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형 크리스천 - 아침형 인간을 넘어서는
문봉주 지음 / 두란노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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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두란노 특새 설교를 듣다가 문봉주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그 설교를 들은

후에 새벽형 크리스천 책을 다시 들춰 보게 된 것이다.

책은 간증이 앞 부분에 나오고  기도에 대한 내용, 그 중에서도 특히 새벽기도의

중요성을 설명한 내용이 뒷 부분에 나온다. 수십년을 새벽기도를 한 저자의 실천

적인 내용이 녹아 있어서 더 실감있게 다가 오고, 새벽기도를 어려워 하는 사람

들이나 처음에 기도가 무언지 몰라서 헤메고 있는 사람들에게 저자의 기도에 대

한 좌충우돌 경험기는 매우 유익했다.

 

저자가 처음에는 성경공부를 시작으로 해서 지금은 성경을 잘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고 그 이후에 암으로 투병하면서 다시금 기도에 불을 붙이게 되고 그 과정에

서 기도를 너무나 힘들어 하던 자신에게 하용조 목사님이 기도모임의 책임자로

임명하면서 부터 그 시간이 너무나 괴로웠다는 저자, 그러나 그 기도의 어려움을

다시금 기도로 극복하고 나서 새벽 기도의 사람이 되었고 무엇보다 새벽 기도의

중요성을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방언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설교에서 말하길, 자신이 오랜기간 동안  방언으로만 기도하면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기도를 하지  않았었는데 하나님은 영으로 기도하게 하신 자신에게, '너

에게 줄 복을 지체시켜서 미안하다'라는 말로 위로 하시면서 그 때부터 자녀들에

게도  복이 임했음을 말하고 있었다.

 

이 부분에서는 깨닫는 바가 많이 있었다. 방언으로 기도하다가도 이 시간에 다른

기도를 해야 하는데 알아 듣지도 못하는 기도를 하면서 시간만 허비하는것이 아

닌가 하는 그릇된 생각을 했었는데 그것이 아니었음을 명확히 알게 되었다.

 

저자가 기도를 어려워하고 극히 부담스러워 하면서도 거기서 굴복하지 않고 어떻

게 하면 기도를 더 잘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부분,그리고 그런 부족한자를 책임

자로 쓰신 담임 목사님의 협력이 합해져서 그를 새벽기도의 사람으로 만든것이

아니었나 생각을 해 본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 분이 이루시며 신비에 속하는 것임을 보게 된다.

 

찰스 스탠리의< 깨어짐의 은혜>에서" 하나님은 당신 삶의 파편들을 모아서 온전

함으로 다시 맞추기를 원하신다"는 말을 생각나게 한다. 깨어진 자가 하나님 앞

에 나와 무릎 꿇을 때 그를 다시 맞춰 가시는 하나님 -자신의 외교 대사라는 직

함에 아랑곳 하지 않고, 새벽에 남들은 부르짖고 기도할 때에 할 말이 없어서 그

저 남의 기도를 듣기만 하던 사람을 이렇게 하나님은 들어 쓰셨다.

기도를 통해서 깨어졌고 암이라는 질병을 통해서 철저히 부서진 그를 다시 맞추

어 놓으셨다.

 

성경공부 지도자라는 직함으로 오만해진 그를(그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은 기

도라는 무기를 통해서 그를 깨뜨리시고 영성을 다시 회복 시켜 주셨다.  은사로

새롭게 하시고 기도의 기쁨을 알게 하셨다.

새벽기도를 통해서 그를 얼마나 많이 연단 시키시고 훈련 시키셨는가를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특히 방언기도에 관해서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는 그는 지금도 방언으로만 기

도를 한다고 한다.

이 말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그냥 묵혀 두지 말아야 겠구나 하는 생

각을 다시 하게 된다.

 

"새벽마다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과 주일날 하루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의 결과가

어떻게 비교가 되겠는가?" 라는 질문을 통해서 새벽기도의 가치를 또 한번 역설

한다.

주일 예배는 소예배이고 새벽기도가 대예배라는 말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새벽기

도에 공을 들이고 예배의가치를 귀하게 여기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기도의 귀한 가치를 그리고 새벽기도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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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의 힘 - 은혜를 붙들면 절대 죽지 않는다 유앙겔리온북스 4
전병욱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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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병욱 목사님을 접할때면 꼭 이중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느낌이다.

책으로는 많은 은혜를 받는데  왜 설교를 들으면 그렇지 않은걸까? 책에서도 밝히듯이, 어느 교회서 설교를 하고 나오는데 그 교회 장로님이 "목사님은 교회서 사용하지 않는 언어를 쓰시는군요"라고 했다는 말이 생각이 난다.

