21:17   좋아요 0 | URL
그래서 요즘에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삽니다.^^

붕붕툐툐 2021-06-07 18: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야~ 이런 일을 당하셨군요~ 저도 점점 못본 척 달인이 되어가는 거 같습니다!ㅎㅎ

하길태 2021-06-07 21:20   좋아요 1 | URL
ㅎㅎ 세상이 참......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coolcat329 2021-06-07 23:07   좋아요 0 | URL
저도 정말 못본척 하려고 앞만 보며 지나칩니다. 빠른 걸음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