우리의 시야가 너무 좁아져서 교회안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 교회가 아줌마 신앙에서 벗어나야 하고 아줌마들만의 문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 이런 문제의식을 접할때면 무언가 일반 목회자들과는 남다른 무엇을 느끼게 된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구석에 숨어 잠자고 있는 신앙의 문제나 신학의 문제점들을 들고 나와서 한방에 힘있는 펀치를 날린다는 느낌이 든다.

 

젊은 목회, 젊은 교회를 지향하는 그 답게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아주 직설적으로 거침없이 쏟아내는 말을 통해서 로마서 10장~13장까지를 잡초에 비유해서 강해를 풀어낸 그의 글에서 또 남다름을 느낀다. 로마서라고 하면 웬지 딱딱하고 흔히 교리설교를 할때 읽어야 할 책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번에도 또 아니다.

 

어떻게 로마서를 잡초에 비유해서 풀어낼 생각을 했을까? 이것이 첫번째로 든 생각이었다.

책을 많이 읽어서일까? 그의 생각은 비단 성경에만 머물지 않는 특성이 있다. 온갖 서적을 넘나들고 동화나 영화에 이르기까지 아주 폭이 넓다. 이것은 그가 젊은이들을 위한 목회를 하기 때문에 항상  무언가 새로은 것을 추구하는 그들에게  신선한 재료를 공급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책을 읽으며 <게오르규의 25시의 삶>을 생각했다.

답답하고 지치고 힘든 삶,도무지 끝날것 같지 않은 삶 이런 삶 속에서 잡초처럼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분명하다면 우린 예수님의 은혜 그 사랑을 붙잡지 않을 수 없다.

그 사랑에 기초한것이 바로 말씀이다.잡초가 왕성하게 번식하는 이유는 뿌리가 끈질기기 때문인데

이 말씀이 바로 잡초의 뿌리에 해당된다.

 

로마서에 나오는 '남은자'의 이해는 곧 '은혜받은 자'라는 말과 일맥 상통한다. 은헤받은자가 끝까지 믿음안에서 살아남게 되고 이들이 세상을 이길 힘을 얻어서  다시 세상속으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파하게 된다. 로마서를 잡초에 비유해 설명을 하면서도 로마서의 핵심진리는 비껴가지 않는다.

곧 말씀,은혜,예배라는 키워드이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항상'네가 나를 믿느냐'?란 질문을 먼저 던지셨고 그 믿음을 확인하곤 하셨다. 그 믿음의 확인 뒤에 고치셨고, 회복시키셨고, 사명을 맡기셨다. 모든것의 토대가 믿음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비록 잡초의 삶일 망정 이 믿음만은 굳게 잡고 있어야 할 뼈대중의 뼈대이다. 그것의 원동력이 바로 사랑에서 비롯된  말씀을 붙잡는 삶이다.즉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은헤에 목말라서 말씀을 붙잡게 된다. 이 삼각연결고리는 트라이 앵글처럼  함께 붙어 있어야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다.

그것을 막대로 치는것은 물론 우리의 몫이다.

 

 베드로를 베드로 답게 쓰시려고 사명을 맡기실 때, 그에게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란 질문을 던짐으로 그를 믿음의 세계로 끌어 들이셔서  믿음안에 먼저 굳세게 세우시고  이후에 그를 사랑으로 다듬어서 쓰신것은 이 원리를 잘 설명해 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잡초처럼 근질긴 생명력은 말씀에 붙어있는자만이 가능하다 .이때 절망은 끝이 난다.

책에 나오는 쇼생크탈출의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안겨 주었다.

주인공이 그 견디기 힘든 독방에서 2주동안 견딜 수 있었던 힘은 자신이 즐겨듣던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음악을 머리와 가슴으로 재생시키며  들었기에 그 고독하고 힘겨운 독방생활을 견디었노라는 말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전에 받았던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가슴과 머리에 늘 재생시킨 둔다면 우리도 힘겨운 삶을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잠기고, 말씀에 잠기고, 그 은혜로 살아간다면 자신이 잡초인들 어떠하며 들풀인들 어떠하랴?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인것을 ..그리고 그 자녀를 결코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

이런 사람은 어떤 상황을 만나도 당당하게 일어설 수 있다. 그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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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 - 질병과 장애 속에서 바라보는 온전함과 희망
마르바 던 지음, 윤종석 옮김 / 엔크리스토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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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은 책은 글을 쓸 수가 없다. 그냥  가슴에만 담아 두어야 할것 같다. 이 책이 그랬다.

마음으로 한자 한자 정성껏 읽어 내려간 책이다.

 

슬픔과 어려움을 당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당하는 어려움이 제일 클거라 생각한다.

자신의 고통에만 함몰 되어서 주변을 돌아 볼 수 없게 되고  하나님께는 무엇을 얻을까만을 생각하게 된다. 마르마던도 이렇게 솔직한 자기고백을 했다.

나 자신도 가끔씩은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마르마던이 겪은 질고와 어려움을 보면서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구나, 자신의 십자가를 이렇게 선하게 활용하는 사람도 있다라는것을 알게 되었다.

 

신학자 마르바던의 질고는 정말 끔찍하다. 사별이나 이혼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상처가 아물고 회복 되어간다. 물론 때때로 그 생채기가 환절기에 찾아오는 감기처럼 문득 문득 갑자기 예고없이 찾아올 때도 있겠지만 아픔을 몸에 달고 수십년 이상을 그리고 약의 부작용으로 인한 고통으로 13년 이상 지금까지도 고통받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난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장의 용종으로 인한 질고로부터 시작된 그녀의 십자가는 유방절제로 인한 신경손상,부실한 면역체,신장이식, 암치료, 한쪽눈 실명, 양다리는 움직이기 불편하다. 지금도 그녀는 하루에 10번이상이 넘는약을 챙겨 먹느라 시간을 잘 지켜야 한다. 신장이식으로 인한 면역체의 이상으로 인해서 그녀는 남들과 다른 약하디 약한 몸을 지니고 산다. 책을 읽으면서 이건 기적이야, 이건 하나님의 은혜야를 속으로 외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책 저술과 활발한 강연활동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서, 고난에서 의미있는것을 찾기위해 조용히 하나님 앞에 마음을 연 그를 본다.

 

그녀가 견딜 수 없는 중압감의 고통에서도 의미있는 고난의 조각들을 하나씩 모아서 내 놓은것은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닌, 오히려 그 곁에서 상처입고 아픈 사람들을 돌봐주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책에는 아픈 사람들이 겪을 수 있는 상실된 마음의 상태가 모두 나와 있고 어떻게 이겨 나가야 할지를 체험으로 터득한 그녀의 방법을 토대로 알려주고 있다.

우울증이나 상실,외로움,고통,하나님 없는 공허감,죄의 응보라는 생각들,염려나 권태,잘못된 죄책감등 아픈 사람이 직접 체험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감정과 신학사상들이 얼개처럼 엮어져 있다. 헨리 나우웬의 <상처입은 치유자>처럼 마르마던은 우리에게 정말 상처입은 치유자로 다가온다.

 

 아픈 사람이 자신의 아픈감정을 호소해도 곁에서 돌봐 주는 이들이 이들의 아픔을 헤아릴 수 없다면 그들의 돌봄은 반쪽짜리 돌봄에 지나지 않는다. 의사는 약과 치료로 처방해 주지만 간병인이 해야 할일은 이들의 마음을 감싸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픈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알아야 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아픈 중에도 이렇게 자신 너머의 섬김의 삶을 살고 있는 마르바던이 던지는 교훈은 실제적으로 다가온다. 아픈 사람들은 자신의 고난에만 함몰되어서 자신너머를 볼 수 없게  된다. 이기적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신 너머의 삶을 바라볼 때 하나님을 축소시키지 않게 되고 편협되고 왜곡된 자신만의 시각을 교정시킬 수 있게 된다.

 

시편을 묵상하면서 던져주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잘못된 신학과 하나님상을 정립시킬 수 있었다. 욥기를 명쾌하게 풀어헤친 그의 말에서 바른신학과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고 응보의 원리가 아닌 하나님의 뜻안에서, 내 생각의 틀에서 좁아진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 편에서 바라본

넓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살다보면 행복의 정점에서도 한모퉁이에서는 절망이 움틀 준비를 하고 있고,절망의 정점에서도

희망은 어둠의 구석 한 자리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다.

완전한 행복, 완전한 절망은 어디에도 없다. 마르마던을 보며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많이 생각했다. '자신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삽자가로 이렇게 빛을 발하는 사람이 있구나'

그 빛은 어느 빛보다도 더  밝아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줄 것이다.

나는 그 보다는 낫지 않은가? 감사할 조건이 얼마나 더 많은가? 그럼에도 나는 무엇을 했는가?

'나의 제한된 생각이 얼마나 그 분을 축소시켰는가?' 자신의 고난을 십자가로만 생각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그 십자가로 무엇을 남에게 줄 수있을가를 생각한다면 우리도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빛이든 큰 빛이든 빛은 어둠을 뚫고 나아갈 능력이 있다.그 힘으로 남도 살리고 자신도 살 수 있다.

마르마던의 끊을 수 없는 애절한 고통이  바흐의 '마태 수난곡'이 되어서 절절히 흐르고 있다.

언젠가 그의 고통으로 인해 또 다른 상처입은 치유자가 생겨나길 바라며 이 책을 꼭읽어 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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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의 비밀 - 드림의 선순환으로 승리하는 삶
스탠 & 린다 톨러 지음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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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얼마를 가져야 만족하며 살 수 있을까? 성경의 말씀대로 '너무 가난하게도 마옵

시고 너무 부하게도 마옵시고'란 말씀이 생각난다. 너무 부해도 하나님을 잊어 버릴 것

이고 너무 가난해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돈이 많다고 하나님께 많이 바치는것이 아니고 돈이 없다고 하나님께 바치지 않는것도

절대 아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돈이 많고 적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물질이

많으면 많은대로 드리는 것에 애착이 생겨서 선뜻 즐겨함으로 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

고, 없으면 없음으로  드리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워 할 수도 있다. 이런것을 보면서 드

는 생각은 '드림'이라는 것은 믿음이 있을 때 드릴 수 있는 것이지 절대 물질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드림의 비밀>은 저자의 부부가 앞 부분과 뒷 부분을 나누어서 저술했다. 평범한 글이

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삶은 결국은 선순환의 고리로 이어져서 그것이 나에게 다시 배로 돌아

오는 축복을 맞게 될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것은 심고 거두는 농작의 원리와도

같다. 풍성한 수확의 원리가 이 드림의 원리에도 적용된다. 드림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이 원리를 기독교인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드리지 못하는 것은 내것을

내것인양 여전히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식은 끝까지 견디는 자

에게 주어지는 것인데 우리는 너무나  성급해서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중간에  낙담해

서 돌아서는 경우가 많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행한일을 보면 이것이 설명된다

. 하나님께 드릴때는 받을것을 기대하지 않고 드려야 한다. 온전한 사랑, 감사함 때문

에 드리는 것이 되어야 나중에 받은것이 없어도 실망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온전한 드

림이라 생각한다.

 

책에서는 주변 사람들의 많은 예화를 들면서 드림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것보다 더 정확한 답변은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에 드림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본다.

말씀만큼 더 정확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드림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기회

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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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사랑해도 괜찮아
김별아 지음, 오환 사진 / 좋은생각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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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도 여러 종류 여러 형태가 있는것 같다. 내가 즐겨 읽는 에세이는 무언가 건질

것이 있는 글이다. 그저 평범하게 써 내려간 에세이는 너무 무의미해서 싫다. 그렇다

고 너무 어렵고 난해한 에세이도 거부한다. 우리의 삶에서 희노애락을 함께 하면서 누

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겉치레가 없는 글, 건질 글감이 있는 글이 좋다. 이 책 <죽도록

사랑해도 괜찮아>는 이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치유 에세이도 아니고 서평에세이

도 아닌것이 좀 특이한 글인것 같다.

 

앞 부분은 저자가 읽은 책을 중심으로 자신의 느낌을 쓴 것인데 책 중심의 글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글로 쓰면서 단지 책의 글을 인용했다는 느낌이 맞을 것 같다.

뒷 부분의 시를 읽고 쓴 글도 마찬가지다. 서평 쪽의 글이 더 가깝다고나 할까? 서평

과 에세이를 섞어 놓은 글이 맞을것 같다.

 

책 속에서 많은 책을 소개해 줘서 여러 책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장르에 구분 없

이 책을 읽는 작가의 특성상 편식하며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다양한 좋은 책의 정보를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책 속의 사진은 자신에게 맞지 않은 옷을 사람처럼 글과 따로 겉도는 모습이 아쉽다.

이름 있는 작가의 사진인데 글과 맞지 않으니 어떤 감흥이 별로 일지 않는다.

사진만 단편적으로 본다면 물론 우리 주변 사람들의 힘겨운 삶을 표현한 것이란 것에

마음 속 깊이 무언가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글과 함께 매치 되지 않음으로 그 감흥이

반감된다.

 

글 속에서는 물론 작가의 예민한 더듬이 본능,평범한 사람들이 찾아 낼 수 없는 것을

찾아내는 능력

그것 때문인지 반짝이는 글도 더러 있다. 하지만 진솔한 에세이에서 얻을 수 있는 마

음 속 깊이 느끼는 감정이입은 되지 않았다. 그냥 머리만 울리는 통소리만 들을 수 있

을 뿐이었다.

그것은 저자의 삶이 깊이 녹아 내리지 않고, 단지 책을 읽고 삶 주변에서만 맴돈 감정

만을 서술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글이란 저자가

깊숙히 체험해서 얻어진 엑기스일 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글이 될것이다. 이런 글

은 작가가 울때 함께 울어주고 작가가 기뻐할때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글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의 울림이 다르기에 다른 사람은 또 다른 감정을 느낄 수

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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